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베네룩스3국> 네덜란드/벨기에 / 룩셈부르크의 역사

2012. 11. 1. 00:02교회사자료/10.세계사

 

네덜란드

 

 

Koninkrijk der Nederlanden
네덜란드의 국기 네덜란드의 국장
국기 국장
표어: Je Maintiendrai
(프랑스어: 나는 유지할 것이다.)
국가: 빌헬무스 판 나소우베
수도 암스텔담
 
공용어 네덜란드어
정부 형태 입헌 군주제
여왕
총리
베아트릭스
마르크 뤼터
독립
• * 공화국
* 왕국
스페인으로부터
1581년
1815년
면적 41,526 ㎢ (131위)
 • 내수면 비율 18.41 %
인구
 • 2005년 어림 16,407,491명
 • 인구 밀도 395명/㎢ (15위)
GDP (PPP) 2005년 어림값
 • 전체 $5000억 (23위)
 • 일인당 $30,500 (15위)
HDI 0.958 (6위, 2006년 조사)
통화 유로1 (ISO 4217: EUR)
시간대 CET (UTC+1)
 • 여름 시간 CEST (UTC+2)
ISO 3166-1 528
ISO 3166-1
alpha-2
NL
ISO 3166-1
alpha-3
NLD
인터넷 도메인 .nl
국제 전화 +31
12002년 이전에는 네덜란드 휠던이 통용되었다.

 

네덜란드(Netherlands [ˈne:dərlɑnt] , 문화어: 네데를란드)는 유럽에 있는 국가이다.

 

서유럽에 있는 입헌 군주국으로 수도는 암스테르담이다.

홀란트(Holland) 지방에서 딴 이름인 홀란드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를 한문으로 음차한 화란(和蘭)으로도 알려져 있다.

 

네덜란드 왕국(Koninkrijk der Netherlanden)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인구 밀도가 높은 나라로 국토의 25%가 해수면보다 낮기 때문에 네덜란드라는 이름도 현지어로 '낮은 땅'이란 뜻이다. 이 나라는 제방(둑)과 풍차, 나무 신발, 튤립 등으로 유명하다.

 

 2009년 5월 10일 유로스타트 네덜란드가 유럽에서 가장 근로시간이 짧은 나라라고 발표했다.[2]

 

 

[편집] 지리

독일, 벨기에 그리고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영국에 둘러싸여 있으며 총면적은 4만 1000㎢이다. 북해에 면해 있는 국토는 라인 강(네덜란드어로는 레인 강(Rijn)), 마스 강(Maas), 스헬더 강(Schelde) 등이 만드는 삼각주를 중심으로 저지대가 펼쳐져 있다. 남서쪽은 구릉지대로 되어 있으나 림뷔르흐 주에 있는 이 나라 최고 지점조차도 321미터에 지나지 않는, 전체적으로 평탄한 국토를 가지고 있다.

 

현재 소유하고 있는 식민지아루바 섬네덜란드령 안틸레스도 포함한다.

 

과거에는 '네덜란드령 기아나'라는 이름을 가진 수리남은 물론 본국의 100여배도 넘는 땅인 인도네시아도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이름으로 식민지에 포함되었었다.

[편집] 기후

홀란트의 겨울

 

네덜란드는 위도가 높은 곳에 있지만, 북부 지역은 북해의 난류편서풍의 영향을 받는 해양성 기후로 1년 내내 온화한 편이다. 여름과 겨울의 기온차는 작지만, 날씨는 변하기 쉽다. 그러나 남동부 지역은 대륙성 기후의 영향을 받아 기후가 거칠고 기온차도 심하다.

[편집] 역사

[편집] 고대와 중세

켈트와 게르만인이 자리잡고 살던 네덜란드에 로마인이 들어와 외국 지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은 BC 50년 경이다. 남부의 마스트리흐트로마 시대의 요새 유적이 남아 있다.

 

로마 지배의 말기에는 프랑크와 색슨-프리스 인들이 들어와 정착하기 시작했고 이 무렵 네덜란드에 그리스도교가 자리잡기 시작했다.

 

8세기에는 카를 대제의 지배를 받게 되고, 10~13세기에는 상업을 중심으로 하는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하였으며, 홀란트 백작이 북부를 중심으로 세력을 강화하였다.

[편집] 독립 전쟁

14세기에 접어들어서는 부르고뉴(부르군트) 공작 지배하에 들어가고,

15세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와 에스파냐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때에는 근대 자본주의에 눈을 뜨게 된 시민들이 우상파괴 폭동사건[3]과 네덜란드 종교개혁 등의 끈질긴 저항으로 에스파냐 세력을 몰아내고,

 

1588년 공화국(국호는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으로 독립을 쟁취하기에 이른다. 공화국은 1815년에 폐지되고 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제[4]로 바뀐다.

[편집] 황금시대

무역국으로 발돋움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황금기에 접어든다.

 

1588년에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이 성립되자 정치적으로 안정을 되찾은 네덜란드는 해외 진출의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당시에는 총독이 통치했다).

 

17세기에는 주식회사연합 동인도 회사(VOC)를 설립하여 세계 제일의 무역국으로 발돋움하였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주주들의 투자를 받아서 설립된 주식회사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남아프리카동남아시아 등지에 인도네시아 등의 방대한 식민지를 건설하였으며, 북미 대륙에도 뉴암스테르담(지금의 뉴욕)을 건설하기까지 하였다. 오세아니아에도 간 상인들은 뉴질랜드를 발견하기도 하였다.

 

네덜란드 상인들은 일본에도 진출하였는데, 일본에서는 나가사키에 활동 공간을 마련해주었으며, '난학'(蘭學)이라고 불리는 네덜란드 문화를 배워가기도 했다.이는 막부시대 일본에서 금지한 종교기독교의 선교를 하지 않고 무역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에 문화적으로도 황금기를 맞이하여, 렘브란트 판 레인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의 화가와 에라스무스, 스피노자와 같은 철학자도 배출하였다.

 

특히 에라스무스는 그 자신은 로마 가톨릭 사제였지만,《우신예찬》으로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 종교 개혁자였으며,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인 루터, 츠빙글리의 사상형성과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된 잉글랜드 종교개혁에 영향을 주었다.

[편집] 쇠퇴기

그러나 네덜란드를 견제하려는 영국과의 계속되는 전쟁에서 밀려나 세계의 상권을 영국에 빼앗기게 되었으며, 1810년에는 프랑스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 영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815년 빈 회의의 결과 네덜란드 왕국이 새로이 탄생하였다.

하지만 로마 가톨릭 국가인 벨기에개신교 국가인 네덜란드가 합병된 왕국이었기 때문에,

1831년 벨기에네덜란드로부터 독립하여 벨기에 왕국을 건국했다.

[편집] 현대사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중립을 지키지 못하고 나치 독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프랑크도 나치 독일의 네덜란드 점령기의 인물 중 하나이다. 전후 네덜란드는 안정된 정치와 높은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식민지 인도네시아가 종전과 동시에 독립을 선언하자, 네덜란드군이 이를 탄압하여 인도네시아 독립전쟁으로 이어졌으며, 많은 비난 끝에 국제연합의 중재로 독립을 승인하였다.

 

현재는 카리브 해네덜란드령 안틸레스아루바만이 식민지의 잔재로 남아 있다.

[편집] 정치

네덜란드는 입헌군주제 국가로서 현재의 군주는 베아트릭스 여왕이다. 의원내각제를 기반으로 하는 대의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의회는 상원과 하원이 있는 양원제로 임기는 각각 4년이다. 행정부 장관은 총리에 의해 지명되며 14개의 행정부서가 있다. 현재의 총리는 얀 페터르 발케넨더이다. 최고법원과 5개의 고등법원에 각 지방법원과 간이법원이 속해해 사법권을 행사한다. 법관은 최고법원과 법무장관의 추천으로 국왕이 임명한다. 헌법재판소는 없으며 법률의 합헌 여부는 특별 법정에서 가린다.

[편집] 경제

네덜란드의 경제적 특징은 역사적, 지리적으로 무역 의존도가 높다는 것이다. 무역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외국의 영향을 받기 쉬운 약점을 가지고 있다. 농업국이었던 네덜란드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적극적으로 공업화를 추진하여 근대 공업 국가로 발전해 왔다.

 

1960년에 발견된 천연 가스 덕택에 에너지의 자급률이 높고 적극적인 해외 시장 개척에 노력하여 높은 경제 수준을 유지해 왔다.

 

로테르담, 암스테르담 등의 천혜의 항만과 수송 시설을 배경으로 국제적인 거대 기업을 적극적으로 유치했고, 석유 정제, 석유 화학, 전기 기기, 식품 가공 등이 이 나라 공업의 중심이 되고 있다. 이외에 낙농원예도 중요한 산업이며, 치즈은 네덜란드의 주종 산업이다.

[편집] 사회, 문화

[편집] 문화

회화로는 17세기 황금시대와 19세기에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뛰어난 화가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17세기 초에는 유화 기법의 선구자 프란스 할스가 활약하였고, 중엽에는 유화 기법의 완성자로 일컬어지는 렘브란트 판 레인이 나타났다. 중산 계급이나 농민의 생활을 주로 그린 얀 스테인, 풍경화가 로이스달 등도 활약했다. 실내화에서는 우아한 광선을 살린 그림으로 유명한 요하네스 페르메이르를 들 수 있으며, 19세기에는 강렬한 개성을 가진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등장한다.

 

네덜란드의 공예품으로는 델프트(Delft) 도자기와 붉은 색의 아름다운 마캄 도자기를 들 수 있다.

도자기는 16세기 말에 이탈리아의 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시작하였고, 17세기부터 중국 등의 영향을 받아 18세기에 전성기를 맞았다.

[편집] 동성애자 결혼 합법화

네덜란드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국가로 알려져 있는데[5], 그 예로 네덜란드는 유럽 국가 최초로 1993년 동성 결혼을 합법으로 인정하였으며[6], 2001년 4월 1일 0시부로 동성애자 커플의 결혼이혼을 허용하는 법이 시행되었다.[7] 단 입양은 허용되지 않으며, 정신 박약 아동과 장애 아동의 양육은 허용된다.

[편집] 마약 합법화 논쟁

네덜란드의 마약 정책은 마약 사범을 처벌하는 처벌 위주 정책이 아닌 중독성이 낮다고 판단되는 마약을 합법적으로 관리하는 정책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1976년, 상대적으로 중독성이 낮으며 인체에 피해가 적은 대마, 환각 버섯 등을 연성 마약(Soft Drug)으로 규정하여 5g 이하의 대마를 피우거나 소지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커피숍이라는 곳에서 대마를 피는 것을 허용하되 500g 이하만 판매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이는 연성마약을 허용함으로써 헤로인코카인 등 이른바 중독성 마약을 가까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지만, 이로 인한 폐해도 있다. 바로 대마중독자 문제이다.

 

 2008년, 네덜란드에서는 마약중독자가 줄어든 대신 대마가 주는 편안함 때문에 복용을 끊지 못하는 대마중독자가 늘어나고 있다.

[편집] 종교

네덜란드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갖고 있는 개신교 국가였기 때문에, 메노나이트 교회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망명하기도 하였다. 현재도 네덜란드 기독교인의 28.3%는 개신교 신자이며, 최대교단은 네덜란드 개혁교회(NHK, 네덜란드 장로교회)이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개신교가 많지 않은 남부지역에서 영향력이 있다.

이외에 힌두교, 유대교(나치독일유대인 박해로 교세가 감소함), 이슬람교도들도 있다.

[편집] 행정 구역

네덜란드는 12개의 주(provincie)로 나뉜다.

프리슬란트 주의 프리지아인은 프리지아어를 사용하여 독자적인 정체성을 갖고 있다.

[편집] 대한민국과의 관계

네덜란드는 조선 시대에 벨테브레가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들어온 일, 헨드릭 하멜도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도착한 일 등으로 한반도와 처음으로 만나게 된 유럽 국가이다. 네덜란드는 1949년 7월 25일, 대한민국한반도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승인하였으며, 한국 전쟁 때에는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해 대한민국을 지원하였다. (보병 1개 대대, 군함 1척) 또한 네덜란드는 유럽 국가 중 최초로 대한민국에 투자한 국가이기도 하며, IMF 사태 때에도 필립스전자 등의 네덜란드 기업들은 대한민국을 떠나지 않았다.

 

특히 2002년 월드컵에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네덜란드 출신의 거스 히딩크가 부임하고, 본선에서 4강 신화를 이룩할 때 네덜란드의 국민들이 네덜란드포르투갈아일랜드에 밀려 본선에 진출하지 못한 아쉬움을 대한민국 대표팀에 대한 응원으로 대신하면서 매우 가까워졌다. 3년 후인 2005년 네덜란드에서 개최된 20세 이하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도 대한민국 팀에 대한 응원이 많았으며, 특히 조별리그 2차전 나이지리아와의 경기에서 대한민국이 극적인 2:1 역전승을 거두자 네덜란드 관중들이 환호하는 장면이 TV에 포착되었었다.

 

얼마 전에는 일본군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한 최초의 유럽 국가가 되기도 하였는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인도네시아 (당시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네덜란드 여성들도 조선의 여성들처럼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에 거스 히딩크 (네덜란드 파르세벌트 출신), 조 본프레레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 출신), 딕 아드보카트 (네덜란드 헤이그 출신), 핌 베어벡 (네덜란드 로테르담 출신) 4명의 네덜란드인이 차례로 임명되었다. 한국인은 대사관 가족을 포함하여 1000명 이상이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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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벨기에>

 

 

 

 

 

 

벨기에 /국기
벨기에 /지도

 

(네)Koninkrijk België(프)Royaume de Belgique.공식 이름은 벨기에 왕국(Kingdom of Belgium).
공식명칭 : 벨기에왕국(Kingdom of Belgium)
인구 : 10,697,000
면적 : 30,528㎢
수도 : 브뤼셀
정체·의회형태 : 입헌군주제, 양원제
국가원수/정부수반 : 국왕/총리
공식 언어 : 네덜란드어·프랑스어·독일어
독립년월일 : 1830. 10. 4
화폐단위 : 유로(euro/€)
국가(國歌) : La Brabanconne

 


북서 유럽에 있는 국가.
유럽 대륙의 북서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수도는 브뤼셀이다. 남북길이는 약 193km, 동서최대너비는 약 240km이다. 북쪽과 북동쪽은 네덜란드, 동쪽은 독일·룩셈부르크, 남쪽과 남서쪽은 프랑스와 경계를 이루며 북서쪽은 66km 길이로 북해와 접한다. 면적 30,528㎢, 인구 10,779,000(2009 추계).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작은 국가이고 인구밀도는 가장 높은 나라에 속한다.

 

1830년 독립 이래로 의회 형태의 정부를 갖춘 세습에 의한 입헌군주제를 실시하고 있다.

 

벨기에는 처음에는 중앙집권정부 형태였다. 하지만 1980, 1990년대 플랑드르, 왈론니아, 브뤼셀 수도권 지역들로 권력을 분산하는 연방국가 형태로 변모했다.

 


문화적인 면에서 벨기에는 서부 유럽의 로망스어와 게르만어족 사이에 있는 복합적 문화를 가진 국가이다. 나라는 동부 지역에 독일어를 사용하는 소수의 국민들을 제외하고는, 프랑스어를 쓰는 사람들과 네덜란드어에서 파생한 플라망어를 쓰는 사람들로 나뉜다.

 

왈론인이라 불리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전체 인구의 약 1/3을 차지하고, 남부의 5개 주인 에노·나무르·리에주·왈론브라반트·뤽상부르에 주로 거주한다.

 

플라망인(플랑드르인)은 전체 인구의 절반이 넘고, 북부와 북동쪽에 있는 5개 주인 서플랑드르·플랑드르·동플랑드르·플랑드르브라반트·안트웨르펜·림뷔르흐에 주로 거주한다.

 

왈론브라반트와 플랑드르브라반트 사이의 경계 바로 북쪽에 해당되는 브뤼셀 수도권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공식적으로는 두 언어를 사용할 수 있지만 대다수가 프랑스어를 사용한다. 이들은 전체 인구의 1/10 정도를 차지한다.

 


벨기에와 후에 벨기에로 통합되는 정치적 독립체들은 풍부한 역사적·문화적 관련성들을 지녀왔다. 중세 대학의 고딕적 웅장함과 상업도시 및 그 도시의 작은 마을은 강을 끼고 깎아지른 절벽 위의 성채가 지배한다. 이들은 16세기에 북부 르네상스의 정점 중 하나를 차지했던 회화와 음악에 있어서 폭 넓은 전통들을 통해 20세기 예술에 기여했으며, 지난 시대의 전통문화를 유지하고 있다.

 

벨기에는 수세기 동안 유럽의 주요한 전쟁터였고, 특히 현대에 들어와서는 워털루 전투(1815)와 20세기에 발생한 2차례 세계대전을 겪었다.

 

면적과 인구를 고려하면, 벨기에는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산업화되고 도시화된 국가들 가운데 하나이다. 기에는 덜란드 및 셈부르크와 함께 베넬룩스 경제동맹을 결성했으며, 유럽연합(EU) 및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이다.

 

이러한 국제기구들은 모두 수도 브뤼셀이나 그 근교에 본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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룩셈부르크

 

 

룩셈부르크의 국기 룩셈부르크의 국장
국기 국장
공용어 룩셈부르크어, 프랑스어, 독일어
정부 형태 입헌군주제
대공
총리
앙리
장클로드 융커
독립
동군연합 해체
네덜란드로부터 독립
1867년 5월 11일
면적 2,586 ㎢ (167위)
 • 내수면 비율 0.6 %
인구
 • 2005년 어림 468,571명
 • 2005년 조사 468,571명
 • 인구 밀도 171명/㎢ (45위)
GDP (PPP) 2005년 어림값
 • 전체 $293.7억 (95위)
 • 일인당 $69,800 (1위)
HDI 0.956 (9위, 2006년 조사)
통화 유로1 (ISO 4217: EUR)
시간대 CET (UTC+1)
 • 여름 시간 CEST (UTC+2)
ISO 3166-1 442
ISO 3166-1
alpha-2
LU
ISO 3166-1
alpha-2
LUX
인터넷 도메인 .lu
국제 전화 +352
11999년까지는 프랑.

룩셈부르크 대공국(룩셈부르크어: Grousherzogdem Lëtzebuerg 그루셰르초그템 레체베르크, 프랑스어: Grand-Duché de Luxembourg 그랑-뒤셰 드 뤽상부르[*], 독일어: Großherzogtum Luxemburg 그로셔초크툼 룩셈부르크[*])은 서유럽에 있고 대공작이 다스리는 대공국(大公國)이며, 수도는 룩셈부르크이다.

룩셈부르크는 세계에서 국민 소득이 높은 나라중 하나이기도 하다.

 

[편집] 역사

  • 963년 아르덴 백작 지그프리트가 룩셈부르크의 고성을 거점으로 삼아 이 지역의 지배를 시작한다.
  • 1060년경 지그프리트의 증손인 콘라트가 처음으로 룩셈부르크 백작을 칭한다.
  • 콘라트의 증손인 에르메진데의 시절에는 영토는 3배로 팽창해 와론 지방도 병합된다.
  • 1308년 에르메진데의 증손인 하인리히 7세가 신성로마 황제로 추대된다.
  • 1354년 하인리히 7세의 손자인 황제 카를 4세가 룩셈부르크를 공국으로 승격시킨다.
  • 1443년 부르고뉴공국필리프 2세가 룩셈부르크를 구입한다.
  • 1477년 샤를 7세의 후계자 마리가 후의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하는 것으로,
  •           룩셈부르크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넘어간다.
  • 1556년 에스파냐 합스부르크가의 영지가 된다.
  • 1659년 피레네조약에 의해 남부지역이 프랑스에 할양된다.
  • 1684년 프랑스에 병합된다.
  • 1697년 라이스바이크조약에 의해 에스파냐에 반환된다.
  • 1714년 라슈타트·바덴 조약에 의해 오스트리아령이 된다.
  • 1794년 프랑스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 1815년 빈 회의에 의해 대공국으로 승격된다.
  • 1839년 런던회의에 의해 서쪽 반을 벨기에에 할양한다.
  • 1842년 독일 관세동맹에 가입한다.
  • 1867년 런던조약으로 프로이센軍이 철수하고 독립과 중립이 보장된다.
  • 1890년 대공을 겸한 네덜란드 국왕 빌렘 3세의 죽음에 의해 나사우-바일부르크가의 아돌프가 대공이 되고 동군연합은 해소된다.
  • 제1·2차 세계대전 때는 독일에 점령당한다.
  • 한국전쟁 때에는 대한민국에 군대를 지원하였고, 10명이 희생되었다. 기욤(Guillaume) 대공장자가 방한한 바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 때는 선수,임원단을 파견하였다.

[편집] 역대 대공

아돌프(Adolphe) 1890-1905
기욤 4세(Guillaume IV) 1905-1912
마리(Marie-Adélaïde) 1912-1919
샤를로테(Charlotte) 1919-1964
장(Jean) 1964-2000
앙리(Henri) 2000-현재

[편집] 정치

[편집] 지리

독일,프랑스,벨기에 사이에 있는 내륙국가로 독일프랑스완충국으로서의 의미도 지녔다.

[편집] 행정 구역

수도룩셈부르크 시이다. 룩셈부르크에는 3개의 지방, 12개의 주(Canton), 116개의 구(Commune)가 있다.

[편집] 경제

Luxembourg city 2007 10.JPG
룩셈부르크의 교회
도시 전경
룩셈부르크 전경
룩셈부르크의 한 은행

 

전통적으로 협소한 국토 때문에 이웃 나라와 유대를 굳게 하여 1843년부터 1918년에 독일과 관세 동맹을 맺고, 1921년 이후 벨기에-룩셈부르크 경제동맹, 1944년 베네룩스 경제동맹, 1952년 유럽석탄철강공동체,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 등에 가맹함으로써 소국의 불리함을 극복하고 있다.

 

프랑스와 국경을 따라 발달한 철강산업은 룩셈부르크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철강산업은 무역액의 29%, 국내총생산(GDP)의 1.8%, 산업고용의 22%, 노동력의 3.9%를 차지한다.

 

남부의 구틀란트를 중심으로 농업이 이루어져 감자, 보리, 사탕무 등을 생산하고 있으며, 독일 국경을 따라 흐르는 모젤 강 연안의 포도원에서 생산하는 포도주는 특히 유명하다.

 

 이 나라 제1의 산업인 광공업은 남서부의 뒤들랑주, 로딩겐, 에슈쉬르알제트, 디페르당주 등지에서 산출되는 철광석을 원료로 하였으나, 철광석층의 대부분이 고갈되어 프랑스의 수입에 의존한다.

 

이밖에 화학제품·금속제품·시멘트를 생산하며, 맥주, 담배, 낙농제품의 제조도 성하다. 그러나 석유파동 이래 세계적 경제의 혼미는 룩셈부르크의 철강업에도 큰 영향을 끼쳐 정부는 경제적 부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외국기업유치에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자국(自國)을 금융시장으로 부상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현재 룩셈부르크는 은행·보험업, 철강업을 기간산업으로 하는 서비스산업국이자 공업국으로 실업률유럽 연합 국가 중 최저이며, 1인당 국내총생산은 세계 최고수준이다. 1998년 이후에도 제조업의 수출증가나 금융업의 호조에 의해 고성장을 유지하였다.

 

무역면에서는 1998년 수출 208억 달러, 수입 174억 달러이며, 주요 수출품은 금속, 기계, 전기제품, 플라스틱, 고무, 섬유 등이고 수입품은 기계류, 전기제품, 금속, 수송용 기기, 광산물품(석유 포함) 등이다.

주요 무역 상대국은 독일, 프랑스, 벨기에, 영국, 네덜란드 등이다.

[편집] 주민

게르만족이 바탕이 되고 프랑스인과의 혼혈이 있다.

포르투갈인과 이탈리아인들이 소수로 살고 있는 데, 이들은 룩셈부르크의 철강 산업의 붐이 일어날 때 노동자로 들어왔다.

[편집] 언어

헌법상의 명시적 조항은 없고, 룩셈부르크어(이 언어는 독일어의 방언으로 규정한다), 프랑스어, 독일어가 사실상의 공용어이다. 입법활동은 프랑스어가 독점하고, 행정 및 사법분야는 3개 언어를 사용한다. 전국민의 97%가 익숙한 프랑스어이기에, 프랑스어사용국기구(프랑코포니)의 정회원국이다. 영어도 관광 장소에서 사용한다.

[편집] 종교

국교는 없고, 주민 대부분은 전통적으로 로마 가톨릭에 속해 있다. 그러나 세속화 경향이 심하고, 외국인의 유입이 많아 무신론자나 이웃 종교 신도의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개신교, 유대교, 정교회, 성공회, 이슬람교 등의 신자가 있다.

[편집] 문화

[편집] 대한관계

룩셈부르크는 한국전쟁 참전국으로 UN군으로 참전하여 44명의 병력을 파병하였다. 1961년 대한민국과 수교하였으며 해운협정(1987년)과 항공협정(2003년)을 체결하였다. 북한과는 2001년 수교하였다.

출처 : 내마음의 보석상자(上善若水/?光養晦)
글쓴이 : 대륙철도횡단열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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