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학 목사 (1877-1933 감리교 목사)

2019. 8. 16. 22:55선교자료/5.선교자료

김영학 목사 (1877-1933 감리교 목사, 우리나라 최초로 해외에서 순교한 파송 선교사)

 

1. 방탕한 젊은 시절과 전도대와의 시비 


김영학 목사는 황해도 금천군 금천읍 조포리 양반가문을 배경으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향리 한문사숙에서 글공부를 시작하여 천자문으로부터 사서삼경을 모두 읽었다. 그러나 기울어져가는 조국의 현실앞에서 절망하며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토산장에서 전도대를 만나게 되고 복음을 듣게 된다.

 

2. 전도집회에서 회개하고 권서인이 됨.


그는 곰곰히 생각한 끝에 그곳은 전도집회 장소로 갔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회개하게 되었다.

이후 권서인이 되어 성서공회에서 공급하는 성경, 찬송가, 쪽복음을 등에 지고 전도하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김영학은 권서인을 하면서 민족의 고통을 더욱 더 절실히 확인하게 되었고 반드시 복음이 필요하게 됨을 알게 되었다.

 

3. 독립운동으로 체포 옥고를 치름.


1911년 해에 정식으로 전도사의 직분을 맡아서 충성을 다하기 시작했다. 1914년에서 감리교 연회에서 집사 목사로 안수를 받아 목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에 장로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그는 1919년까지 그 동안에 평산,금천,장연,철원,서울종교,수표교,양양교회를 담임 목회하였다. 양양에서 1919년 3.1운동을 맞았다. 김영학은 양양만세운동의 중심에 있었고 그가 순회하던 교회의 대부분이 만세운동에 참여했다. 이로 인해서 일본 관헌들은 그를 체포했고 그는 4년간이나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것만 보아도 그의 애국 운동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일제의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극비문서에 그에 대하여 '민족절대독립주의,배일사상 포지자"로 규정하고 있듯이 그는 민족독립운동가였다.


4. 시베리아선교 활동, 공산당에 체포,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 순교


1922년 5월에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하여 가평읍교회를 시무하면서 당시 남감리회가 펼친 선교백년기념사업에 가담하여 전국을 순회하면서 교제확장과 선교사명과 전력을 경주하였다. 1921년 감리교연회는 양주삼 목사를 중심으로 만주 및 시베리아 선교를 시작하였다. 시베리아의 한 도시 블라디보스톡은 우리나라 두만강 바로 건너, 동해에 면한 항구로서 러시아의 동양 진출을 위한 중요 요지이다.시베리아는 당시 러시아 공산혁명이 일어난 지 6년 밖에 안된 때였다. 과격파들은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 하여 교회를 핍박하고 괴롭히던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따라서 시베리아 선교를 지원하는 이들이 거의 없다시피하던 때였다. 그러나 김목사는 혹심한 옥고를 치렀던 뒤라서 아직 건강이 회복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순교를 각오하고 자원하여 그는 이곳에 왔고 나라 없이 외롭게 사는 교포들을 위로하는 한편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교포들 중 많은 이들이 기독교에 입교하였으며 때문에 교회는 곤경중에서도 견고히 발전하였다. 9년간을 목회에 전념했으나 ,1930년 공산당들은 소위 반동분자라는 죄명으로 김목사를 구금하였고 근 1년간을 공갈, 협박 또는 회유책을 써가면서 배교를 강요하였다. 그러나 단연코 거절하자 1931년 3월에 가장 악질적인 반동이라는 죄목으로 10년 중노동형을 받고 시베리아로 강제 이주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