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의 역사

2012. 11. 1. 00:03교회사자료/10.세계사

 

 

노르웨이의 역사

 

(노)Kongeriket Norge.공식 이름은 노르웨이 왕국(Kingdom of Norway).
공식명칭 : 노르웨이왕국(Kingdom of Norway)
인구 : 4,762,000
면적 : 385,199㎢
수도 : 오슬로
정체·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단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국왕/총리
공식 언어 : 노르웨이어
독립년월일 : 1905. 10. 29
화폐단위 : 노르웨이크로네(Norwegian krone/NOK)
국가(國歌) : Ya, vi elsker dette landet("Yes, we love this land")

 


유럽에서 5번째로 큰 국가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쪽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나라.
노르웨이 /국기
수도는 오슬로이다. 16만 개 이상의 호수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는 이 산악국가는 북위 58~72°(북북동에서 남남서로 약 1,753km)와 동경 4~32°(동남동에서 서북서로 약 430km 폭) 사이에 걸쳐 있다.

 

북쪽으로 바렌츠 해, 서쪽으로 노르웨이 해 및 북해, 남쪽으로 스카게라크 해협, 동쪽으로 스웨덴, 핀란드, 러시아 연방 등과 접하고 있다. 면적 385,199㎢. 인구 4,828,000(2009 추계).

 


국민의 대다수는 노르웨이인이지만, 3만~4만 명의 랩인을 포함해서 여러 소수 민족들이 있다. 공용어는 노르웨이어이다. 국교는 복음주의 루터교로 거의 모든 국민이 믿는다. 화폐단위는 노르웨이크로네(Norwegian krone/NKr)이다.

 

노르웨이는 유럽에서 가장 넓은 나라 중 하나이다. 국토 중앙과 남서부가 넓은 고원지대로 이루어진 산악지형이다. 전통적으로 어업 및 임업 국가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광업과 제조업이 크게 증가했다. 주로 서비스업, 석유와 천연가스 생산업, 경공업 및 중공업 등에 기반을 둔 경제가 발달했다. 문맹률은 사실상 0%이다.

 

노르웨이는 단원제를 기초로 한 입헌군주제이다. 국가원수는 국왕이고 정부수반은 총리이다.

 

11세기에 여러 개의 공국들을 통합하여 노르웨이 왕국을 이루었다.

 

1380~1814년 노르웨이 왕이 덴마크의 왕을 겸했고, 1814년에 스웨덴에 합병되었다.

 

1905년 스웨덴과의 연합이 해체되었고, 노르웨이는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노르웨이의 해운업이 제1차 세계대전의 분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기는 했지만, 정책적으로는 전쟁 동안 중립을 지켰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중립을 선언했으나 독일군이 침공하여 점령당했다.

 

노르웨이는 포괄적인 사회복지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나토(NATO) 회원국이다.

 

노르웨이 국민들은 1994년 유럽 연합 가입을 거부했다.

 

 

 

스웨덴의 역사

1397년 형성된 칼마르 동맹에서의 탈퇴와 16세기 구스타브 바사 왕에 의한 통일로 요약된다.

17세기에 스웨덴은 영토를 넓혀가며 스웨덴 제국을 형성했다.

이 시기에 점령했던 대부분의 영토는 18세기에 잃게된다.

 

19세기 초에 핀란드스칸디나비아 반도 밖에 있던 영토를 상실하였다.

1814년에 있던 마지막 전쟁 후로 스웨덴은 1905년까지 노르웨이와 동군연합을 결성한다.

1814년부터 스웨덴은 평화시에는 비동맹주의를 유지하고 전시에는 중립을 지키는 정책으로 평화를 유지하였다.

 

[편집] 선사시대 : 기원전 9천년 ~ 기원후 800년

이웃 나라 노르웨이처럼 스웨덴도 전 국토에 걸쳐 많은 암각화(스웨덴어로는 ristningar 또는 hällristningar라고 한다)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보후스랜(Bohuslän) 지방에 집중되어있는데, 가장 오래된 그림은 기원전 500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얨틀란드(Jämtland)의 그림이다. 그 그림들은 순록, 사슴, 곰, 물개같은 야생동물을 나타내고 있다. 기원전 2300년부터 500년까지 가장 많은 그림들이 그려졌는데, 농사, 전쟁, 교역, 가축에 관한 그림들이 주로 그려졌다. 기원전 800년부터 500년까지는 성적 본능에 관한 그림이 보후스랜에서 발견되었다.

[편집] 초기 스웨덴의 역사 : 800년 ~ 1500년

스웨덴이 국가로서 정확히 몇 년에 세워졌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스웨덴은 고대 웁살라(Uppsala)에 있던 가장 강했던 스베아 리케(Svea Rike;스웨덴어로 스베아 족의 나라)가 발전되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스베아 리케의 존재는 100년경에 타키투스에 의해 이미 알려졌다.

서쪽과 동쪽에 있던 예아트스(Geats)도 또한 국가를 구성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1000년경에 처음으로 스베아와 예타 리켄(Göta Riken;예타의 나라)에 기록된 왕인 올오프 회트코눙(Olof Skötkonung)이 등장하지만 재위 기간과 권력의 실재여부가 불명확하다.

 

12세기에 스웨덴은 여전히 에릭가(Erik clan)과 스베르케르가(Sverker clan)사이에 왕위 다툼을 하고있었다.결국에 그 왕위 다툼은 제3의 세력이 에릭가와 결혼하여 폴쿵아 왕가(Folkunga dynasty)를 세우면서 마무리 되었다. 이 왕가는 칼마르 동맹이 결성되기 전까지 실질적인 국가로 존재하였고, 흑사병이 퍼지면서 결정적으로 쇠락하게 된다.

 

비카톨릭국가에서 카톨릭국가로의 전환은 복잡하고 점진적이고 때때로는 폭력적인 과정이었다. 초기에는 스칸디나비아와 색슨족 사이의 데인법에 의해 잉글랜드아일랜드의 수도승이 와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독일의 영향력은 안스가르에 의한 포교 시도 때문에 초기에는 그다지 크지 않았지만, 결국에는, 특히 노르만 정복이후로, 스웨덴 지역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스웨덴과 러시아 귀족사이의 밀접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동방정교회의 영향은 언어의 장벽 때문에 거의 없었다.

 

이렇게 통합된 기간동안 스웨덴은 현재 핀란드의 중심인 타바스트란드(Tavastland)로의 초기 십자군 정복에 의해 이미 핀란드를 포함하고 있었다.

 

흑사병과 스웨덴 내부 권력분쟁 후에 덴마크의 여왕 마르그레테 1세가 북유럽의 국가들을 1397년에 스웨덴 귀족들의 동의 하에 칼마르 동맹이란 이름 하에 통합한다. 하지만 통합으로 인한 계속되는 국가와 동맹사이의 경제 압박은 결국 15세기에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에 분쟁으로 연결되게 된다. 결국 동맹은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긴 분쟁 속에서 16세기에 해체되게 된다.

[편집] 근대 스웨덴 : 1523년

구스타브 바사

 

16세기에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스웨덴의 독립과 칼마르 동맹을 재구성하는 세력들을 부수기 위해 싸웠고 근데 스웨덴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동시에 그는 로마 카톨릭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종교 개혁을 받아들여 루터교를 국교로 정한다.

[편집] 강대국 스웨덴의 부상 : 1600년

17세기에 덴마크, 러시아 그리고 폴란드를 상대로한 전쟁에서 승리한 스웨덴은 겨우 100만의 인구에도 불과하고 강대국으로 떠오른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종교적 이유뿐만 아니라 정치적, 그리고 유럽의 균형을 위해 30년 전쟁에 참전한다.

[편집] 스웨덴 제국 : 1648년

1645년의 브룀세브로(Brömsebro) 조약과 1658년의 로스킬데(Roskilde) 조약에 의해 스웨덴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중요한 지역을 획득한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따라 스웨덴은 후에 에스토니아, 리보니아, 그리고 북부 독일이 되게 되는 잉그리아,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지배하게된다.

 

스웨덴 제국의 형성, 1560-1660

[편집] 대북방 전쟁 : 1700년

러시아, 작센-폴란드, 덴마크-노르웨이는 1700년에 동맹을 맺고 스웨덴 제국을 공격하였다. 스웨덴의 칼 12세는 비록 어렸지만 대북방 전쟁 초기에 나르바 전투에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다. 모스크바를 공격하여 러시아를 제압하는 계획은 그가 너무 야심찼다는 것을 증명한다.

 

폴타바 전투에서는 러시아에 큰 패배를 당한 칼 12세는 1718년 노르웨이의 프레데릭스텐(Frederiksten) 요새 공성전 도중 총에 맞아 죽는다. 후에 맺어진 평화조약에서 프로이센잉글랜드-하노버가 합세한 동맹군은 스웨덴의 힘에 의한 지배를 종식시켰고 제한된 왕권과 의회 정치시대를 열게하였다.

[편집] 절대 왕정 : 1772년

의회 정치는 반세기동안은 유지되었다. 구스타브 3세에 의한 무혈 쿠데타는 스웨덴을 절대 왕정으로 복귀시켰다. 이런 지배는 나폴레옹 전쟁에 말려들 때까지 지속되었고,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해 스웨덴은 1809년에 핀란드를 러시아에 넘겨주게 된다.

[편집] 노르웨이와의 통합 : 1814년

그 후에 프랑스 출신 장군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Jean-Baptiste Bernadotte)가 의회(Riksdag)에서 왕세자로 선출되어 스웨덴의 왕으로 즉위한다. 1813년 그의 군대는 나폴레옹에 대항하는 연합군에 합류하여 본회베드(Bornhöved)에서 덴마크군을 격파한다.

 

키엘 조약에서 덴마크-노르웨이의 왕은 노르웨이 본토를 스웨덴 왕에게 넘겨주게된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독립을 선언하며 새로운 왕을 선출한다. 스웨덴은 키엘 조약을 따를 것을 주장하며 노르웨이를 침공한다.

 

짧은 전쟁 후에 모스 조약은 두 나라 사이의 동군연합을 승인한다. 이 연합은 1905년 노르웨이의 요구에 의해 평화롭게 해제된다. 칼 14세 요한의 즉위기간(1818-1844) 동안 부드럽지만 효율적인 산업화가 시작된다. 이 첫 발걸음은 시골의 대장간과 초기 섬유산업과 제재소에서 찾을 수 있다.

[편집] 스웨덴의 근대화 : 1866년

산업 혁명 기간 동안 스웨덴의 주요 농업활동은 차차 마을단위에서 개인 농장활동으로 이동한다. 이러한 경제와 사회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인구의 그러한 성장을 보여주지 못한다. 대략 100만명의 스웨덴 사람들이 1850년과 1890년 사이에 미국캐나다로 이주한다. 19세기는 많은 반대 언론의 등장, 자유 기업에 의한 거래와 생산에서 길드 독점의 폐지, 조세제도와 선거제도의 개편, 국가 상비군의 설치, 그리고 3개의 주요 정당 - 사회민주당, 자유당, 보수당의 등장으로 대표된다.

[편집] 스웨덴의 산업화 : 1914년

스웨덴이 중립을 지켰던 제1차 세계 대전 기간과 전후에 스웨덴은 전 세계에 걸친 철, 볼 베어링, 펄프, 성냥 수요로 인해 큰 이익을 본다. 전후의 번영은 현대 스웨덴의 주체성과도 같은 사회보장기금 마련에 큰 보탬이 된다.

 

1930년대의 소비에트와 독일의 확장주의에서 중립을 지키는 외교정책은 북유럽 공동 방어전선의 형성을 실패하게 했다.

 

스웨덴은 제2차 세계 대전동안에도 중립을 지켰고 현재까지도 비동맹주의를 유지하고있다.

[편집]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의 스웨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이웃나라가 차츰 전쟁에 말려들어감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은 중립을 유지하였다. 스웨덴은 전쟁을 하는 양 쪽 모두를 지원하였다.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는 수많은 헝가리유대인들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편집] 현대의 스웨덴

스웨덴은 전후인 1946년에 국제 연합의 회원국이 되었다. 그 후에 다그 함마르셸드가 2대 사무총장이 되었다.

 

 

<핀란드>(핀란드어: Suomi 수오미[*], 스웨덴어: Finland)는 북유럽에 있는 나라이다. 공식 명칭은 핀란드 공화국(핀란드어: Suomen Tasavalta 수오멘 타사발타[*], 스웨덴어: Republiken Finland 레푸블리켄 핀란드[*])이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서남쪽은 발트 해 남쪽은 핀란드 만을 통해 에스토니아와 가깝다.

서쪽은 보트니아 만 등의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스웨덴노르웨이, 러시아와 국경이 닿아 있다.

동쪽은 러시아의 카렐리야 공화국와 인접해 있다.

 

본토 서남쪽에 위치한 올란드 제도는 핀란드 통치 아래서 상당한 자치를 누리고 있다.

다수의 국민은 우랄족핀란드인에 속한다. 공용어는 사실상 핀란드어스웨덴어이다.

 

[편집] 역사

기원전 수천년 무렵에 중앙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우랄어족 언어를 쓰는 핀족이 서진을 계속하여 기원후 1세기에 지금의 핀란드 남부에 정착한 것으로 추정된다.

 

12세기 중엽, 스웨덴에리크 9세의 십자군이 핀란드에 쳐들어 옴으로써 스웨덴의 핀란드 지배 윤곽이 잡혔다. 이후 스웨덴의 역대 왕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핀란드에서 스웨덴 영토를 넓혀왔으며, 1397년 포메라니아의 에리크스웨덴-노르웨이-덴마크의 연합왕으로 즉위할 때 핀란드도 이에 편입되었다.

 

1523년 구스타브 1세 바사는 스웨덴을 안정된 독립 왕국으로 만들면서 핀란드를 이에 포함시켰다. 이후 스웨덴과 함께 핀란드에서도 루터교로 개종하는 종교개혁이 일어났는데, 여기에는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마르틴 루터에게 수학한 미카엘 아그리콜라의 공이 컸다.

 

17세기 초에 스웨덴 왕 구스타브 2세 아돌프는 핀란드를 동방 전초 기지로 활용하였다.

크리스티나 여왕은 핀란드에서 문예를 크게 진흥시켜 투르쿠 대학이 이 무렵에 세워졌다.

 

스웨덴 왕 칼 12세의 무리한 군사정책으로 시작된 대북방 전쟁(1700~1721년)에서 핀란드의 국토는 러시아의 대대적 침공으로 일대 타격을 입었다.

구스타브 3세가 러시아와 전쟁(1788~1790년)을 하는 틈을 타 핀란드 장교들이 무장봉기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전쟁 중에 핀란드 영토를 둘러싼 열강의 외교전이 펼쳐진 끝에 1809년 러시아가 핀란드를 점령하였고, 대공국이라는 이름으로 통치하였다.

 

이에 맞서 핀란드인의 국권 회복 운동이 점차 불붙었고 엘리아스 뢴로트1835년부터 1849년 사이에 서사시 칼레발라를 썼다.

[편집] 20세기 초반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에 핀란드는 독일제국의 공국인 헤센카셀(Hessen-Kassel)가를 핀란드의 왕가로 받아들여 독일제국에서 책봉을 받는 형식상의 제후국이 되었다.

 

1918년 1월 27일 소련의 지원을 받은 핀란드 적군(공산군)이 반란을 일으켰으나, 독일제국의 지원을 받은 핀란드 백군(정부군)이 5월 15일 이를 진압하였다.

 

한편 그 해 11월 11일 독일 제국이 항복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핀란드는 공화국으로 독립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국가의 생존을 걸고 소련과 2차례에 걸쳐 전쟁(겨울 전쟁·계속 전쟁)을 벌였다.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 장군의 지휘 아래 전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소련에 맞서 싸웠고 많은 전과를 거두었으나, 국력의 열세 때문에 끝내 패배로 끝났다. 이전부터 핀란드는 소련에 대한 감정이 좋지 못했는데, 이 전쟁으로 더욱 악화되었다.

[편집] 냉전 시대

전쟁이 끝난 뒤에 국토는 다시 재건되었고 핀란드 정부는 소련과 서유럽 사이에서 중립을 표방하면서 경제발전에 힘을 쏟았다.

 

소련의 의향에 따라 마셜 플랜을 받지 못했고 북대서양 조약기구유럽공동체(EC)에 가입하지 않았다. 자유 민주 정권을 유지하면서, 자본주의 경제권에 속하는 경제정책을 쓰고, 외교, 국방 측면에서 공산권과 가까웠지만,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가맹하지 않았다.

[편집] 현대

이 미묘한 상황 하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독립과 평화를 유지했다.

소련 붕괴후 서방 진영에 접근하여, 1994년에는 EU 가입에 합의하고, 2000년에는 유로를 도입했다.

[편집] 정치

에두스쿤타핀란드어: Eduskunta), 핀란드의 의회

 

핀란드의 정치제도는 의원 내각제를 기초로 하였지만, 대통령에게도 일정한 권한이 있다. 대통령의 임기는 6년이며, 국민의 직접 선거에 의해 선출된다. 의회가 선출하는 총리로 대표되는 내각이 가장 큰 행정 권한을 지닌다. 따라서 의회 민주주의 국가이며, 의회가 국권의 최고 기관이다. 정치 형태는 해방 이후 반대통령제와 같은 상황에서 대통령이 현재보다 더 큰 권력이 있었지만, 1990년 이후 의원내각제로의 전환을 목적으로하는 헌법 개정이 몇 차례 이루어져, 행정권의 비중이 대통령에서 내각의 총리에게 대폭 위임되었다.

 

최고 입법기관인 의회(핀란드어: Eduskunta, 스웨덴어: Riksdag)는 단원제로 200명의 의원들로 구성된다. 국회의원 임기는 4년이며, 15개 선거구로 나누어 개방식 비례 대표제 선거로 뽑힌다. 의회는 헌법을 고치거나 내각을 해임시키거나 대통령이 발동하는 거부권을 무효화할 권한이 있다. 유럽 최초로 보통선거를 실시했다. 1906년 보통 선거권이 실시된 이후 핀란드 국회는 우파인 국민연합당, 농민당과 좌파인 사회민주당, 좌익연합 등의 정당이 지배해왔다. 핀란드는 소련의 영향력이 컸던 냉전 시대에도 민주주의를 지켜왔다.

 

행정부의 장인 총리는 부총리와 장관과 함께 내각을 구성한다. 각 각료는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는다. 총리는 총선 후 각당 대표의 협상 결과에 따라 대통령이 총리 후보를 지명하고 의회에서 과반수의 찬성을 얻은 후, 대통령의 임명을 거쳐 취임한다. 다른 각료는 총리의 임명에 따라 대통령이 임명한다.

 

내정 면에서는 선진적인 북유럽 형의 복지국가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전후 배상금 등의 지불과 같은 외적인 요소로 노동자의 권리 향상은 우선 순위가 밀렸지만, 급속하게 복지 국가 건설에 매진하여 북유럽 형의 사회에 근접하였다.

 

핀란드는 세계에서 가장 정치적 부패가 적은 나라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2008년 민간 활동 단체인 "국제 투명성 기구"에 의한 정치 부패 인식 지수 조사에서는 2004년까지 1위를 지켰지만, 2009년에는 6위로 떨어졌다.

 

핀란드의 헌법에서 특이한 점은 헌법재판소가 없고, 대법원에게는 어떤 법률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릴 권한이 없다는 점이다. 핀란드 이외에 헌법재판소가 없는 나라는 네덜란드와 성문 헌법이 없는 영국뿐이다.

[편집] 행정 구역

Map of Finland with provinces (numbered).png

오늘날 핀란드는 6개의 주(래니 lääni, 복수 래닛 läänit)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진다.

  1. 남핀란드 주
  2. 서핀란드 주
  3. 동핀란드 주
  4. 오울루 주
  5. 라피 주
  6. 올란드 주

올란드 제도는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분야에서 상당한 자치를 누리고 있다.

[편집] 지리

라플란드
남동부의 풍경

 

북쪽은 노르웨이, 서쪽으로는 스웨덴과 국경을 접하고있다. 서쪽은 보트니아 만, 남쪽은 발트 해, 남쪽은 핀란드 만과 맞닿아 있다. 보스 만 건너편은 스웨덴, 핀란드 만 건너편은 에스토니아이다. 동쪽에서 남쪽 걸쳐 러시아와 육로로 국경을 접하고있다. 또한 스칸디나비아 반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국토의 대부분은 평탄한 지형으로 빙하에 깎여 형성된 호수가 무수히 흩어져 있다. 식물은 타이가이끼가 많다. 또한 숲은 다양한 종류의 식물군이 서식한다. 핀란드의 지형은 대체로 평평하며 최고봉은 북쪽 사미 주 해발 1,328미터인 할티툰투리 산이다. 핀란드는 호수 이외에도 육지의 68%가 북방 침엽수림으로 덮여 있다. 섬들은 대부분 서남쪽에 있다.

 

핀란드는 호수와 섬의 나라라고 불릴 정도로 호수와 섬이 많다. 호수 187,888개와 섬 179,584개가 있다. 사이마 호수는 유럽에서 6번째로 크다. 핀란드에 있는 큰 호수는 다음과 같다.

  • 네시 호수
  • 빠이엔네 호수
  • 사이마 호수(Saimaa)
  • 오리 호수
  • 삐에리넨 호수
  • 오울루 호수
  • 로카 호수
  • 이나리 호수

핀란드 국토의 4분의 1 정도는 북극권에 있어 여름에는 백야 현상이 관찰된다. 핀란드 최북단에서는 여름에는 73일 동안 해가 지지 않고, 겨울에는 51일 동안 해가 뜨지 않는다.

[편집] 경제

핀란드 최대 기업 노키아의 본사

 

핀란드는 이웃 나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가난했기 때문에 1860년 대기근과 같은 경제적 변동에 취약한 나라였다. 1930년대까지 핀란드의 산업은 농업이 대부분이었고, 1950대까지도 인구의 절반 이상이 1차산업에 종사했다.

 

2차대전 이후, 영국, 프랑스 등과 같은 나라들이 국유화를 진행할 때에도, 핀란드는 국유화를 기피했다. 보호무역주의가 실패한 후, 1973년 유럽공동체와의 자유무역을 위해 무역장벽을 완화하고, 산업의 시장경쟁력을 강화했다. 1980년대에 빚에 바탕을 둔 거품경제가 무너짐으로써 1991년에서 1993년까지 심각한 경기 후퇴가 있었다.

 

인구가 대한민국의 1/10에 불과한 핀란드는 1980년대 이후 농업 및 임업 중심의 경제 체제에서 휴대 전화의 생산량이 세계 1위에 오르는 등 첨단산업을 핵심으로 하는 산업 선진국으로 현저한 변화를 이루는 데 성공했다.

 

 2008년 현재, 종사자별로 농림 4.5%, 공업 18.3%, 건설 7.3%, 상업 16%, 재무·보험 14.5%, 교통·통신 7%, 공공 서비스 32.4%로 구성되어 있다. 서비스 산업이 전체 경제의 65.7%를 차지하고, 공업이 31.4%를 차지한다. 주요 공업 부문으로는 전자 21.6%, 기계·자동차·금속공업 21.1%, 삼림공업 13.3%, 화학공업 10.9% 등이 있다.

 

150년 전 제지업체로 시작한 노키아(NOKIA)와 리눅스(Linux)로 유명하다. 세계경제포럼(WEF)이 매년 발표하는 세계 경쟁력 보고서에는 2001년부터 2004년까지 4년 연속 선두가 되었다.(2002년 2위로 발표되었다가 재평가 후 1위로 수정).

 

여성의 노동력화는 진행되고 있으며, 특히 법률가, 의사는 여성이 절반을 차지하고있다. 기업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는 여성도 늘고 있지만, 남성에 비하면 아직 적다. 여성은 남성에 비해 정규직으로 고용되기 어려운 경향이 있고, 젊은 여성에 계약직 일자리가 많다.(20대 여성의 4%가 파견 사원). 타임 뱅크 제도를 적용하여 바쁜 시기에 근무하여 바쁘지 않은 때 여가 시간를 쓸 수 있는 제도도 존재한다. 1994년에 16.6%까지 상승한 실업율은 불경기에서 벗어나 해마다 개선되고 있으며, 2006년에는 7.7%까지 떨어졌다.

 

그러나 GDP와 구매력이 증가하면서 러시아발트 삼국에서 유입되는 노동자의 증가로 일을 찾지 못해 매춘부 같은 성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증가 추세에 있다.

[편집] 국민

[편집] 인구 통계

민족 비율은 핀란드인이 93%, 스웨덴인이 6%, 사미인, 러시아인과 기타 민족은 1%를 차지한다.

[편집] 언어

핀란드어가 공용어이나 옛 스웨덴의 식민지배 영향으로 스웨덴어도 공용어로 사용된다. 모든 도로 표지판, 거리의 이름, 경고문 등이 양쪽 언어로 표기되지만 대부분, 일상생활에서는 핀란드어가 주로 쓰인다. 사미어는 북부에서 쓰이고, 스웨덴어는 대부분 남서부의 올란드 제도에서 쓰인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영어에 능통하고 일부는 독일어러시아어 역시 구사한다. 소수는 에스토니아어를 쓰는 경우도 있다.

[편집] 종교

종교는 개신교(루터교)가 89%, 동방 정교회가 1%, 무종교 9%, 기타(대부분이 이슬람교).

[편집] 문화

미카엘 아그리콜라

[편집] 문학

최초의 핀란드어 책을 쓰고 신약성서를 핀란드어로 번역한 투르쿠의 주교 미카엘 아그리콜라(1510~1557년경)는 핀란드 문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19세기엘리아스 뢴로트가 집필한 핀란드의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는 핀란드 전통 문화에 대한 큰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소설가 프란스 에밀 실란패1939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소설가 미카 발타리(Mika Waltari)도 전 세계에 알려져 있다.

[편집] 음악

음악가로는 《핀란디아》를 작곡한 장 시벨리우스가 유명하다. 핀란드 전통 음악에는 하프와 비슷한 현악기인 칸텔레가 쓰인다.

[편집] 건축

핀란드는 또 알바르 알토(Alvar Aalto)를 비롯한 유명한 건축가를 많이 배출하였다.

사우나(sauna)는 핀란드의 전통어이다. “사우나”는 핀란드어 중에서 국제적으로 쓰이는 낱말 중의 하나이다. 사우나는 달궈진 돌에 물을 껴얹어 생기는 수증기를 이용하는데, 섭씨 90도에서 100도까지 상승한다.

[편집] 요리

생강 쿠키는 크리스마스 전 날에 만들어 크리스마스 시즌 내내 먹는 음식이다. 보통 '글뢰기'라고 하는 매콤한 음료와 함께 먹는데 어른들의 경우 보드카에 섞어 먹는다.

[편집] 미디어와 통신

200개 이상의 신문사가 있고, 320개의 잡지, 2100개 이상의 전문지, 67개의 라디오 방송국, 5개의 국영 라디오 채널, 3개의 디지털 라디오 채널이 있다. 매년 12편의 영화가 만들어지고, 12,000권의 책이 출판되며, 1200만장의 음반이 판매된다.[1]

 

국영 방송사인 YLE는 5개의 채널과 13개의 라디오 채널을 2개의 언어로 송신한다.

약 79%의 국민들이 인터넷을 이용하고, 2007년을 기준으로 152만명이 이상이 광대역 인터넷에 접속한다.[2]

[편집] 교육

올란드 제도를 제외하고 학교에서는 핀란드어가 필수이며, 스웨덴어도 필수로 지정되어 있고, 영어 및 기타 언어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스웨덴계 국민은 어려서부터 TV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핀란드어를 접하게 되고, 보통 종합학교 7학년부터 학교에서 스웨덴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현재는 스웨덴어보다 영어에 중점을 두고 있으며, 종합학교 3학년 정도부터 영어 수업을 시작한다. 또한 종합학교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합친 과정으로 9년)에서도 다른 외국어를 선택 과목으로 이수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어 과목 교육 과정 등은 지자체와 학교마다 다를 수 있다. 국가의 외국어에 대한 관심은 전반적으로 높기 때문에 4 ~ 5개 국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는 핀란드인도 많다.

 

핀란드에서는 초등학교와 중학교의 구별이 없으며 학교 제도는 종합학교를 9년간 다니고 고등학교에 3년간 다니는, 일명 9-3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종합학교 9학년과 고등학교 1학년 사이에 진로를 찾기 위한 1년간의 휴학을 채택하고 있다.

 

대학은 모두 국립으로 비교적 쉽게 들어갈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나 핀란드의 교육 수준은 세계 교육계에서 "핀란드 메서드"로 주목할만큼 수준이 높다. 학생들은 경쟁에 의한 상대 평가가 아니라 달성도에 의해 평가되는 절대 평가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학력의 차이를 무시한 평등 교육이 아니며, 고등학교는 종합학교 중등반 성적에 따라 지원을 할 수 있다. 또한, 종합학교의 교육에 주목할만한 것은 성적이 낮은 학생이 특별 학급에 배정되거나, 보충 수업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학력을 차별화하여, 저학력 학생에 대한 개별 교육으로 뒤떨어진 학업성취도를 보충해 줌으로써 학생이 학교의 인형으로 전락되는 것을 방지하는 제도가 핀란드 교육의 특징이다.

 

유네스코의 규정에 따른 고등 교육 기관 (대학 및 기타 고등 교육 기관 과정)의 진학률은 2004년도를 기준으로 세계 두 번째로 87%이다. 2004년도에 열린 OECDPISA(학업능력평가)에서는 한국, 일본, 홍콩 등 교육열이 높은 국가가 유럽 선진국을 제치고 학력 세계 제일을 기록하였지만, OECD 조사 자체에 많은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다. PISA는 (1) 독해 (2) 수학 능력 (3) 과학 문맹률이라는 세 분야에 대해서만 57 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하였다.

 

핀란드 학교는 주 5일제를 적용하며, 교사는 대학 졸업이 기본이다.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에 대한 지원이 강력하며, 의무 교육이지만 유급 제도가 있으며,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대다수 학교의 학비가 무료이다. 한 교실을 담당하는 교사가 1명이 아니라 3명이다.

[편집] 군사

핀란드 독립기념일의 레오파드 2A4 전차 행진
FNS "한코" 하미나급 미사일 고속정
핀란드에서 제조한 F-18 전투기
  • 상비군-16,500명
  • 최대 동원 가능수-34,700명
    • 육군-27,300명
    • 해군-3,000명
    • 공군-4,400명
  • 군사비- GDP의 1.4%

3군 이외에 인원 3000명 가량의 국경수비대가 별도로 짜여져 있는데 평상시에는 내무부 지휘 아래에 있지만, 유사시에는 군으로 통합된다.

 

복무기간은 8∼12개월가량으로, 18살 이상의 남자에 대해 징병제를 실시한다. 여성과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 신도들(종교법인)은 면제 된다.

 

100명당 소형무기 소유율이 2007년 현재 미국, 독일 다음의 세계 3위 수준이다. 냉전 시대에는 소련제의 미그 21 전투기와 AK 소총, T-54/55과 T-72 전차와 중립국의 스웨덴제 서브 35 도라켄 전투기 등을 보유하고 있었다. 현재는 미국에서 구매한 F-18 전투기, 독일제 레오파드 2 전차 등을 갖추고 있다.

[편집] 대외관계

대한관계

남북한 동시수교국으로 1973년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남한과는 1973년 8월 24일에 외교관계를 맺었다. 핀란드는 한국을 1973년 4월 13일 승인하였다. 핀란드는 서울에 대사관을, 한국은 헬싱키에 대사관을 각각 두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의 축구 선수인 권정혁남익경이 핀란드 축구 리그에 진출해 있다.

일본과의 관계

핀란드는 일본과는 우호협력관계에 서있으며, 국제 사회상에도 일본은 핀란드의 입장을 지지해왔다. 당시 제2차 세계대전때에는 추축국의 편에서 같이 싸우기도 하였으며, 대립 관계에 있기도 하였다. 지금도 핀란드는 일본과의 관계에 좋은 위치를 하고 있다.

중국과의 관계

중국과의 관계는 매우 좋다.

 

<스웨덴>

 

 

 

 

 

 

 

 

 

 

 

 

 

출처 : 내마음의 보석상자(上善若水/?光養晦)
글쓴이 : 대륙철도횡단열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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