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5. 10. 18:09ㆍ운영자자료/중국교회에 관한 자료
중국선교역사 / 의화단 사건
서 언
1900년 중국 북경(北京)을 비롯하여 화북(華北)지역을 중심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대대적인 반양운동(反洋運動)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의화단(義和團) 사건이다. 의화단 사건이 거국적인 반양운동이었지만, 실제로 그 피해가 제일 컸던 것은 화북지역의 기독교와 천주교였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는 주교 5명, 신부 48명, 신도 18,000명의 희생자를 낳고, 기독교도 예외가 아니어서 목사와 선교사 180명과 신도 5,000여명이 순교를 당해야 했다.
이번 호에서는 중국 기독교의 뼈아픈 역사를 돌아보며, 선배선교사들과 과거 중국교회 신도들이 남겨놓은 숭고한 순교정신을 기리고,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중국선교의 사명을 어떻게 효과 있게 달성할 수 있을지 함께 토론해 보고자 한다.
의화단의 소개
의화단에 대한 유래는 여러 학자들 간의 견해의 차이가 있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의화단이 기존의 백련회(白蓮會)라고 하는 비밀사회 단체에서 유래되었다고 주장한다. 1874년에 기주(冀州)에 흑호(黑虎)라는 비밀사회의 두목이 있었는데, 그의 세력이 강대하여 기주의 주지(州知) 이병형(李秉衡)이 의화단을 조직하여 흑호의 세력을 흡수하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의화단의 이름이 이때부터 사용되었다고 한다.
의화단의 조직은 실로 특이한 것이 많았는데, 그 두목을 선생이라 칭하고, 소두목들은 큰형님, 작은형님 등으로 칭했다. 무술을 연마할 때는 필히 25명이 하나의 단을 형성하고, 단에는 단장 한 명이 있어, 모든 대원들은 그의 명령에 복종해야 했다. 그들이 섬기는 신들은 중국 전통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로, 예를 들면, 강태공, 제갈량, 손오공, 저팔계 등 이었다. 무술을 연마할 때는 반드시 향을 피우고, 냉수로 온몸을 적시며 알아들을 수 없는 주문을 외운다. 심지어는 거품을 물고 땅을 뒹굴며, 이상한 동작을 하다가 술 취한 사람처럼 고함을 치고 춤을 추며 한바탕 난리를 친다.
그 외에, 홍등조(紅燈照)라는 십대소녀들의 무리가 있었는데, 그들은 홍색 옷을 입고, 한 손에는 빨간색 등(燈)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빨간색 수건을 들고, 공중을 나는 듯이 사방을 종횡하며, 방화와 파괴를 일삼았다. 의화단 단원들은 이들을 큰누나, 작은누나라고 칭하는데, 이들은 청나라를 구하고, 양인을 멸절하기위하여 무술을 배워야 한다고 민중들을 선동하였다. 그들은 무술의 신비함을 선전하면서, 양인들이 중국을 파괴하는 원흉이라고 하였다. 또한 서양 선교사들이 아이들의 심장을 도려내고, 눈을 뺀다는 등의 온갖 유언비어를 퍼트리고 다녔는데, 우민들은 이를 정말로 믿고 분개하며 쉽게 동참하였다. 그들은 서양인들을 대모자 (大毛子), 중국인 기독교인들을 이모자(二毛子), 외국어를 하는 중국인들을 삼모자(三毛子), 그리고 외국 상품을 사용하는 자들을 사모자(四毛子)라고 구별하여 칭하였다.
의화단 사건의 사회적 배경
-전통 산업 구조의 붕괴
중국의 역사학자 고위민(顧衛民)은 의화단의 이토록 강력한 배외행위는 서방의 현대화한 상업경제와 공업경제의 확장에 대한 완강한 반항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1840년 아편전쟁의 패배로 인하여, 중국은 서방 열강과 불평등조약을 맺고, 홍콩과 통상 항구를 통하여, 서양 상품이 물밀듯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하여 중국의 수공업을 중심으로한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소규모의 전통산업경제 체제가 전무후무한 도전을 받으며, 결국엔 붕괴되었다. 전통적인 산업체제가 붕괴되면서 수많은 실업자와 빈민층들이 형성되었고, 이들은 갈 곳 없이 방황하며, 생계를 위협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입장에서는 양인, 기독교, 기선, 철도, 전선, 양복, 양서 등 모든 서양문물이 그들의 고생의 원인이요, 원수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여 강한 적대심과 분노를 나타내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정치화 추세
서방에서 전래된 기독교와 천주교가 천진조약과 북경조약에 의해 선교의 자유는 물론 치외법권까지 누리며, 점점 정치화되기 시작하면서 중국인들에게 배교사상이 강력하게 일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은 아편전쟁의 실패로 말미암아 서방 열강과 불평등조약을 맺으면서, 문호를 완전히 개방하고, 선교의 자유는 물론 선교사와 교회의 재산을 보호해야하는 책임까지 짊어져야 했다. 그래서 관원들은 자기의 보직을 유지하기위하여 백성들을 제제하고, 교회와 선교사들을 과잉보호하게 되었다. 이에 백성들은 불만을 품고 교회와 선교사들을 비밀리에 공격하고, 심지어는 선교사들을 살해까지 하였다. 피해를 당한 교회와 선교사는 조약에 의하여 청 정부에게 많은 손해배상과 그 책임을 추궁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1860년대부터 1900년까지 수없이 발생한 교난들은 중국정부가 많은 보상을 지불하고, 대부분의 지방관들이 관직을 박탈당하고, 범죄자들을 엄벌하는 형식으로 결말을 맺었다. 또 선교사들의 입장에서는 교민들이 억울한 일을 당할 때 마다, 그들의 권익과 인권을 보호한다는 책임하에 그들을 대신하여 소송을 간섭하고 지방관들에게 압력을 가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교인들을 보호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도들과 일반인들 간의 분규가 가면 갈수록 심해지고, 선교사들은 교민들의 효과적인 보호를 위해 청중앙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그들의 영향력을 발휘하고자 하였다. 청정부는 이들의 압력에 못 이겨 선교사들의 등급에 따라 지방관과 대등한 직위을 주고, 대등하게 교섭하도록 하였다. 이로서 선교사들은 중국사회에서 새로운 권력체제를 형성하였으며, 많은 선교사들은 관리인양 자처하고, 명함과 제복, 가마등을 관리들과 똑같은 대우를 요구하며, 이를 향유하였기 때문에 중국인들은 그들에 대한 불만과 적대심이 극에 달하게 되었다.
-극심한 천재지변
19세기 말 중국에는 연이은 가뭄과 홍수 등의 재난이 발생하였는데, 이는 의화단 사건을 촉진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산동과 천진 등의 화북지역에서는 황하의 제방이 무너져 엄청난 재산과 인명피해를 내었고, 연이어 심한 가뭄 등 크고 작은 재난들이 수없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천재지변은 민간인들의 정서적인 불안을 초래하고, 또 수많은 이재민들은 갈 곳 없이 유리하였다.
고위민은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에서 발생한 의화단 사건은 전에 일어난 자강운동(自强運動)과 무술유신(戊戌維新)보다도 더 반침략적인 색채가 강하고, 대부분 하층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또 자연경제와 보수적인 사고와 관념 등의 복잡한 상황에서 도발하였기 때문에, 맹목적인 배외사상과 비이성적인 종교관이 의화단 사건의 큰 특성이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의화단 사건의 전개과정
산동 순무(巡撫:현재의 성장(省長)) 육현(毓賢)은 보수적이며 배외사상이 강한 인물로, 의화단이 청나라에 충성하고, 서방열강을 대항하는 중요한 배외세력으로 사용할 가치가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는 의화단을 은밀히 비호하였기 때문에, 의화단은 산동지역에서 그 세력을 쉽게 형성하게 되었다. 그들은 무술을 연마한다는 미명아래 단원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으나, 기독교를 박해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그들은 공공연히 교회를 파괴하고, 교인들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순무 육현은 그들을 제제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을 고무하여서, 의화단의 세력은 급속히 성장하고, 산동성 전역에서 크고 작은 교난이 끝없이 발생하게 되었다, 결국엔 1899년 12월30일, 영국 선교사 브룩스(Brooks, Sydney Malcolm Wellbye)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기까지 하였다. 육현은 그 사건으로 해임되고 원세개가 순무에 취임하면서 의화단의 두목을 체포하여, 극형에 처하고, 의화단의 활동을 엄격히 단속하여서, 의화단은 산동성에 활동할 수 없어, 직예(直隸)성으로 도피하여, 여전히 파괴행위를 자행하였다.
육현은 교난사건으로 관직에서 해임되었기 때문에, 그의 배외(排外) 감정은 더욱 심해졌다. 그는 중앙정부의 주요한 세력층들에게 의화단은 의민들로 신비한 무술과 서양인의 총포를 무서워하지 않는 용맹을 겸비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잘 이용하면 국력을 신장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적극 추천하였다. 마침 중앙에서 최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자희태후(慈禧太后)와 만주족의 보수세력들은 무술변법(戊戌變法)으로 배외감정이 상당히 고조되어 있는 시기여서, 육현의 이러한 추천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자희태후는 연일 의화단 두목들을 접견하고, 마침내 외국 열강과 전쟁을 할 것을 결정하였다. 물론 소수의 신하들은 이를 강력히 반대하였지만, 자희태후는 그들을 간신으로 몰아 5명의 대신을 참형시키며, 그들의 뜻을 관철시켰다. 청은 의화단을 의민이라 칭하고, 은 십만 량과 양식을 하사하여, 관병과 같은 대우를 하였다. 그리고 의화단은 정식 조직이 없기 때문에 재훈(載勛)을 의화단의 대원수로 임명하였다. 이리하여 비밀결사의 의화단은 하루아침에 국가의 허락 하에 공공연히 기독교를 박해하고, 서양문물을 파괴하는 청정부의 공식단체로 승격되었다.
1900년 5월 자희태후는 의화단을 지지하고, 그들의 애국행위를 칭찬하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외국에게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로써 의화단의 파괴행위는 국가를 사랑하는 애국행위로 승화되어서, 그들의 파괴행위는 직예와 북경을 중심으로 더욱 위세를 더하였다. 그들은 15일 일본 외교관을 살해하고, 교회를 파괴하며 교인들을 학살하는 등 북경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외국인들과 중국 신도들은 신변의 안전을 위하여 대사관과 천주교 북당(北堂)에 피신하여 잠시 생명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자희태후가 의화단을 믿고 외국대사관을 공격하라고 명령하였기 때문에 대사관과 교회당은 그들에게 포위당하고, 수시로 공격을 가하여 그들의 생명은 마치 풍전등화와 같이 위태하기 짝이 없었다. 한 영국인 선교사가 다음과 같이 그 당시의 상황을 편지로 써서 친구에게 보냈다. 그의 편지내용을 통하여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는지 알 수 있다 .
6월 17일 오후, 그들의 공격이 가장 극심했다. 그들은 불란서 대사관에 3개의 지뢰를 매설하고, 폭발시켜, 대사관이 절반이상 파괴되고,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우리들은 포탄의 공격을 피하기 위하여 호를 파고,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대피시켰다. 하루는 사병 한명이 전사하여, 나무 밑에 장사지내려고 하는데, 갑작이 포탄이 날아와 나무위에 터지는 바람에 사람들은 혼비백산하여 피신하고 말았다. 2개월 동안 서양인이 60명이 사망하였고, 140명이 부상당했다. 현재 포위당하고 있는 외국인은 무려 17개국에 이른다. 7월 18일 나는 병으로 들어 누워 있었는데, 구원병이 이미 천진에 도달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의화단들도 구원병이 왔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공격해왔다. 정원에 총알이 마치 비 오듯 쏟아지며, 밤에까지 그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성 밖에서 포탄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들은 구원병이 가까이 온 것을 알고 더욱 힘을 내어 저항하였다. 매우 짧은 내용의 편지지만, 그 당시의 위급한 상황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이 자세히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북경을 포함하여 직예와 산서성(山西省)에서 의화단들의 파괴 행위가 가장 치열했다. 북경에서 서양인 주거지 34채, 교회 18개, 남학교 12소, 여학교 11소, 신학교 4개, 약국 12개, 병원 8개, 인쇄소 3곳, 맹아학교 1개와 천주교 교회당 2개 등이 파괴되고, 철도와 전선, 교량과 역전 등의 많은 현대화 시설이 파괴되고, 수 천 명이 살해되었다. 산서성에서 피해가 심했던 이유는 육현이 후에 산서성 순무에 임명되었기 때문이었다. 육현은 친히 의화단과 군대를 이끌고 교회와 천주교당을 파괴하고, 신도들을 살해하였다. 그들은 목사, 신부, 수녀, 그리고 수 천 명의 신도와 아이들까지 체포하여, 그들에게 향을 들고 불상에 절하도록 위협하고, 또 그것도 부족하여 관청에 가서 기독교를 반대하는 증명서를 돈을 주고 사도록 협박하였다. 그러나 많은 기독교인들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죽음을 선택했다. 그들이 살해하는 방법은 너무도 잔인하여 차마 눈을 뜨고 못 볼 정도였다. 예를 들면 산채로 눈을 빼고, 심장을 도려내며, 사지를 분해하거나 화형과 생매장등 온갖 잔인한 방법을 모두 사용하였다. 산서성에서만 순교를 당한 성직자와 신도수가 수 천 명에 달했다고 하니 그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이 간다. 그 외에도 직예, 산동, 봉천 등의 만주지역, 그리고 심지어는 몽고까지 의화단의 피해가 확장되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동남지역의 이홍장(李鴻章), 류곤일(劉坤一), 장지동(張之洞)등 유력한 지방 장관들이 청정부의 선전명령을 거절하고, 연합하여 동남지역을 스스로 보호하였기 때문에 의화단의 피해가 북부지역에만 국한될 수 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 피해가 얼마나 컸을지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긴박한 상황에서 영국, 불란서, 독일, 일본, 소련, 오스트리아, 이태리와 미국 등 8개국은 연합군을 조직하여 구원 작전을 전개하여 북경을 점령하고, 자희태후는 광서황제를 데리고 서안으로 피신하여 일단 위기는 넘겼지만, 2개월 동안 받았던 고통과 피해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8개국 연합군은 청정부에 사건의 주모자들을 엄벌해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고, 독일과 일본에 사절단을 파견하여 정식으로 사죄할 것과 각국에 손해배상금 4억 5천만 량을 30년에 분할하여 보상하고, 각 지방에 파괴된 교회와 교우들의 집들은 그 지방관의 책임 하에 보상해 줄 것 등 모두 12항목을 요구하였는데, 자희태후는 이를 모두 수락하여 의화단 사건은 일단 그 막을 내렸지만, 그 상처는 쉽게 아물 수가 없었다.
맺는말
많은 학자들은 한국교회가 부흥한 이유 중에 하나는 한국교회 선배들이 흘린 순교의 피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중국교회는 우리보다 더 많은 희생과 순교의 피를 흘려야 했다. 의화단 사건은 중국인들의 반기독교 사상을 대표하는 역사적 사건이었지만, 그것이 종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고,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심지어 동서양의 문화적인 충돌을 반영하는 사건이었다. 다만 천주교와 기독교가 동서문화 충돌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되었을 뿐 이었다. 이 사건은 청정부의 최후의 발악이었으며, 이를 통해 청정부의 무능이 전 세계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10년 후 손문 선생이 이끄는 혁명군에 의해 청은 마침내 멸망하게 되었다. 의화단의 황당무계한 행위는 후에 많은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 역사의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기독교와 천주교가 왜 동서문화 충돌의 돌파구가 되었는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의심할 것 없이 근대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은 서방제국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진행되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기독교가 마치 제국주의의 앞잡이처럼 느껴졌을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인들의 분노가 자연히 기독교로 그 돌파구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성령을 의지하여 초대 교회를 건설한 사도행전의 선교 역사와 무력에 의지하여, 전개한 근대 중국의 선교 역사는 심은 대로 거둔다는 성경의 말씀을 너무나 실감나게 증명하고 있다. 오늘날 중국 선교를 한국교회의 시대적 사명으로 알고 열심히 중국선교에 참여하는 한국교회는 무엇을 의지하고 있을까?
강인규/ 대만중원대학교 교양학부 전임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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