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중국선교 역사와 현 중국교회 상황 (석은혜)

2013. 5. 10. 18:04운영자자료/중국교회에 관한 자료

중국선교 역사와 현 중국교회 상황
-중국에서도 일하고 계신 하나님-

석은혜

1. 중국을 향한 하나님의 뜻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秦國 〓 중국) 땅에서 오리라.” (사49:11-12)

2. 중국의 간단한 선교역사

 

1) 경교(네스토리우스파) : “대진경교유행중국비”에 의하면 당나라 때(635년)에 알로펜에 의해 최초로 기독교가 중국에 전해졌으나 845년 황제가 추방 칙령을 내림. 원나라 때 다시 들어왔으나 사라짐.

2) 원대(프란시스코회) : 1291년 몬테콜리노에 의해 전해짐. 명나라가 들어서자 쇄국정책으로 몰락하게 됨.

3) 예수회: 1582년 마테오리치에 의해 카톨릭이 전해졌으나 선교사들 사이의 “의전논쟁”으로 1723년 옹정제가 추방 명령을 내림.

4) 개신교: 1807년 9월 로버트 모리슨(영국인)이 미국으로 가서 동인도회사의 배를 타고 광저우에 도착 함. 영한사전 번역, 성경을 번역함(1813년 신약, 1819년 구약 번역). 1814년(7년 후) 첫 번째 세례를 줌, 중국에서 사역한 27년 동안 10명에게 세례를 줌.
1818년 말레시아 말라카에 영화대학 설립.
1842년 중국이 아편전쟁에서 영국에게 져서 난징조약을 맺고 5개 항구 개항(상하이, 닝보, 광동, 아모이, 푸저우).
1854년 허드슨 테일러가 상해로 들어감. 1865년 중국내지선교회 만듦(OMF 전신)
그 이후 다시 아편전쟁에서 패함: 북경조약(1958년), 천진조약(1860년) 체결.
     A) 외국인들의 대륙여행을 허용,
     B) 외국 선교사들이 기독교 신앙의 전파를 허용,
     C) 중국인들이 기독교를 믿을 수 있도록 허용.

5) 핍박:1900년 의화단 사건으로 선교사 230명 죽음(그 중 189명이 개신교 선교사),
중국인 2,000명이 순교 당함.
1911년 손문이 중심이 된 민주주의 혁명으로 국가적 혼란이 일어났다.
1919년 5.4운동을 신문화 운동이 일어남.
1922년 3월에 중국지식인들에 의해 반기독교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남.
(8,000여명의 선교사들을 내륙에서 몰아내어 해외로 축출하기 시작함)
1930년대에 욍밍따오, 송샹지에, 웟치만 니(니퉤성), 경전잉 등 토착교회.
1937년-1941년 일본의 중국 침략: 모든 선교사들이 일본의 통제아래 억류 됨.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건립 (모든 선교사들 중국에서 추방됨)
(1949년 공산화 당시 카톨릭 교인 300만 명, 개신교인 75만 명으로 추정)
1954년 미국 뉴욕의 유니온 신학교 졸업한 오요종에 의해 중국삼자애국위원회가
시작됨(삼자-자치, 자양, 자전)/ 기독교인들을 숙청함.
(북경의 65개 교회가 4개로, 상해의 200여개의 교회가 23개로 감소됨)
1966-1976년 중국의 문화대혁명 기간에 모든 교회들이 문을 닫음.
(홍위병들이 구 이데올로기, 구 관습, 구 도덕, 구 습관 등을 파괴한다는 명분으
로 난동을 부렸다)

6) 핍박을 경험한 신앙의 원로들 : 왕명도(22년 10개월 수감), 알렌 위엔(21년 수감),
임헌고(21년 수감-광주에서 사역), 시에모샨(23년-상해에서 사역),
리텐언(李天恩, 10수감): 1928년 하남성 팡청에서 출생. 할아버지가 내지선교회
의 선교사에게 복음을 들음, 어머니도 믿음이 좋아서 전도자로 헌신, 하남성 가
정교회 운동의 급속한 부흥에 영향을 미친 사람, 개봉의 화종침례교신학원에서
공부, 원래 상해에서 사역했으나 1970년 석방 된 후에 하남성으로 가서 사역 함.

3. 현재 중국의 교회 상황

 

1) 교회의 문이 다시 열림

 

1979년 1월에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해 종교사무국이 다시 업무를 재개하고, 1980년에 삼자교회들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10월에 중국기독교협회가 조직되었다.
1982년 “19호 문서”와 “삼정정책”(정해진 사람, 정해진 장소, 정해진 지역)을 발표함.

2) 중국기독교협회가 중국 기독교인수 공식 발표 - 총 2,100만 명

 

* 개신교 교인(삼자교회) : 1,500만 명, * 카톨릭 교인(삼자 카톨릭교회) : 600만 명

3) 중국전문가들이 말하는 중국 교인 수: 약 8,000만 명 ― 1억 정도 될 것으로 추정

4) 삼자 신학교(성경학교 포함): 전국에 18개, 가정교회 신학교: 200-300개 정도(6개월,
1년, 2년 과정 등이 있다)

4. 부흥하고 있는 가정교회 연합 - 하남성, 절강성, 안휘성에 가정교회가 가장 많다.

 

중국 가정교회에 5개의 연합모임이 있는데 그중 3개가 하남성에 있다. 그것은 바로 팡청연합, 탕허(唐河)연합, 중생파(혹은 생명파) 연합이다. 하남성은 1880년 허드슨 테일러의 내지선교회가 복음을 전한 곳이다. 1949년 공산화 당시 하남성에 54개의 교회가 있었다.

1) 팡청연합 

 

까오용주는 문화혁명 기간에 고난을 당한 기독교인으로 리텐언을 하남성으로 오도록 요청하여 30년 동안 같이 사역했다.
이 연합모임의 현재 지도자는 장롱량(張榮亮)이다-리텐언의 제자로 초등학교만 나왔다. 그는 1950년에 태어난 사람으로 1974년-1980년까지 7년형을 받았다. 현재 중국 가정 교회연합 가운데 최대이며, 장롱량은 다섯 개의 연합모인 지도자 중 가장 성숙하고, 지혜롭고, 인내력이 있는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2) 탕허연합 

 

장롱량과 감방동료인 펑장궈가 지도자이다. 그는 1926년에 태어났으며, 6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탕허와 팡청, 그리고 안휘성의 두개 연합은 모두 1988년에 데니스 발콤 목사(미국인)에 의해 오순절파식의 예배와 기도를 드리고 있으며, 은사주의가 되었다(방언, 치유, 예언 등 중시). 탕허연합은 1994년 3월에 중국 22개 성으로 70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다. 6개월 후인 10월에 돌아와서 선교보고를 하도록 했다. 2001년에 40쌍을 파송하고, 2002년에 98쌍과 120명의 미혼 선교사를 전역에 파송함. 탕허연합 소속의 신학교가 중국 전역에 60여개(다른 연합까지 합하면 200여개가 됨).

3) 중생파 

 

이 연합은 쉬용저가 지도자이며, 그도 리텐언의 제자이다. 그는 1940년에 하남성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고 1967년에 체포되어 옥살이를 했다. 1990년대 후반에 쉬용저의 모임은 중국 최대의 가정교회 그룹이 되었으나 “중생파”라는 것 때문에 가장 논란이 되고 있다. 이 파는 “곡파”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성령님이 일하시는 증거로 “울음”이 표준적인 것이라고 주장 함. 그러나 쉬용저는 울음이 구원에 필수적인 교리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가정교회 측에서는 이 중생파를 이단으로 보고 있지는 않다. 1990년대 중반에 삼자와 중국 공안국이 곡파를 사교라고 규정하고 쉬용자를 체포하려고 하였으나 그는 현재 미국으로 망명을 갔다. “하늘이 속한 사람”의 저자 윈 형제도 원래 중생파였으나 탈퇴하였다. 현재는 이 모임이 지도자 부의 혼란으로 많이 약화됨.

4) 딩슈링 자매 

 

중국 가정교회의 여성 지도자이다. 하남성 팡청현 사람이며, 1961년생이다. 13살 때 예수를 믿었다. 고둥학교를 졸업했다. 가정에서 핍박하자 집을 나와서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장롱량의 집에서 살았다. 1988년에 딩자매는 성경을 구하기 위해 광저우 갔다가 광저우에서 데니스 발콤을 알게 되었고, 그 모임에 참석하여 같이 기도생활을 하였다. 그녀가 발콤에서 하남성을 방문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1989년 체포되어 3년 형을 받았다. 그녀는 중국 전역의 200만이 넘는 여성들로 이루어진 “24시간 연속 기도띠 운동”을 조직하는 일을 도왔다. 또 여러 나라의 선교 컨퍼런스에 참석해서 설교를 했다.

5) 루샤오민 자매

 

중국의 소수민족인 회족 출신으로 1970년에 팡천현에서 태어났다. 20살 때 언니가 사는 인근 마을의 가정교회에 참석했다가 데스니 발콤에게 설교를 들었다. 그 이후 성령의 감동으로 찬양을 작사, 작곡하게 되었다. 그녀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으며, 음악을 공부해 본 적이 없다. 2002년 현재 863곡을 만들었고, 그 곡을 CD로 만들었는데 제목이 “가나안의 노래”이다. 그의 노래는 한국 선교사들도 많이 알고 있다. 그녀는 23살에 결혼을 했고, 이슬람 선교의 비전을 가지고 있다.

* 데니스 밸콤 

 

미국 LA출신이며, 1945년생이다. 16세 때 회심하였고, LA의 알몬트에 있는 독립 순오절파교회의 사모님에게 중국선교사가 되라는 예언을 하라는 예언을 듣게 됨. 또한 군대 휴가 중 홍콩 오순절 교회에서 홍콩에서 사역하라는 예언을 듣고 순종한다. 그래서 그는 1970년대에 홍콩에 거주하면서, 홍콩 여자와 결혼했고, 북경어와 광동어를 배웠다. 1980년대 중국이 개방되자 광저우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성경보급 사역을 하였다. 1986년에 딩자매가 그를 통해서 성령세례를 받고, 1988년에 그녀의 소개로 하남성을 방문하게 되면서 그의 영향으로 가정교회의 가장 큰 연합인 팡청, 탕허, 원저우(온주), 안후성의 두개연합(리신, 인샹)이 은사주의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는 중국 가정교회 사람들로부터 제2의 허드슨 테일러로 불리고 있으며, 1995년 잡혀서 8년간 중국에 못 들어 가다가 2003년에 다시 들어 가게 되었다.

6) 온주 교회 

 

“중국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른다. 1867년 중국내지선교회 소속의 ‘조지 스토트’선교사(스코틀랜드 사람, 소아마비로 절뚝거림)가 온주에서 복음을 전함. 1878년에 '청시제’교회를 설립하였다. - 그러나 1884년 반외세 운동으로 소실됨. 1898년에 같은 장소에 다시 교회를 세웠다. 1949년 중국이 공산화 되고, 1966년 문화대혁명이 일어나면서 교회가 다시 폐쇄 됨. 그러나 온주의 가정에서 비밀리에 모여서 계속 예배를 드렸다. 그것이 지금 온주에 가정교회가 부흥을 이룬 이유이다. 온주는 현재 상업 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사업이나 장사를 해서 부자가 되었고, 가정교회도 크게 지었다. 온주도 데니스 벨콤의 오순절 영향을 오순절 교회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인도네시아 화교 ‘스테판 통’ 목사가 보수주의적인 장로교 캘빈주의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한번 구원 받으면 영원히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함. 이 교리 때문에 하남성의 가정교회 사람들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7) 가정교회 연합 모임(“시님연합”⇒나중에 “神州”로 바뀜)

 

1998년 8월에 가정교회 대표 12명이 하남성 정주의 외곽에서 모임, 이 때 “연합 호소문”을 만듦. 11월에는 “기독교 헌장”을 만들어서 가정교회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동방의 번개” 같은 이단 교리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이것을 작성하는 데 있어서 '조나단 차오' 목사가 도움을 주었다).

8) 베이징 포럼

 

2002년 2월에 베이징에서 한국인, 미국인, 중국인 지도자들이 한 호텔에 같이 모였다. 이 때 '루이스 부시'(1989년 10/40창이라는 용어를 만든 사람)도 참석하였다. 이 포럼에서 가장 왕성하게 논의 된 것은 “백 투 예루살렘(Back to Jerusalem)" 운동이다. 이들은 복음이 서진되었다고 보면서 중국 기독교인들이 선교사로 헌신으로 중앙아시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자고 운동을 함(이 운동의 원조 :“서북영공단”). 2007년 로버트 모리슨 200주년까지 10만 명의 선교사를 중국가정교회에서 파송하겠다고 주장 함. 이 운동은 지금도 중국 가정교회에서 계속되고 있으며 2007년까지 10만 명을 파송하기는 어렵겠지만 시작은 할 수 있으며. 오래지 않아 “선교중국”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9) 중국의 각 성별 복음화율 

 
* 복음화율 10% 이상인 지역: 하남성, 안휘성, 절강성,
* 복음화율 5-10%인 지역 : 강서성, 복건성, 강소성, 산동성, 하북성, 북경시, 천진시, 요녕성, 길림성,
* 복음화율 1-5%지만 박해지역이 아닌 지역: 중경시, 호남성, 호북성, 흑륭강성, 산서성
* 복음화율 1-5%로 박해지역:신장위구르자치구, 서장자치구, 내몽고자치구, 광서쭈앙족자치구, 감숙성, 청해성, 사천성, 운남성, 귀주성, 광동성, 해남성 등.

5. 한국 선교사들의 중국선교

 

1) 한국교회의 중국선교 시작

 

1913년-1957년, 산동성 래양에 선교에서부터 시작되었다.
1913년 총회결성 기념으로 3명 파송: 박태로, 사병순, 김영훈 목사 파송.
1917년에 다시 방효원, 홍승한 목사와 김병규 임시 전도인을 파송하였다.
1937년 방지일 목사 파송-1957년까지 사역 함(21년 사역). 현재 살아계신다.

2) 중국 공산화 이후에서 개혁개방 전까지(1949-1979년) 

    방송을 통한 중국선교. (1956년 극동방송, 1973년 아세아방송).

3)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다시 중국선교가 재개 되었다.

 

1980년대 초중반에는 미국이나 캐나다 국적을 가진 한국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갔고, 1992년 8월 한중수교 이후에 본격적으로 우리나라 선교사들이 들어가게 되었다. 한국선교사들이 선교 초기에는 동북삼성(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에 들어가서 조선족을 대상으로 사역했으나 점점 한족(중국인) 중심으로 전환하면서 내륙으로 분산되었다. 그러다가 1995년 이후에는 55개 소수민족에게 관심을 보이면서 많은 선교사들이 소수민족 거주지역으로 들어가고 있다.

4) 한국인 선교사 숫자

 

공식적인 통계로는 1,500명 정도라고 보고 있으나 비공식적인 통계에 의하면 약 5천 명 정도가 될 것으로 보인다.

5) 한국선교사들이 하고 있는 사역

 

신학교육 사역, 제자훈련 사역, 캠퍼스 사역, 가정교회 지도자훈련 사역, 교회개척 사역, 주일학교 교사강습회, 찬양사역자 육성사역, 빈민구제사역, 장학사역(희망공정), 공단사역, 선교사 자녀교육사역, 중보기도사역, 문서사역, 의료사역, 학교설립, 전문인 선교, 소수민족 사역 등등.

6) 한국 선교사들의 장단점

* 장점 : ① 추진력이 강하다.
            ② 비슷한 문화라 적응이 빠르다.
            ③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④ 믿음이 강하다(믿습니다 하면서 밀고 나감).
            ⑤ 대범하게 사역을 진행한다. 
            ⑥ 대가를 지불할 줄 안다
            ⑦ 교회가 선교비를 지원한다.
            ⑧ 개척정신이 강하다. - 새로운 사역을 쉽게 시작한다.
            ⑨ 대부분 고학력자이다.
            ⑩ 대부분 장기사역자이다.

* 단점 : ① 성경지식이 부족하다.

            ② 목회적 훈련과 경험이 부족하다.

            ③ 선교훈련이 부족하다.

            ④ 섬기는 훈련이 부족하다- 군림하려고 한다.

            ⑤ 교파주의가 강하다- 중국교회는 무교파이다.

            ⑥ 협력정신이 부족하다-팀 사역이 잘 안 된다

            ⑦ 물질만능 주의 성향이 있다

6. 맺음말

 

하워드 스나이더 “21세기 교회 동향”에서 21세기에는 중국이 기독교 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데비비드 아이크만 “베이징에 오신 예수님”에서 중국은 기독교화 되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그것은 모든 중국인이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아니다. 그러나 중국이 지금처럼 기독교인이 증가한다면, 기독교인들은 30년 안에 시골과 도시에서 20-30%의 인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기독교 세계관이 중국의 정치, 문화제도에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중국이라는 용이 기독교라는 양에 의해 길 들여질 날이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2006년 세계선교대회에서/NCOWE Ⅳ(장소:할렐루야교회)에서 2030년까지 한국교회가 10만 명의 선교사와 100만명의 평신도를 파송하자고 결의하였다. 앞으로 중국에도 더 많은 선교사가 파송될 것으로 예측되며, 한국교회가 중국을 잘 섬겨서 선교하는 중국교회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한국 선교사들은 중국에 가서 선교할 때, 하나님이 친히 일하시도록 해야 하며, 현지인들로 하여금 주도권을 가지고 일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현지 기독교인과 현지 교회의 필요에 부응하는 선교를 해야 하며, 선교사가 떠난 다음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중국교회가 견고하게 설 수 있도록, 그 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삼자교회가 되도록 섬겨야 한다.

출처 : 내 사랑 중국 ♡ MyLoveCh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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