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고대사 개관

2012. 2. 25. 15:03교회사자료/10.세계사

서양고대사 개관

 

목차

◎서양고대문명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고대 문명의 발전과정/ 고전고대란? 1. 첫째-지역, 공간적인 물음/지중해 세계의 개념 2. 시간적인 구분

 

◎그리스-로마사 시대구분

그리스사 시대구분/ 로마사 시대구분 (BC 8세기-AD 5세기) a. 로마공동체CIVITAS의 탄생과 왕정기(BC753-509) b. 공화정 초기와 중기(509-2세기초) c. 공화정후기 (B.C 2세기-1세기) d. 로마제정 BC 1-A.D 2세기(제정전기) e. 제정후기(3-5세기)/ 중세와의 경계

 

◎그리스의 문화

문화창조의 원동력/ 그리스 문화의 특징/그리스문명의 세계사적 의미와 교훈/ 그리스-로마문화의 차이점

 

◎로마제국의 세계사적 의미

로마발전의 배경 1. 로마정신2. 로마의 외형적 발전요인/ 로마문화의 특징

 

로마제국의 문화사적 역할

로마제국이 문화에 끼친 영향 1. 로마가 헬레니즘사상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 2. 그리스와 오리엔트가 로마에 끼친 영향 3. 정치와 문화의 융합

* 헬레니즘의 매개자로써 마호멧트 교도(아랍인)

 

그리스문명의 성립과 발전

1.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문명개요 2. 크레타문명 개요 3. 미케네문명 개요

 

그리스문명의 성립

1.그리스인의 이주  2. 폴리스의 성립 (B.C.8-6세기) 그리스의 사회  3. 폴리스의 구조  4. 아테네와 스파르타 ㄱ. 아테네  ㄴ. 스파르타

 

그리스 세계의 발전

1. 페르시아 전쟁(B.C. 492-479: 3차)과 아테네의 발전 2. 아테네의 황금기 3. 펠로폰네소스전쟁( B.C. 451-405)  4. 폴리스의 쇠퇴와 종말 *그리스 도시국가의 몰락원인  

 

그리스 문화

그리스의 문화의 특징 *신화와 종교 /그리스 신화/ 그리스종교 /그리스 철학과 정치사상/ 관념론의 발전/ Socrates (470-399)/ Platon(427-347)/Aristoteles(384-322)/ 문학 및 연극과 예술 /그리스문학/ 그리스 연극 /그리스 미술 및  건축과 조각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1.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과 제국의 분열  2. 헬레니즘시대의 사회와 문화 정치, 경제/ 문화/ 현실주의사조

* 로마의 지중해대국 발전과정/로마의 대외정책

 

로마제국의 흥망사

1.  로마공화정의 발전 a. 로마공동체CIVITAS의 탄생과 왕정기(753-509) b. 공화정 초기와 중기(509-2세기초) 2. 로마공화정의 성립 3. 로마의 반도 통일 4. 로마의 발전/ 로마 시민공동체의 해체(공화정후기 B.C2세기-A.D. 1세기) *지중해의 세계 개관/ 로마의 대외정책/포에니 전쟁(Punic War 264-146 B.C) 5. 로마공화정의 변질/로마사회의 변질 6. 로마의 새로운 질서/ 3두정치/제1회 삼두정치/ 케사르의 개혁/제 2차 삼두정치/악티움해전 7. 로마제정의 발전  * 로마의 평화 Pax Romana 8. 제정시대의 사회  9. 로마문화와 기독교

 

로마법의 기원과 발전

로마법/ 만민법/시민법과 명예법/공화정시대/고전시대/제정후기/ 동로마 법률학교와 고전주의의 부활/중세의 로마법(주석학파)/로마법계수운동

 

로마제국의 붕괴원인

정치적 원인/황제의 계승문제/ 군대의 조직력약화/군대의 질적 변화/ 정치적 변화/게르만의 이동/ 게르만의 침입/게르만의 이동에 따른 정치경제적 변화/ 경제적원인 (근본적 원인)/로마의 경제제도/정신문화적원인/기독교의 성장/ 기독교박해/기독교의 성장과정/사도 바울의 등장/ 유태교의 쇠퇴/교부시대

 

이슬람제국과 비잔티움의 발전

 

 

◎서양고대문명

 

서양 고대문명? 3가지 문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리스문명, 헬레니즘 시대의 문명, 로마문명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 서구 문명의 양대 기본적 토양

그리스-로마적 전통/ 유대-기독교적 전통; 현세주의 물질문명/ 초현실주의 정신문명; 인간주의/신본주의; 낮과 밤의 이질적, 대조적이지만 상호보완적 관계

 

 

 

고대 문명의 발전과정

1.에집트-메소포타미아, 오리엔트문명에 세례를 받고 2. 고유한 독자문명 (그리스 문화를 중심)을 창조: 오리엔트의 지나친 종교와 신화적인 면에서 탈피.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중시, 자연과의 조화의 세계를 추구. 3. 그리스 문명은 다시 오리엔트문화와 재접목(헬레니즘의 문화로 계승)  4. 로마문명으로 계승 발전 (헬네니즘+기독교문명)

 

 

 

고전고대란?

-18세기 말 독일 낭만파운동의 신조어: 그리스-로마시대와 동일-르네상스 이후의 가치관과 역사의식의 소산: 그리스-로마세계= 고대사회-19세기부터 그리스-로마 역사를 총칭하는 말 (문화, 문명사적 의미의 확대해석)-특히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음: 고대-중세-근대의 구분(서구 보편문명사적 관점)사회경제적인 요인, 소유형태, 생산방식, 사회구조에 주목한 사회경제사적 관점 

 

 

1. 첫째-지역, 공간적인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서양 고대를 개관할 수 있다.

 

서양고대사? 

지중해의 역사와 그 주변지역과의 정치적, 문화적 관계로 생성 발전된 역사를 말한다.  *즉 서양고대사는 지중해 세계의 형성과정이 씨줄역할을 하며,  그리스로마사회의 내적 발전이  날줄역할을 하면서 짜여진 역사와 문화를  뜻한다.

 

 

*지중해 세계의 개념

특징 -그리스-로마사의 동질성과 연속성을 포괄하는  하나의 역사단위-지중해의 세계는 작은 문명으로부터 출발 지중해 전체를 포괄하는 세계제국으로 확대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며, 주변부의 다른 문명과의 관련 속에서 고유한 전형적인 제도와 이념을 발전시켰다. 예) 시민공동체, 민주주의와 노예제, 자유와 정의의 이념  -이지역의 내적 통일은 제 민족적인 특성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수많은 문화교류를 통해 이루어 졌다. 

 

 

*고대세계의 통일사상은 정치적, 군사적 통일이념이 아니라, 항상 문화적 영역 안에서 가능하였다.  *고대세계란?   역사적인 통일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직,간접의 바다와 국경을 넘어서는 일종의 정치적 문화적 교류로 이루어진 세계이다. (특히 -지중해의 해양적 지리적 특수성이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스-로마가 지리적으로 오리엔트와 다른 면 (자연적 조건: 지중해식 기후 여름에 고온건조, 겨울: 온난다습. 해상을 통한 교통수단이 발달* 공간적으로 엄청난 동서팽창:  스페인부터 (지불롤터해협) 프랑스연안-베네룩스-영국본토-북부아프리카(이집트포함)-다다넬스- 소아시아(터키) 흑해, 시리아, 팔레스티나-페니키아-바빌로니아(메소포타미아:이라크) 페르샤(이란), 서파키스탄, 카자흐스탄, 아프카니스탄, 간지스강유역 까지 

 

 

*알레산더대왕과 카이사르의  세계제국의 이념을 달성키 위한 공간으로서의 지중해의 세계를 연상하라. 알렉산더대왕: “내가 만약 더 젊었더라면 인도까지 제패하였을 터인데...” 그의 이름에 따른 수많은 도시( 알렉산드리아)가 오늘까지 존재한다. 그의 제국: 나일지역부터-겐지스 지역까지 확대-중세이후  인도제국 및 중국의 영향권인 카시미르-타슈켄트지역이 아랍, 모슬렘세력에 대항한 점을 주목하라. 로마와  카시미르에서의 예술의 상호관련성을 생각해 보라. 



2. 시간적인 구분

 

고대 연구의 문제점: 초기 소아시아와 이집트 문명과 깊은 연관시켜 파악해야 한다.

 

중세와의 경계

-3가지 모두 정치적, 교회사적인 의미-니케아 종교회의 325, 훈족의 침임(375), 서로마제국의 멸망( 게르만 용병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한 로물루스 아우구수툴루스의 폐위 476):  495년*중세란? 고대문명의 단절이라는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 고대문화, 고대국가, 고대사상의 종말  -정치세력의 새로운 그룹화(지방 세력의 등장), 새로운 사상과 가치관이 형성(기독교),   새로운 경제시스템(봉건제도)

 

6세기 말/ 7세기 초 중세적인 요인들이 결정적으로 나타남-572년 랑고바르덴족에 의한 파비아점령-634 아랍인에 의한 서구침입 (마호메트 사후 2년 동유럽을 넘어). 이에 따른 영향: 오리엔트의 커다란 세력에 대항하는 서구적인 헬레니즘문화-칼 마르텔: 칼 대제의 할아버지: 732년 투르와 프와티에 (파리근교)에서 아랍세력을 격퇴-칼 대제는 새로운 서구에서의 황제등극 800년*중세의 정치적 역사: 비잔티움, 로마교황, 황제의 3파전의 양상으로 발전 


 

 

 

 

◎그리스-로마사 시대구분

 

그리스사 시대구분 (언어적)


1. 그리스 자유국가시대 (BC 8-4세기)

해외식민시대:(도시국가의 형성-정치제도가 급속히 완비되는 시기)  폴리스(정치적 단위): 도시국가( 시민의 다수는 농민): 근대적 읍수준 100-200개 정도수준.  암흑시대 (BC 10-8세기) 이후 생성. 2. BC 6-4세기: 페이시스트라투스-클레이테내스, 펠리클레스 전성기: 황금기(그리스 문명)알렉산더에 의한 멸망


II.마케도니아시대: B.C. 338-146

BC4-3세기: 정치적 쇠퇴기: 문화적 반전기(헬레니즘의 영향) 마케도니아의 통치시대: 클레오파트라의 사후 로마에 의한 이집트 병합까지 (악티움해전 BC 27년)


III. 로마제국의 시대에 포함 (BC 146 이후)

 

 

로마사 시대구분 (BC 8세기-AD 5세기)

 

 

a. 로마공동체CIVITAS의 탄생과 왕정기(BC753-509)

귀족이지배한 도시공동체-3000년경 인도-게르만의 일파: 이탈리아인이 정주시작-기원전 8세기 티베르강 유역 라틴의 작은 촌락 로마가 건설(라틴인)-초기 에트루리아Etrurians에 지배이후 독립도시국가의 형태를 유지 510년경부터:  이후 1000년의 세계제국의 수도로 변모-그리스문명의 영향(종교,  제도, 건축, 도로건설, 도예)-부족국가: 씨족Gens, 종족Curia 부족Tribus으로 구성  사회적 신분: 혈통귀족Patricii 평민Plebs 예민Clientes 노예Servus

 

b. 공화정 초기와 중기(509-2세기초)

로마시민공동체의 성장  -초기로마: 로마공화정은 6세기이후-귀족(대토지소유)이 실권장악-통치와 군사권은 임기 1년의 2명의 통령Consul-전권은 귀족대표기관인 원로원Senatus이 장악-평민: 중소농민이 주축, 참정권이 박탈

 

c. 공화정후기 (B.C 2세기-1세기)

로마시민공동체의 발전 및 쇠태-포에니전쟁: 반도통일이후 (지중해진출모색) 1차-3차: B.C 3-2세기-지중해의 세계는 당시 군웅활거시대  알렉산더사후 중동, 이집트,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페니키아의 카르타고로 분열   로마의 지중해 진출의 결정적 방해요인 1-2차 3두정치: 케사르, 케사르 사후 BC 1세기

 

 

 

d. 로마제정: BC 1-A.D 2세기(제정전기)

Pax Romana시대(1-2세기)  시민공동체적 요인이 해체기*아우구스투스 시대(옥타비아누스)BC 27년  -내란과 무정부적 혼란방지를 위한 Princeps(원수정)수립

Princepatus: 19세기 몸젠이 명명한 정치체제  Augustinus: 혼합정부체제(원수정) -원로원과의 타협  대권장악: imperator: 군통수권자. Augustus(존엄,지존)의 칭호: 로마  황제에 등극-그는 독재자가 아닌 로마시민의 원수  -Principatum(지배체제): 로마공화정의 변질. 귀족정이 아닌 일인지배 (원로원의 기능쇠퇴)속주의 총독의 사병화 금지(연금제실시, 감독관파견) 상비군과 친위대창설: 국내질서유지. 도시정비: 상수, 신전, 목욕탕, 도로 정비-45년간의 치세: 혼란과 무질서를 추방한 로마의 평화시대가 열림 A.D 1-2세기: 네로이후 4황제 마르셀리우스황제까지

 

 

 

e. 제정후기(3-5세기)

3세기 군인황제시대: 235-285 군대가 개입하는 황제옹립과정에서 내분과 대립-제국의 통합과 황제권에 치명적결과*전제주의 정부형태: 3세기: 부패와 타락(금권정치): 군부의 등장: 황제의 등극을 좌우:   동서의 야만인의 침입, 혼란: 군사비의 증가, 질병이 만연*정치적 변화두황제의 노력: Diocletianus 284-305, Constantinus 306-337   Augustinus: 혼합정부체제(원수정)를 마감, 절대권력체제로 전환.  제국의 통합유지를 위한 중앙집권적 권력국가(관료제적 통제강화)-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제국개편  -강력한 황제권력을 유지: 관료제, 군제를 강화 공화정적인 요인을 일소, 통일적 군현재도를 개편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에서 전제적 군주정(Dominatum)으로 변질

 

 

 

◎그리스의 문화

 

문화창조의 원동력


ㄱ. 폴리스체제와 민족주의적 융합-엄연한 정치적 독립국가, 종교공동체이며 혈연적 전사공동체ㄴ. 진취성과 개방성 (그리스인의 지중해 진출과 정복사업) ㄷ.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ㄹ. 조화와 균형의 미덕(학문과 예술에 반영)

 

 

 

그리스 문화의 특징

도시국가의 자유민 중심의 문화( 다른 문명의 군주의 지배와는 무관) - 개인의 창의성 존중 (독창적인 개성을 중시하는  문화업적은 지속적으로 서양문명에 큰 영향)

(한계: 폴리스의 생활은 문화와 사상을 제약,  폴리스적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아테네/스파르타 (개방/패쇄)-마케도니아시대에 보다 세계적인 그리스문화로 발전 (헬레니즘)

 

인간이 만물의 척도, 우주의 중심(인문주의,) 인간중심주의/합리주의(계몽사상)/개인주의/자유주의/민주주의등 로 발전해 나갔다.-그리스인의 종교: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신(인간과 공존)-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시대로 전환 (B.C, 6세기이후)-인간중심주의: 합리주의 정신의 터전으로 발전  -대립과 투쟁이 아닌 균형과 조화  (그리스 예술문화양식: 미적개념 서양의 전통)-개인중심주의, 이성에 바탕을 준 계몽사상: 미신, 관습, 권위로부터 인간해방(인본사상)

 

그리스문명의 세계사적 의미와 교훈

 

1.  최고의 인간주의 역사와  공동체주의의 흥망의 역사: 비판점:군사적, 물리적 힘에 의한 끝없는 침략과 정복사업을 추진한점.  그리스 폴리스문화(공동체문화)는 외부와 내부의 적대투쟁관계에서 형성, 발전, 몰락.  침략과 정복의 민족역사는 또 다른 침략과 정복으로 멸망하는 실례

 

2. 폴리스체제의 교훈:  노예제도, 시민계급의 폐쇄적 특권의식, 빈부격차, 퇴폐타락의 향락문화:  폴리스체제를 유지, 강화한 반면, 약화와 유지불능 상태를 연출3. 그리스적 한계:  공동체의식의 쇠퇴와 민주정치의 폐단 (중우정치):도덕성과 질서파괴는 자멸한다는 교훈: 민중주의, 다수의 횡포, 무절제와 권력남용,소수계층에 대한 추방  

 

그리스-로마문화의 차이점

그리스-로마: 자유-질서, 주지주의-주의주의, 서양의 동방과 서방(헬레니즙의 2대기조). 그리스-폴리스적 한계(민족통일 실패)/로마-세계제국의 건설: 배타적 폐쇄적/호의적  개방적. 그리스 (유럽문명의 기본적 개념을 착안)/로마인의 정신; 제국창조의 원동력(국가질서)

 

◎로마제국의 세계사적 의미

 

“로마는 하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1. 유구한 역사발전 속에서 세계제국을 건설하고 장기간 지속시킴 2. 그리스문화를 다음세대 또한 여러 다른 세계에 전달시킴. 특히 지중해의 세계라는 역사단위를 창출하고 발전시킴. (지중해의 특유한 문화가 공유하는 세계라는 의미보다는 로마인의  역사적 과업에 해당되는 개념으로 해석됨.)  제국은 로마의 평화에 의해 유지된 점을 주목하여야 한다. 역사상 전무후무한 세계였던 로마제국:  로마가 멸망한 이후 로마와 같은 통일된 세계로 다시 정치적 통합을 유래는 역사상 찾을 수 없다.

 

 

 

로마발전의 배경

 

1. 로마정신

로마인의 사고는 로마정신에 깃들어있다.  그리스인은 폴리스 개념(민족공동체내의 자유와 분립주의)에 집착한 반면, 로마인은 “세계는 오직 하나의 폴리스”라는 입장을 고수하고자 하였다. 즉 로마제국내의 각 민족의 조국들이 있었다. 따라서 로마정신은 출생과 인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중심도시로서의 로마의 역할을 중시하였다. 거대한 영토를 하나의 폴리스로 만든 것이 바로 로마제국의 의미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경제, 하나의 행정만이 존재하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법률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그리스인(Hellas)는 자신이외의 모든 이민족을 야만인 (babarlos)으로 취급하였다. 하지만 로마인은 비로마인과의 관계(특히 법률체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중시하였다. 즉   로마인은 그리스인과 다르게 배타적, 폐쇄적인 면을 금기시하여 로마의 울타리는 개방적이었다.

 

2. 로마의 외형적 발전요인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라는 의미로 상징된다.

1. 도로망의 정비는 거대한 제국을 지배하는 최대의 비밀무기인 셈이다. 이는 초기부터 정치적 군사적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개인의 상업적 목적은 결코 아니다)

2. 도시의 정비는 라틴화된 로마도시의 건설을 뜻한다. (경기장, 신전, 목욕탕, 학교 및 공공시설, 하천, 교량 등). 로마인에게는 도시문명의 외향적 확대를 찬양하는 정신적 사고가 두드러진다.

3. 농업의 중요성(농민생활의 실체). 로마제국의 경제적 기초는 농업에 있었다. 평균적 도시의 주요산업도 농업 및 상공업이다. 당시 상공업을 통한 과학기술혁신보다는 농업의 중요성이 도시경제의 기본으로 자리잡고 있다. 로마인의 제국주의적 착취와 약탈, 즉 전쟁과 정복사업을 통한 노예제에 의존한 농업중심의 경제체제가 바로 로마제국의 원동력이었다. 즉 정복과 전쟁이 종료될 때 농민에게는 치명적 손상을 끼치면서 경제대국의 한계성을 경험하여야만 하였다. 결국 로마의 대토지소유제는 소작제를 취함으로써 농민의 불만과 고통은 증가되었고, 제국 말기에는 이미 봉건제적인 요인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로마문화의 특징

로마의 그리스 정복은 무력적, 정치적으로 이루어진 반면,   문화적으로 로마는 그리스에 정복을 당한셈이다. 그리스인은 로마인에게 학술과 예술분야의 스승이며, 로마인은 그리스문화의 충실한 모방자였다. 하지만 로마인들은 실천적, 실용적인 사고로 무장하여 현실적인 분야에서 대단히 독창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예: 조직적인 대단위 토목, 건축사업)

 

1. 로마공화정, 로마제정의 성립과 발전을 통해 정치와 문화의 통합에 의한 세계통치 즉 세계제국의 건설을 성사시킴. 따라서 로마 최대의 문화사적 업적을 달성하였다. 이는 진리탐구, 예술적 창조 보다는 현실문제 해결을 중시한 로마문화를 대변한다.

2. 그리스문화를 계승하여 서유럽에 전달함. 또한 기독교를 보급하여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유럽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침

3.  인간성(humanitas)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광범위하게 적용함. 그리스인은 보편적 인간사상을  창제하였다지만,  한계는 자신과 동포만을 포함시킴(그리스적)-로마인: 인종, 종교, 민족, 인습에 차등화정책을 인정하면서도, 공통적, 보편적 인간성을 인정. 평등, 인도주의, 박애주의(알렉산더대왕이후 뿌리내림). 이를 조직적으로  법제화한 것은 로마 인간성의 특징이다.

4. 로마법은 가장 뚜렷한 문화적 특징을 대변한다. 최대의 문화유산으로 로마인의 유구한 정치활동 및 체계를 상징하며 거대한 제국의 통치와 질서를 유지하는 골격이었다. 현제까지 영속한 공헌을 주목하라. (한국의 법질서도 로마법에 기인한다.) 로마인의 국가생성의 힘으로써 로마정신은 로마법에 고스라니 담겨있다. 로마법은 서구의 정치적인 생성의 초석이었다. 로마정신은 서양역사의 발전과정에서 중요한 정치적, 문화적 요인으로 제시하였다.



◎ 로마제국의 문화사적 역할


1. 초기 로마는 헬레니즘사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지만, 그 정도는 미비하였다. 2. 로마제국이 헬레니즘세계( 그리스와 동양의 서반부)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였고, 지속적이었다. 3. 로마의 평화시대는 문화를 보급하는데 큰 의미를 갖고 있으며,  로마인은 제국의 통합적 문화 이념에 익숙하였다.  4. 로마는 라틴화한 헬레니즘문명을 마호메트교에 전달되었다. 이후 이슬람세력은 그리스-로마의 지적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다시금 유럽문명의 성장과정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로마제국이 문화에 끼친 영향

 

1. 로마가 헬레니즘사상에 끼친 직접적인 영향

BC 2세기 그리스출신 역사학자인 Polybius는 로마의 대장군 小스키피오의 보호하에 포에니 전쟁사를 저술하였다. 그리스가 로마에 병합되자 다수의 그리스 지성인들은 점진적으로 로마화되었다. 그들은 로마의 정치적 현실에 직,간접으로 관여하면서 그리스 문화를 로마에 전수시키는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풀타크 (A.D. 46-120)는 <고귀한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전기>를 통한 영웅을 비교하여 그리스인과 로마인의 융화에 공헌하였다. 로마는 황금시대에 그리스어를 사용한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시대 이후 그리스의 예술, 사상, 철학적 전통은 점차 쇠퇴되었다.  


 

2. 그리스와 오리엔트가 로마에 끼친 영향

ㄱ. 헬레니즘 예술과 문학

로마인은 대체적으로 수송, 농업기술, 교양 등 우수한 그리스의 문화를 인정하였다. 포에니 전쟁이후 그리스어를 로마지성인이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리스 건축 및 조각 등 예술을 모방하였다. 로마인들은 로마 신과 그리스 신을 동일시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이는 로마인의 기원을 트로이에 둔 이유로 호머의 신화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에서 잘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로마의 철학적 토대는 물론 그리스 철학에 기인한다. 종합적으로 로마문화는 그리스문화에 기생체에 불과하며 독창성이 결여되고 새로운 과학의 발견에 실패하였다. 그러나 로마인의 실용전신은 무척 우수하여 도로, 조직적인 법전, 유능한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다. 로마는 헬레니즘문화에 깊게 융화되므로서 야성에서 지성으로 강건에서 유약으로 우둔에서 현명으로 전환하였다.

 

ㄴ. 반헬레니즘적인 종교와 미신

3세기이후 서로마제국에 대한 그리스의 영향은 급격히 감퇴되었다. 당시 로마의 지성인은 무사안일주의에 빠지게 되고 로마문화는 크게 퇴폐적 성향으로 나타났다. 특히 군벌독재에 따라 문화적 가치는 크게 격하되었다. 군인황제의 시대 로마제국은 반헬레니즘적인 종교와 미신이 확고한 지지기반을 형성해 나갔다. (예: 알렉산더 대왕시대에 수입된 것과 유사한 종교인 페르시아의 미트라스교(조로아스터교의 토대)와 이교도의 미신 따위가 특히 군대계층에 널리 보급되었다.) 당시 유태교 및 기독교의 교리가 급속히 로마에 퍼져나갔다. 이후 콘스탄틴 황제는 군대의 대다수가 신봉한 기독교를 공인하는 고도의 정치적 수완을 보였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 인정자리 잡는 과정에서 그리스적인 요인을 흡수하고 유태적인 요인과 융합된 점을 주목하여야한다.


3. 정치와 문화의 융합

로마의 정치와 문화는 그리스적인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과 로마인은 정복자로 그리스문화를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보호하였다. 특히 정복자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은 그리스의 문화적 요인을 더욱 발전시켜나갔다. 로마제국은 보다 세계화된 Universality을 추구하고 있다. 로마는 군대에 의한 강압적 정복사업을 통해 서유럽의 라인강-도나우강 지역을 개화시키는 문화의 보급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로마인은 문명의 질보다 양을 보다 중시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4. 헬레니즘의 매개자로써 이슬람교도

7세기 예언자 마호메트의 후예들은 시리아, 이집트 및 북 아프리카지역과 8세기에는 스페인지역을 정복하면서 로마제국의 문명과 접하게 되었다. 특히 아랍의 지성인들은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게 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등을 응용적 분석적인 방법으로 연구하였다. 대수(Algebra), Alcohol, Alchemy(연금술), Alkali 등 응용과학의 분야를 살펴보면 아랍인들의 유산은 그리스 것에 기인하고 있다.  또한 그리스의 자연과학을 응용하면서 천문학, 점성술이 발달되었다. 따라서 아랍인은 창조적 이라기 보다 응용적이며, 해설적이다. 11세기에 이르러 서유럽은 이러한 아랍의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무엇보다도 13세기 스콜라 철학의 전통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바탕을 둔 이슬람철학의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

 

서양고대사 개관 2

 

◎그리스문명의 성립과 발전


그리스 문명은 서구문명의 근원적 발전적 토대이며,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에 커다란 영향을 받고, 특히 예술, 문학, 자연과학, 철학, 역사학 등의 학문적 기초를 제공하엿다. (탈레스) 철학과 과학은 동시에 발생하였다.

 

*문자는 이집트에서 B.C. 4000년 경 처음으로 나타났고 이후 바빌론에서도 발생하였다. 초기에 문자는 그림으로 유형화된 표의문자(오늘날 중국문자)로 사용되었다. 이는 수천년 후 알파베트 문자의 초석이 되었다.

 

1. 이집트- 메소포타미아문명 개요

*양대문명은 유목민의 정착에 의한 농업문명.  이후 해상을 통한 상업활동, 철에 대한 약탈과 독점 등이 이루어졌다. 나일,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에 농경을 통한 정주가 시작되고 신과 같은 동격의 왕이 군림하게 되었다.

 

에집트의 종교는 다신교이며, 최고의 신은 왕과 친교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사제계급과 귀족계급이 상류층이다. 죽은자의 영혼은 육신으로 되 돌아온다는 사상를 굳게 믿고 있다. 따라서 시체를 미이라로 보존한다. 기원전 4000-3000초 셈족에 의한 정복의 역사. BC 1800년 팔레스타인 시리아지역으로  에집트문명이 전파되었다.

 

바빌론은 호전적 민족으로 설형문자를 사용하고 셈족에 의해 계승되었다. 종교는 풍년을 기원하는 사상에 기인하며 땅과 태양(여,남)등의 다신교 형태로 나타났다. BC 2100년 경 함무라비법전은 왕이 마르덕(신)에게서 받은 것으로 고대종교는 도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바빌로니아는 이집트와는 다른 내세보다는 현세의 행복에 초점을 두어 점성술, 마술, 점술은 물론 과학이 발달되었다. (1일=24시간, 원=360도 분할, 일식과 월식의 주기성을 발견 함) 후에 탈레스의 일식예언에 근거를 제공( BC. 585년)

 

2. 크레타 (미노아)문명 개요

서양최초의 문명인 미노아문명은  BC 2500년부터 1400년까지 11세기동안 독자적 예술을 만개하였다. 에게문명의 발견은 19세기 고고학의 성과로 혁명적인 결과이다.

 

Schliessmann(1822-1890)

슐리히만이전 그리스 고전문명은 완전히 베일에 가려졌다. 그는 청소년기 호메로스에 심취하여 트로이전쟁의 실체파악에 관심을 두었다. 그의 트로이 유작지 발굴로 B.C 14세기 그리스인의 크레타침공이 시적허구가 아님이 증명되었다. 1873년 트로이에 원정한 그리스인의 발자취를 추적하여 금은보화가 가득한 유적지 발굴한 이래 계속적인 미케네문명을 추적하고 펠로포네수스 반도의 유적지를 탐사함. 미노아문명은 BC. 14세기 그리스인의 침입으로 멸망함.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크레타의 유물은 에집트에 영향을 받았음이 입증됨.  크레타의 종교는 동물의 여신을 숭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문자 판독에는 다양한 이론이 많다. 성은 성벽이 없어 해상방위의 문제점이 제기된다.

 

이반스 경

크노소스 궁전의 유적탐사를 통해 왕국의 규모(부와 권력)를 짐작하였다. B.C. 1500-900년까지 미노아문명의 전통은 그리스에 남아 있었다고 판단됨. 궁전은 지진에 의한 3차례 파괴되고 재차 중건되었다. 미노아 문명은 BC. 1500년 최고조에 달함. 크노소스(Knosos) 궁전는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로 파악됨. 고대 그리스의 전통은 화려하였다. 이는 오리엔트 선진문명의 세례를 받은 해상문명이었다. 초기에는 오리엔트와 유사한 청동기 문명의 증거가 나타난다. 인종 문화면에서 아시아적 특징이 두드러진다. 예술, 특히 미술은 이집트적인 독창성이 강조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화의 사실성과 역동성은 해상문화와 상업적 감각을 잘 표현하고 있다.

 

벤트리스

영국건축가 1952년 미노아문명 및 미케네의 최대유적지 크노소스궁전의 선상문자 B의 암호해독 (미케네문명 연구에 박차). 그리스어의 초기형태는 상형문자와 표음문자의 중간형태였음을 입증하게 되었다.



3. 미케네문명 개요

 

미노아문명의 쇠퇴는 BC 1400년 경부터.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인(도리아계통)이  크노소스 궁전을 점령한 이후 미노아 문명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특징

미케네문명은 미노아문명울 계승하여 독창적 그리스문화의 성격을 완성하였다. 경고한 거석의 성벽문화는 군주권을 상징하며 벽화와 도기는 크레타문명보다 뒤지나 문화의 양상은 상무적이고 역동적이다. 왕의 무덤, 요새, 성곽을 통해 미케네 문명은 크레타에 영향을 받았고 개방보다는 폐쇄적인 특징이 나타난다. 그들은 이방인의 침입에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호모의 서사시를 통해 알려졌다. 그리스어 사용은 점토판의 선상 B문자의 해독으로 오리엔트문명의 세례를 확인케 함.

 

미케네인은 그리스어를 최초로 사용한 주민으로 확인됨. 추측컨대 피라밋 구조의 사회였을 가능성이 있고 공납제(동의 공납)가 쇠퇴한 암흑시대가 도래하였다. BC 1100경부터 8세기까지 내란과 대외전쟁으로 그리스문화의 쇠퇴기를 맞는다. 이시기는 철이 동보다 더 중요하게 사용된 철기시대였다. 당시 지중해의 재해권은 미케네인과 페니키아인과 양분하였던 점에 주목하라.

 

미케네인은 말기 농경정착을 벗어나 지중해의 도서로 이탈리아의 연안으로 해상활동을 시작하고 약탈과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이집트, 페니키아해안, 시칠리아, 남부이탈리아등과 교역활동) 당시 국왕은 군사권, 사법권을 장악하였고 성직자는 제사장 역할을 담당함. 자유민은 농민 목축민, 수공업자 등이며 노예는 전쟁포로 하층계급이었다.

 

과연 미케네인이 최초의 희랍인인가?  BC. 2000년 경부터 남하하여 3차례에 걸친 침입으로 그리스에 정착함. 그리스인의 해상활동을 통한 결과는 우선 문자의 습득에 있다. B.C 1000까지 문자 사용이 미확인되었다. 페니키아인(시리아인과 마찬가지)은 이집트와 바빌론에 영향 받았고 해상무역의 주도권(지중해의 도시국가이전)을 장악하였다. BC 969-936 투르의 그리스인은 알파벳문자를 사용함.(이집트와 페니키아 문자에서 발달) 그리스 문자는 페니키아문자를 개발한 것으로 판명됨.

 


 


◎ 그리스문명의 성립


1.그리스인의 이주

미케네시대의 도리아인은 인도 게르만의 일파로 BC 1200-900년 미케네문명을 파괴하고 이오니아인과 대치함. 양대세력의 대치로 지중해 교역은 중단되고 문화의 쇠퇴기(암흑시대)를 맞는다. 그러나 그리스인은 상업을 통해 오리엔트문화를 적극 수용함으로써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 나감. (예; 페니키아인으로부터 알파벳 전수받음)


2. 폴리스의 성립 (B.C.8-6세기) 

BC. 800년 경 그리스에는 지역마다 소규모의 정치조직이 형성되면서 그리스적인 국가, 사회, 종교의 기본적인 윤곽이 나타났다. 집주의 형성(Synoikismos)은 군사적 공동체 역할을 통해 외적에 침입에 공동대처하는 목적에 기인함. 따라서 집주에 의한 그리스적 정치조직은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되고 200여개의 도시국가(Polis)가 생성됨.

 

그리스의 지리적 조건: 험준한 산악과 해안선의 발달하여 영토국가보다는 소규모의 정치공동체가 용이함. 자연적조건: 산악보다 바다로의 진출이 용이하여 해상국가의 면모가 강화됨. 폴리스는 골짜기마다 작은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농경을 통한 정착문화가 형성되었고 식민지 확보를 위한 해상활동이 강화됨.

 

그리스의 사회

폴리스의 사회구성: 자유민, 외국거류민, 노예로 구성. 시민권은 성년의 남녀 자유민에게 부여 (부녀자 제외). 그리스의 대외팽창의 결과로 외국 거류민이 증가(병역에 종사). 피정복지의 노예제가 정착되었지만 인권, 재산권 모두 박탈됨. 사회제도와 계층은 공동체마다 다양하게 나타남. 일반적으로 노예제 도입, 자영농, 자유민이 등장함. 이오니아인의 정복을 통한 전쟁포로로 노예제가 정착됨. 인구증가, 생산력증대, 토지부족현상으로 폴리스 체제가 강화됨.

 

그리스 초기: 원시사회이며 혈연중심의 씨족사회는 다수씨족이 모여 대씨족(형제단)사회를 구성. 후기: 부족사회이며 인구의 증가와 농축기술이 발달됨. 토지의 사유화는 대토지 소유제로 변질됨. 부족계급의 구성: 사회적 양상이 복잡하여 부족간의 교류가 활발해 짐.


 

3. 폴리스의 구조 

도시중심 및 농촌과의 결합이 필수적.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폴리스의 당위적 목표는 “농업생산을 통한 자급자족”이라 주장함. 인구 1만의 독립된 정치기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한 성벽의 중심지와 성외곽의 농경지로 구분됨. 폴리스의 성내 중심부의 언덕은 아크로폴리스(Akorpolis)로 수호신을 모시는 신전. 그 아래에는 아고라 (Agora: 광장)로 시민생활의 중심무대이며 정치적, 종교적 행사 및 물건교환의 시장 역할을 함.

 

폴리스의 구성원: 성년시민들이 민회를 구성하여 정치적 권리를 행사함. 부녀자, 외국인, 노예는 정치에 참여할 권리가 박탈됨. Hellenes는 그리스인(Hellas: 그리스 땅)이며 Barbaros(이웃)와 철저히 구별됨. 그리스인은 여럿의 폴리스로 분열되었으나 공통의 언어와 문화유산을 통해 공동체의 민족유대의식이 강화되었고 올림픽경기나 동맹을 통해 잘 나타남. 새로운 해외 폴리스의 건설: 시칠리아, 소아시아, 흑해연안, 에게 일대로 팽창됨. 식민도시는 오리엔트문화의 영향을 받아 본토보다 더 자유로운 활동이 전개됨. 따라서 오리엔트지역과의 상업 및 문화교류가 활발해짐. BC. 8세기 중엽이후 귀족과 성장한 시민계급간의 갈등대립에서 시민세력은 경제적, 조직력을 갖고 해외로 진출함.

 

4. 아테네와 스파르타

ㄱ. 아테네

이오니아계 그리스인의 폴리스. 초기: 자연적으로 비옥하지 못함, 원시적인 왕정의 형태. 폴리스의 성립이후 토지소유의 귀족에 의한 귀족회의가 구성됨. Areopagos는 최고의 사법기관이며 (국가를 대표하는 민회는 의결 및 입법기관) 임기 1년의 9명의 집정관도 선출한다. (귀족만으로 구성) BC 7세기 이후 해상무역을 통해 눈부신 성장을 하여 황금기를 맞는다. 이오니아인은 BC 7세기경 리디아로부터 화폐가 도입되면서 경제가 활성화됨.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함. 모국과 식민지역간의 교역은 아테네의 은화가 국제적 통화로 자리잡음. 금은광산업을 통한 은의 축적은 화폐제도의 정착에 크게 기여함. 귀족 외에 상공인(자유인)의 정치, 사회적 발언권이 점진적으로 크게 향상됨.

 

적극적 식민 활동의 전개와 성패는 신분상승 및 몰락(노예화)을 유발함. 귀족에 대한 시민의 반항은 커져감. 농촌의 위기와 군대의 전술 변화로 BC 6세기이후 폴리스는 중무장보병의 밀집대형을 새로운 전술로 채택함. 애국심은 새로운 의식의 자각. (귀족정에서 참주정으로 변화) 즉 중소농민=중무장보병=능동적 시민의식이 강화됨. 폴리스의 정체: 군주정에서 귀족정, 폭군참주정, 민주정의 순서로 발전됨. 국왕은 이집트와 바빌론과 달리 절대권력자가 아닌 원로원의 자문을 중시함 (관례를 존중).  당시 폭군은 상속받지 않은 통치자를 의미함.

 

 

 

Drakon, Solon 집정관의 입법개혁: BC 621, 594-공동체의 분열에 대비함. (내란)  재산에 따른 시민을 4계급으로 등분하여 권리와 의무를 구분함. 부유한 시민층은 귀족과 동등한 지위를 보장. 금권정치(Tomocarcy) 실시이후 내분은 극심하여 솔론의 개혁은 실패함.

 

BC 561년 Peisistratos 의 참주정치(Tyranny):  대중의 지지로 귀족의 재산몰수와 토지분배가 성사됨. '비합법적인 권력 장악' 이었지만 아테네의 정치 및 문화안정에 크게 이바지함.

 

 

 

BC 508년 Cleithenes (클레이테네스: 반참주운동의 선봉장)는 아테네 민주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여 참주정치는 종말을 고함. (계층간의 분열이 원인) 평민과 연계하여 귀족의 권력기반을 약화시키고 민주혁명적인 개혁을 단행함. 행정구역 10개로 개편(10부족제), 500인 협의회를 창설하고 종래의 공동체적 혈연적 규제를 해체함. 170여개의 demos(행정구)가 성립됨. Democracy (민중: 시민에 의한 지배): 502년의 민주개혁. 당시 노예제는 민주정의 필수요인. 능동적인 정치참여를 제약하는 제도.

 

 

페리클레스의 전성시대: 정치적, 경제적, 정신문화적 전성기, 황금기. BC 492년에 귀족회의는 정치적 권한 상실. 아테네의 직접민주주의의 실시(민회는 1년에 40회 집회: 전쟁의 포고, 조약의 비준, 세출 등 국정을 논의). 시민적 애국주의가 발전하여 동질사회의 성격이 강화됨. 그러나 부녀자, 노예, 비자유인은 정치참여를 배제됨. 중우정치의 폐단도 노출: 서민대중을 통한 직접정치의 한계. 펠리클레스 시민권법: 수당제의 재원은 제국주의와 구조적 결합됨. 비 그리스계 주민들(Barboroi: 스키타이인, 트라키아인, 프리기아인). 포로, 유괴, 매매가 성행함. 노예의 수는 전인구의 3분의 1로 상품화됨. -500명의 평의회(Boule: 행정을 감독하는 민회의 대행기관). 모든 관직은 추첨하여 결정함.

 

 

ㄴ. 스파르타

BC 8세기 메네시아 평원을 정복한 도리아인의 폴리스 (발칸남부에 침입). 선주민 아케아인을 정벌하고 이웃도시까지 세력 확장함. 7세기 초 스파르타시민단의 체제변화: 리쿠르코스(Lykurgos)법은 정치적 목적으로 지배를 강화함. 스파르타인 상호간의 토지소유의 평등을 유지함. *군사적 귀족정치: 정복민과 도리아인간의 불평등원칙. 지배계급에게는 엄격한 스파르타식 교육을 실시. 피정복민을 다루기 위한 국가정책은 쇄국주의와 보수주의. 후에 스파르타 폴리스는 보다 민주화되지만 폐쇄적인 면은 강화됨.

 

 

스파르타체제의 핵심요인인 homoioi (호모이오이:동등자들): 민회 구성원의 동등권, 균등한 경제권 토지의 할당을 보장함. agoge( 아고게:훈련제도): 직업적 전사를 위한 훈련제도. 출생 시 적격심사이후 60평생의 군사적, 사회적 교육을 12-20세에 받음. 명령복종의 예비 군사훈련 (20-30세에 받음). 병영생활은 30세 이상에 해당됨. 15인 이상의 공동식사제(시민자격요건): 동등의식의 강화목적. 헤일로타이제도는 아테네의 노예제와 유사하지만 스파르타체제의 필수적 요소이다. (아테네의 노예는 사유재산: 헤일로타이는 시민에게 할당된 국가의 재산) 노예와 자유민 사이의 집단: 2명의 국왕(군 최고사령관),  보좌기구인 장로회의(Gerusia): 60세 이상의 장로로 구성된 원로원의 기능. 민회는 입법기관으로 30세 이상의 남자로 구성됨. 감독관은 5인의 민회에서 선출되고 정사를 담당함.

 

◎ 그리스 세계의 발전

 

 

1. 페르시아 전쟁(BC 492-479)과 아테네의 발전

( 국제적질서의 개편무대) BC 6세기 중엽: 그리스인의 대외팽창기에 페르시아에 의한 오리엔트세계의 통일로 지중해의 페니키아세력을 제압함. 페르샤왕 다리우스는 해상권 장악 이후 소아시아, 이오니아 식민지(밀레토스)에 압력을 행사함.(세금을 요구) 이는 밀레토스 반란 원인, 그러나 실패함. 아테네의 후원하에 소아시아의 그리스계가 결속하자다리우스는 아테네를 응징코자 원정군 파견함. 페르시아 전쟁의 발발-1차 원정(492) 폭풍우로 실패, 2차 원정(490) 에게해를 넘어 마라톤에 상륙후 아테네군에 패배함. 3차 원정(480-479)은 다리우스의 후계자 Xerxes(크세르크세스)가 감행함.

 

결과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결속으로 스파르타군 격파하여 그리스 중부지역을 석권함. 그리스연합군은 스파르타의 지휘하에 페르시아 육해군을 패퇴시킴. 그리스인의 결속: 외국의 지배에서 해방 후에 자유와 번영의 기반을 조성함. 전쟁으로 농민출신의 중방보병과 하층민의 수병 역할로 신분적 상승되고 시민대중의 정치적 발언권이 강화됨.


2. 아테네의 황금기

3대 특징-제국주의, 노예제, 민주주의.

 

당시 노예제는 보편적 현상. 민주정은 급진화됨. 해군력의 성장을 통한 하층시민의 군사화는 제국주의적 경향이 지배적. 페르시아 전쟁 후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해군동맹(Delos동맹)체결함. 참가국에 할당량이 정해짐: 군함, 자금, 인원 등. 아테네의 압력으로 동맹은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본부를 옮김. 이후 아테네의 독주는 동맹국의 반감을 삼. 아테네의 경제적 번영으로 문화와 예술의 발전(도자기, 공예품에서 확인). 아테네의 민주정치는 페리클레스의 전성시대가 열림.

 

3. 펠로폰네소스전쟁( BC 451-405)

결과는 그리스 폴리스체제의 종말원인을 제공함, 전쟁 원인: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그리스세계를 재패하기 위한 쟁탈전. 스파르타의 승리에 따른 아테네의 해체. 델로스 동맹이후 아테네의 번영은 다른 도시국가와 반목케한 직접적 요인. 아테네의 다른 폴리스에 대한 강압적, 제국주의적인 면이 반영됨. 스파르타는 인근지역의 직접지배를 통해 시민단의 군사화를 통한 경제적 기초가 마련된 반면 아테네는 해외의 다른 폴리스에 대한 간접지배와 착취를 통한 시민단을 군사력으로 이용함.

 

폴리스내부에서 진행된 민주화의 수준과 범위의 차이점: 아테네는 정치적 법적 평등, 스파르타는 경제적 평준화에 성공함.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펠로폰네소스 동맹과 델로스 동맹의 반목이 전쟁의 직접적 원인. 코린트(펠로폰네소스 소속: 아테네의 경제침투에 위기감을 느김). 459년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교전상태: 페리클레스에 의한 화해. 431년 스파르타의 전쟁 재개: 아테네의 해군에 의한 스파르타 포위에 성공하지만 피해는 극심.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이 페스트에 감염되고 병사, 펠리클레스도 희생. 이는 아테네의 몰락원인이 됨. 405년 아테네의 패배와 함락, 댈로스동맹의 해체, 스파르타의 패권이 확립됨.

 

4. 폴리스의 쇠퇴와 종말

스파르타의 불안정: 그리스 주도권은 Thebes로 이행되면서 무정부 상태에 빠짐. 스파르타에 의한 각 도시국가 통제: 감독관파견, 군대진주. 전쟁시 페르시아는 스파르타를 지원, 후에 테베 Thebes (반스파르타전선:코린트동맹)를 지원함. 371년 페르시아의 반격으로 스파르타는 패배함. 테베는 아테네, 스파르타에 이어 그리스를 재패하지만 국력은 쇠퇴되고 마케도니아 전제군주에 패배함. ( BC. 338년) 

 

그리스 도시국가의 몰락원인

ㄱ. 정치적 원인  -그리스 도시국가는 폴리스간의 투쟁대립의 연속 정치체계는 붕괴-그리스 문화권 밖의 마케도니아세력에 의해 몰락-그리스 세계는 분립주의와 패권주의: 폴리스의 자치와 그리스의 통일의 2대원리에서 힘을 소모

 

ㄴ. 그리스몰락의 경제적 원인(정복과 제국주의적인 요인의 감소)-자급자족은 불가: 지역의 80%가 산악: 식량은 수입(소아시아, 이집트등으로부터): 곡물, 광물, 노예-수출품: 과실:포도, 올리브  수공업제품: 모직물, 도자기, 금속세공품, 유리제조-수공업의 발달: 해상 상업활동의 활기. 금융업, 은행(예금과 어음교환)이 발달-경제적활동은 그리스 문화에 결정적 역할-그리스 경제는 노예제도에 기초(전쟁포로는 모든 경제활동에 주역)-B.C 4세기 이후 폴리스간의 내분으로 노예제도는 쇠퇴 

 

5. 그리스의 문화

고대세계의 통일사상은 정치적, 군사적 통일이념이 아니라, 항상 문화적 영역내에서 가능하였다. 헬레니즘은 실질적으로 기독교문화의 정신적인 길라잡이 역할을 함. 유럽문명의 개념들은 처음으로 그리스인들에 의하여 착안된 점을 주목하라. 예술, 특히 미술, 건축, 도예분야, 문학(희극과 비극의 드라마), 역사서술, 이오니아인들에 의한 초기 서양 철학 등. 그리스 문화창조의 원동력인 폴리스체제와 민족주의적 융합: 엄연한 정치적 독립국가, 종교공동체이며 혈연적 전사공동체-진취성과 개방성-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번영-조화와 균형의 덕(예술에 반영)

 

 

그리스 문화의 특징

도시국가의 자유민 중심의 문화(다른 문명의 군주의 지배와는 무관). 창의성존중(독창적인 개성의 발휘의 문화업적은 지속적으로 서양문명에 큰 영향). 한계: 폴리스의 생활은 문화와 사상을 제약하여 폴리스적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하였다. 마케도니아시대에 보다 세계적인 그리스문화로 발전함. (헬레니즘) 인간이 만물의 척도, 우주의 중심(인문주의를 중시함). 그리스인의 종교: 초월적인 신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한 신(인간과 공존). 신화의 시대에서 이성의시대로 전환함 (BC, 6세기이후). 인간중심주의: 합리주의 정신의 터전으로 발전됨. ( 대립과 투쟁이 아닌 균형과 조화).  그리스 예술문화양식은 바로 서양문명의 미적 전통이다. 개인중심주의, 이성에 바탕을 준 계몽사상을 보라. 미신, 관습, 권위로부터 인간해방을 모색한 인본사상이 그 중심이다.

 


신화와 종교 


그리스 신화

11-12세기 이후 그리스 반도에 거주한 이오니아, 도리아인등과 그 자손이 소유한 신화.

특징 

미노아문명의 영향을 받아 모계적 색조가 강함 (여신, 모신의 숭배). 신화는 종교와의 융합을 뜻함. 예: 아테네 여신-지리적인 영향으로 인한 이민족의 신화를 수용(셈, 힛타이드인등): 아프로디테, 아도니스신화-종합적인 국민적 신화체계를 이룸(예: 올림프스신)-종류: 우주창성신화(카오스-에로스의 원리), 신통신화(다신교적 영향)   인류창생신화, 홍수신화(제우스신등)

 

 

그리스종교

모든 문화예술의 상징적인 면을 포괄적으로 수용ㅎ마. 일반적 의미의 종교가 아닌 인간적인 것을 중시함. 그리스 비극은 종교와 깊은 연관을 맺음.(문학과 연극)-초기 그리스 종교: 자연숭배의 다신교(지중해 고대문명의 영향) 후에 점차적으로 신의 계보가 형성되면서 Olympus의 12신으로 확정됨 (호메로스의 서사시 Illias, Odysseia(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 Hesiodos의 신통기에 나타남.

 

 

그리스문명의 첫 열매 호머의 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

 

호머는 개인이 아닌 당시의 시인들이란 견해도 있다. 눈먼 시인 또는 다수의 시인으로 해석된다. 작품은 200년간에 걸쳐 완성됐을 가능성이 크다.( BC 750-550-서사시의 저자 연대 소재는 논란 ). 현존하는 호머의 시는 페이시스트라투스가 아테네 및 그리스전역에 확산시켜 사용함. (통치기간: B.C. 560-527). 미케네인의 트로이전쟁 에피소드: 일리아스-아킬레스와 트로이왕가의 싸움: 영웅의 분노와 사랑, 헥토르의 죽음을 묘사

 

 

오딧세이아-희랍전사 오딧세이아의 공상적 무용담, 모험(10년간 트로이 함락지를 유랑하다 고향의 아내 곁으로 돌아간 이야기)  무대: 올림프스 산의 신을 배경으로 한 신의 이야기: 신= 초인적 도덕적 인간상( 종교적인 면 약함)  -종교를 대표하는 올림프스 신에 대한 주제가 당시에 통용된 것은 아님. 등장인물: 포세이돈, 제우스: 신과 인간의 반반요소를 접목

 

호머의 종교는 일반적 의미의 종교가 아닌 인간적인 것. 그에게서 신은 귀족계급의 신이다. 농부를 위한 신은 아니다. 상류사회의 합리적 인간상을 그림.


그리스 철학과 정치사상 

 

BC 6 세기경의 이오니아인의 문화: 철학, 과학, 수학, 역사학 등이 생성되는 시기. 소아시아의 서안지역 이오니아 식민지에 밀레토스학파가 성립됨/ 자연철학적 바탕). 오리엔트의 문물을 전수받음. 그리스 정치사상에 영향을 끼침. 신화적, 시정적인 면에서 결정적으로 탈피한 철학자의 노력의 결정체. Thales: 신화적인 세계관탈피, 우주만물의 근본원리를 과학화에 시도.  만물의 근원은 물 Anaximandros: 아낙시만드로스: 원소Herakleitos 헤라클레이토스  불.Empedokles 엠페도클레스 4원소: 지.수.화.풍Demokritos 원소 및 원자의 기계적 결합 .Pytagoras 수와 수를 통한  조화

 

 

Sophist: BC. 5세기 중엽 아테네 민주정치의 번성기에 성행. 새로운 교양인이 요청됨. 정치, 사회적인 처세술: 수사학, 변론, 웅변술등이 성행함. 프로타고라스 (BC 481-411) : 주관적 절대성, 단순한 회의론자:  인간은 만물의 척도.  Hippias는 상대주의자

 

관념론의 발전 

Socrates(470-399)

회의론적 상대주의의 극복함(대화법). 인간의 독자적 절대가치를 기준으로 절대적 진리를 인식함. 도덕적 선의 개념을 파악함: 지덕합일설을 주장하여 인간과 우주의 원리를 밝힘. 개인과 도덕의 각성을 강조하여 정치와 윤리에 큰 영향을 미침. 

 

 

Platon(427-347)

아카데미아를 창설함. 참다운 실제는관념(idea), 현상은 관념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관념론을 수립함. 정치사상의 확립은 플라톤의 노력의 성과. 펠로폰네수스전쟁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목격.  아테네정치와 도덕의 타락을 경고함. Republic 정의로운 국가란? 인습과 전통이나, 권력의 논리로 성립될 수 없다. 보편타당한 개인의 도덕적 토대위에서만 존제한다고 역설.  중우정치의 폐단을 지적, 철학자에 의한 도덕정치를 강조함.

 

Aristoteles(384-322)

알렉산더대왕의 스승. 이데아는 개개의 사물에 존재함. 경험주의의 창시자-논리학, 형이상학, 예술론, 정치학, 윤리학, 자연과학의 철학적 체계를 수립함. 만학의 아버지-개인의 올바른 삶은 개인의 정치적 공동체의 일원으로 행동할 때만 성사된다는 판단. 법률에 의한 통치를 강조: 철저한 준법정신만이 혁명과 변란을 방지한다고 역설함. *Anaxagoras: 자연철학, 자연의 탐구: 천문학Hippokrates: 의학*미술가는 과학자( 해부학적 지식, 기하학, 물리학 등 응용)

 

역사학

Herodotos(484-425): 페르시아 전쟁사(사료비판의 영역을 개발)-Thucydides(460-400):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인과관계)-Xenophon 그리스사, 소크라테스의 변명

 

그리스문학

신화와 결부된 서사시가 시초. Homer:일리아스와 오딧세이아(그리스인의 생활과 전설을 묘사: 유럽문학에 시초). 헤이오도스의 <신통기>는  올림프스 신의 계보를 정리. <노동의 나날>을 통해 노동의 신성함과 귀족의 부정을 고발함. Sappho는 여류시인으로 인간의 내면세계의 서사시(연애고백)을 그림. 호메로스의 서사문학는 종교,윤리적 철학적 교훈시가 성행 (비극, 희극시인)-펠로폰네수스전쟁이후-미카도니아시대-헬레니즘시대는 산문의 전성시대: 소크라테스-플라톤시대: 수사학과 시학 등 문학이론 및 역사학이 발전 

 

 

 

그리스 연극

 

페르시아 전쟁 후 아테네의 민중적 기반의 연극이 성행함. 연극의 기원: 534년 페이시스트라투스: 디오니소스 제전을 위한 연극제의 입상자들은 찬양, 노래와 춤, 인물에 대한 이야기 등을 묘사함. 酒신: 포도와 샘물을 상징하는 디오니소스를 찬양함. 3대 비극시인인 Aischylos(아이스킬로스)는 기원전 5세기 말 합창대를  배경으로 합창대장외 2명의 배우를 등장시켜 그 역할을 강조하였다는 설. Sophokles <안티고네>에서 호언장당하는 자는 천벌을 받으리라! Euripides 전설속의 인간과 신의 모습을 연극을 통해 형상화시킴.

 

주제와 연출방식 및 목적은 종교적성격: 반사실주의적, 상징적인 면을 강조.  예; 높은 구두신고, 가면 쓰고 장업시 낭송, 무용가을 곁들인 노래와 춤. 비극은 형식적이며, 종교제식적 (연극과 서사시는 발전).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에 관한 정의:“동정과 공포를 통한 카타르시스”*희극시인-Aristophanes 기사, 구름, 벌의 연극작품-희극도 종교적 축제에서 발생: 관객의 감성자극하는 해설형태의 연극

 

 

그리스 미술/ 건축과 조각

진선미의 균형과 조화의 사상을 추구함. 전체적으로 중용과 고요의 안정감, 즉 지성과 감성이 적절히 융합됨. 주제: 신화 및 종교 또는 시민의 일상생활. 폴리스에 대한 사랑과 신에 대한 존경이 어우러짐. 전성기는 기원전 5세기 아테네 황금시대. 6세기 이오니아 밀레토스지역의 석제건축양식이 페르시아전쟁 이후 아테네로 중심지 이동.

 

파르테논신전: 대리석이용, 열주에 꾸며진 장식. Doria 도리아식: 남성적 장중하고, 실용적. 가장 오래되고 단순함. 기둥받침과 머리가 없음, 파르테논신전의 원형는 아테네 아클로폴리스 언덕에 있는 아테네의 여신의 신전. 파아디스의 지휘하에 신전 안팎의 조각품을 장식하여 그리스 조각건축의 정수로 평가됨. Ionia 이오니아식: 여성적, 우아한 장식미: 소용돌이 머리의 기둥양식으로 날씬함. 에레크테리온 신전. Corinth 코린트식; 화려함. 아테네에서 채택되지 않음 후에 로마인이 즐겨 사용함. 이오니아식의 연장(화사, 복잡함). 로마의 판테온신전

 

 

 

조각건축의 재료: 대리석, 청동 등. 조각의 기본특성은 이상주의로 미의 영원함을 상징함. 여인상등 신상이나 경기의 승리자의 상에서 균형과 조화의 인간의 육체가 소재로 채택됨. 나체의 사실주의적 아름다움을 찬양함. 조각의 주제는 제우신 등 존엄한 신에서 아프로디테, 에로스 등 청춘미의 신으로 옮겨감. 신적인 것에서 인간적인 주제로 이동( 에토시적에서 파토시적인 것으로 이동). 인체묘사에 최대한 관심을 둠. 해부학적지식과 원근법, 명암법을 이용함(물리학적 이론을 활용). 조각가:  Myron의 원반던지기. Phiadis(피아디스)의 제우스상. 회화: 현존하는 유물은 거의 없고, 다만 병, 항아리, 접시에 그린 것으로 추측.  프레스코화, 초상화가 성행했다는 기록이 전해짐.

 


 

 

 

◎ 알렉산더 대왕의 제국


헬레니즘이란?

헬레니즘이란 그리스적인 것 (공동체와 도시적 제도와 문화)이 오리엔트세계로 이식되고 보급되며  오리엔트문화와  융합되는 현상 *드로이젠 `1830“-민족적 융합(그리스와 오리엔트)으로 처음사용-구조적으로 지배종속관계(정치. 사회적). 도시와 토착농촌과의 구조적 결합-이원적 구조: 그리스적 도시의 건설: 그리스 지배층과 정복지 상층지배층의 공통언어: 그리스어를 통한 문화적 국제주의의 확산. 피지배층은 토착문화에 강하게 집착할 수밖에  없었다.

 

문화적 융합을 시도( 희랍문화의 사도를 자청): 종교적 편견을 존중: 희랍신과 정복민의 신들과 동격인 대우. 정신적인 우월성을 믿음*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정복민이 노예화를 정당화. 반면 알렉산더는 유화책(혼인, 결혼정책: 정복지의 두 공주와 결혼). 다른 그리스 귀족들에게 모범-절대지배 복종관계는 무의미(세계주의적 견해): 스토아학파의 영향

 

1.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과 제국의 분열

(로마제국 건설의 원동력 및 토대)-그리스 도시국가의 내분을 틈타 마케도니아의 남진(경제적, 문화적으로 미개)-필립2세: 국가제도의 정비, 군사적 남진정책의 성공: 그리스의 위기.마케도니아-그리스 연합군을 창설 :페르시아 원정계획( 필립2세의 돌연사로 실패)-후계자 알렉산더: 그리스 도시국가의 부활을 억제책:  페르시아 원정을 감행-시리아, 페니키나, 이집트를 격파 B.C.323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시 건설-메소포타미아 진격 다리우스 3세의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 B.C 330-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중앙아시아(사마르칸트), 인더스강(박트리아Bactria)유역에 진출-수도 바빌론(323) 대제국을 건설.

 

정치적으로 총독정치를 통한 통합: 지역통치에 대한 중앙의 간섭을 최소화-문화정책: 정복지의 종교, 문화, 제도 및 관습을 유지허용.  각지역의 그리스의 도시를 건설(알렉산드리아):  지식인, 상인, 정치가를 이주시킴: 그리스 문화를 이식* 간다라미술(불상 및 동전)에 큰 영향: 대승불교를 통한 한국에도 영향-그는 신격의 아시아의 대왕: 유럽과 아시아의 융합을 통한 세계 정복에 성공 .정복지의 호족의 딸과 결혼: 혼인정책 (인종적 융합): 그리스인과 동방계 


대왕의 돌연사는 후계자문제에 대한 군부의 대립관계를 연출함 *결과: 이집트. 시리아, 마케도니아의 3왕국으로 분열  -안티고노스가(마케도니아)가 명분을 유지 로마에 복속: B.C.146-셀레우코스왕가(시리아): 안티오키아, 다마스코스에 도시건설 로마에 복속B.C. 64-프톨레미왕가(이집트): 지중해 그리스 도시국가를 복속 절대군주제를 유지:   악티움해전:  로마에 복속 B.C. 31 * 순차적으로 로마에 복속-로마제국이후 실질적으로 기독교문화의 정신적인 길라잡이:(고대: 기독교도은 지금의 아일랜드부터 인디아까지 확산)


2. 헬레니즘시대의 사회와 문화 

 

 

정치와 경제

절대군주제: 국왕이 절대적 권력을 독점, 국가독점하에서의 경제생활-그리스 도시국가 중심의 경제는 동방원정으로 중심지를 오리엔트로 이동(동서문화 교류정책의 일원)-오리엔트지역의 지리적 자연적조건(천연자원이 풍부, 조밀한 인구밀도, 영토의 광활함)-이집트지역: 절대왕정, 대토지소유제(노예제)를 통한 곡물의 대량수출-알렉산드리아: 저렴한 노동력에 의한 대규모 수공업생산(유리, 종이(파피루스)아마포, 주단 및 직물): 왕실과 승려계급이 주도-오리엔트지역의 정치적통일: 동서의 무역이 증대: 상공인의 부의 축척(왕실경비충당)지중해, 홍해, 흑해, 인도에 걸친 무역권형성


문화

-대왕은 그리스문화를 통합수용, 동방문화와 융합: 세계사적인 성격과 의미-특징: 그리스의 도시국가적 애국주의는 쇠퇴:개인주의, 세계주의, 현실주의로 전환-철학: Stoa(Zenon)학파, Epikuros학파, 견유학파Cynicism-3학파는 폴리스의 해체 이후 모두 도시국가에 대한 부정적 태도와 은둔의 가치를 공통적 전제조건으로 함. 회의주의적 -Stoa: 이성중시, 도덕적 철학에 의한 행복추구를 목표로 한 금욕주의. 보편적인 이성에 근거한 세계시민사상Cosmopolitanism (계몽사상)-에피큐로스: 정신적 쾌락에 의한 행복추구만이 인간의 목표(개인주의의적 입장).이후 3세기까지 신플라톤학파의 등장까지 철학의 새로운 것은 생성되지 못함 

 

현실주의사조

자연과학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과학과 수학은 최고조에 이름)-중심지: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Museion. 국왕의 적극적인 문화, 학문의 중심-아르키메데스Archimedes; 원주율을 통한 미적분연구-유클리드Euclid: 유클리드 기하학-에라토스테네스: Eratosthenes지구 구체설(지구둘레를 측정)  -아리스타르코스Aristarchos: 태양중심설 (코페르니쿠스 보다 앞선 주장)-Polybius: 로마사(로마제국의 형성과정에 관한 연구)*건축: 신전, 궁전, 극장, 목욕탕-그리스식 코린트양식의 화려한 조형미 .조각: 개인주의 및 사실주의 사상이 반영. 육체와 감성을 주제로 한 조각: 여인상(밀로섬의 비너스)

 

*로마제국은 2원적 구조

-정치적 통일-문화적 2원구조: 헬레니즘세계는 상층은 국제적 그리스화 .하층은 다양한 지방문화

 

 

서양고대사 개관 3

  

 

◎ 로마제국의 흥망사


1.  로마공화정의 발전


a. 로마공동체CIVITAS의 탄생과 왕정기(753-509):

귀족이지배한 도시공동체-3000년경 인도-게르만의 일파: 이탈리아인이 정주시작-기원전 8세기 티베르강 유역 라틴의 작은 촌락 로마가 건설(라틴인)-초기 에트루리아Etrurians에 지배이후 독립도시국가의 형태를 유지 510년경부터:  이후 1000년의 세계제국의 수도로 변모-그리스문명의 영향(종교, 제도, 건축, 도로건설, 도예)-부족국가: 씨족Gens, 종족Curia 부족Tribus으로 구성.  사회적 신분: 혈통귀족Patricii 평민Plebs 예민Clientes 노예Servus


b. 공화정 초기와 중기(509-2세기초) 

-초기로마: 로마공화정은 6세기이후-귀족(대토지소유)이 실권장악-통치와 군사권은 임기 1년의 2명의 통령Consul-전권은 귀족대표기관인 원로원Senatus이 장악-평민: 중소농민이 주축, 참정권이 박탈


2. 로마공화정의 성립


-상공업을 통한 평민계층의 부의 축척(귀족수준을 능가) 및 일부는 군대(중장보병)의 중심적 역할을 담당  -신분상승을 통한 귀족정의 변질-B.C. 5세기 귀족과 평민간의 신분투쟁(평민의 새로운 도시건설을 통한 이주문제: 성산사건)-원로원의 타협안: 2명의 평민대표에게 호민관 Tribunus Plebis 권한 허용-평민대표기관 평민회구성 Concilium Plebis-평민의 권리신장에 크게 기여:  451년 12표법의 제정: 관습법에 의한 귀족의 폐단을 방지 및 평민보호책 .367년 Licinius(리키니우스법): 토지소유의 상한을 정함(125만 평방m)2명의 통령 중 1명은 평민대표. 평민과 귀족의 실질적 신분차이가 거의 폐지-287 Hortensius(호르텐시우스법): 평민회의 결의가 원로원을 거치지 않아도 효력발생.  로마 공화정의 신분제 문제는 완전 해소


3. 로마의 반도 통일

초기 로마의 정복사업이후 정복지주민은 로마 시민화(평민과 동맹관계에 편입)-로마 주변의 라틴도시국가의 라틴동맹(396)  -주변부:에트루리아인, 갈리아인을 완전 복속-280년경 거의 반도를 통일: 남부경략 삼니움족Samnium: 중부석권 이후, 남부 그리스식민지공략*모든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와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망 건설(군사, 수송도로)-각 지역의 로마화작업(군사, 상업, 문화교류에 영향)-이탈리아에 대한 로마의 통치: 지방자치제를 통한 협력관계를 구축(군대진주를 위한 요새구축)-이후 지중해 및 해외 진출을 통한 대제국 건설의 원동력* 로마시민권의 확대과정: 로마지배하의 이탈리아인 로마군사력의 절반이상차지


4. 로마의 발전 

로마시민공동체의 해체(공화정후기: B.C2세기-A.D. 1세기)

포에니전쟁: 반도통일이후 (지중해진출모색)-지중해의 세계는 당시 군웅활거시대 .알렉산더사후 중동, 이집트,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페니키아의 카르타고로 분열 

카르타고: 서지중해의 맹주(강대한 해군력과 경제력):   로마의 지중해 진출의 결정적 방해요인

 

 

 

지중해의 세계 개관

-지중해 동쪽: 알렉산더의 정복사업에 따른 변화 . 서쪽: 제해권 장악한 북아프리카의 해양대국 카르타고와 이탈리아반도를 석권한 육상국가 로마와의 대결(포에니 전쟁: 이는 그리스세계와 오리엔트 대결의 연장)-카르타고: 기원전 6-8세기 해상왕국 페니키아인 (라틴말 새로운 도시)-포에니: 로마인이 페니키아인을 일컫는 말*기원전 3세기 한니발전쟁의 승리는 로마가 해상왕국으로 급부상  -동지중해의 헬레니즘 강대국과의 긴장, 갈등관계로 발전-기원전 146 로마가 지중해 대국을 건설하는 과정의 분수령-카르타고 격파, 그를 속주로 편입(서지중해에서의 승리)-마케도니아 병합 (196년 2차 마케도니아전쟁이후 속주화) 그리스 자유정신을 존중

 

로마의 대외정책

헬레니즘왕국에 대한 기본전략-직접적인 지배: 로마의 지배(imperium romanorum)과정-기원전 31-30 악티움해전에서 마지막 왕국(헬레니즘) 이집트 격파: 속령화거의 모든 지중해지역을 통일-기원전 27년 로마제정: 황제에 의한 제국통치체제의 수립이후 200년 팽창: 북부 갈리아, 라인-다뉴브강, 영국의 일부등 영토편입-평화의 시대(정복보다는) Pax Romana: 경제적 번영(해운업, 무역, 도시건설)최고의 고대문명의 절정기: 물질문명을 기반

 

*포에니 전쟁(Punic War 264-146 B.C)

-페르시아전쟁이후 최대의 동.서충돌(유럽대 오리엔트)

 

1차 포에니전쟁: 264-241B.C. 

원인: 시칠리아의 내란에 양측이 간섭 군대파견-경과: 로마의 육군과 해군력 총집결로 승리: 시칠리아의 지배권확보(배상금 요구) 이후 Sardinia, Corsica를 확보: 로마제국의 형성에 초석을 마련

 

2차 포에니 전쟁: 218-201B.C

원인: 카르카고의 에스파니아 개발문제에 주력. 한니발Hannibla 에스파니아의 개발을 통한 부의 축척과 군대를 동원  .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원정 216년. 8만의 로마대군을 격파(Canne전투: 이태리 중부)로마의 함락위기: 이탈리아 동맹군의 일부(남부지역)이 카르타고와 동맹. 로마의 재기: Scipio를 중심으로한 신규평성로마군의 카르타고 본토공략. 한니발의 철수: 북아프리카의 전투에서 카르타고의 패배, 휴전이 성사: 201 B.C.-결과: 로마의 스페인 지배, 카르타고 50년 상환의 배상금, 카르타고의 군선인도서지중해의 재해권확보

 

 

3차 포에니전쟁: 149-146B.C.

원인: 카르타고의 재기방지책(카르타고 자체분쟁에 개입)  -목표와 결과: 카르타고의 초토화, 주민을 노예화: 로마속주에 편입* 지중해의 재해권문제-2차 포에니 전쟁이후: 마케도니아정벌작업-목표: 카르타고와 그리스세력의 동맹할 가능성을 사전봉쇄. 4차에 걸친 로마의 마케도니아 간섭: 군대파견을 통한 군사적 개입-소아시아, 이집트, 중동지역으로 확대(로마의 군사적 절대 우위): 속주에 편입


5. 로마공화정의 변질

 

로마사회의 변질

대외적 팽창의 결과: 평민출신의 기사계급(Equites)의 성장(공헌)-군수품조달, 공공건물 건설, 속주의 세금관리 과정에서 경제적 부의 축척*새로운 관료제도의 요구: 토지제도 및 사회적 신분지위. 로마는 부의 집중을 통한 사치와 향락문화 풍조가 확대-건축, 장식, 요리, 사교, 의상 등 전통사회의 가치 및 소비문화가 변질

 

전쟁의 결과: 정복지 주민의 로마노예화.  하층평민 및 자영농의 신분하락. 전쟁을 통한 생산저하 및 부체의 상승. 대토지소유의 농장경영(노예를 통한): 속주를 통한 값싼 농산물 유입

 

 

 

Latifundium  라티푼디움의 실시: 곡물재배가 아닌 올리브, 포도의 상품생산의 대토지소유제로 전환  -결과: 중소농민의 무산자로 전락, 새로운 귀족층이 정착 (사회의 양극화 현상)*사회적 모순: 무산자와 유산자계급의 갈등이 심화-유산자: 전통귀족, 신흥귀족: 관직 및 경제력을 독점.  원로원의원: 대토지 소유자-무산자: 가혹한 대우: 특히 노예의 반란이 반복. Spartacus 73-71B.C.의 반란은 대규모-결과: 로마 내부적인 혼란이 가중은 내란의 수렁에 빠트림. 로마공동체의 시민의식의 사라지고 개인 및 물질주의가 팽배-로마는 무력에 의한 헬레니즘세계를 재패, 반면 헬레니즘의 개인, 물질주의에 패배

 

 

 

개혁과 군벌의 대두(평민파의 개혁요구)Tiberius Graccus 163-133 B.C. 형제  -133 형 그락쿠스의 호민관: 자유농민의 몰락: 귀족의 사병화에 반대. 토지개혁를 주장 (니키니우스법을 부활: 귀족의 토지소유제한)반대파로부터 살해-123 동생 Gaius Graccus의 로마하층민의 지지로 호민관 선출: 형의 계획을 계승. 로마시민권의 확대, 토지분배문제로 원로원과 대립.  내란으로 확대될 위기에 그는 자살로 마감, 실패-이후 혼란이 가중 내란의 유혈사태가 속출-로마의 공화정체제는 대제국의 통치체계를 대신할 수 없었다 .속주의 반란과 이민족의 침입이 결과적으로 나타남

 

*군벌의 등장-혼란속에서 시민군은 귀족의 사병화(용병화)-귀족(속주지사)은 막강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군벌독재화.  원로원과 정치적 대립 -대표인물: Marius (마리우스: 평민출신 원로원을 대변)   Sulla (술라:귀족출신 평민회를 지지)-대립 후 술라의 승리: 원로원의 과두제를 개혁함

 

6. 로마의 새로운 질서

 

3두정치

군벌간의 정치적, 군사적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 원로원이 기능상실이 원인-술라의 사후 그의 참모장 Pompeius106-48B.C와 Carccus 114-54B.C. 의 등장-원로원의 요청으로 이베리아반도에 남은 마리우스파를  완전 분쇄-크락쿠스는 스파르타쿠스의난을 평정 후 대부호로 정치적 야심-케사르 Caesar 100-44B.C.의 등장: 평민의 지지 

 

 

 

제1회 삼두정치

원로원과 대립 (케사르가 최고 실력자로 부상)-케사르: B.C. 59년 갈리아군단의 사령관(군사적 지위의 중요성을 의식)8년간의 갈리아지방 정복사업에 몰두(라인이서지방평정)라틴문화의 프랑스, 독일지역 전수자-크락크스: 시리아 총독부임후 파르티아전투에서 사망

 

폼페이우스와 시저의 대결구도-원로원은 시저의 군사적 성공에 경계: 정치적 대권과 직결. 시저를 군사령관직에서 파면: 그는 군대를 이끌고 루비콘강을 넘었다-결과: 이탈리아와 속주는 전쟁상태, 강력한 군대의 승리는 예고. 봄페이우스는 원로원의 지지자와 동방으로 피신.  케사르의 에스파니아 점령이후 B.C. 48년 봄페이우스군을 격파, 살해.  그는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여왕에 임용한뒤ㅡ B.C. 45년 로마에 귀환. 그는 원로원의 추천으로 10년 임기의 통령이 됨

 

 

 

케사르의 개혁

새로운 질서의 모색-행정개혁:혼란, 무질서, 부패방지의 원인: 세제를 개혁, 중앙집권제 (속주의 총독을 중앙에서 통제)시민권의 확대, 빈민층구제사업(도로, 항만 등 공공사업), 토지재분배(하층민대상)  -문화사업: 46년B.C. 율리우스력(태양력의 기초)의 제정. 44년 B.C. 종신통령(원로원은 로마공화정의 종말로 간주: 그를 암살)

 

제 2차 삼두정치

안토니우스(Antonius:  옥타비아누스(Octavianus)-케사르의 암살: 로마공화정의 혼란을 재현양자: 옥타비아누스와 케사르의 참모 안토니우스와 레피투스(Sepitus)* 3두체제는 부루투스 Brutus(시저의 암살자)의 군대를 마케도니아에서 격파.  반대파의 재산몰수와 숙청 *로마제국의 영토분할-레피투스: 아프리카 (후에 탈락 로마는 동서로 양분)  -안토니우스: 이탈리아 이서지역  -옥타비아누스: 그리스 이동지역 

 

악티움해전 Actium 31 B.C 

로마 실권장악을 위한 분할통치를 둘러싼 내분.옥타비아누스의 승리: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의 연합함대를 격파.  이집트왕국의 멸망(프톨레미왕조): 로마의 영토에 편입. 일인지배체제(제국영토의 효율적지배)가 필요: 제정이 요구. 공화정은 로마제정으로 전환하는 계기 



7. 로마제정의 발전

서기 1-2세기(제정전기): 시민공동체적 요인이 쇠퇴

 

*아우구스투스 시대(옥타비아누스)

내란과 무정부적 혼란방지를 위한 Princeps(원수정)수립Princepatus: 19세기 몸젠이 명명한 정치체제-원로원과의 타협  대권장악: imperator: 군통수권자. Augustus(존엄,지존)의 칭호: 로마   황제에 등극-그는 독재자가 아닌 로마시민의 원수 

 

Principatum(지배체제): 로마공화정의 변질. 귀족정이 아닌 일인지배 (원로원의 기능쇠퇴)속주의 총독의 사병화 금지(연금제실시, 감독관파견)상비군과 친위대창설: 국내질서유지. 도시정비: 상수, 신전, 목욕탕, 도로 정비-45년간의 치세: 혼란과 무질서를 추방한 로마의 평화시대가 열림-아우구스투스는 고대신앙을 복구하는 노력: 진리탐구에는 등한시-로마의 세계는 점점 더 판에 박힌 틀만 유지-그는 정치적 도전자에 냉혹(원로원등)-A.D. 180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죽음까지 같은 시기

 

 

*로마의 평화 (Pax Romana)

아우구스투스이후 4황제시대: 정치체제의 제도적 정비와 전문화작업이 확대-Nero의 기독교박해, 로마방화, 화산폭발(봄베이)에도 불구: 평화와 안정은 유지됨-원로원과의 타협: 군벌의 대립으로 인한 내란위협 방지 :황제권한의 강화-네로이후 5현재시대(96-180): 로마의 전성시대 로마제국의 영토 확장, 내치정비-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Marcus Aurelius(121-180): 원로원을 통해 선출  -빈민구제사업: 대규모의 토목공사  -대외정책: 무력으로 루마니아, 헝가리지방 아르메니아 진출, 속주의 반란진압. 소아시아, 유럽(이베리아반도, 베네룩스, 영국 서유럽라인좌변)   아프리카에 광할한 영토를 넓힘-철인황제: 아우렐리우스(외침과 내분의 연속: 전쟁으로 인한 인구감소 및 게르만의 이동-비단길: 중국 후한에 사신파견 (로마제국을 대태국으로 명명)

 

 

8. 제정시대의 사회

라인,도나우강의 국경유지: 법에 의한 통치, 경제력을 강화-도로, 항만, 습지개발: 무역의 증대(각국의 특산물 교역: 식민지)중국, 인도까지-교역을 통한 도시의 발달: 헬레니즘문화의 계승: 그리스-로마문명의 열매를 맺음-정복지에 지중해 고전문화을 전수시킴(프랑스, 영국,남독일, 스페인 포함)-로마시민권의 확대: 신분제사회, 귀족과 기사계급, 일반평민, 노예-노예제를 통한 경제력 증가: 신분유지를  위한 연속적 대외원정 : 막대한 군사비지출-상업의 발전을 통한 화폐경제의 일상화-대외팽창만이 새로운 재원을 창출한다는 정책: 로마사회의 내부붕괴는 팽창의 중지를 의미


9. 로마문화와 기독교

-지중해 그리스의 도시문명을 인수-로마제국의 발전과정에서 이민족의 문화를 융합하고 그리스-로마적 전통을 전수함-고전고대를 유럽중세세계에 전달하는 역할

-헬레니즘화된 그리스문화를 계승: 그리스의 독창적인 면을 수용  -로마인은 실용적인 정신으로 계승 발전-로마문명은 그리스문화의 모방에 충실: 조성이 부족: 학문, 예술분야:   건축, 도로, 수도 등 토목공사: 웅장함.  제국의 창조력의 원동력: 정치, 군사, 행정, 법률제도의 우수성확인

 

 

◎로마법의 기원과 벌전

 

로마법

-로마제국의 최고의 문화유산-그리스: 예술, 철학  로마: 법-초기: 기원전 8세기 도시국가 civitas- 6세기말 유스티아누스 법전의 집대성-최초의 성문법: B.C 450년 12표법(귀족과 평민의 대립이후 평등을 보장):-시민의 권리와 관습을 법으로 제정(시민법)-농촌사회를 규율하는 법 (엄격한 형식주의)-가부장권을 인정   -자유민, 반자유민, 노예, 가축, 물품에 대한 소송의 당사자: 가장만 인정-정복지 이민족과의 통제 및 교섭을 위한 만민법의 체계

 

 

만민법은 스토아철학의 자연법과 동일시:(제정초기 2-3세기 통용)법은 자연의 합리적인 원칙과 일치되어야 한다: 세계성, 보편타당성.-자연법: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처럼 영혼불멸하고 보편적인 법-보편적 규범, 인간의 공통된 합리성을 강조하는 스토아의 자연법사상을 토대로  세계제패를 위한 법, 행정체계를 유지하고자 함

 

 

*정복사업-만민법과 시민법: 기원 전 3세기 포에니전쟁이후 로마가 헬레니즘세계와의 접촉. 로마시민법: 로마시민에게만 적용하는 관습 및 12표법(민회의 법률) 엄격한 형식주의(법률소송제도를 채택)로마 시민의 거래법(시민법)거래행위: 매매, 금전소비대차, 조합, 저당 등에 대한 법적 보호책-자유로운 거래법은 외국인에도 통용되는 원칙을 채택(만민법으로 통용):(외국과의 소송문제에 외국인 법무관 1명)

 

시민법과 명예법: 민회에 의한 고유한 시민법과 법무관에 의한 명예법(만민법)으로 구별. 법무관은 공화정의 명예로운 관직이라는 의미-귀족의 법률학자:원로원의 구성원들: 1년 임기의 법무관임용에 자문기관 역할.  법무관 임용에 따른 승인방식서, 소송진행표를 재편집한 법전형태가 성장(영구 고시록: 변경이 금지 ) 법률의 체계화: 

 

 

공화정시대

법무관과 명예법시대-원수정시대: 황제의 칙령(제정시대)*pax romana 고전시대:(A.D. 1-2세기)-그리스 철학의 영향 (로마 법률학이 소제, 추상, 귀납의 개념을 체계화)-가이우스: 법학제요: (사람의 법, 물건의 법, 소송의 법) 시민법을 3부분으로 분류. 나폴레옹의 프랑스 민법전의 초석, 법학입문서의 역할  -해설서 저작( 해답집, 문제집, 서간집): 개별적 문제해결에 초점-사법고시의 주해역할, 법제도와 법학의 기초학설을 마련-유스티아누스의 학설집에 40명중 35인이 고전시대의 저자가 해당-지금 5%만 현존: 920페이지상당(법률 해석집)

 

 

고전시대

원수정시대(관료제도의 정비)-법학이 발전 성장하는 이유: 관료제 내에서의 법학자의 위치 지대한 것(모든 공직분야에 진출: praefectus 속주의 총독)-Princeps에 의해 위임된 재판관으로서의 법학자의 권위: 그의 해답만 인정-법무관에 자문하던 때와 다른 공인(월급)*황제의 칙령칙법(칙령)-카라칼라황제 212 로마시민권을 제국의 모든 주민에게 준 칙령-최상급심으로서의 재심원칙-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재판제도(상소제도):  -황제의 재판권은 많은 새로운 법을 발전-황제의 법률해답의 발령( 실질적으로 법학자가 기초한 것)  -법학자의 자유로운 법해석은 많은 제약을 받음-이후 모든 법의 체계는 황제의 이름으로 제도화(고전법학의 쇠퇴)

 

제정후기

3세기말 4세기 초 이후-서로마제국의 멸망   -법학의 체계화에 성공(서책)-법률학교를 통한 법학서적이 다량으로 복제됨( 개념이 일반화)-법학의 비속화: 라틴화하는 경향-콘스탄틴대제 이후의 법률은 비속법이라 함예: 테오도시우스 법전: 438 소유와 점유의 구별이 애매하고 혼동됨-서로마제국의 멸망이후 로마의 비속법은 게르만족의 관습법과 혼제하는 현상-중세에 다시 재발견

 

 

동로마 법률학교와 고전주의의 부활

서로마제국의 해체과정에서 로마법은 더욱 비속해짐-5세기 동로마는 고전주의적 입장에서 법률학교를 신규개편함 (5년 과정)고전법학자의 저술이 수집되고 해석됨-텍스트의 주해, 색인 등의 연구가 강화: 주석적 연구방법-이후 중세의 주석학파와, 현재 법해석학의 기초*유스티니아누스황제의 법전:-로마볍의 집대성-로마법은 동로마황제 Justianus 527-565 (유스티아누스)에 의해 집대성-동로마 법률학교의 연구덕택으로 단시일에 완성-학설집의 자료는 방대하지만 3년만에 533완성-고대로마법과 다르게 가부장제에 따른 엄격한 형식주의는 완화됨-즉 시민법과 명예법이 통합된 보다 일반화된 로마법체계-고전주의적 입장이 반영: 이후 동로마세계에서 비속적으로 적용됨-11세기 까지 서유럽에서는 로마법이 자취를 감춤

 

 

중세의 로마법 (주석학파)

십자군원정 콘스탄티노플과의 교역하던 피사에서 학설집의 사본발견-이후 12-13세기 볼로냐의 주석학파에 의한 법전연구가 활발-주석학파의 업적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1000년의 신.구법제도를 정리통합)의 역사적 기원 및 모순점 해결  -해석학을 통한 실제 생활에 적용시키면서 볼냐대학은 전유럽에서 몰려는 법학도를  위한 로마법 강의와 연구를 활발이 전개함  -영국은 전통적 법률전통에 따라 이를 배척함(영미법)-후기 주석학파: 주석서에 봉건법, 교회법, 도시행정법를 추가로 소재화함

 

로마법계수운동

나폴레옹법전과 19세기 독일법학이 로마법을 전승-1900년 민법전이 성립: 유스티니아누스계통의 로마법이 현행법-나폴레옹의 법전: 로마법에 강력한 영향-제국주의와 양차대전을 통해 전세계에 로마법 대륙법이 전수됨(독일-일본-한국)



로마제국의 붕괴원인

Spengler, Toynbee 문명사적 흥망고찰의 기본적 틀: 그리스-로마문화 /Gibbon: 로마제국의 몰락의 주요원인-( 야만족의 침입과 기독교의 승리: 대중화, 국교화)

 

정치적 원인/황제의 계승문제 

황제권을 둘러쌓은 궁정음모는 고질적 병폐(5현재시대는 제외)-3세기 군인황제시대: 군대가 개입하는 황제옹립과정에서 내분과 대립-제국의 통합과 황제권에 치명적결과-디오틀레티아누스의 수습책: 전제군주정를 도입 -콘스탄틴누스 이후 악화  -로마의 황제권: 제국통합의 핵심-오랜전통의 기능적 제도가 뒷받침되지 못한, 공화정에 접목된 타협의 산물-황제의 칙법과 강력한 군대의 장악-황제의 계승권문제가 애매: 황제의 신격화 작업은 지배층세력에 역효과로 나타남-군인황제시대: 5현재시대이후 (3세기): 로마의 내분과 이민족의 이동 

 

 

군대의 조직력약화  

235-285: 군사반란과 내란이 연속적으로 일어남.군인황제: 속주의 군대를 배경(26명의 군인황제 Barrack Emperor)가 교체:   자연사는 2명뿐: 모두 권력투쟁의 희생물: 군대의 동요

 

군대의 질적 변화

초기: 자유로운 중산적인 시민으로 구성된 국민병의 성격. 공화정말기: 3두정치시부터 용병대의 성격이 첨가되고 사병화함.  제정후기-말기: 속주민과 야만족 출신의 비중이 커짐: 로마에 대한 충성심이 약화. 제정후기(3-5세기)전제주의 정부형태: 3세기: 부패와 타락(금권정치): 군부의 등장: 황제의 등극을 좌우:  동서의 야만인의 침입, 혼란: 군사비의 증가, 질병이 만연

 

 

 

정치적 변화

두황제의 노력: Diocletianus 284-305, Constantinus 306-337/ Augustinus: 혼합정부체제(원수정)를 마감, 절대권력체제:   제국의 통합유지를 위한 중앙집권적 권력국가(관료제적 통제강화)-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284-305) 제국개편-강력한 황제권력을 유지: 관료제, 군제를 강화. 공화정적인 요인을 일소, 통일적 군현재도를 개편.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에서 전제적 군주정(Dominatum)으로 변질  -그는 소아시아에 군대와 함께 체류: 시리아, 이집트를 직접통치  -공동황제 막시미아누스(Maximianus) 밀라노에 체류: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북아프리카지역 통치  -2명의 황제 2명의 부황제: 제국은 4분 분할통치

 

 

콘스탄티누스Constantiuns 306-337:-비잔티움으로 수도이전: 콘스탄티노플으로 명명.  4개의 대관구 Presfectura 14개의 관구 Doicesis 117개의 주 Provincia로 분류  -중앙집권적인 관료제를 정비: 175군단으로 개편-그리스도교를 공인(민간신앙의 확대를 피할 수 없었다)-테오도시우스Theodosius 379-395 동서로 제국이 분열. 서로마제국: Odoacer 476멸망(게르만 용병대장)


게르만의 이동

-외몽골의 훈족이 유럽 침임: 이에 따른 유럽, 인도어족의 3차례 민족 이동-1차 이동: 4말-5세기 초-375년 다뉴브강을 넘은 서고트족,   -406년 라인강을 넘어선 반달, 알란, 수예브족. 이후 슬라브, 동고트, 프랑크족의 민족이동. 이에 따른 로마제국의 국경과 정치조직의 붕괴-2차이동: 유스티아누스대제 527-565의 타계이후(비잔틴 내부의 동요)-아바르족의 발칸침입, 롬바르족의 북부이탈리아 정복,   앙글로섹슨족의 잉글랜드정복, 프랑크족의 지배지역 확대(라인지방)

 

3차 민족이동: 카로링왕조의 종말-9세기 초~10세기 초: 노르만족의 프랑스와 잉글란드 및 전유럽지역에 대한 침입  -이시기: 이슬람세력의 지중해장악: 에스파니아, 사르디니아, 코르시카, 시칠리, 남부이태리(비잔틴제국이 쇠퇴)-서유럽지역: 두 세력의 침입에서 분열되고, 황폐화-카롤링조: 독일 911년까지, 프랑스, 987까지 명맥이 유지-훈족의 침입: 이에 따른 고트족이 도나우강을 넘음: 4세기. 로마황제는 군대를 동원 전투에서 패배, Valens황제

 

 

게르만의 침입

게르만의 일부는 로마의 용병화-국고의 고갈 , 신분제의 동요(군제, 조세, 토지제도)-로마인의 정신적, 도덕적 무기력이 원인-게르만의 이동(라인-도나우 지역에서 월경)동: 고트족 (소아시아와 그리스지역 침입)   서북부: 게르만(갈리아, 에스파니아, 이탈리아에 깊게 침투)동부국경: 사산조 페르시아의 흥기로 크게 위협*결과:-국경을 넘어 도시는 약탈, 방화, 파괴되기 시작,  -군사적으로 물, 인적 동원이 어려움: 강제 징병, 징세, 노동의 악순환

 

 

게르만의 이동에 따른 정치경제적 변화

로마가 그리스 도시국가의 제도를 흡수한 면도 원인: 제국의 발전은 시민공동체의식이 무력해짐 (공화정의 변질: 제정)-로마의 평등이념은 경제, 사회 구조적으로 비현실적인 면에서 나타남.-중앙집권적 관료제의 붕괴는 지방분권적 귀족정치로 이동(고대세계의 종말)-중세사회로의 과도기에 접어듬; 경제의 중심은 도시에서 농촌으로, 행정의 중심은  중앙집권에서 지방의 유력귀족으로

 

 

경제적원인 (근본적 원인)

로마의 번영은 바로 제국의 영토확장과 전리품 및 공납의 산물을 의미한다 -기술개발이나 혁신이 수반된 생산적인 경제발전의 혜택이 아님-정복의 한계=경제적 쇠퇴=황제권이 동요=제국의 해체과정을 겪음

 

로마의 경제제도

그리스와 유사한 노예제를 기반.  대토지소유제가 확대(공화정이후)노예의 인신매매가 성행,   정복사업이 둔화되면서 노예의 감소현상.  대토지경영의 어려움, 생산력저하: 토지제도의 붕괴위기-로마의 경제가 노예제에 의한 생산방식에 의존, 기술개선에 소홀한 면-기술개량에 등한시: 고용창출, 대중의 구매력 자극에 실패

 

 

 

*정복전쟁의 종식-값싼 대량의 노예공급원의 소멸을 의미-대토지소유제(라티푼디움)-콜로누스(소작제)로 변질-콜로누스: 소작제의 도입(대토지분할): 노예제도는 로마경제의 한계. 화폐경제가 흔들리면서 급여가 현물화(자연경제)-제정말기: 제국의 분할에 따른 경제적 상황의 악화: 도시의 역할이 감소(대토지소유제는  유지하는 모순)재정의 어려움은 지방화,자급자족화, 현물화의 결과를 초래-166년 이후 페스트의 창궐과 질병, 기아로 인한 소작인인 점차 부자유적인 농노화-지배계층의 면세특권이 강화: 제정말기에는 자유민이 소작인으로 전락-유산자와 무산자 계층의 대립이 뚜렷해짐

 

 

 

경제, 사회적 동요-속주의 로마시장경제로의 편입문제의 어려움. 도로(군사적 목적): 수송과 통신의 어려움: 자본의 재투자가 비효율적(비생산적),   기술투자의 어려움-과대한 군사비지출: 재정악화, 만성인플레, 화폐경제의 쇠퇴(중국, 동방으로부터 곡물, 향료, 보석수입: 막대한 금, 은을 지출

 

정신문화적원인

기독교의 성장

현실적이 아닌 내세의 신비사상에 사로잡힘-로마말기의 기독교수용: 로마정신과는 배치(원래정신의 토대를 상실)-헬레니즘-로마적 전통문화에 동화된 게르만 야만문화를 배경-로마적 게르만적 요인을 기독교정신으로 계승해나감-이는 중세유럽의 정신적 기반

 

기독교박해

로마황제의 상징적 신성성에 대한 공식적 참배요구  -속주의 군대조직은 대부분 기독교신자가 확산  -이교도적 제의를 거부, 황제의 신성성 요구에 불응이 원인-네로황제 54-68이후 9차례 그리스도교 박해  -4세기 초: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제국 최대 최후의 박해*콘스탄틴 대제: 313 기독교 공인, 관용과 호의 정책적 전환  -기독교는 사적 신조 공동체(sect)가 아니라, 사회적 종교(cicil Religion)-기독교도들도 황제를 정치적 수장으로 인정-기독교는 로마황제 중심적 제국통치에 필요하고 유용한 집단

 

 

-392년 기독교의 국교화를 통한 제국의 통합(로마적인 것과 기독교적인 것의 일치)-395년 테오도시우스 379-395: 마지막 황제의 타계이후 동-서로마의 분열.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로 대립-서유럽은 다수의 다양한 후계자 역할: 5세기 말 정치조직으로서의 로마제국은 붕괴.-동부는 새로운 로마: 비잔티움의 강력한 제국이 유지-서로마제국의 해체과정(서유럽 지역)이 진행될수록, 로마교회는 모든 로마적인 것, 즉 그리스-라틴문명의 유일한 통로의 역할 -서로마제국의 몰락이후 서유럽은 제국통합을 위한 이민족과의 전쟁에서 더욱더 새로운 민족이동 양상으로 변화되고, 이는 서유럽의 분열을 가속화 함.

 

기독교의 성장과정

사도 바울의 등장

A.D. 1-64-기독교를 세계종교로 발전시킨 율법학자이며 전도사:  -전도여행: 소아시아, 그리스, 마케도니아-로마에서 순교-바울의 기독교 세계주의: “각 교회에 보낸 서한”에 명시됨-“기독교는 율법의 마지막이라고 선언: 기독교를 유태교에서 해방시킴-기독교와 유태교의 통합을 역설하면서 기독교를 헬레니즘-로마문화 세계에 전파시켜 기독교신학의 터전을 마련

 

유태교의 쇠퇴

-로마에 대한 독립반란 66년: 1차 유대전쟁 때 기독교도는 불참)-70년 예루살렘이 함락  -제2차 유태전쟁(132-135): 유태교의 철저한 파괴*기독교의 로마전파: 로마교회의 기원은 불투명:  -58년 바울의 로마인에 보낸 서한에 근거이방인을 주체로 한 기독교는 세계종교로 발전: 수도 로마에 신자수 증가-주로 공인종교였던 유태교와 다른 면을 강조하고 로마사회의 관심사가 됨-네로의 박해(64년): 로마 시장거리의 화재사건에 소문으로 연루된 네로는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협의를 덮고 박해하기 시작함-도미티아누스의 박해; 81-96년 기독교인을 공적으로 규정하고 박해. 요한묵시록에 순교한 신자들의 이야기가 나타남

 

 

교부시대

사도시대 1세기 말 -2세기 시대)이후  -교부란 신틀라톤학파나 스토아학파에 비해 지식과 학문수준이 덜함-기독교 교회의 건설과 교의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자

-대체로 6세기까지 교회의 조직화에 노력:  -사도, 예언자라기보다 주교, 사제 등 교회를 대표-2세기 말부터 교회조직은 정비되고 독립적인 주교제가 확립*신약성서가 탄생: 2세기 말-3세기:  -현재의 성서 27서는 4세기에 공적인 인정

 

이슬람제국과 비잔티움의 발전

모하메드Mohammed 570-632이후  -지중해세계는 특히 동로마제국의 영향권(아랍지역 및 동지중해지역)은  이슬람의 권력팽창과정에 흡수됨.-8세기: 이집트, 북아프리카, 에스파냐, 서고트왕국을 정복:  이후: 남프랑스 지중해연안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형성.-바그다드: 비잔틴제국과 힘을 겨루고 있었지만 8세기는 지중해세계의 실질적인 지배자   -이슬람제국은 중세 내내 독자적인 종교로 통합된 세력이며,  -그리스-라틴문명을 보존, 성장시킨 강력한 지중해의 세력으로 유지됨-비잔티움과 더불어 서유럽보다는 높은 수준의 문명을 보존, 성장시키며, 보다 통합된 사회이다.

 

 

-양대세력(비잔틴과 이슬람): 로마제국의 직접적 후예들: 세계문명사적 의의와 중요성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유럽서구문명에 대한 특징과 구조에 대한 분석은 고전문명만으로 해명이 불가능:-로마제국은 3등분의 유산: 비잔티움, 이슬람제국, 분열된 서유럽의 형태  -기독교는 서유럽에 로마 구제국의 전통과 문명을 전달하는 유일한 통로의 역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