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로마와 노예

2015. 7. 7. 17:43사진·동영상 자료/2.성지순례 자료

오늘날 사람들은 노예제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있고, 특히 로마에 대해선 그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편이다. 그러나 로마는 그저 고대 노예제 문명 가운데 하나일 뿐이었다. 고대 사회에서 전쟁 포로를 노예로 삼거나 오랑캐들을 노예로 사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었다.

 로마 시대 이전에 적어도 2500년동안 고대 이집트에선 노예를 부렸다. 바빌로니아, 인디아, 중국, 페르시아, 그리스에서도 노예는 흔했다. 근대 서구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19세기까지 아메리카 농장에서는 노예를 부렸고, 19세기 영국에서 많은 빈민 노동자들이 노예와 같은 생활을 했다. 또한 아직까지도 세계의 일부 지역에서 노예제(인신 매매)가 남아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노예제란 역사상 오랫동안 이어진 관습이었으며, 로마의 노예제가 딱히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로마의 경우에는 약 BC 200년부터 노예 착취가 사회를 떠받쳐왔다고 할 수 있다. 노예 경제 체제는 노예 노동력의 광범위한 확장에 더욱 의존하게 되었다. 노예들은 광산과, 제국의 수많은 농장과 도기 공방에서 일하였다.  국가의 공무도 주로 노예가 처리하고 유지하였다. 또한 정부 부서도 제국의 행정을 관리하기 위해 교육받은 노예들에게 상당 부분 의존하였다. 또한 조폐나 빈민에 대한 식량분배같은 중요한 제도에서도 노예가 크게 쓰였다. 교육받은 노예들은 사무원, 회계사같은 자영업도 했다. 또한 교사, 사서, 필경사, 예술가, 연예인 심지어 의사까지도 맡았다. 그리고 로마의 개인 집에서는 하인으로 노예를 부렸다. 하수구를 청소하는 노예부터, 황제의 필경사까지 노예는 로마 사회의 필수적인 구성원이었다. 제정 후기에 노예제는 그 중요성이 점점 떨어지게 되었다. 자비를 요구하는 그리스도교가 성장하고, 노예 공급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초기의 로마인들은 적은 수의 집 안 노예들에 대해 만족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부를 쌓으면서, 노예의 수는 크게 늘었다. 주인의 목욕같은 간단한 일에도 한 명 이상의 노예가 필요할 지경이었고, 아이들을 학교로 보내주는 데도 노예가 쓰인 바 있다.

 부잣집에서는 많은 노예들이 10명으로 이루어진 그룹으로 나뉘어졌다. 각 그룹은 십장foreman 한 명의 감독을 받았다. 집안 관리는 해방 노예들이 집사(프라쿠라토르, 초기에는 아트리엔시스atriensis라고 했다)를 맡아 일하기도 했다. 목욕할 때 적어도 노예를 세 명씩 데리고 다녀야 잘 사는 집안 소리를 들었다. 노예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은 창피한 빈곤의 상징이었다.  

 산업 현장에선 대개 노예들을 작업조로 나누어 부렸다. 이들 작업조는 하나의 숙련노동자 집단으로, 대개 다시 해체되지 않았다.

 소아시아(터키)같은 곳에서는 속주 세금 징수인들이 노예 공급자 노릇도 했다. 이들은 노예들을 노예 시장으로 보내어 팔았는데, 노예상인들은 이들을 팔기 위해 로마로 돌아가곤 했다. 가장 큰 노예 시장은 에게 해의 델로스Delos 섬이라고 하는데, 이곳에서는 약 10,000명의 노예를 수용할 수 있었다.

 고대 서구 세계에서, 정복을 통해 노예를 획득하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로서, 로마도 예외가 아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어느 갈리아 도시를 점령한 적이 있었는데, 그는 이 도시의 한 지역에 사는 사람 모두를 그 자리에서 바로 노예로 팔아넘겼다. 노예 상인들은 그의 군대와 동행하고 있었다. 한번은 5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노예로 끌려가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노예의 결혼은 주인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었으며, 법의 제약도 없었다. 이들이 아이를 낳으면 그 아이도 노예가 된다.

  도주하다 잡힌 노예는 낙인이 찍히거나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 노예의 처분은 완전히 주인의 손에 달려있었으며,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다.

 노예들 가운데 어떤 자들은 전사로 훈련받아, 검투사가 되어 원형 투기장에서 싸운다. 검투사 학교에서 이들을 양성했는데, BC 73년에 카푸아Capua의 어느 검투사 학교에서 유명한 스파르타쿠스Spartacus의 반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림 설명)

 

 영화 '스파르타쿠스'

 

 1960년 작

 스탠리 큐브릭 감독

 커크 더글러스, 로렌스 올리비에 주연

  검투사들은 자신의 운에 따라 비참한 삶을 산다. 농장 노예들은 사슬에 묶인 채 일하며, 밤에는 숙소에 감금된다. 그러나 모든 노예들이 시골에서 그런 비참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가령 노예 목동들은 꽤 자유롭게 살 수 있었으며, 자신에게 맡겨진 가축들을 돌보았다.

  어떤 로마 사람들은 노예 양성을 일종의 투자로 여겼다. 大 카토는 젊은 노예들을 사서 특별한 기술을 가르켜 훈련시켰다. 그리하여 그는 나중에 이문을 붙여 이들을 팔았다. 카토는 자신의 책에서, 노예 12 명(십장 한 명, 일꾼 11 명) 정도면 150 에이커(약 60.7 ha) 규모의 올리브와 양을 기르는 농장을 운영하는데 충분하다고 썼다.

 노예제는 고대 세계의 기술 발전에 악영향을 주었다. 산업 분야 전반에 공짜에 가까운 노예 노동력이 마구 흘러들어오면서, 딱히 장비 개선을 자극할 요소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 그림 설명) 노예 시장

 조영관의 감독에 따라, 노예 상인은 포룸이나 가게에서 노예를 판매했다. 때로는 회전하는 단 위에 노예를 세워 팔기도 했다. 외국에서 바로 데려온 노예는 발에 분필로 희게 칠하여 전시했다. 각 노예의 목에는 현판이 걸려있었는데, 여기에는 구매자가 될 만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 국적, 능력, 장단점 등이 나와 있었다.

 최상의 노예는 포룸과 가까운 사이프타saepta에서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은 고급 상점이 있던 유행계의 모임 장소였다. 노예의 가격은 당연히 그 노예의 질과 나이에 따라 천차만별이었다.

 거액의 돈에서 보잘 것 없는 액수에 이르기까지, 노예 가격에 대한 여러 기록이 남아있는데, 재능있는 문법 교사grammaticus 노예는 700,000 세스테르티우스에 팔렸다고 한다. 그러나 그런 터무니없이 비싼 노예는 드물었다. 일반적인 기준에 따라 특정한 기술이 있는 노예는 훈련받지 않은 노예보다 스무 배 정도 비쌌다.

 총명하고 학식이 높을수록 노예가 최고가를 보여준다. 그 다음으로 외모와 기술이 중요한 조건이었다. 그러나 저능하거나 난쟁이거나, 추한 노예도 높은 가격에 팔릴 수 있었는데, 이 노예는 구매자를 즐겁게 해 줄 어릿광대 노릇을 하게 된다.

 고대 로마에는 노예는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살 수 있는 제도도 있었다. 노예가 시간제 근무를 통해 자신의 재산peculium을 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주인의 순수한 온정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늙은 노예가 돈을 주고 자유의 몸이 되면, 주인은 그 돈으로 새로운 젊은 노예를 살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이를 통해 노예가 노환으로 죽어 손해를 보는 일이 없었다.   

 이 관례는 공화정이 무너졌을 때 더욱 널리 퍼져서, 아우구스투스는 이를 제한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는 해방 노예에게 시민권을 주되, 여기서 공직에 오를 권리는 빼버렸다. 어떤 해방 노예는 자신의 기술로 돈을 벌어, 자신의 옛 주인보다 더 부유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노예의 주인은 노예에게 여자 노예 가운데 짝을 택할 권리를 주어, 결혼의 형태로 동거하게 해주는 특전(peculium과 무관하게)을 주기도 했다. 이를 노예 결혼contubernium이라 한다. 노예 결혼은 법적인 공인을 얻지 못하며, 이들 사이에 태어난 자식도 주인의 노예가 된다. 제정 시대에 노예 결혼은 합법화되고, 주인이 결혼한 노예를 따로 떼어 판매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노예에게 가하는 벌은 노역, 채찍질, 낙인, 관절이나 뼈 부수기, 십자가형 등 매우 무자비하다. 뿐만 아니라, 노예를 경기장에서 야생 동물의 먹이로 던져지거나, 기름에 젖은 망토가 씌여 산 채로 불태우기도 했다. 도망치다 잡힌 노예에게는 이마에 '도망자', '거짓말쟁이', '도둑놈'(FUG, KAL, FUR)를 뜻하는 문자로 낙인을 찍었다.

 

:: '도망자'는 라틴어로 fugitivus, '도둑'은 라틴어로 furs라 한다.

  로마법에서는 노예를 재산으로 보았으며, 이들은 주인의 의지에 종속되었다. 그러나 제정 시대에 들어, 노예에 대한 주인의 절대적인 권리는 일정 범위로 제한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칙령을 내려, 노예 주인에게 노예의 생사여탈권을 박탈했다. 나중에 콘스탄티누스는 노예를 죽이는 일을 살인죄로 규정한다.

 고의로 노예를 잔인하게 대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로마 사람들도 노예를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로마 사람들은 노예와 자유민의 차이란 단지 신분상의 차이라고 생각했지, 인종이나 문화적 우월성에 기초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주인이 노예에게 잔학한 형벌을 가하고 욕설을 퍼붓는 끔찍한 이야기들도 많지만, 한편으로는 주인에게 절대적으로 충성을 바친 노예들에 대한 기록도 남아있다. 주인을 배반하지 않으려고 고문이나 죽음을 택한 노예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은 노예를 경멸했다. 노예는 그런 존재였다. 이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일은 드물었고, 혹 그런 일이 있으면 나약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출처 : 로마탐험
글쓴이 : 똥깡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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