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7. 17. 00:15ㆍ목양자료/3.강해설교
28: 1-29 제사장의 의복(2)
아론과 그 아들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직분을 행하도록 여호와께서 지혜의 영으로 충만케 하신 자들을 통하여 지어 입히신 거룩한 옷은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이다. 제사장의 의복은 에봇으로 대표된다. 에봇을 메는 띠와 흉패도 에봇 짜는 법으로 만든다. 겉옷도
에봇 밭침 겉옷이라 부른다.
대제사장의 에봇은 그 재료인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에 의해서 성소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대제사장에게 준다. 에봇에 부착된 모든 직물은 다 에봇 짜는 법으로 짠다. 에봇을 받치는 겉옷의 청색도 하늘의 영광이다.
에봇과 에봇
받침 겉옷은 다 통으로 짜서 만들어 조각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에봇은 멜빵을 달며, 겉옷은 어깨 사이에 머리 구멍을 내서 만들고 그 가를 갑옷
깃처럼 만들어 찢어지지 않게 한다. 에봇에 부착하는 것들도 에봇에 붙여 짜거나 금태와 금사슬과 청색 실로 묶어 에봇에서 떨어지지 않게 한다.
에봇에 부착하는 것은 기념 보석과 판결흉패이다. 이것들은 보석에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을 도장 새기듯이 새겨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이
되게 하는 것이다. 기념 보석은 아론의 어깨에 두고, 판결흉패는 아론의 가슴에 둔다.
기념 보석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도장을
새기듯이 나이 순서대로 여섯씩 두 보석에 새긴다. 두 보석을 금태에 물리고 에봇 두 견대에 붙여서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보석을 삼아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두 어깨에 메어서 기념이 되게 한다.
판결흉패는 에봇 짜는 법으로 짠다. 장광이 각각 한 뼘인 반듯한
정사각형 모양이며 두겹으로 주머니처럼 만든다. 거기에 각 줄에 세개씩 네줄로 각기 다른 보석을 금태에 물린다.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 둘이며 한 보석에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긴다. 금고리와 금사슬과 청색 실로 견대와 에봇 메는 띠 사이에 흉패를 붙여서
항상 에봇에서 떠나지 않게 한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서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는다.
판결흉패 안에는 우림과 둠밈을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두게 한다.
대제사장의 어깨와 가슴에 있는 보석에 새겨진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여호와 앞에서 영원히 기념되는 아들들이며 그
보석은 여호와 앞에서 개념 되는 영광이다. 흉패 안에 넣는 우림과 둠밈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의 판결이어서 판결흉패라고 부른다. 우림과 둠밈의
문자적인 뜻은 빛과 완전이나 그것의 구체적인 것은 알 수가 없다. 여호와께서 우림의 판결 법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신다(민27:2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형제 중에 이러한 대제사장을 세우셔서 성소에서 여호와 앞에 나아 오게 하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서 기념되고 판단되며 인도를 받는다.
에봇 받침 겉옷은 전부 청색으로 하며,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를 수놓고, 금방울을 간격하여 달되 한 금방울에 한 석류의 방식으로 단다.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려 성소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에 금방울
소리가 들리면 그가 죽지 아니할 석이다. 옷 가장자리의 장식은 이스라엘로 방종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민15:37-41). 그러나 여기서는 아론이 출입하는 걸음을 성전의 영광으로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정금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기고 청색 끈으로 관 전면에 있게 한다. 이 패가 아론의 머리에 있어서 그로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거룩한 성물의 죄건을 담당케 한다.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된다. 가는 베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 관을
만들고 띠를 수놓아 만든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씌워 주시는 관은 여호와 앞에 서는 대제사장의 영광이다(슥3:).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멜기세덱의 반차에 오르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들 세우셨다.
또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과
띠와 관을 만들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옷을 입히고, 기름을 부어서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로 여호와께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한다.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서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한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간다.
지난 시간에는 28:1-5절까지 아론의 거룩한 옷이 어떻게 영화롭고 아름다운지 그것을 하나님이 지혜의 영으로 채운
자들이 짓고 그 재료가 무엇인지 그것을 통해서 제사장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말씀을 드렸다. 그것은 성소 내부의 재료로 되어 있다. 제사장 옷과
성소 내부의 색과 똑 같다. 그것이 제사장에게 주신 영광이고 그 옷을 지어 입힌 것은 하나님께서 지혜의 영으로 채운 자들이 지었는데 하나님의
성소도 하나님의 지혜의 영으로 채운 자들이 지었다. 대제사장의 옷도 하나님의 지혜의 영으로 채운 자들이 지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다 하나님의
영으로 이루신 일이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여호와를 섬기는 직분을 행하도록 여호와께서 지혜의 영으로 충만케 하신 자들을 통하여
지어 입히신 거룩한 옷은 흉패와 에봇과 겉옷과 반포 속옷과 관과 띠이다. 제사장의 의복은 에봇으로 대표된다. 에봇을 메는 띠와 흉패도 에봇 짜는
법으로 만든다. 겉옷도 에봇 밭침 겉옷이라 부른다.
28장 1절에 보면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 아들들 곧 나답 아비후
이다말을 그와 함께 내게로 나오게 나를 섬기는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되 이러이러한 옷을 지어 입혀라고 하셨다. 그전에 시내 산에 올라 갓을
때는 여기 엘르아살과 이다말은 없다. 시내 산에 하나님의 발 밑에서 먹고 마셨을 때 이 두 아들은 없었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아론과 함께 그
아들들 전부를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 형제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 중 네 형 아론과 그랬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중에
제사장을 일으키고 그 제사장 때문에 그 가문이 전부 제사장 직분을 행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직분을 주시는데 영화롭고
아름다운 옷을 지어 입혀서 그 직분을 행하게 한다.
그런데 이 옷은 무엇이 대표되냐면 흉패와 에봇과 해서 흉패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에봇이고 에봇에 붙여 있는 제일 중요한 것은 흉패다. 그러니까 흉패가 제일 앞에 나와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흉패와 에봇은 차라리
붙여서 읽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제일 먼저 에봇에 대한 이야기가 6절부터 나온다. 그들이 금실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공교히 짜서 에봇을 짓되 그것에 견대 둘을 달아 두 끝을 연하게 하고 대제사장의 에봇은 그 재료인 금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에
의해서 성소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대제사장에게 준다. 에봇에 부착된 모든 직물은 다 에봇 짜는 법으로 짠다. 에봇을 받치는 겉옷의 청색도 하늘의
영광이다.
여기서는 대제사장이라는 말은 없고 그냥 아론과 그 아들들로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아론이 대표자고 그 아들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함께 참여한다. 여기서는 제도적으로 대제사장이냐 아니냐 그런 것을 다루지 다루지 않고 아론과 그 집안으로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중에 함께 계시는 언약 체결이 강조다. 제가 이해하기 좋게 대제사장이라는 칭호를 쓰고
있어도 여기서는 대제사장은 더욱 특권을 갖고 일반 제사장과 다르다. 그런 차이점에 강조를 두지 않고 아론과 그 아들들로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중
아론과 그 아들들로 내게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하라. 그러니까 아론 때문에 그 아들들이 함께 영광에 참여하고 그들 때문에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이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왜 이스라엘 자손중에 이들을 택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출애굽기는 하나님의 언약 체결에 대한 강조점이기
때문에 대제사장이라는 어떤 직무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아론과 그 아들들 그들은 이스라엘중에서 택함받은 자들이다. 그렇게 해서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는 약속을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아론이 입는 옷은 성소 내부의 재료와 똑 같다. 그러기 때문에 성소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입혀 주는 것이다. 여기 28장에서 직무적인 칭호를 쓰지 않고 아론과 그 아들들 이렇게 연합해서 쓰는 의미를 잘 보라.
에봇에 부착된 모든 직물은 다 에봇 짜는 법으로 짠다. 여기 그냥 모든 직물을 이렇게 좁혀 쓰는 이유가 직물 중에는 어깨에 매는 맬방도
있고 흉패도 직물로 짠다. 그런 것들은 다 에봇 짜는 법으로 짜는데 그것을 다 쓰면 길어져서 이렇게 했는데 이렇게 되었다. 하여튼 직물로 된 것
즉 천으로 짠것은 전부 에봇을 짜는 법으로 짠다. 한 것이 통일되는 관점이다. 또 에봇을 받치는 겉옷도 그냥 겉옷 그러지 않고 에봇 받치는 겉옷
그러니까 에봇 밑에 받쳐입는 옷이다. 겉옷도 그냥 겉옷이 아니라 에봇 받치는 겉옷 해 가지고 에봇과 연결 지어서 설명을 하고 있고 그것은 전부
청색으로 되어 있는데 그것도 하늘에 영광을 나타내는 방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시내 산에 강림하셨을 때 그 발 밑이 청옥을 깐 것처럼
청명했었다. 하늘의 색깔이다.
에봇과 에봇 받침 겉옷은 다 통으로 짜서 만들어 조각으로 나누어지지 않는다. 에봇은 멜빵을 달며,
겉옷은 어깨 사이에 머리 구멍을 내서 만들고 그 가를 갑옷 깃 처럼 만들어 찟어지지 않게 한다. 에봇에 부착하는 것들도 에봇에 붙여 짜거나
금태와 금사슬과 청색실로 묶어 에봇에서 떨어지지 않게 한다. 기념하는 보석이나 또는 흉패에 부친 모든 보석은 다 이렇게 금태에 물리고 또 금
사슬과 청색 끈으로 묶고 그런 방식으로해서 결론은 흉패와 에봇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라. 그것이 표현하는 방식이다.
특별히 흉패 붙이는
법을 보면 복잡한데 자세히 읽어보면 알도록 되어 있다. 그래도 쭉 읽어보면 에봇은 어떻게 짜느냐? 통으로 짠 옷으로 견대를 만들어라. 그 견대는
멜방이다. 그런데 멜방도 에봇과 똑같은 것으로 짜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그 어깨에다가 기념 보석을 붙이는데 금테에다가 호마노를 물려 가지고
거기다 붙이고 그리고 가슴에다가는 흉패를 붙이는데 그것도 에봇 짜는 방식으로 두겹으로 주머니처럼 싸고 그리고 네모 반듯하게 만들어 가지고 네
끝에다가 금고리를 단다. 금고리를 두 고리를 에봇 앞에다 달고 그리고 나머지는 두 금고리는 또 밑에다가 두 에봇에 붙여 만들어 가지고 그것을
청색 끈으로 고리끼리 메면 딱 붙어진다. 그리고 그 밑에가 에봇에 붙여서 짜진 허리끈이 있는데 그렇게 묶으면 제사장의 직무적인 복장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짜냐면 에봇도 통으로 짜서 멜방을 메고 그리고 에봇 받치는 속에 입는 겉옷은 통으로 짜고 전부 청색인데 통으로
짜고 그리고 어깨하고 그리고 머리 구멍을 낸다. 그러니까 원피스 입는 식이다. 그렇게 해서 입는다 그 말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냐면 목도 갑옷
가를 짜는 것처럼 든든하게 짜서 찢어지지 않도록 해라. 여러분이 요한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입었던 옷이 통으로 짠 옷이다. 그래서 찢지 말고
우리가 제비 뽑아 나누자 그랬다. 보니까 예수님 옷은 통으로 짠 옷이더라. 그렇게 제사장 의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옷은 한마디로
말하면 든든하고 찢어지지 않고 한 통이다. 그리고 거기 붙어 있는 것도 전부 금고리 금사슬 또 청색 끈으로 묶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그것이 옷에 대한 전체적인 묘사다. 그러니까 이런 것은 자세히 읽어보면 모르고 전체적인 묘사를 보면 알 수 있고 그 다음 전체적인 흐름을 따라서
그 다음 세부적으로 보면 아하! 그렇게 되어 있다. 부분 읽으면 이것은 제단사도 알기 어렵게 되어 있다. 복잡하다. 그러니까 옷은 아주
든든하다. 그리고 거기 있는 모든 부착물을 에봇과 함께 쪄져 있다시피 묶여서 있어서 절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에봇에 부착하는 것은
기념 보석과 판결흉패이다. 이것들은 보석에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을 도장 새기듯이 새겨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이 되게 하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이다. 그런데 기념보석은 아론의 어깨에 두고, 판결흉패는 아론의 가슴 즉 흉패 안에다가 금태로 물려서 둔다. 그러니까 따라 띠면 똑 같은데
다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을 새긴 것이고 그리고 여호와 앞에 기념 되도록 한다. 하는데 있어서는 똑 같다.
기념 보석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도장을 새기듯이 나이 순서대로 여섯씩 두 보석에 새긴다. 그러니까 기념 보석은 둘인데 어깨에 하나씩 두는데 그 하나에다 여섯씩
이름을 새기는데 나이 순서대로 새기고 도장 새기듯이 새긴다. 두 보석을 금태에 물리고 에봇 두 멜방에 붙여서 이스라엘 아들들의 기념보석을 삼아
아론이 여호와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두 어깨에 메어서 기념이 되게 한다. 이 대제사장이 나오면 누가 함께 나오는가? 이스라엘의 이름이 아론의
어깨에 붙여져서 나오는데 호마노 보석에다가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을 나이 순서대로 여섯 씩 적은 것이 금태에 물려서 에봇에 붙어 있다.
판결흉패는 에봇 짜는 법으로 짠다. 장광이 각각 한 뼘인 반듯한 정사각형 모양이며 두겹으로 주머니처럼 만든다. 거기에 각 줄에
세개씩 네줄로 각기 다른 보석을 금태에 물린다. 이 보석들은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대로 열 둘이며 한 보석에 한 이름씩 도장을 새기는 법으로
새긴다. 금고리와 금사슬과 청색실로 견대와 에봇 메는 띠 사이에 흉패를 붙여서 항상 에봇에서 떠나지 않게 한다.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에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서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는다.
판결 흉패를 보니까 굉장히 복잡한데
그렇게 하지 말고 가로 세로가 한 규빗 두겹으로 만든다. 그런데 거기다가 우림과 둠밈을 널 수 있도록 해야 하니까 주머니처럼 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은 에봇 짜는 재료와 똑같이 짠다. 금색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실로 짠다. 거기다가는 보석을 물리는데 열 두 가지 보석을 금태에
물려서 붙인다. 그러니까 이 보석이 금테에 물려 졌고 또 에봇도 금사슬로 가를 두른다. 그러니까 장식품이 굉장하다. 제일 좋은 방법은 성경을
기록 한데로 읽는 것이 제일 좋다. 왜냐하면 13-14절을 읽으면 기념 보석을 만드는 법을 쭉 이야기하고 나서 너는 금으로 태를 만들고 정금으로
노끈처럼 두 사슬을 땋고 그 땋은 사슬을 그 태에 둘지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이 앞에 기념 보석을 여기다 붙인 것만 해도
금테로 두르니까 면류관 쓰는것처럼 굉장하다. 그것을 다 해놓고 또 금사슬로 둘러라 했다. 그러니까 거기다가 치장을 한 번더 한다. 이렇게 해서
영광스럽게 치장하도록 되어 있다. 우리 같으면 이렇게 묘사를 하지 않고 그냥 한꺼번에 호마노로 만들고 금태로 물리고 금사슬로 둘려라 해 버리고
어깨에다 붙여라 하면 되겠는데 여기서는 다 붙여라. 붙이면 기념 보석이 되리라. 끝나는 듯 한데 그 다음 거기다 무엇을 하고 있냐면 금태를
둘려라. 한 번 영광을 더 주고 있다. 이 표현 구조들을 잘 봐야 된다. 이미 기념보석이 되리라 하면 끝난 이야기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끝내놓고 금태를 둘러라 그렇게 하고 있다. 그러니까 옷 다 입혀 놓고 한 번더 치장을 해준식이다. 그렇게 해서 그것을 아주 영광스럽게 꾸미고
있다.
그러니까 저 같이 설명하는 식을 하면 알아듣기는 좋은데 이 문장이 표현하고 있는 뉘앙스는 발견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성경은 옛날에
어리석어서 이렇게 복잡하게 기록한 것이 아니라 가장 분위기를 잘 표현할 수 있도록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 문장 방식을 그대로 반복해서 읽고
따라서 설명하는 것이 제일 좋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길고 해서 묶어서 설명을 한 것이다. 그런데 방금 어깨에 두른 기념패도 보면 기념하는
보석이 되게 할지니라. 다 해 놓고 그 다음 금테를 두를지니라. 하고 있다. 금사슬을 만들어서 또 금태를 둘러라 그렇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영광스럽게 꾸미고 있다.
그런데 흉패도 어떻게 하냐면 에봇 짜는 법으로 짠다. 에봇은 성소 내부의 영광과 같다고 했다. 그것을 가로 세로
똑 같이 한 규빗으로 정사각형으로 짠다. 이 정사각형을 여기서는 의미가 직접 나온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지성소 구조에서는 정육면체가 하나님의
완전한 임재를 나타냈다. 성소 자체에서는 완전한 임재는 지성소다. 그런데 여기 보니까 네모 반듯하게 만들어야 한다. 두 겹으로 만드는 것은
주머니 때문에 그런 것이다. 그러면 우리 같으면 더 넓게 만들면 좋을 것 같은데 네모 반듯하게 만들어야 한다. 보석이 세 줄씩 해서 네 줄이니까
또 같은 거리로 하려면 조금 길쭉해야 맞겠지요? 그런데 여기 보니까 가로 세로가 한 뼘씩 네모 반듯하다. 마치 지성소 규모를 연상할 만큼 가로
세로가 똑 같다. 그렇게 하고 거기다가 열두 보석을 금테를 물려서 거기다 붙인다.
그런데 그 열두 보석의 이름이 다 다르다. 색깔로 다
다를 것이다. 또 거기다가 이스라엘 자손의 이름을 한 보석에 하나씩 새기는데 도장을 새기듯이 새긴다. 그러니까 생전 지어지지 않을 것이다.
보석에다가 도장을 파듯이 새겨 놓았으니까 이것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열두 보석에 각각 이름이 다르고 색깔이 다른 보석에다가 한 사람씩
나이 순서대로 이름을 새겨서 배열하는데 네 줄로 배열한다. 한 줄에 세 개씩 그런데 전체로 합하면 가로 세로가 한 뼘씩이다. 그렇게 해서
붙이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그 흉패는 어떻게 붙이냐면 네 귀퉁이다가 금사슬을 달고 위에 금사슬은 금고리에 묶으면 된다. 그리고 밑에
금고리에다가 또 아래 에봇에다가 금고리를 달고 두 금고리 사이를 청색 끈으로 묶으면 된다. 그리고 그 밑에 에봇 띠가 붙어 있다. 그러니까
허리끈과 멜방 사이 가슴에 그것이 붙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흉패인데 판결 흉패라고 그렇게 말을 한다.
그런데 이 기능은 무엇이냐면
아론이 성소에 들어갈 때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 판결 흉패를 가슴에 붙여서 여호와 앞에 영원한 기념을 삼는다. 그러니까 어깨에
있는 기념 보석이나 판결 흉패나 다 기능은 같은데 이스라엘 백성의 이름이 여호와 앞에 기념되게 한다. 그렇게 되어 있다.
판결흉패
안에는 우림과 둠밈을 넣어 아론이 여호와 앞에 들어갈 때에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항상 그 가슴 위에 두게 한다. 그래서 흉패라고
하지 않고 판결 흉패라고 이름을 부른다. 왜 이스라엘 자손의 판결을 그 가슴에 둔다해서 판결흉패라고 부른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되겠지요?
대제사장의 어깨와 가슴에 있는 보석에 새겨진 이스라엘의 아들들의 이름은 여호와 앞에서 영원히 기념되는 아들들이며 그
보석은 여호와 앞에서 개념 되는 영광이다. 우리가 이 보석을 구체적으로 해석할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항상 큰 것부터 전체적인 흐름을 보면
지엽적인 문제들을 해석할 수가 있다. 그러면 가장 큰 문제는 하나님께서 성소 안에 계시는데 이스라엘 자손중 아론의 가문을 택하시고 특별히 아론을
택하셔서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으로 덧입혀 주는데 이 덧입혀 준 영광은 하나님의 지혜의 영으로 충만케 된 자들이 입혀준 옷이다. 그러니까 성소도
지혜의 영으로 지었고 아론의 지혜의 영으로 지었따.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령으로 하나님께서 충만한 영광을 주시는데 하나님의 거처의 영광을 주어서
하나님을 봉사하도록 한 것이 가장 큰 흐름이다.
그러면 나머지 모든 것은 여기에 포함되도록 설명되어 맞다. 왜 이런 설명을 하냐면 이런
설명을 할 때 하나님의 은혜의 제도를 행위의 제도로 바꾸어서 설명하는 경우들이 많다. 그러면 에봇도 하나님의 성소 영광으로 다 짠다. 또 청색
고리고 묶는데 청색도 다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에 있는 색깔이다. 그런 면에서 같다. 그러면 이 보석들은 무엇인가? 보니까 우리가 모른 보석이
많다. 저는 그 중에 아는 보석이 진짜 없다. 그러면 주석들을 읽어보면 설명을 많은데 무슨 말인지 모를 이야기다. 그러면 이런 보석이 무엇인지
다 알 사람이 드물 것이다.
그런데 열 두가지 보석인데 어깨에는 특별히 큰 보석 둘을 달아서 여섯 씩 나이 순서대로 그렇게 해서 열두
지파의 이름을 새긴다. 그리고 금태로 물린다. 그리고 여기는 열두 보석을 가슴에 붙이는데 그냥 에봇에 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 보석을 붙인 판이
있는데 그 판은 네모 반듯한 에봇으로 만든 판이다. 그것은 두 겹으로 되어서 주머니처럼 되어 있는데 그 안에는 우림과 둠밈을 넌다. 그리고 밖에
있는 보석이 마치 어깨에 있는 보석처럼 그렇게 붙어저 있다. 그러면 이 보석이 전부 다르다. 아마 이 보석을 알수 있는 것은 여러분이 계시록을
보면 하늘로부터 내려온 예루살렘 성이 있는데 거기 보니까 사방에 문이 있고 또 기초돌이 있다. 거기 보면 열두 사도와 열두 족장들의 이름이
있다. 그 문들의 기초가 보석으로 되어 잇을 것이다. 이제 그런 보석과 맞추면 맞아질 것이다.
그런데 큰 성은 전부 금으로 되어 있다.
성곽도 금이고 내부도 전부 금이다. 여러분이 금판자 집에 살고 계시는 하나님의 성소나 또 솔로몬 성전을 보면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전부 금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항상 출애굽기 언어를 그렇게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 보석은 무엇이냐? 그런데 전부 기념 보석이라고 했다. 기념
되도록 해라.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을 덧입은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서면 거기는 누가 함께 나오냐면 보석에 새겨진 열두 지파가 나온다.
그런데 새겨진 보석은 아주 찬란하게 영광스럽게 빛나는 영광이다. 그리고 금태로 면류관을 쓰고 있고 금사슬로 쓰고 있다. 아주 영광스럽게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나온 것이다. 그러니 이 보석의 영광은 성소의 영광과 같다. 왜냐하면 계시록에서 열두지파가 기초를 이루고 있는데 이런
보석들로 되어 있다. 그것이 대제사장이 자기 백성과 함께 나오는 영광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중에서 제사장 가문을 일으켜 세웠는데 그들이
하나님 앞에 이 영광으로 나오면 백성이 함께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에 있는가? 어깨에 있고 가슴에 있다. 어깨는 힘이 있는 것이고
가슴은 어떻게 봐서 애정이 있고 그런 식이 된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화목 제물을 먹을 때도 가슴과 뒷다리 그렇게 해서 힘 있는 것은 다
하나님의 몫이다. 그런데 사람은 힘 하면 어깨 힘이다. 소 같으면 뒷다리가 힘이 있지만 사람은 어깨가 힘이 있다. 그래서 어깨에다 매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제사장의 모든 힘과 애정 거기에 무엇이 붙어 있냐면 이스라엘 자손의 영광스러운 이름이 보석에 새겨져 있다. 그러니까
제사장의 모든 힘과 애정은 이스라엘 백성의 뵹사를 위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다. 거기 대제사장이 나오면 이스라엘 백성이 영광중에 함께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처소에서 기념이 된다. 기념되고 기억되는 것이 기념 보석이다.
흉패 안에 넣는 우림과 둠밈은
여호와 앞에서 이스라엘의 판결이어서 판결흉패라고 부른다. 우림과 둠밈의 문자적인 뜻은 빛과 완전이나 그것의 구체적인 것은 알 수가 없다.
여기서는 어떻게 만드는지 그런 말이 하나도 없다. 단지 단어 풀이 할 때 빛과 완전이라는 단어 풀이는 가능해도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전혀 모른다. 여호와께서 우림의 판결 법으로 이스라엘 자손을 인도하신다(민27:21). 이전에 하나님이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셨다. 그런데 인도함을 받은 중보자들이 범죄함으로 다 끝났다. 모세도 범죄하고 아론도 범죄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운 이스라엘을
계수 하신 것이 민수기 26장인가 그렇게 계수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새롭게 인도하실것인데 이전에 아론은 죽었고 그 아들
엘르아살을 세웠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엘르아살을 통해서 인도하실 것이다 하는 것이 민수기 이야기다.
그러면 이스라엘 백성들 여호수아나
왕들은 누구한테 물은 가 하면 대제사장 앞에 와서 물으면 하나님께서 대제사장 가슴에 넣어 둔 우림과 둠밈의 판결 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리라 그렇게 되어 있다. 거기 우림의 인도법이 처음 나와 있다. 나중에 다윗 같은 사람도 쫓겨 다니다가 겁이 나면 제사장을 오도록 해서
우림을 가져오도록 해서 물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왔을 때 에스라에서 보면 돌아온 사람들의 가문을 전부 계수한다. 그런데
제사장 가문중에 족보가 명확하지 않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은 제사장 직분을 행하지 못하게 했는데 우림을 가진 제사장이 나타나도록 까지는
그런 일을 못하도록 했다. 그러니까 그 제사장은 우림을 가진 제사장을 어떤 제사장이겠는가? 엘르아살이 하나님의 우림과 둠밈의 판결법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시리라.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는데 이제는 제사장을 통해서 인도하신다. 그런 우림을 가진 제사장이 올때만
족보가 분명하지 않는 사람들도 그 때는 하나님 앞에 제사장 직분을 행할 것이다. 그렇게 에스라서에서는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민27장과
에스라서에 우림을 가진 제사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렇게 했을 때 우림의 인도하심이란 무엇이냐? 우림과 둠임을 흉패에 넣으면 이스라엘을
위한 판결이 거기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형제 중에 이러한 대제사장을 세우셔서 성소에서 여호와 앞에
나아 오게 하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교회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 가운데서 기념되고 판단되며 인도를 받는다.
그러니까 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오면 거기에 이스라엘의 열두 족장의 이름이 있고 그 속에 우림과 둠밈이 있다. 우림과 둠밈은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판결이
있다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가는 모른다.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림으로 자기 백성에게 자기 뜻을 계시하시고
인도하시리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생명과 완전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막을수가 없다. 그것이 성경에 전체적인 약속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환난중에 하나님 앞에 물으면 우림을 가진 제사장이 하나님의 판단을 말하고 자기
백성에 대한 약속을 집행 시킨다. 이분은 이전에 불기둥과 구름기둥 가운데 계셨던 분이다. 그 판결을 우림의 판결 법으로 인도한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빛 가운데서 계신다. 완전 가운데 계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모든 생명으로 인도하신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영원한 자기 소유로 삼으셨기 때문에 열두 보석으로 빛나는 보석
상자 속에 우림과 둠밈의 판결 법을 넣어 논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그렇게 빛과 영광 가운데서 판결하신다. 이는 내 백성이라 그가 빛
가운데서 인도하시고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의 인도를 거절할 수 없다. 왜 그가 자기 백성의 제사장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그분이 우리의 형제로 오신 분 우리의 형제로 하나님이 세우신 분 그분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그분의 어깨와 가슴에는 누가 있는가? 그가
대표하는 새로운 이스라엘 열두 제자들의 이름이 있는 것이다.
구약의 조상들은 사람이 만든 장막 지성소 앞에까지밖에 못나 간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이 보석의 영광 중에 나아가는 자리다. 그것은 우림의 판결 법으로 판결을 하는데 그 판결은 이전에는 불기둥과 구름기둥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인도했던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의롭다 하면 어느누구도 손대지를 못한다. 그것은 보석중에 빛나는 영광이라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완전한 생명을 방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인도하시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형제 중에서
세우셨는데 그분은 사람이 만든 장막 가운데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 그분은 하늘 성소에 교회에 대표로 들어가셨다. 그가 수고하신 모든 수고는 그의
교회를 위한 것이고 그의 가슴에 이전에 열두 보석보다 더 찬란히 빛나는 예수의 영광으로 빛나는 교회가 있다. 주님은 완전한 빛과 완전한
생명이시다. 그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 중에 자기 교회를 기억하고 기념하신다. 우리의 대제사장 예수 그분이 참으로
우림과 둠밈을 가진 대제사장이다. 그분만 참으로 빛과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판결로 하나님이 자기 교회를 인도하신다. 교회는 이런
영광의 빛 가운데 있다. 그것이 이 출애굽기 제도에서 하고 있는 이야기다.
에봇 받침 겉옷은 전부 청색으로 하며, 옷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석류를 수놓고, 금방울을 간격하여 달되 한 금방울에 한 석류의 방식으로 단다. 아론이 입고 여호와를 섬기려 성소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에 금방울 소리가 들리면 그가 죽지 아니할 석이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이냐?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자기 성소의
영광으로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에게 입히셔서 그와 그 가문으로 하나님 앞에 나오게 하신 것이 모든 백성을 나오게 하신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가 나올 때는 개인으로 나오지 않고 열두 족장의 이름을 가슴에 붙이고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으로 인도했던 그 인도가
이제는 제사장 가슴에 있는 판결 법 안에 들어있다. 이제는 제사장을 자기 백성을 인도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세우신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이 항상
제사장에게 말씀하심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런 제사장이 있다.
그러면 여기 석류 방울을 수놓는데 이것은 성소 내부의 색으로
수놓는다. 그리고 돌아가면서 금방울을 단다. 아론이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 금방울 소리가 들리면 아론이 죽지 않는다 한 것은 보통 우리가
어떻게 해석을 했냐면 말하자면 하나님 앞에 들어갈 때는 조심해서 들어가야 되겠다. 금방울 하나님의 말씀은 금사와 같다고 했으니 말씀에 영양분이
있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의 소리가 잘 들리고 그리고 이 말씀을 잘 기억하고 조심해서 들어가면 안 죽을 것이고 이런 식으로 푸는
것이다. 또 더구나 석류 방울이 수놓아져 있으니 소리만 들어도 소리가 난다. 그러니까 말씀은 꿀보다 더 달고 석류 송이보다 침이 더 많이 나오게
하고 식욕을 왕성하게 하고 이것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라고 해석을 한다.
그 증거를 어디서 잡느냐면
신15장에 보면 안식일날 나무하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야기했다. 너희들이 그렇게 방자하게 행동을 하지 않게 하려면
옷 가에다가 수를 놓고 그 수는 청색 수를 달아라. 그렇게 해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라. 그렇게 하면 너희들이 죽지 않으리라 그렇게
했다. 그러니까 옷가에 다는 것은 전부 하나님의 말씀을 조심하고 기억하는 것인데 그 말씀은 석류보다 달고 금방울처럼 소리가 아주 깨끗하게 나는
것이다. 말씀이 둔탁하게 나면 알아듣지 못하겠지요? 그래야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 죽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분도 교회 나올 때 대충
나오면 안되고 여러분의 행위에다가 하나님의 말씀의 방울을 달고 그 말씀에 방울이 청명하게 들릴 만큼하고 교회에 나와라. 그렇지 않고 그 옷을
입고 아무데나 다니고 그대로 교회 나오면 되겠냐? 그러면 안된다. 왜 이스라엘 자손들을 걸을 때도 항상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걸었지 않냐? 이런
식으로 풀면 안된다 그 말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법이 아니라 행위의 법으로 푸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으로
덧입혀 준 것이지 너는 이런 사람이 되어야만 나한테 나올 수 있다 하는 기준을 정해 주고 있는 것이 아니다. 만일에 이 성소의 영광으로 덧입지
않으면 못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제사장 가문에 있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택하셨는데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으로 덧입혀 주셨다. 하나님의
지혜의 영으로 덧입히셔서 그들로 하나님의 면전에 나오도록 했다.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중에 함께 계시는 언약 체결의 구조다 그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 해석은 너는 어떤 사람이 되어서 나와라 그렇게 해석하면 안되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제사장에게 영광을 입혀 주셨는가? 하는 그런 은혜의
관점에서 해석을 해야한다는 이 큰 문맥안에서 풀지 않으면 잘못된다 그런 말씀이다.
옷 가장자리의 장식은 이스라엘로 방종하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다(민15:37-41). 그러나 여기서는 아론이 출입하는 걸음을 성전의 영광으로 거룩하게 하신
것이다. 거기서는 분명히 네 행동을 조심하라는 것으로 옷에다 수를 달아라고 그랬다. 그러니까 너는 걸을 때마다 하나님과 함께 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행동을 조심하라 그런 말이 아니고 그가 들어갈 때나 나갈 때나 이 소리가 들리면 하나님께서 그를 죽이지 아니하리라 그렇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아론의 걷는 것은 하나님의 거처에 있는 그 영광의 빛과 광채와 영광의 소리로 전부 덧입혀 있는 것이다.
정금 패를 만들어 인을 새기는 법으로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기고 청색 끈으로 관 전면에 있게 한다. 이 관은 세마포로 만든
관이다. 이 패가 아론의 머리에 있어서 그로 이스라엘 자손이 드리는 거룩한 성물의 죄건을 담당케 한다. 그 패가 아론의 이마에 늘 있으므로 그
성물을 여호와께서 받으시게 된다. 가는 베실로 반포 속옷을 짜고 관을 만들고 띠를 수놓아 만든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씌워 주시는 관은 여호와
앞에 서는 대제사장의 영광이다(슥3:).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해서 멜기세덱의 반차에 오르사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를 세우셨다.
그 다음에 대제사장에게 입히신 것은 세마포로 만든 면류관이다. 그 관 앞에는 정금에다가는 도장
새기듯이 새기는데 여호와께 성결 해 가지고 청색 끈으로 관 앞에다가 묶는다. 이 관을 쓰고 아론이 하나님 앞에 나오면 그는 이스라엘 백성의
성물을 드릴 수가 있다. 그들을 죄중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성물을 드린다. 이 대제사장이 관을 쓰면 하나님 앞에 성물을 드릴 수가 있고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대제사장이 되는 것이다. 만일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거기다가 속옷을 짜서 입힌다. 그리고
이처럼 대제사장이 직무를 행하는 영광스럽게 옷만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상시에 입는 옷도 지어준다. 그것도 대제사장을 영광스럽게 하는 옷이다.
그래서 속옷과 띠를 짜고 옷을 만들어서 영광스럽게 해라 그렇게 나와 있다. 그리고 그 다음 문단에는 속옷 만드는 이야기와 아들들의 이야기가 따로
나와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대제사장의 직무적인 복장으로 에봇을 입히고 그리고 일상복으로도 영광스럽게 입혀줘야 한다. 이것이 제사장의
영광이다.
그러면 이 대제사장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성소에 나와서 죄 아래 있는 백성들의 거룩한 물건을 하나님 앞에 드리고 교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가? 하나님께서 거룩한 관을 쓰여 주셨기 때문에 그러는데 그 관은 여호와께 성물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 나온 것이다. 그러면 대제사장의 거룩은 어떤 거룩인가? 옷을 입히고 관을 씌운 거룩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은혜의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교회를 위해서 완성하셨다. 예수님은 우리 형제 중에서 택하심을 받은 자고 그분이 대제사장이기 때문에 우리도 아론의
가문이 된 것처럼 신령한 제사장이 됐다.
그분이 영광과 존귀로 관 쓰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대제사장이요 우리들도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그는 구약 율법대로 새기고 하얀 관을 씌워 준 것이 아니라 그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셨다. 그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서 관을 쓰셨다. 그는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왕이요 제사장이다. 그는 참으로
빛이시다. 그는 참으로 우림과 둠밈으로 자기 백성을 인도하신 분이다. 그가 완전한 빛인 것처럼 자기 백성도 완전한 빛이다. 그렇게 인도하신다.
신약 교회는 이처럼 영광과 존귀로 관 쓰신 대제사장 예수를 하나님이 세우셨다. 그분은 구약 방식으로 모세 제도를 따른 의식적인 거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 분이다. 바로 그 분 안에서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갈 수가 있게 되었다.
또
아론의 아들들을 위하여 속옷과 띠와 관을 만들어서 영화롭고 아름답게 옷을 입히고, 기름을 부어서 위임하고 거룩하게 하여, 그들로 여호와께 제사장
직분을 행하게 한다. 또 그들을 위하여 베로 고의를 만들어서 허리에서부터 넓적다리까지 이르게 하여 하체를 가리게 한다. 이것을 도덕적으로 풀어서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체를 드러내지 맙시다. 그래 가지고 이런 것은 보니까 음행이 다고 해석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하나님이 하체를 가리도록
속옷을 지어 입히셨다 그 말이다. 이것이 구약 백성이 하나님 앞에 죽지 않는 방식이다. 아론과 그 아들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나 제단에 가까이
하여 거룩한 곳에서 섬길 때에 그것을 입어야 죄를 지어서 죽지 아니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리스도로 옷 입고 은혜의 보좌에 담대히 나아간다.
구약 제사장 가문은 하체를 가릴 속옷을 하나님이 지어 입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안 죽는다. 아직도 부정한 자로 간주되고 있다. 옷을
입지 않으면 죽는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식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이제는 예수 안에서 온전한 정결함을 입었고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간다.
왜냐하면 우리를 예수로 옷 입었기 때문에 그렇다. 이것이 신약 교회가 누리는 복이다.
그런데 구약 때는 이런 모세 제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이 자기 제사장을 이스라엘 가문 중에서 세우셨는데 그 대표는 아론이고 아론이 대표이기 때문에 그 아들들도 함께 영광스럽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으로 전부 지혜의 영으로 덧입히셔서 하나님의 거룩한 곳에 나와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은혜의 일을
친히 성령으로 세상에 보내시고 그리고 그 아들을 성령으로 충만케 하셔서 그 직무를 다 수행케 하시고 이 아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영으로
새 사람으로 보좌 우편에 올리셔서 영광과 존귀로 관 쓰셨는데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대표로 거기 있고 예수님의 어깨와 가슴에 하나님의 새로운
이스라엘인 교회의 이름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다. 그 영광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왜 그가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이기 때문에 그
영광으로 빛나고 있고 이제 교회는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판단을 받고 하나님의 빛 가운데서 완전하게 되었다. 왜 바로 그 영광의 보석 상자 안에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는 판결 법이 들었었다. 하나님은 바로 그곳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신다. 판단하신다. 이것이 우리가 누리고 있는
영광이다. 구약 교회가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의 거처로 지어졌는지 알겠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구약에 대제사장과는 비교가 안된다.
그는 영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이기 때문에 아론처럼 옷입어서 들어간 분이 아니고 아직도 가리워야 되고 그런 방식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죽음을 영원히 이기신 분이시다. 그가 걷는 곳마다 석류 사이에 있는 금방울이 소리 나는 것처럼 하나님의 거니심이 있다. 그는
지금도 우리 중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거닐으신다. 그러니까 그분과 함께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거닐 수가 있는 것이다. 교회도 그분과
함께 걷는다. 이것은 인간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그가 자기 백성 중에 어떻게 영광중에 함께 계시는가? 하는 문제를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푸는 것이 맞는 것은 여러분이 열왕기상17장이나 보면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보면 400석류로 앞에다가 요동치 않는
두 기둥을 세웠다. 든든한 기둥을 세웠는데 이 기둥은 다윗 성전에는 없는 것이다. 솔로몬 성전에 있는 것이다. 반석 위에 지었을 뿐만 아니라 큰
놋 기둥을 든든히 세웠다. 계시록을 보면 하나님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라 한 기둥이 이 기둥이다. 요동치 않는 기둥이다. 그 기둥에 보면
석류를 200개씩 해서 4백개를 단다. 다 놋으로 된 석류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소에 문의 입구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것과 비교했을
때 이런 석류 금방울 하는 것은 서로 돌아가면서 새기리 했을 때 같은 의미로 해석을 해야 한다. 금방울은 이것이고 석류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의미로 해석을 해야 되는데 솔로몬 성전에 보면 하나님의 전 입구가 그렇게 되어 있다.
그렇게 했을 때 아론의 모든 걸음걸이에
하나님의 성소의 영광으로 하나님이 덧입혀 놓은 것이다. 그는 땅을 걷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소를 걷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안
죽는다.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해석하는지 그 방법을 빨리 파악해야 한다. 전체 구조를 보고 들어가면 개별적으로 흐트러지지 않고 풀
수가 있다.
그런데 구약만 열심히 연구하면 건축가밖에 안되고 그것이 어떻게 예수 안에서 영광스럽게 되었는가를 선포했을 때만 구약의 모든
그런 영광은 사라지고 영원히 썩어지지 않는 영광이 교회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고 우리의 대표인 예수님이 나아가는 곳에 그의 형제된 우리들도
나아가고 그의 어깨와 가슴에 교회가 주님의 영광으로 빛난다. 그것은 완전한 빛 가운데 있는 영광이요 하나님은 교회를 그 빛 가운데서 기억하신다.
그것이 기념되게 하라는 말씀이다.
질문: 하체를 안보이게 해라 했는데 무슨 뜻인가? 이것은 도덕적인 문제를 말하지 않는다.
구약에서는 왜 하체를 가리라고 그러는가? 했을 때 구약 표현법이 모든 생명이 허리에 있는 것으로 묘사를 한다. 생육하고 번성토록 한 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를 봉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할례를 받으면 그는 새롭게 출생되는 것이다. 그것도 일종의 하체를 보이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하체를 드러내지 말라 그 말이다. 그런데 제사장의 옷은 요즘 식으로 하면 칠부쯤된다. 말하자면 무릎은 내려오는데 장단지
가운데쯤 내려온다. 또 제사장의 신발 이야기는 전혀 없다. 그것은 맨발로 섬기는 자리다. 왜냐하면 여전히 종이기 때문에 그렇다. 구약에서는 종은
맨발로 봉사한다. 그리고 앉아서 먹지 못하고 서서 봉사한다. 제사장 의자를 놔두라는 말이 없고 서서 봉사한다. 종은 쉴 자리가 없다. 그 일을
완성하신 우리의 대제사장만 하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는 일을 다 마치신 분이다. 그렇게 되어 있는데 거기서는 도덕적인 문제를 있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생명이 온전치 못하다는 방식으로 하체를 가려라 그 말이지 미니스카트는 안되고 이런 도덕적으로 풀지 말라 그 말이다.
도덕적인 문제는 하나님과 관계에서 다시 풀 일이다. 그러면 이조 때 한복 입은 것은 고상하고 그보다 옷이 짧아지면 도덕이 짧아지는
것인가? 그런 이야기는 성경 자체에서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그러면 여름은 도덕성이 점점 적어지고 겨울이 되면 도덕성이 점점 길어지는 것인가?
그런 이야기도 없다. 여름이 되면 옷이 짧아지고 겨울이 되면 길어지는데 더우니까 짧아지지 도덕성이 없어서 짧아진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도덕적인 개념으로 성경을 옷입혀 가지고 보라고 제사장도 고의 옛날 식으로 하면 고쟁이다. 입으라고 했지 않냐고 그러면 요새
팬티 입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러면 안 죽은 것인가? 그런 식으로 해석하지 말라 그 말이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이것은
아직도 생명이 온전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그런다. 그런데 보니까 그 온전하지 못한 것을 하나님이 고의를 덧입혀서 그것을 가려 주고 있다.
그도 고의로 가려 줬기 때문에 죽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다. 그런데 이제는 이런 가리운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아갔기
때문에 영원히 죽음은 제거되었다. 그러면 신약 시대는 마음대로 미니스커트를 입어도 된다 그 말인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오직 예수로 옷
입고만 하나님 앞에 나간다. 믿는 자만 나아가고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나갈 수가 없다. 그런 말씀이다. 그것은 도덕을 훨신 뛰어 넘는
이야기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게 푸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렇게 해서 말하자면 여자들 같으면 한 달에 한 번씩은 예배당 나오지 못하게
하고 또 왜 새벽기도 안하냐? 아 부부 생활 한사람이 어떻게 삼일 동안은 부부 관계를 갖지 말라고 했는데 어떻게 새벽기도를 하겠냐? 거룩한
제단에 그래 가지고 새벽기도 안하기도 하고 전부 구약에다가 근거를 두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아직 예수를 누군가를 모르니까 성경대로 한다고
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유대인도 아니고 구약 백성도 아니고 그는 하나님의 성경을 이방종교로 만들어서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도덕적으로 연결하면 그만큼 위험하다.
종교는 권위가 있어서 그것도 통한다. 그래 가지고 조심한다. 그런데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는 삼일 전에 목욕하고 옷을 빨아야 된다. 그것도 적용을 하자면 재미는 있겠다. 어느 집에 들어갈 때는 외투는 벗는데 교회
올때는 추우니까 다 입고 있으니까 그러면 아하 예배 의식을 조심하라 그 말인가? 그러나 성경은 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다. 무슨 옷을 입었다고
해서 할 이야기는 아니고 그것은 그 다음에 할 이야기다. 왜 당시에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도덕의식들이 있다. 그런 문제지 그 문제를 예배 의식에
도덕적으로 막 붙이면 안된다.
그것은 전부 예수 그리스도를 지시하는 것이지 신약 교회의 어떤 도덕성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넥타이 메고 오는 것을 달리 해석하는 것이지 구약을 끌고 들어오면 안된다 그 말이다. 마땅히 하나님 앞에 정장을 하고 와야
한다. 그래야 된다. 그런데 나도 지금 슬리퍼 신고 있거든요. 실내니까 슬리퍼를 신었지 하나님 앞에 슬리퍼 신으면 되겠냐고 그런데 대통령 집에
들어가도 이 슬리퍼는 신는 것이다. 우리 문화권이 그런 것이다. 그것을 갖고 구약을 보라고 제사장은 맨발이 아니냐고 맨발로 들어가라고 그러면
안된다 그 말이다.
구약은 종의 신분이다. 우리는 아들이 신분이다. 달라져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을 우리 예배 의식에나 도덕에 막
붙이면 안된다 그 말이다. 구약은 전부 예수 안에서 우리를 하나님이 받으실 것을 구약 때는 그런 제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휘장밖에 두셨다. 그
은혜의 일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최고 멋쟁이로 나와라 그런 말이 아니라 교회 나올 때는 정장을 해야 한다. 저도 그전에 넥타이만 매도 죽을
지경이더라고요. 더구나 그전에 새벽 기도 까지 하니까 캄캄한 새벽부터 넥타이를 메니까 얼마나 고생스러운가? 그래서 한 번은 밑에서 넥타이를 쭉
내려놓고 기도를 했다. 그리고 예배 인도할 때 쭉 올리려고 그런데 올라서니까 잊어 버렸다. 얼마큼 미안한가? 그런데 또 한 번은 낮 예배 시간에
그래 벼렷다. 그리고 끝나고 교인들 갈 때 인사하려고 문 앞에 섰는데 고개를 숙이니까 보인다. 그래서 할말도 없고 그 때는 또 내가 농담을 하는
판이거든요. 그래서 장로님한테 이렇게 내려놓으니까 시선이 집중되고 설교가 잘 들리지요? 그리고 빨리 올렸다. 그런데 내 생각을 바꿨다. 내가
하나님 덕분에 새벽부터 넥타이를 메는구나. 우리 나라 사람은 넥타이 메는 것이 소원이다. 손톱 밑에 때 안 묻히고 그런데 나같이 새벽부터 이러니
얼마나 좋냐? 그렇게 마음을 바꿔 먹고 했습니다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 할 때는 그냥 설교 들으러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배하러 오니까 우리들이 정장을 하는 것이 좋다. 물론 우리들이 의복을 최상으로 입어라 그런 말은 아니다. 그래도 항상 정장을 하는 것이 옳고
좋다.
그런데 조용기 목사처럼 비디오 예배를 하면 이제 이불 속에 할 것이다. 하나님은 안보이니까 교회 올 필요도 없는 것이다. 앞으로
이 텔레비 때문에 교회가 파괴될 것이다. 그전에는 아버지 안 만나면 나쁜 자식이다. 그런데 요새는 전화로 인사를 대신한다. 누워서 아버지
안녕하시오. 아버지가 봐야죠. 그러니까 이제는 전파로 연결되지 가서 함께 한 상에서 먹고 마신다는 개념은 아주 멀어져 버렸다. 그러니까 인격적인
방식은 점점 멀어진 것이다.
앞으로 교회가 성찬식을 중심한 예배가 안되면 교회의 의미는 전부 사변화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교회가 타락하기 쉽다. 그런데 그것도 영리 사업을 한다. 투자해서 그리고 이익금은 교회가 가져가자. 그런데 교회는 그런 영리 사업을 해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시대 정신을 따라서 움직이니까 그렇게 된 것이다. 아주 위험한 시대다. 도덕적으로 풀면 안된다.
단지 여러분에게
정장하고 나오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그렇게 한 것이지 구약을 붙여서 그렇게 하면 안된다 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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