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블라디보스톡을 다녀와서 8(셋재날 최재형고택, 시민공원, 전로한족중앙총회 본부)|

2019. 8. 12. 10:20선교자료/5.선교자료

2019년 7월26일 답사 셋째날이다.  둘째날 아침 뷔페에서 음식을 잘못 골라 실패했는데 오늘은 그것을 거울삼아 간단하게 잘 선택했다. 빵도 어제보다는 맛있었다. 간단한 아침이었지만 부담스럽지 않게 잘 먹은 것 같다. 오늘은 숙소가 바뀌기 때문에 가방을 다 챙겨서 내려왔다. 버스에 가방을 싣고 프리마켓이 열리는 곳으로 갔다. 싱싱한 야채와 꿀이 많이 나와 있었다. 보리수꿀과 화분을 샀다. 비교적 가격이 싸고 좋았다. 오늘의 일정은 우수리스크의 독립운동과 관련된 유적들을 살펴보고 블라디보스톡으로 간다. 먼저 약 5분거리에 있는 최재형고택으로 갔다. 일본에 의해 체포 되기 까지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많은 돈을 벌어 부자가 되었어도 나라를 되찾기 위한 독립운동에 전재산을 쏟아 부은 분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늦었지만 이렇게 먼 연해주 땅에서 독립을 위해 헌신 한 분들을 찾게 되어 다행이다. 길 건너편에 있는 공원안에서 진나라의 유적이라고 하는 귀부를 보았는데  발해의 유물이라고 합니다.  공원근처에 전로한족중앙총회본부였던 학교로 갔다. 현재는 우수리스크 11호 교사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문이 열려 있어 안으로 들어가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철제 안내판을 건물 현관 위쪽 벽면에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이런 안내판이 붙여져 있는 것은 철저한 고증으로 확인 곳이라고 한다. 이런 것을 눈으로 볼 수 있음에 감사드린다.

어제의 실패를 거울삼아 오늘은 아주 잘 선택한 아침이었다.


오늘도 호텔앞 주차장에는 프리마켓이 열리고 있었다.

오늘은 보리수꿀을 한병사고 또 다른 가게에서 화분을 샀다.

호텔에서 약 5분 걸리에 있는 최재형고택에 왔다.

최재형고택 :우수리스크시 보르다르스코로 거리 38번지

당시 가옥의 원형을 대체로 잘 보존하고 있다.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철제 안내판을 도로쪽 벽면에 부착해 놓았다.

안내판에는 태극기와 러시아 양국 국기 아래에 다음과 같은

안내문(한글, 러시아어 병기)이 소개되어 있다. 

 “최재형의 집. 이 집은 연해주의 대표적 항일운동가이며

전로한족중앙총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였던 최재형 선생이

1919년부터 1920년 4월 일본헌병대에 의해 학살되기 전까지 거주하였던 곳이다.


 




최재형 [崔在亨]1858(철종 9) 함북 경원~ 1920.

   독립운동가. 일명 재형(在衡)·도헌(都憲). 러시아 이름은 뻬돌쏘오·최뻬찌카.

어릴 때 부모를 따라 러시아령 노우키예프스크로 이주하여 귀화했다.

상업으로 치부하여 노우키예프스크 도헌(都憲)이 되자,

연봉을 은행에 적립하여 그 이자로 동포 자녀 1명씩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유학시켰다. 1904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 해군소위로 경무관 부속 통역관이 되어 활동하는 한편,

남부소집회감독(南部所集會監督)으로 러시아 군부의 지원하에 동포들을 규합했다.

또한 전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 이범윤(李範允)과 결의형제하고 그를 지원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군대가 해산당하여 다수의 군인들이 러시아령으로 넘어오자,

이범윤과 함께 격문을 작성하고 최병준(崔秉俊)·엄인섭(嚴仁燮) 등을 각지에 파견하여 의병·군자금 모집에 나섰다.

이듬해 3월 이위종(李瑋鍾)으로부터 군자금 1만 루블을 지원받고,

190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범윤과 함께 독립군 600명을 훈련시킨 다음,

국내진공작전을 전개하여 함경북도 경원의 신아산(新阿山), 회령 영산(永山)에서

일본수비대를 궤멸시켰다.

이어 노우키예프스크에 박춘근(朴春根)이 이끄는 독립군 본부를 설치하는 한편,

 러시아군에 쇠고기 기름 등을 납품하여 군자금을 마련하고 동포 사회의 정착을 지원했다. 엄인섭·김서윤(金瑞允)·이위종 등과 독립운동단체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했으며, 1910년 2월 〈해조신문 海朝新聞〉을 인수하여

〈대동공보 大東共報〉로 개칭·재간행하여 동포들의 항일독립정신을 고취했다.

또한 노우키예프스크에 한인중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1911년 신한촌(新韓村)에서 홍범도(洪範圖)·이종호(李鍾浩) 등과 함께

권업회(勸業會)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재러한인대표로 2명의 위원을 파리 강화회의에

파견할 것을 계획하고 이를 추진했다.

그해 4월 상해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재무청장에 선임되었으나 이를 사양했다.

1920년 4월초 일제의 시베리아 출병에 대해 재러한인독립군부대를 총집결하고

사단장이 되어 러시아 적군과 함께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다가

김이직(金利稷)·황경섭(黃景燮)·엄주필(嚴周珌)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헤이룽장 성[黑龍江省]의 일본헌병본부로 압송되는 도중 탈출했으나

니콜스크 시 남쪽 군사경계선 근처에서 일본군추격대에 의해 살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최재형선생의 동상을 세우기 위해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입구에 있는 페치카(벽난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도운 러시아인

콘스탄틴 페트로비치 미하일로프, 세르게이 라조,  그리고리 블라디미로비치 포드스타빈, 

곤다찌총독(흑룡강성 아무르지역총독)


























안내판에  진나라의 구부라고 되어 있다

발해의 이름이 대진국이니 발해의 귀부이겠지요.








전로한족중앙총회 본부 (2차회의장소) : 우수리스크시 자나드보롭쓰까야 15번지

1910년 국치 전후 활발하게 전개되던 연해주 한인사회의 독립운동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극도로 위축되었다.

그뒤 1917년 볼세비키혁명이 일어나게 되자, 연해주 한인사회는 전로한족대표자회의를 열고 중앙총회를 결성하면서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10월 발발 이후인 1918년 6월에는 제2회 전로한족(회)중앙총회가 개최되었다.

하지만, 연해주 각 지방 단체 대표와 학교 대표 등 129명이 참석한 이 대회에서는

원호(귀화인), 여호(비귀화인)간에 첨예한 의견 대립이 노정되어 한인사회당,

그리고 대한국민회 계열 등으로 분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18년 6월 회의가 개최될 당시 이 건물은

니콜리스크우수리스크 실업학교 교사였다고 한다.    

 

2010년 한 러 수교 20주년 기념을 부착해 놓은 현판

ㅇ현재상태 : 건물의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현재 이 건물은 우수리스크 11호 학교 교사로 사용되고 있는 중이다.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철제 안내판을 건물 현관 위쪽 벽면에 부착해 놓았다.

안내판에는 태극기와 러시아 양국 국기 아래에

다음과 같은 안내문(한글, 러시아어 병기)이 소개되어 있다. 

 “이 건물은 1918년 6월 13일부터 23일까지 제2회 특별전로한족대표회의가 개최되어

민족의 자치와 항일독립운동을 추진하고자 전로한족중앙총회를 결성한 장소이다.

 1919년 3월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면서 전로한족중앙총회는 최초로

임시정부를 선포한 대한국민의회로 확대․개편되었다.”

이후 전로한족중앙총회는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로 발전한다.

의연금을 모집하고 뤄쯔거우[羅子溝]에 군사훈련소 설치하는 활동에 힘쓰며,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비했다.

1차회의 개최지는 현재 학교운동장으로 변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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