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공산주의 시기 러시아 정교회의 존속과 변천:1919-1991

2012. 2. 25. 14:59교회사자료/10.세계사


러시아史는 정치와 종교가 독특한 형태로서 유착(癒着)하고, 또는 두 줄의 실과 같이 합쳐서 러시아인의 生을 꾸려 왔다. 1991년 말에 와해된 소련은 종교적으로 볼 때 무신론을 표방하던 세속적 국가였으나 사실 이데올로기 때문에 종교 자체가 완전히 말살된 상태에 놓여 있지는 않았다. 이러한 사실은 1992년 독립국가연합(CIS: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의 정식 출범 이후 현재까지 과거 소련을 구성했던 러시아 연방과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제국가에서 펼쳐졌던 활발한 종교의 부활 현상을 보면 이해될 수 있다.

사실 소련의 중심적 종교 조직인 러시아 정교회는 1987년 이후부터 지속적으로 과거 공산화 이전의 영예를 회복하고 있는데, 이는 정부에 빼앗겼던 많은 교회와 수도원를 되찾는 데 성공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종교 활동을 할 수 있는 제도적, 법적 장치를 확보하는 데 성공한 사실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더욱이 1988년에 있었던 루시 세례 천주년 기념 행사는 소련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위상을 크게 높여 준 역사적 사건이었으며 이러한 배경에는 세속적인 국가의 종교에 관한 정책이 크게 전환되는 움직임이 깔려 있었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소련 시기에는 종교가 크게 탄압되었던 것은 사실인데 이는 서구 사회와 같은 자유로운 종교 활동에 대한 제한 조치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 조직에 대한 국가의 엄격한 통제 및 때로는 사제와 교회 재산에 관한 물리적인 박해가 자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주로 스탈린 집권 초반기와 흐루시쵸프 시대에 확연히 나타났던 일이었는데, 그 결과 서구에 보여진 소련에 대한 종교적 이미지는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소련 시기를 전체적으로 조망해 본다면 종교나 종교 조직이 그렇게 완전히 절망적인 상태로만 지속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1.4.1공산주의 혁명과 러시아 정교회

1917년 2월 혁명 후 수립된 임시정부 하에서의 러시아 정교회는 어떠한 탄압적 상황이나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18세기 초 이래 금지되어 왔던 전국교회회의 를 개최할 수 있었다. 교회회의는 1917년8월15일에 모스크바 크레믈린 내에 있는 성모승천 성당에서 첫 회의를 가진 이후 총대주교의 선출 문제에 대하여 1918년9월7일까지 논의를 계속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러시아 정교회는 거의 2세기만에 총대주교를 선출할 수 있었으며 총대주교는 당시 모스크바 수좌대주교인 티혼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교회는 이미 1917년에 진행되었던 혁명 과정에서 공산주의의 이데올로기로 집단화한 볼셰비키들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기 때문에 볼셰비키 당과의 갈등은 불가피하였다. 1917년12월11일 모든 교회 학교들을 인민위원회 소속의 교육부로 이관하라는 포고령이 발표됨으로써 교회가 가지고 있던 모든 교육 시설이 정부 당국에 의해 박탈되고, 이어서 12월8일에는 교회에서 올리는 결혼식은 무효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제 교회는 과거에 가지고 있던 유형의 재산을 당국에게 빼앗기고 심지어 법적 권리도 박탈당함으로써 재산권 침해에 대한 어떠한 대항도 할 수 없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1917-22년의 5년 동안28명의 러시아 정교회 주교와1,215명의 일반 사제들이 당국에 의해 처형당했으며, 성직자들은 주거와 식량 배급권을 비롯한 일체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신학교도 폐쇠되고 모든 종교적 간행물들이 정간되었다.
그러나 1927년7월29일에 총대주교 티혼의 사망후 그 후임을 맡은 니즈니-노브고라드 수좌대주교인 세르기가 총대주교 직무대행은 "충성 선언"을 함으로써 러시아 정교회의 소련 정부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가 천명되고 이른바 "세르기예프쉬나"로 대변되는 교회의 국가에 대한 예속이 확실시 되었다. 이에 대한 결과는 러시아 정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우선 최소한의 교회 생존의 가능성은 확보 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종교의 자유가 크게 훼손된 제한적 범주의 권리를 가지는데 그쳤다.

교회는 국가가 요구하는 사항을 만족시켜 주어야 했다. 단지 교회 건물 안에서만 행해지는 종교적 예배만을 단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예배를 볼 수 있는 교회를 구성하려면 18세 이상의 성인 20명이 최소한 한 지역에서 구성되어야 하며 지방 소비에트 관청과 종교에 관한 최고 권한을 지니고 있던 중앙의 종교문제위원회의 승인이 필요로 하였다. 이러한 철저한 제도적인 규제와 정부 당국에서 행해지는 세속적이고 무신론적인 교육 방침으로 소련 사회에서의 신자들의 수는 점차 줄어들었다.
공산주의 혁명 이후 가장 어려웠던 시기를 보냈던 러시아 정교회는 전쟁기간 동안에 그 처지가 역전되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사실 1939년까지 러시아 정교회는 이른바 30년대의 시련이라고 불릴 정도로 극심한 어려움에 놓여 있었다. 러시아 공화국 내의 25개 주에는 활동중인 교회가 하나도 없었으며 20개 주에는 2-5개 정도에 불과했으며, 우크라이나의 경우에는 6개 중에는 하나도 없었고 3개 주에는 1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런데 1941년6월에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러시아 정교회의 세르기 총대주교 직무 대행은 조국 방위를 위한 전쟁 지지 선언과 함께 국민의 단결을 즉각적으로 호소했고 이는 스탈린의 종교 정책관을 동요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렇게 되자 스탈린의 정교회에 대해 긍정적인 종교 정책으로 인해 글자 그대로 '10년간의 교회의 부활(1943-1953)'이 이루어 지게 된 것은 러시아 정교회로서는 크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스탈린이 여전히 집권하고 있던 1946년에 러시아 정교회는 정교회 혁신파 교구들을 완전히 모스크바 총대주교 산하로 통합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르보프를 비롯한 서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많은 신자들을 지니고 있는 우니아트 교회를 공식적으로 폐지시킨 일이다.
다음의 도표는 종전을 전후한 러시아 정교회의 외형적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

               

1944년(8월) 1945년(7월) 1946년(1월) 1947년(1월)
소 련 전 체 8,809 10,243 10,547 13,813
러 시 아 1,907 2,297 2,816 3,082
우크라이나 5,206 6,072 6,007 8,815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증가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측면에서 볼 때 어시아 정교회는 완전한 종교적 자유를 누리지 못하였다. 그 이유는 우선 1929년의 종교법이 여전히 유효한 채 남아 있어서 교회가 누리던 사회적 자선 활동과 같은 자유로운 종교 활동이 제한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교구가 형성되려면 국가의 승인이 필요했고 일전한 자격이 있어야 했다. 일반 학교에서의 무신론적 교육은 지속되었고 사제들에 대한 국가의 감시는 여전했던 것이다. 따라서 스탈린이 죽기 전까지 누리던 러시아 정교회의 부활 양상은 '제한적' 성격을 띤 것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1.4.2후르시쵸프와 브레즈네프 시기의 러시아 정교회

1953년 스탈린이 죽은 뒤 흐루시쵸프는 마르크스-레닌주의에 입각한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강화가 더 필요하다고 인식하였다. 그래서 흐루시쵸프는 소련에서 점차 살아나고 있던 종교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1957년에 1만 3천여개까지 늘어났던 러시아 정교회의 교회 수는 1958년부터 후루시쵸프가 실각된 1964년까지 지속적으로 크게 줄어들었다.
이 시기에는 수도원도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1959년에 러시아 정교회가 가지고 있던 수도원의 수는 47개였으나 1960년대 중반 무렵에는 16개로 감소하고 이에 따라서 수도사들도 3천명에서 1천 5백명 수준으로 줄어 들었던 것이다.
확실히 흐루시쵸프가 행한 종교 탄압 정책의 결과 전국적으로 진행된 교회 폐쇄는 강제적인 방법이 동원되지 않고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폐쇄된 교회 건물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는데 창고, 상점, 극장, 청년들의 클럽, 반종교적 무신론을 선전하는 박물관 등으로 전용되었다.

이렇게 러시아 정교회는 내적으로는 교회 탄압이라는 시련 속으로 다시들어갔으나 외적으로는 국가 기관의 하나로서, 더 상세히 말하자면 국가 외교정책의 지지 단체로 변모해 나갔다. 러시아 정교회는 전 세계의 교회 통일을 목적으로 수립된 세계교회협의회(본부:제네바) 의 회원국으로서 1961년 말에 가입한 이후 이 단체에서 소련의 외교 정책의 선전을 행하는데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 된 것이다.
1964년 흐루시쵸프가 실각하고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정치 지도자들이 집단지도 체제를 구축한 이후에도 러시아 정교회의 상황은 그렇게 호전되지는 않았다. 다음에 있는 표와 같이 교회의 폐쇄는 지속되었던 것이다.


표)러시아 정교회의 교회 수
연대 1966 1971 1976 1981
교회의 수 7,523 7,274 7,038 7,007



러시아 정교회의 지도부는 국가와의 관계를 중시여겼으며 이와 동시에 국가도 교회의 지도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우선 정부는 소비에트 국가에 적대적인 지도자들을 감금하고 국가에 협력하는 자들을 지원했으며, KGB요원들을 교회 간부로 침투시켜 감시와 감독을 철저히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국가와 긴밀한 체제를 이루고 있던 러시아 정교회는 적어도 두 가지 면에서 소련 정권에 도움이 되고 있었다. 첫째, 교회는 소련의 '외교정책을 지지하고 있었으므로 정부에 유익하다는 것이다. 교회는 군비 경쟁 문제에 있어서 서방측을 비난하기도 했으며, 1968년 체코 사태에 있어서는 소련 정부를 지지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둘째, 소련 정부는 여러 해 동안 소련에 종교의 자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대외에 과시하기 위하여 러시아 정교회를 이용 하려고 노력했다.

교회 지도부의 안정적인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와는 별개로, 1960년대 중반이후 소련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러시아 문화를 정교회와 동일시하려는 신슬라브주의 경향이 등장하여 러시아 민족은 정교 문화로 되돌아 가자는 운동이 벌어지면서 러시아 민족주의적 기운이 대두 되었다.
이러한 조류는 사실1966년에 창설된 '전러시아 역사 문화 유적 보존협회'의 활동에서 출발하는데, 이 협회의 회원은 그후 1972년에 700만명으로, 그리고 1977년에는 1,200만명으로 증가되었다.
이렇게 러시아 정교회는 과거의 유산을 찾기 위한 노력의 결과, 건축물의 가치로서의 교회의 보존에는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으로 생각되나 예배용으로 사용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불명확하다.
결국 1970년대 말에는 폐쇄되거나 방치된 교회에 대한 울분이 소련 공식 간행물 잡지, 신문에서도 표출되었는데 그러한 울분에는 비단 종교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문화 보존의 측면에서 비롯되기도 하였다. 과거 러시아 역사의 귀중한 건축물을 상징하는 교회들을 찾으려는 이러한 움직임에서 러시아 민족주의적인 경향을 엿볼 수 있다.

1.4.3 고르바쵸프 시기의 러시아 정교회

고르바쵸코프가 소련 최고의 지도자인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된 1985년과 그후 1-2년 동안에도 소련에서의 종교적 상황은 그렇게 호전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르바쵸코프는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한 1989년 12월 교황청에서 가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의 회담에서 종교의 자유에 대한 법률을 제정할 것임을 강조하였다. 결국 1990년 '양심의 자유의 종교 조직에 관한 법'이 제정되어 자선 활동을 포함한 교회의 활동 영역이 크게 넓어지게 되었다.
1990년 6월에는 정교회 미사가 레닌그라드의 이삭 성당(박물관으로 사용)에서 거행되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 미사는 알렉세이 총대주교가 집전하였으며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인 엘친도 참석하였다. 미사 부분은 TV로 중계되고 1만 3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이 꽉 차고 성당 주변의 도로에도 수많은 인파가 모여들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1988년 한 해 동안에 고르바쵸프 정부로부터 약 700개의 교회를 건네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듬해인 1984년 4월까지 총 1700개 이상의 교구를 받았으며, 성직자의 충원을 위하여 키예프, 스몰렌스크, 민스크, 키시네프, 토볼스크, 스타브로폴 등지에 신학교를 개설하였다. 이와 동시에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 지도자인 피멘 총대주교, 알렉시 레닌그라드 및 노브고라드 수좌대주교, 피트림 볼로콜람스크 및 유리예프 수좌대주교가 소연방 최고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91년 7월25일 모스크바 시 당국은 도시에 있는 과거의 모든 교회 건물(175개)을 원칙적으로 러시아 정교회 측에 넘기기로 하였다. 러시아 정교회는 파괴되어 없어진 교회 건물의 재건을 허용 받았는데 그 대표적인 경우가 크레믈린 인근의 서쪽에 위치한 '그리스도 구세주' 교회와 키예프의 페체르스카야 수도원에 있는 성모승천 성당이다.
1812년 나폴레옹 전쟁 당시 러시아 군의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알렉산드르 1세가 세운 '주 구세주' 교회는 모스크바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였으나 1931년에 스탈린의 무신론 강화 정책으로 인해 이 교회는 인위적으로 폭파되어 사라졌다. 그러나 루시 세례 천주년 기념을 축하하면서 정부와 러시아 정교회는 이 교회의 복원을 결정하고 추진하였다.
정부와 교회 간에 가장 민감한 토론이 있었던 크레믈린 내의 정교회 성당에 대해서는 1991년11월14일 대통령령으로 정교회 측으로 그 사용권이 최종 결정되었다. 사실 1991년 8월 쿠데타 실패가 있은 후 8월28일에 1917넌 이후 처음으로 크레믈린 내의 우스펜스키 성당에서는 교회 축제가 있었다.
고르바쵸프가 집권하기 5년 전에 소련 정부는 루시 세례 천주년 기념식을 거행할 것을 결정하여 정부와 러시아 정교회의 주관 하에 실시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1988년의 전국교회회의는 개혁 시대에 러시아 정교회가 처해 있는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과 국가와의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내실 있는 토론의 장이었다. 6월5일에서 12일까지 진행된 러시아 기도교화 천주년 기념 행사와 그 기간 중에 있었던 전국교회회의를 통하여 소비에트 공산 사회에서 러시아 정교회는 완전히 부활하게 되었음을 대외적으로 알려졌다. 1989년9월에는 모스크바 총대주교구 설치 400주년 기념식이 모스크바에서 거행되고 다닐로프 수도원에서는 9일부터 11일까지 주교단 회의가 개최되어 정교회의 위상 재확립 및 양식의 자유 등에 관한 교회의 입장을 정리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러시아 정교회는 무신론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공산주의 정권하에서도 그 생명을 유지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소련의 국가 수립 초반기인 스탈린 집권 때에는 종교와 교회가 모두 탄압되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적어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하기까지 비속 되었다. 이 시기에 러시아 정교회는 제정러시아 시기에 지녔던 특권적 지위가 박탈되고 법적으로도 종교 활동의 범위를 크게 위축 받았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교회는 국가를 정신적, 물적으로 지지하고 나섬으로써 그 결과 스탈린에 의해 일시적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물론 완전한 의미에 있어서의 종교의 자유는 확보되지 않았으나 관용적인 종교 정책으로 인하여 러시아 정교회의 지위는 안정화하였던 것이다.



195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에 이르는 기간에는 다시 수난과 압제의 길로 들어서게 된 러시아 정교회는 한편으로는 흐루시쵸프의 시기에 이미 국가의 외교 정책을 홍보하고 지지하게 되는 국가 편향적인 현상이 나타나고 동시에 국가에 의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물론 러시아 정교회의 이미지는 탈 신앙 적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야쿠닌 신부와 같은 정교회의 반체제 사제들이 등장하여 정교회의 지도부를 강력히 비판함으로써 러시아 정교회의 내부적인 위기가 노정되었던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는 고르카쵸프가 실행한 페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트 정책으로 인하여 다시 부활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고 법적으로도 완전한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었다. 마침내 모스크바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정점으로 하는 러시아 정교회는 주교구와 그 동안 상실했던 교회와 수도원 등을 되찾음으로써 제정 러시아 시대에 준하는 자산을 회복함으로써 러시아인의 교회로서 재차 자리를 잡는 데 성공하였다. 실로 러시아 정교회는 공산주의 통치 기간에 한편으로는 수난을 당하면서 한편으로는 국가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그 생명력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사진 : 이영제 / 성바실리정교회



출처 : 러시아 장태호 선교사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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