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중국 첫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

2013. 5. 10. 18:06운영자자료/중국교회에 관한 자료

중국 첫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


마카오의 신사

보통 사람들에게는 마카오 하면 카지노 도박, 포르트칼, 마카오신사 정도가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중국선교를 위한 회의를 마카오에서 하기로 되어 있어 아무 생각 없이 갔다. 홍콩, 싱가폴, 대만에서 중국 본토 선교사역을 하는 이들과 미국과 유럽에서 온 중국 선교관련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홍콩에서 배를 타고 한시간 남짓 가니 마카오에 도착했다.

마카오는 중국 남해안 주강과 서강 삼각주 남단 그러니까 지금 홍콩에서 서쪽으로 약 65Km지점에 있는 중국대륙의 일부 반도와 타이파 섬, 콜로아네의 두 섬으로 이루진 홍콩의 1/5 정도에 해당되는 동서거리 1.4Km, 남북거리 4Km의 작은 포르칼 자치구이었으나 홍콩처럼 최근 중국에 반환되었다.

마카오의 식민역사는 서방세계의 근대화 변천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1514년 포르트칼이 말라카(말레아지아 남부항구)를 정복하고, 1557년 마카오를 점거함으로 아시아 진출의 교두보로 삼는다. 그후 포루투칼은 1887년 영국이 아편전쟁의 결과 홍콩을 중국으로부터 얻어낸 것처럼 영주관리권을 얻어낸다. 중국 광동성(광쪼우) 즉 내륙으로 들어가는 관문으로 포르트칼의 번영에 따라 전성기(1582-1589)를 누렸던 마카오는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 영국이 세계의 주도권을 잡게되고 그 결과 홍콩이 그 중심에 서게 되면서 서서히 그 영광의 막을 내리게 됐다. 그래서 초기 천주교와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는 마카오가 중국 내륙 선교를 하는 교두보가 되었다.

우리가 회의를 하기 위해 사용한 교회는 프란시스 사비에르의 중국선교를 기념하기 위해서 만든 교회였다. 개신교가 전파되기 오래 전인 1594년 이미 예수회 신부 마테오리치가 선교사로 왔고 그 후 프란시스 사비에르도 일본을 비롯하여 아시아를 선교하면서 이곳에서 선교했기 때문이다. 삼일 내내 중국의 본토가 바로 건너다 보이는 하구의 반대편의 위치한 교회에서 중국선교를 위한 여러가지 이야기와 전략들을 나눴다. 모든 지역의 선교가 다 그렇겠지만 오늘의 중국선교 매우 조심스럽게 그리고 창의적으로 이뤄져야 한다. 이미 중국 안에 수천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있고 중국 정부는 경제적으로는 개방 정책을 취하고 있지만 외부로 부터 들어오는 종교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매우 민감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흥분하는 할아버지

삼일간의 긴장된 회의를 마치고 우리들은 시내 관광을 나섰다. 우리들 중에 이 시내 관광에 가장 흥분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우리 중 가장 나이가 많은 Dr. 바비 승(Bobby Sng)였다. 나는 약간 의아해 했다. 그는 환갑이 가까운 나이로 싱가폴에서 존경받는 기독교지도자였기 때문이다. 원래 의사였으나 기독 대학생운동(IVF)과 졸업생들을 위한 사역을 평생하고 이제는 은퇴하여 주로 강의와 설교를 하는 분이었다. 젊은이도 아닌 그 분이 시내 관광을 앞두고 흥분하다니! 그분은 의사 출신이지만 또 유명한 싱가폴 교회사를 쓸 정도록 알려진 분이었다. 그가 흥분한 이유는 바로 시내 구 개신교 묘지안에 있는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선교사의 묘지를 방문하기 때문이었다. 모리슨(1782-1834)은 중국에 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였다. 1807년부터 25년간 중국에서 사역하면서 중국어 성경을 번역한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선교사였다.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 년 1월 5일 영국 동북부의 노덤벌랜드(Northumberland)에서 태어난 모리슨은 사춘기때 항구 도시인 뉴카슬에 살면서 주변의 환경의 영향으로 잠시 방탕한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15세가 넘어서면서부터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산 체험을 하고 성경을 읽는 일에 전념한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이 다니던 교회의 목사에게서 라틴어, 헬라어 그리고 히브리어를 배우게 된다. 그는 또 학비를 벌기 위해서 부친의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매일매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가면서 그 과정을 일기로 기록한다.

그의 일기 한 부분에서 그는 미래의 자신의 삶에 대해서 "나는 장래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신다. 만일 하나님께서 내가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을 좋아하신다면, 그가 주실 기회를 기다렸다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봉사하리라"라고 기록한다. 이러한 하나님께 대한 신뢰 그리고 철저한 자기훈련(성경읽기, 언어공부하기, 일기쓰기)은 결국 그가 하나님으로 최초로 중국성경을 번역하는 사명을 맡기에 충분한 사람으로 자라게 된다.

그가 해외선교에 대해 관심을 가진 것은 그의 나이 17세때 교회 잡지에 싣린 선교사들에 관한 기록을 읽은 후이고 20세가 되는 1802년에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고 일정한 교육을 받기 위해 그해 11월 초에 선교사학교인 혹스턴 아카데미(Hoxton Academy)에 입학한다. 공부하는 동안 학교 안에서의 그의 명성은 대단했다. 교수들 마져도 그가 고국에 남아서 더 공부하고 교수가 될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하나님과 선교지를 향한 그의 뜨거운 열정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1804년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에 지원했다. 그러나 실제 그가 미국을 거쳐서 중국으로 향하는 배를 탄 것은 1807년 1월 28일이었다.

그 동안 그는 의학과천문학에 이르기까지 선교사가 되기 위한 훈련을 받았다. 그가 탄 배는 온갖 풍랑 속에서 겨우 뉴욕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다시 113일간의 항해를 통해 중국의 마카오연안에 닷을 내린 것은 동인도회사 창립 후 207년 아편전쟁(1840-1842)개전 33년 전인 1807년 9월 4일 이었다. 그리고 그날 아침 새벽 작은 목선을 갈아타고 마카오 해변의 작은 어촌에 상륙한 것이다. 모리슨이 마카오에 도착할 때(1807년) 쯤 영국은 이미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치고(1588년) 이미 진출해 있던 포르트칼, 네델란드의 세력을 압도하면서 1600년에 식민기업인 동인회사를 설립하여 중국의 비롯한 아시아의 식민지정복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던 상황이 었다. 1818-1828년에 아편전쟁이 일어났엇으므로 모리슨이 중국에서 활동하는 동안의 시대적 상황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최초의 전문인 자비량 선교사

모리슨은 처음부터 중국어 성경을 번역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 누구보다 언어를 빨리 배워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언어를 배운다는 것은 문화를 배운다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언어는 문화습관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어 잘하기가 힘든 것도 이 때문이다! 그래서 모리슨을 중국인들처럼 생활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서양인들에게 중국말을 가리치다가 들키면 사형을 당했다. 서양 세력의 침입을 견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렇지만 중국에서는 되는 일도 안 되는 일도 없다! 돈의 힘은 법률의 힘을 능가했다.

 

그는 좋은 중국어선생을 만나서 언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 선생들을 항상 몸에 독약을 가지고 다녔다. 발칵되어 사형 당하니 자결하겠다는 것이다. 모리슨은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중국인은 돈을 버는 일에 목숨을 건 것이다! 모리슨을 힘들게 했던 것은 언어 배우는 일만이 아니었다. 이미 와있던 천주교신부들이 그를 배척했다. 또 영국의 런던선교회와 교회의 무관심이었다. 그가 광조우에 온 처음 8개월 동안 200여통의 편지를 교보냈으나 답장은 오직 2통 뿐이었다. 극한 외로움이 그에게 다가왔다(현재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선교사들에게 당장 편지쓰라!). 그러나 모리슨은 이러한 사소한 일에 마음을 뺏기지 않았다.

그는 당시 마카오 주재 영국 상인 모르톤(william Morton)박사를 만나 그의 가족과 교제를 나누는 중 그의 딸 메리 모르톤과 만나서 결혼하게 된다. 그리고 결혼식장에서 바로 동인도회사의 통역원으로 초빙을 받아 1834년 동인도회사가 해산될 때까지 25넌간 통역원으로 일하면서 선교한다. 메리와의 결혼, 동인도회사의 초빙 등으로 그의 많은 문제, 즉 외로움, 선교지에서의 체류문제, 생활비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된다. 요즘 선교에서 유행하는 말로 창의적 접근지역에서 자비량 전문인사역자(성경 번역)가 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런던선교회는 모리슨이 동인도회사에 취직한 것에 대해 처음에 매우 분노를 느꼈다. 영국교회의 중국선교의 신성한 의무를 저버렸다는 것이다. 당시 선교현장의 형편을 이해 할 수 없었던 본국의 교회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동인도회사는 식민지 착취가 주 목적 이었으므로 선교사들에 대해서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의 선교는 동인도회사의 배경 하에 전개됐다는 사실을 무시할 수 없다. 식민지 확장 정책이 서구선교사들에게 아시아선교를 하는데 발판을 마련해 준 셈이 된 것이다.

사실 모리슨의 비전은 아시아전체의 선교였다. 1814년 모리슨은 후배선교사 밀네(Milne)와 동남아 선교기지에 대한 논의를 했다. 그들은 말라카(Malacca)를 선교기지로 정한다. 말라카는 말레이지아의 남부 항구 도시로 현재의 싱가폴과 쿠알라룸프르의 중간지점으로 서양인들에게는 아시아로 오는 또 다른 교두보였다. 그래서 포루투칼(1511년), 네델란드(1641년), 영국(1824년)의 통치를 받았다. 말레이지아의 마카오라고 할 수 있다.  한번 꼭 가볼 만한 곳이다!

 

마카오 방문 한달 후 말라카에 간 나는 1753년에 세워진 말라카의 스타더스 광장 앞에 있는 기독당(Christ Church Melaka)에서 밀네의 묘비와 모리슨을 기념하는 벽 장식을 발견하고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말라카는 당시 이미 많은 중국인들(화교)가 이 지역에 와있었고 자바, 인도네시아 등과 가까워 동남아시아의 선교를 위한 교두보가 되기에 충분한 지역이다. 또 마카오가 중국선교기지로 가장 적합한 곳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많은 제약(당시 중국은 외세의 침략을 막기 위해 여러가지 정책을 씀)으로 인해서 중국과는 다소 거리가 멀지만 말라카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래서 그곳에 중국인 사역자 양성을 위한 학교와 문서선교를 위한 인쇄소를 설치해 중국어 성경과 기독교문서를 제작 중국으로 가져가 사용했다.

중국에서의 첫 열매들

모리슨에 의한 중국에서의 첫 개신교 세례자는 성경역본을 인쇄한 '채로흥'의 동생인 '채고'였다. 그는 형의 인쇄소에서 모리슨이 번역한 신약성경 역본원고를 수정하는 가운데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게 됐다. 1814년 7월 16일 마카오 동쪽 해안 산기슭에 있는 한 동굴 속에서 모리슨은 '채고'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현재는 그곳에 1906년에 설립한 지도당(知道堂) 이라는 예배당이 있고 현재도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

 

중국의 첫 개신교 목사는 양발이었다. 1815년 양발은 돈을 벌기 위해 밀네를 따라 말라카에 가서 각종 기독교 선교문서를 인쇄하면서 차츰 기독교 교리에 심취했다. 그는 원래 불교이었으나 처음에는 돈을 벌기 위해 교정작업을 해야하므로 할 수 없이 성경을 읽게 되었지만 점차로 성경의 진리를 깨닫고 선교사들의 삶을 보고 회심하게 된다. 기독교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돌아간 양발은 곧 발칵되어 다시 말라카로 되돌아와 자신의 부인에게 성경을 가르키는 것이 계기가 되어 신학을 공부하게 되고 모리슨으로부터 목사로 장립되면서 중국 최초의 개신교목사가 되어 67세로 사망 할 때까지 놀라운 선교사역을 감당한다.

모리슨이 이룬 선교사역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은 중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일이다. 물론 모리슨의 번역 이전에도 몇 가지 역본이 있었으나 성경전권이 다 번역된 것은 모리슨에 의해서이다. 1807년에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1813년에 신약성경 전권을 1823년에는 구약성경 전권을 중국어로 출판했다. 당시 성경을 중국어로 번역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복잡한 중국언어(배워 본 사람은 얼마나 힘든지 안다!) 속에 깊인 내재되어 있는 동양사상을 다 이해하면서 기독교적 개념을 중국어로 소개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대단한 집중력의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1811년 중문법정(A Dictionary of the Chinese language), 영화자전(영어 중국어 사전) 등도 만든다. 1834년에 이르러 그는 영국무역감독관 네이피어의 중국어 비서겸 통역관으로 임명받는데 이 직책은 부 영사급이었다. 모리스는 동인도회사 안에서 사목의 역할도 겸했다. 그러던 1834년 7월 22일 네이피어가 마카오에서 광주로 여행 할 때 건강이 나쁜 상태에서 동행하다가 풍랑을 만나 건강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고 그후 몇 날이 못된 8월 1일 광동성 광조우에서 아들 존 로보트 모리슨의 가슴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그때 그의 나이가 52세였다. 25세에 중국으로 와서 25년을 살다가 순교한 것이다.

Born and died


공원 모양을 한 구 개신교묘지(Old Protestant Cemetery)에 들어서자 입구에 모리슨 기념예배당이 보였다. 교회를 끼고 뒤로 돌아가자 개신교선교사들이 묻혀있는 묘지가 보인다. 원래 이 묘지는 모리슨의 첫 부인이 메리가 죽자 동인도회사가 천파운드나 되는 거금을 주고 산 땅인데 그후 중국에서 죽어간 개신교선교사들이 묻히는 곳이 됐다. 한 200평 정도의 묘지에 수백 개의 묘와 비석이 서있다. 그들 사이를 지나가면서 묘비 하나 하나를 지날 때마다 한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복음선포를 위해 이국에 와서 죽어간 믿음의 선배들의 모습이 생생해 하게 살아오는 것 같다. 묘비마다 쓰여진 글을 읽어본다. 많은 수가 20-30대의 나이에 순교한 것이다.

 

모리슨의 묘는 그의 부인 메리 그리고 아들 존 로봇의 묘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조그마한 비석하나를 발견했다. 그 곳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James Morrison, Born and Died on March 5, 1811(1811년 3월 5일 태어나고 죽다.) 마카오에서 태어난 모리슨의 첫아들 제임스는 태어난 날 죽은 것이다. 묘지공원을 나서자 하늘이 시커며지며 소나기가 쏟아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다음날 중국으로 들어갔다. 거기서 중국어 성경으로 예배를 드렸다. 모리슨이 번역한 중국어 성경을 오늘 우리가 볼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을 아셨을 것이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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