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돌궐족 (터키)

2012. 2. 25. 14:53교회사자료/10.세계사


돌궐·위구르로 이어진 유목제국, 유라시아의 무역·군사 초강국 군림 흉노 붕괴 500년 만에
유연 멸망시키고 초원의 유목민 통합 .돌궐, 세 부족 반란으로 무너진후 위구르가 새 제국 건설,돌궐,
정체성 지키기 위해 중국의 불교· 도교 배척하고 고유의 ‘ 탱그리(단군)’신앙 숭배 위구르, 唐 반란
제압해주고 비단 헐값에 독점 매입.


6세기 중반 서쪽으로는 카스피해에서 동쪽으로는 만주지방에 이르는 광대한 유라시아 초원을 제패한
강력한 유목제국이 출현했다. 이 제국을 건설한 사람은 스스로를 ‘튀르크(Turk)’라고 불렀고,
중국 측 자료에는 ‘돌궐(突厥)’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었다. 오늘날 터키(Turkey)라는 나라의 이름도
그 어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바로 이 ‘튀르크’라는 말에서 비롯된 것이다.

돌궐제국은 기원후 1세기 중반경 흉노가 붕괴된 뒤 실로 500년 만에 초원의 유목민을 통합하고
출현한 국가였다. 그런데 그 영역은 훨씬 더 커졌다. 과거 흉노의 경우 서쪽 경계가 대체로 파미르
고원 정도까지였는데, 돌궐의 범위는 서쪽으로 더욱 확장되어 카스피해와 흑해까지 미쳤으니
실로 유라시아 규모의 대제국이었고 당시 동아시아의 당제국, 서아시아의 압바스 칼리프조, 유럽의
동로마제국과 함께 유라시아의 국제질서를 좌지우지했던 큰 기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료에 기록된 내용을 살펴보면 ‘돌궐’이라는 부족은 원래 알타이 산맥 부근에서 유목하면서
거기서 철을 캐내어, 몽골리아 초원의 맹주 유연(柔然)에게 공납을 바치던 일개 미약한 부족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문으로 된 사료에는 돌궐인의 조상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거기에는 고난으로 점철된 그들의 역사적 기억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즉 언젠가 돌궐인이
주변의 강력한 국가의 공격을 받아 주민 모두가 살해되고 어린 사내아이 하나만 겨우 살아 남았는데,
암늑대 한 마리가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고기를 물어다 주어 키웠다. 후일 이 아이가 커서 암늑대와
혼인을 하고 거기서 10명의 아들이 태어났는데, 그 가운데 막내아들의 이름이 ‘아사나(阿史那)’였고,
그가 바로 돌궐제국의 카간(qaghan·황제)을 배출하는 씨족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학자들은 ‘아사나’라는 말이 튀르크어로 ‘늑대’라는 뜻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통상 ‘낭생설화(狼生說話)’라고 불리는 이러한 전설은 돌궐뿐만 아니라 몽골인에게도 보인다.
칭기즈칸의 계보와 그의 일대기를 기록한 ‘몽골비사’라는 책을 보면 맨 처음에 ‘잿빛 늑대’와 ‘흰빛사슴’
이 만나서 아이를 낳고 그 후손 가운데 칭기즈칸이 출현했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  

물론 늑대가 이들의 조상일 수는 없고, 다만 초원의 약탈자적 강인함의 상징인 늑대를 토템동물로
숭배했던 유목부족의 관습에서 비롯된 설화일 텐데, 흥미로운 사실은 당시 돌궐인이 이같은
낭생설화를 실제로 믿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가 발견된 것이다.

오늘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에서 서쪽으로 400㎞ 정도 떨어진 곳에 체체를렉이라는 도시가
있다. 현지어로는 ‘꽃이 만발한 곳’이라는 의미인데, 사실 이 도시는 항가이라는 이름의 산맥 북사면에
있으며 해발 1700m의 비교적 고지대에 위치해 있어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다. 봄이 되면
푸른 초원에 아름다운 야생화들이 만발하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던 것 같다. 이 도시의
중앙에 박물관이 있고 정원 한가운데에 높이 2.45m의 비석이 하나 세워져 있는데, 기단 부분에는
거북이 모양을 조각한 귀부(龜趺·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가 있다. 이수(首·뿔 없는
용의 모양을 아로새긴 형상)에 해당되는 부분은 한쪽 귀퉁이가 떨어져 나갔는데, 흔히 이수에
새기는 용은 보이지 않고 대신 어린아이가 늑대의 젖을 빨아먹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 비석의 삼면에는 모두 중앙아시아에서 사용되던 소그드(Soghd) 문자가 새겨져 있고 마지막
한 면에는 인도에서 사용되던 브라흐미 문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원래 체체를렉 근교에 위치한
부구트(Bugut)산에서 발견되어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기 때문에 통상 ‘부구트비’로 부른다.
비문을 판독한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여 제작연도는 대체로 580년대이며, 비석은 당시 이 지역을
지배하던 돌궐왕족에 속하는 마한 테긴(Mahan Tegin)이라는 인물의 기념비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돌궐제국의 지배집단은 자기들 조상이 늑대의 젖을 먹고 살아남은 ‘아사나=늑대’의 후손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처럼 비석의 머리 부분에 자신들의 뿌리를 보여주는 내용을 부조해 넣은 것이다.
늑대와 아이가 조각된 것은 퀼 테긴이라는 왕자의 비석 상단에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사나 일족이
모두 믿고 있던 설화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 측 기록에 의하면 돌궐의 건국은 553년의 일이었다. 그 해에 투멘(Tumen 만호장)이라는 이름의
수령이 몽골리아에 있던 유연을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일릭 카간(Ilig Qaghan)’이라는 칭호를갖고
즉위했다고 한다. ‘일릭’은 ‘나라를 건설한’이라는 의미의 튀르크어이지만, ‘카간’은 돌궐인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었다. 유목민의 군주를 뜻하는 명칭인 ‘카간’ 혹은 ‘칸’이라는 단어가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는지는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늦어도 5세기 중반경이 되면 선비·유연 계통의 유목민 사이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신라에서 4세기 중반경 처음 출현하는 ‘마립간(麻立干)’이라 는 칭호에서 ‘간’을
‘칸’과 동일한 단어로 보는 견해도 있다.

6세기 중반 몽골리아를 장악한 돌궐은 곧바로 대외원정에 나서기 시작한다. 제2대 카간은 서쪽으로는
헤프탈(Hephtal)을 쳐서 사산조 페르시아와 접경을 이루고, 동쪽으로는 거란족을 복속시켰으며,
북으로는 바이칼호에 이르고, 남으로는 고비사막을 넘어 당시 북주·북제로 나뉘어져 있던
북중국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 당시 이 두 나라는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방의 돌궐에
잘 보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재물을 갖다 바쳤으니, 돌궐의 제3대 카간은 “남쪽에 효성이 지극한
두 아이들이 있는데, 내게 물자가 부족할까 무슨 걱정을 하겠는가?”라고 호언장담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에 통일왕조가 들어서고 당태종이 대북방 강경책으로 선회하면서 상황은 바뀌기
시작하였다. 특히 지배층 내부의 갈등이 격화되고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돌궐은 급속하게 쇠약해졌고,
결국 630년 태종은 북방의 또 다른 유목세력과 연합작전을 펼쳐 돌궐의 카간을 생포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당의 동서 이간책으로 동돌궐의 패망 ,지금도 중공의 남북한 이간책 아닌지?)

이로써 초원의 대제국은 일거에 무너져버렸고, 유라시아의 유목민은 졸지에 당제국의 통제를받게
되었다. 634년 당태종은 포로가 되어 끌려온 돌궐의 카간과 남월(南越)의 수령에게 자신의 궁정에서
한 사람은 시를 읊게 하고 한 사람은 춤을 추게 하면서 “이제 호(胡)와 월(越)이 한 집안이 되었으니
일찍이 없었던 일”이라고 하면서 즐거워했다고 한다.
그는 중원의 통치자인 ‘황제’이면서 동시에
북방 유목민의 지배자로서 ‘천가한(天可汗)’이라고 불렸으니, 이는 ‘하늘 같은 카간’이라는 뜻이다.

물론 당나라의 북방지배는 현지의 부족장이나 씨족장을 도독(都督)과 자사(刺史)로 임명하여 다스리게
하는 간접적인 지배형태를 취하였다. 당시에는 이를 두고 ‘기미(羈)’라고 불렀으니 ‘소와 말의 고삐’를
뜻한다. 꼼짝 못하게 꽉 묶어두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마음대로 풀어주는 것도 아닌 느슨한 통제방식
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돌궐>인은 중국의 지배를 받은 지 반세기 만에 놀랍게도 제국의 부흥을 이룩하였다.

만리장성 주변의 내몽골 지방에 살면서 당나라의 감시와 통제를 받던 부족민 사이에서 570년대
후반부터 독립을 향한 움직임이 나타나다가, 682년에는 쿠틀룩(Qutluq)과 톤육쿡(Tonyuquq)이라는
두 사람의 지도자가 이끄는 돌궐인이 고비사막을 넘어서 북방으로 갔고, 마침내 687년에는 자신들의
성산(聖山)인 외튀캔(한국어= 우뚝한) 산지를 회복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재건된 나라를 돌궐
제2제국이라 부르며,당의 지배를 받기 전, 즉 553년부터 630년까지 존재했던 국가를 제1제국이라 부른다.

쿠틀룩은 ‘일테리시 카간(Ilterish Qaghan)’이라는 칭호를 취하였는데 이는 ‘(흩어진)백성을 모은
군주’라는 뜻이다. 그를 도운 건국공신 톤육쿡은 재상이 되었고 두 사람은 자녀들의 혼인을 통해
결속을 더욱 공고히 하였다.

반세기에 걸친 중국의 지배는 그들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식민의 기억이었지만 되풀이되어서는
안될 역사적 교훈이기도 했다. 제국을 부흥시킨 그들은 돌궐인이 어떠한 굴욕을 감내했는가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같은 각성을 통해서 돌궐 유목민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깨달아야 한다
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서 그들은 ‘중국적’ 종교인 불교와 도교를 경계하고 그 대신 유목민 고유의
‘탱그리(tangri=하늘=단군)를 강조했다.

돌궐의 카간은 ‘탱그리에서 태어나’ ‘탱그리와 닮고’ ‘탱그리가 세운’ 군주로 묘사되었다.
돌궐의 지배층은 이같은 사실을 일반 유목민에게 각인시키기위해 거대한 비석을 초원 여러 곳에
세우기 시작했다. 비석을 세우는 전통은 부구트비를 세운 제1제국 때부터 있었지만, 제2제국이 되면
전에 없던 중요한 변화가 하나 발견된다. 그것은 바로 돌궐인 자신이 창제한 고유한 문자에 의해
비문이 새겨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제2제국이 존속했던 680년경부터 8세기 중반까지 소위 ‘고대 투르크문자’로 새겨진 비문이 처음으로
발견된 것은 19세기 말이었다. 비문의 탁본은 학계에 소개된 지 불과 몇 년 만에 해독되었다.
그 결과 이 문자는 돌궐인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중앙아시아의 소그드인이 사용하던 소그드
문자를 고쳐서 만들었고 표음문자의 원리를 받아들여 35개 내외의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동시에 이란계 소그드어와는 달리 돌궐인이 사용하던 튀르크어의 언어적 특성에 적합한 체계로
수정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우리는 보통 유목민이라고 하면 가축을 치고 말을 타고 다니면
서 전쟁은 잘하지만 문화적으로는 미개한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글이 창제되기 무려 750년 전에 이들 유목민이 자신의 언어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표음문자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돌궐제국은 752년 그 지배하에 있던 세 부족의 반란으로 무너졌고, 이들 가운데 하나였던 위구르
(Uyghur)가 몽골리아의 모든 유목민을 제압하고 돌궐의 뒤를 이은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위구르는
때마침 중국에서 터진 안사의 난(755)에 개입하여 당 왕조를 대신해서 반란군을 토벌하고 수도장안과
낙양을 수복해주었다. 그러나 당나라는 비싼 대가를 치러야 했다. 양귀비에 빠져 반란을 자초한 현종
대신 즉위한 숙종은 위구르의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758년 자신의 어린 딸을 ‘영국공주(寧國公主·
나라에 안녕을 가져다 주는 공주)’라 이름하여 나이 많은 카간에게 보내야 했다.


중국 역사상 황제가 이민족의 강요에 의해 친딸을 시집보낸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물론 후일 몽골의쿠빌라이가 친딸을 고려 왕실의 태자에게 시집보냈지만 그것은 경우가 달랐다.
아무튼 숙종은 국경까지 친히 배웅 나와 눈물을 흘리면서 딸을 보냈는데, 시집간 그 다음 해에
카간은 죽었고 어린 딸은 유목민의 풍습에 따라 얼굴을 칼로 그으면서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리고 후일 그녀는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소박’을 맞고 중국으로 돌아오는 신세가 되었으니,
오히려 그녀에게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단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위구르의 위세에 눌린 당나라는 그들에게 비단을 헐값에 매도할 수밖에 없었다. 위구르인은 자신
들과 연맹했던 국제상인 소그드인에게 말떼를 넘겨주고 그것을 비단과 교환해 오도록 했다.
원래 말 1필에 비단 1필 하던 것이 나중에는 비단 40필을 요구할 정도가 되었으니, 당나라가 이런
불공정한 교역조건에 대해 항의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를 시정할 힘은 없었으니
그 처지가 말이 아니었다. 이렇게 해서 엄청난 규모의 중국산 비단이 위구르·소그드인의 손으로
들어갔고, 이들은 서아시아나 유럽과 원거리 비단무역을 통해서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거둘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6세기에서 9세기에 걸쳐 몽골리아에 등장한 돌궐·위구르와 같은 유목제국은 미증유의
광대한 영역을 지배하면서 유라시아 대륙 여러 지역의 문명권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들의 이같은 번영과 발전은 물론 유목민족의 기동성과 그에 기초한 기마군단의 탁월한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그들과 손을 잡고 일했던 국제상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는지도
모른다. 이들 중앙아시아 출신의 소그드인은 유목민에게 농경지역에서 생산되는 풍부한 물자,
비단 교역을 통해서 획득한 거대한 재화, 마니교와 같은 종교는 물론 자신들의 문자까지 전달해
주었고, 나아가 유목민의 세계관을 유라시아 전체로 넓혀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고대 튀르크 비문과 그 내용

현재까지 고대 튀르크문자가 새겨진 다수의 크고 작은 비문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도 규모가
큰 것으로는 제3대 군주였던 빌개 카간의 비, 그의 동생인 퀼 테긴의 비, 그리고 건국공신이자
빌개 카간의 장인인 톤육쿡의 비가 있다. 이들 비문에 적힌 내용을 통해서 우리는 처음으로 한문
자료라는 이방인의 프리즘을 통해서가 아니라 유목민 자신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육성, 초원의
바람처럼 거칠면서도 솔직하고 수식없는 진솔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하늘과 같고 하늘에서 태어난 튀르크의 빌개 카간, 나 이제 보좌에 앉았노라. …너희는 내 말을
잘 듣고 단단히 귀를 기울여라!”로 시작되는 빌개 카간의 비문은 중국인이 달콤한 말과 나긋나긋
한 비단으로 어떻게 돌궐인을 유혹해서 변경 가까운 곳으로 끌고 가서 절멸시켰는가, 그 후에
자신의 아버지 일테리시 카간이 어떻게 백성을 이끌고 나라를 재건하고 그들을 배불리 먹이고
따뜻하게 입혔으며, 군대를 이끌고 사방의 적들을 모두 쳐부수고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게 하였는
가를 기록하고 있다.

 

터키의 역사 : 튀르크-오스만제국 (1923 - 현재)



튀르크(돌궐)족은 기원전 220년 이후 수많은 국가를 이룩하였는데 이중에는 그 영토가 1,800만㎢ 이상에 걸친 경우도 있었으며, 10∼11세기경 현재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하여 셀죽 제국을 건설하였다.


튀르크인의 역사
초기의 튀르크인들은 돌궐족, 흉노족이라고 하였으며, 지금의 오르혼강 하류인 바이칼호 주변에 있었다. 돌궐은 몽골계 민족인 유연에 속해 있었으며, 돌궐의 수장인 토문은 '이리가한(伊利可汗)'이라고 자칭하며, 6세기경 유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이와 동시에 돌궐이 독립하였으므로 터키 공화국은 그 해를 건국의 해로 본다. 돌궐은 유목민족이으므로 말을 잘탔기 때문에 아주 빠른 기동성을 갖고 있었다.
중앙 아시아에 살던 그들은 알타이에서 카자키스탄지역으로 그곳에서 남하에 지중해까지 이르렀다. 다른 튀르크족들은 우랄산맥을 거쳐서 핀-오굴족과 만나게 된다. 또 다른 부족은 중국북서부에서 칸수지역으로 이동해 아시아 흉노국을 세운다. 다른 부족은 시베리아쪽으로 퍼져나간다. 또 인도의 인더스, 펀잡지역을 공격한 부족도 있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튀르크족은 BC 17 세기 경에 국가를 세운 것으로 나온다. 훈(흉노)라는 국가는 바로 튀르크족이 세운 국가인 것이다. 중국에 세워진 만리장성도 바로 이 튀르크족을 막기위해 세운 것이다. 그렇게 강대했던 흉노도 BC36년 북, 남흉노로 갈라지면서 북흉노는 멸망하게 되고, 남흉노는 중국의 속국이 된다. 멸망한 흉노들은 점차 서쪽으로 이동해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일으킨다. 그후 흉노족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드디어 유럽의 트라키아에 들어서게 된다. 그들은 유럽에 훈제국을 건설해 동로마와 서로마로부터 조공을 받아낸다. 유명한 왕은 아틸라였다. 유럽 훈제국은 아틸라 이후 힘을 잃고 사라지게 된다. 이상이 고대 튀르크인들의 역사인데 꽤나 복잡하다.


셀죽 튀르크
오우즈 부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오우즈의 부족장 두칸이 죽고 나서 그 뒤를 이은 셀죽, 그리고 그 손자 투룰, 차으르가 그 뒤를 있는다. 차으르의 지휘하에 1018년 아나톨리아에 진군해서 아르메니아를 물리치고 아니에까지 진출한다. 얼마 후 셀죽 튀르크는 카라한르도 패배시킨다. 1035년에는 가즈네리를 이겨서 호라산까지 진출한다. 그후 투룰은 스스로 술탄이 된다. 중요한 이란 도시중 하나인 이스파한을 얻고, 셀죽인들은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계속적으로 비잔틴에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다음에 바그다드에 들어간 투룰은 칼리프로부터 지배자로 인정받는다. 투룰이 1063년에 죽자 투룰의 형제 차으르의 아들 알프 아스란이 그 뒤를 잇는다. 아제르바이잔, 카프카시아까지 원정을 떠난 알프아슬란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니까지 포위한다. 그때 튀르크멘 그룹이 영토내에 이주해오기 시작한다. 그들을 위해서도 아나톨리아에 진출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비잔틴 제국도 내부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여황제가 루마니아인 디오게네스와 결혼한다. 비잔틴의 새황제는 계속해서 비잔틴을 괴롭히는 셀죽 튀르크를 아나톨리아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셀죽 튀르크를 공격한다. 1071년의 말라스기르트전투에서 비잔틴은 패배를 당하고, 셀죽 투루크의 아나톨리아 진출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린다. 알프아슬란의 뒤를 이은 아들 메릭샤는 아버지의 훌륭한 재상 니자뮬 뮬큐와 손잡고 계속적인 정복사업을 벌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얻는다. 아나톨리아의 토착민들은 셀죽 튀르크인들의 발전을 그렇게 불편해 하지 않았는데 그이유는 비잔틴 제국의 높은 세금 때문이었다. 그 후 사판자에서 비잔틴제국은 다시 패배를 당하고 아나톨리아는 서서히 튀르크화한다. 또한 슈레이만 샤에 의해서 안타키아(안디옥)까지 셀죽 튀르크의 영토가 된다. 메릭샤는 드디어 영토를 흑해까지 넓힌다. 그리하여 셀죽 튀르크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중국근방까지 서쪽으로는 이스탄불 근방까지 넓힌다. 메릭샤가 죽고나서 셀죽 튀르크에 왕권을 두고 혼란이 생긴다. 그리고 얼마 후 십자군 원정이 벌어진다. 산잘이 1141년 카라하이트에 패하고 나서 셀죽 튀르크는 없어지나 아나톨리아의 셀죽 튀르크는 그 역사를 이어간다. 십자군과의 직접적인 전쟁을 벌인 것은 바로 아나톨리아의 셀죽 튀르크이다. 셀죽 튀르크 말기에 역사에 등장한 몽골과의 쿄세산 전투에서 완패를 당하고 셀죽 튀르크는 일한의 점령하에 들어간다. 그 뒤 셀죽은 역사의 무대뒤로 사라진다.


오스만튀르크
오스만튀르크는 셀죽 시대에 세워져 셀죽 튀르크가 없어지자 독립을 선언한 부족국가 중의 하나이다. 셀죽 튀르크가 멸망하고 많은 이재가 몰려왔고, 또한 많은 부족들이 경쟁하는 중부 아나톨리아로부터 떨어져 부르사, 이즈닉 지역에 정착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견제를 덜 받았고, 이미 비잔틴제국은 약해질때로 약해진 상태였다. 오스만은 1299년 국가를 세운다. 그리고 1324년 죽을 때가지 차근차근 영토를 확장해서 말마라해의 아나톨리아지역을 석권한다. 그 뒤를 이은 아들 오르한은 1326년 부르사를 점령하고 1335년 일한이 멸망하자 독립국의 제일인자가 된다. 오르한은 계속적으로 서쪽으로 그러니까 비잔틴제국으로 처들어가길 계속한다. 1354년 오르한의 아들 슐레이만이 겔리볼루를 지나서 비잔틴제국의 유럽쪽 영토에 들어가기에 이른다. 이것은 오스만튀르크의 유럽땅에 내딛은 첫발자국이다. 슐레이만은 그후 앙카라를 점령하나, 사고로 죽게 되자 그의 형제 무라트의 계속적인 정복사업을 벌인다. 1362년 오르한이 죽었을 때 오스만튀르크의 영토는 아나톨리아의 북동부와 에게해의 일부, 트라키아의 일부였다. 1362년에 왕위에 오른 무라트 1세는 발칸 반도쪽의 점령을 시도해서 에디르네(아드리아폴리스)를 점령한다. 그리고 수도를 에디르네로 옮긴다. 1389년 무라트1세는 코소바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해 예니체리를 구성하는데 예니체리는 기독교집안의 자제들로 구성된 술탄의 친위대였다(예니체리 참고). 1396년 전체 유럽이 참가했던 십자군을 니볼루 전투에서 물리치고, 연합유럽조차도 이제는 오스만 튀르크를 유럽에서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와 더불어 비잔틴의 함락은 그야말로 시간문제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전성기를 치달리던 오스만 튀르크는 불의의 기습을 당하는데, 그것은 몽골족의 후예 티무르의 등장이었다. 티무르와의 전투에서 패한 오스만 튀르크는 재기불능의 상태로까지 빠졌다. 이것을 극복하는데 약 20년의 세월이 걸린다. 그 후 무라트 2세때 힘을 다시 회복한다. 1422년 헝가리, 폴란드 왕은 성경에, 무라트 2세는 코란에 맹세하며 협정을 맺고 무라트2세는 왕권을 아들 메흐메트 2세에게 물려준다. 그러나 헝가리와 폴란드는 이 서명을 어기고 튀르크의 영토로 쳐들어온다. 이에 메흐메트2세는 아버지의 도움을 요청하나, 무라트2세는 아들의 권위를 손상시키지 않기위해 이 청을 거절한다. 그러자 메흐메트 2세는 아버지 무라트에게 "내가 왕이라면 와서 군대를 지휘하고, 당신이 왕이라면 당신의 나라를 구하소서" 라는 말을 한다. 이에 무라트2세는 달려와 적군을 물리친다. 아버지 무라트가 죽고 나서 왕위에 오른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점령하는데 그때가 1453년이다. 학자들은 이때를 기준으로 유럽의 중세가 막을 내렸다고 한다. 야우스 술탄 셀림은 카이로를 점령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무너뜨리고 칼리프를 이스탄불로 데려와 칼리프직을 양도받아 오스만 튀르크는 명실상부한 이슬람의 종주국이 된다. 카누니 술탄슐레이만은 오스만튀르크를 최전성기로 이끄는 사람인데, 그 당시의 영토는 북부 아프리카 전체, 동부 유럽 전체, 중동지역 전체를 확장한 로마 이후 최대의 영토를 지니게 된다. 그 후로 점점 오스만 터키는 기울기 시작하고 점점 전쟁에서 지는 횟수가 많아지게 되는데, 그래도 오스만 튀르크는 그 명을 이어간다. 이어간다고 표현했지만 역시 당시에는 최강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편에 선 오스만 튀르크는 전쟁에서 져서 패전국으로 전락하고, 그 많던 영토는 이미 다 상실하고 아나톨리아마저 점령된 상태가 돼버렸다. 이 와중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터키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다. '아타튀르크'라는 이름은 터키인의 국부라는 말로 국회로부터 받은 칭호이다. 아타튀르크에 의한 독립운동은 성공해서 1923년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고 왕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오스만 제국 시대 (1281-1922)
오스만제국은 1281년 성립된 이후 1354년 유럽에 진출, 여러나라를 정복하였으며, Sultan Mehmet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정복함으로써 오스만제국의 팽창정책은 절정기에 들어섬. 16세기에는 에게해와 흑해가 오스만제국의 내해로, 이디오피아, 중앙아프리카, 예멘, 크리미아가 국경으로 되었고, 유럽의 비엔나까지 그 영토가 확장되었다.
오스만제국은 17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 1912∼1913년 발칸전쟁으로 영토가 그리스의 Maritsa강 지역까지 축소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시에는 패전국인 독일측에 가담, 1920년 8월 연합국측과 체결한 Sevre 강화조약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背後地와 아나톨리아 고원만을 보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무스타파 카멜 파샤(Mustafa Kemal Pasha)의 영도로 실지회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1923년 7월 연합국측과 Lausanne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현재의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

1071년 셀주크족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을 쳐부수고 아나톨리아에 정착했다. 당시 쇠퇴기를 맞은 비잔틴 제국은 튀르크족의 위협이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비잔틴 제국은 경제적 위기로 쇠약해진데다 로마 황제 디오게네스가 암살된 후 자신들이 원하는 왕을 등극시키고자 하는 도당끼리의 싸움으로 분열된 상태라, 아주 뒤늦게 서야 튀르크족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알렉시스 콤네노스가 권력을 장악한 1081년에 소아시아는 거의 튀르크족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당시 튀르크족은 점령한 영토를 분할해 나누어 가졌다. 반도 중앙부의 콘야(KONYA)는 13세기 전반에 융성기를 맞았던 아나톨리아의 셀주크족이 지배했다. 셀주크족은 중앙아시아에서 계속 밀려들어오는 유목민들을 서쪽 국경지대에 머물게 하고는 국경수비를 맡겼는데, 이미 아나톨리아 고지에 정착한 튀르크의 도시인들이 그들을 서쪽으로 내몰았다. 그로 인해 코니아의 술탄은 400개에 이르는 천막을 이끌고 소아시아에 도착한 오스만족의 선조인 에르토그룰에게 세습 토지이자 가축들의 여름 목초지로 사용하던 아나톨리아 북서쪽의 소유트 촌락을 양도해야만 했다.
여기서 에르토그룰의 아들 오스만이 오스만 제국의 시조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시조 오스만 1세(1280-1324)
오스만 - 시조
오스만은 대단히 대담한 지도자였다. 역사적으로 확인된 초기 영웅담에 따르면, 1302년에 오스만은 니코메디아 부근에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에서 처음으로 비잔틴을 쳐부수었다. 그는 이웃 기독교인들과 이슬람교도들을 복속시켜 점차 마르마라해 방향의 부르사와 니케아 쪽으로 영토를 넓혀갔고, 동시에 자신의 정복지들을 관할하기 위한 조치들을 단행했다. 아나톨리아의 주요 도시에서 건너온 이슬람 법률가들과 문인들이 그를 도와 새로운 요구에 부응하는 국가 초석을 마련했다.
오스만은 아나톨리아 중부에 위치한 게르미안(Germian) 공국에 압박을 받자 보스포러스 해협과 마르마라(Marmara)해안으로 이주하여 동로마 제국의 영토를 잠식해 갔다. 내정이 문란해진 동로마 제국은 오스만제국의 공세를 막지 못했다. 1323년에 점령된 도시 부르사(Bursa)는 오스만제국 최초의 수도가 되었다(오스만은 아나톨리아의 튀르크왕들을 본따서 도시를 정복한 후 모스크, 교육기관, 빈민급식소, 병원, 목욕탕, 대상들의 숙소, 교량등 종교적 또는 사회적 용도의 수많은 건축물들을 설립했으나 본인은 천막에 거주하는 방식을 오랫동안 선호했다고 함.).

오르한
오스만의 아들 오르한(1323-1362년)은 서쪽으로 계속 전진하면서 처음으로 동쪽 앙카라로 방향을 돌렸다. 그는 비잔틴 인들을 물리치고 니케아와 니코메디아(1337년)를 정복했다. 또 카레시 태수령을 합병하고 다르다넬스 해협의 지중해 연안에 정착했다. 그는 비잔틴 제국의 내분을 이용하는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유럽에 발을 들여놓았다. 새 황제 요한네스 5세 팔레올로구스는 미성년자였고, 그의 어머니 안드사부아는 섭정을 맡은 요한네스 콘타쿠제누스와 대립하고 있었다. .
오르한은 콘타쿠제누스에게 협력했고, 1346년 그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했다. 오스만족은 동맹자를 강력하게 원조해 주기 위해 정기적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을 드나들었다. 이렇게 해서 트라키아에 정착했고 몇 년 후인 1354년에는 겔리볼루를 점령했다. 오스만제국은 동로마 제국의 제위 계승 분쟁에 개입하면서 발칸 반도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그들은 유럽에 진출하여 약 6세기 가량 머물게 된다.


오스만 왕조의 번영
무라트 1세
오르한이 죽자 그의 세 아들 중 하나인 무라트 1세(1362-1389년)가 권좌에 올랐다. 그가 오스만 제국의 힘을 유럽에 최초로 알렸다는 점에서 그의 통치 시기는 대단히 중요하다. 1363년 그는 아드리아노플(지금의 에디르네:EDIRNE-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가 건설한 도시)을 점령하여 그곳에 중앙정부를 세웠다. 이어 무라트 1세는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동부와 불가리아를 점령했다. 동쪽 국경에서는 오스만족의 주요 적이었던 카라만의 태수들을 격퇴했다.
그는 행정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중앙집권적인 행정조직을 정착시키고 군대에도 예니체리 부대라는 새로운 보병대를 편성하여 정복지의 통제와 관리를 맡김으로써 16세기에 절정을 맞게 될 오스만 제국의 기초를 다져놓았다. 또한 그는 처음으로 술탄이라는 칭호에 걸 맞는 직책을 부여받기도 했다. “벼락” 이라는 별명을 지닌 그의 아들 바예지드 1세(1389-1402년)는 카라만을 제외한 아나톨리아의 동부와 중앙의 모든 튀르크 태수령을 합병시켰다.
위기를 느낀 발칸 반도의 여러 군주들이 연합하여 오스만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준비하였다. 튀르크족은 무적의 군대라는 명성을 얻어 수세기 동안 서구인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무라트 1세는 직접 통치보다는 조공과 유사시 군대 지원을 조건으로 기존의 지배층을 인정하고 활용하는 간접 지배 방식을 택했다. 기존 군주의 생명과 재산을 보장해 주고 정복지의 문화적 전통을 인정하는 무라트 1세의 통치 방식은 그 후 오스만제국의 기본 정책이 되었다.


바예지드 1세
무라트 1세의 뒤를 이은 아들 바예지드 1세는 집권 초기에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카라만(Karaman) 튀르크멘 공국과 대결하였다. 카라만은 발칸 반도의 세르비아와 연합하여 오스만제국을 협공하였다. 바예지드 1세는 1391년 카라만을 패퇴시키고 동부 아나톨리아까지 복속시켰다. 이어 발칸 반도로 출병하여 헝가리와 동로마제국의 지원으로 반기를 든 소국들을 다시 지배 하에 두었다. 나아가 불가리아 전체를 점령하여 직접 통치하에 두었으며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였다. 이에 헝가리를 중심으로 십자군이 결성되었으나 바예지드 1세는 1396년 도나우 강변에 있는 니코폴리스(Nicopolis)에서 이를 격퇴하였다. 이로서 도나우 강 이남 지역이 오스만제국의 지배 하에 들어왔다. 이에 이집트 카이로에 망명해 존속하던 압바스 왕조의 할리파가 바예지드 1세에게 술탄(Sultan) 칭호를 주었고 바예지드 1세는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서방의 정복자 바예지드 1세는 동쪽에서 무서운 적수와 대적해야 했다. 당시 티무르 렝이라는 절름발이 타메를란이 이끄는 튀르크-몽고족의 새로운 물결이 동방에서 기세를 떨치고 있었다. 티무르 전사의 무리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침입한 뒤, 아나톨리아 동부에서 튀르크족과 맞붙게 되었다. 1402년 앙카라에서 대격전이 벌어졌다. 바예지드 1세와 티무르와의 결전은 1402년 7월 28일 앙카라 평원에서 이루어졌다. 튀르크계 부족들은 바예지드를 버리고 티무르에게 기울었고 바예지드는 기독교도 부대만을 이끌고 전투에 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에서 오스만제국 군은 참패하고 바예지드 1세는 포로가 되었다가 곧 사망하였다. 티무르는 바예지드 1세에 멸망당한 군소 왕국을 부활시키고 사마르칸트로 돌아갔다.
티무르가 아나톨리아로 진격한 것은 정복이 목적이 아니라 배후의 잠재적 위협을 제거하려 한 것이었다. 몽고 세계 제국 부활을 목표로 활동한 티무르는 명나라와 인도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티무르는 징기스칸의 10대 후손을 황후로 맞이하였다). 70세가 넘은 노구를 이끌고 티무르는 1405년 명나라를 치기 위해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으나 도중에 병사하였다. 티무르의 죽음은 오스만제국에는 큰 행운이었다. 비록 바예지드 1세의 아들 4명이 술탄 자리를 놓고 골육상쟁을 벌였으며, 두드러진 외부의 침략은 없었지만, 사태는 심각했고,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에서의 지배권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왕이 없었던 10년 동안 술탄으로 내정된 후계자들끼리 권력다툼을 벌이는 바람에 제국은 분열 직전이었다.


마흐메드 1세와 무라드 2세
1413년 메흐메트 1세(1413-1421년)가 다른 3명의 형제를 제거하고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메흐메트 1세와 그의 뒤를 이은 무라드 2세(1421-1451년)의 통치 기간에 오스만제국은 바예지드 1세 때의 영토를 회복하고, 유럽과 아나톨리아에서 더욱 세력을 확장하였다. 메흐메트 1세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다시 복속시켰고 무라드 2세는 아나톨리아를 다시 지배 하에 두었다. 무라드 2세의 가장 큰 업적은 해군을 육성한 것과 술탄의 친위부대인 예니체리를 대폭 강화한 것이다.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평정에 이어 무라드 2세는 이탈리아의 왕성한 도시국가 베네치아(Venecia, Venice)와 무역 로를 놓고 전쟁을 벌였다. 베네치아는 그때까지 흑해와 오스만제국 지배하의 무역 로를 이용하며 오스만제국과의 우호 관계를 맺어 왔다. 그러나 베네치아가 동로마제국으로부터 살로니카를 얻고 오스만제국이 마케도니아를 지나 아드리아 해로 진출하는 것을 막으려 하여 충돌이 일어났다. 이 전쟁은 7년을 끌었는데 무라드 2세가 왈라키아(Walachia)를 점령한 헝가리와 동시에 전쟁을 벌여야 했기 때문이다. 1430년에 이르러 무라드 2세는 강력한 함대를 건설하여 베네치아의 해군을 격파하여 아드리아 해를 장악하였다.
튀르크 계 왕조는 왕족과 귀족들의 권력이 강하고 술탄의 권력이 그리 강하지 못해 내분이 자주 일어난다. 예니체리 부대원들은 기독교 노예들과 이슬람으로 개종한 비튀르크 족들을 주축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어릴 때 징집되어 엄격한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가족관계도 없고 오직 술탄에 대해 절대적 충성만 하도록 교육받았다. 귀족들은 일정한 수준 이상의 대외팽창에는 반대하였는데, 이는 광범위한 정복전쟁을 통해 술탄의 권력이 귀족을 압도하는 수준으로 커질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예니체리의 강화로 정복전은 용이해졌다.
무라드 2세는 예니체리를 이끌고 유럽 원정을 본격화하였다. 1434년 헝가리와 전쟁을 시작하여 1439년에는 헝가리에 복속되어 있던 세르비아를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때 무라드 2세는 처음으로 간접통치 방식을 버리고 세르비아를 직접 통치로 전환했다. 1443년에는 헝가리 국왕 훈야디(Hunyadi)를 즐라티카(Zlatica) 전투에서 격파하여 모든 저항 세력을 무력화시켰다. 이에 놀란 튀르크 귀족들이 헝가리에 유리한 평화협정을 체결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444년 무라드 2세는 헝가리와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이 조약으로 헝가리는 왈라키아와 베오그라드를 획득하고 세르비아는 자치권을 얻었다. 또한 오스만제국은 도나우 강 이북에 대한 공략을 중지하기로 했다.
오랜 대외 전쟁과 귀족과의 권력 투쟁에 지친 무라드 2세는 1444년 세 번째 아들인 메흐메트 2세(1444-1446년)에게 양위하고 종교적인 명상에 탐닉했다. 12살의 어린 술탄이 등장하자 동로마 제국과 로마 교황은 오스만제국에 대한 십자군 원정을 기획하였다. 동로마, 헝가리, 베니스가 주축이 된 이 십자군은 평화 협정을 파기하고 세르비아와 발칸 산맥을 통과하여 흑해의 요충지 바르나(Varna)까지 진격하였다. 이에 무라드 2세가 신속히 아나톨리아에서 귀환하여 군대를 이끌고 1444년 11월 10일 바르나 전투에서 유럽 십자군을 궤멸시켰다. 이것이 이슬람에 대한 마지막 십자군 원정이었다.
바르나 전투에서 승리한 무라드 2세는 황제로 북위하여 메흐메트 2세는 술탄의 자리를 아버지에게 빼앗겼다. 그는 다시 발칸 원정을 하였고 1448년 2차 코소보 전투에서 알바니아의 민족 영웅인 스칸데르베르그(Skanderberg)의 저항을 분쇄하였다. 1451년 2월 무라드 2세가 사망하고 메흐메트 2세(1451-1481년)가 19세의 나이로 다시 즉위하였다.


메흐메트 2세와 셀림 1세의 활약
메흐메트 2세(1451-1481년) - 정복왕
메흐메트 2세의 지상 과제는 역대 오스만제국의 술탄들의 소망이었던 동로마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 함락이었다. 동로마는 거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고 콘스탄티노플과 그 부근만을 차지하고 있었으나 콘스탄티노플이 가지는 중요성은 단순히 한 도시만이 아니었다. 콘스탄티노플은 기독교 세계의 정치, 문화의 상징이었다. 전통적으로 오스만제국 귀족들은 콘스탄티노플 점령을 결사반대했다. 명분은 동로마 멸망이 십자군 운동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술탄의 권력 강화를 우려한 때문이었다. 예니체리는 술탄의 동로마 공격을 강력히 지지하였다.
아나톨리아를 평정한 후 1452년 메흐메트 2세는 주도 면밀 하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준비를 해나갔다. 그는 우선 유럽 연안의 가장 좁은 해협에 루멜리 히사르 성채를 쌓아서 보스포루스 해협을 차단하는 것으로 공략을 개시했다. 동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사절을 보내 축성 중단을 요청하였으나 메흐메트 2세는 거절했다. 1452년 8월 루멜리 히사르 성채는 완공되었다.
맞은편 아시아 연안에는 바예지드 1세가 축조한 아나돌루 성채가 있었다. 두 성채에는 대형대포를 갖추고 선박의 통행을 엄격히 통제했다. 헝가리의 유명한 제련공을 고용하여 엄청난 규모의 대포를 주조하게 했다. 1452년 여름 헝가리의 엔지니어 우르바누스가 콘스탄티노플로 찾아와 동로마제국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에게 대포 제조를 건의하였으나, 거절당하자 우르바누스는 메흐메트 2세를 찾아갔다. 메흐메트 2세는 그가 견고한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파괴할만한 대포를 제작할 수 있다고 판단하자 우르바누스가 기대하던 액수의 4배를 보수로 지급하기로 하였다. 3개월간의 작업으로 1453년 1월 완성된 대포는 전하는 바에 따르면 길이가 거의 9 m, 포문의 구경은 15 cm로 600 kg의 포탄을 1마일이나 날릴 수 있었다.
1453년 1월 말 메흐메트 2세는 모든 신하들을 불러놓고 전쟁을 결의하였다. 메흐메트 2세는 사흘간 콘스탄티노플의 요새들을 조사한 뒤, 1453년 4월 2일에 공격을 개시했다. 그는 유럽인과 아시아인으로 각각 편성한 군대와 대포, 공격 무기를 집결시킨 뒤 도시를 포위했다. 오스만제국의 함대는 3월 갈리폴리(Gallipoli) 앞바다에 집결하여 3월말에는 마르마라 해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군도 3월에 콘스탄티노플로 나아갔고 메흐메트 2세는 4월 5일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하였다.
제노바와 베네치아에서 소수의 그리스 지원군이 도착했다. 오스만제국 군은 정규군 8만, 비정규군 2만이었다. 이에 비해 동로마는 그리스인 4,983명, 외국인 2,000명으로 7,000명이 못되는 병력으로 방어해야 했다.
도착 당일인 4월 5일 메흐메트 2세는 이슬람의 전통에 따라 사절을 파견하여 항복을 요구하였다. 즉시 항복한다면 주민들의 목숨은 살려주겠으나 따르지 않으면 자비는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 11세는 응대하지 않았다. 4월 6일 오스만제국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포 1문당 하루 발사 횟수는 7발에 불과했으나, 포탄 한발 한발은 우뢰와 같은 소리를 내며 콘스탄티노플 성벽을 무너뜨렸다. 오스만제국의 해군은 해안을 따라 순시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해상 봉쇄하여 외부의 원군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골든 혼(Golden Horn)으로 들어오면 육군의 성채 공격에 합세할 수 있었다. 4월 12일 오스만제국의 해군은 보스포러스 해협을 따라 골든 혼 진입을 시도했으나 동로마제국의 완강한 수비로 실패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골든 혼에 쇠사슬을 쳐 함선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해상 진입이 불가능해지자, 메흐메트 2세는 4월 22일 야음을 타서 67척의 전함을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골든혼까지 모래위로 선박을 이송했다. 일단 선박이 수로에 당도한 다음에는 배를 연결해 다리를 만들고 군대를 통과할 수 있게 했다. 이로써 도시는 완전히 포위되었다.
육군과 해군의 합동 공격이 시작되었으나 동로마는 결사 항전하여 1개월을 버티었다. 그러나 식량부족에다가 서유럽에서 구원 군이 올 가능성이 없어지자 절망감에 빠졌다. 오스만제국에도 비관론이 대두되었다. 5월 26일 참모회의에서 오스만제국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재상 할릴 파샤(Halil Pasha)는 강화를 맺을 것을 주창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29일을 총공격 날짜로 정했다. 29일 새벽 1시 반 경 오스만제국의 총공격이 시작되었다. 공세의 시작은 비정규 부대인 바시바조우크가 맡았다. 새벽 4시가 되자 아나톨리아 튀르크 군이 2차 공격을 시작했다. 동로마제국 측에서는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진두지휘하여 잘 막아냈다. 3차 공세에는 술탄의 친위부대인 예니체리가 투입되었다(예니체리의 해체 참고). 이른 아침 오스만제국 군은 콘스탄티노플 성에 진입했다. 방위부대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두 달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굶주리고 무력해진 콘스탄티노플은 5월 29일 굴복하고 말았다. 비잔틴의 마지막 황제는 최후의 접전에서 전사했다(루멜리성, 로마의 성벽 참고).

대규모 방화와 약탈이 시작되었다. 메흐메트 2세는 공격 개시 전 3일간의 약탈을 허용했으나 29일 저녁에는 중지시켰다. 29일 저녁 메흐메트 2세는 말을 타고 소피아 성당으로 들어갔다. 그를 따라온 이맘(Imam:이슬람교에서 예배를 지도하는 사람)이 엄숙히 선언했다.
"알라 이외에는 신이 존재하지 않으며 마호메트는 신의 사도이다."
메흐메트 2세는 성 소피아 대성당 이슬람 사원으로 바꿀 것을 명했다. 대성당의 수많은 인물 모자이크와 벽화는 이슬람 계율에 위배되기 때문에 석회로 덧칠을 해 버리고 이슬람 문양으로 장식을 했다. 동방 기독교의 총본산이었던 성 소피아는 이슬람 사원으로 변모하여 영국 역사가 토인비가 역사의 근저에 있다고 본 문명의 구도 '도전과 응전'을 그대로 보여준다. 즉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의 조우-격전이다. 이런면에서 '콘스탄티노플 함락'이야말로 세계 역사상 가장 흥미로우며 또한 많은 문제를 내포한 드라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메흐메트 2세는 대대적으로 콘스탄티노플의 복원과 정비에 착수하였다. 콘스탄틴노플의 이름을 이스탄불(Istanbul)로 고치고, 오스만 튀르크 제국의 수도를 아드리아노폴리에서 이스탄불로 옮길준비를 하였다. 이스탄불은 단순히 새로운 정복자들을 위한 도시가 아니라 토착 동로마인과의 공존이 가능한 국제적 성격의 도시로 기능하도록 하였다. 그는 과거에 지켜온 규율을 그대로 편입시키고 정복국가의 법과 관습을 보존시켰다. 조세 제도를 정비하여 무역상과 장인들의 이익을 보장하였고 비 이슬람교도의 종교 의식, 언어, 관습의 보존을 허용하였다(오스만의 관용정신 참고). 이로서 세계 교역의 중심지로서 이스탄불은 더욱 번영하였다. 콘스탄티노플에 있던 교회들이 잇달아 모스크로 개조하고 1475년 톱카프 궁전을 건축하도록 하였다. 자신의 통치 말기에 편찬된 세속 법률집인 <카눈나메(Kanunname)>에서 메흐메트 2세는 제국 전체에 일관된 제도를 정착 시키고자 애썼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잔인하고 천하무적인 튀르크족의 인상이 부각되면서 유럽에 커다란 반향이 일었다. 하지만 서구세계는 동요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2년 뒤, 세르비아 공략에 성공했다. 다음해인 1456년에는 보스니아도 튀르크(오스만)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로써 폴란드와 헝가리는 대튀르크 전선의 최전선에 놓이게 된다.
1460년, 펠로폰네소스 반도에 팔레올로구스 왕가 황족들이 간신히 보존하고 있던 지역도 오스만 대군앞에 무릎을 꿇었다.
다음해인 1461년, 역시 비잔틴 제국의 황통을 이은 나라인 트레비존드가 함락된다. 이로써 흑해 남안은 오스만의 완전한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1463년, 지금까지 육전을 주전공으로 하던 오스만군이 바다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과녁이 된 것은 에게 해에 떠 있던 레스보스 섬이었다. 대군이 상륙해서 육지에서 공격을 퍼붓자 200년 이상 제노바령이었던 이곳도 즉시 함락되고 만다.
1470년, 에게해 남하를 계속한 오스만은 베네치아 해군기지 네그로폰투스에 싸움을 걸어 그 해에 네그로폰투스를 점령한 데서 시작되어 이후 10년 간이나 계속된 튀르크-베네치아 전쟁의 단초가 되었다.
1473년, 페르시아 따라 원정에 나선 오스만군은 페르시아군을 패주시키고 개선한다. 이에따라 동서로 오스만을 협공하려던 베네치아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1475년, 오스만은 대군을 흑해로 파견하여 카파를 공략한다. 이 공략에 의해 흑해는 오스만의 내해가 되었다. 카파를 근거지로 하던 제네바의 통상은 이로써 재기불능 상태가 되어 버렸다.
1479년, 이번에는 서남쪽으로 군사를 보낸 메흐메트 2세는 당시까지 산악지방의 게릴라전으로 애를 먹어왔던 알바니아를 마침내 수중에 넣는 데 성공한다. 이제 발칸은 그리스 해안을 따라 점점이 존재하는 베네치아 기지를 빼고 나면 완전히 오스만 앞에 무릎을 꿇었다.
1480년, 이탈리아 본토가 처음으로 오스만의 공격에 직면했다. 오스만군이 남이탈리아의 오틀란토에 상륙하자, 로마 교황은 성 베드로 광장이 금세라도 이슬람교도로 메워질 것만 같은 생각에 밤잠을 설칠 정도엿다. 하지만 그 다음해에 술탄이 급사를 하면서 오스만군이 철수함에 따라 이는 악몽으로 그쳤다.
메흐메트 2세는 1481년 5월 3일 대군을 이끌고 아시아쪽으로 건너간 직후 숨을 거뒀다. 당시 나이 49으로 원정의 목표는 시리아와 아라비아 반도의 메카, 그리고 이집트 공략이었다고 한다. 이 기독교의 적이 죽자 유럽은 횃불을 올리고 불꽃을 날리며 축하했고, 교회는 신에 감사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로 가득찼다. '정복왕' 이라는 칭호를 얻은 메흐메트 2세의 전적이 모조리 성공으로만 색칠 된 것이 아니다. 베오그라드 공략은 실패했고, 로도스섬도 함락되지 않았다. 이 두군데는 물론이고 시리아와 이집트 공략도 그가 쌓아놓은 기반 위에 선 손자 셀림, 그리고 술레이만 대제때에 이르러 실현되었다.

오스만은 '정복왕' 사후에도 급격히 붕괴하지 않았다. 알렉산더 대왕보다 20년 정도 더 산 메흐메트 2세에게는 정복에 그치지 않고 정복지를 지배망에 확고히 편입시킬 수 있는 사회기구를 정비할 시간적 여유도 있었기 때문이다.
안정된 듯하던 오스만 제국에 15세기 초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정복자의 아들인 바예지드 2세(1481-1512)는 동생 젬을 제압하고 왕위 계승 분쟁으로 기강이 흔들린 제국의 질서를 바로잡았다.


셀림 1세 - 무서운 사람
결정적인 위기에 처한 시기에 셀림 1세(1512-1520)가 권력을 잡아 가신들을 내치고 고관들의 목을 베게 하는 등, 널리 알려진 잔인성 때문에 그는 생전에도 ‘무서운 사람’ 이란 별명을 얻을 정도였다. 황실의 권위를 회복한 셀림은 샤 이스마일에게 대항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두 왕 모두 튀르크족이었다.
오스만은 수니(정통회교도파)로서 선지자 마호메트의 수나(회교의 구전 율법), 즉 전통을 내세웠다. 수피(신비주의)교단의 셰이크(장로) 후손인 사파비조는 선지자 마호메트의 사촌이자 마호메트의 딸 파타마의 남편인 알리의 추종자들이 결집한 이슬람의 최대분파인 시아교파와 관련되어 있었다.
1514년 셀림은 샤 원정에 나섰다. 이는 18세기까지 두 강국을 대립시키는 기나긴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두 군대는 아나톨리아의 반 호수 북동쪽인 찰드란 평야에서 맞붙었다. 찰드란에서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후에, 셀림은 교전도 하지 않고 사파비조의 수도 타브리즈를 포위했다.
그는 귀중한 전리품을 탈취했는데 그중에는 화려한 수사본(手寫本)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예술가와 장인들을 이스탄불로 데려와 황실 작업장에서 일하게 했다. 이로 인해 페르시아의 영향이 오스만 제국의 예술, 특히 세밀화 부문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나톨리아의 통합 계획 이후 셀림 1세는 맘루쿠의 속령들이 마음에 걸렸다. 적대관계인 샤 이스마일과 맘루쿠의 술탄칸수 알 가우리가 언젠가 합심해 공격해올 것이었다. 그는 책략을 써서 맘루쿠의 술탄이 이집트를 떠나도록 유도했고, 1516년 알레포 북쪽에서 그의 군대를 분쇄하고 쉽사리 시리아를 점령했다.
1517년 1월에는 이집트를 점령하여 2세기 반에 걸친 맘루크 왕조의 종지부를 찢었다. 그는 그들의 특권을 모두 빼앗고 칼리프의 칭호와 계승권을 인수해 이스탄불로 옮겨왔다. 이슬람교의 최고 지위인 칼리프를 오스만의 술탄들이 겸임하면서 이스탄불은 이슬람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1520년 가을 셀림 1세는 급환으로 사망했다. 1512년 붕괴 위기에 놓인 국가를 인수받은 그는 8년 만에 오스만 제국을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로 뻗어가는 대국으로 만들어 아들 술레이만 1세(1520-1566년)의 손에 넘겨주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가장 업적을 많이 남기고 오랜 통치를 한 장본인이 바로 술레이만 대재일 것이다.


술레이만 - 위대한 왕
술레이만은 제국에서 가장 오랜 통치(1520-1566년) 46년간을 했다. 셀림은 왕위를 계승할 아들 하나만을 남겨두었는데, 아버지(셀림)가 죽었을 때 술레이만은 25살 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는 곧 지도자로서 충분한 자질을 보였다(술레이만은 장신에다 마른 편 이었고, 매부리코에 각진 턱, 위압적인 검고 커다란 눈은 엄격한 인상을 주었으며, 그의 아내 록셀란은 “결코 아름답지는 않지만 우아했다” 고 표현할 정도였으며, 그녀는 쾌활한 성격 때문에 명랑한 여인, 즉 후렘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는 군대에게 인정을 받았고, 모든 반란 기도를 즉각 무력으로 진압하여 지방에서도 그의 권위를 존중하게 만들었다. 그는 특정한 종교나 인종에 구애받지 않고 모든 백성에게 숭앙받는 왕이 되기를 원했다. 술레이만이 통치기간 동안 취한 여러 행정적 조치들을 보면 그가 정의롭고 관대한 ‘위대한 왕’ 이라는 사실이 극명하게 나타난다. 탁월한 행정적 업적을 살펴보면 그가 카누니, 즉 입법자란 칭호를 받을 만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술레이만은 공정하고 현명하며 도덕적으로 고매한 매우 종교적인 인물로 그려졌고, 또한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고 자신이 한 약속을 충실히 지키는 사려 깊은 인물이기도 했는데, 말년에는 금욕 생활을 했으며, 아리따운 아내 록셀란, 즉 후렘 왕비와 그가 각별히 총애하던 재상 이브라힘에게만은 지나치게 치우쳤다는 비판을 받았다. 특히 국가 안녕을 위해 두 아들을 희생시켰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술레이만은 다른 군주들, 특히 프랑수아 1세와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했으며, 동유럽과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카를 5세와의 대전투에서 적수의 지지가 있으면 유리하리란 사실을 꿰뚫어 보았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야말로 기독교권의 왕 프랑수아 1세와 ‘위대한 왕’의 역사적인 동맹이 탄생했던 것이다.
1544년부터 1545년 사이에 프랑스인과 튀르크인은 니스와 사부아 속령 공략을 비롯해 여덟 차례에 걸친 합동 해전에 참여했다. 술레이만은 선왕들의 업적을 완성하여 지중해 동부를 장악하는 한편 유럽 깊숙이 침투해 갔다. 1521년 5-6월 전격적인 원정으로 그는 베오그라드와 주위의 요새들을 점령했다. 그리고 다음에는 로도스 섬에 세력을 집중시켜 공략을 시작한지 5개월만인 1522년 12월 20일 섬을 함락했으나 기사단과 섬 주민들의 필사적인 저항에 경탄하고는 전쟁의 영예를 적인 그들에게 돌려 결국 빌리에 드 리슬 아담과 그의 부하들은 섬을 떠났고 지중해는 오스만제국이 되었다.
술레이만 통치기의 황금기는 이브라힘 파샤가 재상 직에 있었던 시기와 일치한다. 이브라힘은 술레이만을 섬기는 시동으로 왕궁에 들어온 그리스 출신으로 당당한 풍채와 지성, 빠른 두뇌 회전으로 왕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궁정학교에서 자란 이브라힘은 공부를 열심히 해서 페르시아어, 이탈리아어, 튀르크어, 그리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는 곧 왕의 그림자와 같은 동반자가 되었다. 1523년 술레이만은 그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이듬해에 누이 하디스와 결혼시켰다. 이처럼 바로 제국의 최고위직으로 상승해가자 많은 사람들이 이브라힘을 시기했고 술탄이 베푸는 특별한 호의에 대해서 수군거렸다. 이브라힘 파샤는 재빨리 자신의 역량을 과시했다. 아흐메드 파샤의 봉기가 일어나자 그는 이집트로 파견 나가 1년 만에 내부질서를 회복했고 선임자의 악습을 시정했으며 모범적인 행정기구를 설치했다.
1526년 헝가리 군대와 오스만 군대가 모하크스 평원에서 격돌했다. 헝가리 군대는 몰살되었고 루투비히 2세도 전사했다. 술레이만은 손쉽게 수도인 부다를 점령했고 헝가리 왕국은 오스만제국의 속국이 되었다. 이 승리로 군대의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싸운 술레이만과 재상에게 영광이 돌아갔다.
1529년 헝가리에서 발생한 문제는 오스만 제국을 다시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았다. 부다를 재탈환하고 나서 오스 제국은 적합한 시기는 아니었지만 빈으로 향했다. 1529년 9월 27일 그들은 빈을 포위했다. 오스트리아인들은 2만명의 병사와 대포도 72대밖에 갖고 있지 않았지만, 매우 조직적으로 도시를 수비하고 있었다. 기독교 세계는 숨죽인 채 전투를 지켜보았다. 폭격이 끊이질 않았고 빈은 계속해서 항전했다. 오스만 진영은 궂은 날씨 때문에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식량과 군수품이 바닥나기 시작했으며, 예니체리 부대는 불평을 터뜨렸다(예니체리 참고1, 2). 빈의 꺾이지 않는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살인적인 공격을 가한 후에야 술레이만은 포위를 풀었다

샤 이스마일을 계승한 그의 아들 샤 타흐마스프가 아나톨리아의 내정사건에 말려들자, 술레이만은 이 갈등을 이용해 이라크를 점령하고자 했다. ‘두 이라크전’이라고 불릴 이 전쟁은 2년간 계속되었고 재상이 몰락하는 원인이 된다.
이브라함은 바그다드로 직진하는 대신 아제르바이잔으로 가는 모험을 감행했고 트브리즈를 점령했다. 그러나 이 같은 대 원정에 대한 준비가 되지 있지 않았던 그는 술레이만에게 도움 요청해야 했고, 술레이만은 지원군을 거느리고 그와 합류했다. 샤 타흐마스프는 ‘땅에 불을 지르는’ 전략을 쓰며 피신해 다녔다. 결국 오스만 족은 바그다드로 향했고 1534년 11월에 술탄이 진입했다. 처음의 목적은 달성되었으나 그 손실은 막대했다. 1536년 1월 초 술레이만은 이스탄불로 돌아왔다. 재상은 여전히 막강한 권력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후 3월 14일 밤과 15일 사이에 은밀하게 암살된다. 이브라힘을 시기하는 고관들과 록셀란 왕비에 의해 소리 없이 진행되어온 이브라힘 반대 운동이 술레이만에게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또한 재상의 지나친 오만과 ‘두 이라크전’의 참담한 결과 역시 왕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 분명하다.
1536년부터 1566년 사망할 때까지 술레이만은 줄곧 전투 지휘관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술레이만의 통치 말년은 가정의 비극으로 얼룩져 있었다. 사랑하는 아내 록셀란 왕비를 잃었고, 세 아들 중 둘이 죽었다. 무스타파는 1553년에, 바예지드는 1561년에 국가의 안녕을 도모한다는 명목으로 아버지의 지시에 따라 처형되었다. 유일한 아들인 셀림은 무능한 술주정꾼이었다. 왕은 금욕적인 생활을 했으며 건강이 악화되어 관절염으로 고생했다. 그런데도 1566년 오스트리아가 조공을 거부하자 그는 마지막 전투이자 열 세 번째인 ‘장엄한 전투’를 기도했다. 지게트바르를 공략하던 중 죽음(9월 6일)이 그를 찾아왔다. 이틀 후 그 도시는 함락되었다.

술레이만 사후, 오스만 제국은 재상 소쿨루 메흐메트 파샤 덕분에 번영을 유지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셀림 2세의 무능함은 다행히도 소쿨루 메흐메트 파샤의 정력적인 활약으로 보완되었다. 1564년 술레이만에 의해 재상으로 임명된 그는 14년간 공직에 머물면서 제국의 안정과 선왕들의 위업 계승을 확고히 했다. 그러나 1571년 셀림 2세는 재상의 신중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키프로스 정복을 시도했다. 이 때문에 베네치아의 비오 5세와 에스파냐가 이른바 카톨릭 동맹을 맺게 된다. 1571년 10월 5일 키를 5세의 서자인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가 지휘하는 카톨릭 동맹의 함대는 대 제독 무에진다드 알리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와 코린트 해협의 레판토에서 접전했다. 돈후안의 놀라운 전략으로 오스만 함대는 수적인 우위(230척의 갤리선)에도 불구하고 전멸 당한다. 승리 자체보다도 승리가 안겨준 심리적인 효과가 더욱 컸다. 즉 무적의 오스만군에 대한 신화가 깨진 것이다. 또한 이 전투가 미친 영향력은 상대적인 것에 불과했지만 그 여세는 지속되었다. 결국 1573년에 베네치아에서 맺어진 평화조약은 튀르크족의 키프로스 정복을 인가했고, 1574년에 복구된 오스만 함대는 튀니스를 완전히 탈환했다. 같은 해 술탄은 사망했다.
1579년에 소쿨루 메흐메트 파샤는 한 광신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무라드 3세(1574-1595)와 메흐메트 3세(1595-1603)치하에서 재상은 23번이나 경질되었다. 두 왕은 선왕들의 모범을 따르지 않고 국정 관리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국내의 복잡한 문제들이 누적되었고 이란과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한 전투가 재개되었다. 16세기 말 이미 제국은 종말을 고하고 있었다.
16세기에 오스만 제국이 이룩한 놀라운 팽창과 모든 영역에 걸친 번영은 중앙 집권 화된 권력, 국가의 필요에 부응하는 빈틈없는 행정체계, 훌륭한 장비를 갖춘 강력한 군대 등 제국의 견고한 내부구조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4세기 전반에 갖춰지기 시작한 이러한 구조는 대부분 무라드1세와 정복자 메흐메트2세. 화려한 술레이만, 이 세 명의 대 술탄이 이룬 업적이었다.

16세기에 오스만제국의 예술은 절정에 도달했다. 즉, 오스만 고유의 요소에다가 외부에서 받은 영향을 종합하여 오스만 예술의 생명력, 독창성, 황실풍이라는 특성을 확고히 했다. 특히 건축 영역에서의 창조물들은 영감의 원천이 된 권력을 찬미했고, 황실 작업장에서 주요 장식적 요소가 탄생했다. 경직된 행정조직과 지방을 뒤흔들어 놓은 독립운동 때문에, 오스만제국은 내부적으로 힘을 잃게 되었고 외부로부터는 강한 압력에 굴복하여 서서히 균열이 일면서 붕괴해 갔다.
오스만제국의 쇠퇴는 1683년의 2차 비인 포위전의 실패가 기점이 된다. 합스부르크 왕조를 위해 유럽연합군이 비인을 구원하러 왔는데 주로 폴란드 군의 활약으로 비인의 포위가 풀렸다. 이후 오스트리아, 베네치아, 폴란드, 러시아 등의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에 대한 동맹을 맺어 사방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세를 취했다. 오스만제국의 열세를 인정하여 1699년 카를로비츠(Karlowitz) 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로서 헝가리 전역과 트란실바니아 지역, 우크라이나와 달마티아를 상실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 오스만제국의 쇠퇴는 더욱 두드러졌다. 1821년에 그리스가 독립을 위한 반란을 일으켰고 러시아, 프랑스, 영국이 연합 함대를 구성하여 도왔다. 1827년 10월 나바리노(Navarino) 해전에서 연합 함대에 참패한 오스만제국은 1829년에는 그리스의 자치를, 1832년에는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유럽 열강은 오스만제국을 해체할 능력이 있었으나 각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상반된 입장이었다. 러시아는 적극적으로 오스만제국의 해체를 노렸으나 러시아의 팽창을 견제하고 있던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만제국의 급격한 와해에 반대하였다. 크림 전쟁(Crimean War, 1853-1856; 크림 반도를 중심으로 러시아가 영국, 프랑스,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전쟁. 이 전쟁은 중동을 둘러싼 열강들의 분쟁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러시아가 튀르크 제국 내 정교회 교도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었다.)에서 영국, 프랑스가 오스만제국과 연합하여 러시아의 흑해 지배를 저지한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내정 개혁이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한 가운데 19세기 후반에는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이 독립하여 유럽의 오스만제국의 영토는 마케도니아, 알바니아, 트라키아 지역만 남게 되었다.

오스만제국이 약화되고 재정이 악화된 1876년 즉위한 압둘 하미드 2세는 즉위 다음 해 '붉은 술탄'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붉다'는 것은 극단적 좌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피로 물들여졌다는 뜻이다. 그는 개혁파와 자유주의자를 증오하여 그들을 탄압하는데 온힘을 쏟아 많은 피를 흘리게 했다. 압둘 하미드 2세가 미드하트 파샤를 재상으로 임명하고, 헌법이나 의회제도를 실시하는 것처럼 보이고자 한 것은 덕망있는 인물을 방폐로 내세워 개혁운동에 대처하기 위해서 였다. 결국 미드하트 파샤는 사형선고를 받고 유배되어 죽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극단적으로 오스만 터키를 죽였다고도 한다. 그후 미드하트 헌법의 부활과 독재정치 반대하는 비밀결사가 조직되고, 붉은 술탄은 그들을 활동을 억압하고, 탄압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압둘 하미드 2세가 즉위한 이후 러시아와 전쟁이 일어나 1878년 베를린 조약으로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잃고, 그 외의 영토도 각국에 할양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키프로스 섬을 영국에 할양한 것도 바로 이때다. 역대 술탄들의 방만한 소비와 재정 능력의 결핍으로 제국은 파산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붉은 술탄은 그런 위기감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외국 자본 계열인 오스만 은행에서 돈을 빌린 댓가로 국가의 수입인 관세, 소금, 담배, 우편 전매들이 저당 잡혔다. 그는 오스만 터키 제국의 회생은 정신적인 면에 달려 있다고 믿고 '범 이슬람주의'에 힘을 쏟았다. 제국의 영토안에 이라크족, 시리아족, 아라비아족, 그리고 산지에는 쿠르드 족이 많았는데, 모두 종교는 터키족과 같은 이슬람교였지만 비이슬람교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그리스인에 대한 적대감을 부채질하는 결과를 낳았다. 아르메니아인의 대학살도 붉은 술탄이 불을 지핀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국 제국은 분열되어 억압정치로 돌파구를 마련하려 했지만 잘 될리 없었다. 오스만제국의 약화와 재정 적자는 유럽 열강의 내정 간섭으로 이어졌다. 유럽 열강에게 빌린 외채를 상환하지 못하게 되자 1881년에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의 재무 관계자들로 구성된 '오스만제국 채무 관리회'가 생겨 오스만제국의 재정을 장악하여 열강에의 종속은 더욱 심화되었다.
파리에 유학했던 새로운 지식층을 중심으로 자유주의적 경향이 강한 사람들이 '미드하트 헌법'을 목표로 다향한 그룹을 형성하고 있었다. 붉은 술탄은 비밀 경찰을 이용하여 그들을 없애려고 했다. 한편 1891년 제네바에서 결성된 비밀결사가 나중의 청년 튀르크 당의 중추가 되었다. 청년 튀르크당은 통일 진보 위원회라는 기구를 갖고 있었다. 본부가 파리에서 국내의 살로니카로 이전되면서 군대 내의 청년 장교 중에서 이에 가담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가운데 청년 장교들이 비밀 결사 '청년 튀르크 당'을 결성하였고, 1908년에는 집권에 성공하였다. 이들은 이슬람교가 아닌 튀르크 민족주의를 내걸고 있었다. 붉은 술탄은 1909년 4월 24일 퇴위 당하고 말았다.
한편 발칸 반도에서 오스트리아의 영역은 계속 확장되었다. 1908년 10월 오스트리아는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였으며 자치령이던 불가리아가 독립을 선포하였다.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 획득을 염원하였던 세르비아의 오스트리아에 대한 원한은 더욱 커져갔다. 1911년 7월 '2차 모로코 사건'으로 영국, 프랑스, 독일이 모로코에 집중한 기회를 노려 이탈리아는 8월, 트리폴리(현재 벵가지와 더불어 리비아 수도)를 노리고 오스만제국에 선전포고 하였다.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이 한창이던 1912년 3월에서 8월에 걸쳐 불가리아, 세르비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등 4개국 사이에 개별적으로 방어 동맹이 맺어졌다. 이를 발칸 동맹이라 부른다. 동맹을 맺은 4개국은 튀르크가 이탈리아에 고전하는 틈을 타서 1912년 10월 오스만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912년의 발칸전쟁(Valkan Wars; 1912∼1913년, 제 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 발칸 지역의 긴장을 고조시키면서 연속적으로 일어난 두 차례의 군사적 충돌)으로 오스만제국은 서둘러 이탈리아와 강화 조약을 맺어 이탈리아의 트리폴리를 지배를 인정하였다. 오스만제국과 발칸 동맹국과의 전쟁을 1차 발칸 전쟁이라 하는데 영국의 중재로 1913년 5월 런던 조약이 체결되어 오스만제국은 발칸 영토를 할양하였다.
알둘 하미드 2세가 실각당한 후, 뒤를 이은 이복동생 메흐메트 5세는 형과는 달리 현명한 편이었으나, 당시 술탄에게는 아무런 실권도 없었다. 메흐메트 5세는 대 재건 공사가 끝난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이사했으나, 예전과 같은 권력의 중심지로서 부활하지는 못했다. 실권을 장악한 자는 살로니카의 무장봉기를 진두지휘하고, 그후 베를린의 대사관 무관을 역임한 다음 발칸 전쟁에 종군한 엔웨르 파사(Enver Pasa; 오스만 제국의 장군이자 총 사령관, 재위 1881∼1922년)였다. 불은 술탄이 범이슬람주의를 채택한데 반해 그는 '범튀라니즘'을 주장했다. 원래 청년 튀르크당은 '범오스마니즘'이었다. 붉은 술탄이 이슬람을 중심으로 결속하면서 이교도의 산 것을 반성하는 차원에서 청년 튀르크당은 오스만 터키의 국민이라면 종교나 민족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청년 튀르크당의 '범오스마니즘'은 민족이나 종교와 상관없이 터키 국민이면 누구나 평등하다는 것이지만 '범튀라니즘'은 터키 민족 우월주의적인 색채가 강하다. 엔웨르 파샤가 청년 튀르크 당을 다른 길로 이끌었다는 평을 듣는 것도 이 때문이다. 결정권을 빼앗긴 돌마바흐체 궁전의 주인인 메흐메트 5세는 아무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다.
발칸 전쟁의 패배로 격앙된 오스만제국은 설욕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민족주의 비밀 결사에 의해 암살되어 1차 세계대전으로 비화되었다. 터키는 충분히 중립노선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주 독일 대사관의 무관 출신이자 육군 장군과 참모총장을 겸한 엔웨르 파샤는 파샤는 독일의 승리를 확신하고, 독일과 동맹을 맺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였다. 연합군 편이 러시아와 싸워 이기면 그의 염원인 '범튀라니즘'의 염원이 실현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튀르크 군은 케말 파샤의 지휘로 1915년 4월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하려는 영국, 프랑스 연합군을 격퇴하였다. 이들은 12월 작전을 포기하고 철수했는데 육군 11만과 군함 수십 척을 잃었다. 이 전투가 오스만제국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불가리아는 1915년 가을 독일, 튀르크 측에 가담하였다. 오스만제국은 개전 즉시 러시아의 카프카즈 지역에 공세를 폈으나 1915년 1월 퇴각하였고, 러시아군은 에르주름, 트라브존, 만 등 동부 터키의 여러 도시를 차례차례 함락시켰다. 그러다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동부 전선이 휴전 상태로 들어가면서 터키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결국 영국군은 치열한 전투 끝에 바그다그를 점령하고, 팔레스티나와 시리아, 아랍민족의 반터키 운동을 지원했다. '아리비아의 로렌스'가 활약한 것도 이때 쯤이다. 그러나 1918년 3월에 360만 병력을 동원하여 시작된 독일의 총공세는 200만에 이르는 미군이 도착하여 실패하였고(미국은 1917년 4월 독일에 선전포고하였으나 신병 훈련 관계로 1년이 지나 유럽에 상륙하였다), 독일, 튀르크, 오스트리아, 불가리아의 전쟁 수행 능력은 바닥이 났다. 1918년 9월 동맹국 측에서는 불가리아가 가장 먼저 항복하였다. 터키는 새로운 내각이 들어서 1918년 10월 30일 에게해에서 종전협정에 서명 하였다. 이 협정에는 해협 통과의 자유와 함께 이스탄불 점령이 포함되어 있었다. 메흐메트 5세는 이 비보도 모른채, 항복 직전인 1918년 7월 3일, 향년 73세로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서거하고, 예윱 성묘에 묻혔다.
압둘 하미드 2세인 '붉은 술탄' 뒤를 이은 이름만인 술탄 자리는 이복 동생인 와히뎃딘(Vahideddin)이었다. 이 사람이 메흐메트 6세(Mehmed VI; 1861∼1926)이다. 무라드 5세는 93일간 즉위하였고, 그로부터 5대동안 이복형제들이 술탄 자리를 계승한 것이다. 이들의 아버지인 압둘 메지드 1세는 1861년 6월 38세 나이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으나, 35명의 자식을 두었었고, 마지막 술탄이 된 메흐메트 6세는 아버지가 죽기 4개월 전인 1861년 2월에 태어난 것이다. 메흐메트 6세는 한동아나 돌마바흐체 궁전에 살았으나, 이을드즈 궁전으로 거처를 옮겼다.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그리스의 협상국은 오스만제국을 완전 해체하려고 전쟁 중에 비밀 조약을 맺은 상태였다. 1919년 5월 15일 협상국을 등에 업은 그리스 군은 '대 비잔틴 부활'을 내세워 에게해에 펼쳐진 옛날 그리스인들 비잔틴 제국의 재건을 시도했다. 아나톨리아 각 지역에는 많은 그리스인들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미 그리스 영토라고 생각했다. 이것은 엔웨르 파샤의 '범튀라니즘'과도 통하는 사상이다. 그리스 군은 영국의 지원을 얻어 이즈미르에 상륙하여 점령지를 확장하고자 했다.
이 때 전쟁 영웅인 무스타팔 케말이라는 장군이 북부 지방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관례에 따라 취임인사를 하기 위하여 이을드즈 궁전으로 향했다. 압둘 하미드 2세가 세운 추밀원 2층에서 무스타파 케말은 메흐메트 6세와 만난 것이다. 1919년 5월 16일 케말은 이을드즈 궁전을 뒤로하고, 흑해의 삼순항으로 떠났다. 케말이 탄 배가 이스탄불을 출발한 몇 시간 후, 메흐메트 6세는 경찰 측으로부터 무스타파 케발에 관한 보고서를 들었다. 케말이 아나톨리아의 혁명 지하 조직과 연락을 취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미 출발한 케말에 대해 메흐메트 6세는 항만관리 당국에 체포령을 내렸다.
케말이 제 9군 감찰관의 자격으로 삼순항에 상륙한 것은 5월 19일로 혁명은 이 날부터 시작되었다. 현재 이 날은 10일 후인 5월 29일의 메흐메트의 정복자의 날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공화국의 기념일이 되었다. 삼순에 상륙한 날은 비바람이 불었다고 한다. 술탄은 체포령을 내렸으나 아무도 이것을 실행하려 하지 않았다. 영국 점령군은 술탄의 명령에는 따리즈 않고, 그저 케말을 미행하는데 그쳤다. 케말은 터키 군이 와해된 상태에서 연합국과 이스탄불 정부에게 투쟁을 선언하고, 민병대를 조직, 무장 투쟁 준비에 착수하였다.


종전 협상으로 이스탄불 일부를 점령하고 있던 협상국은 1920년 3월에는 점령지를 확대하고, 튀르크 민족주의자들을 체포하였다. 연합국의 괴뢰가 된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에 맞서 케말은 1920년 4월 앙카라(Ankara)에서 '대국민회의'를 결성하였다. 이 의회는 술탄이 이교도의 손에 있다고 단정하고 외세를 축출하는 것이 이슬람교도의 의무라고 선언했다.
1920년 8월 10일 세브르(Sevre) 조약을 오스만 제국의 술탄에 강요하여 체결하였다. 내용은 오스만제국의 영토 가운데 아르메니아와 히자즈는 독립시키고, 메소포타미아와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 통치 하에, 시리아는 프랑스의 위임통치 하에 두고,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국으로 삼는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아르메니아는 아나톨리아의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며, 그리스는 에게해의 섬들과 이즈미르 지역을 차지하는 것이었다. 이 조약이 실행되면 오스만제국은 이스탄불 일대와 아나톨리아의 일부만 영토로 하게 되어 사실상 망국의 길을 걷는 것이었다.
이 가혹한 조약의 체결은 어느 정도 예상된 것이었으며 튀르크 국민의 술탄에 대한 반감이 높아지게 되었다. 대국민의회는 1921년 1월 기본법을 제정하고 주권은 국민에게 있음을 선언하였다. 국명은 투르키예(Turkiye, 영어로는 Turkey)로 하고 국가 운영은 집행위원회가 하도록 하였다. 그리스 군이 이즈미르를 거점으로 앙카라까지 진격해 오자 1921년 8월 케말이 지휘하는 민병대는 사카리아(Sakarya) 전투에서 격퇴하였다.
1922년 9월에는 '바다로 쓸어 넣기 작전'을 실시하여 그리스 군을 이즈미르에서 축출하고, 문자 그대로 바다로 쓸어 넣었다. 그리스 군 포로는 6만이 넘었다. 1922년 11월 1일 대국민회의는 술탄제도 폐지를 결의하였고,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황제 메흐메트 6세는 11월 17일 돌마바체 궁전에서 영국 배를 타고 영국으로 망명했다. 오스만 터키 제국 623년의 왕조가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케말 정부는 그리스와의 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국제적으로 승인을 받았다. 1921년 3월 소련과 협정을 체결하여 카르스(Kars)와 아르다한(Ardahan) 지역을 회복하였고, 프랑스도 1921년 10월 앙카라 조약을 맺어 시리아로부터 철수에 동의하였다. 마지막으로 무단야(Mudanya) 종전 협정을 맺어 협상국은 이스탄불과 트라키아 동부를 터키에 이양하였다. 1923년 7월 24일에는 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과 포괄적인 로잔(Lausanne) 조약을 체결하여 강제국에 분활될 운명이었던 아나톨리아는 터키로 되돌아 왔다. 터키의 그리스계 주민과 그리스의 터키게 주민의 교환이 정해진 것도 이때이다. 그러나 이 주민 교환에서 이스탄불에 거주하는 그리스계만은 제외되었다. 당시 이스탄불은 연합군 점령하에 있었는데, 1923년 10월 20일 연합군을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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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제국은 14세기부터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지역에서 일어나 서쪽의 모로코부터 동쪽의 아제르바이잔, 북쪽의 우크라이나와 남쪽의 예멘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600여 년간 지배했던 다민족 제국이다. 오스만제국은 서지중해의 유럽 일부 해안을 제외한 지중해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동양과 서양을 연결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소아시아의 작은 부족국가에서 대제국으로 성장한 오스만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건국자 오스만 1세이다. 오스만제국이라는 국명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됐다.

 

 

소아시아의 작은 부족국가에서 일어나다

13세기 말, 소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가지고 있던 셀주크투르크 가 서양 십자군과의 잇따른 전쟁과 결정적인 멸망원인이 된 몽골군의 서침으로 몰락하면서 아나톨리아(소아시아)의 투르크계 민족들은 크고 작은 부족으로 분열됐다. 그 중 한 부족인 오구즈의 일파 카유족의 족장 에르투구룰 베이(Ertugrul Bey)는 소구트 지역을 차지하고 힘을 기르고 있었다. 오스만은 에르투구룰의 셋째 아들로 아버지가 사망한 후 1281년 24세의 나이에 부족장으로 추대됐다.

 

그의 이름 오스만은 이슬람교 남자들이 흔히 가지는 이름으로, 그 뜻은 ‘뼈를 부수는 자’라는 강한 힘을 의미하는 한편 콘도르를 뜻한다고 한다. 그의 이름에서 유래한 콘도르는 오스만제국의 자주권과 호전성을 뜻하는 상징이 되기도 한다. 오스만은 족장이 되면서 탁월한 지도력과 전투력을 보여주었다. 셀주크투르크가 멸망한 이후, 구심점을 잃고 방황하던 투르크족의 전사들은 세력을 키워가던 오스만의 명성을 듣고 그의 수하로 모여들었다.


 

그의 군대는 몽골군에 밀려 아나톨리아로 들어온 투르크족의 이슬람 전사, '가지(Ghazi)’와 인근의 여타 투르크족 중 오스만의 명성을 듣고 온 모험가들로 점점 세력이 커졌다. 아버지 에르투구룰 시절부터 400기 이상의 기병을 보유한 강력한 군사조직을 갖추고 있던 오스만의 군대는 그가 족장이 되면서 더욱 강력해졌다. 오스만가문과 군대의 유래와 정체성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분분하다. 그 중 셀주크투르크의 일파로 1077년부터 1307년까지 아나톨리아를 다스린 이슬람 왕조 룸셀주크의 용병집단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룸셀주크가 몽골군의 침입으로 점차로 약화되자 오스만의 가문도 독립해 독자적인 부족국가를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 아버지 에르투구룰과 아들 오스만을 거치면서 그 세력이 점차로 커진 오스만의 군대는 아나톨리아의 기독교 세력이나 이슬람교 세력들과 경쟁하거나 협력하면서 점차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그리고 1299년경 마침내 왕국을 선언하고 오스만 1세로 등극했다. 당시 수도는 그의 고향인 소구트였다.

 

오스만을 따라 전투에 참가하는 가지(Ghazi)전사들


왕국을 건국한 뒤 오스만 1세는 비잔틴제국과의 경계까지 영토를 넓혔으며, 1326년 비잔틴 도시인 부르사(Bursa)를 공략하여 아나톨리아 전역을 통일하였다. 부르사는 그의 사후 아들 오르한 1세에 의해 오스만제국의 두 번째 수도가 되었다. 왕국을 세운 후 오스만 1세는 군사적인 면뿐만 아니라 행정적•정치적 면에서도 제국으로 가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그는 밀레(Millet)로 알려진 종교적•민족적 소수집단의 자치구를 설정하여 효율적인 국정을 가능하게 했다. 오스만 1세가 만든 이 제도들은 매우 체계적이어서 이후 약 4세기 동안 큰 변화 없이 오스만제국 내에서 그대로 유지되었다.

 

오스만의 건국과 국가의 성장에는 몇 가지 역사적, 지리적 상황도 도움을 주었다. 몽골의 서침과 셀주크 투르크의 몰락, 구심점을 잃은 투르크족의 방황, 비잔틴 제국의 약화는 용맹스런 전사 집단이었던 오스만과 그를 따르는 이슬람 전사(가지)들에게 새로운 왕국을 열고 성장시킬 기회를 주었다. 방황하던 투르크족은 혁혁한 전과를 세우며 비잔틴과 맞서는 오스만을 구심점으로 지하드(이슬람의 성전)를 치르기 위해 속속히 집결하여 그의 힘을 강하게 만들었다. 결국 오스만 세력의 성장과 반비례하여 점차로 몰락의 길을 걷고 있던 비잔틴은 오스만제국에게 지중해의 지배권을 내주게 되었다. 13세기에 오스만 1세에 의해 세워진 오스만제국은 20세기 초까지 600년간 존속하였다. 이러한 오스만제국의 발전과 번영은 건국자 오스만 1세가 그의 꿈속에서 이미 예언을 받은 일이었다고 한다.

 

 

꿈에서 본 제국의 미래


오스만 1세는 매우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였다. 그는 족장이 되기 전 젊은 시절 이슬람교의 성자를 찾아 다니며 가르침을 받았다. 그 중 그가 스승으로 모신 사람은 셰익 에데바리(Sheik Edebali)라는 이슬람교의 지도자였다. 에데바리에게는 아름다운 딸이 있었는데 말 하툰(Mal Hatun)이라고 하였다. 말 하툰의 외모와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있다. 그녀가 매우 아름답고 육감적인 외모의 소유자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편에서는 종교적으로 성녀와 같은 품성과 성스러운 외모를 가진 신화의 여신과도 같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어떤 형의 미녀이든 미녀였던 것만은 확실한 듯하다. 오스만은 스승의 아름다운 딸에게 한눈에 반했고 그녀에게 청혼하였다. 그러나 스승은 신분의 차이를 들어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였다. 존경하는 스승의 명을 어길 수 없었던 오스만은 상심에 빠졌다. 그 사이 말 하툰의 미모에 대한 소문은 다른 부족에게도 퍼져나가 많은 구혼자가 있었다. 오스만은 말 하툰의 구혼자들과 싸워 이겼지만 정작 스승의 결혼 승낙은 계속 받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2년 여 세월을 보내며 스승에 대한 존경과 말 하툰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며 상사병에 걸려 있던 오스만은 어느 날 친지의 집에서 잠시 잠이 들었다가 꿈을 꾸었다. 그 꿈에서 그는 스승 에데바리와 함께 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에데바리의 가슴에서 달이 튀어 나와 오스만의 가슴으로 들어와 잠겼다(이슬람의 유명한 전승인 이 이야기에서 달의 모양은 반달이었다고도 하고 보름달이었다고도 한다). 달이 잠기고 잠시 후 오스만의 가슴에서 아름답고 커다란 나무가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무는 점점 자라나 커다란 나무 그늘이 생겼으며 그 그늘은 온 세계를 뒤덮었다. 나무 아래 세계의 산맥이 생기고 강이 흘렀으며 사람들은 나무 그늘에서 혜택을 얻고 즐거워했다.

 

오스만은 꿈 이야기를 스승 에데바리에게 했다. 에데바리는 오스만의 꿈 이야기에 나온 달이 바로 자신의 딸 말 하툰임을 깨달았다. 꿈이 오스만와 말 하툰이 결합하여 후손을 낳으면 그 후손이 세세손손 알라의 가호아래 번영하는 대제국을 경영할 것을 예언한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오스만의 꿈은 그와 말 하툰의 후손들이 가질 영광과 힘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말 하툰과 결합한 오스만이 세울 나라의 미래를 알려주는 꿈이었다. 에데바리는 오스만의 꿈 이야기를 듣고 오랫동안 허락하지 않았던 딸 말 하툰과의 결혼을 승낙했다. 오스만은 너무나 원했던 여인과 결혼하였고 그의 꿈이 예언한 대로 향후 600년간 존속할 나라 오스만제국을 세웠다.

 

 

600년 오스만제국의 기틀 마련


왕국을 세운 오스만 1세에게는 몇 가지 선택이 있었다. 소아시아의 내륙으로 들어가 투르크족을 통합하여 영토를 확장할 것인가, 지중해 쪽으로 비잔틴의 영토를 넘볼 것인가의 귀로에서 그는 후자를 선택했다. 비잔틴과의 싸움은 투르크족 통합보다 더 어려운 전쟁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스만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전쟁이었다. 오스만 1세의 선택은 탁월했다. 비잔틴 공격은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는 전략이었다. 비잔틴과 전쟁을 치르는 동안 강해진 오스만의 세력권 안으로 여타 투르크족은 별 어려움 없이 병합되었다. 그리고 오스만 1세가 시작한 비잔틴 공략은 훗날 그의 후손 메흐메드 2세가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제국의 수도가 되었다. 현재 터키의 이스탄불이다)을 함락하고 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는 결과를 낳았다. 바야흐로 세계 대제국의 탄생이었다.

 

오스만 1세는 영토 확장 문제 외에 내치에도 큰 틀을 마련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었다. 오스만 1세는 스승 에데바리의 도움을 받아 작성한 정책방침을 아들 오르한 1세에게 남겼고 이를 세세손손 계승하게 하였다. 오스만 1세의 정책은 이후 오스만왕조의 중요한 정책방침이 되었다. 그는 후세의 술탄들에게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올바른 인재의 선택과 학자와 예술가 대우, 현자들의 가르침을 적극 수용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알라신의 힘에 왕권을 의탁하고 백성들을 공평하게 다스리며 이교도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라고 주문하였다. 그의 정책 방침은 이슬람교 안에서 백성을 애민하며 정치적 공정성을 잃지 않고 문화를 부흥시키라는 것이었다.

 

 

부르사에 있는 오스만 1세의 무덤

 

  

오스만 1세는 지하드의 기치 아래 26년간 계속 비잔틴제국을 공략하였고 죽음마저도 비잔틴의 소아시아 내 도시였던 부르사를 공격하다가 갑자기 맞았다. 부르사는 그의 유지를 받든 아들 오르한 1세에 의해 정복되었고 오르한 1세는 아버지 오스만 1세의 무덤을 이곳에 만들었다. 오스만 1세는 사후 오스만제국에서 하나의 상징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는 가지(Ghazi) 전통의 상징으로서 종교와 나라를 이끌어가는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 받았다. 그러기에 오스만 1세의 칼은 대대손손 그를 잇는 오스만 왕조의 술탄 대관식에서 사용되었으며 제국의 국호는 그의 이름 오스만을 따 600년간 존속된 것이다.

 

오스만 1세가 세운 오스만제국은 동양과 서양의 사이에 위치하는 지리적 성격상 세계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유럽의 대항해시대는 오스만제국의 지중해 지배로 동방으로 가는 육로 길이 막히자 바다 길을 찾아보기 위해 도래한 것이었으며, 대항해시대의 여파로 신대륙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한편, 오스만제국은 동서양을 잇는 지역적 위치를 이용하여 상업으로 큰 부를 누렸으며 이슬람교 안에서 동양과 서양의 문화를 습합하여 오스만제국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키며 번영하였다.

주제로 인물 엮어보기작은 부족에서 시작하여 대제국을 이룬 왕들

오스만 1세 오스만 1세
오스만제국의 초대 술탄
클로비스 1세 클로비스 1세
(465~511) 프랑크족의 살리족의 수장에서 중세 유럽을 여는 프랑크왕국을 건국하였다.
칭기스칸 칭기스칸
(1155~1227) 몽골의 작은 부족에서 시작해 중국과 서역을 아우르며 유럽사에도 영향을 미친 대제국 건설.
누르하치 누르하치
(1559~1626) 여진의 한 부족인 건주 여진의 수장에서 중국을 다스리는 청나라를 세웠다.

 인물사 연표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982년

최승로 시무 28조 건의

993년

서희 강동 6주 확보

997년

천추태후 목종 즉위, 천추태후 집권

1037년

토그릴 베그 셀주크투르크 건국

1018년

강감찬 귀주대첩

1077년

그레고리오 7세 카노사의 굴욕

1063년

왕안석 삼사조례사 설치, 개혁시작

1055년

최충 구재학당 설립

1126년

이자겸 이자겸의 난

1150년

힐데가르트 폰 빙엔 아이빙엔에 대수녀원 축성

1135년

묘청 서경 천도 운동

1152년

프리드리히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즉위

1145년

김부식 [삼국사기] 완성

1175년

주희 [근사록] 편찬

1170년

정중부 무신정변

1189년

리처드 1세 제 3차 십자군 전쟁

1187년

살라딘 십자군전쟁에서 예루살렘 탈환

1196년

최충헌 고려 최씨 무신정권의 시작

1215년

존왕 마그나카르타 승인

1206년

칭기즈칸 몽골제국 수립

1198년

만적 만적의 난

1295년

에드워드 1세 모범의회 성립

1271년

원세조 쿠빌라이 원제국 수립

1274년

충렬왕 여.몽 연합군의 일본정벌

1299년

마르코 폴로 [동방견문록] 발간

1299년

오스만 1세 오스만제국 수립

1281년

일연 [삼국유사] 편찬

1304년

단테 알리기에리 [신곡] 집필 시작

1325년

이븐 바투타 이슬람 메카 성지순례

1371년

신돈 역모죄로 처형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봉서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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