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12. 10:21ㆍ선교자료/5.선교자료
전로한족중앙총회본부를 둘러보고 고려사범전문학교로 사용했던 곳으로 갔다. 1937년 강제이주를 당해 폐교가 되기까지 고려인 교육을 위한 인재를 배출했던 곳이다. 지금도 우수리스크 전문문화학교가 되어 있다. 이제 버스에 탑승하여 이상설선생님을 만나러 간다. 차로 약 10분거리에 있는 라즈돌나야강(수이푼강)가 에 서생님의 유허비가 서있다. 비가 내린 탓에 물웅덩이가 생겨 걸어가기가 곤란했는데 기사님의 배려로 강가 유허비앞 까지 들어 갈 수 있었다. 유허비에는 다른 팀이 먼저 와 있어서 유해를 화장하여 뿌렸다는 수이푼 강가에서 선생의 마지막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눈물이 난다. 먼 이국 땅에서 흔적도 남기지 않고 가셨지만 그 숭고한 뜻을 우리는 잊지않고 찾아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헤이그밀사로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니 미안할 뿐이다. 순국의 정신만이라도 우리는 간직하고 뜻에 어긋나지 않게 강한 나라로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우리 아이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들이 이제 이 나라의 주인공인것을.......
선생님의 유허비에 참배하고 사진도 찍었다. 다시우리는 고려인문화센터로 갔다.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서니 태극기와 러시아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두 국기의 색깔이 묘하게 같다. 아이들이 발견하고 신기해 한다 건물안으로 들어가 고려인들의 연해주 이주과정과 이주후 삶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그리고 이 곳에서 나라를 되찾기 위해 활동한 독립운동가들도 만나보았다. 블라디보스톡의 한 대학교 교정에 세워져 방치되있던 안중근의사기념비도 이 곳으로 가져와 다시 세워두었다. 안중근의사기념비와 함께 홍범도장군, 13도 의군 도총재 류인석장군비도 함께 서있다. 이제는 방치되지않고 잘 보존 할 수 있을것 같아 안심이 된다. 다음으로 4월참변 추모비에 참배했다.
고려사범전문학교
1920년대 한인교사들을 양성하던 학교
1918년 설립된 한인 교원 양성학교로 전로한족중앙총회에서 4만 루블을 들여 만들었다고
알려진 곳이며, 1937년 한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폐교가 될 때까지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1922년 시베리아 내전이 종료된 뒤에는 러시아 교육전문학교의 조선과로 속해있다가,
1926년 고려교육전문학교로 정식 설립되었다.
이 학교 졸업생에게는 7년제 학교의 교사 자격증이 발급되었으며,
1926년부터 1936년까지 10년 간 교원 244명을 배출하였다.
현재 이 건물은 우스리스크 문화 학교의 교사로 활용되고 있다.
우수리스크의 라즈돌나야강(수이푼강:중국명)
이곳에 이상설선생의 유해가 뿌려진 곳이라고 한다
이 강물은 흘러흘러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
아마도 이상설선생은 죽어서도 고국으로 돌아가 독립된 대한민국을 만나고 싶어
이 강에 뿌려달라고 했을까?
갑자기 동해의 용이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했던 문무왕이 생각난다.
이상설의사유허지 :우수리스크시 라즈돌리노예강변
이상설은 1906년 북간도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용정에 서전서숙을 개숙한 뒤
이듬해 7월에는 헤이그특사의 정사가 되어 구국외교에 헌신하였으며,
1908년 연해주로 망명한 뒤로는 십삼도의군 창설과 성명회 결성,
그리고 권업회 활동 등을 지도했던 독립운동계의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그는 우수리스크에서 자신의 육신을 화장할 것과 자신의 필적을 모두 소각할 것을
유언으로 남겨두고 1917년 3월 2일 48세를 일기로 쓸쓸히 타계하였다.
우수리스크에서의 이러한 그의 유적을 기려 광복회와 고려학술재단은
2001년 10월 18일 러시아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곳에 유허비를 세웠다.
유허비 주변에는 유독 소나무가 많이 심어져있다.
김니콜라이고려한인회회장이 사비를 들려 이 곳에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유허비의 설립 과정을 잘 안다는 여행 안내자가 알려준 사실이다.
그이는 비석이 담고 있는 뜻도 설명했다.
비석이 직선 모양인 것은 이상설 선생의 올곧은 선비 정신을 표현한 것이고,
네 면에 새겨진 불꽃 모양의 문양은 선생의 불꽃같은 삶과 동해로 흘러가 조국의 수호신이
되었을 선생을 동시에 표현한 것이라고 했다.
그이는 수호신이라는 말에 힘을 주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추운 남의 땅에서 고난 속에 독립운동을 벌였던 지사들은 살아서도 조국의 수호신이었고
혼이 되어서도 조국의 수호신이 되었을 것이다.
출처 : 카페 도방 이야기 신연호글에서 따옴
이 기밀문서에는 ‘00에는 대한제국 신민 이상설이 살고 있다.
블라디보스토크시 신한촌 인근에 벽돌과 목재로 지은 2층 건물이 이상설 선생 등이
고려인문화센터 :우수리스크시 아무르스캬야 거리 63
고려인 이주 1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8년 건축된 이 건물은
연해주 일대에 집중적으로 뿌리내린 고려 이주민들을 위한 문화시설이다.
건물이 거대하지는 않지만 실속있게 꾸며져있는데,
이주민의 역사와 이주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박물관과 고려인들이 만들고 계승해온
식문화를 즐길 수 있는 식당, 그리고 고려인들의 전통 춤을 감상할 수 있는 안무단까지 있어 다양한 볼거리와 먹거리를 제공한다.
우리 민족의 아픈 과거와 바른 역사를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다.
문화센터 앞마당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가져온 안중근의사기념비가 서 있다.
안중근의사는 1907년 만주에서 블라디보스톡 개척리로 건너와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였다.
1908년 4월, 안중근의사는 연해주에서 항일의병 조직인 동의회의
발기인에 참여하며 평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1908년 7월 최재형이 이끄는 동의회와 이범윤이 이끄는 창의회 동지 300여 명과 함께 두만강 연안의 신아산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회령에서 패퇴한 후 연추에서 단지동맹 조직을 만든 안중근의사는
죽기를 각오로 항일전에 뛰어들 것을 맹세하였다.
그 후 안중근의사는 1909년 『대동공보』에 실린 이토히로부미의 하얼빈 방문 소식을 듣고 대동공보사에서 의거를 준비하였다.
대동공보사 사장 최재형이 회장인 동의회의 핵심 조직원 중 한 명이 바로 안중근의사였다.
즉 안중근은 하얼빈 의거를 단지 개인으로서의 의거가 아니라
한국의군 참모중장 자격으로 조국의 독립전쟁을 거행한 것이다.
안중근의사 기념비는 서울 보건신학연구원과 블라디보스토크 주립의과대학이
2002년에 건립하였다.
무관심과 관리 소흘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지금은 우수리스크 고려인문화센터 내 마당에 옮겨 놓았다.
1층 로비의 풍경
4월참변추모비
이 추모비는 1920년 4월 일본군이 자행한 4월 참변 당시 우수리스크 지역에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소련군 병사 170명과 빨치산 70명 등 총240명의 희생자들을
위해 설립된 것으로 바로 그 전투현장에 세워져 있다.
4월 참변이란 1920년 4월4일 밤부터 5일 새벽에 걸쳐 일본군이
연해주일대의 러시아 혁명세력과 한인들을 공격한 만행적 사건을 말한다.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나고 러시아에 볼셰비키 정권이 수립되자
일본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열강은 이를 붕괴시키고자
1918년 8월 시베리아출병을 단행하는 한편 반(反)볼셰비키 세력인 러시아 백위파를 지원했다. 하지만 볼셰비키의 완강한 저항에 직면한 다른 열강 군대가 철병을 단행하자 홀로 남게 된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 니콜스크-우수리스크, 라즈돌리노예, 이만(달네레첸스크)
스파스크, 하바로프스크, 포세트, 스챤 등 연해주 각지에서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연합한 러시아 혁명정부의 공공기관과 러시아 혁명세력을 공격하는 한편, 한인들을 공격하고
대량체포, 방화, 파괴, 학살하는 등 만행을 자행했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습격해 한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 50명을 무장해제하고
한인단체사무소와 가택을 수색해 60여 명을 검거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한민학교와 한인신보사 건물에 불을 질렀으며,
헌병분견대를 주둔시키고 자위대라는 헌병보조기구를 창설했다.
니콜스코-우수리스크에서도 일본군은 한인 76명을 검거하고 4월7일 이들 가운데 한인사회
최고원로인 최재형(崔在亨)을 비롯한 김이직(金理直), 엄주필(嚴柱弼), 황경섭(黃景燮)등
저명한 한인 독립운동지도자 4명을 총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지금까지도 그들의 시신에 대한 행방은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비문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승리를 위하여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이들의 업적은 영원하리라. 이곳은 1920년 4월 4일~5일까지 연해주에서 있었던,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 중 간섭자들과의 전투에서 숫적인 열세 상태에서 240명의 빨치산이 산화한 장소입니다.”
출처 :부산향토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 박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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