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1950년대의 삼자운동 (강인규)

2013. 5. 10. 18:08운영자자료/중국교회에 관한 자료

1950년대의 삼자운동

1937년 7월 7일, 일본이 허베이(河北)성의 루거우차오(蘆溝橋)사건을 도발하면서 중국 기독교는  8년간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몸부림쳐야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전쟁의 회오리는 잠시 종식 되었지만, 연이어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 사이의 권력투쟁으로 정국은 다시 한 번 혼란 상태에 돌입하게 되었다. 4년간의 치열한 내전과 투쟁 끝에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승리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수립되고 중국은 새로운 정국을 맞이해야 했다. 이러한 정치적인 대변화 속에서 중국 기독교는 삼자운동(三自運動)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정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하여 다시 한 번 큰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제 1950년대에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중국교회가 새로운 정치 환경에 어떻게 도전을 받고 적응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950년대 중국 기독교의 사회적 배경

 

▶ 정치적인 배경

 

1949년 9월 21일, 중국은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를 개최하고,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공동강령(이하 “공동강령”이라 칭함)>,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조직법>과 <중국인민 정치협상회의조직법>을 통과 시키고, <중앙인민정부위원회>를 선출하여, 마오쩌둥을 주석으로 정식 추대하였다. 이 회의를 통해 수도를 베이징(北京)으로 정하고 국기를 제정하는 등 건국의 기초를 확립하고 10월 1일, 마침내 “중화인민공화국”을 정식으로 수립하였다.

 

  <공동강령>은 중국의 임시헌법으로 국민의 민주 정치를 추구하고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와 반관료주의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1954년 헌법이 정식 제정되기까지 국가시정의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 경제적인 배경

 

건국 초기에 중국은 통화팽창, 불경기와 실업자의 폭증 등 심각한 경제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1950년 6월, 제7회 제3차 「전인대」에서 <토지개혁법>을 반포하고, 지주계층의 토지를 몰수하여 소작인들에게 분배시켰다. 이러한 토지개혁을 1952년말 까지 거의 완성시키고, 연이어 이듬해 10월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선포하여,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양식과 면화 등 생활필수품 등에 대하여 배급 제도를 채택하여 국민들의 소비량을 통제하는 등 각종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적극적인 노력을 하게 되었다.

▶ 외교적인 배경

 

건국이후에 중앙정부는 중국을 세계5대 강국의 하나로 성장시킨다는 목표아래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전개하였다. 당시 중국은 소련과 협조하여 미국위주의 제국주의와 대항한다는 기본적인 외교방침을 채택하고, 1949년 10월 3일 소련과 정식 외교관계를 맺고, 밀접한 왕래를 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소련 일변도의 외교정책은 1953년 3월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가 스탈린 사망 후 점차적으로 수정을 하게 되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중국은 100만 병사를 한국전에 투입시키고, 또 제네바에서 한국전쟁 휴전 협상에 참여하게 되었다. 비록 이 회의는 중국이 처음으로 국제회의에 참석한 것이지만, 이러한 기회를 통해 중국이 아시아는 물론 국제무대에서 외교적 지위를 향상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사회적인 배경

 

건국 초기에 중국은 민심을 수습하고, 반대 세력을 제거하며, 정국의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기 위하여 개인 기업체를 보호하고, 토지 사유제도 폐지를 보류하는 등 다양한 회유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정국이 점차 안정되면서 공산주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각종정책을 추진하고, 다양한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면서 인민들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중국이 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채택한 중요한 방법은 민중운동이었는데 이 민중운동을 통하여 선전과 여론 조성의 효과를 노리고 더 나아가 민중들의 지지를 얻는데 큰 효과를 보았다. 건국이후 5년 내에 중국은「토지개혁운동」,「항미원조(抗美援朝)운동」,「반혁명진압운동」,「삼반운동(三反: 반탐관, 반낭비, 반관료주의)」과 「오반운동(五反: 반뇌물, 반탈세, 반국가재산침점, 반부실공사, 반국가경제정보도취)」등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민중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민중운동은 중국이 그들의 정책을 추진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

삼자(三自)의 의의

 

삼자의 개념은 20세기 초에 벌써 중국 기독교의 지식층들에 의해 제창되었었다. 당시 청찡이(誠靜怡) 등은 중국교회가 자립(自立), 자양(自養), 자전(自傳)해서, 교회의 경제와 인재 등을 서양교회와 선교단체에 의지하지 않고 자급자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은 중국교회 사역의 부담과 책임을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점진적으로 중국인 신도들에게 교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주장한 주요한 목적은 중국교회가 지나치게 외국 선교회에 의존하고 있어 복음전파에 도움보다는 오히려 중국교회 성장에 치명적인 결점을 초래하고 있다고 보고 과감히 삼자의 자립교회 방식을 주장하여 중국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뿐 아니라 복음을 중국 문화의 기초아래 지속적으로 중국 전역에 널리 전파하고자 하였다.

 

  1949년 이후의 삼자운동은 그 성격과 정신이 20세기 초의 삼자운동과 대동소이 했지만 그 목적에 있어서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이 시기의 삼자운동의 목적은 복음을 널리 전하기보다는 오히려 중국교회를 통제하기 위한 요소가 더욱 강하여 삼자의 중점이 복음 전파에서 새로운 정부에 호응하여 그들의 정책을 이행하고 실천하는 수단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이다.

삼자운동의 형성

 

삼자운동은 1949년 우야오종(吳耀宗)등 교회 지도자 5명이 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면서 정식으로 형성되었다. 정치협상회의는 건국 초기 민주당원, 지식층, 화교 그리고 자산계층 등 비공산당원들을 흡수하기 위해 개최한 정치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우야오종의 활동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후에 그는 삼자운동의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1950년 초에 우야오종이 이끄는 상하이(上海), 베이징과 톈진(天津) 등의 교회 지도자 20여 명이 저우언라이(周恩來)를 방문하여 신정부의 종교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과 태도를 문의하고 방문단은 토론을 거쳐, 우야오종이 기초한 《중국 기독교가 신중국 국가 건설에 있어서 노력해야 할 길》이라는 선언문을 통과시켰다. 그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 선언문을 전국 각지의 교회 지도자들에게 전달하여 이에 서명하고 지지해줄 것을 촉구하였다. 이 선언문은 그 해 9월 22일 인민일보에 정식 등재하여 신정부가 이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히기도 하였다.

 

  이 선언문의 전체적인 내용은 중국 기독교가 정부에 대한 충성을 표하는 것이었다. 선언문은 모두 4부분으로 되어있었는데, 그 두 번째 부분에서는 중국 기독교와 단체들은 철저히 공동강령을 옹호하고, 정부의 영도 하에 제국주의, 봉건주의와 관료자본주의를 반대하여 독립, 민주, 평화, 통일과 부강한 신중국을 건설하는데 분투할 것을 강력히 호소하면서 그를 위한 기본 방침과 구체적인 방법은 제국주의와 교회와의 관계를 확실히 청산하고, 정부의 정책에 적극 호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선언문은 비록 중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선언문이지만 신앙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선언문은 후에 중국교회의 정치와 종교관계를 결속시키는 분수령 역할을 하는 중요한 문서가 되었다. 이후부터 선언문을 지지한 모든 종교 인사들은 반드시 국가정책을 옹호하는 것을 최우선 순위에 놓아야 했다. 그 이듬해 4월까지 선언문에 서명한 인사들이 18만 명이 넘었음을 당시 톈펑(天風)이라는 잡지에서 밝힌 바 있다.

삼자(三自)의 성립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은 “삼자”의 성립에 직접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중국정부는 기독교 단체가 미국을 지지하고 암암리에 정보를 제공할까 두려워하여 중국교회가 삼자운동을 전개하도록 적극 격려하는 한편 정부는 이 전쟁 기회를 이용하여 중국교회가 정부를 지지하는 여부를 신속하게 결정하도록 압력을 가하였던 것이다. 중국정부의 입장에서는 모든 국민들이 미국제국주의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정부가 추진하는 “항미원조운동(抗美援朝 運動:미국을 반대하고 북한을 돕자)” 에 적극 참여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1951년 4월 종교사무국은 미국 선교단체의 도움을 받는 기독교 단체 문제를 처리 한다는 주제 하에 기독교 단체회의를 개최하고 아래와 같은 항목을 통과시키면서 중국 기독교의 정부에 대한 지지와 참여의 태도를 분명히 밝혔다.

▶「중국 기독교의 각 교회와 단체들의 연합선언문」을 발표하고 중국 기독교는 정부의 정책을 적극 지지하고  “항미원조운동” 에 적극 참여한다는 기본적인 태도를 밝혔다.

 

▶「미국교회 선교비를 받는 기독교 단체 처리법」을 통과 시키고 미국 선교단체의 도움을 받는 교회와 단체들은 반드시 등록해야 한다는 규정을 통과시켰다.

 

▶ 공소회(公訴會)를 개최하고, 전국기독교협진회 주석인 미국인 선교사 프라이스(F.W. Price)등 일부 외국선교사와 중국교회 지도자 천원웬(陳文淵, 감리교), 양샤오추(梁小初, 청년회), 주요우위(朱友漁)등 일부 교회의 대표자들을 성토하고 비판하였다. 이 공소회는 그 후에 전국 각지에서 수없이 개최되는 공소회의 모델이 되었다.

 

▶「항미원조 삼자혁신운동위원회 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우야오종을 주석으로 선출하여 그를 중심으로 한 삼자운동이 정식 발족 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중국 기독교는 삼자운동을 전국적으로 추진하였는데, 그들은 주간지 “톈펑”을 발간하여 기독교 교리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하고 이를 적극 선전하였다. 예를 들면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개인에 해당하는 것이지 인민 전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인민의 적인 미제국주의에 적극 대항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들은 또 전국 각지에 공소회를 개최하여 그들의 운동을 반대하거나 비협조적인 교회지도자들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기회를 이용하여 민중들을 교육하여 일거양득의 효과를 노렸다. 이러한 공소회의 방식은 전국 각 지역에서 열렬히 호응하여 삼자운동을 전개한지 3개월 만에 상하이, 난징(南京), 칭다오(青岛) 등 63곳의 중요한 도시에서 공소회가 활발히 개최되었다.

 

  정치학습은 삼자운동을 추진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그들은 정치학습을 통하여 간부들을 훈련시키고 그들의 정신을 무장하여 삼자운동을 강력히 전개 할 뿐 아니라 삼자교회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또 일반 교회지도자들에게 각종 학습회를 통하여 삼자운동의 목적과 사상을 교육시켜 그들의 지지와 참여를 촉구하였다. 이러한 학습회는 매우 활발히 진행되어 각 교회와 교단에서는 총회를 개최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학습회를 개최하는 것이 당시의 기본 관례가 되었다. 

 

  그들은 삼자운동을 통하여 중국교회를 전면적으로 개편하려고 시도하였고 과거 교파 위주의 난립된 교회와 각종 기독교출판사 심지어는 신학교들까지 병합하거나 폐지하여 중국교회를 완전히 삼자계통으로 통일하고자 하였다. 1952년까지 신학교와 교회들을 대부분 정리하고 1958년에 이르러 전국의 교회들을 삼자계통으로 통일하여 난립된 교회조직을 완전히 개편하였다.

삼자운동의 전개 과정

 

1950년대의 삼자운동은 중국의 정치 운동의 변화와 매우 밀접한 관계 속에서 진행되었다. 공산당은 정권을 장악하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각종 정치운동을 전개하며 신중국 건설에 최선을 기울였다. 그 중요한 정치운동은 50년대 초기의 5대운동(五大運動: 토지개혁운동, 반혁명진압운동, 사상개조운동, 삼반운동(三反運動), 오반운동(五反運動))과 1953년에서 57년까지의 삼대개조운동(三大改造運動 : 농업집체화, 수공업집체화, 사기업상공업개조), 그리고 1958년의 대약진운동(大躍進運動) 등을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는데 삼자운동은 이러한 정국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응하며 발전하게 되었다.

 

  1949년에서 1958년까지의 삼자운동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1954년 삼자회(三自會)가 정식 성립되면서 이 시기의 분수령 역할을 하였다. 전반부에는 중국교회와 서방 선교단체의 관계를 완전히 근절하여 중국교회가 과거 서방교회에 의존하던 폐습을 철저히 제거하고 중국교회 독립 기초를 세우는데 주력하였다. 후반부에는 독립된 교회들을 삼자회에 귀속하도록 조직 개편에 중점을 두고 운동을 전개하였다.

 

  1951년 4월, 「미국 후원단체 문제회의」를 마친 후 전국 각지에 공소회를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이러한 공소회를 통해 수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비판을 받고 심지어는 감옥에 감금되기도 하였다. 많은 서양 선교사들은 각종 압력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중국을 떠나야 했으며 중국에 남아있더라도 그들이 과거에 갖고 있던 교회의 치리권은 완전히 박탈당했다.    1952년 말에 이르러 삼자회는 전국교회의 치리권을 대부분 장악하는데 성공하였다. 1953년 8월부터는 각종 정치학습회를 개최하여 목회자들의 애국심과 정치의식을 고취하고 자기반성과 검토를 통해 과거의 서양 선교사위주의 관념과 제도들을 수정하고 삼자의 이념과 목적을 교육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뿐 아니라 과거 서방 교파위주의 교회조직과 목회자 관리 등의 제도를 철저히 타파하고 삼자회를 중심으로 한 모든 제도와 조직을 완전히 개편하였다.

 

  1954년 7월, “삼자애국회”가 정식 성립되면서 삼자운동은 더욱 활성화 되었다. 삼자준비 위원회는 베이징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중국기독교전국회의” 와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를 정식 발족하였다. 이후부터 개혁의 중점이 “삼자”에서 “애국”으로 전환되면서 정치와 더욱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먼저 삼자에 협조하지 않는 소수의 반대세력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1955년 8월 왕밍따오(王明道)목사가 체포되었고 그 이듬해 1월에 워치만 니(倪柝聲)가 체포된 것이다. 1955년 10월 29일 정부는 “삼자”외의 모든 기독교 활동은 불법이라고 정식 선포하고 그해 연말까지 각 성(省)과 시(市) 등 197곳의 지방에 “삼자애국” 분회를 설립하였다. 1957년 6월 정부는 “반우운동(反右運動)”을 전개하고 정부의 개혁에 비협조적이거나 비판적인 인사들을 숙청하기 시작하였다. 그해 10월 130여 명의 삼자애국회 대표들이 베이징에 회의를 개최하고, 정부의 반우운동 정책에 호응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또 다시 대규모의 공소회를 전개하였다. 이 반우운동 시기에 1958년의 대약진운동 초기까지 모든 목회자들을 소집하여 집중훈련을 시키거나 생산 활동에 참여토록 하여 교회의 예배와 각종 집회는 자동적으로 정지되었고, 그와 동시에 전국의 각 교회들을 대대적으로 병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상하이의 약 200여 개의 교회가 15개로, 베이징의 64개의 교회가 4개로 대폭 감소되었다. 이 시기 “삼자”는 중국교회의 치리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50년대의 교회 개혁 임무를 완성하게 된다.

결 론


이 시기에 중국교회는 우야오종의 영도 하에 “중국기독교 삼자애국위원회”를 조직하고 서방 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삼자” 중심의 독립된 중국교회의 기초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것은 과거 1807년 영국 런던회소속의 모리슨이 중국에 선교를 시작한지 150여 년 동안 서방 선교단체에 의뢰하던 중국교회로서는 획기적인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개혁과정에서 지나치게 정치 세력에 의존하여 교회가 하나의 정치 도구로 전락하였다는 비난도 없지 않다. 당시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이에 가담하지 않고 가정을 중심으로 모임을 만들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교회는 정부의 공인을 받는 “삼자교회”와 공인 받지 못한 “가정교회”로 나뉘게 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강인규/ 대만 중원대학교 교양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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