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8. 12. 10:15ㆍ선교자료/5.선교자료
이제 배도 든든히 채웠으니 아르바트거리를 산책해 보아야겠다. 아르바트거리 를 따라 쭈욱 내려가면 바다가 나오고 그 주변으로 해양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40분간의 자유시간을 얻은 우리는 해양공원까지 내려가서 올라오는 순서로 돌아보기로 하였다. 해양공원 쪽으로 내려가다. 이 곳이 바로 웅덕마퇴와 둔덕마퇴가 있었던 자리 라 유심히 살펴보면서 갔다. 지금은 한인촌의 모습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둔덕마퇴라 불렸던 내리막길에서 개척리터라는 표지석을 찾았다. 2014년 이주 150주년을 맞아 고려한인회에서 개척리터에 비석을 세운것이라고 했다. 아르바트거리에서 개척리의 흔적을 찾게되어 좋았다. 약속시간에 맞추어 만나기로 한 장소로 돌아갔다. 비록 해적커피는 못 먹어 보았지만 보람이 있었다.
아르바트거리
블라디보스톡의 아르바트 거리는 모스크바에 있는 아르바트 거리를 본떠 만든 거리이다.
이 아르바트 거리는 한국 기업 KT에서 조성해준 거리로 KT 거리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
정식 명칭은 Admirala Fokina Street이다.
보행자 중심의 거리인 만큼 길 곳곳에 앉을 수 있는 벤치와 분수대가 마련되어 있다.
또한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처럼 건물 사이사이에 낙서와 카페, 모임공간이 있어
아티스트들의 흔적을 찾아 돌아다니며 영감을 얻는 '예술의 거리'로도 활성화되어 있다.
아르바트거리에서 아래로 쭈욱 내려오면 해양공원이 나온다
블라디보스톡의 상징동물 아기호랑이
이 길의 아래쪽 낮은 지역이 둔덕마퇴 즉 개척리이다.
이 길의 언덕으로 올라가면 웅덕 마퇴이다.
웅덕마퇴와 둔덕마퇴를 고려인이 정착해 살았던 한인촌 개척리이다.
이 조형물은 블라디보스톡과 자매결연을 맺은 도시들을 새겨 두었다.
우리 나라의 인천과 부산도 자매결연 도시이다.
인천의 뒷면에는 부산이라고 새겨져 있다.
일본이 러일전쟁과 세계 2차대전에 대하여 사과하고 세계평화를 기원하자는 뜻으로 세운 탑
러시아에는 사과의 뜻을 표하며 세계평화를 위한 탑까지 세우면서
우리에게는 아직까지 한마디의 사과가 없는 일본의 이중적인 태도가 정말 일본스럽다.
저 탑을 세운 것에 대하여 설명하는 글
1864년 이주해온 한인들이 자리잡고 살았던 터 개척리라는 표지석을
2014년 150주년 기념으로 고려한인회에서 세운 탑
이제 다시 약속장소로 돌아와 일행을 기다리다.
모스크바의 아르바트거리
블라디보스톡의 아르바트거리와 비교해 보세요
푸시킨과 부인나탈리아의 동상
동상에서 두 부부는 두 손을 맞잡고 있지 않고 떨어져 있다.
그 이유는 그의 아내 나탈랴의 정숙하지 못한 태도 때문에 결국은 아내의 연인과 권총 결투를 벌여 총상을 입은지 이틀 뒤에 숨졌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동상에서 두부부는 손을 잡고 있지 않은 것으로 표현 했다.
어쩌면 푸시킨의 안타까운 죽음을 애도하면서 나탈랴의 정숙하지 못함을 꾸짖는
벌이 아닐까........
러시아의 저항시인이었던 오쿠자바의 동상.
빅토르 최
아버지는 고려인이고,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다.
1962년 6월 21일에 카자흐공화국의 크질오르다(Kzyl-Orda)에서 태어나서,
5년 뒤에 레닌그라드(Leningrad)로 이주하였다.
학창 시절부터 예술에 많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림과 조각에 대한 공부를 꾸준히 하면서 노래부르는 것을 즐겼다.
특히 여러 차례 당국의 제지를 받으면서도 아마추어 록그룹을 조직하였으며,
1982년에는 ‘키노(KINO)’라는 록그룹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다만 당시에는 록 음악이 환영받는 분위기가 아니어서, 대중의 관심을 끌지는 못하였다.
1987년에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카 정책이 시행되면서,
소련 사회에는 큰 변화가 일어났다.
개방정책으로 인해 서구와 교류가 더 쉬워졌고,
당국의 간섭도 확연히 누그러졌다. 이 때 빅토르 최의 록 음악 활동은 절정에 이르러,
1988년부터 덴마크, 프랑스, 미국을 방문하여 공연하였고,
1990년에는 일본도 방문하였다.
잦은해외 공연을 경험한 그는 소련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열정을 끊임없이 나타냈지만,
1990년 8월 15일에 라트비아(Latvia)의 수도 리가(Riga)에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림과 마트료시카를 파는 가게들이 길 양옆으로 늘어서 있다.
지금 비교해보니 모스크바의 아르바트거리는 주변 건물이며 규모면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러시아인들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톡의 아르바트거리는 연륜이 얼마되지않은 젊은 아이와 같다고 해야 하나.......그리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도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라는 점이다.
출처 :부산향토문화연구회 원문보기▶ 글쓴이 : 박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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