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장이 봉사하는 단 [출29장38절 ]
2006. 7. 17. 00:21ㆍ목양자료/3.강해설교
29:38-30:10 제사장이 봉사하는 단
29:38-46 단 위에 드릴 것
7일 동안 단을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면 단은 지극히 거룩하게 되어, 단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이 거룩한 단은 하나님께 매일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는 곳이며, 하나님은 거기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단에서 자기 백성의 향내나는 예물을 받으시고, 거기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영광 때문에 회막은 거룩하다.
매일 드리는 제사는 어린양으로 드리는 번제인데, 아침과 저녁에 드린다. 번제와 함께 소제와 전제를 드린다. 이것은 여호와께 가나안의 극상품 음식을 드려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회막과 단과 아론과 그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여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회막과 단과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물의 피와 관유로 거룩하게 하셨다. 생명의 하나님께서 회막 중에 거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복주신 생명의 풍성함을 단에서 함께 나누시며,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피와 관유와 향내나는 예물은 다 생명의 교제요, 생명의 새로움과 풍성함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성소의 거룩한 교제로 함께 거하시려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이 은혜의 일을 부활하신 주의 상에 교회를 앉게 하시고 주님의 피와 살로 기르심으로 완성하셨다. 신약 성도의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관계의 삶이다.
30:1-10 분향할 단
분향할 단은 조각목으로 가로 세로 각각 일 규빗, 높이 이규빗의 반듯한 모양으로 만들고, 뿔을 만들고, 고리 둘씩을 양편에 만들고, 메는 체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단의 땅에 닿는 부분을 제외하고 이 모든 것 전부를 정금으로 싼다.
단을 두는 장소는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 장 밖이다.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는 곳이다. 향단이 놓인 장소는 외소이지만 왕상 6:22과 히9:2-4에서는 향단을 지성소에 있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향단은 장밖에 두어도 그것의 위치는 속죄소와 증거궤와 연결하여 말한다. 향단은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의 휘장 밖이다. 향단은 여호와의 보좌 앞이다(계8:4).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는 장소이다(24:18). 향단에서 아론을 만나신다.
아론은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른다. 향을 사르는 때는 아침마다 등불을 정리할 때와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이다. 이 향은 여호와 앞에 대대로 끊지 못한다. 향을 사르는 사람은 아론이며, 향을 사르는 때는 등불을 정리할 때와 켤 때이다. 시141:2에서는 기도가 향을 사르는 것과 제사와 유비된다. 계시록에서는 금대접의 향을 성도의 기도라고 말한다(5:8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라; 8:3-4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아론이 일년 일차씩 지성소에 들어갈 때 향단의 향연으로 보좌를 가리워야 죽음을 면한다(레16:13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향단에는 다른 향을 사르지 못하며, 번제나 소제나 전제를 드리지 못한다. 이 향단은 지성소에 속하며, 다른 제단은 뜰에 속하기 때문이다.
아론이 일년 일차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년 일차씩 대대로 속죄하여야 한다. 향단의 속죄는 속죄소를 속하는 대 속죄일에 아론이 행한다. 속죄소에서 모세를 만나시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대제사장인 아론을 향단에서 만난다. 이 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다. 향단은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론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아직은 나아갈 수 없었으나, 휘장 밖 여호와의 보좌 맞은 편에서 등불을 켜고 향단에 향을 사름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일년 일차씩 지성소가 속죄될 때 지성소가 잠깐 열렸고 아론은 향단의 향연으로 가리우고 여호와 앞에 나아갔다. 이것이 구약 경륜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요 소망이었다.
이 은혜의 일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사 하늘 성소에 나아가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롭고 영원한 산 길이 열렸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가심으로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가 응답하시는 생명의 관계가 열렸다.
29:38-30:10 제사장이 봉사하는 단
29:38-46 단 위에 드릴 것
7일 동안 단을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면 단은 지극히 거룩하게 되어, 단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이 거룩한 단은 하나님께 매일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는 곳이며, 하나님은 거기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단에서 자기 백성의 향내나는 예물을 받으시고, 거기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영광 때문에 회막은 거룩하다.
(출29:37) 네가 칠일 동안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라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리니 무릇 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이 단에다가 드릴 것은 무엇이냐? 그 문제를 38절 이하에서 쭉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방금 읽은 문단은 38절 이하를 전체적으로 요약한 것이다. 항상 어떤 문단을 보면 처음과 마지막이 중요한데 38절에서는 네가 단위 드릴 것은 이렇게 되어 있고 그리고 42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내게 말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너를 만나기 때문에 회막은 거룩하게 될지니라. 43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누구를 통해서 만나는가? 44절에 보니까 아론의 봉사를 통해서 만난다. 그리고 45-46절에 보면 그 관계를 세우려고 너희를 애굽에서 불렀느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뒤에 있는 결론을 앞으로 돌려서 설명을 했다.
단을 칠일 동안 피와 관유로 깨끗하게 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는데 이 단을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단에 접촉한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그러면 이 단을 무슨 용도로 쓰이는가? 단에다가는 매일 아침저녘으로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번제를 지내야 된다. 그런데 그 번제와 함께 전제와 소제를 드린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 단에서 자기 백성의 봉사를 기뻐받으시고 하나님께서 거기 나타나셔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회막은 거룩하다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단에다 드린 것은 무엇인가?
매일 드리는 제사는 어린양으로 드리는 번제인데, 아침과 저녁에 드린다. 번제와 함께 소제와 전제를 드린다. 이것은 여호와께 가나안의 극상품 음식을 드려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레위기를 보면 번제가 더 자세히 설명이 되겠지만 이 단을 지극히 거룩한 단인데 여기다 할 일은 매일 번제를 드리는데 아침과 저녁에 드린다. 하나님은 그러면 두 끼만 잡수시는가? 이스라엘 백성도 두 끼만 먹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두 끼만 먹으면 딱 맞는 말이고 그런데 나는 이스라엘 문화를 잘 모른다. 몰라도 하는 방법은 있다. 어떻든 아침과 저녁에 드리면 하루 종일 양식이다. 왜 아침과 저녁이 모든 날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음식을 몇 끼 잡수시는가는 모르겠는데 여기 보면 하여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양식을 드린다 그런 말이 될 것이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에 가서 두끼 먹는 줄을 알면 아하 그럼 문화적인 배경에서 썼구나 더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몇끼를 먹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아침과 저녁 그러면 날을 대표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전날에 대한 양식 그런 개념으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번제를 드리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화제가 된다. 어떻게 화제가 되는가? 불로 태워 드리는데 화제가 된다. 향내가 난다 . 레위기를 보면 향내가 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고 향내 안 나는 제사는 속죄가 중심이다. 향내나는 제사는 번제와 그리고 소제와 화목제가 향내나는 제사고 향내 안 나는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다. 그러니까 이것은 감사제의 성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로 태워 드리면 하나님 앞에 향내가 되는 것이다. 구약은 항상 물로 정결케 하고 불로 정결케 하면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완전한 정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단의 불로 태워 드리는 것이 마지막 정결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번제는 레위기를 보면 전체를 다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번제와 함께 소제와 전제를 드린다. 소제는 밀가루 음식이고 전제는 포도주다.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살이요 피라 그랬다. 그런데 가나안 땅의 양식은 떡과 포도주다. 그래서 그것을 함께 드린다.
그러니까 여기 보면 특별히 레위기에 보면 잘 나오겠지만 하나님의 단에 드린 것은 일상 양식하고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반 양식도 가나안 땅의 것이라고 몽땅 다 먹는 것이 아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이 먹으라고 한 것만 먹어야 한다. 아직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으면 그는 부정한 자다. 진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먹을수 있는것도 스스로 죽어 버리면 먹으면 안된다. 그것을 이방인에게는 팔아도 됐지만 자기가 먹으면 그는 죽음에 첩촉된 자가 되기 때문에 부정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단에 드린 것은 그 중에서도 또 다르다.
밀가루 음식을 드리면 자기 집에서는 그냥 마음대로 먹어도 하나님 앞에 드릴 때는 완전히 밀가루 기름 반죽 기름 요리 그 위에다가 기름을 한 번 더 바르고 그렇게 해서 드리니까 기름이 자르르 흐른 것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최고의 식품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단에 드리는 것도 피를 뿌리고 거기다 기름을 드리고 나머지 고기는 제사장은 먹어도 하나님의 단에는 주로 기름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번제는 보니까 임자도 먹을 것이 없이 몽땅 태워드리는 것이다. 전체를 다 드린다는 것이 번제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온전한 감사 제물이고 완전한 식탁이다. 여기는 보니까 채소는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건강법으로 해석을 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모세 언어로 해석을 해야 되지 건강법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 앞에 아주 가나안 땅의 극상품 음식을 드려서 기쁘게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회막과 단과 아론과 그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여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회막과 단과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물의 피와 관유로 거룩하게 하셨다. 생명의 하나님께서 회막 중에 거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복 주신 생명의 풍성함을 단에서 함께 나누시며,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피와 관유와 향내나는 예물은 다 생명의 교제요, 생명의 새로움과 풍성함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성소의 거룩한 교제로 함께 거하시려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그러면 여기다가 단도 거룩하게 하고 제사장도 거룩하게 하고 그리고 그 거룩한 제사장으로 거룩한 단에다가 하나님 앞에 음식을 차려 드리도록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거룩하게 되었는가? 피와 관유로 거룩하게 했다. 피와 관유로 거룩하게 한 그 제단에다가 극상품 식품을 차려 놓고 하나님 앞에 드린다. 나중에 다른 화목 제물을 거기서 장자인 아론에게 한 다리 쭉 떼어 주는 것이다. 가슴도 뛰어준다. 그전에 여러분이 아버지의 상에서 먹으면 큰 아들한테는 특식을 주는식이다. 옛날에는 아들한테 그랫다. 아들만 아버지하고 겸상이고 어머니와 딸들을 저 옆에서 먹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젖가락 들기 전에 못들고 아버지가 한 다리 떼어주면 감지덕지 하는 것이다. 요새는 아이들이 먼저 떼어 먹어 버린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해하면 여러분이 이해를 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화목 제물은 특별히 위임식 너는 나의 제사장이라 너는 내 앞에서 봉사해라 했을 때 가슴과 오른 쪽 다리를 준다. 오른 쪽 다리 준 것은 다리를 다 준의미와 같다. 대표기관을 주기 때문에 다 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것이 장자로서 하나님의 상에 앉은 아론의 몫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번제는 하나님 앞에 전체를 드리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완전히 태워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보니까 완전한 피와 관유로 함께 뿌려졌기 때문에 한 피와 한 관유로 연결 됐을 뿐만 아니라 거기 극상품 식품이 차려졌기 때문에 완전한 생명의 교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식사만 하는것인가? 우리 나라로 하면 밥상머리 교육인데 알기 쉽게 내가 거기서 너를 만나겠다. 시내 산에서 실은 만나신 하나님이시다. 처음에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났을 때는 밥도 없고 모세도 40일을 굶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소에 계시면서는 피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고 단도 거룩하게 하고 어느 정도 거룩하게 하는가? 접촉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는 거룩이다. 그러니까 실은 거기 하나님이 완전히 임했다는 말이다. 하나님만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만지시면 문둥병이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두 해 된 혈루증 병자도 예수의 옷만 만져도 그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런 완전한 거룩으로 내가 거기 임하겠다. 그러면 그 자리는 아침과 저녁으로 내게 상을 차려라. 그러면 거기서 내가 기뻐 먹고 마시고 내가 거기서 너를 만나 이야기를 하겠다. 그러니까 시내 산에서 함께 계신 것보다 더 탁월하게 함께 계신다. 내가 너를 그렇게 하려고 애굽에서 불러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불러냈다. 이렇게 거룩한 생명의 거처에서 완전한 생명의 교제를 나눌려고 내가 불러 냈느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고 너는 내 백성이니라.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성소라 그 말이다.
그래서 내가 거기서 만나는 거룩 때문에 회막이 거룩하다. 만일에 하나님의 거처가 아니면 회막은 거룩한 것이 아니다. 이제 제사장이 아침과 저녁으로 드리는 것이 그렇게 거룩하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회막의 의미고 내가 너희를 내 거처로 만들려고 너희를 애굽에서 불렀노라 그것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생명의 언약이다.
이 은혜의 일을 부활하신 주의 상에 교회를 앉게 하시고 주님의 피와 살로 기르심으로 완성하셨다. 신약성도의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관계의 삶이다.
그런데 구약의 단이 아무리 거룩해도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해도 그것은 모세 제도의 거룩밖에 안된다. 그것은 사람이 만든 장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밖에 안된다. 그러나 이 은혜의 일을 우리가 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 중에 거하시려고 오셨다. 특별히 마태복음이 임마누엘 사상이 강하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문둥병도 그가 만지시면 정결하게 되고 혈루증 든 여인도 그의 옷자락을 만지면 정결하게 된다. 구약 같으면 그렇게 안되는데 정결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중에 함께 거하시는데 그냥 하나님이 번제단에서 대표를 통해서 제단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열두 제자들을 그의 상에다 앉히시고 그렇게 교제하셨다. 그 열둘로 출생된 교회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계셔서 우리한테 극상품 식품을 주셨다. 이것이 내 살이요 내 피니라. 이제 신약에서는 주님 앞에 모일 때마다 그것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잘못하면 천주교 제사가 되니까 좀 오해가 되지만 그것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백성이 드린 것으로 하나님은 이것이 내 살이요 피라고 주시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는 제대로 하면 음식이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 때는 성찬 비용이 굉장이 많이 책정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자들은 더 많이 가져와고 가져와서 함께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전부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살이요 피라고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것이 애찬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 식사로서 구별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형제와 함께 주의 몸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한 식사를 할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주의 교회는 단을 모세의 방식으로 거룩하게 한 정도가 아니라 참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오셨고 그리고 그가 자기 몸의 몸의 죽음에서 죄를 온전히 정결케 하셔서 이제 예수님께 연합된 백성이 다 거룩한 백성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다 거룩하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것이 요한 복음에서 주님께서 보리 떡 둘을 주시면서 하셨던 말씀인데 그런 관계로 신약 교회에 함께 계신다.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그 일을 하셨다. 그것이 신약의 교회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소는 단이 핵심이다. 그래서 회막과 단을 거룩하게 했다고 한다. 단이 핵심이고 그 단에 나가서 봉사한 사람은 제사장 아론이다. 지극히 거룩하다. 거기다가 아주 아침과 저녁으로 최고의 식품을 차려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거기서 자기 백성의 봉사를 향기로 맡으시고 그리고 거기서 아론을 만나셔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는 굶고 만났지 아론처럼 이렇게 식사 자리에서 만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만나는 것은 금식이 만나는 방식이었다. 대속죄일에 금식이 중심이다. 모세도 굶고 만났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자기 제자들은 식사에 초대하시고 또 죄인들을 자기 식탁에 앉게 하시고 그렇게 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 잔치였다. 그리고 식사 중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 교회가 그 식탁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것이 교회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성찬적인 의미가 되어야 되고 그리고 여러분은 그런 것으로 형제를 공급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냥 예배당 와서 먹을 때만 거룩하다. 눈을 지긋이 감고 찡하고 나가서는 속옷 차림으로 마음대로 먹고 이런 식으로 먹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 몸을 주셔서 이 생명의 식탁을 차려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부활 자이기 때문에 내 살고 피를 먹고 마셔라. 구약에는 이런 극상품을 대접한 적이 없다. 피와 기름은 하나님의 몫이고 단지 가슴과 든 뒷다리만 줬는데 이제는 그이 모든 백성에게 내 살이요 내 피니라. 그렇게 주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개혁 교회는 아이들은 저리 가거라. 어른들만 먹고 아이들은 저리 가고 밥흘리면 안되니까 해서 천주교는 포도주는 안 준다. 입에서 피를 흘리면 큰 죄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비싼 것이다. 로마에서 온 것이어서 자기만 홀짝홀짝 마시고 안 준다. 그런데 옛날 양반도 그렇게 안했는데 그런식이 되었따. 옛날 양반도 아버지 앞에서 무릎꿇고 먹으면서 배운 것이다. 아버지의 상에 앉는 것이 최고의 특권이다. 큰 아들만 앉고 딸들은 다른 상이다. 그것이 제사장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그런데 그런 정도 누리는 특권이 아니다. 모세 장막으로 부르신 지극히 거룩이 아니라 하늘 성소에 부르신 지극히 거룩함으로 그가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하시고 자기 자신을 주신다. 그것이 여러분이 먹고 마시는 삶이다. 그러니까 성찬이 식사 적인 의미다.
그 다음 다른 단이 있는데 제사장이 봉사할 단이다. 이 향단 까지가 한 문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30장1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7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2절을 봐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런 말로 문단이 시작되는데 그 앞에는 그런 말이 없다. 하늘에서 본 식양대로 지을 지니라 그런 말을 하다가 제사장에 대해서 쭉 나오고 그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런 새로 시작된 구분이 없다. 그러니까 30:1-10절까지가 지금 까지 공부했던 제사장의 규례에 마지막 단락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단에다가 드리는 봉사와 향단에 드리는 봉사는 일맥상통한 것이다 그런 말이다. 같은 범위에 속한다.
30:1-10 분향할 단
분향할 단은 조각목으로 가로 세로 각각 일 규빗, 높이 이규빗의 반듯한 모양으로 만들고, 뿔을 만들고, 고리 둘씩을 양편에 만들고, 메는 체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단의 땅에 닿는 부분을 제외하고 이 모든 것 전부를 정금으로 싼다. 조각목으로 전부 만들고 정금으로 싸는데 바닥에 닿는 부분만 안 싼다.
단을 두는 장소는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 장 밖이다.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일부러 쓰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표현법을 잘 유의해야 한다. 여기 보니까 단을 두는 장소는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 장 밖이다. 속죄소 맞은편이고 증거궤 맞은편이다 그런 말이다. 그런데 항상 속죄소는 증거궤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 그런데 장 밖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이다 그런 말이다. 그런데 장밖에 있다 그런 말이다.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는 곳이다. 6절에 보면 그 속죄소는 내가 너를 만날 곳이며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는 곳이다. 향단이 놓인 장소는 외소이지만 왕상 6:22과 히9:2-4에서는 향단을 지성소에 있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향단은 장밖에 두어도 그것의 위치는 속죄소와 증거궤와 연결하여 말한다. 향단은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의 휘장 밖이다. 향단은 여호와의 보좌 앞이다(계8:4).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는 장소이다(24:18). 향단에서 아론을 만나신다.
무슨 말이냐면 이 향단을 두는 장소를 보면 증거궤 위에다가 속죄소를 두는데 속죄소 맞은편에 두어라. 또 한 번 반복하기를 증거궤 앞 장 밖에다가 두어라. 그렇게 해서 속죄소와 증거궤를 중심 해서 그 앞에 두는데 휘장밖에 두어라 그것이 향단을 두는 위치를 말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속죄소에서 모세를 너를 만날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왕상이나 히브리서를 보면 성소에 있는 물품들을 쭉 말하면서 이 향단 향로가 있으면 향단이다. 보좌와 함께 막 언급을 한다. 휘장밖에 있는 떡상과 등대와 함께 언급하지 않고 휘장 안에 있는 물품으로 막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는 휘장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계시록 8장을 보면 향단이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는 장소고 이제 향단은 아론을 만난다. 이것이 구약에서 자기 백성과 언약 체결 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출24-25장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야 너는 가까이 나와라. 그리고 아론과 70인 장로는 저 만큼 떨어져 있어라. 그리고 백성들은 저 산밑에 있어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던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지성소는 모세를 만나는 곳으로 이야기를 한다. 향단에서 봉사한 사람은 아론이다. 그러면 여러분이 출24장을 보면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셔서 70인 장로들을 자기 발 밑에서 먹고 마시게 했을 때 후에 모세와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갔는데 6일 동안 하늘이 맹렬한 불이 타고 연기가 자욱했다. 그리고 제 7일 안식일에 하나님이 모세를 불렀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구름 속으로 들어갔고 그 구름을 산밑에서 보는 백성들의 눈에는 맹렬한 불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모세만 홀로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또 그런 의미로 모세는 나를 친히 대면했느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모세으 위치다.
그리고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의 위치는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로 되어 있고 그리고 언약의 대표자인 아론은 그 밖에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성소에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으로 오신 아들이다. 그리고 그가 친히 아론을 사이에 둔 것이 아니라 그가 친히 대표자가 되어서 자기 백성과 언약 체결을 하셨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보았고 그 말씀을 친히 들으신 분이다. 아버지께로서 오신 분이다. 그렇게 신구약이 서로 상관되면서도 대비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씀하시기를 속죄소 그리고 언약궤 그 앞부분 정면에다가 향단을 두는데 휘장으로 가리우고 휘장 밖에다 두어라. 그러면 속죄소는 어느 곳이냐? 내가 모세를 너를 만나는 곳이다. 향단에서 아론은 이렇게 이렇게 봉사해라. 그러니까 향단은 아론을 만나는 곳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구약의 하나님 앞에 교제는 아론이 거룩한 자로 지극히 거룩한 곳에 들어가 봉사를 하는데도 여전히 하나님과 아론 사이에는 휘장이 가리워져 있고 아직도 간격이 있다. 그런데도 휘장으로 가리고 계신 분께서 가리고 캄캄한 곳에 계시면 큰 사망인데 휘장으로 가리기는 가리웠는데도 향단에서 아론을 만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향단은 휘장밖에 있으면서도 휘장 안에 있는 의미다. 그것이 향단의 봉사다.
아론은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른다. 향을 사르는 때는 아침마다 등불을 정리할 때와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이다. 이 향은 여호와 앞에 대대로 끊지 못한다. 향을 사르는 사람은 아론이며, 향을 사르는 때는 등불을 정리할 때와 켤 때이다. 시141:2에서는 기도가 향을 사르는 것과 제사와 유비 된다. 가령 내 기도가 하나님 앞에 제물 드리는 거처럼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가 있다. 계시록에서는 금대접의 향을 성도의 기도라고 말한다. (5:8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라; 그렇게 막 직접적인 유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8:3-4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여기 보니까 보좌 앞 금단에 드린다고 했다. 그런데 이 향은 제단이니까 번제단에서 모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금향로를 받아서 어디로 가냐?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한다. 이 금단은 보좌 앞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말이다. 그런데 분명히 보좌 앞은 앞인데 휘장으로 가리운 앞이다. 장밖에 두어라 했는데 계시록에서는 휘장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그것이 말하자면 먼저 간 성도들의 예배를 구약 방식으로 그렇게 묘사해 주고 있다. 아론이 일년 일차씩 지성소에 들어갈 때 향단의 향연으로 보좌를 가리워야 죽음을 면한다. (레16:13은 대속제일의 제사 법인데 거기보면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이렇게 향을 피우고 나서 피를 일곱 번 뿌리는 것이다. 향단에는 다른 향을 사르지 못하며, 번제나 소제나 전제를 드리지 못한다. 이 향단은 지성소에 속하며, 다른 제단은 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향단의 거룩은 다른 단의 거룩과 다르다. 번제단이 지극히 거룩한 단인데도 이 향단과는 또 다르다. 번제단에서는 제물을 하나님 앞에 불태워 드리고 다른 모든 제사가 드려지고 다른 향도 살라진다. 가령 하나님 앞에 소제 드릴 때 향도 드리면 한 주먹을 사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향은 이 향단에 살라서는 안된다. 다른 말로 하면 번제단에서 드린 것은 이 단에서는 드리지 말라 그 말이다. 왜냐하면 번제단은 뜰에 있는 것이고 향단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전히 휘장 밖은 밖인데도 보니까 뜰에 있는 것과 향단은 구별시키고 있다. 그렇게 향단은 걸룩하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아론이 일년 일차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년 일차씩 대대로 속죄하여야 한다. 향단의 속죄는 속죄소를 속하는 대 속죄일에 아론이 행한다. 속죄소에서 모세를 만나시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대제사장인 아론을 향단에서 만난다. 이 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다. 향단은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론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아직은 나아갈 수 없었으나, 휘장 밖 여호와의 보좌 맞은 편에서 등불을 켜고 향단에 향을 사름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일년 일차씩 지성소가 속죄될 때 지성소가 잠깐 열렸고 아론은 향단의 향연으로 가리우고 여호와 앞에 나아갔다. 이것이 구약 경륜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요 소망이었다.
다른 단보 지극히 거룩하고 하나님의 식탁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대제사장만 먹는 식탁이 있다. 그것은 소위 성소다. 구별해서 부르면 외소다. 성소가 두 구분으로 되어 있다. 안쪽이 지성소밖에는 성소 함께 말하면 성소로서 거룩하다 말하는데 둘로 나누면 그렇고 그 밖은 뜰이다. 그러니까 뜰에는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단이 있어서 거기서 하나님이 백성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얼마나 거룩한 성소인가? 시내 산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의 교제로 거기 오셨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 최고의 식품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자기 제사장과 임자들에게 한 몫씩 떼어 줘서 먹게 하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먹는 것도 거룩한 생명의 교제인데 그것은 극상품 식품은 아니다. 하나님의 뜰에서 먹는 것은 진짜 거룩한 교제다. 그런데 이 거룩한 양식은 보통 하루 양식이고 자원해서 드린 것은 이틀치 먹고 나머지는 하루 양식밖에 안되었다. 특별히 장자를 자기 앞에 두고 먹는 곳이 있는데 그것이 성소의 외소다. 거기는 금떡상이 있고 안식일에는 열두 덩어리 떡을 진설하면 다음 안식일에 아론의 몫이다. 그것은 지극히 거룩한 떡이다. 완전한 생명의 교제가 있다. 그런데 거기는 등불을 켜야 되는데 이 등불은 저녁 때 켜고 아침에 심지를 정리하면서 불을 커야 되겠지요? 그러면 낮에는 태양 빛이 들어올 것이다. 물론 천막이 쳐져 있으니까 지붕으로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등불을 켤 때 또 정리할 때 향을 살라야 된다. 그러니까 향 사른 것은 등불과 연결이 되어 있다. 위치로 보면 내소에 있는 보좌와 즉 증거궤와 속죄소와 관계되어 있다. 그 정면에 두는데 휘장밖에 두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시간으로 봐서는 등불과 관계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캄캄한 가운데 계시는데 캄캄한 중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저주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서 만나시면 그 빛도 죽이는 빛이 아니라 그 빛 가운데서 아론이 떡상을 진설하고 먹는다. 생명이 빛 가운데서 나타나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교제다. 바로 이런 구약 언어로 하나님은 빛이요 생명이라 그렇게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구약 언어를 가져다가 쓰는 것이다.
만일에 그 빛이 없으면 캄캄한 중에서 밥 먹을 수 없고 만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캄캄한 중에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셨고 시내 산에서는 빽빽한 구름으로 가리우고 계셨는데 그것은 죄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휘장 밖에다가 일곱 등불을 켜게 하시고 그리고 그 앞에 떡상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드리고 먹게 하시고 그리고 그 불을 켜고 정리 할 때마다 향을 사르도록 했다. 그런데 이 향은 어디냐? 실은 하나님 보좌 앞이다. 그러니까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일곱 촛대 가운데서 자기 백성의 빛으로 생명으로 거기서 만나시고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시는데 실은 향단에서 아론을 만나시는 것이다. 그것이 이 향을 사르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향단을 일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속죄해야 한다. 대속죄일은 지성소를 속죄하는 날이다. 다른 때는 이런 저런 피로 번제단을 속하게 해도 하나님의 보좌 법궤와 속죄소는 매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한 번씩 하는 것이다. 아침과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면 아침과 저녁으로 단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죄소는 일년에 한 번씩 한다. 만일에 속죄소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속죄소에서는 모세를 만났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소는 하나님의 거처가 안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일년에 한 번씩 피로 속죄하면 된다. 그 때는 레16장에 보면 대제사장도 영화로운 옷을 입지 않고 세마포 옷을 입고 들어가서 하는 것이다. 그 때는 모든 백성이 다 굶어야 된다. 굶는다 그 말은 아직 완전한 생명을 안 주었다는 말이다. 다 굶어야 된다. 그렇게 하면 성소가 거룩하게 되어서 일년 동안 하나님의 거처가 되고 또 모든 제사가 드려지는데 그 때 향단도 속죄를 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향단을 속죄소의 속죄하고 연결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향단은 휘장밖에 있어도 의미적으로는 휘장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속죄일에 속죄로 속죄를 해라. 그러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어서 내가 거기서 너를 만나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성소 중에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나와서 비추셨다는 의미로는 등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드린다는 의미로는 향단이다. 향단에서 하나님께서 아론을 만나신다. 아침과 저녁으로 등불을 켜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무엇으로 묘사하냐면 기도와 연결시켜서 말하고 있다. 본래 성소는 기도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교제니까 그렇다. 항상 교제는 대면해서 말씀하시고 식탁에서 교제하시고 그런 것이 구약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다. 하나님께서 대면해서 말씀하시면 그것이 완전한 교제다.
모세하고 가장 가까이 대면해서 말씀하실 때 내가 모세하고는 얼굴을 대면하고 말했지만 내가 어느 선지자하고 그렇게 한 적이 있냐? 모세는 다르다. 대면해서 말씀했다고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기도와 연결시켜서 하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 성전도 처음 지었을 때 솔로몬이 봉헌사에서 하는 말이 만일에 백성이 범죄하고 멀리서 이 전을 향하여 자복하고 기도하면 먼 이방인들도 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그런 식으로 소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한 것처럼 기도의 처소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도는 예배당 와서 기도하고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과 교제의 의미로 기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도가 어디서 완벽하게 열렸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이전에는 내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내가 시행하리라.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그렇게 하리라. 그렇게 말했지만 구약 때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러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가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시행하는 자다.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그 말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 말을 뒤에 붙이자 그런 말이 아니다. 내 이름으로 예수님한테 기도하라 그 말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이유다. 그러니까 완전한 교제가 열린 것이다.
그전에는 그렇게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내 이름으로 기도해라.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너희들로 열매를 맺게 하리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이 가장 친밀한 친교를 열으신 것이다. 여러분보고 기도가 제일 중요하다는 예배 의식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러면 어떤 사람은 찬양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교제 문제로 했을 때 기도를 그렇게 배정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얼굴을 대면해서 말하고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번제단에 임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단이 지극히 거룩하고 그래서 거룩하게 임하게 되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번제단은 휘장밖에 뜰에 있는 것인데 이제는 성소 안에 둔 단이 있다. 그 단은 대제사장이 아침과 저녁으로 향을 사름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고 그는 그런 관계로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에 지성소에 들어설 때도 먼저 향을 살라서 그 향연이 자욱해서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고 여호와의 보좌를 가리우게 하고 그렇게 하면 네가 죽음을 면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가리우고 있다. 그래도 그 향을 가지고 먼저 들어오고 그리고 나서 피를 가지고 들어와서 뿌리는 것이다. 그것이 대속죄일에 지성소를 속죄하는 방식이다. 즉 성소의 내소를 속죄하는 방식이다.
이 은혜의 일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사 하늘 성소에 나아가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롭고 영원한 산 길을 열으셨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가심으로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가 응답하시는 생명의 관계가 열렸다. 우리 중에 함께 계셨던 분 제자들의 음성을 듣고 배고프고 풍랑중에 휩쓸리고 그러면 모든 위기중에 함께 햇던 그분 그분이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들이 내게 기도해라. 내가 시행하리라. 그는 땅에서도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셨던 분이시다. 그런데 제자들이 자기 선생에게 말했던것이지 그를 하나님으로 알고 구하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기도해라. 내가 너희로 열매맺게 하기 위해서 가노라. 그것이 더 좋은 처소로 옮기는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제 하늘의 영원한 산 길이 열렸고 휘장 밖에서 향단에 향을 사름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다. 아침과 저녁이 아니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앞에 항상 있고 우리는 항상 주님께 말씀하고 우리는 주님께 말씀을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영원한 생명의 관계를 열으셨다.
구약을 보면 이렇게 탁월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고 있는데 기독론적인으로 풀면 이렇게 탁월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교회가 이런 것을 예배당 의식용으로 쓰고 인간 행위로 풀고 그렇게 되어 있다. 기도하는 사람이 제일 보좌 가까이 있으니까 기도 제일로 많이 하라고 하면서 종교 의식으로 바꿔 버렸는데 이것을 그런 말이 아니다. 그런 관계를 새롭게 했다 그 말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도하셔야 한다. 항상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나는 너에게 속했고 너는 나에게 속했고 내가 너와 함께 하려고 애굽에서 너를 건져냈느니라. 예수님께서 죽음을 맛보시고 보좌에 나아가신 것이 하늘 처소에 있는 영광의 거처에서 함께 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대면해서 말씀하시는 관계로 하나님의 향단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는 언약 적인 친교다. 그 관계가 향단에서 나타나도록 하셨다. 그러니까 시편을 보면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는것도 하나님 앞에 손을 드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저녁 제사같이 하옵소서. 하는 말이 전부 그런 언어다. 하나님의 번제단에 드린것도 실은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다. 그것은 그가 고난중에 하나님을 부르면서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 드렸던 가장 탁월한 봉사가 자기의 기도와 같이 되게 해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왜 그런 연합 관계가 거기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나라 교회는 기도하는 방법론을 가르쳐서 아주 쉽게 배운 듯 해도 여러분의 종교적인 훈련은 될지 몰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우리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잘 파악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바르게 설명하지 못하면 복음을 설명한 것이 오히려 복음에 해롭다는 말이 그 말이다. 우리 나라 교회는 기도를 전부 종교 의식으로 알고 있지 얼마큼 가까이 있는 가를 모르니까 기도하고도 예수 이름으로 기도 안했으며 아하 도장을 안 찍었구나 이렇게 한다. 그러니까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겠지요?
29:38-46 단 위에 드릴 것
7일 동안 단을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면 단은 지극히 거룩하게 되어, 단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이 거룩한 단은 하나님께 매일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는 곳이며, 하나님은 거기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단에서 자기 백성의 향내나는 예물을 받으시고, 거기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영광 때문에 회막은 거룩하다.
매일 드리는 제사는 어린양으로 드리는 번제인데, 아침과 저녁에 드린다. 번제와 함께 소제와 전제를 드린다. 이것은 여호와께 가나안의 극상품 음식을 드려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회막과 단과 아론과 그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여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회막과 단과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물의 피와 관유로 거룩하게 하셨다. 생명의 하나님께서 회막 중에 거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복주신 생명의 풍성함을 단에서 함께 나누시며,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피와 관유와 향내나는 예물은 다 생명의 교제요, 생명의 새로움과 풍성함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성소의 거룩한 교제로 함께 거하시려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이 은혜의 일을 부활하신 주의 상에 교회를 앉게 하시고 주님의 피와 살로 기르심으로 완성하셨다. 신약 성도의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관계의 삶이다.
30:1-10 분향할 단
분향할 단은 조각목으로 가로 세로 각각 일 규빗, 높이 이규빗의 반듯한 모양으로 만들고, 뿔을 만들고, 고리 둘씩을 양편에 만들고, 메는 체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단의 땅에 닿는 부분을 제외하고 이 모든 것 전부를 정금으로 싼다.
단을 두는 장소는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 장 밖이다.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는 곳이다. 향단이 놓인 장소는 외소이지만 왕상 6:22과 히9:2-4에서는 향단을 지성소에 있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향단은 장밖에 두어도 그것의 위치는 속죄소와 증거궤와 연결하여 말한다. 향단은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의 휘장 밖이다. 향단은 여호와의 보좌 앞이다(계8:4).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는 장소이다(24:18). 향단에서 아론을 만나신다.
아론은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른다. 향을 사르는 때는 아침마다 등불을 정리할 때와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이다. 이 향은 여호와 앞에 대대로 끊지 못한다. 향을 사르는 사람은 아론이며, 향을 사르는 때는 등불을 정리할 때와 켤 때이다. 시141:2에서는 기도가 향을 사르는 것과 제사와 유비된다. 계시록에서는 금대접의 향을 성도의 기도라고 말한다(5:8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라; 8:3-4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아론이 일년 일차씩 지성소에 들어갈 때 향단의 향연으로 보좌를 가리워야 죽음을 면한다(레16:13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향단에는 다른 향을 사르지 못하며, 번제나 소제나 전제를 드리지 못한다. 이 향단은 지성소에 속하며, 다른 제단은 뜰에 속하기 때문이다.
아론이 일년 일차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년 일차씩 대대로 속죄하여야 한다. 향단의 속죄는 속죄소를 속하는 대 속죄일에 아론이 행한다. 속죄소에서 모세를 만나시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대제사장인 아론을 향단에서 만난다. 이 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다. 향단은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론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아직은 나아갈 수 없었으나, 휘장 밖 여호와의 보좌 맞은 편에서 등불을 켜고 향단에 향을 사름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일년 일차씩 지성소가 속죄될 때 지성소가 잠깐 열렸고 아론은 향단의 향연으로 가리우고 여호와 앞에 나아갔다. 이것이 구약 경륜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요 소망이었다.
이 은혜의 일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사 하늘 성소에 나아가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롭고 영원한 산 길이 열렸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가심으로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가 응답하시는 생명의 관계가 열렸다.
29:38-30:10 제사장이 봉사하는 단
29:38-46 단 위에 드릴 것
7일 동안 단을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면 단은 지극히 거룩하게 되어, 단에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이 거룩한 단은 하나님께 매일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는 곳이며, 하나님은 거기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단에서 자기 백성의 향내나는 예물을 받으시고, 거기서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시는 영광 때문에 회막은 거룩하다.
(출29:37) 네가 칠일 동안 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라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리니 무릇 단에 접촉하는 것이 거룩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이 단에다가 드릴 것은 무엇이냐? 그 문제를 38절 이하에서 쭉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방금 읽은 문단은 38절 이하를 전체적으로 요약한 것이다. 항상 어떤 문단을 보면 처음과 마지막이 중요한데 38절에서는 네가 단위 드릴 것은 이렇게 되어 있고 그리고 42절에 보면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내게 말하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너를 만나기 때문에 회막은 거룩하게 될지니라. 43절에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면 누구를 통해서 만나는가? 44절에 보니까 아론의 봉사를 통해서 만난다. 그리고 45-46절에 보면 그 관계를 세우려고 너희를 애굽에서 불렀느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뒤에 있는 결론을 앞으로 돌려서 설명을 했다.
단을 칠일 동안 피와 관유로 깨끗하게 하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는데 이 단을 지극히 거룩하기 때문에 단에 접촉한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그러면 이 단을 무슨 용도로 쓰이는가? 단에다가는 매일 아침저녘으로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번제를 지내야 된다. 그런데 그 번제와 함께 전제와 소제를 드린다. 바로 하나님께서 그 단에서 자기 백성의 봉사를 기뻐받으시고 하나님께서 거기 나타나셔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기 때문에 그런 의미로 회막은 거룩하다 그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러면 단에다 드린 것은 무엇인가?
매일 드리는 제사는 어린양으로 드리는 번제인데, 아침과 저녁에 드린다. 번제와 함께 소제와 전제를 드린다. 이것은 여호와께 가나안의 극상품 음식을 드려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레위기를 보면 번제가 더 자세히 설명이 되겠지만 이 단을 지극히 거룩한 단인데 여기다 할 일은 매일 번제를 드리는데 아침과 저녁에 드린다. 하나님은 그러면 두 끼만 잡수시는가? 이스라엘 백성도 두 끼만 먹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두 끼만 먹으면 딱 맞는 말이고 그런데 나는 이스라엘 문화를 잘 모른다. 몰라도 하는 방법은 있다. 어떻든 아침과 저녁에 드리면 하루 종일 양식이다. 왜 아침과 저녁이 모든 날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음식을 몇 끼 잡수시는가는 모르겠는데 여기 보면 하여튼 하나님 앞에 온전한 양식을 드린다 그런 말이 될 것이다. 거기다가 이스라엘에 가서 두끼 먹는 줄을 알면 아하 그럼 문화적인 배경에서 썼구나 더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몇끼를 먹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아침과 저녁 그러면 날을 대표하는 시간이기 때문에 전날에 대한 양식 그런 개념으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번제를 드리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화제가 된다. 어떻게 화제가 되는가? 불로 태워 드리는데 화제가 된다. 향내가 난다 . 레위기를 보면 향내가 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고 향내 안 나는 제사는 속죄가 중심이다. 향내나는 제사는 번제와 그리고 소제와 화목제가 향내나는 제사고 향내 안 나는 제사는 속죄제와 속건제다. 그러니까 이것은 감사제의 성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불로 태워 드리면 하나님 앞에 향내가 되는 것이다. 구약은 항상 물로 정결케 하고 불로 정결케 하면 하나님 앞에 향내나는 완전한 정결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제단의 불로 태워 드리는 것이 마지막 정결법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번제는 레위기를 보면 전체를 다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번제와 함께 소제와 전제를 드린다. 소제는 밀가루 음식이고 전제는 포도주다.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를 주면서 살이요 피라 그랬다. 그런데 가나안 땅의 양식은 떡과 포도주다. 그래서 그것을 함께 드린다.
그러니까 여기 보면 특별히 레위기에 보면 잘 나오겠지만 하나님의 단에 드린 것은 일상 양식하고 다르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반 양식도 가나안 땅의 것이라고 몽땅 다 먹는 것이 아니다. 그 중에서 하나님이 먹으라고 한 것만 먹어야 한다. 아직 먹지 말라고 한 것을 먹으면 그는 부정한 자다. 진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런데 먹을수 있는것도 스스로 죽어 버리면 먹으면 안된다. 그것을 이방인에게는 팔아도 됐지만 자기가 먹으면 그는 죽음에 첩촉된 자가 되기 때문에 부정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단에 드린 것은 그 중에서도 또 다르다.
밀가루 음식을 드리면 자기 집에서는 그냥 마음대로 먹어도 하나님 앞에 드릴 때는 완전히 밀가루 기름 반죽 기름 요리 그 위에다가 기름을 한 번 더 바르고 그렇게 해서 드리니까 기름이 자르르 흐른 것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최고의 식품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단에 드리는 것도 피를 뿌리고 거기다 기름을 드리고 나머지 고기는 제사장은 먹어도 하나님의 단에는 주로 기름을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번제는 보니까 임자도 먹을 것이 없이 몽땅 태워드리는 것이다. 전체를 다 드린다는 것이 번제에 잘 드러나 있다.
그러니까 이것은 온전한 감사 제물이고 완전한 식탁이다. 여기는 보니까 채소는 하나도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건강법으로 해석을 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모세 언어로 해석을 해야 되지 건강법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 앞에 아주 가나안 땅의 극상품 음식을 드려서 기쁘게 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회막과 단과 아론과 그 아들들을 거룩하게 하여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회막과 단과 아론과 그 아들들을 제물의 피와 관유로 거룩하게 하셨다. 생명의 하나님께서 회막 중에 거하시고, 자기 백성에게 복 주신 생명의 풍성함을 단에서 함께 나누시며, 자기 백성에게 말씀하신다. 피와 관유와 향내나는 예물은 다 생명의 교제요, 생명의 새로움과 풍성함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성소의 거룩한 교제로 함께 거하시려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다.
그러면 여기다가 단도 거룩하게 하고 제사장도 거룩하게 하고 그리고 그 거룩한 제사장으로 거룩한 단에다가 하나님 앞에 음식을 차려 드리도록 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거룩하게 되었는가? 피와 관유로 거룩하게 했다. 피와 관유로 거룩하게 한 그 제단에다가 극상품 식품을 차려 놓고 하나님 앞에 드린다. 나중에 다른 화목 제물을 거기서 장자인 아론에게 한 다리 쭉 떼어 주는 것이다. 가슴도 뛰어준다. 그전에 여러분이 아버지의 상에서 먹으면 큰 아들한테는 특식을 주는식이다. 옛날에는 아들한테 그랫다. 아들만 아버지하고 겸상이고 어머니와 딸들을 저 옆에서 먹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젖가락 들기 전에 못들고 아버지가 한 다리 떼어주면 감지덕지 하는 것이다. 요새는 아이들이 먼저 떼어 먹어 버린다. 그런데 옛날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이해하면 여러분이 이해를 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화목 제물은 특별히 위임식 너는 나의 제사장이라 너는 내 앞에서 봉사해라 했을 때 가슴과 오른 쪽 다리를 준다. 오른 쪽 다리 준 것은 다리를 다 준의미와 같다. 대표기관을 주기 때문에 다 준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것이 장자로서 하나님의 상에 앉은 아론의 몫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번제는 하나님 앞에 전체를 드리는 것을 말하기 때문에 완전히 태워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 보니까 완전한 피와 관유로 함께 뿌려졌기 때문에 한 피와 한 관유로 연결 됐을 뿐만 아니라 거기 극상품 식품이 차려졌기 때문에 완전한 생명의 교제가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은 식사만 하는것인가? 우리 나라로 하면 밥상머리 교육인데 알기 쉽게 내가 거기서 너를 만나겠다. 시내 산에서 실은 만나신 하나님이시다. 처음에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났을 때는 밥도 없고 모세도 40일을 굶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성소에 계시면서는 피로 제사장을 거룩하게 하고 단도 거룩하게 하고 어느 정도 거룩하게 하는가? 접촉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는 거룩이다. 그러니까 실은 거기 하나님이 완전히 임했다는 말이다. 하나님만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문둥병자를 만지시면 문둥병이 옮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열두 해 된 혈루증 병자도 예수의 옷만 만져도 그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그런 완전한 거룩으로 내가 거기 임하겠다. 그러면 그 자리는 아침과 저녁으로 내게 상을 차려라. 그러면 거기서 내가 기뻐 먹고 마시고 내가 거기서 너를 만나 이야기를 하겠다. 그러니까 시내 산에서 함께 계신 것보다 더 탁월하게 함께 계신다. 내가 너를 그렇게 하려고 애굽에서 불러냈다.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려고 불러냈다. 이렇게 거룩한 생명의 거처에서 완전한 생명의 교제를 나눌려고 내가 불러 냈느니라. 나는 너희 하나님이고 너는 내 백성이니라.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성소라 그 말이다.
그래서 내가 거기서 만나는 거룩 때문에 회막이 거룩하다. 만일에 하나님의 거처가 아니면 회막은 거룩한 것이 아니다. 이제 제사장이 아침과 저녁으로 드리는 것이 그렇게 거룩하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회막의 의미고 내가 너희를 내 거처로 만들려고 너희를 애굽에서 불렀노라 그것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시는 생명의 언약이다.
이 은혜의 일을 부활하신 주의 상에 교회를 앉게 하시고 주님의 피와 살로 기르심으로 완성하셨다. 신약성도의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주의 상에서 먹고 마시는 관계의 삶이다.
그런데 구약의 단이 아무리 거룩해도 접촉하는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해도 그것은 모세 제도의 거룩밖에 안된다. 그것은 사람이 만든 장막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밖에 안된다. 그러나 이 은혜의 일을 우리가 같은 사람이 되셔서 우리 중에 거하시려고 오셨다. 특별히 마태복음이 임마누엘 사상이 강하다. 그분은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문둥병도 그가 만지시면 정결하게 되고 혈루증 든 여인도 그의 옷자락을 만지면 정결하게 된다. 구약 같으면 그렇게 안되는데 정결하게 된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중에 함께 거하시는데 그냥 하나님이 번제단에서 대표를 통해서 제단에서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열두 제자들을 그의 상에다 앉히시고 그렇게 교제하셨다. 그 열둘로 출생된 교회와 함께 부활하신 주님께서 함께 계셔서 우리한테 극상품 식품을 주셨다. 이것이 내 살이요 내 피니라. 이제 신약에서는 주님 앞에 모일 때마다 그것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잘못하면 천주교 제사가 되니까 좀 오해가 되지만 그것을 가지고 와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백성이 드린 것으로 하나님은 이것이 내 살이요 피라고 주시는 것이다. 떡과 포도주는 제대로 하면 음식이다. 그러니까 초대 교회 때는 성찬 비용이 굉장이 많이 책정 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자들은 더 많이 가져와고 가져와서 함께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전부 나누어 주는 것이다. 이것이 내 살이요 피라고 나누어 주는 것이다. 그것이 애찬과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 식사로서 구별정도가 아니라 그것이 형제와 함께 주의 몸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한 식사를 할수 있도록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주의 교회는 단을 모세의 방식으로 거룩하게 한 정도가 아니라 참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오셨고 그리고 그가 자기 몸의 몸의 죽음에서 죄를 온전히 정결케 하셔서 이제 예수님께 연합된 백성이 다 거룩한 백성이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에 다 거룩하다. 그렇게 해서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처럼 나를 먹는 자는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것이 요한 복음에서 주님께서 보리 떡 둘을 주시면서 하셨던 말씀인데 그런 관계로 신약 교회에 함께 계신다.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 되시려고 그 일을 하셨다. 그것이 신약의 교회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소는 단이 핵심이다. 그래서 회막과 단을 거룩하게 했다고 한다. 단이 핵심이고 그 단에 나가서 봉사한 사람은 제사장 아론이다. 지극히 거룩하다. 거기다가 아주 아침과 저녁으로 최고의 식품을 차려 드리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거기서 자기 백성의 봉사를 향기로 맡으시고 그리고 거기서 아론을 만나셔서 말씀하신다. 그런데 모세가 시내 산에 올라갔을 때는 굶고 만났지 아론처럼 이렇게 식사 자리에서 만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구약의 만나는 것은 금식이 만나는 방식이었다. 대속죄일에 금식이 중심이다. 모세도 굶고 만났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자기 제자들은 식사에 초대하시고 또 죄인들을 자기 식탁에 앉게 하시고 그렇게 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 잔치였다. 그리고 식사 중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지금 교회가 그 식탁 교제를 나누고 있다. 그것이 교회다. 그러니까 여러분의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성찬적인 의미가 되어야 되고 그리고 여러분은 그런 것으로 형제를 공급할 수가 있어야 한다. 그냥 예배당 와서 먹을 때만 거룩하다. 눈을 지긋이 감고 찡하고 나가서는 속옷 차림으로 마음대로 먹고 이런 식으로 먹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기 몸을 주셔서 이 생명의 식탁을 차려 주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부활 자이기 때문에 내 살고 피를 먹고 마셔라. 구약에는 이런 극상품을 대접한 적이 없다. 피와 기름은 하나님의 몫이고 단지 가슴과 든 뒷다리만 줬는데 이제는 그이 모든 백성에게 내 살이요 내 피니라. 그렇게 주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 개혁 교회는 아이들은 저리 가거라. 어른들만 먹고 아이들은 저리 가고 밥흘리면 안되니까 해서 천주교는 포도주는 안 준다. 입에서 피를 흘리면 큰 죄거든요. 그런데 그것이 비싼 것이다. 로마에서 온 것이어서 자기만 홀짝홀짝 마시고 안 준다. 그런데 옛날 양반도 그렇게 안했는데 그런식이 되었따. 옛날 양반도 아버지 앞에서 무릎꿇고 먹으면서 배운 것이다. 아버지의 상에 앉는 것이 최고의 특권이다. 큰 아들만 앉고 딸들은 다른 상이다. 그것이 제사장이 누리는 특권이었다.
그런데 그런 정도 누리는 특권이 아니다. 모세 장막으로 부르신 지극히 거룩이 아니라 하늘 성소에 부르신 지극히 거룩함으로 그가 자기에게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하시고 자기 자신을 주신다. 그것이 여러분이 먹고 마시는 삶이다. 그러니까 성찬이 식사 적인 의미다.
그 다음 다른 단이 있는데 제사장이 봉사할 단이다. 이 향단 까지가 한 문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30장11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17절부터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22절을 봐도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런 말로 문단이 시작되는데 그 앞에는 그런 말이 없다. 하늘에서 본 식양대로 지을 지니라 그런 말을 하다가 제사장에 대해서 쭉 나오고 그런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런 새로 시작된 구분이 없다. 그러니까 30:1-10절까지가 지금 까지 공부했던 제사장의 규례에 마지막 단락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단에다가 드리는 봉사와 향단에 드리는 봉사는 일맥상통한 것이다 그런 말이다. 같은 범위에 속한다.
30:1-10 분향할 단
분향할 단은 조각목으로 가로 세로 각각 일 규빗, 높이 이규빗의 반듯한 모양으로 만들고, 뿔을 만들고, 고리 둘씩을 양편에 만들고, 메는 체를 조각목으로 만들고, 단의 땅에 닿는 부분을 제외하고 이 모든 것 전부를 정금으로 싼다. 조각목으로 전부 만들고 정금으로 싸는데 바닥에 닿는 부분만 안 싼다.
단을 두는 장소는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 장 밖이다. 성경 구절을 그대로 일부러 쓰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의 표현법을 잘 유의해야 한다. 여기 보니까 단을 두는 장소는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 장 밖이다. 속죄소 맞은편이고 증거궤 맞은편이다 그런 말이다. 그런데 항상 속죄소는 증거궤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증거궤 위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 그런데 장 밖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이다 그런 말이다. 그런데 장밖에 있다 그런 말이다.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는 곳이다. 6절에 보면 그 속죄소는 내가 너를 만날 곳이며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는 곳이다. 향단이 놓인 장소는 외소이지만 왕상 6:22과 히9:2-4에서는 향단을 지성소에 있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므로 향단은 장밖에 두어도 그것의 위치는 속죄소와 증거궤와 연결하여 말한다. 향단은 속죄소 맞은편 곧 증거궤 앞의 휘장 밖이다. 향단은 여호와의 보좌 앞이다(계8:4).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시는 장소이다(24:18). 향단에서 아론을 만나신다.
무슨 말이냐면 이 향단을 두는 장소를 보면 증거궤 위에다가 속죄소를 두는데 속죄소 맞은편에 두어라. 또 한 번 반복하기를 증거궤 앞 장 밖에다가 두어라. 그렇게 해서 속죄소와 증거궤를 중심 해서 그 앞에 두는데 휘장밖에 두어라 그것이 향단을 두는 위치를 말하는 방식이다. 그러면 속죄소에서 모세를 너를 만날 것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왕상이나 히브리서를 보면 성소에 있는 물품들을 쭉 말하면서 이 향단 향로가 있으면 향단이다. 보좌와 함께 막 언급을 한다. 휘장밖에 있는 떡상과 등대와 함께 언급하지 않고 휘장 안에 있는 물품으로 막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면 실제적으로는 휘장안에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계시록 8장을 보면 향단이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속죄소는 여호와께서 모세를 만나는 장소고 이제 향단은 아론을 만난다. 이것이 구약에서 자기 백성과 언약 체결 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출24-25장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야 너는 가까이 나와라. 그리고 아론과 70인 장로는 저 만큼 떨어져 있어라. 그리고 백성들은 저 산밑에 있어라 그것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만나시던 방법이었다. 그러니까 여기는 지성소는 모세를 만나는 곳으로 이야기를 한다. 향단에서 봉사한 사람은 아론이다. 그러면 여러분이 출24장을 보면 모세는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셔서 70인 장로들을 자기 발 밑에서 먹고 마시게 했을 때 후에 모세와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산으로 올라갔는데 6일 동안 하늘이 맹렬한 불이 타고 연기가 자욱했다. 그리고 제 7일 안식일에 하나님이 모세를 불렀는데 모세는 하나님의 구름 속으로 들어갔고 그 구름을 산밑에서 보는 백성들의 눈에는 맹렬한 불처럼 보였다. 그러니까 모세만 홀로 하나님의 영광 안으로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또 그런 의미로 모세는 나를 친히 대면했느니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것이 모세으 위치다.
그리고 언약의 중보자인 모세의 위치는 지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로 되어 있고 그리고 언약의 대표자인 아론은 그 밖에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성소에 만나는 정도가 아니라 그는 하나님으로 오신 아들이다. 그리고 그가 친히 아론을 사이에 둔 것이 아니라 그가 친히 대표자가 되어서 자기 백성과 언약 체결을 하셨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보았고 그 말씀을 친히 들으신 분이다. 아버지께로서 오신 분이다. 그렇게 신구약이 서로 상관되면서도 대비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말씀하시기를 속죄소 그리고 언약궤 그 앞부분 정면에다가 향단을 두는데 휘장으로 가리우고 휘장 밖에다 두어라. 그러면 속죄소는 어느 곳이냐? 내가 모세를 너를 만나는 곳이다. 향단에서 아론은 이렇게 이렇게 봉사해라. 그러니까 향단은 아론을 만나는 곳이다. 그러니까 아직도 구약의 하나님 앞에 교제는 아론이 거룩한 자로 지극히 거룩한 곳에 들어가 봉사를 하는데도 여전히 하나님과 아론 사이에는 휘장이 가리워져 있고 아직도 간격이 있다. 그런데도 휘장으로 가리고 계신 분께서 가리고 캄캄한 곳에 계시면 큰 사망인데 휘장으로 가리기는 가리웠는데도 향단에서 아론을 만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향단은 휘장밖에 있으면서도 휘장 안에 있는 의미다. 그것이 향단의 봉사다.
아론은 아침마다 그 위에 향기로운 향을 사른다. 향을 사르는 때는 아침마다 등불을 정리할 때와 저녁 때 등불을 켤 때이다. 이 향은 여호와 앞에 대대로 끊지 못한다. 향을 사르는 사람은 아론이며, 향을 사르는 때는 등불을 정리할 때와 켤 때이다. 시141:2에서는 기도가 향을 사르는 것과 제사와 유비 된다. 가령 내 기도가 하나님 앞에 제물 드리는 거처럼 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 기도가 있다. 계시록에서는 금대접의 향을 성도의 기도라고 말한다. (5:8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 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라; 그렇게 막 직접적인 유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8:3-4 또 다른 천사가 와서 제단 곁에 서서 금향로를 가지고 많은 향을 받았으니, 이는 모든 성도의 기도들과 합하여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라. 여기 보니까 보좌 앞 금단에 드린다고 했다. 그런데 이 향은 제단이니까 번제단에서 모은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금향로를 받아서 어디로 가냐? 보좌 앞 금단에 드리고자 한다. 이 금단은 보좌 앞에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 말이다. 그런데 분명히 보좌 앞은 앞인데 휘장으로 가리운 앞이다. 장밖에 두어라 했는데 계시록에서는 휘장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금단에 드리고자 함이다.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그것이 말하자면 먼저 간 성도들의 예배를 구약 방식으로 그렇게 묘사해 주고 있다. 아론이 일년 일차씩 지성소에 들어갈 때 향단의 향연으로 보좌를 가리워야 죽음을 면한다. (레16:13은 대속제일의 제사 법인데 거기보면 여호와 앞에서 분향하여 향연으로 증거궤 위 속죄소를 가리우게 할지니 그리하면 그가 죽음을 면할 것이며) 이렇게 향을 피우고 나서 피를 일곱 번 뿌리는 것이다. 향단에는 다른 향을 사르지 못하며, 번제나 소제나 전제를 드리지 못한다. 이 향단은 지성소에 속하며, 다른 제단은 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향단의 거룩은 다른 단의 거룩과 다르다. 번제단이 지극히 거룩한 단인데도 이 향단과는 또 다르다. 번제단에서는 제물을 하나님 앞에 불태워 드리고 다른 모든 제사가 드려지고 다른 향도 살라진다. 가령 하나님 앞에 소제 드릴 때 향도 드리면 한 주먹을 사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향은 이 향단에 살라서는 안된다. 다른 말로 하면 번제단에서 드린 것은 이 단에서는 드리지 말라 그 말이다. 왜냐하면 번제단은 뜰에 있는 것이고 향단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전히 휘장 밖은 밖인데도 보니까 뜰에 있는 것과 향단은 구별시키고 있다. 그렇게 향단은 걸룩하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아론이 일년 일차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제의 피로 일년 일차씩 대대로 속죄하여야 한다. 향단의 속죄는 속죄소를 속하는 대 속죄일에 아론이 행한다. 속죄소에서 모세를 만나시는 하나님께서 백성의 대제사장인 아론을 향단에서 만난다. 이 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다. 향단은 여호와의 보좌 앞에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론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아직은 나아갈 수 없었으나, 휘장 밖 여호와의 보좌 맞은 편에서 등불을 켜고 향단에 향을 사름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일년 일차씩 지성소가 속죄될 때 지성소가 잠깐 열렸고 아론은 향단의 향연으로 가리우고 여호와 앞에 나아갔다. 이것이 구약 경륜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요 소망이었다.
다른 단보 지극히 거룩하고 하나님의 식탁이라고 말씀을 드렸다. 그런데 대제사장만 먹는 식탁이 있다. 그것은 소위 성소다. 구별해서 부르면 외소다. 성소가 두 구분으로 되어 있다. 안쪽이 지성소밖에는 성소 함께 말하면 성소로서 거룩하다 말하는데 둘로 나누면 그렇고 그 밖은 뜰이다. 그러니까 뜰에는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한 단이 있어서 거기서 하나님이 백성을 만나시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얼마나 거룩한 성소인가? 시내 산의 영광보다 더 큰 영광의 교제로 거기 오셨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 최고의 식품으로 드리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께서 자기 제사장과 임자들에게 한 몫씩 떼어 줘서 먹게 하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서 먹는 것도 거룩한 생명의 교제인데 그것은 극상품 식품은 아니다. 하나님의 뜰에서 먹는 것은 진짜 거룩한 교제다. 그런데 이 거룩한 양식은 보통 하루 양식이고 자원해서 드린 것은 이틀치 먹고 나머지는 하루 양식밖에 안되었다. 특별히 장자를 자기 앞에 두고 먹는 곳이 있는데 그것이 성소의 외소다. 거기는 금떡상이 있고 안식일에는 열두 덩어리 떡을 진설하면 다음 안식일에 아론의 몫이다. 그것은 지극히 거룩한 떡이다. 완전한 생명의 교제가 있다. 그런데 거기는 등불을 켜야 되는데 이 등불은 저녁 때 켜고 아침에 심지를 정리하면서 불을 커야 되겠지요? 그러면 낮에는 태양 빛이 들어올 것이다. 물론 천막이 쳐져 있으니까 지붕으로는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그렇게 등불을 켤 때 또 정리할 때 향을 살라야 된다. 그러니까 향 사른 것은 등불과 연결이 되어 있다. 위치로 보면 내소에 있는 보좌와 즉 증거궤와 속죄소와 관계되어 있다. 그 정면에 두는데 휘장밖에 두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시간으로 봐서는 등불과 관계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은 캄캄한 가운데 계시는데 캄캄한 중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저주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서 만나시면 그 빛도 죽이는 빛이 아니라 그 빛 가운데서 아론이 떡상을 진설하고 먹는다. 생명이 빛 가운데서 나타나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의 교제다. 바로 이런 구약 언어로 하나님은 빛이요 생명이라 그렇게 언어를 쓰고 있는 것이다. 추상적인 언어가 아니라 구약 언어를 가져다가 쓰는 것이다.
만일에 그 빛이 없으면 캄캄한 중에서 밥 먹을 수 없고 만날 수 없다. 그런데 하나님은 캄캄한 중에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셨고 시내 산에서는 빽빽한 구름으로 가리우고 계셨는데 그것은 죄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휘장 밖에다가 일곱 등불을 켜게 하시고 그리고 그 앞에 떡상을 차리고 하나님 앞에 드리고 먹게 하시고 그리고 그 불을 켜고 정리 할 때마다 향을 사르도록 했다. 그런데 이 향은 어디냐? 실은 하나님 보좌 앞이다. 그러니까 보좌에 계신 하나님께서 일곱 촛대 가운데서 자기 백성의 빛으로 생명으로 거기서 만나시고 보좌에 계신 하나님이 휘장으로 가리우고 계시는데 실은 향단에서 아론을 만나시는 것이다. 그것이 이 향을 사르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향단을 일년에 한 번 대 속죄일에 속죄해야 한다. 대속죄일은 지성소를 속죄하는 날이다. 다른 때는 이런 저런 피로 번제단을 속하게 해도 하나님의 보좌 법궤와 속죄소는 매일 하는 것이 아니라 일년에 한 번씩 하는 것이다. 아침과 저녁으로 번제를 드리면 아침과 저녁으로 단을 정결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속죄소는 일년에 한 번씩 한다. 만일에 속죄소에 들어가지 못하면 그 속죄소에서는 모세를 만났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성소는 하나님의 거처가 안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일년에 한 번씩 피로 속죄하면 된다. 그 때는 레16장에 보면 대제사장도 영화로운 옷을 입지 않고 세마포 옷을 입고 들어가서 하는 것이다. 그 때는 모든 백성이 다 굶어야 된다. 굶는다 그 말은 아직 완전한 생명을 안 주었다는 말이다. 다 굶어야 된다. 그렇게 하면 성소가 거룩하게 되어서 일년 동안 하나님의 거처가 되고 또 모든 제사가 드려지는데 그 때 향단도 속죄를 해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향단을 속죄소의 속죄하고 연결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향단은 휘장밖에 있어도 의미적으로는 휘장 안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대속죄일에 속죄로 속죄를 해라. 그러면 지극히 거룩한 단이 되어서 내가 거기서 너를 만나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성소 중에서 하나님께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께서 나와서 비추셨다는 의미로는 등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드린다는 의미로는 향단이다. 향단에서 하나님께서 아론을 만나신다. 아침과 저녁으로 등불을 켜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무엇으로 묘사하냐면 기도와 연결시켜서 말하고 있다. 본래 성소는 기도와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교제니까 그렇다. 항상 교제는 대면해서 말씀하시고 식탁에서 교제하시고 그런 것이 구약에서 하나님과의 교제다. 하나님께서 대면해서 말씀하시면 그것이 완전한 교제다.
모세하고 가장 가까이 대면해서 말씀하실 때 내가 모세하고는 얼굴을 대면하고 말했지만 내가 어느 선지자하고 그렇게 한 적이 있냐? 모세는 다르다. 대면해서 말씀했다고 그렇게 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기도와 연결시켜서 하고 있는 것이다.
솔로몬 성전도 처음 지었을 때 솔로몬이 봉헌사에서 하는 말이 만일에 백성이 범죄하고 멀리서 이 전을 향하여 자복하고 기도하면 먼 이방인들도 이 성전을 향해서 기도하면 그런 식으로 소위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한 것처럼 기도의 처소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도는 예배당 와서 기도하고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과 교제의 의미로 기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도가 어디서 완벽하게 열렸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이전에는 내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내가 시행하리라.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그렇게 하리라. 그렇게 말했지만 구약 때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러면 내가 시행하리라. 그가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시행하는 자다. 내 이름으로 기도하라 그 말은 예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 말을 뒤에 붙이자 그런 말이 아니다. 내 이름으로 예수님한테 기도하라 그 말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가는 이유다. 그러니까 완전한 교제가 열린 것이다.
그전에는 그렇게 열리지 않았다. 그런데 내 이름으로 기도해라.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너희들로 열매를 맺게 하리라. 그러나 예수님께서 아버지께로 가심이 가장 친밀한 친교를 열으신 것이다. 여러분보고 기도가 제일 중요하다는 예배 의식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그러면 어떤 사람은 찬양이 제일 중요하다고 할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교제 문제로 했을 때 기도를 그렇게 배정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 얼굴을 대면해서 말하고 교제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번제단에 임해서 말씀하시기 때문에 그 단이 지극히 거룩하고 그래서 거룩하게 임하게 되는데 이제 하나님께서 번제단은 휘장밖에 뜰에 있는 것인데 이제는 성소 안에 둔 단이 있다. 그 단은 대제사장이 아침과 저녁으로 향을 사름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고 그는 그런 관계로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에 지성소에 들어설 때도 먼저 향을 살라서 그 향연이 자욱해서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고 여호와의 보좌를 가리우게 하고 그렇게 하면 네가 죽음을 면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가리우고 있다. 그래도 그 향을 가지고 먼저 들어오고 그리고 나서 피를 가지고 들어와서 뿌리는 것이다. 그것이 대속죄일에 지성소를 속죄하는 방식이다. 즉 성소의 내소를 속죄하는 방식이다.
이 은혜의 일을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위하사 하늘 성소에 나아가심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롭고 영원한 산 길을 열으셨다. 예수께서 아버지께 가심으로 그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그가 응답하시는 생명의 관계가 열렸다. 우리 중에 함께 계셨던 분 제자들의 음성을 듣고 배고프고 풍랑중에 휩쓸리고 그러면 모든 위기중에 함께 햇던 그분 그분이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들이 내게 기도해라. 내가 시행하리라. 그는 땅에서도 자기 백성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루셨던 분이시다. 그런데 제자들이 자기 선생에게 말했던것이지 그를 하나님으로 알고 구하고 그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로 가면 기도해라. 내가 너희로 열매맺게 하기 위해서 가노라. 그것이 더 좋은 처소로 옮기는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제 하늘의 영원한 산 길이 열렸고 휘장 밖에서 향단에 향을 사름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다. 아침과 저녁이 아니다. 우리는 은혜의 보좌앞에 항상 있고 우리는 항상 주님께 말씀하고 우리는 주님께 말씀을 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우리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렇다. 영원한 생명의 관계를 열으셨다.
구약을 보면 이렇게 탁월하게 그리스도를 증거해 주고 있는데 기독론적인으로 풀면 이렇게 탁월하게 말하고 있는데도 교회가 이런 것을 예배당 의식용으로 쓰고 인간 행위로 풀고 그렇게 되어 있다. 기도하는 사람이 제일 보좌 가까이 있으니까 기도 제일로 많이 하라고 하면서 종교 의식으로 바꿔 버렸는데 이것을 그런 말이 아니다. 그런 관계를 새롭게 했다 그 말이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기도하셔야 한다. 항상 여러분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나는 너에게 속했고 너는 나에게 속했고 내가 너와 함께 하려고 애굽에서 너를 건져냈느니라. 예수님께서 죽음을 맛보시고 보좌에 나아가신 것이 하늘 처소에 있는 영광의 거처에서 함께 하도록 우리를 부르셨다.
대면해서 말씀하시는 관계로 하나님의 향단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모든 일에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는 언약 적인 친교다. 그 관계가 향단에서 나타나도록 하셨다. 그러니까 시편을 보면 하나님 앞에 제사드리는것도 하나님 앞에 손을 드는 것이 하나님 앞에 저녁 제사같이 하옵소서. 하는 말이 전부 그런 언어다. 하나님의 번제단에 드린것도 실은 하나님 앞에 드린 것이다. 그것은 그가 고난중에 하나님을 부르면서 구약에서 하나님 앞에 드렸던 가장 탁월한 봉사가 자기의 기도와 같이 되게 해 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왜 그런 연합 관계가 거기 있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 나라 교회는 기도하는 방법론을 가르쳐서 아주 쉽게 배운 듯 해도 여러분의 종교적인 훈련은 될지 몰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우리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하는 인격적인 관계를 잘 파악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을 바르게 설명하지 못하면 복음을 설명한 것이 오히려 복음에 해롭다는 말이 그 말이다. 우리 나라 교회는 기도를 전부 종교 의식으로 알고 있지 얼마큼 가까이 있는 가를 모르니까 기도하고도 예수 이름으로 기도 안했으며 아하 도장을 안 찍었구나 이렇게 한다. 그러니까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알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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