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블라디보스톡을 다녀와서 11(토카렙스키등대, 구일본영사관 고려사범대학, 8호모범한인중학교)

2019. 8. 12. 10:27선교자료/5.선교자료

블라디보스톡의 땅끝 지킴이라 불리는 토카렙스키등대로 갔다. 비가 부슬부슬내려 비옷으로 챙겨입고 내렸다. 등대까지는 자갈 길이 나있는데 밀물 시간대는 물에 잠겨 건너지 못한다. 다행히 완전 밀물시간대가 아닌지 자갈길이 열려 있다. 등대까지 가보려고 했다. 그런데 2/3지점이 물에 약간 잠겨 있다. 많은 회원들은 건너기를 포기하고 아이들과 함께 몇몇 어른들은 건너갔다. 생각보다 물에 잠긴 깊이가 깊지 않아 파도만 잘 피하면 쉽게 건널 수 있었다. 룰론 운동화를 신은 사람은 신을 벗어들고 건너야 했다. 빨간 등대까지 가서 등대를 한바퀴돌아보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던 일행들과 합류하여 버스에 올라 저녁을 먹을 식당으로 갔다. 명가라는 한식레스토랑이다. 처음에는 북한 식당이었는데 지금은 한식당이다.  입구에 예전에 모란봉식으로 개업한다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저녁 메뉴로는 불고기 전골이 나왔다. 오랜만에 국물있는 음식을 먹으니 혀가 즐겁다. 반찬도 맛있고 간만에 밥다운 밥을 먹은 느낌이다.  맛있게 식사를 한 후 이제 마지막 남은 구일본영사관과 고려사범대학, 8호모범 한인중학교 등을 둘러 보았디. 3박4일간 블라디보스톡과 우수리스크에 남아 있는 우리의 흔적을 찾느라 참 바쁘게 돌아다녔다. 이번 기회에 연해주에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찾아 볼 수있어 무엇보다 보람된 답사여행이었던것 같다. 블라디보스톡에서의 마지막 밤은 베이가든호텔에서 보낸다. 시내에서 약 15분 정도 떨어져 있지만 호텔의 시설들이 아주 좋았다. 가이드 말로는 4성급 호텔 이라는데 그정도로 시설이 좋았다.  정말로 푹신침대에서 푹 잠을 잤다. 드디어 마지막날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여행 일정은 없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일만 남았다. 9시10분경에 호텔을 출발하여 공항으로 이동하였다. 공항에서 그동안 수고해준 가이드와 작별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2시간 30분 비행끝에 김해공항에 도착하여 3박 4일간의 답사여행을 마무리했다. 힘든 일정 이었지만 잘 참여해준 회원님들께 감사하고 싶다. 

 

블라디보스톡의 땅끝 지킴이 (토카렙스키등대 : 마약등대)

    

1876년부터 약 140년 동안 블라디보스톡의 땅끝 토카렙스키 만을 지키는 등대이다.

한국인들에겐 마약 등대라고 불리기도 한다.

러시아어로 등대가 마야ㅋ 이라 발음이 마약과 비슷하여 토스카렙스키보다는

쉬운 마약등대로 불린다고 한다.

이곳은 밀물 때는 등대로 가는 길이 사라졌다가 썰물 때 물이 양옆으로 갈라져 길이 생긴다.



등대로 가는 길 2/3 지점이 물에 잠겨 있다. 그래도 도전해 보기로 했다.

생각보다 물이 깊지 않았고 차갑지 않아 파도를 살짝 살짝 피해 가는 재미도 있다.

운동화를 벗어들고 마의 구간을 건너가다

드디어 빨간등대에 도착했다


등대에 도착한 인증사진 ㅎ ㅎ ㅎ









블라디보스톡에서 마지막 저녁식사를 한 곳 ;명가'




'이 곳에 1989년 10월 24일 우대한 수령 김일성동지 지시대로

조선모란봉 식당이 개업하였습니다'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현재는 명가라는 식당으로 한식전문 식당이다

오늘 저녁 메뉴는 불고기전골이다.

오랜만에 한식으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전 일본 총영사관 건물  현재는 블라디보스톡의 법원건물


1916년 건립된 구 일본 총영사관 건물은 약 100여 평[약 331㎡] 규모의 2층 석조 건물로,

원형을 비교적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건물에는 일본을 상징하는 국화 모양이 새겨져 있다.

 과거에는 건물 앞에 두 마리의 사자상이 있었으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지하에는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투옥했던 감방이 있었다.

일본 총영사관은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항일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일본의 대표적인 기구였다. 개척리의 외곽이며 신한촌에서 불과 1㎞ 정도 떨어져 있어

 한인들의 독립운동을 감시하며 탄압하였다.

또한 1921년 1월 북간도에서 일어난 15만 원 탈취 사건의 주역인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등이 엄인섭의 밀고로 체포된 뒤 구금당했던 곳이다.

구 일본 총영사관 건물은 현재 연해주 지방법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히치 하이킹을 하고 있는 조각상



건물이 오래되어 보강작업을 하고 난 뒤 오벽의 철골구조를 이용하여

시계탑으로 만들어 인테리어를 함

조금은 생뚱맞은 조합이지만 그런대로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



고려사범대학

1931년에 블라디보스토크(Владивосток)에 거주하였던

고려인들은 사범대학 건립 계획을 세우고서,

이전의 원동국제사범대학을 원동고려사범대학으로 재출범시켰다.

원동고려사범대학은 1935년에 첫 졸업생으로 17명을 배출한 뒤,

꾸준히 극동 지역 고려인들의 고등교육을 담당하였다.


1931년 블라디보스톡에 고려사범대학이 설립되자

러시아 한인신문'선봉'은 국내 경성제국대학을 동경제국대학의 분교라고 비판하며

고려사범대학을 유일한 조선인대학이라고 하였다. 

현재는 블라디보스톡의 시정부에서 소유하고있으며

 1층은 은행 2층은 파데예프도서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블라디보스톡 시청사 건물



8호 모범한인중학교

    독립운동가이자 역사가였던 계봉우 등 한인지식인들이 1930년대에 교사로 활동하며

한인자제들을 교육하던 학교 건물이다.

계봉우(1880-1959)는 함남 영흥 출신으로 서북학회ㆍ신민회 등

한말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였고,

1910년 북간도로 망명한 후 간민교육회와 간민회 간부, 광성학교의 교사로 활동하였다.

다시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하여 권업신문 기자,

대한광복군정부 책임비서로 활동하였다.

 1916년 북간도 하마탕에서 일본영사관 순사들에게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어

 1년간 유배형을 받고 고향 영흥에서 연금생활을 하였다.

1919년 3ㆍ1운동 후 북간도로 다시 망명하여 철혈광복단 단장으로 선출되었고,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의원(북간도 대표)으로 활동했다.

이동휘ㆍ김립 등과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상해파) 핵심간부로 활동하다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에 의하여 체포되어 이르쿠츠크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연해주 신한촌에서 저술ㆍ언론ㆍ교육에 전념하다

1937년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로 강제이주를 당한 후 그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당시 건물은 변호사협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극동국립대학건물




블라디보스톡의 마지막 밤을 지낼 베이가든호텔

에어컨이 완비된 객실과 구내 바를 자랑하는 Hotel Bay Garden은

블라디보스토크 금각만에서 11km 내에 있다.

레스토랑, 24시간 프런트 데스크, 룸서비스와 무료 Wi-Fi도 이용 가능하다.

이 금연 호텔은 오를리노예그네즈도 산에서도 8km 떨어져 있다.

아늑한 객실에는 책상, 평면 TV와 전용 욕실이 마련되어 있다.

각 객실에 전자레인지도 제공된다.



아침에 일어나 차문을 열어보니 호텔아래로 기차역이 보인다.

그래서 밤에 기차소리가 들렸나보다.

바다에는 군함들이 여러척 떠있다. 극동함대답다




LG고가도로

이고가도로를 놓을 때 LG에서 도움을 주었단다.

그래서 그 보답으로 무엇을 주면 좋을지 물었을때 LG에서는 이다리 가로등에 LG로고가 있는 광고판을 달아줄 것을 원했다고 한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세워진 블라디보스톡 상징탑

이 탑을 지나면 블라디보스톡을 빠져 나가고 공항에서 이탑을 보고 들어오면

블라디보스톡으로 들어온 거라고 했다.

우리나라의 동네입구에 서 잇는 천하대장군과 같은 역할인가 ㅋ ㅋ ㅋ






블라디보스톡공항으로 가던 도중 마지막 경계선을 상징하는 조형물 앞에서








우리가 타고 갈 이스타항공비행기가 들어오고 있다.



이 비행기를 타면 드디어 부산으로 가게된다.

블라디보스톡이여 안녕!




무사히 3박4일간의 일정을 마무리하다.

 

다음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