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곤잘레스: 초대교회사(94- )

2009. 11. 19. 01:28목양자료/1.기독교자료

p.94. 그렇다면 철학자들과 기독교 사이의 이러한 부분적 일치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저스틴은 그 대답을 로고스의 교리에서 찾고자 하였다. 로고스는 'word'와 'reason'을 동시에 의미하는 헬라단어이다. 헬라철학에서 오랫동안 견지해 온 전통에 의하면, 인간의 지성은 모든 실재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로고스, 혹은 우주적 이성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실재를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만약 우리가 2+2=4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 이유는 우리들의 지성과 우주 속에 2+2=4로 만드는 이성, 혹은 질서인 로고스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제4복음은 예수님 안에서 로고스 혹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저스틴에 의하면 성육신에서 발생한 사건은 온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이성, 혹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제4복음에 의하면, 이 로고스야말로 모든 이들을 비추는 진정한 빛이시다. 이는 곳 성육신 이전에 이미 모든 진정한 지식의 근원이셨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미 히브리인들의 신앙이 다름 아닌 그리스도에 기초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성육신 이전에 그들에게 계시되셨다고 하였다(고전10:1-4). 이제 저스틴은 비록 희미하기는 했지만, 이교도들 가운데서도 또한 동일한 로고스를 알고 있는 인물들이 있었다고 첨가하였다. 즉 플라톤의 저술 가운데에 진리가 포함되어 있다면 이러한 진리는 하나님의 로고스에 의해 허락된 것인데, 이 로고스는 곧 예수님 안에서 성육신한 바로 그 로고스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면에서 볼 때에 고대의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기타 지혜자들은 '기독교인들'이었다. 왜냐하면 이들의 지혜는 결국 그리스도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곧 성육신이 불필요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 옛날 이러한 철학자들은 '부분적으로' 로고스를 알았는데 반해 성육신을 통해 그를 본 자들은 그를 '온전히' 알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스틴의 주장에 따르면, 비록 이교도들에 의해 생성되었다 할지라도 고전문화속에서 발견되는 모든 선한 것들과 진리들은 기독교에 속한 것이다. 이러한 그의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곧이어 그들의 신앙과 고대 문화사이에 계속 다리를 놓고자 시도하는 기독교인들이 나타났다. 그들의 업적과 그 속에 내재하는 위험들은 앞으로 다른 곳에서 언급하게 될 것이다.

 

저스틴에게 질문해야겠다. 2+2=4를 알게 되면 '부분적으로' 로고스를 알게 되고 그 부분적인 지식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가?

 

p.99. "오류는 절대 그 자체의 모습으로 우리들 눈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나타난다. 그리하여 어리석은 자들은 오류가 진리 자체보다도 더욱 진리라고 믿게 된다"(리용의 이레니우스).

 

p.99. 가장 많은 배경을 가진 초심자들이 초대교회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러한 다양성은 교회생활을 더욱 풍부하게 하였으며 교회가 갖는 메시지의 우주성에 대한 증명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또한 이 때문에 그 메시지를 여러 가지로 다르게 해석하는 경향도 나타났는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메시지의 본질 자체를 위협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위험은 당시에 유행했던 혼합절충주의, 즉 어떤 일관된 체계의 교리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여러가지 체계로부터 서로 다른 요소들을 종합하여 진리를 찾고자 하는 움직임 때문에 더욱 증가되었다. 그 결과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장하였으나 어떤 이들은 그의 멧지의 핵심 자체를 오염시키거나 부인하는 모습까지도 보이게 되었다.

 

p.106. '신약전서'라 불리는 부분에 있어서는 우선 복음서들이 교회의 일반적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런체 처음 교회들이 정경 가운데 한 개의 복음서 이상을 포함시키기로 결정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후기에 들어서서는 4보음서 가운데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는 자들도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미 초대기독교인들 역시 이러한 차이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신자들은 한 가지 이상의 복음서를 사용하기로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곧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의 도던에 대한 직접적 반응이었다....마르시온에 의해 조작된 누가복음에 대항하여 교회는 여러 복음서들을 수용하였다. 어떤 때는 3개, 혹은 4개였는데, 왜냐하면 4복음서는 공관복음서들보다 늦게 교회의 공인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하였던 비밀의 전통과 사적인 해석들에 대항하여 교회는 공개된 전통을 주장하였다. 즉 모든 이들에게 열려져 있는 바 복음서들의 복수성을 채용한 것이다.

 

p.108-111. 사도신경의 기본골격은 아마 150년 경 로마에서 이루어진 듯 하다,. 당시에 이것은 '신앙의 상징'이라고 불리웠다....그러나 이때의 상징이란 단어는 현재의 그것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이는 황제나 장군들이 그의 사절들에게 주는 증명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수신자들이 이를 통하여 진정한 사자를 식별할 수 있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마찬가지로 로마에서 편찬된 '상징'이란 것을 통하여 기독교신자들이 당시 유행하고 있던 여러 이단들, 특히 영지주의와 마르시온주의에 대항하여 진정한 신자들을 식별할 수 있는 증거라는 의미였다. 누구든 이 신경을 고백할 수 있는 신자는 영지주의자나 마르시온주의일 수 없었다.

  이러한 '상징'은 특히 세례문답 때에 널리 사용되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질문의 형식으로서 세례받기를 원하는 신자에게 주어졌다.

 

  "그대는 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가?

   그대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셨으며, 이 때문에 죽으시고 제3일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하늘로 승천하시고 성부의 오른 편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가?

   그대는 성령과 거룩한 교회와 몸의 부활을 믿는가?"

 

  이러한 질문들을 읽어보면, 곧 두 가지 점에 착안할 수 있다. 우선 이 가운데에는 후에 [사도신경]이라 불리운 신경의 핵심적 부분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이 신경이 세례때에 사용되었던 삼위일체적 문답을 통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신자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들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에 대한 진실한 신앙의 시험을 위해 사용되었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초기신경이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선, 보통 '전능하신'이라고 번역되는 판토크라토르(pantokrator)는 문자 그대로 하면 '모든 것을 통치하시는' 이라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특히 강조하는 바는 아무 것도 물론 물질세계를 포함하여, 하나님의 통치영역 밖의 것이란 없다는 의미이다. 모든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요소를 포함한 이 우주는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모든 것들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이 신경이 가장 자세히 다루고 있는 부분은 물론 성자에 관한 대목이다. 왜냐하면 특히 기독론에 있어서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이 교회와 판이하게 다른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첫번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명기되어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요점은 예수님이야말로 이 세계와 일체의 실체를 다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동정녀마리아에게' 나셨다는 귀절은 동정녀탄생을 특히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 물론 이는 인정되어 있다 - 차라리 예수님께서는 마르시온이나 또 다른 자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지구 위에 갑자기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태어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특별히 본디오 빌라도의 이름이 나타나는 것은 이 로마총독을 비난하고자 함이 아니요 그의 죽음이 역사적인 사실, 즉 그 날짜를 지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실임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돌아가시고 부활하셨다'고 선언함으로써 가현설을 부인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예수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재림하실 것을 확인함으로써 마르시온의 잘못을 공박하고 있다. 

 

p.110. 비록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에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한 부분까지 다루고 있지는 않으나 세번째 질문 역시 동일한 관심을 보여준다. 여기서 특히 '거룩한 교회'를 지칭하는 것은 영지주의자들의 여러 학파들과 마르시온의 교회에 대항하여 기독교신자들이 정통교회의 권위를 강조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몸의 부활'을 기록한 것은 우리의 몸이 악하다거나, 혹은 실질적 무존재라는 관념을 최종적으로 부인한 것이다.

  비록 이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신약의 정경이나 신경의 형성이 효과적이기는 했으나, 논쟁은 결국 교회의 권위문제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는 누군가가 정사를 가리는 것이 필요했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의 중요성 때문에 참으로 심각한 의미를 지닌다. 모든 이들은 진정한 메시지가 예수님에 의해 가르침을 받고 전달되었다는 데에 동의하고 있었다. 영지주의자들은 일련의 비밀에 싸인 교사들에 의해 그 원래의 메시지를 소유한다고 주장하였다. 마르시온은 그가 구약에 대해 가지고 있던 견해와 일치하지 않는 부분들을 삭제할 수 밖에 없긴 하였지만 바울서신들과 누가 복음을 통해 바로 그 메시지를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에 대항하여 보편교회는 바로 자기들이야말로 원래의 복음과 예수님의 진정한 교훈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여기서 논쟁의 초점이 되는 것은 교회의 권위에 대항한 이단들의 주장이라는 문제이다.

  바로 이 시점에서 사도전승의 개념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사도전승이론을 쉽게 이야기한다면, 만일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전달해야 할 어떤 비밀의 지식들을 가지고 계셨더면 - 실제로는 없었다 - 이러한 가르임을 다름 아니라 그가 교회를 맡겼던 사도들에게 전달하셨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만약 사도들이 이러한 가르침을 전수받았담녀, 그들은 이를 교회의 지도자직을 게승한 이들에게 전달해 주었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 이러한 비밀의 교훈들이 있다면 이는 사도들의 지계제자들과 이러한 제자들의 후계자들인 감독들이 소유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 즉 2세기에 - 이러한 직접적 사도들로부터의 전승을 주장할 수 있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밀의 전통과 교훈을 전승받고 있다는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p.116.그러나 2세기 말에 나타난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도전은 또 다른 반응을 요구하였다. 이들 이단들은 자기들 나름대로의 교리체계를 마련하였으므로 교회일반도 이에 대해 정통신학을 체계적으로 수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러한 교단들의 이론체계가 너무도 포괄적이고 거대하였으므로 기독교교사들의 응답 역시 그 규모가 커질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비교적 전반적인 기독교진리의 해석을 시도하는 저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레니우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터툴리안, 그리고 오리겐 등의 작품들이 바로 이것이다.

 

p.119.천사들은 임시적으로 인간보다 높은 위치에 있을 뿐이다.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때에, 우리는 천사들보다 위에 서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우리들의 교제는 천사들의 그것보다 더욱 친밀하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기능은 마치 왕자의 첫걸음을 인도하는 선생의 기능과 같다. 비록 선생이 임시적으로 왕자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으나 결국은 왕자가 선생까지도 다스리게 될 것이다.

  인류는 천사들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양손'에 의해 교훈받는다. 이 양손은 곧 말씀과 성령이시다. 이러한 양손의 인도에 의하여 인류는 성숙하게 되어 하나님과의 긴밀한 교제를 더욱 증가시켜간다. 이렇나 과정의 목표는 이레니우스가 정의한 '신화'였다. 즉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보다 더 신성에 가깝도록 만들어 가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결코 우리가 하나님과 동일하게 된다든가, 혹은 인간 자신의 고유성을 상실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보다 너무나 우월한 위치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아무리 그를 닮아 성숙해 간다 하더라도 도저히 그에게까지는 미칠 수는 없다.

 

p.121. 하나님의 왕국이 건설되는 최후의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담당하시는 목자의 직무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구속받은 인류는 계속 그와의 교제를 통해 더욱 성장할 것이며, 이러한 신화의 과정은 영원히 계속 되어 우리를 하나님께 가까이 이끌어 갈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는 이레니우스 속에서 하나님의 경륜이 역사를 통해 전개된다는 감격적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의 촛점은 성육신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이 사건을 통하여 인류의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았을 뿐만 아니라 태초부터 인간과 신의 결합이야말로 역사의 목표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륜은 인간들과 연합하시고자 하는 것이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특별한 모습으로 성취되었다.

 

p.122. 그(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이레니우스와는 달리 목회자가 아니라 사상가요 연구자였다. 그가 학문을 탐구한 목적은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을 돕고, 이교도 지성인들에게 기독교가 절대로 불합리한 미신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p.124. 옛날 선지자들이 히브리인들에게 대해 담당했던 역할을 철학자들은 헬라인들을 위해 담당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율법의 계약을 맺으셨으며, 헬라인들과는 철학을 통한 계약을 맺으셨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성경과 철학자들 사이의 공통점을 발견할 것인가? 언뜻 보기엔 양자 사이에 엄청난 거리가 있는 듯 하다. 그러나 클레멘트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게 되면 결국 철학자들이 깨달았던 진리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 이유는 성경이 풍유적으로, 클레멘트늬 말을 사용한다면 '비유로써'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의 본문들 속에는 한 가지 이상의 의미가 숨어 있다. 우리는 문자적 의미를 무시할 수 없으나, 이러한 수준에 만족하는 이들은 성인으로 장성하지 않은 채 우유만을 탐하는 자들과 같다. 성경본문에는 문자적 의미를 넘어서서 진정 지혜로운 자들이 발견해야 할 또 다른 의미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가 있으며, 양자는 서로 떨어져서 그 기능을 발할 수 없다. 이성은 증명될 수 없이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제일 원리들 위에 그 논리를 전개한다. 진정 지혜로운 자들에게 있어서 신앙이야말로 제일 원칙, 즉 시발점이며, 이성은 그 위에서 작용하는 것이다. 단지 신앙으로만 만족하고 그 위에 또 다른 건축물을 계속 짓기 위하여 이성을 사용하지 않는 기독교신자들은 영원히 젖으로만 만족하는 어린아이와 같다.

 

p.125. 클레멘트 신학의 실제 내용에 관하여는 그다지 상세하게 다룰 필요가 없겠다. 그는 자신을 성경해석가로 간주하였으나, 그는 풍유적 주석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플라톤주의에 가까운 사상과 교리들을 성경 속에서 추출하곤 하였다. 하나님은 불가해한 존재로서 우리는 단지 상징과 부정적 용어로서만 그에 관해 말할 수 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 아니신가만 말할 수 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관해서는, 단지 인간의 용어로서 표현할 수 있는 그 이상의 실재라고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이 점에서 클레멘트는 이미 저스틴이 지향했던 방향을 좇고 있다. 양자간의 가장 큰 차이점은 저스틴이 이교도들에게 기독교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로고스의 교리를 사용했던 데 반해, 클레멘트는 같은 교리를 이용하여 기독교인들에게 철학을 진리에 관하여 보다 개방적 태도를 취하도록 촉구했다는 점이다.

 

p.127. 그(터툴리안)의 목표는 이단들이 잘못되었을 뿐만 아니라 교회와 논쟁을 벌일 자격조차 없음을 증명하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성경이 교회에 속한 것이라 주장하였다. 이미 수세대를 두고 교회는 성경을 사용해 왔으며, 이단들은 그때까지 그 소유권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물론 모든 성경들이 처음부터 다 교회에 속한 것은 아니었으나 당시에는 그러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이미 합법적으로 교회에 속해 있는 재산을 변경하고 사용하고자 하는 몰상식한 존재들이다....

  ....이단들은 성경을 해석할 권리조차 없으므로, 이러한 해석들조차 격에 맞지 않는 것이다. 교회는 성경의 정당한 소유자인 만큼 이를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유일한 존재였다.

 

p.128. 그것은 16세기에 카톨릭교회가 프로테스탄트에 대항하여 사용하였던 주된 논리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터툴리안의 경우에는 그의 논리가 단지 형식적 계승만이 아니라 수 세대에 걸친 교리의 계속성에 근거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할 것이다. 종교개혁 시대에 바로 이러한 교리의 계속성이 문제가 되었었으므로, 가톨릭의 논리는 터툴리안의 시대만큼 설득력을 갖지 못하였다.

 

p.129-30. 그런데 207년경 바로 이 이단의 징벌자이자 교회권위의 창조자가 몬타누스운동에 합류하게 된다. 과연 왜 터툴리안이 이러한 행동을 했는가는 교회사에 남겨진 많은 신비의 문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그의 저술을 통해서나 당시의 기록을 통해서도 그의 동기를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왜 터툴리안이 몬타누스주의자가 되었는가에 관하여는 쉽게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터툴리안의 성격과 신학, 그리고 몬타누스주의의 성품 사이에 나타난 유사점을 지적할 수는 있다.

 

p.131. 터툴리안은 아마도 몬타누스파의 엄격한 모습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법률가로서의 그는 항상 모든 사물들이 질서를 이루고 있는 완전한 체제를 추구하고 있었다. 비록 당시 보편적 교횓르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으나 터툴리안으로서는 인정하기 어려운 불완전성이 너무도 많았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계속되는 죄를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당시 교회가 곧 성령의 새로운 시대에 의해 대체될 중간적 상태에 있다고 보는 것이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고, 일부 고대저술가들은 터툴리안도 그의 생애 말기에 몬타누스파에 실망한 나머지 자기 자신의 분파를 설립했다고 전해 준다. 이 분파를 가리켜 당시 학자들은 '터툴리안파'(Tertullianists)라 불렀다.

 

p.132. 이러한 모든 이유 때문에 터툴리안은 기독교역사상 특유한 인물로 남아 있다. 모든 이단들에 대해 지칠줄 모르던 수호자가 말기에 일반교회들에 의해 이단이라 간주되었던 운동에 참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시기에도 정통신학의 미래에 큰 영향을 미쳤던 신학논문들과 용어들을 만들어 내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라틴어를 사용한 최초의 기독교신학자였다. 라틴어는 당시 로마제국의 서방에서 사용되던 언어이었으므로 그야말로 서방신학의 창시자라고 분류될 수 있을 것이다.

 

p.134-6. 오리겐의 신학에 쓰는 정신은 그의 스승 클레멘트의 그것과 매우 비슷하다.....오리겐은 성령에 관하여는, 성령의 영광이 성부와 성자에 못지 않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사도들의 전통이 완전 명료하지 않다고 보았다. ...

  그러나 오리겐은 우리가 일단 이처럼 중요한 교리들에 승복한 후에는 다른 문제들을 보다 자유스럽게 명상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예를 들어, 사도들과 교회의 전통은 우주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문제에 관하여는 자유스럽게 연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1장에는 창조에 관한 두 가지 이야기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오리겐 이전의 유대인학자들도 알고 있었다. 그 중 한 장면에서 인류들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 창조되었으며 '그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고 표현되었다. 두번째 장면에서는 하나님께서 먼저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 후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를 만드셨다고 되어 있다. 첫번째 장면에 나오는 바 하나님의 행동을 묘사하는 희랍어 동사는 '창조하다'인 반면 두번째 장면에서는 '형성하다' 혹은 '형태를 주다'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양자 사이에는 어떤 의미의 차이가 있을까? 현대학자들은 이 두 가지를 조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오리겐은 실제로 두 개의 창조가 있었기 때문에 두 개의 창조장면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오리겐에 의하면, 최초의 창조는 순수하게 영적인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신 것은 육체를 갖지 않은 영혼들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본문은 '남자와 여자', 즉 성별없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형성하셨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다'고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오리겐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창조된 영혼들이 신적인 것에 관한 명상에 전념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일부가 명상을 게을리하여 타락하였다. 그리하여 하나님께서는 제2의 창조사역에 임하시게 되었다. 두번째 창조는 물질적인 것으로서 타락한 영혼들을 위한 임시의 처소를 마련키 위한 것이다. 가장 바닥으로 떨어진 영들은 악마들(demons), 그리고 나머지들은 인간 영혼들이 되었다. 바로 이러한 인간영혼들 -타락하여 선재하던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현재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육체들을 만드셨다. 즉 하나님께서는 흙으로 이들을 '형성하여' 일부는 남자로, 일부는 여자로 만드신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모든 인간영혼들이 이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 순수한 정신들로서 - 오리겐은 이들을 이지들(intellects)이라 불렀다 - 존재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이유는 이전에 순수한 영적 존재들로서 죄를 범했기 때문이다. 비록 오리겐은 그의 모든 주장들이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고 역설했으나, 이 부분은 플라톤주의적 전통에서 연유된 것이 분명하다. 플라톤학파는 이미 오랫동안 이러한 주장을 해오고 있었다.

  이 세상에서는 사단과 그 악마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고 있으므로, 이러한 사단의 세력을 쳐부수기 위해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들의 진정한 영적 고향으로 돌아갈 길을 보여주셔야만 했다. 그 뿐 아니라 사단 역시 우리들과 같은 영적 존재에 불과하며,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므로 궁극적으로는 사단까지도 구원받을 것이고, 따라서 일체의 피조세계는 모든 존재가 순수한 정신으로서 존재하는 원래 상태로 귀환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적, 정신적 존재들은 그때에도 여전히 전과 같은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므로 실상 새로운 타락, 새로운 물질 세계, 그리고 새로운 세계의 타락, 구원, 그리고 타락이라는 순환이 영원히 계속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게 된다.

  이러한 이론을 공부하면서 우리들은 오리겐의 정신적 사고의 규모에 경탄할 수 밖에 없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는 교회의 역사를 통해 열렬한 숭배자들을 소유해 왔다. 그런데 우리들은 오리겐이 이 모든 이론들을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진리나 혹은 교회의 기존교리를 대처할 신조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권위있는 가르침과 비교되어선 안될 자기 자신의 개인적 의견으로 제안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또한 오리겐이 여러 가지 점에서 기독교신자라기 보다는 플라톤주의자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예를 들어 오리겐은 이 세상이 보다 열등한 조물주의 창조라고 했던 마르시온과 영지주의자들의 교훈을 부인하였다. 그러나 그는 역사와 아울러 물질세계가 죄의 결과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특히 이 점에서 오리겐은 역사의 존재를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의 일부라고 파악하였던 이레니우스와 큰 대조를 이룬다. 또한 영혼들의 선재라든가 타락과 구원의 영원한 순환에 이르러서는 오리겐이 기독교의 정통적 교리를 벗어났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출처 : 곤잘레스: 초대교회사(94- )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