거룩한 관유 [출30장22절~33절]

2006. 7. 17. 00:26목양자료/3.강해설교

출30:22-33 거룩한 관유

거룩한 관유의 재료는 상등 향품이다. 유질 몰약 500세겔과, 그 반 수의 향기로운 육계와 향기로운 창포 각 250세겔과, 계피 500세겔을 취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만든다.

관유를 만드는 방법은 상등 향품을 재료로 하여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든다. 이것이 거룩한 관유이다.

관유의 용도는 회막과 그 모든 기구에 발라 지성물로 구별하는 것이다. 지성물은 무릇 그것에 접촉하는 것을 거룩하게 한다.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여 여호와께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한다.

관유는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므로 사람의 몸에 붓거나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자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끊쳐질 것이다.

관유는 상등 향품에 감람 기름을 섞어 만든 향기름이다. 향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이며, 감람 기름은 가나안 땅의 귀한 기름이며 충만한 생명의 선물이다. 성소와 그 모든 기구는 그것에 발리운 향기름에 의해서 지성물로 구별되며 그것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거룩은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속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향기름으로 발리운 성소에서 제사장 직무를 행하도록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향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한다. 그들은 백성의 대표로서 성소에 계시는 여호와께 속하여 봉사하는 제사장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러한 기름을 만들거나 몸에 부으면 죽는다. 그들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속하며, 여호와께서 아직은 제사장의 거룩을 성소 밖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성령이 내려서 머물러 계시는 분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중보자이시다. 그는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버지에게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아들에게도 생명이 있다. 그의 옷을 믿음으로 만지는 자마다 정결함을 얻었다(마9:20-21, 14:36). 부활하사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으로 증거 하는 사도들과 함께 하시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도 나갔다(행19:12).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다.

출30:34-38 증거궤 앞에 두는 향품

재료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무게로 한다.
그것으로 향을 만드는데 향을 만드는 법대로 만든다. 그 향에다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한다.
그 향을 곱게 찧어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둔다. 그곳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날 곳이다. 이 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극히 거룩하다.
모세가 만든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만들지 말 것이다.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향을 만드는 자는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진다.
여호와께서 모세로 향을 만들게 하시고 곱게 찧은 그 향을 성소 안의 증거궤 앞에 두게 하시고 친히 맡으신다. 향을 두는 증거궤 앞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실 장소이다. 여호와께서 향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밖에 두게 하시고 아론으로 하여금 아침 저녁으로 등불을 정리할 때에 여호와께 향을 사르게 하셨었다.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와 만날 장소였다(출30:6-9). 모세는 언약체결의 중보자요, 아론은 백성의 제사장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향을 증거궤 앞에 두게하시고 맡으시며, 제사장의 향을 속죄소 앞 휘장 밖에서 사르게 하시고 맡으신다. 거룩한 성소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가장 친밀한 관계로 만나시는 곳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대표인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이러한 친밀한 관계로 여호와를 섬기며, 직접 이러한 친교에 아직 들어갈 수 없다.

부활하사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성소에 속한 영원한 교제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서 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여러 번 말씀을 드렸지만 성경은 그 기록된 형식대로 여러 번 읽어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단지 제가 지금 여기서 설명하는 것은 그 기록된 특징을 드러냄으로 여러분의 이해를 돕는것이고 더 다른 좋은 방법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다. 처음에 읽어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상등 향품을 취하되 그렇게 해 놓고 상등 향품이 무엇이냐? 이제 몇가지 쭉 이야기를 한다. 24절에 취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그것으로 거룩한 관유를 만들되 향을 제도하는 법대로 향 기름을 만들지니 그것이 거룩한 관유가 될지니라. 그러니까 관유는 향기름이다 그 말이다. 어떤 향기름이냐면 고급 향 기름이다 한 이야기다. 그러니까 처음에 상등 향품을 취해라. 그리고 상등 향품의 종류를 쭉 이야기 하고 향을 만드는 법대로 향 기름을 만들어라. 그러면 그것이 거룩한 관유니라. 그런 표현 방법들을 유의하시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관유는 고급 향 기름이다 하는 것을 그냥 알수가 있다. 그런데 그것은 향과 기름을 섞어서 향기름이다. 왜냐하면 감람 기름에다 섞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의 용도는 26절에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모든 기구에 쭉 발라라. 그 기구들을 회막과 증거궤부터 쭉 순서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28절에 보면 번제단과 물두멍과 그 밭침에 바르면 지성물이 되는데 지성물은 어떤 의미로 지성물이냐? 그것의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는 지성물이다. 향기름이 발라졌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말이다. 그러면 성소의 기구만 바른 것이 아니라 아론에게도 그것을 발라서 하나님을 봉사케 해라. 그리고 아론과 일반 백성들은 그것을 만들지도 말고 몸에 붓지도 말라. 아론에게는 부어도 일반 백성에게는 붓지 말아라. 이제 아론과 일반 백성들을 구별해 주고 있다. 흐름을 알겠지요? 그러니까 성경 본문을 차분하게 읽어보는 것이 제일 좋은 방법이다. 주보를 읽으면서 설명하겠다.

거룩한 관유의 재료는 상등 향품이다. 유질 몰약 500세겔과, 그 반 수의 향기로운 육계와 향기로운 창포 각 250 세겔과, 여기 보니까 향기롭다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된다. 상등 향품으로 취할지니 그렇게 해 놓고 향 기름만 쭉 나열해도 되는데 향기로운 뭣 해가지고 그 말이 반복된다. 그리고 계피 500세겔을 취하고, 감람 기름 한 힌을 취하여 만든다. 이것이 재료다. 그러니까 재료는 고급 향이다.

관유를 만드는 방법은 상등 향품을 재료로 하여 향을 제조하는 법대로 향기름을 만든다. 이것이 거룩한 관유이다. 이 향은 제조하는 법은 향단에 사르는 향 제조법일 것이다. 이 법으로 만드는데 향 기름을 만든다. 감람 기름 한 힌을 섞어서 만드니까 기름이 될 것이다. 이것이 거룩한 관유 이다.

관유의 용도는 회막과 그 모든 기구에 발라 지성물로 구별하는 것이다. 지성물은 무릇 그것에 접촉하는 것을 거룩하게 한다.

관유를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발라 거룩하게 하여 여호와께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한다. 하나님의 향기름이 발라진 모든 것은 지극히 거룩하다. 그러니까 이 지극히 거룩한 성소에서 봉사하도록 아론과 그 아들들도 향기름을 발랐다. 그러니까 성소적인 영광이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있다. 그 옷도 성소 내부의 색깔로 옷이 직조되어 있다. 그것이 거룩한 관유에 대한 내용들이다.

관유는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므로 사람의 몸에 붓거나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러한 자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끊쳐질 것이다. 그러니까 아직 성소밖에는 이것을 부을 수 없고 성소에서 봉사하는 아론 외에 부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이 향 기름이 발라진 성소와 아론은 지극히 거룩하고 나머지는 아니다. 어느 정도 거룩하냐면 그것을 만지는 자가 거룩해 진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거룩케 하는 거룩은 누구에게만 있는가? 실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하나님만 모든 생명의 근원이어서 그로부터 모든 거룩이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성소와 아론은 그런 거룩으로 발라라 그러나 일반 백성에게는 그것을 발라서는 안된다.

설명이다. 관유는 상등 향품에 감람 기름을 섞어 만든 향기름이다. 향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이며, 감람 기름은 가나안 땅의 귀한 기름이며 충만한 생명의 선물이다. 그들이 감람 기름을 짜서 이런 저런 용도로 쓰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 기름진 것 생명의 충만으로 복 주신 것이 감람기름 그런 것이다. 더구나 이 감람 기름도 향이 날 것이다. 왜냐하면 그냥 참 기름 정도가 아니라 아마 향이 날 것이다. 그런데 감람 기름은 가나안 땅의 귀한 선물이며 충만한 생명의 선물이다. 성소와 그 모든 기구는 그것에 발리운 향기름에 의해서 지성물로 구별되며 그것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여기서 거룩은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라 성소에 계신 하나님께 속하게 한다는 의미이다.
가령 향 기름을 바르면 거룩하게 된다 했을 때 죄인에게 향 기름이 발라지면 도덕적으로 느닷없이 깨끗해진다 그런 것이 아니라 향 기름이 발라진 것은 하나님의 성소에 속한 생명이다. 그것에 발리 우거나 또 접촉되면 그것과 연합이 된다. 그러니까 향기름을 바르면 성소밖에 있지 않고 성소 안에 있다. 그런 의미로 거룩하게 된다 그런 말이다. 그러지 아주 더러운 사람이 기름 목욕을 해 버리니까 느닷없이 깨끗해 저버리고 그런 말이 아니다. 그런 관계로 살기 때문에 그 거룩을 누리는 것이다. 자꾸 결혼 관계를 예로 들고 있다. 가령 아무리 여자가 도덕적으로 얌전해도 남편을 남편으로 알지 못하면 사람은 착한테 못 쓰겠구나 그런 것이 아니라 마누라 아니다. 소위 세상에서 싸움을 잘하고 집에서 남편한테만 잘해도 좀 짬짬해도 좋은 마누라라고 혹시 할 수 있을 것이다. 도덕적으로만 평가를 못한다 그 말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과 관계로 모든 윤리를 설명하지 하나님은 거룩하니까 절대적인 기준을 줘서 백성을 대면한다 그런 방식으로 대면하지를 않는다.
아까 어떤 형제가 질문한 것처럼 살인하지 말아라. 그런데 하나님은 가나안 백성을 몽땅 죽여라 해서 변덕이 심해서 이렇게 됐거든요.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끼리는 죽이면 안되고 밖에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라 그런 말인가? 그런 문제보다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고 그 박에는 하나님의 대항자로 있다. 성경은 그들을 죽었다 원수다 그렇게 되어 있다. 더구나 가나안 땅 밖에 사람을 몽땅 죽여라 하지 않고 가나안 땅 사람을 몽땅 죽여라 했다. 그러면 그냥 땅에다가 집 짓고 사니까 열나고 그것은 전부 죽이려고 그런 것이 아니라 본래 가나안 땅은 하나님이 함께 하는 나라로 구별했고 그것은 하나님이 지배하는 왕국이고 그런 의미로 하나님을 대항하는 사람은 거기 있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대항하는 원수들을 전부 죽이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 때는 하나님의 나라가 이방인과 전쟁하는 관계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전쟁은 예수 안에서 끝났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으니까 이제는 구약 방식으로 있지 않다. 교회는 이방인과 전쟁하는 관계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교회는 예수님께서 하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까 세상을 정복했다. 그러니까 그전처럼 전쟁하고 원수를 정복하고 그런 방식으로 있지를 않다. 지금은 오히려 예수님처럼 원수까지 사랑하고 자기 생명을 줄 수 있는 사랑과 능력의 나라로 변화되어 있다. 그것은 살인하지 말라 하는 절대적인 도덕 개념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떤 방식으로 역사를 경영했는가를 따라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백성의 삶의 윤리가 결정이 되는 것이다.
그 때 이방인을 죽이라고 했는데 안 죽이고 살려주면 사울처럼 자기가 죽어야 될 것이다. 사울이 보니까 소가 튼튼하고 사람도 쓸 만 하니까 갖다 써야 되겠구나 하고 안 죽였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제물을 기뻐하는가? 그렇게 해서 오히려 사울은 그 원수한테 죽임을 당했다. 사울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산 것이 아니라 자기 이해 판단으로 그들을 남겼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있는 살인하지 말라 한 개념도 단순한 도덕적인 절대적인 기준 그런 방식으로도 구약 때도 집행이 안된다. 이제 그것이 완전한 방식으로 집행된 것이 신약 때 예수의 부활의 생명으로 사는 신약 때 완전한 방식으로 집행이 된다. 이제는 소위 모든 사람이 존귀하다 그런 개념보다도 교회가 우주적인 나라로 확대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그런 원수를 제거하는 방식으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진행이 안된다.
그러니까 저도 처음 성경을 읽을 때 이해가 안되더라고요. 그렇게 하나님이 고약할 수가 있는가? 하나님이 하라고 하니까 일단 옳기는 옳겠다고 고개를 끄떡 끄덕 했지만 그 때도 안 믿었으면 아주 불사스러웠을 것이다. 일단 믿으니까 아버지가 하라고 한 것이 옳겠지. 우리 아버지 아니면 이해가 되어야 믿겠지만 우리 아버지니까 이해를 안돼도 옳겠지요? 그래서 고개를 끄떡이면서 읽어도 이해는 안되었다. 나중에 성경을 알고 보니까 이해가 되었다. 그런데 우리들은 항상 돌 판에 새긴 법을 절대적인 도덕 규칙 이런 방식으로만 읽어 버리면 구약의 문제는 이해가 안되고 더구나 구약 때 솔로몬이 아내를 천명쯤 두고 살았는데 간음했다고 법정에 서지를 안했다. 그러면 간음하지 말라는 말이 왜 이렇게 되는고? 잘 이해가 안될 것이다. 우리들은 도덕법으로 이해하면 간음하지 말라 딱 눈으로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간음. 그러니까 솔로몬도 간음 다윗도 간음하고 전부 벌을 줬으면 아하 하나님이 공평하고 명쾌하구나 알겠는데 그전에 천명을 둔 사람도 왕이고 더구나 평화의 왕이고 신약 교회는 둘 정도가 아니라 눈으로 보고 마음에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고 이것은 고약한 선생을 만나 버린 것이다.
옛날에는 하나님이 여유 있게 봐 주셨는데 신약은 조금만 해도 이런다. 그러니까 참 난처하겠다. 아 왔다갔다하고 복잡하다. 이런데 실제적으로 우리가 인류라는 것은 개인의 도덕성이 문제가 아니라 인류로서 성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아버지가 도덕률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적용을 하지 않는다. 아이는 아이로서 아버지를 순종하고 살수 있도록 되어 있다. 어른은 어른으로서 아버지를 나타내야 한다. 그런데 신약 교회는 소위 어른의 교회가 되었고 역사가 완성된 것이다. 여러분은 모세 보다 훨신 밝은 빛 가운데 있고 훨신 큰 능력 가운데 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절대적인 윤리가 요구된다. 그러니까 구야과는 상황이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교회에서는 소위 도덕율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배운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대하시는 줄을 알고 그 하나님을 믿어야 되고 그 하나님을 따라서 살아야 되는 것이다.

여기 보니까 기름을 바르면 거룩하게 되고 또 거기 접촉하게 되는 것이 거룩하게 된다 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을 나타낸다. 왜 모든 생명의 능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성소가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론도 그렇게 되어 있다. 거기 접촉하면 거룩하게 되어 버린다. 그러니까 무슨 제물을 가져다 아론의 손으로 제단에 드리면 그것은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양식으로 거룩하게 된다. 그러면 무슨 음식물을 소독을 했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방부제를 넣어서 소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의미로 하나님의 상에 놓는다는 의미로 거룩하게 된 것이고 사람도 기름을 바르면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 속한다는 의미로 거룩하게 된다.

향기름으로 발리운 성소에서 제사장 직무를 행하도록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향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한다. 그러니까 아론과 그 아들들은 성소에 있는 기름으로 발라졌기 때문에 성소와 같은 영광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백성의 대표로서 성소에 계시는 여호와께 속하여 봉사하는 제사장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이러한 기름을 만들거나 몸에 부으면 죽는다. 그들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속하며, 여호와께서 아직은 제사장의 거룩을 성소 밖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구약은 전부 이런 간격이다. 가장 근본적인 간격은 하나님의 보좌와 제사장을 가리고 있는 휘장이다. 거기 들어가면 죽는다. 그것뿐만 아니라 향 기름을 일반 백성이 만들거나 부으면 죽는다. 왜냐하면 일반 백성에게는 아직 성소에 속한 거룩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성소 밖에서 성소에 속한 거룩을 스스로 누리면 아직 주지 않았기 그는 죽어야 된다. 그들은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소에 속하며, 여호와께서 아직은 제사장의 거룩을 성소 밖의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잉태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성령이 내려서 머물러 계시는 분이시며 하나님 아버지의 기뻐하시는 중보자이시다. 그는 아버지의 품속에 계신 독생하신 하나님이시다. 아버지에게 생명이 있는 것처럼 아들에게도 생명이 있다. 그의 옷을 믿음으로 만지는 자마다 정결함을 얻었다(마9:20-21, 14:36). 부활하사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는 그의 이름으로 증거 하는 사도들과 함께하시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도 나갔다(행19:12).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다.

구약의 가나안 땅의 감람 기름 이것은 아주 귀한 기름이고 향내나는 기름일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의 감람나무가 무성한 것은 그 땅이 하나님의 안식의 거처로 풍성한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만일에 그 땅에 감람나무도 말갛게 말라지고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도 없으면 그것은 황무지다. 그래서 이 감람 기름은 귀한 손님한테 발라 주는 것인데 우리는 그런 기름 바른 의식이 없어서 잘 모를 것이다. 그래도 옛날 멋쟁이들은 기름이 자르르 흐른다고 그런다. 그래서 파리가 않으면 미끄러지겠다고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요새는 기름 바르면 웃기는 사람이다. 요새는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고 구두만 광이 나도 촌 사람 같고 나같이 중간색으로 신어야 세련된 사람 같다. 아마 옛날 같으면 좀 이해가 갈 것이다. 그런데 손님이 오면 발닦을 물을 주고 기름을 발라 준다. 가령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에게 초청을 받았는데 한 여자가 귀한 기름을 바르고 눈물로 발을 닦는다. 그래서 너는 내가 들어올 때 감람 기름도 붓지 아니했는데 이 여자는 나를 사랑하니까 귀한 기름으로 붓는 것이 아니냐? 이것을 봤을 때 우리는 그 의식을 몰라도 아하 귀한 손님에게 기름을 바르는구나 알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 보니까 그런 정도 귀한 기름이 아니라 아주 최고급 향으로 범벅한 기름이다. 그 향도 조금식 넣은 향이 아니다. 거기 보면 성소의 세겔대로 제한을 했다. 성소의 세겔은 일반 세겔의 갑절이다. 그러니까 오백세겔 하면 우리 나라 작은되로 열대일 것이다. 향도 많이 넣은 식이다. 그리고 고급 향이 여러 가지다. 그러니까 향으로 범벅한 것이다. 이런 향은 세상이 맡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아주 성소의 모든 기구와 제사장을 최고급 향으로 바르게 했다.
그것이 백성이 하나님과 누리는 관계다. 그러니까 기름을 생명의 충만함이면 향은 하나님이 기뻐 맡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소는 완전히 향 집이고 기름 집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최고 기분 좋아서 충만한 생명으로 거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제사장도 그 향과 기름으로 발랐는데 아직 백성은 발라 주지 않았다. 백성은 제사장에게 무엇을 가져오면 제사장을 통해서 그 제물도 향 기름으로 거룩하게 되고 또 성소에 접촉함으로 거룩하게 되고 하나님이 드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도 나중에 보면 불로 태워 드려야 한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성소밖에는 이런 기름으로 발라진 적이 없다. 성소 밖은 하나님이 그렇게 향기로운 향으로 맡게 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니까 일반 백성에게 발라지면 그는 죽어야 되고 아직은 아니다. 그것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기뻐하시는 관계다. 완전히 향에 취해 계신다. 그래서 완전한 교제 가운데 계신 것이다. 왜 제사장이 성소의 향으로 완전히 발라져 있다. 그런 기쁜 교제 가운데 있다. 그것이 여기 성소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성소와 제사장을 통해서 자기 백성과 교제하시는가 하는 출애굽기의 언약 체결의 문제다 그런 말씀이다.
그러면 이것이 신약 교회에서는 어떻게 주어졌는가? 우리 예배당 들어오면 냄새가 나더라. 왜냐하면 그러면 우리는 냄새가 덜 좋으니까 안 좋은 것인가? 그래 가지고 문성명이처럼 묘한 향이나 뿌려 놓고 할 것인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구약에서 가장 기뻐 맡으시는 것은 향기로운 냄새 향 그렇게 말한다. 그러면 신약 교회는 향 기름을 바르고 그런 것은 없다. 신약 교회는 절에 나온 사람들보다도 의복이 단정하지 않다. 절에 올라간 사람들도 단장하고 올라간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슬리퍼를 끌고 살살 와서 아빠 아빠하고 가도 봐 준가 몰라. 옛날 노인만 같아도 혼날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너무 신식이 되었다. 그런데 절에 올라간 사람도 깨끗하게 올라간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도 그렇게 안 나온다. 그러면 그들이 훨씬 거룩하고 깨끗한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항상 구약 언어 개념으로 이해하라 그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됐는가? 우리의 대표자는 아론처럼 향 기름을 바르고 하나님 앞에 선 자가 아니다. 그는 향 자체이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하셨고 또 성령이 머물러 계신 분이다. 요한 복음에 말대로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 분이고 성령을 주셔서 씻으신 분이다. 그는 이처럼 성령으로 머물러 계실 뿐만 아니라 그는 이는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나님이 휘장밖에 세워두시고 기뻐하자 냄새 맡자 그런 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에 들어가신 분이다. 자기 백성의 죄를 대신해서 죽음을 맛보심으로 그렇게 하셨다. 그는 본래부터 하나님의 품속에 계신 하나님이신데 그는 본래부터 아버지와 영원한 교제 가운데 계신 분인데 그런 관계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대표로 죽음을 맛보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진 분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계신 분이다. 그가 우리의 대표로 하나님 안에 들어가 계신다. 하늘 보좌 우편에 들어가셨다. 그것은 완전한 생명의 영역에 들어가신것이고 가나안 땅의 향을 바른정도가 아니다. 그는 생명의 영역에 들어가셨다.
이처럼 예수님이 우리의 대표로 거기 들어가셨는데 구약 때는 휘장으로 가리우시고 휘장밖에 아론이 있었고 백성은 성소밖에 있었따. 휘장이 하나님과 사람을 가르는 근본적인 가름 원수된 가름이다. 왜 하나님이 가리고 계시고 보면 죽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이루셔서 그의 온전한 순종안에서 이제는 죄가 지배하던 시대는 끝났다. 하나님이 휘장을 찢으셨고 이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은 새로운 세계를 가져오신 왕이시다. 마태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죽는 순간에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고 그리고 잠자던 성도들의 무덤이 열렸고 땅도 진동하고 바위도 터졌다.
땅이 진동하고 바위가 터진 것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이 강림하신 장면이다. 바위가 터지고 땅이 진동한 것은 하나님이 죄 된 세상에 강림하실 때 세상이 그러했다. 예수님 죽으셨을 때 그렇게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에서 휘장은 찢어졌다. 이제는 죽음이 지배하던 옛 시대는 끝났다. 왜냐하면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은 이제는 천지를 진동시키시고 이전의 무덤의 권세를 열어 버리시고 자기 백성과 거룩한 성에 함께 사시는 분으로 마태복음은 묘사를 한다. 이제 예수 안에서 휘장은 찢어졌고 성소 안과 성소 밖이 상관이 없고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 있다. 바로 그렇게 하시려고 그의 성령을 우리 안에 부으셔서 한 성령으로 살게 하셨다. 부활하신 주님의 생명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생명의 권세가 우리 안에 있어서 우리 죽을 육체도 영화로운 몸으로 살리신다. 우리가 이런 관계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구약의 제사장 보다 더한 향 기름으로 발라졌다. 그의 성령으로 발리어졌고 충만하게 되었다. 이제는 성소 밖과 성소 안이 상관이 없다. 우리의 대표자가 계시는 하늘의 권능이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은 교회를 아들을 기뻐하신 기쁨으로 우리를 기뻐하신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러한 기쁨으로 기뻐하신다. 왜 우리는 예수 안에서 그분의 심장으로 부르셧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교회가누리는 거룩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상 생애를 보면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옷자락을 만진 사람들이 있다. 옷만 만져도 낫겠다. 마태복음은 내 안에서 능력이 나갔다 그런 말은 안한다. 왜냐하면 옷자락을 만져서 낫는 분은 누굴 까요? 구약으로 하면 제사장이 그렇게 거룩하다 그 말이다. 그런데 구약 때 제사장이 성소 밖으로 나가서 부정한 자를 진찰은 했어도 만진 적은 없었다. 자기 아버지가 죽어도 시체를 만지지 않았다. 제사장은 생명이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예수님이 예수님 옷 자락을 만지면 나았다. 그 다음에 이스라엘 백성은 옷 자락을 만져서 나은 분이 누군고 그냥 알 수가 있다. 그러니까 마태복음은 내게서 능력이 나갔다. 누가 나를 만졌는가 찾지를 않는다.
그런데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은 누가 내 옷을 만졌느냐? 내게서 능력이 나간 줄을 알았다. 왜냐하면 옷자락을 만지면 그분의 능력이 그에게 간다는 것을 이방 백성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구약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럴 이유가 없다. 왜 제사장이 거룩하면 누구든지 그를 만지면 거룩하게 되어 있다. 또 한 성소를 만져도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분이 여기 계신다. 그분은 성소 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군중들 사이에 있다. 구약에는 거룩한 분만 나가서 제단에서 봉사했는데 죄인이 만질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나았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했느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이분이 구약에서 성소 안에 계신 대제사장이신 데 그 보다 더한 분이다. 왜 성소 안에 있는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거룩을 누리고 있는 대제사장인데 그분이 여기 계신다. 그분 옷만 만져도 낫는다. 그러면 그분에게 무슨 기름 부음이 있는가? 없다. 그분은 하나님 자신이시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거룩케 한분으로 그리고 자기 백성과 함께 계신 분으로 특별히 죄인들이 성소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둘러 쌓여서 만질 수 있도록 가까이 오셨다. 이분이 임마누엘 하나님시다. 이제는 성소 안에 거룩이 아니라 그 거룩이 모든 죄인에게 나타났느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 예수님이 죄인들에게 둘러 쌓여 있을 때 열두해 혈루증으로 앓고 있던 여인이 나은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님 지상 생애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은 저 위로 올라가시고 안 계시는가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말씀하셨다. 사도행전은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계셔서 만민을 그의 권세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거기 보니까 바울이 전도했을 때 그 옷자락 또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가고 악귀도 나갔다. 그러면 바울은 예수님 보다 능력이 훨씬 더 있었는가? 예수님은 옷이라고 입고 있으니까 전기가 통할라 해도 선이 이어져 있어야 되니까 옷을 만지면 옷에서 무엇이 나갔는가 보다 하고 이해나 되겠는데 바울은 앞치마를 떨어져 있는 사람에게 얹어도 나아 버리고 하니까 바울은 훨씬 크구나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요? 그것은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종들과 함께 하신 권능이다. 그러니까 다른 많은 사도의 권능을 이야기하지 않고 베드로와 바울의 권능만 이야기한다. 베드로는 유대인을 위해서 세운 사도이고 바울은 이방인을 위해서 세운 사도다. 다른 사도들의 이야기는 일체 거론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두 대표자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바로 부활하신 주님은 자기 종과 권세로 함께 하셔서 고치셨다. 너희가 믿는 예수가 이 사람을 고쳤다. 그렇게 사도들을 증거 했던 것이다. 만일에 바울에게 제사를 지내려고 하면 깜짝 놀랠 것이다. 왜 너희들이 나쁜 짓을 하려고 하느냐? 너희들은 예수를 죽였는데 하나님이 예수를 하늘의 주가 되게 하셔서 그 권능이 너희들을 고치셨느니라. 그가 지금 고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개인의 권능으로 이야기하면 안되고 부활하신 주님께서 사도들과 함께 하셔서 친히 성소에 거룩을 나타내셨다. 이제는 사도에게서 무엇만 가져다 얹어도 나았다.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생명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에 참여한다. 그러면 우리들도 요새 누가 목사 옷자락을 만지면 나을까요? 누구 목욕한 물로 목욕해도 낫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도들을 통해서 일단 터를 놓았다. 예수의 지상 생애에서 터를 놓은 것처럼 그의 사도들을 통해서 이제는 성소의 거룩을 온 땅에 확대시켰다. 그 토대는 두 번 반복되지 않는다. 이제 복음을 믿음으로 그 권세를 받는 것이지 누구의 옷자락을 만져서 그렇게 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오셔서 그가 성소에 계신 하나님이신 사실을 증거 하셨고 그는 부활하셔서 영광의 성전에 계시는데 이제는 사도들을 통해서 그 권능을 나타내심으로 이제는 천하 만민에게 복음의 권세가 성소의 거룩이 확대된 것을 증거하고 있다. 그러니까 교회는 주님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발리어졌다.

향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시는 냄새다. 그것과 제사장이 관계가 있다. 제사장은 백성의 대표다. 이처럼 하나님은 성소를 그의 향내나는 거처 기름 집으로 완전히 기뻐하시는 생명의 충만한 거처로 그렇게 말씀하고 있고 그 대표자도 향기름으로 발라서 하나님 앞에 향을 사르는 존귀한 봉사를 감당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거처로서 성소다. 그것이 출애굽기에서 증거 하는 것이다.
출30:34-38 증거궤 앞에 두는 향품

항상 성경 본문의 구조를 읽어야 한다. 여러분도 그 훈련을 해야 한다. 이런 훈련을 통해서 여러분이 읽으면 아 이것이구나. 여기서는 이것을 말하려고 했구나. 또 이것을 똑같이 말해도 여기다 강조를 두어서 표현하고 있구나. 그런 식으로 읽으라 그 말이다.
3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취하고 그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중수로 하고. 여기도 보니까 전부 향이다. 향도 한가지 향이 아니고 여러 향을 섞었다. 그러니까 이것도 아주 고급 향이구나 알 수가 있다. 이것은 상등 향품 이런 말은 없는데 아마 여기 나온 향 이름에서 그것이 귀한 향인 줄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향 장사를 하면 안된다. 이제 이 향을 보고 주석을 보니까 소합향은 조개 껍질을 갈아서 어떻게 만드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들은 그 재료를 가지고 설명을 하는 것이다. 조개 껍질은 딱딱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부서버려야 합니다. 갈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향기가 될 것이다. 딱딱하면 하나님이 알아주지 않습니다. 왜 교회 말 안듣고 딱딱한 사람이 있거든. 그러니까 밀가루처럼 완전히 반죽하라고 한 대로 해 버리고 자기는 모양이 없이 하라는데 맡겨 버리고 아하 이것이 진짜 떡이구나. 전라도 말로 하면 밥이다. 이제 이런식으로 설명해서 밥을 만들지 말라 그 말이다.
주석을 보면 그런 말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들이 아는 이야기고 우리들은 잘 모른다. 그런 것을 알면 우리는 아 고급 향이구나 이런것만 알아도 된다 몰라도 읽으면 전부 향 이야기구나 알게 되어 있다. 다른 품목이 하나도 없으니까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용을 봤을 때는 이것처럼 고급향이 없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소를 향 기름으로 뒤범벅으로 발라 버렸을 뿐만 아니라 또 특별히 지성소 안에다가 향 상자를 두고 맡으신 분이다. 이것이 그 향이다. 그러니까 이것만 하나님의 지성소 안에 넣어둘 향이다. 그러니까 최고급향이구나 할 수가 있을 것이다. 이 문장을 읽으면 알 수가 있는 것이다.

35 그것으로 향을 만들되 향 만드는 법대로 만들고 그것에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하고. 그전에는 향 기름이다. 향을 기름에 섞어서 발랐는데 이제는 향에다가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한다. 그러니까 다른 향보다도 이 향에다가 소금을 치면 성결하게 되는데 어떻게 성결하게 되느냐? 36절에 보니까 증거궤 앞에 두는 성결을 얻는다. 소금 안 치면 거기 까지 못 들어갈 것이다. 그러니까 레위기를 보면 모든 제물에는 소금을 치라 했을 때 이것을 맛내는 방식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은 꿀 섞은 소금 섞은 것 자연식을 좋아하시는가 그런 말이 아니라 그 말이다. 여기 보니까 소금을 섞어 성결하게 해라. 성결의 소금인데 하나님의 지성소에 나아가는 소금으로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다른 성물에다 소금을 치면 그렇게 성결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곱게 찍으면 냄새가 날 것이다.
그러니까 곱께 찧는 것은 뭐 인격을 부숴라 그런 말이 아니고 아주 향을 가늘게 해서 거기서 부수면 향이 오를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해서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두라. 그런데 이 향은 너희에게 지극히 거룩하니라. 네가 만들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을 만드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그전에 향은 바를려고 만든 것인데 이 향은 맡을려고 만든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맡으신다는 말은 없어도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것은 만드는 자는 하는 것을 보니까 하나님이 맡으신다 그 말이다. 너희들은 맡지 말라 내가 맡겠다 그 말이다. 그런데 여기 보면 36절에 보면 그 향을 얼마를 곱게 찧어 내가 너와 만날 회막안 증거궤 앞에 두라. 여기서는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다. 제가 항상 모세 하면 휘장밖에다 두고 있지만 언약 체결로서 모세는 구름안으로 들어갔고 휘장안에 있다. 그런데도 그 휘장은 하나님이 구름으로 가리고 있는 지성소 안이다. 그도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면 죽는다. 구약에서는 모세는 하나님의 등을 보았는데 그냥 서서 본 것이 아니라 바위 밑에 감추시고 보게 했다. 그냥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모세는 언약 체결 자로서 아론보다 앞서 있다. 모세가 제일 앞서 있다. 그러니까 아론은 휘장밖에 있으면 모세는 휘장 안에 있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거기서 증거궤 앞에서 너를 만날 장소다. 그리고 향은 모세보고 만들도록 했다. 이스라엘 백성은 만들지 말고 모세 네가 만들어서 증거궤 앞에 둬라. 내가 거기서 너와 만날 것이 아니냐? 그리고 내가 거기서 향을 맡겠고 어느 누구도 그 향 냄새를 맡지를 말아라.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까 성소는 완전히 향 기름 집이고 그것은 발리운 것이고 하나님은 또 고급 향을 만들게 해 가지고 보좌 앞에 두고 맡으시고 나머지는 맡으면 안되는데 그 향은 모세가 들고 들어온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모세를 맡겠다는 말과 같은 의미다. 그것이 언약 체결로서 성소에 대한 마지막 이야기다. 성소는 하나님 앞에 기뻐서 자기 종을 자기 앞에 두고 기뻐서 계시는 것으로 모세의 향을 자기 보좌 앞에 두는 분이다.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바다. 읽으면서 설명하겠다.

재료는 소합향과 나감향과 풍자향의 향품을 유향에 섞되 각기 동일한 무게로 한다. 그것으로 향을 만드는데 향을 만드는 법대로 만든다. 그 향에다 소금을 쳐서 성결하게 한다. 그 향을 곱게 찧어 회막 안 증거궤 앞에 둔다. 그곳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날 곳이다. 이 향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극히 거룩하다. 모세가 만든 향은 여호와를 위하여 거룩한 것이니 그 방법대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만들지 말 것이다. 무릇 맡으려고 이같은 향을 만드는 자는 이스라엘 중에서 끊쳐진다.

지금 성경이 있는 것을 더 쉽게 풀어서 쓴 것이니까 읽으면 더 알기가 나을 것이다. 그런데 저는 성경에 있는 방식을 더 뚜렷하게 나타나도록 표현한 것뿐이고 항상 성경 자체를 읽으라 그 말이다.

여호와께서 모세로 향을 만들게 하시고 곱게 찧은 그 향을 성소 안의 증거궤 앞에 두게 하시고 친히 맡으신다. 향을 두는 증거궤 앞은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실 장소이다. 여호와께서 향단을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에 있는 휘장밖에 두게 하시고 아론으로 하여금 아침저녁으로 등불을 정리할 때에 여호와께 향을 사르게 하셨었다.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와 만날 장소였다(출30:6-9절에 보면 금 향단이 나온다. 그런데 거기서 제사장이 아침과 저녁에 등불을 정리할 때 향을 사르는데 그 향단은 어디인가? 했을 때 증거궤 위 속죄소 그리고 화목제 맞은 편 휘장밖 속죄소는 어딘가? 내가 모세 너를 만날 곳이다. 그렇게 향단의 위치를 지적하셨다. 그런데 휘장 밖은 밖이어도 바로 속죄소 앞이다. 그런데 아론은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속죄소 앞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모세는 언약 중보자이기 때문에 속죄소로 묘사되지 않고 여기서는 증거궤로 이야기한다. 너를 증거궤에서 만나겠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여기 보니까 제사장이 향을 사르는 금향단과 모세의 향품이 들어 있는 향 상자를 넣는 것은 위치가 같다. 한 선에 서 있는데 휘장밖에냐 휘장 안에냐 그런 차이점 뿐이지 위치는 같다. 증거궤 앞과 속죄소 앞으로 위치가 똑 같다. 그러면 왜 여기서 마지막에 제사장 이야기를 하지 않고 모세 이야기를 하는가? 모세가 언약 체결자다. 만일에 모세가 향을 들고 휘장밖에 있으면 이것은 온전한 언약 체결은 아니다. 그는 비록 아직도 영광을 온전히 보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는 휘장안에 있어야만 구약의 성소가 하나님의 영광의 거처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증거궤 앞은 모세를 만날 곳이고 그리고 한 휘장이 져져 있는 그 밖에는 내가 제사장을 만나는 곳인데 그래도 장소는 증거궤 위 속죄소 앞 휘장밖 거기다가 두어라. 그렇게 되어 있어서 그런 의미로는 같도록 되어 있다.

모세는 언약 체결의 중보자요, 아론은 백성의 제사장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의 향을 증거궤 앞에 두게 하시고 맡으시며, 제사장의 향을 속죄소 앞 휘장 밖에서 사르게 하시고 맡으신다. 거룩한 성소는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가장 친밀한 관계로 만나시는 곳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대표인 모세와 아론을 통하여 이러한 친밀한 관계로 여호와를 섬기며, 직접 이러한 친교에 아직 들어갈 수 없다. 그러니까 백성은 이것을 맡아서는 안된다. 하나님만 맡으실 것이다. 모세가 향을 들고 거기 서면 거기서 그 향을 맡으신다.

부활하사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 성소에 속한 영원한 교제가 그리스도의 교회에 주어졌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의 이름으로 은혜의 보좌 앞에서 살며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제 구약은 성소 밖이 제사장의 거처요 아론이 그 영광 안으로 들어가도 그것은 지상의 증거궤 앞이었다. 그는 하늘의 영광의 거처에 들어간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리의 대제사장이 시요 언약 중보자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자기 백성의 대표로 죽음을 맛보시고 이제는 영광의 거처에 들어가셨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과 영으로 계시는 영원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 들어가셨다. 그분이 우리의 향이시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내 이름으로 기도해라 내가 시행하리라. 그전에는 그렇게 기도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기도해라. 내가 시행하리라. 왜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기 때문에 그렇다.
이제 우리는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가고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향내나는 제사를 지내고 그리고 그분의 이름으로 우리가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 때 항상 금향단은 성도의 기도로 묘사되어 있고 가장 가까운 교제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가 아버지께 말씀하시면 그가 우리의 말씀을 들으신다.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의 교제 가운데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구약에서 향단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제 예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영원한 향 기름으로 발렸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가 우리의 대표로 하나님 앞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나아가면 우리는 그분 앞에 직접 나아가는 것이다. 휘장밖에 있고 땅에 있는 증거궤 앞이 아니라 영광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교회는 이처럼 친밀한 교제 가운데 있다.
예수 안에서 죽음의 권세가 영원히 제거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죄의 권세가 제거되었다. 그런데 그분은 그냥 죄를 제거한 것이 아니라 자기 백성의 대표로 죽음을 맛보시고 이 순종을 통해서 영원히 죄를 제거하셔서 교회로 이제는 휘장 밖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께 기뻐하는 향내나는 제사를 지내고 우리의 몸으로 산 제사를 지내고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향연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그런 교제로 우리와 함께 계신다.
아버지께서 영원히 기뻐하신 분은 품속에 계신 아들이신 데 그가 우리의 대표로 있을 때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죽음을 당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께 순종하는 아들로서 그 죽음을 친히 감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를 영원한 교제의 자리 기쁨의 자리 영광의 자리로 올리셨다. 그는 아버지의 대리 왕이기 때문에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즉 음부의 권세를 가진 자요 산 자와 죽은 자의 주가 되신 분이다. 모든 것은 그 권세 아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분 안에서 우리도 향내나는 제사를 지낼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지상 생애에서 기름을 바르고 한 것도 다 이런 구약 문맥에서 기름 부음이다. 그 당시 그 사람들 장사 지낼 때 어떻게 기름을 바르는가? 하는 그런 유대인 장례 법으로 기름을 바른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름 발리운 자로서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시는가? 왜 구약 때는 이런 기름을 발라야 성소에서 봉사를 하거든요? 그것이 그의 죽음을 말하는데 그의 죽음을 통해서 영광의 거처에 들어가시니까 항상 구약 문맥을 염두해 두셔야 한다. 그러니까 지금도 누가 머리에다 손 얹고 기도해야 효과 있을 줄 알고 또 옷자락이라도 만져야 효과 있을 줄 알고 그러지 말아라 그 말이다. 남녀간에는 그렇게 안수하고 기도한 것이 아니다. 조심해야 되고 이미 예수님께서 그의 영원한 기름을 우리에게 부으셨다.
친히 그의 권세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분을 믿으면 여러분은 영광의 거처에 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이 믿음으로 사는 것이 옳은 일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도시킬 때도 아이고 목사님이 시키니까 할 수 없어서 한다거나. 또 아들은 아들인데 저 대문 밖에서 얼쩡얼쩡 하고 아버지 눈치나 본다거나 그렇게 안된다 그 말이다. 신약 교회는 그렇게 있지를 않는다. 우리는 땅의 성소에서 기름 발린 정도가 아니라 이제는 주님의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완전한 생명의 성령으로 우리가 충만함을 받아서 아버지 앞에서 산다. 우리의 모든 삶은 향내나는 제물의 삶이요 여러분의 모든 언어와 기도는 하나님 앞에 향기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 받으신다. 왜냐하면 우리의 대표자이기 때문에 그렇다. 예수 안에서 죽음의 권세 가리움은 끝났고 휘장 밖과 휘장 안은 없다. 여러분이 그 믿음으로 기도해야 하고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