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로마

2011. 3. 18. 17:42교회사자료/10.세계사

그리스, 로마


그리스와 로마는 인류 문명의 기초가 되는 중심적인 국가 입니다.
그리스와 로마가 만든 정치제도와 법 제도, 사회 시스템 등이 아직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문명은 그리스가 기초가 되었고, 그리스의 문명은 크레타와 페니키아로부터 전수 받았고,
크레타와 페니키아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문명을 이어 받았습니다.
즉 그리스와 로마의 문명은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문명을 계승 발전시킨 문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 신화는 메소포타미아의 신화와 이집트의 신화를 혼합해 놓은 듯한 면을 보입니다.
그리스는 다니엘이 본 우상 중 동으로 된 가슴에 해당하고, 로마는 철로 된 다리에 해당합니다.
그럼 크레타, 스파르타, 그리스, 그리스 신화, 로마 제국, 폼페이, 로마의 기독교 박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1. 크레타 (미노안 문명)
a) 역사
크레타 섬은 그리스 남부에 지중해에 위치한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입니다.
크레타 섬의 문명은 기원 전 3000년 경 부터 시작되었으며, 크레타 섬에 사는 미노스 칼로카이리노스 라는
상인이 찾아냈습니다.

그 후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스가 1900년대 초 본격적으로 발굴했고, 크레타의 문명을 미노스 왕의 이름을
따서 ‘미노안(미노스의)’ 문명이라고 이름 붙혔습니다.
미노안 문명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고 약 2000년 간 지속됬습니다.
호메로스는 크레타에 각기 다른 다섯 종족이 있었다고 합니다.

헤로도투스는 미노스 왕이 그리스인이 아니라고 했다.
벽화나 유골을 보아도 크레타 주민은 그리스인과는 인종이 다릅니다.
아마도 이 섬의 토착인일 것입니다.
에번스는, 크레타인이 원래 창조력이 뛰어난 데다가 항해 능력이 출중해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로부터
우수한 문명을 받아들여 독특하고 수준 높은 문명을 이룩했다고 보았습니다.
강대하고 화려했던 미노스 왕국은 하루 아침에 멸망해 땅에 묻힙니다.
에번스는 이 궁전이 폼페이처럼 화산폭발 같은 천재지변으로 어느날 갑자기 무너졌다고 추측했습니다.
그는 옥좌가 있는 방을 발굴하면서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듯한 시신을 발견했습니다.
방에는 기름 그릇이 거꾸로 엎어져 있었습니다.
아마도 왕이 제사를 지내려고 그 방에 왔다가 미처 피할 틈도 없이 최후를 맞이한 것 같았다.

1926년 6월26일 오전 9시45분. 에번스는 자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몸소 겪었습니다.
책을 읽고 있는데 지진이 일어나 느닷없이 땅과 벽이 크게 흔들렸습니다다.
그는 지진이 멈추자마자 밖으로 뛰어나갔더니 왕궁은 괜찮았지만,근처 마을들은 모두 폐허가 돼 있었습니다.

에번스는 거대한 미노스 왕궁을 무너뜨린 것은 밖에서 온 침략자가 아니라 바로 지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은 대부분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는데,1939년 그리스의 한 젊은 고고학자 스피리돈 마리나토스가
놀라운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크레타 문명을 파괴한 것이 크레타 섬에서 서북쪽으로 120㎞ 떨어져 있는 티라 섬(산토린 섬)의 화산폭발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했습니다.

마리나토스는 1883년 인도네시아 크라카타우 화산이 폭발할 때 3만6천명이 죽고,그 여파로 생긴 해일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돌았던 일을 상기시켰습니다.
크라카타우의 4배가 넘는 규모인 산토린 화산의 폭발이야말로 160㎞밖에 떨어지지 않은 크레타 섬과 에게 해
일대에 어마어마하게 큰 피해를 중 것이라 했습니다.
미국 지질학자들이 산토린 화산의 돌들을 조사해 보니, 그 화산은 크레타 문명이 멸망할 무렵인 기원전 1500년께
폭발했고 50년 뒤에 더 크게 폭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마리나토스는 1967년 티라 섬을 발굴해 크레타 왕국과 같은 시대에 번성했던 도시를 용암과 화산재 속에서
찾아냈습니다.
3만명이 살았던 이 도시에서 궁전과 벽화,생활용품이 많이 쏟아져 나옴으로써 미노아 문명은 산토린 섬
화산폭발로 멸망했고,그뒤 이민족에게 정복되었으리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b) 그리스 신화 중 크레타 관련 부분
* 그리스 신화 중 크레타 문명의 탄생과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올림포스의 주신(主神) 제우스가 세계를 방랑하다가 페니키아 왕의 딸인 에우로페의
아름다움에 반했습니다.
제우스는 황소로 변해 그녀를 등에 태우고 자기가 태어난 크레타 섬으로 데려갔습니다
그 때 에우로페가 소를 타고 다닌 곳을 그녀의 이름 Europe에서 따서 ‘유럽’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세 아들이 태어났는데 첫째인 미노스가 크레타의 왕이 되었습니다.
미노스 왕은 아들 안드레게오스를 아테네에서 열리는 운동 경기에 내보냈습니다.
안드레게오스가 그리스 사람들을 물리치고 월계관을 독차지하자 화가 난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가 그를
죽였습니다.
미노스 왕은 함대를 보내 아테네를 굴복시키고, 9 년마다 일곱 청년과 일곱 처녀를 바치라고 요구했습니다.

미노스 왕은 이 젊은이들을 라비린토스 궁전에 보내, 미노타우로스라는 괴물로 하여금 잡아 먹게 했습니다.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산 미노스 왕비 파시하이는 머리는 소이고 몸은 사람인 괴물을 낳자, 미노스
왕은 회랑과 방을 복잡하게 배치해 한번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을 짓고 괴물을 가두어 두었던
것 입니다.

세 번째로 청년과 처녀를 보내야 하는 해가 돌아오자, 아테네는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러자 왕자 테세우스가 미궁의 괴물을 죽이고 젊은이들을 구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는 검은 돛을 단 배를 타고 아테네를 떠나면서, 괴물을 죽이고 살아 돌아오게 되면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꾸어
달기로 왕과 약속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은 대개 잘 생긴 청년이고 여자에게 약합니다.
크레타 왕국의 아름다운 공주 아리아드네를 본 테세우스는 곧 사랑에 빠졌습니다.
공주도 왕자에게 한눈에 반했습니다.
공주는 미궁을 지은 다이달로스를 찾아가, 미로(迷路)를 헤치고 나올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사정했습니다.
공주는 그에게 들은 대로 몰래 칼과 털실뭉치를 테세우스에게 건넸습니다.

공주가 털실의 한쪽 끝을 잡은 채 미궁 입구에서 기다리고,왕자는 실을 풀면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괴물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그는 털실을 되감으면서 미궁을 빠져 나오자 공주를 데리고 아테네로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흥분한 나머지 검은 돛을 흰 돛으로 바꾸는 것을 깜박 잊었습니다.
아테네 왕은 수평선에 모습을 드러낸 배가 검은 돛을 단 것을 보자 절벽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테세우스가 자기 딸을 데리고 도망친 사실을 안 미노스 왕은 대로했습니다.
미궁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알 만한 사람은 다이달로스밖에 없었습니다.
왕은 다이달로스와 그의 아들 이카로스를 잡아다가 미궁에 가두었습니다.
그러자 다이달로스는 새의 날개를 모아 초를 녹여 붙여서 날개를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그것을 달고 하늘로 날아올랐는데, 아들은 그만 너무 높이 날아 태양 근처까지 갔다가
날개를 붙인 초가 녹는 바람에 바다에 빠져 죽었습니다.
다이달로스는 무사히 바다를 건너 시칠리아 섬에 닿았습니다.
그는 왕의 마음에 들어 그곳에 숨어 살게 되었습니다.

다이달로스를 찾을 수 없자 미노스 왕은 한 가지 꾀를 내었습니다.
그는 겹겹이 잇댄 나선형의 소라껍데기에 실을 꿰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고 선전했습니다.
다이달로스가 이름을 숨기고 그 소라껍데기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그는 조그마한 구멍을 뚫고는 개미를 잡아다가 다리에 실을 묶어 소라껍데기 속으로 밀어넣었습니다.

개미는 빙빙 돌아 다른 구멍으로 기어나왔습니다.
문제는 풀었지만 다이달로스는 숨어 있던 곳을 들켰습니다.
미노스 왕이 직접 다이달로스를 잡으러 오자,시칠리아 왕은 다이달로스로 하여금 특별한 목욕통을 만들게 한 뒤
미노스 왕을 거기에 들어가도록 유인해 죽였습니다.

c) 문화

크노소스는 미노안(Minoan)의 수도로 이라클리온에서 5km 떨어져 있습니다.
크노소스는 크레타의 가장 중요한 곳이며 미노안(Minoan) 궁전 가운데서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하고 인상적인
곳입니다.
이 크노소스 궁전에서 신화상의 미노스 왕조(Minos Dynasty)의 후예인 미노스(Minos)가 살았습니다.

미노스는 해군의 창시자이자 법률가이며 미노안 종교의 지도자였습니다.
미노타우어 신화(myth of Minotaur)는 미노스의 전능과 아테네인들의 크레타에 대한 충성을 보여줍니다.
부가적으로 그것은 궁전의 규모와 복잡한 양식을 나타내준다.
거대한 미노스(Minos) 왕의 궁전과 대저택 그리고 묘지들이 이 크노소스 유적지에 있습니다.
B.C. 3000년 부터 2천년 동안 크노스스는 그리스와 유럽 대륙에서 가장 최초로 그리고 가장 큰 도시이었습니다.
크노소스 시민들은 부유함을 마음껏 누렸으며 오늘날의 눈으로 봐도 매우 세련된 문화를 향유하고 살았습니다.
크레타는 지금도 포도주와 올리브유를 많이 생산하지만 그 옛날에도 값비싼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화려한
무늬가 그려진 항아리에 담아 에게해 일대와 멀리 이집트·시리아·키프로스에까지 수출했습니다.
크레타는 에게해를 통틀어 가장 큰 섬으로 수도인 크노소스 항구는 온갖 배들이 모여드는 무역 중심지였습니다.

기름과 포도주를 수출한 배들은 돌아오는 길에 사치품을 사왔습니다.
주석과 구리는 이탈리아나 에게해의 다른 섬에서, 금과 은은 소아시아에서, 상아는 시리아에서 들여왔습니다.
이집트의 자수정,아프가니스탄의 청금석,나일강 유역의 갑충석과 타조알 껍질,메소포타미아의 보석과 인장이
궁전의 보물창고에 수북이 쌓여있었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은 영국의 버킹엄 궁만큼 컸습니다.
그 건물의 화장실은 수세식이었고 배수구와 호사스러운 목욕탕,환기 장치와 지하수 도랑과 하수도가 있었습니다.
백합의 왕자
백합꽃이 핀 들판을 공작털로 된 관을 쓰고
거니는 왕자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항아리 나르는 남자들
남자 인물은 밝은 색의 자수를 놓은 요의(허리옷)를
입고 있으며 금과 은제의 벨트를 매고 은제 발찌와
팔찌를 하고 있으며 귀중한 단지를 나르고 있습니다.
남자들은 가슴을 드러내고,허리에 작은 천을 둘러 엉덩이를 가렸습니다.
그것을 작은 치마처럼 입거나, 팬티처럼 가랑이 사이에 포개어 입고, 때로는 술로 장식한 긴 치마를 입기도
했습니다.
가끔 넓은 허리띠를 찼으며,날씨가 추우면 털가죽 망토를 둘렀습니다.
크레타의 벽화에는 주로 젊은이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젊음을 중시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백푸른 빛 속의 여인들
당시 유행에 따라 매우 우아하게 차려 입은 궁정의
여인들이 대화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항아리 나르는 여자들
일반 평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자들의 화장과 옷차림 또한 세련과 사치의 극치였습니다.
그들은 입술과 볼은 물론 젖꼭지에까지 화장을 했습니다.
꽉 끼는 옷을 입어 몸의 곡선을 강조했고,앞가슴은 대담하게 파서 벌렸습니다.
긴 스커트 자락은 가볍게 퍼지게 했고,옷단에는 장식을 달았으며,색색 무늬가 있는 화려한 드레스도 입었습니다.
벽화에 나타난 한 무희는 투명한 속곳 위에다 노랑 바탕에 빨강 파랑 단을 댄 옷을 입었는데 길고 검은 머리가
어깨 위에서 물결쳤습니다.
에번스는 어느날 매우 특이한 그림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두 소녀가 날뛰는 황소의 앞뒤에서 황소를 어르고,한 소년이 황소의 등에서 물구나무서기를 한 그림이었다.
미노타우로스에게 제물로 바쳐진 그리스 젊은이들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만,에번스는 그것 역시 크레타
사람들이 인생을 화려하게 즐긴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 그림에 나타난 젊은 남녀의 모습에서는 포로나 노예라는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이것은 권투나 레슬링 같은 경기가 아닐까.
이 남녀 선수들은 크레타 사람 중에서 엘리트인 것 같다.
그들은 숙련과 담력을 요하는 아슬아슬한 기예를 보여주고 사람들의 환호에 흥분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발굴해도 크노소스 궁전에서는 방어벽이나 요새가 나타나지 않았다.
옛 도시를 발굴하면서 처음 보는 일이었다.
이 수수께끼는 에번스가 크레타 함대의 자취를 발견함으로써 풀리게 되었다.

막강한 크레타의 해군함대는 에게해 출입구를 막아서서 지중해를 오가는 배들을 통제하거나, 외적을 섬에까지
들이지 않고 먼 바다에서 물리친 것은 물론, 바다를 오가며 수출입 무역에 종사했던 것입니다.
에번스가 찾아낸 기름 창고에서 올리브 기름을 담았던 큰 병과 그릇들을 놓고 계산해 보니 약 8만6,000ℓ나 되는
엄청난 기름을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크노소스 왕궁이 얼마나 부유하고 사치했는지 짐작케 하는 증거였습니다.


d) 종교

미노안 문명의 종교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유물을 통해서 대략적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황소 머리 단지
검은 동석(凍石)으로 황소 머리 모양으로 조각한 헌주
(獻酒) 단지로 눈은 수정과 벽옥(碧玉)으로 상감되어
있으며, 입은 하얀 조가비(진주의 어머니)로 상감되어
있고, 뿔은 금박을 입힌 목재로 만들었습니다.
뱀의 여신
구불 구불 움직이는 뱀을 휘어잡고 있는
여신상으로 가는 허리선, 노출된 가슴,
애프런을 걸친 주름 스커트를 입고 있어서
당시의 의상을 보여 줍니다.
청동 인물상
청동으로 된 얇은 판을 망치로 두둘겨서 만든 3개의
작은 인물상으로 아폴로와 그의 누이 아르테미스와
그들의 어머니인 레토를 묘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망치로 두둘겨 조각상을 만든 최초의 청동 작품.
앉아 있는 여신
신석기시대의 테라코타 소조각상.
크레타 이라페트라 근처의 카토 초리오에서
발굴되었고 다산(多産)의 여신을 상징합니.
황소를 보석으로 치장하고, 뱀을 숭배하고, 여신을 섬기는 것을 보면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스파르타

스파르타는 아테네와 경쟁한 그리스의 도시국가로 엄격한 규율에 의한 교육이 유명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 외에도 스파르타는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이자 금욕적 국가였습니다.
스파르타는 그리스와 같이 원로원이 있어서 왕권을 견제했습니다.

스파르타의 리크르고스 왕은 토지 개혁을 해 부자가 가진 토지를 가난한 사람에게 분배했습니다.
또한 화폐개혁을 해 금화와 은화를 없애고 철로 만든 동전을 사용하게 했습니다.
이로써 돈의 운반과 사용이 간편해지고, 돈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경제가 원활해지고 사치가 사라졌습니다.
남자들은 거대한 식당에 모여 공동으로 똑같은 식사를 함으로써 재물에 대한 욕망이 없게 하였습니다.


스파르타 시민의 교육은 국가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새로 태어나는 아기는 스파르타 시민으로 적절한지 여부에 대해 장로들의 검사를 받았습니다.
튼튼하고 건강한 아이들 만 양육이 허가되었고 그렇지 못한 아기는 타이게투스 산에 버려져 죽게 되었습니다.
어린이는 7세 까지 집에서 양육되고 이후에는 집을 떠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7세된 소년들은 아고개 라고 불리우는 교육기관에서 페이도노모스의 감독 아래 생활하였습니다.
이곳에서의 생활 목적은 강철 같은 기강, 명령에 대한 복종, 기아와 고통에 대한 인내심, 후퇴는 생각할 수 없는
어떠한 형태의 경쟁 혹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는 인간의 육성에 있었습니다.
도둑질을 시켜 담력을 기르고, 화법과 음악을 배웠으며, 나라를 위해 협동하는 애국주의자로 키웠습니다.

짐내스틱은 군사훈련과 신체훈련의 기본적 의미가 되었습니다.
스파르타의 청소년들은 수영, 달리기, 격투술, 레슬링, 권투, 공놀이, 승마, 활쏘기, 투창, 투원반, 야지행군,
판크라티움(권투와 레슬링의 혼합) 등에 대해 훈련을 받았습니다.
체육활동은 여성에게도 권장되 여자도 달리기나 레슬링, 창던지기를 했고, 두려운을 없애기 위해 남자와 같이
벌거 벗고 행진했습니다.
청소년들은 20세에 이르면 스파르타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고 실제 전투에 참여하였습니다.



3. 그리스

그리스는 발칸 반도에 있는 본토와 전체 영토의 약 5분의 1을 차지하는 2000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양 문명의 바탕을 이룬 나라로 민주주의를 최초로 도입했고 철학, 과학, 예술, 체육 등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는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종교를 받아드려 신화를 만들고 신전을 지었으며, 델피에서 신접행위를
함으로써 정치에 사탄의 직접적인 주관을 받았습니다.

a) 역사

1. 미케네 문명
크레타 문명이 쇠퇴하면서 그리스 본토에는 미케네 문명(Mycenaean Civilization)이 출현하였습니다.
이 문명은 B.C. 1500~B.C. 1200년 사이에 절정에 이르렀고, 이 문명의 이름은 미케네라는 고대 도시 성립 이후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중앙 집권적 권위 아래서 비교적 평화를 유지해 왔으며, 미케네 문명에서 가장 인상적인 유물은 아테네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서 손쉽게 볼 수 있는 금 보석들과 장신구들입니다.
미케네인은 후기에는 신들을 숭배하기 시작했습니다.

한편 미케네의 도시 국가들은 트로이(Troy)를 격파하고 흑해까지 그들의 무역로를 보호하기 위해 동맹을 맺었습니다.
트로이는 크레타의 영향력 안에 있던 곳입니다.
그러나 미케네 문명은 B.C. 12세기에 도리스족의 침략을 받아 쇠퇴하고 말았다.
2. 기하학 시대
기하학 시대(Geometric Age)는 B.C. 1200~B.C. 800년에 해당합니다.
도리스족은 그리스의 도시 국가들을 무너뜨리고 주민들을 노예로 잡아갔으며 나중에는 크레타와 소아시아의
남서부 해변까지 장악하였습니다.
또한 이 때에 테살리아인(Thessalian)으로 불리는 인도 유럽 민족의 하나가 지금의 테살리아에 정착하였습니다.
도리스족은 영화를 누렸지만 그리스는 약 400년 동안 암흑의 시대를 맞이하였습니다.
고전 시대 그리스인들은 미케네 문명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뒤부터 B.C. 8세기까지 흔히 암흑 시대라고 부르던
수백 년 동안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도리스족은 철과 기하학적인 모양의 도자기를 전해 주었으며 다산의 여신 대신에 남성신을 숭배했고 포세이돈, 제우스,
아폴로와 같은 미케네 시대의 신들을 받아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B.C. 800년께 미케네 시대 형태의 도시 국가들이 재건되었고, 전제 정치 대신 민주주의적인 정부가 부유한
귀족들에 의해 영도되었습니다.
이 때 도리스족과 적대 관계에 있던 이오니아족(Ionian)이 세운 가장 유명한 도시로는 아테네가 있었습니다.
3. 고풍의 시대
고풍의 시대(Archaic Age)는 B.C. 800~B.C. 480년에 해당합니다.
이 때는 지방의 농업과 가축 농업이 활기를 띠었고, 그리스의 새로운 식민지가 북아프리카, 이탈리아의 시실리,
남부 프랑스와 남부 스페인에 건설되었습니다.
한편 그리스 알파벳 발명과 호머의 시, 신전의 설립 등은 여러 도시 국가 주민들에게 그리스인으로서의 공동체성을
처음으로 심어 주게 되었습니다.
도시 국가는 높은 지대에 요새화된 아크로폴리스(Acropolis)로 건설되었으며 이 곳에는 신전, 보물이 보관되었고,
외부 민족의 침입 때는 피난처로도 제공되었습니다.
성채 밖에는 아고라(Agora:시장)가 있었으며 그 뒤쪽은 거주 지역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도시 국가들은 자유로운 자치권이 있는 국가들이었지만 이로 인해 말다툼과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대부분의 도시 국가들은 전제 군주의 지배를 폐지하고 집정관이 이끄는 민주적인
형태의 정부를 가졌습니다.
4. 아테네와 살론
아테네 및 그 주변 지역인 아티카의 광대한 면적과 유리한 지형은 그리스의 여러 도시 국가들과는 남다른 것이었습니다.
아테네는 자체에서 물을 얻을 수 있는 훌륭한 아크로폴리스도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연적 이점들 덕분에 아테네는 일찍부터 중앙 집권 정체(政體)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아티카는 천연의 방어선을 이루는 4개의 산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아티카의 긴 해안선은 에게 해로 튀어 나와 있었다.
그러나 배를 만들려면 부족한 목재를 대량으로 수입해야 했으며, 이것은 아테네가 제국주의적 사고 방식을 갖게 된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또한 인구가 크게 증가하자 아테네는 경작지를 얻기 위해 제국주의적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B.C. 594년 집정관에 임명된 살론(Salon)이 지향한 사회는 여전히 상류층의 단결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계급
사회였지만 그는 좀더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살론은 빚 때문에 노예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켜 주었으며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특권의 세습을 폐지하였고, 부에 근거해서 네 가지 계급으로 정치 권력을 개편하였습니다.
즉 첫번째와 두 번째 계급만이 지배자(관리인)가 될 자격이 있고, 네 가지 계급 모두 행정 장관을 선출할 자격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개혁은 민주주의의 선구적인 것이었습니다.
5. 스파르타
펠로폰네소스에는 여러 도시 국가가 스파르타(Sparta)라는 형태 안에서 존재하였습니다.
이것은 다섯 개 마을로 이루어진 그룹이었으며 전제 정치가 남아 있는 몇몇 도시 국가들 가운데 하나인 스파르타는
두 명의 왕이 통치하였습니다.
그들은 도리스족의 혈통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B.C. 9세기의 입법가 뤼쿠르고스(Lycurgus)에 의해 정해진 엄격한
군사적 규정에 따라 운영되었습니다.
새로 태어난 아기들은 검사를 받아야 했으며, 만일 허약하다고 판명되면 산 꼭대기에 갖다 버렸습니다.
7세의 소년들도 군사 훈련을 받기 위해 집을 떠나야 했으며 소녀들은 군사 훈련에서는 제외되었지만 튼튼한 아들을
낳기 위해 건강을 유지하도록 훈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6. 페르시안 전쟁
그리스인과 페르시아인의 대결은 B.C. 500년께 아시아 지역의 그리스 식민지에서 일어난 이오니아 반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페르시아는 반란을 지원한 아테네에 적대감을 갖고 보복을 결심했습니다.
B.C. 519년 점차 세력을 팽창하던 페르시아 제국의 왕좌에 등극한 다리우스(Darius) 1세는 아테네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는 스파르타에게 뒤에서 아테네를 공격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인들 역시 그리스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므로 거절하였습니다.
페르시아 군대가 B.C. 490년 마라톤(Marathon)에 상륙하자 1만여 명에 불과한 아테네 병사들은 뛰어난 지략으로
페르시아 사수들과 기병대를 격파하였습니다.
페르시아가 64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아테네군의 사상자는 192명에 불과했습니다.
마라톤 전투는 당장 신화적인 사건이 되었고, 그 당시의 모든 예술가들은 이 전투에 찬사를 바쳤습니다.
한편 다리우스 1세가 계획을 달성하기 전에 죽자 왕위는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Xerxes)에게 넘어갔습니다.
B.C. 480년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 제국의 전 지역에서 장정들을 모아 육군과 해군을 조직하여 그리스를 침입하였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us)는 이 페르시아 제국의 병사 수를 거의 500만 명으로 추산하였습니다.
초기의 전세는 그리스 쪽에 불리했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의 지원과 숙련된 기동 작전을 펼쳐 페르시아 함대를 격파함에 따라 크세르크세스는 페르시아로
돌아가야만 했습니다.
1년 후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Pausanias) 장군 밑에 있던 그리스인들은 플라테아(Plataea)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전멸시켰고,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이오니아인들의 도시 국가들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7. 고전 시대(B. C. 480~B. C. 338)
페르시안 전쟁을 거친 후 여러 도시 국가들이 델로스 동맹(Delian League)을 결성하였습니다.
이 동맹의 목적은 페르시아에 점령되어 있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구출하고, 또 다른 페르시아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대규모의 해군을 만들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페리클레스(Pericles)의 영도 아래 아테네인들은 문화, 예술, 과학의 황금 시기를 맞이하였습니다.
그것은 대개 소아시아에 있는 이오니안 도시들 안에서 싹텄으며 해외 무역과 함께 호화로운 물결을 타게 되었습니다.
아테네인들은 영토를 더욱 팽창하기 위해 서쪽을 관망하기 시작하였고 본토에 있는 도시 국가들에 대항하려 하였습니다.
아테네는 또한 스파르타에 의해 주도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속해 있었던 무역 지대를 서서히 잠식해 나갔습니다.
8.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쟁 발발의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는 아테네가 본국 도시인 코린트(Corinth)와 케르키라(Corcyra)의 논쟁에서
케르키라를 지지하자 코린트는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발발한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B.C. 431~B.C. 421년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이 전쟁은 본래 코린트와 아테네의 싸움이었고, 스파르타도 이따금 개입하였습니다.
전쟁 초기에는 아테네가 유리했지만 아테네는 육지에서 스파르타를 격파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하여 아티카(Attica)를
넘겨 주고 해군력으로 펠로폰네소스를 봉쇄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쌍방은 분명한 활로를 찾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불안정한 정전 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아테네에게 포위를 당했던 스파르타는 B.C. 413년에 아테네 함대와 보병을 격파하면서 그 포위망을 뚫었습니다.
아테네인들의 군대와 돈과 배들은 점점 고갈되어 갔고, 서서히 굶주리기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시실리(시칠리아)와 그리스에서 일어난 사건을 주시하고 있던 페르시아 제국은 스파르타에 물자를 제공하기도
하였습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제국에게 소아시아의 이오니안 도시 국가들을 반환해 준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결국 B.C. 404년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여러 도시 국가들이 파괴되었으며 오직 스파르타만이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스파르타는 전쟁 기간 동안 아테네에 대항했던 도시 국가들에게 자유를 되찾아 준다고 약속했지만 약속을 무시하고
과두 정치를 통해 강압적으로 지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에게 해의 도시 국가들은 점차 옛 힘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스파르타에 대한 반감이 전반적으로 드높아지기 시작해 스파르타는 그리스의 지도적 지위를
잃어버렸습니다.
B.C. 378년에 발족한 제2차 아테네 동맹은 스파르타를 주요 적국으로 규정했고 재건된 아테네 해군이 낙소스 전투
(B.C. 376)에서 스파르타를 물리친 뒤 새로운 도시들이 동맹에 가담했고 아테네는 해양에서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리스 역사의 무대는 이제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아니라 마케도니아의 세력 부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9. 마케도니아의 부상과 알렉산더 대왕
그리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많은 국력을 소비할 때 마케도니아는 북쪽에서 힘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마케도니아는 오랫동안 그리스의 발전에 비해 낙후되어 있었으나 육상과 해상의 통신 수단과 더불어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발전된 문화를 수용하였습니다.
한편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는 테베(Thebes:그리스의 도시 국가 가운데 하나)에 볼모로 잡혀 있었던 적이
있지만 에파미논다스(Epaminondas)로부터 군사 전략에 관해 충실히 배웠고, 후에 보병 부대와 창기병 부대를
효과적으로 조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서서히 그의 입지를 주변 도시 국가들로부터 강화시키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카이로네이아(Khaironeia) 전투에서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 군대를 격파하였으며 여러 도시 국가들을
연합 동맹 형태로 묶어 페르시아에 대항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336년에 암살당함으로써 페르시아를 무너뜨리려는 그의 야망은 실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보병대에서 중요한 책임을 맡고 있던 20세의 알렉산더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위를 계승함에 따라 세계의
질서는 크게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학문적 소양이 높고 빈틈이 없으며 야심적인 알렉산더는 그의 아버지가 추구했던 사업을 계승하려 하였습니다.
그는 국내의 질서를 회복한 후 페르시아를 목표로 B.C. 334년에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소아시아로 출정하였습니다.
페르시아와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알렉산더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그리고 이집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는 파라오임을 선포하고 알렉산드리아(Alexandria)라는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또한 그는 페르시아 제국의 왕관을 차지하려는 야망을 품고 B.C. 331년에는 메소포타미아에서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격파하였습니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 제국을 격파하는 동안 다리우스 3세는 동쪽으로 후퇴하였습니다.

또한 알렉산더는 150년 전 아크로폴리스를 약탈한 것에 대한 복수로 페르시아 궁전을 파괴했으며, 왕의 보물들을
압수하였습니다.
그 다음해 다리우스 3세는 박트리아(Bactria)인의 칼에 찔린 시체로 발견되었습니다.
알렉산더는 계속해서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으로 진출하였지만 그의 병사들은 무리한 원정으로 지쳐 갔기 때문에
결국 B.C. 324년에 메소포타미아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바빌로니아에 정착해 남쪽의 아라비아(Arabia)에 대한 정복을 꿈꾸었지만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10. 로마의 통치
알렉산더 대왕이 동쪽에서 거대한 제국을 만들어 내는 동안 로마인들은 서쪽으로부터 세력을 팽창시켜 그리스를
침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B.C. 168년에 마케도니아가 패하고 소아시아도 점령당하더니 결국 그리스 대부분의 지역이 로마에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B.C. 31년에는 해상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에 승리를 거둠에 따라 로마의 첫번째
황제로 등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후 300년 동안 로마 제국의 한 지방이 된 그리스는 `로마의 평화(Pax Romana)'라는 전례 없는 평화의
시대를 구가했으며,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예술, 문학 그리고 철학을 존경했기 때문에 그들의 자녀를 아테네에 있는
학교에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b) 문화, 종교
그리스의 도시 국가도 다른 고대 국가들처럼 신전을 중심으로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는 아테네 한복판에 솟아있는 언덕으로 올림포스의 신들에게 제사 지내는 여러 신전이 있습니다.
신전은 전쟁, 절도, 지진 등으로 황폐해졌고, 현재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 보수공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크로폴리스
이 언덕에 있는 신전은 B.C.500년
전부터 세워졌고, 당시 일반인은
출입할 수 없는 성역이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
아크로폴리스 최대의 신전으로
파르테논이란 '처녀의 집'이란 뜻이고
아테네의 수호신 아테나를 위한
곳입니다.
에렉티온 신전
아테네의 신화상의 왕인 에릭토니
우스의 이름을 딴 신전으로 아테나,
포세이돈, 에릭토니우스에게
제사 드린 신전입니다.
니케 신전
승리의 신 니케를 위한 신전입니다.
제우스 신전
제우스 신을 위한 신전으로 당시에는
신전 안에 황금과 상아로 만든
제우스 신상이 있었습니다.
하드리아스 문
A.D. 131년에 아테네인들이 아테네
문명을 존중한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
를 칭송하기 위해 건설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But I say, that the things which the Gentiles sacrifice, they
sacrifice to devils, and not to God: and I would not
that ye should have fellowship with devils) KJV

사도 바울은 이방인들이 제사드리는 것은 귀신에게 제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영문성경에는 분명히 Devil(마귀)에게
제사한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마귀는 타락한 천사이고 귀신은 죽은 사람의 영혼이기 때문에 엄연히 다릅니다.
즉 그리스에서 믿는 신들은 사탄과 그의 추종자인 마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코린트식 도자기
코린트식 기둥머리
황금문양이 있는 상아 단검
황금 반지
대리석 스핑크스
왕의 황금 데드 마스크
황금 뿔이 달린 은제 소머리상
아스클레피오스 석고 조각
지팡이에 신성한 뱀 있음.
위 사진 윗줄은 그리스의 문화적 유물이고 둘째줄은 종교적인 상징물입니다.
스핑크스, 데드 마스크, 황소 머리, 신성한 뱀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영향을 받았고,
사탄을 숭배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델피 지도
신탁 장면 삽화
아폴로 신
델피 성역 (사진)
델피 성역 (그림)
아폴로 신전 (사진)
아폴로 신전 (그림)
옴파로스
플라태이아 삼각대의 기둥의 뱀
델피는 그리스에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 다음으로 인기있는 고고학 유적지입니다.
그리스인들은 델피를 세계의 중심이고, 지하세계와 이 세상이 만나는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신화에서 델피는 제우스가 풀어 놓은 두 마리 독수리가 만나는 곳입니다.

제우스는 하늘 신을 반역했고, 황소로 변하고, 최고의 신으로 섬겨졌다는 점을 볼 때 사탄이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과 지옥의 신 하데스, 무저갱의 신 아폴로가 3명의 사령관입니다.
델피는 제우스의 아들 아폴로에 대한 숭배 장소입니다.

그러나 이 지역이 아폴로와 관련 짓기 이전부터 지구의 여신 게(Ge), 테미스(Themis), 데메터(Demeter) 그리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Poseidon) 등과 같은 신들을 숭배하는 성역이었습니다.
미케네 시대의 말엽에 아폴로가 이러한 신들을 대신하였으며 신탁(Oracle)의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신탁(神託, Oracle)이란 신이 사람을 매개자로 하여 그의 뜻을 나타내는 행위입니다.
델피의 신탁은 아폴로의 영혼이 사람들의 삶이나 국가사와 관계된 문제들에 대한 답을 하는 것입니다.
피티아(Pythia, 여사제) 질문이 가해지면 피티아가 신의 영혼을 연결합니다.
수천년 동안 델피에 가면 뭔가 마술 같은 기적이 있다고 사람들은 믿어서 1년에 100만의 방문객이 찾고 있습니다.
델피에의 신탁의 명성이 자자함에 따라 성역은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공물을 갖다 바치는 곳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델피는 고대시대에 그리스의 종교의 중심지였습니다.
이 신탁은 매우 고대적인 것으로, 전통에 따르면 신탁은 땅의 균열이 생길 때 생기며 이때 자연스런 수증기가 나오고
사람이 몽환(夢幻)의 경지에 빠져 그로 하여금 미래를 예측할 수 있게 합니다.

신화에 의하면 아폴로는 제우스(Zeus)와 레토(Leto)의 아들로서 그의 탄생지인 델로스(Delos)를 떠나 델피에 왔습니다.
아폴로는 신화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게(Ge)의 성역(sanctuary)의 피톤-드래곤-수호자(Python-dragon-guardian)와
투쟁을 벌이는 등 수차례의 어려움을 겪고 난 뒤 이 지역에 대한 지배를 확보하였다.


피톤을 죽인 후 그 자신을 정결히 하기 위하여 아폴로는 올림푸스를 떠나 템페 골짜기(Vale of Tempe)로 스스로 부과한
망명에 들어갔습니다.
8년 동안 그는 페레스(Pheres)의 왕인 아드메토스(Admetos)의 무리를 돌보았습니다.
그의 죄값을 치러 정화한 이후에 아폴로는 델피로 돌아왔고 이를 교훈으로 인간들에게 도덕적인 가르침을 펼쳤습니다.

신탁으로 인해 각지의 공식 사절단들이 국가사나 보통 사람들의 문제들에 대한 신의 계시를 듣기 위하여 델피에
왔습니다.
이들은 희생을 받쳤고, 결정금(determinded sum)을 내고 신의 계시를 기다렸습니다.
신의 계시는 예언 여사제인 피티아(Pythia)의 입을 통해 전달되었고, 이들의 이해할 수 없는 중얼거림은 사제들에
의해 교묘하게 해석되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신탁의 영향은 그리스의 정치적, 지적인 생활에 결정적이었습니다.
델피는 그리스 도시국가에 관련된 많은 이슈에 중재자로서 행동하였습니다.
간접적으로는 신탁의 발언을 통해서 또한 직접적으로는 일종의 국가 연방인 암픽티오니(Amphictyony)를 통해서
중요한 결정의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초기에는 피티아는 어린 처녀였습니다.
그러나 나중 시대에 가면서 피티아는 50세 이상의 흠잡을 데 없는 여인이어야만 했습니다.
신탁의 절정기에는 피티아는 3명으로 까지 늘어났습니다.
신탁의 초기에는 응답은 1년에 한번 주어졌습니다.

즉 2월 말엽과 3월 초의 비시오(Bysios)의 달 7일(아폴로의 생일)에 응답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신탁의 전성기에는 응답은 매달 17일에 주어졌으며 예외적으로 겨울에는 세 달에 한번 있었는데,
이때는 아폴로(Apollo)가 빛이 영원히 비추는 하이퍼보레이안스(Hyperboreians)로 가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폴로의 부재 동안에 디오니소스(Dionysos)가 숭배되었습니다.

피티아가 대답을 주기 위하여 정확한 절차가 행해져야만 했습니다.
첫째, 피티아와 사제들은 카스탈리아 샘의 물로 스스로의 몸을 깨끗이 씻고 요금(fee)을 지불합니다.
그리고 나서 동물 한 마리를 아폴로의 제단에 희생으로 바칩니다.
동물은 아무 결점이 없는 완전하고 어린것이어야만 하고, 피티아와 사제들은 그 희생 위에 찬물을 부읍니다.

만일 동물이 전율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신이 현재 같이 있고 대답이 주어질 것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러면 피티아가 월계수와 보리꽃을 영원한 불꽃이 있는 곳에서 태우기 시작하고, 그리고 난 후에 피티아는 지하
성단(聖壇)으로 내려갑니다.
이곳은 사원의 본당 회중석(會衆席, 중심부)의 바로 아래입니다.

사제들과 신탁 신청자들이 위쪽에 있는 한 방에 머물러 있다가 여기에서 신청자가 그의 질문을 큰 목소리로 외칩니다.
피티아는 카소티스 샘(Kassotis Spring)의 물을 마시고 월계수 잎을 씹고 나서는 신성의 삼각대(sacred tripod)에
앉습니다.
그녀 근처에 옴파로스(omphalos)가 있고, 피티아는 근처의 갈라진 틈에서 나오는 수증기를 들이 마십니다.

그녀가 몽환(夢幻)의 경지에 빠져 있을 때 그녀가 말을 하기 시작하고 그 말들은 사제들에 의해 글로 쓰여지고
해석되어집니다.
신탁에 의해 주어진 대답들은 주로 모호한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인들이 신화 속 신들을 섬기는 것 뿐만이 아니라 교통하고 정치도 그(마귀)에게 의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옴파로스는 그리스인들이
세계의 한 가운데라고 믿었던 델피에 세워진 부조 네트워크가 조각된 대리석 원추체
(圓錐體) 입니다.
옴파로스는 이 중심을 나타내 주는 조각물이고 신들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는 표시입니다.
지옥은 지구 땅 속에 있으며 지구에는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 곳곳에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곳이 티벳과 델피입니다.

플라태이아의 삼각대는 BC479년의 플라태이아 전투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그리스의 결정적인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델피에 헌납된 것입니다.
원래는 아폴로신전 앞에 서 있었는데 현재는 그 기초만 남아 있습니다.

세 기둥 가운데 하나는 세 마리의 청동 뱀으로 된 몸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그 머리 부분에 황금 삼각대가 놓여
있습니다.
뱀의 몸체에는 전투에 참여하였던 도시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 삼각대는 3차 성전(Holy War) 동안에 포키안들(Phokians)에 의해 녹여졌습니다.

반면에 뱀이 서로 뒤얽혀 있는 청동 기둥은 콘스탄틴 대제에 의해 그의 새로운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의 히포드롬
(Hippodrome)으로 옮겨졌고 오늘날까지 서 있습니다.
삼각대는 원래 피티아가 앉는 곳인데 그 기둥에 3마리의 뱀이 둘둘 말려 있다면 뭔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4. 그리스 신화

그리스 신화와 로마 신화는 거의 비슷하고 이름만 다를 뿐입니다.
제우스는 쥬피터가 되고 에우로페는 비너스가 됩니다.

a) 창조 이야기

암흑과 혼돈의 세계에 대지의 여신 가이아, 밤의 여신 뉙스, 사랑의 신 에로스 등이 태어났습니다.
가이아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태어나게 했습니다.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결합해 팔이 100개 달린 외눈박이 괴물들을 낳았는데, 우라노스는 이들이 보기 싫어 지옥에 가둡니다.
가이아와 우라노스는 또 다시 티탄신이라는 정상적인 6명의 자녀를 낳습니다.

가이아는 지옥에 갇힌 괴물들을 구하기 위해, 티탄신의 막내 크로노스를 시켜 우라노스가 잠든 사이 그의 성기를
자르게 합니다.
크로노스는 힘을 잃은 우라노스를 몰아내고 신들의 왕이 되었으나 괴물들을 지옥에서 구해주지 않습니다.
크로노스는 가이아의 저주가 두려워, 자기 자식이 반역할까봐 태어나는 대로 잡아먹습니다.

그리스의 창조신화는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창조신화 보다 훨씬 더 난잡합니다.
항상 창조의 신은 여러 명이고 질이 안 좋은 것이 고대 신화의 특성인데, 이런 거짓말은 신화 속에 숨은 사탄의 의도입니다.



b) 티탄신과 제우스의 전쟁
대지의 여신 가이아
염소젖을 먹는 제우스
크로노스를 죽이는 제우스
바다의 신 포세이돈
크로노스가 5 번째 자식까지 잡아 먹자 아내 레아는 6 번째 아기를 크레타 섬의 님프에게 키우게 하고, 아기 대신 돌을
담요에 싸서 크로노스에게 먹게합니다.
아기는 염소젖을 먹고 자라 제우스가 되고, 같은 방식으로 포세이돈과 하데스가 자라납니다.
제우스 형제는 올림푸스산에 모여 승리의 신 니케, 힘의 신 비아, 질투의 신 젤로스 등과 함께 크로노스를 비롯한
티탄신과 전쟁을 벌입니다.

제우스는 무기로 번개를 던지고, 포세이돈은 삼지창을 사용하고, 하데스는 보이지 않게 하는 투구를 사용합니다.
지옥의 괴물들의 도움을 얻은 올림푸스 신들은 마침내 승리를 합니다.
티탄신은 암흑에 가두고, 제우스는 왕이 되 하늘을 차지하고, 바다는 포세이돈이, 지옥은 하데스가 다스립니다.

항상 고대 신화에서 최고의 신은 하늘의 나쁜 신을 쫓아내 왕좌를 차지하는데, 이는 하늘에서 범죄해 쫓겨난 사탄이
오히려 자신은 하늘의 나쁜신을 혼내주는 정의의 신이라고 선전하는 것입니다.
하늘의 제우스와 땅 속의 하데스와 바다 속의 포세이돈은 삼위일체를 형성하며, 실제로 이 곳은 마귀들이 왕국을
건설해 거하는 처소입니다.



c) 생명체의 창조와 판도라의 상자

올림푸스 신들이 권력을 잡은 후, 프로메테우스가 물과 흙을 빚어 생명체를 만들어 내면, 에피메테우스가 특징을
부여해 각종 동물을 만들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는데, 에페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줄 선물이 바닥나자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늘에서 불을 훔쳐옵니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불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니, 인간은 불을 이용해 추위를 이기고 연장을 만들어내 문명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제우스는 이 사실을 알고 대노하여 프로메테우스를 바위에 묶고 독수리가 간을 쪼아 먹는 형벌을 내립니다.
제우스는 헤파이토스를 시켜 물과 흙으로 여자를 만들 게 하니, 아프로디테는 그녀에게 아름다움을 부여했고, 아테나는
바느질을 가르쳤습니다.
독수리에게 간을 뜯어 먹히는 프로메테우스
상자를 여는 판도라
상자를 여는 판도라
이렇게 아름답게 태어난 여인의 이름은 판도라였습니다.
제우스는 에피메테우스에게 판도라를 인간에게 주라고 했지만, 판도라의 아름다움에 반한 에피메테우스는 그녀를 아내로
삼습니다.
판도라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점차 무료함을 느끼게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우스가 선물로 주었지만 절대로 열어보아서는 안된다는 상자를 호기심에 열어봅니다.
그러나 상자에서 고통, 슬픔, 질투, 욕망, 늙음, 죽음 등이 흘러나와 온 세상을 뒤덮게 되고, 이로 인해 인간들은 타락하게
됩니다.

이 내용은 창세기와 상당히 흡사한데 성경에서와 같이 신화에서도 흙을 빚어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또한 성경에서 홍수 심판 전 천사들이 사람 여자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내로 삼은 것 같이, 신화에서는 신이 여자의
아름다움에 반해 아내로 삼습니다.

성경에서 하와가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따먹고 그로 인해 고통과 늙고 죽음, 슬픔, 노역등이 생겼듯이, 신화에서도
판도라가 호기심에 상자를 열어 이러한 일들이 생기고 사람들이 타락하게 됩니다.
다른점이 있다면 성경에선 뱀(사탄)이 하와를 꼬여 타락하게 한 반면, 신화에서는 판도라가 호기심에 스스로 상자를
엽니다.



d) 홍수 심판

판도라가 상자를 열자 풍요롭고 평화롭던 세상에 슬픔과 고통과 질병이 생겼습니다.
사람들은 악해지고 서로 전쟁을 했습니다.
이들은 신들에게 경배하지 않았고 거짓과 불신이 난무했습니다.
이에 실망한 신들은 지상을 떠나 인간을 물로써 쓸어 버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제우스는 남풍의 신 노토스에게 비바람이 몰아치게 하고,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강물이 범람하게 합니다.
모든 사람이 물에 빠져 숨졌고, 신에게 경배하던 데우칼리온과 퓌라 부부만 파르낫소스산 꼭대기로 피신해 살아남습니다.
물이 빠지자 그들은 내려왔지만 모든 것이 황폐해져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신들의 지시대로 돌을 집어 등 뒤로 던지니 돌이 떨어진 곳에 인간이 생겨나 새로운 인류의 문명이 생겨났습니다.

인간의 타락으로 신이 노해 홍수로 멸절시키고 의로운 한 가족만 살아남는다는 것은 성경의 홍수심판과 유사합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서 느낀 점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와 힌두교의 신화와 닮았다는 점과 성경과도 유사하다는
점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제우스 머리에서 완전 무장한 여신 아테나가 태어났다' 또는 '거품에서 아프로디테가 태어났다' 등
황당한 내용이 믾아서 우리는 재미있는 옛날 얘기 정도로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 신화는 사실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지어낸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쓰여졌듯이, 그리스 신화는 사탄의 계시를 받아 쓰여진 이야기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그리스 신화를 사실로 받아드리고,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에게 신전을 지어서 제사를 드렸습니다.

모든 고대 신화는 비슷한 줄거리와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어 작자가 한 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창조신은 포악해 정의로운 최고의 신(사탄)이 이를 몰아내고 왕좌를 차지해 사람을 다스린다는 내용입니다.
이러한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 유대인을 제외한 모든 고대인들은 사탄을 신으로 섬겼습니다.

요즘 신비주의 열풍이 불어 마법을 쓰는 온라인 게임이나, 헤리포터나 반지의 제왕 같은 영화, 더불어 그리스 신화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에 심취하게 되면 비슷한 줄거리를 가진 성경도 하나의 신화로 취급하게 되고, 급기야 그리스 신화를
사실로 믿어 제우스(사탄)나 아폴로(아바돈)를 존경하고 호감을 갖게 됩니다.




5. 로마 제국

로마는 그리스의 문화를 받아드려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와 유사하지만, 정치 제도, 법 제도, 군사 기술 등을 발전시켜
오리엔트와 유럽에 걸친 대 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로마 제국에 대해 알다 보면 현재 미국의 상황과 비슷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역사를 알아보겠습니다.

a) 공화정 초기 (B.C. 509~B.C.264)

B.C. 800년 경에 라틴족인 로물루스가 로마시를 세웠습니다.
B.C. 700년 경에는 에트루이아족이 침입해 로마를 지배했습니다.
B.C. 509년에 에트루이아 왕조가 무너진 후 공화정이 생겨났습니다.
공화국은 주권을 가진 국민이 직접 또는 간접 선거에 의하여 일정한 임기를 가진 국가원수를 뽑는 국가 형태를 말합니다.

임기 1년의 두명의 집정관(콘솔)이 군사, 사법, 제사적 권력을 가지고 통치했습니다.
그밖에 사법권을 가진 프라이토르와, 인구와 재산을 담당하는 켄소르(감찰관), 행정을 담당하는 콰이스토르가
생겨났습니다.
B.C. 450년에 데컴이라는 10인 위원회가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 표법을 제정합니다.

원로원은 유력한 씨족의 우두머리로 구성된 공화국 최고의 권력 기관이었습니다.
원로원은 민회의 법률을 비준하거나, 법률을 제안하고, 행정관에게 조언했습니다.
그밖에 종교 문제에 관여하고, 국고를 맡아 공공 재정을 운영했습니다.

평민(플레브스)들은 자신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평의회를 세우고, 호민관(트리부누스)을 두었습니다.
호민관은 원로원의 결정을 거부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로마는 이 시기에 에루트리아족, 켈트족, 삼니움족 등을 물리치고 이탈리아를 통일합니다.


b) 공화정 중기 (B.C. 264~B.C. 133)

포에니 전쟁 이전의 지중해 판도
한니발 장군

당시 지중해를 지배하던 카르타고(페니키아의 로마식 이름)와 이탈리아를 통일한 로마는 지중해의 요충지
시칠리아에서 부딪치게 됩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로마는 카르타고 해군을 물리치고 아프리카 해안에 상륙합니다.
카르타고가 일시적으로 전세를 역전시키기도 했지만 결국 로마에게 시칠리아 섬을 뺏기고 전쟁 배상금을 물고 평화
조약을 체결합니다.

카르타고가 지중해의 패권을 되찾기 위해 히스파니아(스페인) 지역에 신 제국을 수립하고 힘을 키우자 이를 우려한
로마가 2차 포에니 전쟁을 일으킵니다.
히스파니아의 젊은 장군 한니발은 막강한 로마 해군을 피해 육로로 험한 알프스를 넘어 북 이탈리아를 점령합니다.
B.C. 217년에 에트루리아에서 한니발을 로마군에 대승을 거두었지만 병력을 보충하기 위해 로마로 진격하지 않고
이탈리아 남부를 공격합니다.

이 사이 로마는 기력을 회복하고 한니발을 남쪽으로 몰아냈으며, 카르타고의 지원군도 격퇴해 카르타고군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합니다.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는 B.C. 206년에 히스파니아를 정복하고, B.C. 205년에 카르타고에서 한니발을 물리침으로써
카르타고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이로써 카르타고는 전함과 지중해 섬을 빼앗기고, 독자적으로 전쟁과 외교를 수행할 권리를 잃었습니다.

한편 로마는 B.C. 197년에 그리스 지역의 마케도니아를 정복하고, 시리아와의 전쟁에서도 이겨 소아시아를 점령합니다.
B.C. 151~146년에 로마는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동맹과 싸워 이겨 발칸 반도와 아프리카까지 영역을 넓힙니다.
B.C. 146년에 카르타고가 누미디아의 공격에 맞서 저항하자, 로마는 이를 구실로 카르타고를 공격해 함락하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한 후 포로를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로마는 정복한 속주를 프라이토르라는 총독을 두어 다스리게 했습니다.
로마가 이렇게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인의 충성심이 높았고 군대의 효율성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군주정(콘솔), 귀족정(원로원), 민주정(코미티아)이 세력 균형을 이뤄 권력이 한 곳으로 집중되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선포하고 평화조약을 맺는 것은 민주정의 권한이나 주요 정치 문제와 식민지 관리는 원로원이 했습니다.

평민회는 독자적으로 입법할 권리가 있었으나 10명의 호민관 가운데 1명이라도 거부하면 통과가 안되기 때문에
귀족들이 1명이라도 거부하면 통과될 수 없었습니다.
에퀴데스(기사계급) 계층은 국가의 하청을 받아 도로를 닦고, 광산을 경영하며, 군대에 납품했습니다.
식민지가 넓어지면서 로마는 부강해졌지만 값 싼 농산물이 수입되면서 로마 농민은 몰락해 갔습니다.

이탈리아의 부자들은 국유지를 점유하고 빈농의 땅을 싸게 사들여 라피푼다움이라는 대 농장을 경영하며 노예로
목축을 경영해 큰 돈을 벌었지만 땅을 잃은 농민들은 도시로 몰려들었습니다.
로마인은 그리스 문화를 동경해 그리스어를 배우고, 그리스 문학을 수용하고, 그리스의 신들을 섬기고, 회의주의적
철학을 받아드렸습니다.


c) 공화정 후기 (B.C. 133~31)

빈부의 차가 심해지자 B.C. 133 년에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개인이 점유할 수 있는 국유지를 500 유게라
(1,212m
2)로 제한해 나머지 국유지를 시민들에게 나눠주려 했습니다.
부자와 귀족으로 이루어진 원로원이 반대하자, 평민회에 법안을 제출했지만 귀족 편인 호민관 마루쿠스 옥타비우스의
거부권 행사로 좌절됩니다.

그러자 평민회는 옥타비우스의 호민관직을 박탈하고 법안을 통과시킵니다.
이에 원로원파는 평민회로 몰려가 티베리우스를 살해하고 평민회를 탄압했습니다.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리쿠스는 B.C. 123년 호민관이 된 후 공공수입을 늘려 시민들에게 혜택을 주고,
에퀴데스라는 직책에게 행정관의 부패를 방지하게해 원로원을 견제했습니다.
호민관 재 선거에서 진 그는 B.C. 123년에 무력으로 개혁을 하려 했으나 폭동으로 목숨을 잃습니다.

폼페이우스는 B.C. 77년에 이베리아의 반란을 진압한 장군이었고, 마루쿠스 크라수스는 노예 반란을 진압한 공로가
있어 B.C. 70년에 각각 콘솔이 됩니다.
크라수스는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음모와 폭력을 동원했고, 나라는 피폐해져 갔습니다.
B.C. 63년에 카틸리나 라는 정치가가 쿠테타를 시도했으나 키케로에게 진압됩니다.

동방을 원정해 승리하고 로마로 돌아온 폼페이우스는 군대를 해산하고 권력을 내 놓았으나, 원로원은 병사들에게
토지를 나누어달라는 그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한편 히스파니아(스페인)에서 총독 활동을 하다가 돌아온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뛰어난 재능으로 B.C. 59년에 콘솔이
되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콘솔직에 있으면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모두에게 신뢰를 얻어 정권을 장악합니다.
3명이서 밀약을 맺고 권력을 독점했고, 키케르는 이들을 분리시키려했지만 실패합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군의 지휘권을 얻었고,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의 지휘권을 얻었으며,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공격했고, 키케르는 결국 이들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크라수스가 죽자 품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대립하게 되는데, 원로원이 폼페이우스 편을 들자 갈리아에 있던
카이사르는 반란을 일으켜 로마를 점령했고, 폼페이우스는 그리스로 퇴각합니다.
카이사르는 이집트로 좇아가 폼페이우스를 격퇴했고, 이집트로 도망간 폼페이우스는 그 곳에서 암살당합니다.
카이사르는 권력을 독점하고 1인 독재를 실시했지만, 원로원에서 부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암살당합니다.
그러나 이 후 권력은 카이사르의 신하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장악했고, 암살자들은 도망을 갑니다.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과 협력해 안토니우스에 대항합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서부를 통치했고, 안토니우스는 동부를 장악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해 이집트를 정치적, 군사적
근거지로 삼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를 이집트에 넘겨주려 한다고 선동한 다음 공격해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연합군을 패배시킵니다.


d) 제정 전반기 (B.C. 31~A.D. 139)
아우구스투스 황제
네로 황제
로마 제국 영역 (A.D. 117)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전권을 잡고 첫 황제가 되었습니다.
원로원은 그에게 히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의 통치를 위임하고, 아우구스투스(존귀한 사람)라는 칭호를
부여하였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콘솔직을 맡았으나 B.C. 23년에 사퇴하고 호민관 권한과 원로원과 민회를 소집하고 주재할 권한을
얻었습니다.

원로원은 그에게 프로 콘솔의 권한을 부여해 속주와 군대의 통수권도 가지게 했습니다.
그는 또한 막시무스(大神官)가 되었고, 8번째 달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부르게 하였고, 조국의 아버지란 칭호를
받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군사와 재정에 실권을 장악하였으므로 원로원의 권한은 축소되었습니다.
원로원 의원과 에퀴테스로 이루어진 특별 위원회가 프라이토르와 콘술을 선출했습니다.

보수를 받는 직책은 대부분 에퀴테스에게 돌아갔고, 그들은 제국 안에서 강력한 계급을 형성합니다.
민회는 가끔 회의를 열어 이미 결정된 사항을 형식적으로 승인할 뿐이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이탈리아에서 도로 건설과 같은 공공사업을 벌이고, 재정과 통치를 안정시켜 이탈리아를 전체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속주 총독직에는 원로원 의원이나 에퀴테스가 임명됐고, 속주는 로마에 직접세와 간접세를 바쳤으나 민회와 참사외,
키비타스를 단위로 자치를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을 서약한 군대는 레기온(군단), 변경 주둔군, 황실 근위대, 제국 함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레기온과 변경 주둔군의 병사는 주로 서부 속주 출신으로 제대하면 시민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정복하기 쉬운 곳은 속주로 다스렸지만 로마에서 먼 곳은 위성국가를 만들어 다스렸습니다.
식민지를 관리하기 위해 도로를 건설하고 역참제도를 시행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56년간 통치하며 200년간 유지된 입헌 정부를 만들어냈습니다.
아우수스투스는 아들에게 왕위를 상속해 왕조를 세우려 했으나 아들이 없었으므로,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제위시킵니다.
티베리우스는 유능한 황제였지만 뒤를 이은 칼리쿨라는 폭군으로 암살당합니다.

클라우디우스 1세(A.D. 41~54)는 중앙 집권화를 진척시키고, 브리튼을 합병했습니다.
네로황제(A.D. 54~68)는 가족을 비롯한 여러 사람을 살해하고, 로마시를 불태우고, 크리스천을 최초로 박해했지만
반란이 일어나자 자살합니다.

A.D. 117~138 년에 집권한 하드리아누스는 변경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속주의 주둔군을 자체에서 충원했습니다.
또한 레기온과 주둔군의 차이를 없앴으며, 이민족으로 구성된 기동 부대를 창설합니다.
그는 관료제를 정착시키고, 영구고시록(법무관의 고시에 따라 해석하는 법)을 법전화 시키는 법률적 업적을 남겼습니다.

안토니누스 황제(A.D. 138~161) 때부터 게르만족이 침입하고, 반란이 일어났고, 그는 게르만 족을 진압하다
전사합니다.
2 세기 들어 황제들은 자기 가문을 신격화해서 절대 군주정에 이르렀고, 원로원을 거치지 않고 직접 법을 제정했습니다.
제국 내의 다른 종족들은 각기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이 허용 되었고, 도시 단위로 지방 자치가 이루어졌습니다.

극단적인 빈부 격차는 물질 만능 주의를 낳았고, 내세를 지향하는 종교가 성장했습니다.
로마 제국 동부에서는 라틴화를 거부해 그리스 문학이 부흥을 이뤄 수사학과 풍자가 유행했습니다.
철학은 스토아 철학이 번성했고, 예술은 로마인답게 사실적 표현이 주류를 이룹니다.


e) 제정 후반기 (A.D. 193~476)
포로 로마노 (FORO ROMANO)
고대 로마의 중심으로 지금은 폐허나
다름 없지만 한 때 신전, 바실리카,
원로원 등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콜로세움 (Colosseum)
1세기에 세워진 세계 최대의 원형 경기장으로
5만명을 수용할 수 있고, 모의 해전, 검투사의
결투, 맹수들의 싸움 등이 개최되 시민들에게
큰 오락 거리를 제공했습니다.
로마 말기 이민족의 침입 경로
192년 콤모두스가 암살 당한 후 벌어진 내전에서 두나우 주둔군이 추대한 세베루스가 승리를 거둬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군대를 우대하고 관료제를 강화했지만 원로원을 무시해 중앙권력을 강화했습니다.
193년부터 235년까지 세베루스 가문이 집권했는데 세금을 올리고, 악성 인플레를 낳았고, 이교를 숭배하다가
바시아누스가 암살당함으로써 끝을 맺습니다.

로마는 그리스의 다신을 숭배했는데 집권층은 대형 신전에서 제사 지냈지만 하층민들은 군소신에 대한 믿음이
강했습니다.
한 때는 이원론적 사상과 내세의 심판을 믿는 조로아스터교 계열의 종교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1세기 말부터 그리스도교가 하층민과 유대교 사이에 퍼져나갔는데 로마인들은 그리스도교가 배타적이고 황제에게
경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생각했습니다.

2세기부터 지식층에도 그리스도교가 보급되자 네로황제 때부터 탄압되기 시작했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세계적인
박해를 가했습니다.
235년부터 막시무스 같은 군인이 황제를 맡게 되었지만, 이민족의 잦은 침입을 받게 됩니다.
게르만족은 본거지인 스웨덴에서 로마나 히스파니아로 쳐들어 왔습니다.

로마는 갈리아와 소아시아 지역 일부를 잃게 됩니다.
외침과 내란으로 많은 지역이 황폐해졌고, 강도와 해적이 들끓었으며, 전염병으로 인구가 줄고, 제국은 빈곤해져
갔습니다.
284년에 동부 주둔군이 황제로 선포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공동황제(Augustus)로 막시미아누스를,
부황제(Ceaser)로 콘스탄티우스와 갈레이우스를 지정했습니다.

이들 황제는 제각기 군대를 가지고 막시미아누스는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와 브리튼을,
갈레이우스는 도나우 지역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부를 책임졌습니다.
이들은 황제를 신격화 해 권력의 안정을 도모했고, 4 과두제정을 실시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속주의 수를 늘리고 이탈리아도 속주와 같이 분할했습니다.

4 황제가 자기 지역에서 통치함에 따라 로마는 수도의 특권을 잃게 됩니다.
또한 황제 직속군인 기동 타격군을 창설하고, 관료제를 팽창해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인플레이션과 재정위기가
심각해졌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인구를 조사해 공평하게 과세하고, 가격 제한제를 도입하고, 국민을 출생지에
묶어 놓아 사회 이동을 금했습니다.

디오클레아누스와 갈레리우스는 황제의 신적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그리스도교인을 가혹히 박해했습니다.
366년 콘스탄티우스가 죽자 갈리아와 브리튼에서는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황제가 됩니다.
로마에서는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도나우에는 라키니우스가 황제가 됩니다.
이들은 서로 싸움을 벌였고 결국 콘스탄티누스가 제국을 장악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하늘에서 빛나는 십자가 환영을 보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합니다.
이에 힘입어 그리스도교는 제국 전체에 전파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해 삼위일체론을 믿지 않는 아리우스파를 탄핵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337년 지금의 터키 지역의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깁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뒤 353년에는 콘스탄티우스가 제국을 통합하고 페르시아의 위협에 맞서 대항했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주로 종교문제에 관심을 두었는데 그의 간섭은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아리우스파에 기울어져 있었는데 이는 교회에 불리한 것이었습니다.
361년 그가 죽자 율리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마지막 황제로서 뒤를 이어 이교신앙을 되살리고 그리스도교를
약화시키려 했으며, 자유로운 원수정을 복귀시키려고 애썼으나 페르시아를 공격하다가 패해 전사했습니다.

새로 황제가 된 발렌티니아누스는 동생 발렌스를 공동황제로 지명해 제국을 서부와 동부로 분리했는데, 제국이 실제로
분리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서부를 맡은 발렌티니아누스는 이민족을 물리치고 여러 차례 반란을 진압하는 등 대외적으로 훌륭한 업적을 쌓았을
뿐만 아니라 대내적으로는 종교에 대한 관용을 선포하고 하층계급 보호정책을 폈습니다.

반면에 동부를 다스린 발렌스는 무능했고, 광신적인 아리우스파로서 이교도와 정통 그리스도교를 탄압해 반발을
샀으며, 도나우 지역으로 침입해온 서고트족과 동고트족과의 전투에서 378년 죽었습니다.
발렌티니아누스가 375년 갑자기 죽자 그의 아들인 16세의 그라티아누스가 뒤를 이었습니다.
그는 379년에 발렌스의 후임으로 테오도시우스를 동부 황제로 선포하고 고트족과 프랑크족을 제국 안의 영토 안에서
살도록 허용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곧 그라티아누스를 압도해 주도권을 잡고서 아리우스파와 이교도를 척결하기 위한 싸움에
뛰어들었습니다.
이단과 이교에 대한 이러한 탄압은 서부에서 많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틈타 갈리아와 브리튼의 군대는 383년
지휘관인 막시무스를 황제로 선포한 뒤 그라티아누스를 살해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막시무스를 황제로 인정했으나 388년 막시무스가 테오도시우스를 공격하다 죽었으므로 제국 모두를
테오도시우스가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395년 테오도시우스가 갑자기 죽은 뒤 그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부와 서부를
물려받았습니다.
제국의 상황은 계속 악화되어 세금 부담이 더욱 늘고 경제는 줄곧 쇠퇴해갔으며 전제정이 더 강화되었습니다.
심지어 군대는 지휘관들까지도 주로 이민족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주교들은 그리스도교 세력이 강화되면서 점점 더 큰 권력을 소유하게 되어, 약자에 대한 보호를 둘러싸고 계속
유력자들과 경쟁을 벌여 5세기에는 세속적인 통치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농촌에서는 독립적인 중소 농민이 무거운 세금 부담과 대토지 소유자들의 압력에 못 이겨 몰락해갔습니다.
그들은 자기 땅을 팔아넘기거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유력자에게 땅을 넘긴 뒤 소작인으로 전락해 땅에 매임으로써
자유를 구속당해 중세 농노제를 지향해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 교회는 제국의 행정단위를 바탕으로 조직을 갖추었는데 각 도시에는 주교가, 각 속주의 수도에는 대주교가,
그리고 아주 큰 도시에는 총주교가 자리잡았습니다.
교회는 엄청나게 부유해졌고 세속 당국의 사법권에서 제외되는 불입권(不入權)을 획득했습니다.
황제는 종교문제에 간섭할 권리를 주장했으나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서로마 교회는 교권(敎權)과 속권(俗權)이
분리되어야 하며 교권이 더 위에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보여준 황제교황주의가 우세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가 죽은 뒤 호노리우스가 서로마를 통치했지만 게르만족이 물밀듯이 제국으로 침략해 들어왔습니다.
402년 스틸리코에게 저지당했던 서고트족의 알라리크는 곧 다시 침략해 410년 로마를 함락하고 약탈을 자행한 뒤
남쪽으로 진격했으며, 그뒤를 이어 아타울프는 이탈리아를 떠나 갈리아로 쳐들어갔습니다.
갈리아로 들어간 서고트족은 호노리우스의 요청으로 반달족을 공격하기 위해 히스파니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동안 로마 장군 콘스탄티우스는 갈리아를 어느 정도 평정한 뒤 421년에 공동황제로 선포되었습니다.
얼마 뒤 그가 죽고 나서 423년에 그의 아들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호노리우스의 뒤를 이어 455년까지 통치했습니다.

5세기 초반에는 로마 장군 아이티우스가 소규모 군대를 지휘하여 이민족으로부터 제국을 지키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였으나 여러 속주에 자리잡은 이민족을 물리칠 수는 없었습니다.
브리튼은 앵글족·색슨족·주트족에게 넘어갔고, 히스파니아는 수에비족·서고트족이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반달족은 428년 히스파니아에서 아프리카로 건너가 로마, 시칠리아, 비잔틴 제국의 서로마를 위협했습니다.
450년에는 훈족이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침략했으나 서부에 자리잡은 이민족의 도움을 받은 아이티우스에게
격퇴당했습니다.

454년과 455년에 아이티우스와 발렌티니아누스 3세가 차례로 죽은 뒤에는 게르만족 출신 장군이 정권을 장악했고
황제는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476년 게르만 출신인 오도아케르 장군이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위하고 스스로를 왕으로
선포함으로써 서로마 제국은 막을 내렸습니다.


한편 그러는 사이 아프리카에는 반달족 왕국이, 히스파니아·갈리아·루아르 지역에는 서고트족 왕국이, 그 북쪽으로는
살리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 왕국이 자리를 잡았으며 5세기말에는 강력한 두 왕국이 새롭게 들어섰습니다.
갈리아에서는 클로비스가 가톨릭으로 개종해 주교의 지지를 얻어 활발한 정복에 나서 큰 영토를 차지하고 프랑크
왕국을 건설했습니다.

한편 동고트족의 테오도리크는 동로마 황제 제노의 요청에 의해 오도아케르를 이탈리아에서 쫓아낸 뒤 494년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그는 고트족이 차지한 북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옛 제국의 제도를 유지했으며, 대외적으로는 프랑크 왕국이
지중해까지 팽창하는 것을 막고 동고트 왕국을 론 강 유역까지 팽창시켰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뒤 동고트 왕국은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이탈리아 재정복으로 멸망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몰락은 일반 국민의 낮은 생산 및 생활수준에 비해 고대 세계로서는 너무나 무거운 상부구조와 세금을 들
수 있습니다.
군대는 많은 유지비가 필요한 반면 규모는 충분하지 못했고 심지어 인구도 줄어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이민족의 대규모 침략이었습니다.

여기서 서로마는 몰락한 반면 동로마는 보존될 수 있었던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시기 동로마는 부유하고 인구도 조밀했으며 국가 구조도 서 로마보다 건전했습니다.
서로마는 소작인을 착취하는 대토지 소유자들의 손아귀에 놓여 있었고, 국민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이 없이 무관심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동로마는 또한 외부로부터 별로 위협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방어하기도 쉬웠습니다.
반면 서로마는 국경을 가지고 있어서 엄청난 비용이 드는 대규모 군대의 유지와 수많은 요새가 필요했고, 일단 변경이
침략 당하자 핵심지역인 갈리아와 이탈리아는 걷잡을 수 없는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6. 폼페이
발굴한 폼페이 시
돌로 포장된 도로
원형 경기장
방앗간
공공 수도 시설
사창가 벽의 춘화
순식간에 화산재에 덮힌 사람
석화된 사람 모습

화산재에 파묻힌 비극의 도시 폼페이(Pompei)는 서기 79년 8월 제정 로마시대에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로 번영과
쾌락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폼페이는 농업, 상업의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도 피서지와 피한지로 인기가 높았습니다.
이러한 폼페이가 전성기에 멸망을 하였으므로 현재 발굴되고 있는 자료들에서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BC 63년 대지진이 있었고, 기원 79년에는 베스비오화산이 크게 폭발했습니다.
그때 강진과 더불어 분출한 화산재가 무려 1m 가까이나 쌓였습니다.
시민 중에는 교외로 도망치는 사람, 집안에서 피신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마침내 계속해서 내린 비 때문에 분출한
화산재와 용암이 응결하면서 거리 전체가 마치 찌는 솥이 되면서 모든 것이 매몰되었습니다.
폼페이는 17세기에 도로 건설에 종사하던 건축가 몬타나에 의하여 발견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조직적인 발굴작업이 전개된 것은 1748년부터, 이 발굴 작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현재까지 3/5가
발굴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발굴작업을 통하여 돌을 깔은 포장도로,대리석과 벽돌로 지은 벽과 집, 수도와 목욕탕 등으로부터 당시의 훌륭한
도시계획과 소위 폼페이 양식을 알게 되었습니다.
출토품 중에는 당시의 생활과 문화를 알 수 있는 다양한 유적과 유물이 많습니다.
우선 광장과 주요 도로를 중심으로 한 고대도시의 형태를 살펴보면 극장, 원형 경기장, 도량형 검사소, 시청, 체육관,
하수도와 목욕탕, 레스토랑, 공중 화장실까지 갖춰진 각종 시설이 현대의 도시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도로는 7m 너비로 돌로 포장되어 있고 인도가 양 옆에 있어 당시의 변영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돈많은 상인인 베티의 집은 부유한 집으로 입구에 들어서면 풀장이 있고, 양쪽으로 금고와 침실이 있습니다.
도시 여러 곳에 사창가가 있는데 작은 방들이 있고 벽에는 춘화가 걸려 있습니다.
당시엔 성이 매우 자유로워 여자는 누구나 사창가에 가서 몸을 팔고 돈을 벌 수 있었으며, 죄악시 되지 않았습니다.

크레타와 폼페이, 성경에 나오는 소돔성까지 모두 하나님이 없어도 풍요롭고 행복한 세상이었습니다.
이 곳들은 모두 화산 폭발이나 지진에 의해 순식간에 멸망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 하나의 공통점은 모두 성이 자유로워 소돔은 동성연예가 횡행했고, 크레타는 여인들이 가슴을 드러내고 다닐 정도로
성이 자유로웠고, 폼페이는 사창가가 번성했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것은 참으셔도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하는 것은 참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현재에도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성적으로 타락해 동성연예와 성매매, 변태, 음란물이 넘치고 있습니다.



7. 로마의 기독교 박해

초기 기독교는 모진 박해의 파고를 헤치고 살아남았습니다.
4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의 밀란칙령과 데오도시우스의 기독교 공인으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기 전인
1-3세기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습니다.
그렇지만 모진 고문과 죽음의 위협도 결코 그리스도인을 굴복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부활에 대한 확신, 임박한 재림의 주를 기다리는 강인한 믿음과 대속의 주(Lord)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
대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였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역시 "진실로 그 분은 부활하셨습니다"였습니다.
이처럼 그들의 신앙은 부활과 재림에 대한 소망과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a)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한 이유
1. 기독교인들이 무신론자들이라는 이유에서입니다.

로마의 종교는 그리스 신앙에 바탕을 둔 다신교였습니다.
원칙적으로 로마의 종교정책은 각 지역의 고유 종교를 인정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로마에는 각지에서 유래한 온갖 종류의 신전들이 즐비했습니다.
특히 헬라와 페르시아 등의 동방에서 유래한 온갖 밀교들이 성행했고 그 신들에 대한 축제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제1계명을 이유로 그 신들에 대한 제사를 거부했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그 하나님뿐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의 온갖 신들에 대한 숭배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무신론자들이라고 매도되었습니다.
2. 신격화된 황제에게 경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온갖 종류의 신들 중 로마의 황제는 태양신의 아들로서 마땅히 숭배의 대상이었습니다.
동시에 황제는 모든 사람들의 정치적인 황제였습니다.
누구든 유일한 황제와 황제의 나라를 벗어나서는 존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황제 숭배를 거부하였음은 물론, 재림의 주로 오시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바라보고 예수를
만왕의 왕이라 믿었습니다.

황제도 예수의 나라에서는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시민권이 로마에 있지 않고 장차 도래할 예수의 나라에 있다고 공언했습니다.
이것은 로마를 전복하고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다는 음모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치적 모반이 일어날 때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배후세력으로 지목되었다.
3. 그리스도인들이 반 사회적이고 부도덕한 무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이유 등으로 감시와 박해를 받던 그리스도인들은 드러내 놓고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택한 장소는 자연히 은밀한 장소로 로마인들이 꺼리는 지하무덤인 카타콤베였습니다.
카타콤베으로 숨어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음해는 그리스도인들이 무덤 속의 시체를 먹는다는 것과 은밀한 곳에서
남녀가 혼음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b) 카타콤베
카타콤베 (Catacombe)
카타콤베(Catacombe)는 초기 기독교 인들의 모였던 지하 공동묘지를 지칭합니다.
고대 로마의 법에 묘지는 성벽 밖에 쓰도록 되어 있었고 로마 귀족들은 성벽 밖에 성을 지어 묘를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빈민계급이었던 기독교인들은 귀족들의 풍습을 따를 수 없어 그들만의 묘지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폐광이 된 골재 채석장이라든가, 호의적인 독지가의 지하 가족묘지에 조상들을 묻게 됩니다

여기에는 돌무덤에 묻힌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형성된 기독교인의 지하 공동묘지는 기독교 박해 때에 중요한 피신처가 됩니다
묘지에는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로마법을 이용하여 지하 공동묘지에 숨게 됩니다.
이곳에 피신한 신자들은 함께 모이게 되고 예배활동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후에는 로마 군병들이 이 곳까지 들어오게 됩니다.
그런가 하면 군병들 중에는 오히려 그들로부터 전도되어 신자가 되고 동료 군병으로부터 순교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로마 주위에는 약 30개의 카타콤베가 있습니다


c) 로마의 기독교 박해 역사
1. 네로 황제 박해 (54~68)

네로 황제가 재임하던 주후 64년에 발생한 대화제 사건은 기독교 역사에 잊을 수 없는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그가 통치하던 주후 64년 네로는 로마에 발생한 대화제 사건의 원인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린후 극심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일반들에게 기독교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네로는 자연스럽게 로마의 대화재 사건을
기독교인들에게 돌려 버릴 수 있었습니다.

수에토니우스는 기독교인들을 "새롭고 사악한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들의 단체인 그리스도인들 "이라는 표현했습니다.
타키투스는 그의 연대기에서 네로가 광적인 잔학성을 충죽시키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죽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유세비우스도 네로의 '극단적인 광기' 때문에 그의 생모와 아내 , 수천명의 사람들을 죽었다고 했습니다.
다음 타기투스의 연대기에서 네로의 잔학성과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짐승의 가죽으로 싸서 개들에 의해 찢기우기도 하고 십자가에 못박혔다 . 혹은 화형이 되어, 해진후
밤을 밝히는 일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네로는 그 광경을 위해 자신의 정원을 개방하고 자신은 기수의 복장을 하고
사람들과 어울리거나 아니면 마차를 몰고 다녔고 그동안 서커스에스는 쇼가 공연되었다.
그러므로 가혹하고 본보기적인 형벌을 받기에 마땅한 범죄자들이라 할지라도 사람들 사이에 동정심이 생긴 것은 사실상
그 일이 공중의 선을 위해서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광적인 잔학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그들이 죽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2.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박해 (161~180)

'명상록의 저자'이며 스토아 철학의 대변자인 아우렐리우스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인 경향을 나타내 보였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첨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를 참혹하게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어져 유혈이 낭자했으며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나왔습니다.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습니다.
박해의 강도가 점점 심해졌지만,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갖은 고문과 박해속에서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습니다.

이 박해로 인해 게르마니투스라는 독실한 청년이 순교했습니다.
지방 총독의 간곡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어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죽음에 대한 본성적인
두려움을 극복하였습니다.
게르마니쿠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사나운 짐승의 밥이 되어 마침내 이 불의한 세대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박해는 시간이 흐르면서 강화되었고 마르쿠스 아우레릴우스 황제치하에 폴리갑이 서머나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의 순교의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총독은 그에게 ' 맹세하시오. 그러면 당신풀어 주겠소. 그리스도를 비난하시오.'라고 재촉했습니다.
폴리갑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86년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왕 그리스도를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이윽고 화형을 위해 마련된 도구들이 그에게 정착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를 큰 못으로 말뚝에 고정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분께서는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을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니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에, 그리고 그리스도의 잔에 참여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않는 축복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다고 여기어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가납될 만한 제물로서 당신이
보시는 앞에서 받아들여지기를 바랍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하여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 성자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히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통치기간인 177년 심한 박해가 고울지방에서 일어았으며, 이후 250년까지 박해가 간헐적으로
계속되었다.
그후 막시미누스 통치 3년후에 간헐적으로 진행된 박해이후 평화가 잠시 도래하였습니다.
박해가 중단된 기간은 복음전파를 위한 기회가 되어 3세기 50년동안 수천명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공동체는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3. 데시우스 칙령과 전국적인 박해 (249~251)

데시우스 황제 아래서 기독교가 그 때까지 직면했던 박해 가운데 가장 혹독한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250년 데시우스 황제는 지방관료와 행정관들에게 정해진 날에 필요한 장소에서 제사를 총괄하도록 명령을 내렸고,
제사를 드린 사람들에게 제사 증명서인 리벨루스를 발급하였습니다.
데시우스의 명령앞에 교인들은 순응, 타협, 거부, 도피 중 하나를 택해야 했습니다.
이 때 로마 교회 감독 코르넬리우스, 예루살렘의 감독 알렉산더, 안디옥의 감독 바빌라스가 순교했습니다.
4. 디오클레티안 황제 박해 (284~305)

디오클레티안이 황제는 이교도이자 기독교를 미워한 그의 모친 영향을 받아 교회에 박해를 가해기 시작했습니다.
전국에 칙령을 내려 교회들을 부수고 성경을 불태우며 신자들의 직책들을 박탈하고, 성직자들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기간동안에도 상당히 많은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니코메디아에 교회를 박해하는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자, 훌륭한 가문 출신이며 직위도 존경을 받던 사람이 거룩한
열정과 뜨거운 믿음으로 인해 분기하여 나붙은 칙령을 떼어내어 조각내 버렀습니다.
그 일은 모든사람에게 알려졌으며 대담한 행동을 한 그 사람은 영혼이 떠나는 순간까지 평정을 잃지 않았다고 합니다.
5. 갈레리우스 황제 박해 (305~311)

디오클레티안 사위 갈레리우스 황제도 사정없이 교회를 핍박하였으나 8년이 되던해부터 박해를 완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태도가 바뀐 것은 그의 중병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몸에는 종양이 생기며, 창자속이 곪게 되었으며 그의 몸에는 지독한 악취가 나게 되었습니다.
투병이 계속되면서 갈레리우스 황제는 자신이 경건한 사람들을 대적하여 범한 죄에 대한 가책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황제는 먼저 자신을 돌이켜 반성하면서 무엇보다 하나님께 자신의 죄를 자백하게 되었습니다.
갈레리우스는 자신의 병이 기독교를 핍박했기 때문에 왔다는 기독교인들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즉시 기독교 박해를
중지하라는 칙령을 발표하게 되었습니다.
이 칙령가운데에는 기독교인들은 서들러 교회를 재건하여 예배를 드리며 제국의 안전을 위해 기도하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