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의 칼빈과 칼빈주의

2010. 3. 12. 00:27교회사자료/10.세계사

네덜란드의 칼빈과 칼빈주의

 

 

칼빈주의는 그 이상은 아니라 할지라도 세계의 다른 국가만큼은 네덜란드에 파고들었고 영향을 미쳤다.  네덜란드는 칼빈주의의 삶, 사고, 부흥의 중심지였고 네덜란드 칼빈주의는 여러 세기에 걸쳐 개혁 교회에 많은 공헌을 했다.  그들은 16세기에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투쟁할 때 용기와 신실의 모범을 제공했으며 17세기초에 열린 도르트 교회회의에서 알미니우스주의의 위협에 맞섰다.  이제 네덜란드의 교회와 사회에 대한 칼빈의 초기 영향에서부터 탐구하고자 한다.
칼빈주의 이전의 개혁
로마 카톨릭 교회를 개혁하려는 관심은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전에 네덜란드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다.  오랜 역사에 걸쳐 적극적인 개혁과 교회 내의 악습을 고치려는 요구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는 관심의 토대를 마련했다.
다수의 네덜란드의 따른 첫 번째 프로테스탄트의 형태는 재세례파였다.  이 초기의 재세례파들은 네덜란드 대중에게 깊이 뿌리를 내렸고 로마 카톨릭 당국의 박해를 견뎌 내었다.  재세례파는 1530년대와 1540년대의 네덜란드에서 주도적인 형태였지만, 결국 칼빈주의가 네덜란드 개혁의 가장 보편적인 표현으로 재세례파를 대신 했다.
칼빈과 네덜란드의 접촉
존 칼빈은 창조적인 시절을 제네바에서 보낸 프랑스인 이었지만 교회에 대한 관심은 프랑스나 스위스에 국한되지 않았다.  그가 쓴 수많은 서신에는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 개혁 운동을 진출시키려는 관심이 표명되어 있다.  또한 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저지대 국가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네덜란드에 미친 칼빈의 영향은 개인적인데 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잘 알려지고 널리 배포되었던 그의 저서들은 개혁적인 신앙을 퍼뜨리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기독교 강요」최종판이 1560년 네덜란드어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불링거(Bullinger)의 「열 편의 설교들」이 출간된 이래 개혁자가 출판한 가장 영향력 있는 책이었을 것이다.  또한 1543년에 쓴 "로마 카톨릭교인들 사이에서 복음의 진리를 아는 신앙인 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짧은 논문" 에서 칼빈이 표현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비전은 네덜란드 개혁 교회에 심대한 자취를 남겼다.  이 논문에서 그는 희생의 대가가 무엇이건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의해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난 받는 교회들
1540년대부터 1560년대에 교회들은 박해를 당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대부분 비밀리에 행동하였다. 그래서 그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데 쓸 수 있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이 시대에는 두 가지 점이 분명히 나타났다.  첫째로, 개혁 교회 내부에 실천과 교리에 대한 현저한 입장 차이가 드러났다.  둘째로, 개혁 교회가 박해에도 불구하고 회원 수나 조직면에서 수 십년간 현저하게 성장한 것은 분명했다.
1560년대 후반에서 1570년대 초반에 네덜란드 개혁 교회 사이에 더 큰 조직과 교리적 권징을 위한 중요한 운동이 등장하였다.  결연한 노력으로 교회에 대한 칼빈의 비전이 이루어졌다.
개혁 교회의 통일성과 번영에 대한 관심은 1571년 동 프리슬란드의 엠덴(Emden)에서 모인 전국 교회 회의 소집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 교회 회의는 공식적으로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교회 질서에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교회를 위한 교리적 규범으로서 벨기에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을 채택하였다.  이 신앙고백 문은 존 칼빈의 감독 아래 쓰여졌던 1559년의 프랑스 신앙고백 문을 주로 모범을 삼았다.  이것은 그 당시 당국이나 시민들에게 불신의 대상이었던 재세례파들과 개혁 주의를 확연하게 분리시키려고 노력하였고, 개혁 주의 기독교의 성경적이고 보편적인 성격을 증명해 보이려 했다.
또한 엠덴 교회 회의에서 언급되었던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문도 네덜란드 개혁 교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새 국가에서의 교회
네덜란드의 정치제도는 매우 애매모호 한 상태였다. 1584년 북부 일곱 개의 주로 구성 구성된 연합 주는 스페인과의 전쟁이라는 긴박한 상황에 대처하는 가운데 공화국으로 발전하였지만 연합 주들이 실제로 독립을 쟁취한 1608년까지 전쟁은 질질 끌리었다. 
연합 주에서의 개혁 교회의 위치 또한 역시 불확실하였다.  전국 교회의 소집 문제를 놓고 국가와 교회 사이에 잠재적인 투쟁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개혁 교회는 그 규모에  맞지 않는 상당한 권력을 지니고서 각 주들의 종교 업무를 빠르게 장악하였다.  개혁 교회가 힘을 행사하게 된 것과 교회와 국가가 몇 가지 문제에 대해 긴밀하게 협력했다는 것은 교회가 공식적으로 국가 교회가 되었음을 의미하지 않았다.  교회와 국가가 어떤 문제에  관해서는 친밀하게 협력하였던 반면에 교리 적인 권징문제에 있어서는 긴장 관계가 계속되었다.
알미니우스와의 대결
연합 주의 교회와 국가간의 긴장은 16세기에 상대적으로 완화되었다. 그러나 권징문제에 관한 차이는 네덜란드 사회를 깊게 분열시키거나 날카로운 대립을 야기시킬 가능성이 남아 있었다. 그 가능성은 알미니우스 논쟁으로 인해 현실로 나타났는데, 이 논쟁은 매우 격렬해서 연합 주들을 내란 직전까지 몰고 갔다.
알미니우스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은총을 유지하는데 관심을 가졌고 타락 전 예정설이 하나님을 죄의 창시자로 만들려 한다고 우려했다.  그는 기독교 생활에서 믿음과 성결이 중요함을 강조했고 칼빈주의 신학의 몇 가지 요소들이 도덕을 와해시킨다고 우려했다.  또한 그는 믿음에 이르기 위해 특별한, 효력 있는 은총이 필요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고, 성도의 견인에 관한 교리에 이의를 제기했다.
알미니우스가 죽은 뒤 그를 추종자, 요한 위텐보가르트가 이끄는 43명의 알미니우스주의 목사들은 1610년에 회합을 가지고 탄원서 즉 항변서(Remonstrance)를 작성했고 자신들의 지위를 보호해 줄 것을 네델란드정부에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5가지로 천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하나님은 개개인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복종하는 사람들의 집단을 선택했다.  둘째 그리스도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다.  셋째,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넷째, 그러나 믿음의 선물을 거부할 수 있다.  다섯째, 그들은 성도의 견인에 관한 교리를 확신하지 못했다.  이 문서는 엄격한 칼빈주의자들에게 격렬한 반발을 일으켰으며 소위 반 항변서로 일컬어지는 7개항의 진술을 나오게 했다.  이때부터 항변파와 반 항변파 두 집단이 당시 네덜란드 사람에게 널리 알려졌다.  
도르트 교회회의
알미니우스 논쟁을 종결짓기 위해 1618년 11월 도르트에서 전국 교회회의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칼빈주의자들은, 공정한 심문을 받을 수 없으며 단순히 지역적인 개인 문제가 투쟁을 야기시켰다는 항변파의 주장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하여 재판 절차의 공정성을 보증하고 증명하기 위해 유럽 전역의 개혁 교회로부터 대표를 초대하기로 결정했다.  외국의 대표단은 교회회의의 진행 과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교회 법령의 최종 형태는 항변파의 5가지 조항에 대한 응답으로 5개 교리로 구분되었다.  항변서의 3조항은 4조항과의 관계에서만 오류가 있기 때문에 3,4조항을 하나로 묶었다.  교회 법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하나님이 선택하는 목적은 죄인의 유전이나 행위에 의해 구애받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을 구원하기에 충분하지만 오직 선택된 자들에게만 그 효력이 발행한다.  타락한 인간은 자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저항할 수 없는 성령을 선택된 자에게 믿음을 선물로 준다.  의롭게 되고 중생된 이들은 끝까지 견인되고 영화된다.  이 다섯 가지 교리는 칼빈주의의 요지라고 불린다.
법령 이후에서 교회회의는 세 가지 주요 논점을 다루었다.  첫째, 교회회의는 교회를 위해 벨기에 신앙고백의 최종판을 확증했다.  둘째는 네덜란드 교회 내에 엄격한 청교도식 안식일 준수와 덜 엄격한 대륙식 준수 사이에 고조되는 긴장에 대한 응답이다.  셋째로 교회회의는 권징 자체를 교회의 권리로 세우려 했던 칼빈의 관심사를 구현하기  위해 새로운 교회 질서를 채택했다.
도르트 교회회의는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신학에서 정통 칼빈주의의 승리를 확정지었고 윤리 문제에서 권징을 실시하는 교회상에 대한 칼빈주의의 열의를 드러냈다.  그러나 도르트 교회회의의 충고가 장차 네덜란드 교회와 사회에서 발생하는 사건의  실제적인 과정을 항상 결정지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르트 교회회의의 그 조처와 결론을 존 칼빈의 비전을 새롭게 표현했고 개혁 주의 기독교 역동성을 보여주었으며 교회의 칼빈주의가 힘을 받고 갱신될 수있는 풍부한 지혜의 원천을 제공했다.
경건주의와 스콜라주의
도르트 교회회의는 17세기초에 네덜란드 개혁 교회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신학적 문제들을 해결하였다.  그러나 그밖에도 교회가 조치를 취해야 할 과제와 기회가 있었다.  교회는 계속해서 교인들의 생활과 경건을 눈여겨보았고 교인들의 신학을 명료화했으며 네덜란드 경계를 너머 복음을 전파하라는 선교의 명령을 발전시켰다. 
강한 엄격주의에 대한 확신을 지녔던 후기 경건주의자들은 더 교리와 생활 사이의 균형을 잃는 경향이 있었고, 다른 이들이 감정의 역할이나 종교체험을 너무 강조한 반면에 엄격한 생활을 과도하게 강조했다.  경건주의자들이 교회의 도덕적, 영적 생활을 증진시키려고 노력하는 동안, 다른 이들은 교회가 조직신학 분야에서 계속 작업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개혁 신학을 설명하고 다듬는 것은 로마 카톨릭 교회나 소지니주의 등에 대항해 열정적인 논쟁을 벌이던 그 당시에는 필요 불가결했다.  그러나 17세기가 진행되면서 개혁 신학자들은 자신들의 저서에서 새로운 철학적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데카르트의 철학이 대학교에서, 개혁주의 조직신학을 표현하기 위해 때때로 이용되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대립하게 되자 데카르트 철학의 출현은 개혁주의 교의학자들에게 특별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때문에 신학은 그 당시의 논쟁적, 철학적 경향과, 신학이 과학이라는 개혁 주의의 기본적인 확신에 대한 반발로 보다 전문적, 스콜라주의적 방향으로 선회했다.
보에티우스(Voetius)
네덜란드에서 가장 뛰어난 신학자였던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의 생애와 활동은 스콜라주의와 경견주의의 조화로운 연합을 증명해주며 그 당시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여러 측면을  반영해 주고 있다.  그는 철학적 입장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 였고 그의 선생이었던 고마루스를 본받아 엄격한 칼빈주의자가 였다.  1640년대에 그는 네덜란드 대학교들에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데카르트 철학을 공격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데카르트는 개인적으로 "매우 유명한 사람 기스베르투스 보에티우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보에티우스의 공격에 응답했다.
17세기  변화로 인해 네덜란드의 삶은 여러 모로 영향을 받았다.  연합 주들은 주도적인 유럽국가들중 하나로 부상했고 상당한 정치적 안정과 안보를 이룩하였다.  또한 세계 무역 시장을 석권하면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고 예술과 문학이 만개하여 렘브란트나 포델같은 위대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보에티우스는 새로움과 다양성에 엄격하게 반대 입장을 고수했지만 상당히 중세적인 견지에서 완전한 개혁 주의 사회에 대한 자신의 이상을 부단히 추구했다.
선교
교회가 씨름하던 신학과 경건이 라는 내적인 문제 이외에, 무역업으로 동양에서 네덜란드가 경제적으로 성공을 거두자 이에 힘입어 외국 선교에 대한 새로운 기회가 교회에 열리게 되었다.     동방이 그들에게 열리자 교회는 선교 임무에 관한 사상에 자극을 받았다.  아드리안 사라비아(Adrian Sravia)는 그의 저서에서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선교에 대한 네덜란드의 관점을 더 두드러지게 나타낸 사람들은 예안 타핀, 윌리암 텔링크, 유스투스 헤우르니우스,보에티우스 같은 17세기 경건주의자들로서 교회의 사역에서 선교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네덜란드 사상가들에게서 처음으로 프로테스탄트 선교론이 나왔다.
계몽주의, 혁명, 부흥
18세기 네덜란드의 지적, 종교적 분위기는 17세기보다 더 빠르고 현저하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계몽주의가 배태한 개인주의와 합리주의가 네덜란드 사회와 교회에 침투해 왔다.  계몽주의는 대혁명 중이던 프랑스와 네덜란드 연합 주들이 전투를 벌이던 1793년에 네덜란드에서 크게 유행했다.  승리한 프랑스는 네덜란드를 1795년부터 1806년까지 바타비아 공화국으로 재편성했다.   새 공화국은 교회와 국가를 근본적으로 분리시켰는데 이로 인해 성직자들은 윤리적,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했다.
교회의 외형상 구조는 변화된 반면 엄격한 칼빈주의자들은 1820년대 유럽 주요 부분에 영향을 미친 대각성운동,  즉 종교 부흥 운동으로 영적 갱신을 체험했다.
19세기 초반에 네덜란드 개혁 교회 내의 분쟁은 네덜란드 사회의 불안정한 사회, 문화적 상태를 반영했다.  증가하는 다원주의, 세속 주의, 사회 분열은 근대적인 혁명 이후 네덜란드의 정신적 부산물이었다.  이 새로운 문화적 환경에서 칼빈주의 사상가들은 근대 세계의 문제에 직면했고 개혁 주의 사상과 생활의 발전에 새로운 전기를 열었다.  후에 대각성운동에 영향을 받은 흐룬은 혁명적 절대주의나 혁명적 절대주의의 모두를 거절하였다.  그는 사회의 주권은 국가, 백성, 전제군주가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유래하며 하나님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카이퍼
흐룬의 영향은 네덜란드의 삶의 여러 영역에 흡수되었지만 그의 가장 신실하고 능력 있는 협조자이며 계승자는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였다.
그는 심오한 사상가, 위대한 조직가, 일반 대중과의 효율적인 의사 소통자였다.  실제로 그는 잡지에 기고하거나 수많은 신학 저서를 쓴 힘있는 작가로서 재능을 발휘하였다.  그의 작품 전편에는 그의 기본적인 확신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  그는 기독교 사상과 비기독교 사상간의 근본적인 대립을  주장했다.  그는 "그리스도인은 성경과 자연의 계시에 기초하여 하나님과 그의 세계를 특별히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세사에서 죄의 결과가 억제되어 왔으며 지리는 비 그리스도인의 저서에서 사용되고 나타날 수 있다고 보았는데 이 사상은 비칼빈주의자들과 정치적인 제휴를 허용하였다.
대립 혹은 순응
카이퍼의 정신과 저서는 네덜란드 교회와 사회에 활력 있는 힘으로 칼빈주의를 갱신하고 재활성화 하였다.  그의 추종자인 아프샤이딩 목사의 아들인 바빙크는 카이퍼와 함께 칼빈주의를 부흥시킨 위대한 신학자중 한 사람이다. 그의 가장 뛰어난 저서는 명석한 조직신학 작품인 개혁 교회 교의학 이었다.  또한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자 가운데 가장 심오한 사상가는 헤르만 도에베르트 일 것이다. 그는 대립과 영역 주권에 대해 강조했던 카이퍼의 전통을 따라 개혁 주의 신학을 풍부하게 발전시켰다.
도예베르트가 철학 분야에서 카이퍼의 사상을 확장하는 동안 신학 분야에서 카이퍼와 바빙크의 가장 유명한 계승자는 벌카우어(G. C. Berkouwer)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 수 십년간의 네덜란드 칼빈주의 전통에서 우회하는 한 상징적인 모습이다.  강하고 전통 지향적이고, 권징이 실시되는 교회와 정의로운 사회에 대한 비전을 가졌던 칼빈과 그의 추종자들의 비전이 쇠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역사가는 예언가가 아니다.  그는 현재의 쇠퇴가 일시적인 후퇴인지 칼빈주의 근원으로부터 영원히 갈라서는 것인지 보기 위해 기다릴 뿐이다.  네덜란드 칼빈주의의 발전을 따르는 추종자들은 장래에 네덜란드 칼빈주의에 새로운 형태를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건 칼빈주의는 분명히 네덜란드의 삶과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라는 사실은 존속될 것이다

'교회사자료 > 10.세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 로마  (0) 2011.03.18
세계사 연대표   (0) 2011.03.18
메소포타미아의 종교  (0) 2010.03.12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   (0) 2008.12.27
고레스의 칙령이 발견된 '악메다'  (0) 2008.1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