씻는 물두멍 [출30장17절~21절]
2006. 7. 17. 00:25ㆍ목양자료/3.강해설교
출30:17-21 씻는 물두멍
물두멍을 놋으로 만든다. 물두멍의 용도는 씻는 것이다. 그것을 두는 장소는 회막과 단 사이이다. 그 속에 물을 담아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손발을 씻게 한다.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가서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 씻어야 한다. 그리하여야 죽음을 면한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이와 같이 그들의 수족을 씻어야 죽음을 면한다. 이것이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다.
물두멍을 만드는 놋은 회막에서 시중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다(출38:8). 이것의 의미는 여인들이 외모를 꾸미는 것을 그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사는 것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씻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해석이다. 회막의 다른 기구들과는 달리 물두멍은 크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매일의 잘못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량이 없는 것을 나타낸고 해석하는 것도 자의적인 해석이다. 물두멍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둔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는 순서를 말하는데, 먼저 믿음의 문으로 들어가서, 번제단에서 불타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의지하고, 매일의 죄를 고백하여 물과 같은 성령의 역사로 깨끗함을 입고, 그리고 나서야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해석하는 것도 자의적이다.
회막 문에서 시중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물두멍을 만든 것은 물두멍의 특성과 성소에서 시중 드는 여인들의 거울과 상관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성소의 여인들의 거울은 외모를 단장하는 허영이 아니라 정결함을 나타낸다. 회막의 물두멍은 여인들의 거울로 만든 가장 투명한 놋 물두멍이며 그 속에 있는 물로 제사장을 씻어서 하나님의 성소와 제단을 봉사하도록 정결케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나라가 완성되어 온전히 거룩케 된 때에는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계4:6).
크기가 없는 것은 은혜의 한량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가 언약 체결을 내용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속한 장자로서 구속되었다. 성소를 봉사하는 제사장 가문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성소와 제단에 나아가 여호와께 화제를 사르므로 여호와를 봉사한다. 그러나 회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일지라도 성소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나아가 화제를 드릴 때에는 물로 씻어 정결케 하여야 한다. 반복되는 씻음이 아니고는 그들도 죽게 될 것이다. 물두멍의 의미는 모세의 구약 경륜의 완성인 솔로몬 성전에서 나타난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물두멍 보다 훨씬 큰 놋 바다를 만들어 제사장을 씻게 하였고, 놋으로 물두멍 열을 만들어 번제물을 씻게 하였다(대하4:6). 솔로몬 성전에서는 놋바다와 물두멍의 크기와 거기에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을 기록한다(왕상7:23,38).
단 사이에 물두멍을 둔 것은 성소에 나아가는 순서를 말한 것이 아니라, 성소와 단의 봉사를 위한 자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에 행하신 일은 유월절의 만찬과 새 언약의 식사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줄을 아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였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종의 모습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닦으셨다. 믿는 자는 이미 목욕하여 온 몸이 깨끗한 자이며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씻기시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 아버지께로 가시는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씻어서 자기 앞에서 먹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가시면 제자들이 이 일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때에 제자들도 종의 모습으로 그들을 씻어 자기 상에 앉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본 받아 서로의 발을 씻는 봉사를 하여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세상에 증거 하여야 한다(요13:).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온전히 씻으시어 자기 상에 앉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로 서로를 섬기게 하셨다.
항상 성경이 기록된 그대로 읽는 것을 훈련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기록된 그 자체 형식에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반복되는 말은 씻으라 하는 말이다. 씻어 죽기를 면하고 대대로 씻으라 하는 말이 강조 점인 줄 알 것이다.
물두멍을 놋으로 만든다. 물두멍의 용도는 씻는 것이다. 그것을 두는 장소는 회막과 단 사이이다. 이것이 물두멍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이고 그 다음에는 물두멍에 대한 용도를 반복해서 설명해 버리고 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씻고 그래야 안 죽을 것이다. 대대로 씻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물두멍을 놋으로 만드는데 용도는 씻는 것이고 그것을 두는 장소는 회막과 단 사이이다. 그 속에 물을 담아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손발을 씻게한다.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가서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 씻어야 한다. 그리하여야 죽음을 면한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이와 같이 그들의 수족을 씻어야 죽음을 면한다. 이것이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다. 씻으라 그 말이다. 이 주보에 있는 첫 문단에는 성경에 있는 내용들을 기록된 방식으로 반복한 것이다.
물두멍을 만드는 놋은 회막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다(출38:8). 이것의 의미는 여인들이 외모를 꾸미는 것을 그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사는 것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씻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해석이다. 회막의 다른 기구들과는 달리 물두멍은 크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매일의 잘못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량이 없는 것을 나타낸고 해석하는 것도 자의적인 해석이다. 물두멍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둔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는 순서를 말하는데, 먼저 믿음의 문으로 들어가서, 번제단에서 불타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의지하고, 매일의 죄를 고백하여 물과 같은 성령의 역사로 깨끗함을 입고, 그리고 나서야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해석하는 것도 자의적이다.
먼저 잘못된 해석들을 언급했다. 이런 해석이 많다. 가령 스펼전 같은 사람도 그렇게 설교를 할 것이다. 이 사람이 설교하는데 머리는 비상한 사람인데 성경 본문에 의지한 것은 아니다. 그전에 이야기했지요? 작은 죄 소돔과 고모라에서 도망쳐라 하니까 소알성은 작은 성이니 그리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소알성을 불을 안 질렀다. 그런데 나중에 롯이 소알성에 살다가 산으로 갔지만 결국 가나안 사람의 죄를 똑 같이 지어서 세상에 부끄러운 일을 행하고 그 집안이 기록됐다. 이런 식이다. 그러니까 소돔성에서는 도망쳐 나왔는데 하나님이 도망치라고 한 높은 산까지는 못 가고 높은 산은 신앙이 도달한 높은 경지다. 이곳에 좋사오니 하고 소돔 들판에 있는 소알성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롯이다. 그래가지고 그 집안에 망해 버린 것이 아니냐? 이런 이야기다. 그래서 큰 바위에 무릎이 깨어진 것이 아니라 양말 속에 작은 모래알이 이 신앙의 행군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큰 소나기는 안 맞고 이슬비에 폼 잡다가 옷이 젖고 냄새가 나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범죄 심리나 종교적인 심리는 잘 분석하는데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미냐 하면 전혀 아니다. 소알성은 작은 죄 중에 머무르는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알성까지 하나님의 기업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롯이 그 성을 차지하는 것이고 또 롯의 집안에 부끄러운 일을 기록한 것은 그 자녀들도 기업에 포함된다는 의미로 기록되지 세상에 창피한 꼴좀 봐라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종교 심리와 범죄 심리적으로 푸니까 아주 적응력이 센듯해도 그것은 복음의 적응력은 아니다.
그래 가지고 개구리 박사들도 있다. 작은 죄 해 가지고 어떤 큰 공장에 수도물이 막혀 버렸는데 보니까 올챙이가 파이프를 타고 들어 왔는데 나중에 큰 두꺼비같이 되어 가지고 파이프는 막아 버리니까 그런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조심해라 이런다든가? 또 어떤 집에 아이가 죽었는데 다 소독을 했는데 보석 상자 넣어 둔 서랍만 열쇠로 열지 않고 소독을 안했다. 거기 있는 병균이 결국 그 집안을 죽였다. 네 마음에 보석 상자는 어디가 있느냐? 이런 이야기들 그러면 소독하는데 보석 상자 열어서 소독할 까닭이 없다.
또 많다. 그런 설교들이 많이 있다. 또 연기하는 죄도 있다. 바울이 못가게 하려고 야 나중에 보내 주마 천천히 가거라 별말을 다 한다. 그래 가지고 연기하는 마귀 해 가지고 한다. 제일로 간사한 마귀는 살살 달래 가지고 못 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 가지고 개구리도 뜨거운 물에 넣으면 바짝 데워 버리는데 찬물에다 넣고 살살 데우면 헤엄을 치다가 살살 죽는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요새 그런 박사들이 있는지 별 말을 다한다. 그런데 여기도 그런 일들을 많이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제가 그런 일에 별 관심이 없는데 조금 적어 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해석을 한 사람들이 많고 여러분들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서 좀 바꾸라고 그런다.
무슨 말이냐면 스펼전도 그런 설교를 한 것 같다. 아마 내가 스펼전 설교를 많이 읽어서 그런 것 같다. 다른 설교는 안 읽었으니까 기억나면 스펼전 설교일 것이다. 그분이 설교를 못한 것이 아니라 청교도 설교 황태자다. 그런데 그 선배들이 복음이라고 설명 해 놓은 것이 복음 아닌 것이 많으니까 그것을 조심하라 그 말이다.
그분은 어떻게 말하냐면 이 물두멍은 씻는 물두멍인데 날마다 씻을 것이 아니냐? 그러면 씻는 다는 의미는 무엇이냐? 38:8절을 보니까 성전에 수종드는 여인의 거울로 이 물두멍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여인들이 그전에는 거울로 보고 자기 외모를 단장하고 아름답다 기분이 좋아했는데 이제 우리 나라 옛날 여자들처럼 이것으로 큰 물두멍을 만들어 버렸으니 이제는 물 항아리에다 그 얼굴을 비쳐 봐야 하겠지요? 그전에는 놋 거울로 봤는데 이제는 씻는 물로 자기를 봐야 될 것이다. 그러니까 외모를 단장하는 세상 허영들을 버리고 우리의 영혼을 씻는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서 자기 영혼을 봐야 될 것이다. 그것이 씻는 물두멍이 의미하는 바다 하니까 성경도 인용이 되고 또 성경에 있는 말이고 하니까 복음인 듯 하다. 사실이다. 외모를 단장하지 말고 마음을 단장하라 하니까 다 맞는 말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물로 비유한 것이 많으니까 맞는 말 같다.
그러니까 이제는 외모를 단장하는 허영을 버리고 말씀으로 내 영혼의 거울로 내 마음을 비춰서 정결케 해야 하나님의 성소에 나가서 봉사할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이 아니냐? 이런 말이다. 그 말로 하면 여러분의 죄에도 다 걸린다. 왜냐하면 그런 일에는 관심이 대단하다. 가르치지 않아도 관심이 대단하다. 집안 청소 안한 여자도 어디 나갈 때는 다 화장하고 나간다. 그런데 성경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모른다. 그렇게 공격을 하면 뜨끔하기도 하고 아하 진짜구나. 깊도다. 이렇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다.
이제 해석을 해 보면 알 것이다. 또 어떤 해석이 있냐면 이 물두멍은 보니까 크기가 없다. 가령 번제단 같으면 가로 세로 높이 얼마 또 향단 같은 것도 규격이 있고 또 증거궤도 크기가 있는데 이 물두멍은 보니까 크기가 없다. 그러면 스펼전은 어떻게 해석을 하냐면 은혜의 한량없음 이렇게 푼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날마다 스스로 짓거든. 얼마나 죄를 많이 짓던지 씻다 보면 물그릇에 물이 다 없어져 버릴 것 같다. 그러니까 이 물통은 끝이 없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주십시오 하는데 그 전화 통화는 혼선도 안되고 다 듣고 줄려면 정신없지 않겠어요? 그런 말처럼 죄가 너무너무 많아서 씻으려면 한량이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끝없이 용서하신 은혜를 이 놋 제단 크기가 가르친다. 크기가 가르친다. 그러니까 이 셈에서는 얼마든지 씻을 수가 있다. 그렇게 하니까 그것도 굉장히 은혜스럽게 들리지요? 그런데 이 본문이 그런 것을 말한 것인가 했을 때 아니라 그 말이다.
또 한가지 이야기는 성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나타내는데 처음에 한 문이 있는데 오직 예수라 그런다. 그런데 에스겔 성전은 문이 네 개다. 새 하늘과 새 땅도 문이 네 개다. 사방으로 열렸거든. 그러면 오직 예수도 안 맞다. 그런데 모세 성전은 문이 하나다. 그러니까 문이 하나니까 예수한테 맞춘 것이다. 왜 이 문으로 안 들어오면 도둑이요 했으니까 나는 문이요 했으니까 오직 예수 한 문 이렇게 해서 한 문을 들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문이다. 쑥 들어가면 처음에 눈에 띤 것이 번제단에서 불타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그러니까 첫째 믿음의 문으로 들어가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알고 그리고 붙들고 거기 까지가 일 단계다.
그 다음 성소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봉사하려면 일 단계 가지고 안된다. 매일 씻어야 된다. 왜냐하면 번제단 다음에가 물두멍이 잇거든요. 그리고 물두멍 다음에 성소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순서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다. 그렇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본문이 그런 것을 말하는가? 아니다. 자기 교리로 해석을 해 놓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소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한다고 해 가지고 그런 영해를 많이 한다. 그런데 그 영해가 전부 틀리면 틀린 줄을 알아 버리는데 우리 종교성에도 맞고 또 성경에 있는 말이기고 하고 하니까 은혜롭게 들리는 것이다. 그것이 제일로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항상 은혜 되면 된다는 그 말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거기가 초점을 두라 그 말이다.
이제 해석을 하겠다.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물두멍을 만든 것은 물두멍의 특성과 성소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과 상관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놋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놋으로 만든 것이 놋 제단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성소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놋으로 만들었더라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 민수기를 보면 오히려 그 놋을 무엇으로 되어 있냐면 고라의 자손들도 놋 향로에다가 향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섰거든요. 그들을 하나님이 불살랐다. 그들도 놋 향로를 가지고 단을 쌓아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 번제단을 향로와 관계가 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물두멍을 만드는데 성전에 수종드는 거울로 만들었다. 다를 기구는 그렇게 안 만들었는데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분명히 관계가 있는 줄은 알겠지요? 그냥 관계가 없다 하면 안되고 관계가 있다.
성소의 여인들의 거울은 외모를 단장하는 허영이 아니라 정결함을 나타낸다. 이것을 우리들은 여자들이 거울 보는 것으로 막 해석을 하는데 성소에서 수종드는 여자들이 외모를 단장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거울 하니까 여자들이 치장하는 것 막 이렇게 보는 것인데 성소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은 마치 장자처럼 성소에 드려진 여인들이다. 그러면 성소는 한마디로 정결하고 거룩하다 한 것이 성경 개념이지 거기서 성소에 들어가서도 머리 단장한다는 말은 성경에는 없는 말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거울이라는 표상을 갖다 써먹으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결과 관계가 있는 문맥이지 허영과 관계가 있는 문맥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이것은 최고급 거울이 될 것이다. 옛날에는 구리 거울이다. 그것이 투명해야 얼굴을 잘 비춰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특성과 물로 씻는다는 의미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회막의 물두멍은 여인들의 거울로 만든 가장 투명한 놋 물두멍이며 그 속에 있는 물로 제사장을 씻어서 하나님의 성소와 제단을 봉사하도록 정결케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나라가 완성되어 온전히 거룩케 된 때에는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계4:6).
수정이 가장 아름답고 투명하다. 가장 아름답고 맑다 하면 수정 같다고 그런다. 우리 교인들이 보석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나만큼 모르겠지요? 여기 본문에 보니까 수정 같다 하는 말을 유리 같다 하는 말이지요? 수정 같은 유리 바다 본문이 본래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수정 같다 했을 때는 투명한 유리 같다 그 말이다. 그전에 놋도 이 만큼 투명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놋은 순결한 놋이어서 여인들의 거울로 활용했다. 그런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었다 했을 때 씻는 물과 여인들의 거울로 썼다는 것과는 일종의 상관 관계가 있는데 완성된 것을 보니까 그 나라에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닷가 있다. 그렇게 완전한 정결을 묘사하고 있는 방식이다. 그 보다 더 깨끗한 유리 바다는 없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허영을 닦아라 이런 이야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이 물두멍에 씻는 특성 깨끗함 정결함 투명성 그것을 말하는 것이 놋으로 해석을 한다. 왜 뜰도 놋으로 만든다. 가장 투명한 놋은 무엇인가? 거울로 사용하는 놋이다. 그렇게 해서 씻는 물과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일부러 해석하지 말고 성경 자체를 읽어보면 될 것이다. 성소 안의 여인들의 허영은 없는 것이다. 성소 안에는 거룩하다 한것만 유일한 특성이다. 그러니까 일반 여인들이 거울 보고 단장한 것으로 하면 우리는 우리 나라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 들어가는 것이다. 성경 자체로 해석한 것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니까 목매어 죽인 것은 먹지 말라고 하면 개고기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신자는 닭을 잡을 때도 이제는 비틀어서 안 잡고 칼로 잘라서 잡는다. 왜냐하면 목매어 죽인 것은 먹지 말라고 했거든요? 손으로 맨 것이나 노끈으로 맨 것이나 같으니까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닭을 잡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 배경을 빼버리고 해석을 하니까 그런 해석이 된다. 여기서는 온전한 정결함을 말하고 있다.
크기가 없는 것은 은혜의 한량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가 언약 체결을 내용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놋으면 만들어라 한 이야기가 출30장에는 없다. 38장에 성소를 세우는 문맥에서 있지 성소는 어떤 곳인가 하는데서는 없다. 가령 속전도 은으로 내라 한것도 성전을 세우는 문맥에 있지만 여기서 속전의 의미는 무엇 인가? 했을 때는 은이라는 말은 없다. 여기서 속전은 대리자로 낸다.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의미로 낸다. 그런 의미가 속전이 말하지 은으로 내라는 가치 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성소를 구체적으로 지었을 때 그 문맥에서 출애굽기 후반부에서는 은으로 내라 그런 말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놋으로 만들어라 그런 이야기만 있지 어떤 놋인가 하는 이야기는 성소를 짓는 문맥인 후반부에서 나오고 여기서는 안 나온다. 여기서는 성소가 어떤 재료로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도 어떤 관계인가 언약 체결 관계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어라 그런 이야기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고 물두멍의 크기에 대해서도 없다. 왜냐하면 물두멍의 의미만 밝히면 되지 그것이 얼마큼 큰가 하는 것은 여기서는 상관이 없다. 그래서 여기서 말안하고 있는 것이지 말한 것 보니까 한량없구나 그렇게 해석을 한다. 그런데 말을 안했으면 적다는 의미도 될 수 있지 크다는 의미가 될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그냥 지레 짐작으로 은혜가 한량없으니 그렇게 해석해 들어가면 안된다. 규모를 말 안했으면 지극히 작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클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니 이것을 미리 크다고 해석하는 것은 신학적인 선입관념이고 여기서는 크고 작고 하는 문제는 없고 단지 씻어라 그것만 여기서 하는 유일한 강조점이다. 왜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장자로 설수 있또록 속전을 받도록 했다. 그런데 그들의 봉사는 아직도 온전한 봉사는 아니고 씻어야 한다. 씻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소는 휘장으로 가려졌을 뿐만 아니라 씻어야 들어간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 크기가 크니 작니 하는 것은 여기서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어떤 관계로 자기 제사장을 성소에서 봉사하게 하시는가? 씻어서 정결케 해서 그렇게 하신다. 그 말만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문맥을 떠나서 해석을 하면 그런 묘한 해석이 되는 것이다.
크기가 없는 것은 은혜의 한량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가 언약 체결을 내용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속한 장자로서 구속되었다. 성소를 봉사하는 제사장 가문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성소와 제단에 나아가 여호와께 화제를 사르므로 여호와를 봉사한다. 그러나 회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 일찌라도 성소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나아가 화제를 드릴 때에는 물로 씻어 정결케 하여야 한다. 반복되는 씻음이 아니고는 그들도 죽게 될 것이다. 한 번 씻어서 끝난 것이 아니라 대대로 씻어라고 했다. 그러면 분명히 제사장이 위임될 때 목욕을 했다. 목욕하고 옷을 입었다. 그런데도 반복해서 씻어라. 어느 때 성소에 들어올때와 제단에 나갈 때 그러니까 한 번 목욕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반복된 씻음으로 하나님을 봉사하도록 하고 있다. 만일에 씻지 않으면 부정하니까 죽을 것이다. 분명히 성소에 살고 있고 백성의 대리자로 봉사하고 정결한데도 또 하나님의 단이나 성소에 들어갈려면 씻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해서 아직도 그들이 부정하다는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만일에 씻지 않으면 죽는다. 하는 것을 보니까 부정하다는데 강조가 있고 씻으면 정하다.
그런데 대대로 씻으라 했다. 그러면 성소에 들어갈 때는 아침과 저녁으로 들어간다. 출애굽기 문맥에서 향을 사를 때 또 아침과 저녁 번제를 드릴 때 그 때는 들어가야 한다. 제단에 나아가고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다. 등불을 관리할 때 아침과 저녁에 번제를 사른다. 그러니까 아침과 저녁에 성소에 한 번씩은 나아가야 된다. 그 때마다 씻어라 매일 씻어라 그 말이다.
물두멍의 의미는 모세의 구약 경륜의 완성인 솔로몬 성전에서 나타난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물두멍 보다 훨씬 큰 놋 바다를 만들어 제사장을 씻게 하였고, 놋으로 물두멍 열을 만들어 번제물을 씻게하였다(대하4:6). 솔로몬 성전에서는 놋바다와 물두멍의 크기와 거기에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을 기록한다(왕상7:23,38). 그러면 솔로몬 성전에서는 크기를 기록해버렸으니까 은혜가 한량없는 것이 끝나 버린것인가? 아니다. 그러니까 아까 치수가 없다 하는 해석은 바른 해석은 아니다. 그러면 모세 성전이 완성된 것은 솔로몬 성소다. 그러면 거기 나타난 것을 보면 모세 제도의 의미가 밝혀 질 것이다. 거기보면 물두멍 보다 훨신 큰 놋 바다가 있다. 그리고 아까 계4장에도 수정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고 했다. 이 바다는 짠물 바다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한 자 언어를 가져다 쓰니까 그렇다. 이것은 말하자면 물 대야다. 큰 물 대야다. 그런데 수정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고 그랬다. 똑 같은 바다도 불이 섞인 바다는 홍해를 말한다. 왜냐하면 불이 섞인 유리 바다에서 구속받았다고 노래 부르고 있다. 그것은 홍해의 장면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보좌에 수정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 했을 때 이것은 성소에 있는 물두멍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 한자로 쓰면 다를 것인데 한글로 쓰면 똑같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을 보니까 조그만 물두멍이 있는 것이 아니다. 큰 놋 바다가 있다. 그 놋 바다는 물두멍 보다 얼마나 크냐면 10배는 된다. 어떻게 되냐면 솔로몬을 보면 놋 제단과 성소 사이에 놋 바다가 있는데 그 직경이 15 규빗이다. 그러니까 반경은 7.5 규빗이다. 그리고 번제단 좌우로 물두멍이 있는데 바퀴가 네 개 달려서 이동식 물두멍이다. 그 작은 것은 물두멍이 그러고 큰 것을 놋 바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 놋 바다는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 씻는 용도로 쓰고 그리고 열 개의 물두멍은 번제물을 씻는데 쓴다. 이동식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씻는 것이 굉장히 많다. 그러면 솔로몬 성전에는 죄가 많다는 것이겠는가? 그 말이 아니다. 거기 번제물이 무수히 많고 거기서 봉사하는 제사장이 무수히 많다. 솔로몬 성전은 은혜가 더 확대 된 것이지 죄가 많다는 문제는 아니다.
가령 목욕하는 손님이 적으면 목욕탕을 조그맣게 지으면 될 것이다. 손님이 많으면 목욕탕이 커야 할 것이다. 목욕탕이 많으면 이 동네는 때낀 사람이 많은가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은혜가 확대된 의미다. 그러니까 여기 보니까 큰 크기를 말하는데 이제는 조그만 물두멍이 아니라 놋 바다를 두도록 되어 있다. 그것을 제사장을 씻는 용도로 하고 열 개의 물두멍은 번제물을 씻는 용도로 두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봉사하는 양이 많고 그러니까 씻어 정결케 하는 은혜도 풍성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어떻든 이 문맥에서는 씻어라 씻지 않으면 죽는다. 하는 것이 출애굽기의 문맥이다. 그러니까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봉사하도록 속전이 다 내져 있고 그것을 제사장이 감당한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곳은 성소와 단에 나아감으로 봉사하는데 그들까지라도 반복적인 씻음이 아니고는 나갈 수 없고 씻지 않고 나가면 죽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두 가지를 나타내고 있다. 씻어 정결케 한다는 은혜와 동시에 여전히 반복되는 씻음이 아니면 죽으리라는 아직도 가리운 원수된 것 간격이 있는 것을 말한다.
단 사이에 물두멍을 둔 것은 성소에 나아가는 순서를 말한 것이 아니라, 성소와 단의 봉사를 위한 자리이다. 출애굽기 여기 보니까 왜 성소와 단 사이에 두었는가? 성소에 나갈 때도 씻고 단에 나갈 때도 씻게 하려고 그렇게 해서 성소와 단에 봉사의 자리로 중간을 말하고 있지 저 문으로부터 들어온 순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문맥은 성소에 들어갈 때 씻고 단에 나갈때도 씻어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소와 단 사이에 두어라. 그렇게 되어 있지 입구에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려면 문 번제단 씻고 그 다음 성소에 들어가는데 그러면 물러나면 어떻게 하게요? 씻고 단으로 물러나야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씻고 앞으로 들어가야 될것인데 씻고 돌아서서 뒤로 돌아서서 봉사해야 된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순 자기가 꾸며낸 이야기지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다.
이것은 성소와 단에 나아가는 봉사를 위해서 그 사이에 두고 나아갈 때마다 씻어라 하는 이야기지 앞으로 전진 그런 문맥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 본문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장 자체가 그런 것을 부정해 버리고 있는 것을 소위 은혜라는 신학적인 개념을 가지고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붙들고 날마다 눈물로 죄를 씻고 성령으로 씻고 그래야 성소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받으실것이 아니냐? 어떻게 죄를 두고 하나님께 나갈수가 있겠느냐? 해서 한 번 번제단을 통과하면 그 만이다. 그 다음 반복된 씻음만 필요한것처럼 그것이 소위 선교 그룹들의 선교하는 그림이다.
기독론적으로 설명을 하지 않고 개인의 경험 발달로 성경을 설명해 버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초보적인 은혜고 성령만 추후적인 은혜고 충만한 은혜다. 반복된 은혜고 예수 믿는 것은 천당 가는 다리일 뿐이고 한 번 건너와 버렸으니까 다시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개인 발전으로 설명을 하면 그렇게 웃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도식을 가지고 성소에다가 맞추는 것이다. 문 번제단. 씻는 물 그 다음 성소 이 순서로 들어가야 된다고 말하는데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이 성경 본문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러면 이것이 신약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로 오는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에 행하신 일은 유월절의 만찬과 새 언약의 식사이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줄을 아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였다. 요한 복음에 있는 말이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약 체결을 유월절 잔치와 연결시키는데 요13장에서는 언약 체결과 관계를 말하지 않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하는 문맥에서 말씀하고 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종의 모습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닦으셨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하기를 나의 발을 씻깁니까? 나를 다 씻어 주십시오 하니까 이 믿는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다. 이미 목욕한 자와 같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는 이미 목욕하여 온 몸이 깨끗한 자이며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씻기시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 아버지께로 가시는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씻어서 자기 앞에서 먹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가시면 제자들이 이 일의 의미를 알게된다. 그때에 제자들도 종의 모습으로 그들을 씻어 자기 상에 앉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본 받아 서로의 발을 씻는 봉사를 하여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세상에 증거하여야 한다(요13:).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온전히 씻으시어 자기 상에 앉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로 서로를 섬기게 하셨다.
요한 복음이 성소와 관계가 있고 전부 제사장 언어라고 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줄 알았다. 그리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는데 그 문맥은 무엇인가? 제자들을 자기 상에 앉게 하는 사랑이었다. 그리고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이처럼 제자들을 닦았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왜 나를 닦으시냐고 그럴수 없다고 했다. 그 때 예수님이 네가 나에게 씻기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니까 그러면 목욕까지 시켜주라고 했는데 이미 목욕한 자는 깨끗해 졌으니까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는데 다는 깨끗한 것이 아니다. 가룟 유다는 아니라 그 말이다. 그는 깨끗한 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씻어 주셨다. 그리고 나서 식사 자리에 앉으셔서 내가 주와 스승이 되어서 너희들이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그렇게 해라. 그렇게 하면서 뒤에 내가 새 계명을 주노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처럼 서로 사랑해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줄 알리라.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님을 따르겟다고 이야기를 한다. 주님께서 네가 지금은 나를 따를수 없고 또 이해할수도 없다. 그런 문맥이다.
여기 요한 복음은 부활하신 뒤로 주님께서 반복해서 찾아오신 것이 요한 복음 구조다. 제자들이 모였을 때 반복해서 두 번 찾아온다. 그리고 디베랴 바닷가에서도 먹을 것을 놔두고 제자들을 부르셔서 먹게 하신 분이다. 그리고 요한 복음 처음부터 갈릴리 혼인 잔치에서 먹게 하신 분이셨다. 특별히 요한 복음은 성소 언어다. 예수님이 유월절 양으로 죽으심을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 재판도 제사장한테 재판 받은 것이 반복된 것이 요한 복음이다. 다른 복음은 제사장 재판을 그렇게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줄 알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는데 자기가 씻어서 자기 상에서 먹도록 하셨다.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씻었다. 그리고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네가 나한테 씻김을 받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냥 내가 선생이 되어서 너희를 이렇게 사랑했으니까 너희들도 모이면 발닦아줘라 그런 말인가? 천주교는 지금도 매일은 닦지 않지만 닦아주고 있다. 이제 신문에 날 때 한 번 닦으고 몇 번식 한다. 만일에 천주교는 그런 가난한 자가 없으면 선전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족 식이라 해서 그런 것이 있다. 그리고 요새는 성경에 있는 대로하자 해서 그렇게 한 교회도 있다. 자기 집에서 발도 안 씻고 왔는지 그런데 가 있다. 그러니까 이 구약 의미를 모르고 그렇게 하니까 그런 것이다. 구약에서 씻음의 의미는 성소의 씻음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씻는 것은 자기들을 제사장으로 해석하고 씻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실 줄을 아시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는데 어떤 사랑인가? 먹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닦아 주셨다. 그렇게 하고 있다. 그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내용이다. 그러면 발좀 닦아 준 것 가지고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그러는가? 그러니까 구약 의미를 모르고 그것을 해석하면 해석할 방법이 없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실 줄 알고 닦아 주셨다. 그는 아버지께로 가면 더 좋은 것으로 제자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가 있는 곳에 제자들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씻어서 자기 상에서 먹도록 하는 그런 축제를 벌이셨다. 그는 분명히 종의 형상으로 씻으셨는데도 씻으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가 씻으셔서 자기 상에 앉게 하신 분이 그가 부활하시면 제자들도 이 의미를 알게 된다.
이 주의 백성들 어떻게 우리를 씻으셔서 자기 상에 앉게 하셨는가? 그 사랑의 봉사로 서로 봉사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들이 내 제자 인줄 알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는 그냥 씻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아버지께로 갈 줄을 알고 씻으셨다. 그러니까 실은 아버지께로 가셔서 더 좋은 처소로 제자들을 인도하시는 것이 그의 씻으시는 작업의 완성이다. 실은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온전히 씻으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살아 계셨을 때 씻어서 그들을 정결한 제사장으로 자기 상에 앉히신 것이다. 그런데 구약 때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아론은 씻고 즉 백성의 대표자로 아론을 씻지 열두 제자를 씻고 그런 것은 없다. 항상 신약은 구약처럼 열둘 열둘의 제사장, 장자가 아니라 열둘을 씻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은 아니다. 그리고 씻김을 받은 이 사람들이 온전히 씻어진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을 통해서 그들을 씻으셨을 때 그들이 온전히 씻김이 되었끼 때문에 이제는 하늘의 권세가 그에게 있어서 제자들을 빼앗을 세력도 없고 이제는 그의 사랑을 이해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서로를 씻어서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신령한 제사장의 봉사를 감당할수 있또록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다. 이 일을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이 사랑의 씻음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이 씻음의 의미를 모른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사랑하신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주님이 신령한 성소가 되었고 제자들이 서로 권면해서 주의 이름으로 씻으면 그렇게 해서 주의 상에 앉으면 그것이 온전히 씻김을 받은 것이다. 만일에 죄가 있으면 신령한 교제로부터 제외된다. 그것이 참으로 주님을 봉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씻어서 정결케 하셨기 때문에 그렇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씻어서 자기 상에 앉히신 하나님으로 자기를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죽으심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것이 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 안에서 온전히 씻음을 입었다. 그런데도 요한 -서를 보면 죄를 고백하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죄의 고백은 구약 때는 씻어도 지성소까지 밖에 못 씻는다. 그런데 우리의 고백은 주님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셨고 속죄제가 되셨기 때문에 그의 씻으심은 우리를 온전하게 씻어서 빛 가운데서 나아가게 하신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것이 우리의 죄의 고백과 구약 백성의 죄의 고백과 다른 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씻음을 입어서 신령한 제사장이 된 것이다. 그의 죽으심이 이 일을 완결해 주셨다. 우리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런 사람들은 아니지만 형제가 서로를 권면해서 그가 씻어서 정결케 한 것처럼 서로를 권면하고 수고해서 그들이 주의 상에 앉아서 먹고 마시는 신령한 제사장 적인 교제를 감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수고하는 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들이 서로 사랑한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세상이 너희들이 내 제자 인줄 알게 한다. 하는 말씀이다. 성도들은 그런 의미로 서로 권면해야 한다. 그런 의미로 우리 개인적인 영역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 개인적인 삶이 있다. 가령 내가 날마다 소고기를 먹은들 내 식성이 그렇다는데 누가 관여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도 만일에 가난한 자가 그렇게 했을 때 누가 형제여 말하면 내가 먹는데 왜 개인일을 상관하냐? 그렇게 하면 안될 것이다. 마땅히 서로 권면해서 형제가 장애 되지 않도록 도와야 된다. 그런 것이 서로 씻는 사랑의 수고다.
이것을 가지고 중생이냐? 날마다 회개냐? 이런 구원론적으로 설명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주님께서 씻어서 자기 상에 앉도록 하는 제사장으로 수고하셨다. 왜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에 씻어 주셨다. 왜 그가 가는 곳으로 제자들을 가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 이제 그가 있는 곳에 그이 백성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너희들을 씻는 이유를 모를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후에는 안다. 그것이 요한 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다. 개인적인 영역이 있으면서도 그것이 성경에 비춰진 성도의 삶인가? 하는 것은 서로 권면해 줘야 한다. 만일에 우리가 스스로 죄를 짓고 마음대로 살면 주의 상에 앉기에 합당치 못할 경우가 있다. 주님께서 죽으심을 통해서 이 일을 해 주셨다. 우리는 그런 기원적인 은혜는 없지만 성도를 권면하면 허다한 죄로부터 그들을 구원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서로 씻어서 상에 앉도록 해줘야 할 것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친히 종의 형상으로 수고한 것인데 죽음을 통해서 완성하셨는데 그런 겸손의 수고를 통해서 감당하는 것이다.
제사장을 하나님 앞에 향을 사르는 거룩한 직무에로 부르셨는데 제사장의 복의 특성은 백성을 대표한 것이며 여전히 반복된 씻음을 통해서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 문제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물두멍을 놋으로 만든다. 물두멍의 용도는 씻는 것이다. 그것을 두는 장소는 회막과 단 사이이다. 그 속에 물을 담아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손발을 씻게 한다.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가서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 씻어야 한다. 그리하여야 죽음을 면한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이와 같이 그들의 수족을 씻어야 죽음을 면한다. 이것이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다.
물두멍을 만드는 놋은 회막에서 시중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다(출38:8). 이것의 의미는 여인들이 외모를 꾸미는 것을 그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사는 것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씻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해석이다. 회막의 다른 기구들과는 달리 물두멍은 크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매일의 잘못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량이 없는 것을 나타낸고 해석하는 것도 자의적인 해석이다. 물두멍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둔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는 순서를 말하는데, 먼저 믿음의 문으로 들어가서, 번제단에서 불타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의지하고, 매일의 죄를 고백하여 물과 같은 성령의 역사로 깨끗함을 입고, 그리고 나서야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해석하는 것도 자의적이다.
회막 문에서 시중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물두멍을 만든 것은 물두멍의 특성과 성소에서 시중 드는 여인들의 거울과 상관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성소의 여인들의 거울은 외모를 단장하는 허영이 아니라 정결함을 나타낸다. 회막의 물두멍은 여인들의 거울로 만든 가장 투명한 놋 물두멍이며 그 속에 있는 물로 제사장을 씻어서 하나님의 성소와 제단을 봉사하도록 정결케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나라가 완성되어 온전히 거룩케 된 때에는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계4:6).
크기가 없는 것은 은혜의 한량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가 언약 체결을 내용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속한 장자로서 구속되었다. 성소를 봉사하는 제사장 가문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성소와 제단에 나아가 여호와께 화제를 사르므로 여호와를 봉사한다. 그러나 회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일지라도 성소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나아가 화제를 드릴 때에는 물로 씻어 정결케 하여야 한다. 반복되는 씻음이 아니고는 그들도 죽게 될 것이다. 물두멍의 의미는 모세의 구약 경륜의 완성인 솔로몬 성전에서 나타난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물두멍 보다 훨씬 큰 놋 바다를 만들어 제사장을 씻게 하였고, 놋으로 물두멍 열을 만들어 번제물을 씻게 하였다(대하4:6). 솔로몬 성전에서는 놋바다와 물두멍의 크기와 거기에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을 기록한다(왕상7:23,38).
단 사이에 물두멍을 둔 것은 성소에 나아가는 순서를 말한 것이 아니라, 성소와 단의 봉사를 위한 자리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에 행하신 일은 유월절의 만찬과 새 언약의 식사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줄을 아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였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종의 모습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닦으셨다. 믿는 자는 이미 목욕하여 온 몸이 깨끗한 자이며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씻기시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 아버지께로 가시는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씻어서 자기 앞에서 먹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가시면 제자들이 이 일의 의미를 알게 된다. 그때에 제자들도 종의 모습으로 그들을 씻어 자기 상에 앉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본 받아 서로의 발을 씻는 봉사를 하여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세상에 증거 하여야 한다(요13:).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온전히 씻으시어 자기 상에 앉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로 서로를 섬기게 하셨다.
항상 성경이 기록된 그대로 읽는 것을 훈련하라고 했다. 왜냐하면 기록된 그 자체 형식에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반복되는 말은 씻으라 하는 말이다. 씻어 죽기를 면하고 대대로 씻으라 하는 말이 강조 점인 줄 알 것이다.
물두멍을 놋으로 만든다. 물두멍의 용도는 씻는 것이다. 그것을 두는 장소는 회막과 단 사이이다. 이것이 물두멍에 대한 총체적인 설명이고 그 다음에는 물두멍에 대한 용도를 반복해서 설명해 버리고 있다.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서 씻고 그래야 안 죽을 것이다. 대대로 씻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물두멍을 놋으로 만드는데 용도는 씻는 것이고 그것을 두는 장소는 회막과 단 사이이다. 그 속에 물을 담아서 아론과 그 아들들이 손발을 씻게한다. 그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와 단에 가까이 가서 직분을 행하여 여호와 앞에 화제를 사를 때에 씻어야 한다. 그리하여야 죽음을 면한다. 아론과 그 아들들은 이와 같이 그들의 수족을 씻어야 죽음을 면한다. 이것이 그들이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이다. 씻으라 그 말이다. 이 주보에 있는 첫 문단에는 성경에 있는 내용들을 기록된 방식으로 반복한 것이다.
물두멍을 만드는 놋은 회막에서 수종 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었다(출38:8). 이것의 의미는 여인들이 외모를 꾸미는 것을 그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사는 것처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씻는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해석하는 것은 성경에 근거가 없는 자의적인 해석이다. 회막의 다른 기구들과는 달리 물두멍은 크기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매일의 잘못을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한량이 없는 것을 나타낸고 해석하는 것도 자의적인 해석이다. 물두멍을 회막과 제단 사이에 둔 의미는 하나님을 섬기는 순서를 말하는데, 먼저 믿음의 문으로 들어가서, 번제단에서 불타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를 의지하고, 매일의 죄를 고백하여 물과 같은 성령의 역사로 깨끗함을 입고, 그리고 나서야 휘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라고 해석하는 것도 자의적이다.
먼저 잘못된 해석들을 언급했다. 이런 해석이 많다. 가령 스펼전 같은 사람도 그렇게 설교를 할 것이다. 이 사람이 설교하는데 머리는 비상한 사람인데 성경 본문에 의지한 것은 아니다. 그전에 이야기했지요? 작은 죄 소돔과 고모라에서 도망쳐라 하니까 소알성은 작은 성이니 그리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그러니까 하나님이 소알성을 불을 안 질렀다. 그런데 나중에 롯이 소알성에 살다가 산으로 갔지만 결국 가나안 사람의 죄를 똑 같이 지어서 세상에 부끄러운 일을 행하고 그 집안이 기록됐다. 이런 식이다. 그러니까 소돔성에서는 도망쳐 나왔는데 하나님이 도망치라고 한 높은 산까지는 못 가고 높은 산은 신앙이 도달한 높은 경지다. 이곳에 좋사오니 하고 소돔 들판에 있는 소알성에 머물렀는데 그것이 롯이다. 그래가지고 그 집안에 망해 버린 것이 아니냐? 이런 이야기다. 그래서 큰 바위에 무릎이 깨어진 것이 아니라 양말 속에 작은 모래알이 이 신앙의 행군을 못하게 하는 것이다. 큰 소나기는 안 맞고 이슬비에 폼 잡다가 옷이 젖고 냄새가 나 버리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다.
그러니까 범죄 심리나 종교적인 심리는 잘 분석하는데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미냐 하면 전혀 아니다. 소알성은 작은 죄 중에 머무르는 잘못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소알성까지 하나님의 기업으로 주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롯이 그 성을 차지하는 것이고 또 롯의 집안에 부끄러운 일을 기록한 것은 그 자녀들도 기업에 포함된다는 의미로 기록되지 세상에 창피한 꼴좀 봐라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종교 심리와 범죄 심리적으로 푸니까 아주 적응력이 센듯해도 그것은 복음의 적응력은 아니다.
그래 가지고 개구리 박사들도 있다. 작은 죄 해 가지고 어떤 큰 공장에 수도물이 막혀 버렸는데 보니까 올챙이가 파이프를 타고 들어 왔는데 나중에 큰 두꺼비같이 되어 가지고 파이프는 막아 버리니까 그런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조심해라 이런다든가? 또 어떤 집에 아이가 죽었는데 다 소독을 했는데 보석 상자 넣어 둔 서랍만 열쇠로 열지 않고 소독을 안했다. 거기 있는 병균이 결국 그 집안을 죽였다. 네 마음에 보석 상자는 어디가 있느냐? 이런 이야기들 그러면 소독하는데 보석 상자 열어서 소독할 까닭이 없다.
또 많다. 그런 설교들이 많이 있다. 또 연기하는 죄도 있다. 바울이 못가게 하려고 야 나중에 보내 주마 천천히 가거라 별말을 다 한다. 그래 가지고 연기하는 마귀 해 가지고 한다. 제일로 간사한 마귀는 살살 달래 가지고 못 가게 하는 것이다. 그래 가지고 개구리도 뜨거운 물에 넣으면 바짝 데워 버리는데 찬물에다 넣고 살살 데우면 헤엄을 치다가 살살 죽는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요새 그런 박사들이 있는지 별 말을 다한다. 그런데 여기도 그런 일들을 많이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제가 그런 일에 별 관심이 없는데 조금 적어 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해석을 한 사람들이 많고 여러분들도 기억하고 있을 것 같아서 좀 바꾸라고 그런다.
무슨 말이냐면 스펼전도 그런 설교를 한 것 같다. 아마 내가 스펼전 설교를 많이 읽어서 그런 것 같다. 다른 설교는 안 읽었으니까 기억나면 스펼전 설교일 것이다. 그분이 설교를 못한 것이 아니라 청교도 설교 황태자다. 그런데 그 선배들이 복음이라고 설명 해 놓은 것이 복음 아닌 것이 많으니까 그것을 조심하라 그 말이다.
그분은 어떻게 말하냐면 이 물두멍은 씻는 물두멍인데 날마다 씻을 것이 아니냐? 그러면 씻는 다는 의미는 무엇이냐? 38:8절을 보니까 성전에 수종드는 여인의 거울로 이 물두멍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여인들이 그전에는 거울로 보고 자기 외모를 단장하고 아름답다 기분이 좋아했는데 이제 우리 나라 옛날 여자들처럼 이것으로 큰 물두멍을 만들어 버렸으니 이제는 물 항아리에다 그 얼굴을 비쳐 봐야 하겠지요? 그전에는 놋 거울로 봤는데 이제는 씻는 물로 자기를 봐야 될 것이다. 그러니까 외모를 단장하는 세상 허영들을 버리고 우리의 영혼을 씻는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서 자기 영혼을 봐야 될 것이다. 그것이 씻는 물두멍이 의미하는 바다 하니까 성경도 인용이 되고 또 성경에 있는 말이고 하니까 복음인 듯 하다. 사실이다. 외모를 단장하지 말고 마음을 단장하라 하니까 다 맞는 말이다. 또 하나님의 말씀은 물로 비유한 것이 많으니까 맞는 말 같다.
그러니까 이제는 외모를 단장하는 허영을 버리고 말씀으로 내 영혼의 거울로 내 마음을 비춰서 정결케 해야 하나님의 성소에 나가서 봉사할 수 있는 수준이 된 것이 아니냐? 이런 말이다. 그 말로 하면 여러분의 죄에도 다 걸린다. 왜냐하면 그런 일에는 관심이 대단하다. 가르치지 않아도 관심이 대단하다. 집안 청소 안한 여자도 어디 나갈 때는 다 화장하고 나간다. 그런데 성경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모른다. 그렇게 공격을 하면 뜨끔하기도 하고 아하 진짜구나. 깊도다. 이렇게 보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다.
이제 해석을 해 보면 알 것이다. 또 어떤 해석이 있냐면 이 물두멍은 보니까 크기가 없다. 가령 번제단 같으면 가로 세로 높이 얼마 또 향단 같은 것도 규격이 있고 또 증거궤도 크기가 있는데 이 물두멍은 보니까 크기가 없다. 그러면 스펼전은 어떻게 해석을 하냐면 은혜의 한량없음 이렇게 푼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날마다 스스로 짓거든. 얼마나 죄를 많이 짓던지 씻다 보면 물그릇에 물이 다 없어져 버릴 것 같다. 그러니까 이 물통은 끝이 없다. 누가 그러더라고요? 이 세상 사람들이 다 주십시오 하는데 그 전화 통화는 혼선도 안되고 다 듣고 줄려면 정신없지 않겠어요? 그런 말처럼 죄가 너무너무 많아서 씻으려면 한량이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끝없이 용서하신 은혜를 이 놋 제단 크기가 가르친다. 크기가 가르친다. 그러니까 이 셈에서는 얼마든지 씻을 수가 있다. 그렇게 하니까 그것도 굉장히 은혜스럽게 들리지요? 그런데 이 본문이 그런 것을 말한 것인가 했을 때 아니라 그 말이다.
또 한가지 이야기는 성소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우리에게 나타내는데 처음에 한 문이 있는데 오직 예수라 그런다. 그런데 에스겔 성전은 문이 네 개다. 새 하늘과 새 땅도 문이 네 개다. 사방으로 열렸거든. 그러면 오직 예수도 안 맞다. 그런데 모세 성전은 문이 하나다. 그러니까 문이 하나니까 예수한테 맞춘 것이다. 왜 이 문으로 안 들어오면 도둑이요 했으니까 나는 문이요 했으니까 오직 예수 한 문 이렇게 해서 한 문을 들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문이다. 쑥 들어가면 처음에 눈에 띤 것이 번제단에서 불타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그러니까 첫째 믿음의 문으로 들어가서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알고 그리고 붙들고 거기 까지가 일 단계다.
그 다음 성소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봉사하려면 일 단계 가지고 안된다. 매일 씻어야 된다. 왜냐하면 번제단 다음에가 물두멍이 잇거든요. 그리고 물두멍 다음에 성소가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순서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다. 그렇게 설명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본문이 그런 것을 말하는가? 아니다. 자기 교리로 해석을 해 놓은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성소가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한다고 해 가지고 그런 영해를 많이 한다. 그런데 그 영해가 전부 틀리면 틀린 줄을 알아 버리는데 우리 종교성에도 맞고 또 성경에 있는 말이기고 하고 하니까 은혜롭게 들리는 것이다. 그것이 제일로 하나님의 교회를 파괴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항상 은혜 되면 된다는 그 말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시는가? 거기가 초점을 두라 그 말이다.
이제 해석을 하겠다.
회막 문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로 물두멍을 만든 것은 물두멍의 특성과 성소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거울과 상관 관계가 있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놋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놋으로 만든 것이 놋 제단도 있다. 그런데 그것은 성소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의 놋으로 만들었더라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나중에 민수기를 보면 오히려 그 놋을 무엇으로 되어 있냐면 고라의 자손들도 놋 향로에다가 향을 들고 하나님 앞에 섰거든요. 그들을 하나님이 불살랐다. 그들도 놋 향로를 가지고 단을 쌓아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 번제단을 향로와 관계가 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물두멍을 만드는데 성전에 수종드는 거울로 만들었다. 다를 기구는 그렇게 안 만들었는데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분명히 관계가 있는 줄은 알겠지요? 그냥 관계가 없다 하면 안되고 관계가 있다.
성소의 여인들의 거울은 외모를 단장하는 허영이 아니라 정결함을 나타낸다. 이것을 우리들은 여자들이 거울 보는 것으로 막 해석을 하는데 성소에서 수종드는 여자들이 외모를 단장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거울 하니까 여자들이 치장하는 것 막 이렇게 보는 것인데 성소에서 수종드는 여인들은 마치 장자처럼 성소에 드려진 여인들이다. 그러면 성소는 한마디로 정결하고 거룩하다 한 것이 성경 개념이지 거기서 성소에 들어가서도 머리 단장한다는 말은 성경에는 없는 말이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거울이라는 표상을 갖다 써먹으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정결과 관계가 있는 문맥이지 허영과 관계가 있는 문맥은 아니다. 그러면 무엇일까요? 이것은 최고급 거울이 될 것이다. 옛날에는 구리 거울이다. 그것이 투명해야 얼굴을 잘 비춰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특성과 물로 씻는다는 의미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회막의 물두멍은 여인들의 거울로 만든 가장 투명한 놋 물두멍이며 그 속에 있는 물로 제사장을 씻어서 하나님의 성소와 제단을 봉사하도록 정결케 하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는 나라가 완성되어 온전히 거룩케 된 때에는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계4:6).
수정이 가장 아름답고 투명하다. 가장 아름답고 맑다 하면 수정 같다고 그런다. 우리 교인들이 보석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으니까 나만큼 모르겠지요? 여기 본문에 보니까 수정 같다 하는 말을 유리 같다 하는 말이지요? 수정 같은 유리 바다 본문이 본래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수정 같다 했을 때는 투명한 유리 같다 그 말이다. 그전에 놋도 이 만큼 투명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놋은 순결한 놋이어서 여인들의 거울로 활용했다. 그런 놋으로 물두멍을 만들었다 했을 때 씻는 물과 여인들의 거울로 썼다는 것과는 일종의 상관 관계가 있는데 완성된 것을 보니까 그 나라에는 수정 같은 유리 바닷가 있다. 그렇게 완전한 정결을 묘사하고 있는 방식이다. 그 보다 더 깨끗한 유리 바다는 없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을 허영을 닦아라 이런 이야기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오히려 이 물두멍에 씻는 특성 깨끗함 정결함 투명성 그것을 말하는 것이 놋으로 해석을 한다. 왜 뜰도 놋으로 만든다. 가장 투명한 놋은 무엇인가? 거울로 사용하는 놋이다. 그렇게 해서 씻는 물과 상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일부러 해석하지 말고 성경 자체를 읽어보면 될 것이다. 성소 안의 여인들의 허영은 없는 것이다. 성소 안에는 거룩하다 한것만 유일한 특성이다. 그러니까 일반 여인들이 거울 보고 단장한 것으로 하면 우리는 우리 나라 식으로 성경을 해석해 들어가는 것이다. 성경 자체로 해석한 것이 아니고 그런 식으로 해석을 하니까 목매어 죽인 것은 먹지 말라고 하면 개고기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 신자는 닭을 잡을 때도 이제는 비틀어서 안 잡고 칼로 잘라서 잡는다. 왜냐하면 목매어 죽인 것은 먹지 말라고 했거든요? 손으로 맨 것이나 노끈으로 맨 것이나 같으니까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닭을 잡는 방법을 연구한 것이다.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 배경을 빼버리고 해석을 하니까 그런 해석이 된다. 여기서는 온전한 정결함을 말하고 있다.
크기가 없는 것은 은혜의 한량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가 언약 체결을 내용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놋으면 만들어라 한 이야기가 출30장에는 없다. 38장에 성소를 세우는 문맥에서 있지 성소는 어떤 곳인가 하는데서는 없다. 가령 속전도 은으로 내라 한것도 성전을 세우는 문맥에 있지만 여기서 속전의 의미는 무엇 인가? 했을 때는 은이라는 말은 없다. 여기서 속전은 대리자로 낸다. 하나님 앞에 봉사하는 의미로 낸다. 그런 의미가 속전이 말하지 은으로 내라는 가치 판단을 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성소를 구체적으로 지었을 때 그 문맥에서 출애굽기 후반부에서는 은으로 내라 그런 말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놋으로 만들어라 그런 이야기만 있지 어떤 놋인가 하는 이야기는 성소를 짓는 문맥인 후반부에서 나오고 여기서는 안 나온다. 여기서는 성소가 어떤 재료로 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보다도 어떤 관계인가 언약 체결 관계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여인들의 거울로 만들어라 그런 이야기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고 물두멍의 크기에 대해서도 없다. 왜냐하면 물두멍의 의미만 밝히면 되지 그것이 얼마큼 큰가 하는 것은 여기서는 상관이 없다. 그래서 여기서 말안하고 있는 것이지 말한 것 보니까 한량없구나 그렇게 해석을 한다. 그런데 말을 안했으면 적다는 의미도 될 수 있지 크다는 의미가 될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그냥 지레 짐작으로 은혜가 한량없으니 그렇게 해석해 들어가면 안된다. 규모를 말 안했으면 지극히 작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클 수도 있는 것이고 그러니 이것을 미리 크다고 해석하는 것은 신학적인 선입관념이고 여기서는 크고 작고 하는 문제는 없고 단지 씻어라 그것만 여기서 하는 유일한 강조점이다. 왜 하나님께서 제사장으로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장자로 설수 있또록 속전을 받도록 했다. 그런데 그들의 봉사는 아직도 온전한 봉사는 아니고 씻어야 한다. 씻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소는 휘장으로 가려졌을 뿐만 아니라 씻어야 들어간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지 크기가 크니 작니 하는 것은 여기서는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어떤 관계로 자기 제사장을 성소에서 봉사하게 하시는가? 씻어서 정결케 해서 그렇게 하신다. 그 말만 강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문맥을 떠나서 해석을 하면 그런 묘한 해석이 되는 것이다.
크기가 없는 것은 은혜의 한량없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출애굽기가 언약 체결을 내용으로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속한 장자로서 구속되었다. 성소를 봉사하는 제사장 가문은 백성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성소와 제단에 나아가 여호와께 화제를 사르므로 여호와를 봉사한다. 그러나 회막에서 봉사하는 제사장 일찌라도 성소에 들어갈 때에나 제단에 나아가 화제를 드릴 때에는 물로 씻어 정결케 하여야 한다. 반복되는 씻음이 아니고는 그들도 죽게 될 것이다. 한 번 씻어서 끝난 것이 아니라 대대로 씻어라고 했다. 그러면 분명히 제사장이 위임될 때 목욕을 했다. 목욕하고 옷을 입었다. 그런데도 반복해서 씻어라. 어느 때 성소에 들어올때와 제단에 나갈 때 그러니까 한 번 목욕한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고 반복된 씻음으로 하나님을 봉사하도록 하고 있다. 만일에 씻지 않으면 부정하니까 죽을 것이다. 분명히 성소에 살고 있고 백성의 대리자로 봉사하고 정결한데도 또 하나님의 단이나 성소에 들어갈려면 씻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게 해서 아직도 그들이 부정하다는 관계를 나타내고 있다. 만일에 씻지 않으면 죽는다. 하는 것을 보니까 부정하다는데 강조가 있고 씻으면 정하다.
그런데 대대로 씻으라 했다. 그러면 성소에 들어갈 때는 아침과 저녁으로 들어간다. 출애굽기 문맥에서 향을 사를 때 또 아침과 저녁 번제를 드릴 때 그 때는 들어가야 한다. 제단에 나아가고 성소에 들어가는 것이다. 등불을 관리할 때 아침과 저녁에 번제를 사른다. 그러니까 아침과 저녁에 성소에 한 번씩은 나아가야 된다. 그 때마다 씻어라 매일 씻어라 그 말이다.
물두멍의 의미는 모세의 구약 경륜의 완성인 솔로몬 성전에서 나타난다. 솔로몬 성전에서는 물두멍 보다 훨씬 큰 놋 바다를 만들어 제사장을 씻게 하였고, 놋으로 물두멍 열을 만들어 번제물을 씻게하였다(대하4:6). 솔로몬 성전에서는 놋바다와 물두멍의 크기와 거기에 담을 수 있는 물의 양을 기록한다(왕상7:23,38). 그러면 솔로몬 성전에서는 크기를 기록해버렸으니까 은혜가 한량없는 것이 끝나 버린것인가? 아니다. 그러니까 아까 치수가 없다 하는 해석은 바른 해석은 아니다. 그러면 모세 성전이 완성된 것은 솔로몬 성소다. 그러면 거기 나타난 것을 보면 모세 제도의 의미가 밝혀 질 것이다. 거기보면 물두멍 보다 훨신 큰 놋 바다가 있다. 그리고 아까 계4장에도 수정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고 했다. 이 바다는 짠물 바다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한 자 언어를 가져다 쓰니까 그렇다. 이것은 말하자면 물 대야다. 큰 물 대야다. 그런데 수정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고 그랬다. 똑 같은 바다도 불이 섞인 바다는 홍해를 말한다. 왜냐하면 불이 섞인 유리 바다에서 구속받았다고 노래 부르고 있다. 그것은 홍해의 장면을 옮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하나님의 보좌에 수정같은 유리 바다가 있다 했을 때 이것은 성소에 있는 물두멍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마 한자로 쓰면 다를 것인데 한글로 쓰면 똑같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솔로몬 성전을 보니까 조그만 물두멍이 있는 것이 아니다. 큰 놋 바다가 있다. 그 놋 바다는 물두멍 보다 얼마나 크냐면 10배는 된다. 어떻게 되냐면 솔로몬을 보면 놋 제단과 성소 사이에 놋 바다가 있는데 그 직경이 15 규빗이다. 그러니까 반경은 7.5 규빗이다. 그리고 번제단 좌우로 물두멍이 있는데 바퀴가 네 개 달려서 이동식 물두멍이다. 그 작은 것은 물두멍이 그러고 큰 것을 놋 바다라고 한다. 그리고 이 놋 바다는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갈 때 씻는 용도로 쓰고 그리고 열 개의 물두멍은 번제물을 씻는데 쓴다. 이동식이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씻는 것이 굉장히 많다. 그러면 솔로몬 성전에는 죄가 많다는 것이겠는가? 그 말이 아니다. 거기 번제물이 무수히 많고 거기서 봉사하는 제사장이 무수히 많다. 솔로몬 성전은 은혜가 더 확대 된 것이지 죄가 많다는 문제는 아니다.
가령 목욕하는 손님이 적으면 목욕탕을 조그맣게 지으면 될 것이다. 손님이 많으면 목욕탕이 커야 할 것이다. 목욕탕이 많으면 이 동네는 때낀 사람이 많은가 그렇게 해석하면 안된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은혜가 확대된 의미다. 그러니까 여기 보니까 큰 크기를 말하는데 이제는 조그만 물두멍이 아니라 놋 바다를 두도록 되어 있다. 그것을 제사장을 씻는 용도로 하고 열 개의 물두멍은 번제물을 씻는 용도로 두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봉사하는 양이 많고 그러니까 씻어 정결케 하는 은혜도 풍성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어떻든 이 문맥에서는 씻어라 씻지 않으면 죽는다. 하는 것이 출애굽기의 문맥이다. 그러니까 백성을 대신해서 하나님 앞에 봉사하도록 속전이 다 내져 있고 그것을 제사장이 감당한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봉사하는 곳은 성소와 단에 나아감으로 봉사하는데 그들까지라도 반복적인 씻음이 아니고는 나갈 수 없고 씻지 않고 나가면 죽는다. 그러니까 이것은 두 가지를 나타내고 있다. 씻어 정결케 한다는 은혜와 동시에 여전히 반복되는 씻음이 아니면 죽으리라는 아직도 가리운 원수된 것 간격이 있는 것을 말한다.
단 사이에 물두멍을 둔 것은 성소에 나아가는 순서를 말한 것이 아니라, 성소와 단의 봉사를 위한 자리이다. 출애굽기 여기 보니까 왜 성소와 단 사이에 두었는가? 성소에 나갈 때도 씻고 단에 나갈 때도 씻게 하려고 그렇게 해서 성소와 단에 봉사의 자리로 중간을 말하고 있지 저 문으로부터 들어온 순서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문맥은 성소에 들어갈 때 씻고 단에 나갈때도 씻어라.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성소와 단 사이에 두어라. 그렇게 되어 있지 입구에서부터 출발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갈려면 문 번제단 씻고 그 다음 성소에 들어가는데 그러면 물러나면 어떻게 하게요? 씻고 단으로 물러나야 하는데 다른 말로 하면 씻고 앞으로 들어가야 될것인데 씻고 돌아서서 뒤로 돌아서서 봉사해야 된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순 자기가 꾸며낸 이야기지 성경에는 없는 이야기다.
이것은 성소와 단에 나아가는 봉사를 위해서 그 사이에 두고 나아갈 때마다 씻어라 하는 이야기지 앞으로 전진 그런 문맥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라 그 말이다. 그러니까 이 본문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문장 자체가 그런 것을 부정해 버리고 있는 것을 소위 은혜라는 신학적인 개념을 가지고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붙들고 날마다 눈물로 죄를 씻고 성령으로 씻고 그래야 성소에서 기도할 때 하나님이 받으실것이 아니냐? 어떻게 죄를 두고 하나님께 나갈수가 있겠느냐? 해서 한 번 번제단을 통과하면 그 만이다. 그 다음 반복된 씻음만 필요한것처럼 그것이 소위 선교 그룹들의 선교하는 그림이다.
기독론적으로 설명을 하지 않고 개인의 경험 발달로 성경을 설명해 버리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초보적인 은혜고 성령만 추후적인 은혜고 충만한 은혜다. 반복된 은혜고 예수 믿는 것은 천당 가는 다리일 뿐이고 한 번 건너와 버렸으니까 다시 돌아보지도 않을 것이다. 개인 발전으로 설명을 하면 그렇게 웃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도식을 가지고 성소에다가 맞추는 것이다. 문 번제단. 씻는 물 그 다음 성소 이 순서로 들어가야 된다고 말하는데 성경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 이 성경 본문에도 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러면 이것이 신약에서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로 오는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기 전에 행하신 일은 유월절의 만찬과 새 언약의 식사이다.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줄을 아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였다. 요한 복음에 있는 말이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언약 체결을 유월절 잔치와 연결시키는데 요13장에서는 언약 체결과 관계를 말하지 않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하는 문맥에서 말씀하고 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종의 모습을 하시고 제자들의 발을 닦으셨다. 그런데 베드로가 말하기를 나의 발을 씻깁니까? 나를 다 씻어 주십시오 하니까 이 믿는 자는 온 몸이 깨끗하다. 이미 목욕한 자와 같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자는 이미 목욕하여 온 몸이 깨끗한 자이며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다. 예수님께서 씻기시지 않으면 그들은 예수님과 상관이 없다. 아버지께로 가시는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씻어서 자기 앞에서 먹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가시면 제자들이 이 일의 의미를 알게된다. 그때에 제자들도 종의 모습으로 그들을 씻어 자기 상에 앉게 하신 하나님의 아들을 본 받아 서로의 발을 씻는 봉사를 하여 그들이 그리스도께 속한 자임을 세상에 증거하여야 한다(요13:).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죄의 권세로부터 자기 백성을 온전히 씻으시어 자기 상에 앉게 하셨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봉사로 서로를 섬기게 하셨다.
요한 복음이 성소와 관계가 있고 전부 제사장 언어라고 했다. 요한 복음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줄 알았다. 그리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는데 그 문맥은 무엇인가? 제자들을 자기 상에 앉게 하는 사랑이었다. 그리고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이처럼 제자들을 닦았다. 베드로가 하는 말이 왜 나를 닦으시냐고 그럴수 없다고 했다. 그 때 예수님이 네가 나에게 씻기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니까 그러면 목욕까지 시켜주라고 했는데 이미 목욕한 자는 깨끗해 졌으니까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는데 다는 깨끗한 것이 아니다. 가룟 유다는 아니라 그 말이다. 그는 깨끗한 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씻어 주셨다. 그리고 나서 식사 자리에 앉으셔서 내가 주와 스승이 되어서 너희들이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그렇게 해라. 그렇게 하면서 뒤에 내가 새 계명을 주노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처럼 서로 사랑해라. 그러면 모든 사람이 내 제자인줄 알리라. 베드로가 하는 말이 주님을 따르겟다고 이야기를 한다. 주님께서 네가 지금은 나를 따를수 없고 또 이해할수도 없다. 그런 문맥이다.
여기 요한 복음은 부활하신 뒤로 주님께서 반복해서 찾아오신 것이 요한 복음 구조다. 제자들이 모였을 때 반복해서 두 번 찾아온다. 그리고 디베랴 바닷가에서도 먹을 것을 놔두고 제자들을 부르셔서 먹게 하신 분이다. 그리고 요한 복음 처음부터 갈릴리 혼인 잔치에서 먹게 하신 분이셨다. 특별히 요한 복음은 성소 언어다. 예수님이 유월절 양으로 죽으심을 받으셨기 때문에 예수님 재판도 제사장한테 재판 받은 것이 반복된 것이 요한 복음이다. 다른 복음은 제사장 재판을 그렇게 반복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줄 알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는데 자기가 씻어서 자기 상에서 먹도록 하셨다. 식사 자리에서 일어나 씻었다. 그리고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네가 나한테 씻김을 받지 않으면 나와 상관이 없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그냥 내가 선생이 되어서 너희를 이렇게 사랑했으니까 너희들도 모이면 발닦아줘라 그런 말인가? 천주교는 지금도 매일은 닦지 않지만 닦아주고 있다. 이제 신문에 날 때 한 번 닦으고 몇 번식 한다. 만일에 천주교는 그런 가난한 자가 없으면 선전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세족 식이라 해서 그런 것이 있다. 그리고 요새는 성경에 있는 대로하자 해서 그렇게 한 교회도 있다. 자기 집에서 발도 안 씻고 왔는지 그런데 가 있다. 그러니까 이 구약 의미를 모르고 그렇게 하니까 그런 것이다. 구약에서 씻음의 의미는 성소의 씻음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씻는 것은 자기들을 제사장으로 해석하고 씻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실 줄을 아시고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는데 어떤 사랑인가? 먹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닦아 주셨다. 그렇게 하고 있다. 그것이 주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는 내용이다. 그러면 발좀 닦아 준 것 가지고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그러는가? 그러니까 구약 의미를 모르고 그것을 해석하면 해석할 방법이 없다.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실 줄 알고 닦아 주셨다. 그는 아버지께로 가면 더 좋은 것으로 제자들을 인도하실 것이다. 그가 있는 곳에 제자들이 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을 씻어서 자기 상에서 먹도록 하는 그런 축제를 벌이셨다. 그는 분명히 종의 형상으로 씻으셨는데도 씻으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가 씻으셔서 자기 상에 앉게 하신 분이 그가 부활하시면 제자들도 이 의미를 알게 된다.
이 주의 백성들 어떻게 우리를 씻으셔서 자기 상에 앉게 하셨는가? 그 사랑의 봉사로 서로 봉사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들이 내 제자 인줄 알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는 그냥 씻는 것이 아니라 그가 아버지께로 갈 줄을 알고 씻으셨다. 그러니까 실은 아버지께로 가셔서 더 좋은 처소로 제자들을 인도하시는 것이 그의 씻으시는 작업의 완성이다. 실은 그의 죽으심을 통해서 온전히 씻으신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살아 계셨을 때 씻어서 그들을 정결한 제사장으로 자기 상에 앉히신 것이다. 그런데 구약 때는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아론은 씻고 즉 백성의 대표자로 아론을 씻지 열두 제자를 씻고 그런 것은 없다. 항상 신약은 구약처럼 열둘 열둘의 제사장, 장자가 아니라 열둘을 씻고 있다. 그런데도 아직은 아니다. 그리고 씻김을 받은 이 사람들이 온전히 씻어진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심을 통해서 그들을 씻으셨을 때 그들이 온전히 씻김이 되었끼 때문에 이제는 하늘의 권세가 그에게 있어서 제자들을 빼앗을 세력도 없고 이제는 그의 사랑을 이해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으로 서로를 씻어서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신령한 제사장의 봉사를 감당할수 있또록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다. 이 일을 부활하신 주님 때문에 이 사랑의 씻음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이전에는 이 씻음의 의미를 모른다.
그래서 주님께서 가시기 전에 제자들을 사랑하신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주님이 신령한 성소가 되었고 제자들이 서로 권면해서 주의 이름으로 씻으면 그렇게 해서 주의 상에 앉으면 그것이 온전히 씻김을 받은 것이다. 만일에 죄가 있으면 신령한 교제로부터 제외된다. 그것이 참으로 주님을 봉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씻어서 정결케 하셨기 때문에 그렇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씻어서 자기 상에 앉히신 하나님으로 자기를 증거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의 죽으심에서 완성된 것이다. 그것이 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들은 예수 안에서 온전히 씻음을 입었다. 그런데도 요한 -서를 보면 죄를 고백하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그 죄의 고백은 구약 때는 씻어도 지성소까지 밖에 못 씻는다. 그런데 우리의 고백은 주님께서 우리의 속죄제물이 되셨고 속죄제가 되셨기 때문에 그의 씻으심은 우리를 온전하게 씻어서 빛 가운데서 나아가게 하신다. 성소 안으로 들어가게 하신다. 그것이 우리의 죄의 고백과 구약 백성의 죄의 고백과 다른 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씻음을 입어서 신령한 제사장이 된 것이다. 그의 죽으심이 이 일을 완결해 주셨다. 우리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그런 사람들은 아니지만 형제가 서로를 권면해서 그가 씻어서 정결케 한 것처럼 서로를 권면하고 수고해서 그들이 주의 상에 앉아서 먹고 마시는 신령한 제사장 적인 교제를 감당할 수 있도록 그렇게 수고하는 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들이 서로 사랑한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 세상이 너희들이 내 제자 인줄 알게 한다. 하는 말씀이다. 성도들은 그런 의미로 서로 권면해야 한다. 그런 의미로 우리 개인적인 영역이라는 것은 없는 것이다. 분명히 우리가 개인적인 삶이 있다. 가령 내가 날마다 소고기를 먹은들 내 식성이 그렇다는데 누가 관여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래도 만일에 가난한 자가 그렇게 했을 때 누가 형제여 말하면 내가 먹는데 왜 개인일을 상관하냐? 그렇게 하면 안될 것이다. 마땅히 서로 권면해서 형제가 장애 되지 않도록 도와야 된다. 그런 것이 서로 씻는 사랑의 수고다.
이것을 가지고 중생이냐? 날마다 회개냐? 이런 구원론적으로 설명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주님께서 씻어서 자기 상에 앉도록 하는 제사장으로 수고하셨다. 왜 그가 아버지께로 가시기 전에 씻어 주셨다. 왜 그가 가는 곳으로 제자들을 가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셨다. 이제 그가 있는 곳에 그이 백성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내가 너희들을 씻는 이유를 모를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후에는 안다. 그것이 요한 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바다. 개인적인 영역이 있으면서도 그것이 성경에 비춰진 성도의 삶인가? 하는 것은 서로 권면해 줘야 한다. 만일에 우리가 스스로 죄를 짓고 마음대로 살면 주의 상에 앉기에 합당치 못할 경우가 있다. 주님께서 죽으심을 통해서 이 일을 해 주셨다. 우리는 그런 기원적인 은혜는 없지만 성도를 권면하면 허다한 죄로부터 그들을 구원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서로 씻어서 상에 앉도록 해줘야 할 것이다. 그것은 주님께서 친히 종의 형상으로 수고한 것인데 죽음을 통해서 완성하셨는데 그런 겸손의 수고를 통해서 감당하는 것이다.
제사장을 하나님 앞에 향을 사르는 거룩한 직무에로 부르셨는데 제사장의 복의 특성은 백성을 대표한 것이며 여전히 반복된 씻음을 통해서 그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 문제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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