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중국교회사 이야기

2013. 5. 10. 18:10운영자자료/중국교회에 관한 자료

중국 교회사 이야기

 

 

네스토리우파 교회, 중국에 들어오다.


흔히 중국교회하면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모리슨 등의 개신교 선교사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중국교회는 생각보다 깊은 역사를 갖고 있다. 이미 7세기에 페르시아를 거쳐서 들어온 네스토리우스파 교회 , 경교/京敎가 정부의 보호를 받으면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사 학자인 양선 목사가 불국사 수리 발견된 십자가상을 근거로, 기독교가 당나라를 거쳐 신라에 들어왔을 것이라는 학설을 주장할 정도로 경교는 중국 등의 동방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럼, 경교는 어떤 이유에서 이렇듯 동방에서 활동한 것일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431 에베소(Ephesus) 공회에서 있었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 키릴(Cyril) 신학자의 논쟁을 필요가 있다.

 

당시 [1]동로마 교회에서는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마리아를 어떻게 것인가에 대한 심각한 교리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네스토리우스가 속한 안디옥 학파는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모두 인정하되, 인성을 강조하여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Theotokos) 아니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학파에 속한 아나스타시우스 장로는 설교를 하면서 일부러 하나님의 어머니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알렉산드리아 학파도 안디옥 학파처럼 인성과 신성을 모두 인정하는 것은 같았지만,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여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라고 불려야 한다고 주장, 학파는 치열하게 대립을 벌였다.

 

결국 430 교회의 총대주교가 키릴의 교리를 지지하면서, 네스토리우스파가 이단으로 규정되었으나, 그래도 교리논쟁은 멈추지 않았다. 당시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이러한 기독교계의 교리논쟁으로 인한 분열을 멈추기 위해서 431 에베소 공회를 소집한다.

 

하지만, 네스토리우스파 주교들이 부득이하게 늦게 도착하자, 일찍 도착한 키릴 주교들의 주장만이 받아들여져서 네스토리우스는 주교직을 박탈당하고 만다.이에 대항해서 네스토리우스파 주교들은 키릴, 에베소 교회의 멤논 주교의 자격을 박탈하였으나 이마저도 황제의 키릴 지지로 의미가 없게 된다.

 

교리논쟁에 상심한 네스토리우스가 방황하다가 451 어느 수도원에서 숨을 거두자, 네스토리우스 신도 17명은 동방선교로 세력을 확장하기로 한다. 페르시아 , 이란의 에뎃사(Edessa) 정착하고, 키릴 학파에서 [2]칼케돈(Chalcedon)공회에서 자신들에 대한 이단 재규정으로 압박하자,아시리아 교회, 갈대아 교회로 독립하는 것으로 대항한 것이다. 674 페르시아가 아라비아에 멸망한 후에도 칼리파(Khalifa)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한 네스토리우스파는 762 바그다드로 교회를 옮겼으며, 해외 선교사들도 파송하여, 중국에도 기독교가 경교라는 이름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경교는 당시 황제였던 현종의 보호는 물론, 고력사 정치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할 정도로 지지를 받았는데, 이유는 크게 가지이다.

 

하나는 이슬람 세력을 견제할 있는 종교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번째는 현종이 한족(漢族) 아니라서 이방문화에 개방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당나라에서는 고구려유민 출신의 고선지, 서역출신의 안록산이 무인으로 활동할 정도로 이방인들에게도 열린 나라였다.

 

번째는 경교 수도사(수사)들의 실천하는 신앙생활이 교회에 대한 좋은 느낌을 주었다.

 

당시, 경교 수사들은 대진사(大眞寺)라고 불리는 교회에서 청빈하게 살았으며, 노예제도에 반대할 정도로 기독교 정신에 충실했다.

 

하지만, 경교는 중국최초의 여성 권력가인 측천무후가 집권하면서 불교와 더불어 쇠퇴하기 시작한다. 당시 측천무후는 종교재산을 국고에 환수시키는 정책을 썼는데, 교회도 예외가 없어서 교회재산은 모두 국고에 환수되고, 300명이나 되는 수사들을 모두 [3]환속(還俗) 정도로 타격을 입었다. 이후 경교는 몽골지배시대에 야리기온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다가 완전히 쇠퇴하고 말았다.

 

예수회의 활동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난 이후, 성공회, 장로교, 루터교 여러 개신교 교파들이 세력을 확장하자, 로마 가톨릭은 해외에 많은 선교사들을 중국, 인디아, /남미등에 파송한다. 이러한 가톨릭의 선교활동에 대한 열의로, [4]예수회, [5]프란체스코 , 도미니쿠스 회의 선교사들도 17세기 중국(명나라와 청나라)에서 선교사로 활발한 활동을 한다.

 

특히,[6]마태오 리치(Mateo Ricci) 신부는 천주실의(天主失意) 저술하여, 중국인들의 하늘을 다스리는 상제(常帝) 대한 신앙을 이해하고, 그들이 믿는 상제가 천주(天主) , 하나님임을 설명했다. , 하나님을 중국인들의 관점에서 알기 쉽게 소개한 것으로, 이러한 중국문화에 대한 높은 이해는 뛰어난 중국어와 중국 경전들에 대한 [7]지식인으로서의 이해에 근거한 것이다.

 

그가 죽은 후에도 유능한 예수회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이 선교활동을 했는데, 이중 독일출신의 가톨릭 신부인 아담 (Jean Adam Schal Von Bell) 가장 탁월했다. 아담 신부는 청나라 강희제때 활동했는데, 병자호란에서의 패배로 청나라에서 강제로 살고 있던 소현세자와 깊은 교제를 가졌다. [8]왕세자비 강씨가 농업으로 부를 축척하여 청나라에 끌려온 조선인들을 해방시켰다면, 소현세자는 외래문물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열린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소현세자 내외가 이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아버지 인조에게 죽임 당하고, 자신의 손자들은 부양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에 외래문물과 가톨릭이 들어오지는 못했다.

 

하지만, [9]중국에 사신으로 조선의 지식인들이 남경에서 가톨릭 선교사들과 교제를 가지면서 조선에도 [10]교회가 생긴다.

 

이렇듯 동아시아에서 가톨릭은 교세를 선교사들의 헌신을 바탕으로 확장하지만, 중국 가톨릭교회는 18세기에 논쟁에 휩싸이면서 탄압 받기 시작한다.

 

바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어떻게 것인가였는데, 이는 교황청에서 100여년이나 신학자들이 우상숭배 여부로 논쟁을 벌일 정도로 어려운 문제였다. 사실 중국 가톨릭 교회는 중국문화를 존중해서 중국식으로 의식주를 해결했고, [11]예배를 제외하고는 모든 분야에서 중국어를 사용했지만, 조상을 숭상하는 문화만큼은 쉽게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었다. 결국 조상에 대한 제사는 우상숭배로 규정되었는데, 이는 유교문화의 뿌리가 깊었던 중국에서는 받아들일 없는 것이었고, 교회는 기독교인들은 불효하는 라는 손가락질을 받는 수난을 면치 못한다. 결국 1724 황제의 칙령으로 천문학자로써 중국정부에서 봉사하는 소수의 선교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가톨릭 선교사들이 추방당하는 중국 크리스천들은 1860 종교의 자유가 허용될 때까지 전도금지, 배교의 압력 탄압을 면치 못한다.

 

개신교 선교


1807
1 8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ison;1782-1834) 성공회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 [12]미국을 거쳐 1807 9 파송되었다. , 모리슨은 중국 최초의 [13]개신교 선교사로써, 그는 이미 2년간 런던선교회에서 훈련을 받으면서 중국어, 의학, 천문학을 배웠기 때문에 바로 선교사로 파송되어도 무방하였다..

 

그는 마카오를 거쳐 광주에서 활동하면서 [14]마카오에서 활동하는 포르투갈 가톨릭 사제들의 개신교에 대한 배척으로 인한 중국 정부의 개신교 경계, 중국의 외세배척, 외부의 지원이 없음에 의한 가난, 동인도 회사 사람들이 이용가치가 없는 그를 상대해주지 않는 외로움 매우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중국어를 공부하는 선교준비를 했다.

 

하지만, 가난의 장벽은 높았고, 그는 1809 [15]동인도회사에 통역으로 입사하였다.

 

목회자는 목회에만 전념해야 한다고 믿는 한국교회의 관점에서 선교사이자 개신교 성직자인 그가 일반직장을 가진 것은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더구나, 그가 일한 곳은 식민지 수탈을 위한 기관이었기 때문에 그의 행동은 논쟁의 대상이 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그의 입장에서는 필요한 행동이었다.

 

그가 런던선교회에서 보낸 해명을 보면,

 

나의 취직은 중국에서 안전하게 거류할 있는 신변조치이며,

본인의 맡은 통역 일은 나의 현지어 학습에 도움이 것이며,

나의 선교활동에 대한 교회의 경제부담을 줄이는 일이며,

이로 인하여 동인도 회사 주재 직원들이 선교사인 본인을 경원시하 않을 것이라는 판단임.

 이라고 되어 있다.

 

실제로 그는 일반직장에서 일하면서 일정한 수입이 생기자, 학교(영화학교)설립, 문서선교(정기간행물 발간) 돈이 많이 들지만 선교효과가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으며, 중국인 신자들에 대한 세례, 중국어 사전 발간(1815-23), 중국어 /구약 성서인 신천성서번역(1813 밀론과 같이 번역함)으로도 복음을 전했다.

 

중국에서 활동한 선교사로는 유명한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 있는데, 모리슨 선교사와 마찬가지로 성공회에서 신앙 생활한 개신교 선교사이다. 알려져 있듯이, 허드슨은 중국 현지에 적응하는 선교활동을 하여 중국식문화에 동화된 삶을 살았다.

 

문화를 존중하는 그의 겸손함은 중국인들에게 친숙히 복음을 전할 있도록 것은 물론, 1842 영국의 침략 전쟁인 [16]아편전쟁과 [17]굴욕 조약인 난징조약 체결로 높아진 중국인들의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줄여주었다. 당시 [18]서구 선교사들은 폭력을 써서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극단에 치우친 사고를 갖고 있었는데, 허드슨은 겸손하면서도 지혜롭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는 의료선교도 하여, [19]돌아다니면서 아픈 어린이가 있으면 약을 주어 치료하는 방법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이러한 의료선교는 의료수준이 낙후되어 있던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친숙하게 여기도록 하여 복음을 전할 있게 하였다.

 

당시 만주의 봉천에도 허드슨 외의 선교사들이 헌신하였는데, 이들은 현지인들과의 관계를 가져서 복음을 전하였다. [20]실제로 당시 봉천의 총독은 이슬람 교도였는데, 개신교 선교사들은 흉년이 백성을 위해 직접 닭죽을 쑤어 나누어 정도로 자비로운 성격의 그를 진심으로 존경하였고, 그러한 서로간의 존중은 복음전파가 있도록 하였다. 물론, 여성 선교사들도 남성 선교사 못지 않게 성실히 선교활동을 하였다.

 

이들은 허드슨 테일러의 중국 내지선교회(CIM; 동아시아 선교회/OMF 전신)에서 훈련을 받은 선교사들이었다. 19세기 영국 여성들은 1928 남자와 여자 모두 참여하는 보통선거가 시행되기 전까지 정치에 참여할 없을 정도로 대외활동을 없었는데, 허드슨 테일러에 의해서 선교사가 되어 대외활동을 있게 것이었다. 여성도 성공회 사제나 장로교 목사가 있는 현대 영국 교회에 비할 수는 없지만, 당시에는 이는 혁명이었다.

 

당연히 이들은 차별로 인해서 억눌림 받던 힘과 재능을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발휘할 있었다.

 

외에도 영국 이외에 노르웨이에서 선교사가 있었는데, 하늘에 속한 사람에서 린자바오(일명 윈형제) 존경하는 선교사로 소개한 마리 몬센(Marie Monsen)이다. [21]노르웨이의 루터교 선교사인 그는 1901년부터 1932년까지 가정교회를 돌면서 완곡하지 않은 내용의 설교를 하였는데, 필자는 남성에 비해 몸이 연약한 여성이 강한 정신력으로 그토록 왕성한 활동을 것에 대해서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중국의 개신교 선교도 배척과 탄압의 길을 걸었다.

 

우선, 1857 태평천국운동의 영향으로 보수파들인 사대부들의 배척을 받았다.

[22]태평천국운동은 흥수전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23]야훼의 아들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형님이라고 주장하면서 시작된 이단인 상제회가 태평천국이라는 절대평등사회를 구현하겠다면서 일으킨 사회혁명 운동이다. 이들은 청나라정부와 서구 열강들의 공격으로 흥수전이 자살하여 결국 실패로 돌아갔지만, 보수파들에 의해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게 하였다.

 

물론, 상제회는 교주 흥수전이 런던선교회에서 개신교 교리를 배웠기 때문에 기독교와 유사하지만, 교주를 우상화하는 이단에 불과하다. 하지만, 대통령을 선출하려고 민주주의와 절대평등사회를 주장하는 사회주의를 주장했기 때문에, 보수파들인 사대부들의 눈에는 당시 개신교 신도들도 상제회처럼 자신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보였다.

 

또한 외세배척 운동인 의화단운동 때는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이 살해당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 실제로 1905 중국 내지선교회 선교사들이 105명이나 의화단 운동당시 기독교에 대한 배척으로 순교한 적이 있다. ,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라면 개신교와 가톨릭의 구분 없이 핍박을 피할 없는 것이다.

 

중국 정교회

 

개신교, 가톨릭과 더불어 중국 기독교의 교파인, 중국 정교회에 대한 정보는 인터넷에서 거의 구할 없었고, ‘최계명의 "비잔티움 제국(http://members.nate.com/darkedda/)’이라는 홈페이지에서 발췌한 정보 정도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정교회도 일부의 오해와는 달리 분명히 선교활동을 하는 교회이며,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 받았다는 것이다.

 

1686 당시 중국의 황제가 일단의 러시아인 카자흐 병사들을 그의 호위병으로 임명 하면서부터이다. 후에 카자흐 병사들의 후손들은 완전히 중국 문화에 동화되었지만 신앙만은 정교회 신앙으로 남아 있었고 그들이 중국에서의 정교회 공동체의 핵심이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본격적인 중국 선교는 19세기 말부터이며 1914년에는 중국인 성직자를 포함하여 5,000 정도의 중국 정교회 신도들과 베이징에 정교신학교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17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 이후엔 중국에 러시아인과 중국인을 포함하여 100,000 정도의 신자들이 분포해 있었으며 1939년에는 5명의 주교와 하얼빈에 정교회 대학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 혁명으로 인해 많은 정교회 신자들이 서방으로 이주하거나 러시아에 송환되어 현재는 하얼빈에 성당만이 운영되고 있을 뿐이다. 중국 정교회는 1956 러시아 총대주교 청에 의해 자치교회의 지위를 인정 받았다.

 

참고자료

 

정교회 한국대교구 홈페이지 : http://www..orthodox.or.kr

우리역사의 수수께끼, ‘신라시대에 기독교가 들어왔는가’/이덕일 공저/김영사

중국선교핸드북/다니엘 차오 /중국 어문선교회 편역/두란노

여인열전 소현세자 강씨’, ‘조선최초의 천주교 교우회장 강완숙’/이덕일/김영사

http://kcm.co.kr/mir/webzine/200207/biography.htm중국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모리슨

한국과 이웃나라 /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 / 이인화 번역/ 살림

교회와 사회(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 소식지) 실린 중국 기독교 협회 회장인 조성결 목사님의 강의내용 일부

상식 밖의 세계사/ 효상/새길

아시아 추수선교회 소식지(http://www.asiaharvest.org/)

미션저널 2000 겨울 , ‘토마스 목사 강의’/예수교장로회(합동측) 총회 선교회(GMS)

최재명의 비잔티움 제국(http://members.nate.com/darkedda/)



[1]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로마 교구의 교회들. 1054 로마교구는 로마 가톨릭교회로, 남은 4 교구는 동방정교회로 분열하였다. /정교회 한국 대교구 홈페이지(http://orthodox.or.kr/)

[2] 초대교회의 교회회의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 인정하는 단성론과 마리아는 하나님의 어머니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네스토리우스파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이로써 칼케돈 공회의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 단성론 주의자들은 시리아정교회, 이집트의 전통 교회인 콥틱교회로 분리되었고, 네스토리우스파와는 완전히 결별하게 되었다.

[3] 타의나 자의로 성직이나 수도자의 길을 포기함. 참고로, 독신 수도자 제도가 있는 성공회(개신교의 교파), 독신 성직 수도자 제도가 있는 로마 가톨릭(사제, 부제, 주교 성직자와 수도자가 독신을 하도록 되어 있다), 정교회(, 백색신부는 제외)에서는 타의나 자의로 성직이나 수도자의 길을 포기하는 환속이 가능하다.

[4] 군인 출신인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만든 가톨릭 수도회. 교황에 대한 충성, 윗사람에 대한 순종, 청빈이 주요 정신이었으며, 중국, 인디아, /남미, 일본에서 교육사업, 복음전파 등으로 활발한 선교활동을 했다.

[5] 13세기 이탈리아의 아씨시에서 활동한 가톨릭 성인인 프란체스코의 청빈을 본받는 수도회.

[6] 기독교 사상 2005 2월호/대한 기독교 서회

[7] 예수회의 성직자들은 라틴어, 수학, 논리학, 과학, 철학, 언어학,교육학, 신학, 중국 문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8] 여인열전/이덕일/김영사

[9] 여인열전 최초의 천주교 교우회장 강완숙’/이덕일/김영사

[10] 여기서 말하는 교회는 예배당이 아니라, 크리스천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실제로 현재까지 알려진 조선최초의 교회는 서울 명륜동( 명동) 김범우라는 크리스천의 집에 세워진 가정 교회이다. 하지만, 가톨릭 교회법상으로 사제가 목회하지 않는 교회는 불법이기 때문에, 중국 교회에 요청하여 조선최초의 외국인 가톨릭 신부인 주문모 신부를 파송하게 한다. / 여인열전 최초의 천주교 교우회장 강완숙’/이덕일/김영사

[11] 트렌트 교회회의에서 결정된 내용에 따라 로마가톨릭교회는 1965년까지 라틴어로 예배를 드렸다.

[12] 당시 동인도 회사 상사원이 아니면 중국에 없었으므로, 미국에 들려서 국무장관의 도움을 받았다.

[13] 성공회를 로마 가톨릭 , 천주교나 이단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간혹 있어서, 부연설명하면, 성공회는 영국 종교개혁으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개신교이다. 실제로 성공회 교리를 보면 예정설, 믿음을 통한 구원등 개신교의 영향을 받은 교리들을 갖고 있다.

[14] 1962 바티칸 공의회에서 개신교를 분리된 형제 인정하기 전까지, 가톨릭은 개신교를 이단으로 생각했다.

[15] The east India company; 영국이 식민지 수탈을 위해서 만든 회사로 일제의 동양척식주식회사 못지 않은 식민지 흡혈 기관이었다.

[16] 영국 상인들이 중국과의 무역불균형으로 고민하던 정부의 묵인 하에 중국에 아편을 팔자, 중국정부는 아편을 강제 소각하고 상인들을 홍콩으로 추방하는 조치를 취한다. 이를 빌미로 영국정부는 무역을 통한 중국 착취를 위한, 제국주의성격의 침략전쟁을 일으켰는데, 이를 아편 전쟁이라 한다.

[17] 영국에 의해서 강제로 체결된 굴욕조약. 조약으로 중국정부는 통상의 자유확대와 종교의 자유를 억지로 허용해야 했기 때문에, 서구 열강들은 무역과 종교를 앞세운 식민지 개척을 마음 놓고 하게 되었다..홍콩이 99년간 조차지가 때도 이때이다.

[18] 중국 기독교 협회 회장인 조성결 목사님의 강의내용 일부/교회와 사회(한국 기독교 교회협의회 소식지)

[19] 미션저널 2000 겨울 , ‘토마스 목사 강의’/예수교장로회(합동측) 총회 선교회(GMS)

[20] 한국과 이웃 나라들 / 이사벨라 버드 비숍 지음/이인화 번역/살림

[21] 아시아 추수선교회 소식지인 Asia Harvest 나온 기사

[22] 상식밖의 세계사/안효상/새길

[23] 흔히 여호와라고 하는데, 야훼가 정확한 발음이다. : 믿음과 행함 하나님은 창조 주이시다.’/김영재 지음/합동신학대학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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