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곤잘레스: 현대교회사(320- )

2009. 11. 19. 01:24목양자료/1.기독교자료

p.320. 교회가 비잔틴제국으로부터 전통적으로 받았던 지원들은 축복만은 아니었다. 이러한 제국과의 관계를 통해 희랍교회는 방대한 특권을 누렸으나, 동시에 그 자유는 제한받아야 했다. 서방의 경우 교황들이 국왕들보다도 더 강력했던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는데 반해, 동방에서는 황제들이 교회를 통치했으며, 황제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총대주교들은 그 직위을 박탈당하거나 대체되곤 했다. 그리하여 황제가 자기 조직을 구원하기 위해 로마와 재결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결정했을 때, 비잔틴교회 내의 다수가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재결합이 이루어졌다. 1년후인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터어키인들에게 함락당했다. 수많은 비잔틴기독교신자들은 이 사건이 동방교회를 이단적인 로마와 강제로 연합시켰던 황제의 폭거로부터 교회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해석했다....

  콘스탄티노플 시에 있는 교회들 가운데 반수가량은 모스크로 전환되었으나, 나머지 교회에서는 국가의 완전한 보장 아래 기독교의 예배를 계속할 수 있었다. 1516년 오토만제국이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정복하게 되자, 그곳에 있는 기독교신자들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 아래 두었다. 1년 후 이집트가 터어키에게 함락되었을 때에는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로 하여금 그곳의 신자들을 다스리게 했다. 이를 통해 총대주교들은 터어키제국내에서 또 다른 별개의 기독교국가를 통치하는 것처럼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술탄의 정책에 반대하는 총대주교들은 가차없이 그 직위가 박탈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수세기에 걸쳐 헬라어 사용권 교회들의 신학활동은 서방의 영향 아래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기간 중 서방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던 신학적 문제들은 헬라어사용권 교회에서도 논의되었으며, 1629년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키릴 루카리스(Cyril Lucaris)가 펴낸 [신앙고백](Confession of Faith)은 짙은 프로테스탄트 색채를 띠고 있었다. 비록 루카리스는 직위을 박탈당하고 살해당했으나, 그의 이름은 계속 많은 이들에게서 존경받았다. 어떤 이들은 그의 신앙고백은 영감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결국 1672년의 종교회의는 그를 "칼빈주의적 이단자'라고 정죄했다.

 

p.323. 러시아의 많은 신자들은 1453년의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이단적인 로마와의 재결합에 동의한데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라고 해석했다. 이러한 결론은 결국 콘스탄티노플이 '제2의 로마'로서 로마를 대체했듯이 이제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고 주장하는데 까지 발전해 갔다. '제3의 로마'야말로 정통신앙을 수호할 하나님으로부터의 임무를 부여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1547년 러시아의 이반IV세는 "짜르", 즉 황제라는 칭호를 자칭했다. 이는 곧 그가 그 옛날 로마나 콘스탄티노플 황제들의 후계자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마찬가지로 1598년 모스크바의 대주교(metropolitan)는 총대주교의 칭호를 차지했다.

 

p.324.피터 대제(Peter the Great, 1689-1725)는 또 따른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그리스 정교 신자들과의 화해보다는 서구의 영향을 받아들이는데 더욱 적극적이었다. 이에 따라 교회 역시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신학에 큰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어느 쪽을 선호했든, 이들은 자기의 본래의 정교회신앙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들은 주로 카톨릭, 혹은 프로테스탄트의 방법론 등을 도입하여 정교회 본래의 신학을 발전시킬 길을 찾았다. 논쟁의 대상이 되는 문제에 있어서도, 일부는 카톨릭적으로, 일부는 프로테스탄트적으로 기울어져 공존했다.

  피터 모길라(Peter Mogila)가 이끄는 키에프학파는 가톨릭적 성향을 띠고 있었는데 반해, 테오파네스 프로코포비크(Theophanes Trokopovick) 및 그의 추종자들은 러시아의 종교가 프로테스탄트노선을 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9세기초에는 계몽주의 및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프로코포비크학파가 우세했다. 그러나 19세기말 민족주의적 반동이 강하게 일어나, 러시아 고유의 전통을 강조하기 시작했으니, 이것이 곧 친슬라브주의(Slvaophile)운동이다. 이 운동을 이끈 중심인물은 평신도출신의 신학자 알렉시스 코미야코프(Alexis Khomiakov, 1804-1860)로서,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도입하여 정교회가 주장했던 보편성이야말로 가톨릭이 주장하는 교회의 통일과 프로테스탄트측의 주장하는 복음의 자유를 포용하는 완전한 신테제(Synthesis)임을 증명하고자 했다.

 

p.326-327. 5세기에 있었던 기록논쟁 시기부터 동방 정교회 내에서도 종교회의의 결정에 대해 일치할 수 없는 입장들을 유지했다. 이전 페르시아 제국 영토내의 대부분 신자들은 마리아를 가리켜 '하나님의 어머니'라 부르기를 거부했으므로 네스토리우스파라 불리기도 했다. '앗시리안'이라는 또 다른 이름으로 알려진 이러한 신자들의 역사는 상당히 복잡하다. 중세의 한 동안은 이 교회에 속한 신자들이 상당히 많았으며, 중국에까지 선교의 손을 뻗치기도 했지만, 근래에는 특히 모슬렘 신도들로부터 심각한 박해를 받았다. 20세기초에는 핍박 때문에 신자들의 수가 격감했다. 많은 생존자들은 서구로 이주했다. 이들은 처음에는 사이프러스로 일단 이주했다가 결국은 시카고에 정착했다. 현재 10만명에 달하는 이들 기독교신자들은 이란, 이라크, 그리고 미합중국에 흩어져 살고 있다.

  칼케돈종교회의의 '신앙의 정의'가 예수님의 인성과 신성을 분리하는 것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그 결정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던 신자들은 흔히 '단성론자'(Monophysites)라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명칭이 이들의 기독론적 입장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 교회들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이집트의 콥트교회와 여기서 파생된 이디오피아교회이다. 후자는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은 경우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원은 1974년 하일레 셀라시에(Haile Selassie)황제의 몰락과 함께 종식되었다. 또한 "야곱파"(Jacobite)라 알려진 고대의 시리아 단성론파 교회는 시리아와 이라크에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다. 야곱파의 수장인 안디옥 총대주교는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에 자리잡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이 총대주교의 관할 아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독립을 유지하고 있는 인디아의 시리아파 교회는 사도 로마에 의해 설립되었음을 자칭하고 있으며, 토착화된 형태에서 약 50만명의 신도를 유지하고 있다.

  이미 지적한 바처럼 아르메니아교회는 칼케돈 신경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가장 큰 이유는 페르시아인들이 아르메니아를 침략했을 때 로마제국이 아무런 원조도 하지 않았던데에 있다. 이들의 영토는 터어키인들에 의해 정복되었는데, 이들은 계속하여 전통적 신앙을 고수했기 때문에 터어키인 정복자들과 게속 갈등상태에 있었다. 오토만 제국의 세력이 약화됨에 따라 이러한 갈등은 폭력사태로 나타났다. 1895년,1896년,1914년에걸쳐 터어키의 지배 아래 있던 아르메니아인 수천명이 학살당했다. 약100만명이 이를 피해 이주했는데, 그 결과 시리아, 레바논, 이집트, 이란, 이라크, 그리스, 프랑스 그리고 서유럽 일대에는 상당수의 아르메니아기독교신자들이 거주하고 있다. 현재 소련의 영토 일부가 된 아르메니아지방에서는 교회가 계속 영토내의 다른 교회들과 비슷한 상태로 존속하고 있다.

 

p.328. 이러한 여러 교회들을 전체적으로 살펴볼 때 두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첫째는 이들 교회들이 눈부신 속도로 콘스탄틴 이후시대에 돌입했기 때문에, 이제 서로 비슷한 변화를 겪어야만 했던 다른 기독교신자들에게 상당한 통찰력과 도움을 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번째는 서방기독교신자들이 동방교회로 하여금 가장 혹심한 상황 속에서도 계속 생존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예배의식과 힘을 과소평가했었다는 깨달음이라 할 수 있겠다.

 

p.329. 가톨릭교회는 현대의 각종 사상과 운동들을 공포와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 경계하고 있었다. 이러한 반동을 가져온 이유들 가운데는 새로운 이탈리아공화국에게 교황령을 빼앗겼다는 것, 새로운 세속국가들이 가톨릭교회의 사역을 방해할지도 모른다는 공포, 현대사상에 의해 신자들이 무신론적으로 물들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p.330. 20세기 초반 이들 비판세력들은 계속 교회에 의해 무시되고 억압당했다. 따라서 20세기의 가톨릭 교회 역사야말로, 트렌트회의와 제1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정을 계속 고수하는 세력과 현대세계의 도전에 대응하여 교회를 개방시키고자 하는 세력들 사이의 갈등의 역사라 할 수 있겠다.

 

p.333. 피우스12세는 몇시간씩 기도와 명상에 잠기는 신비주의자이기도 했으며, 주위 사람들을 혹사하는 엄한 상전이기도 했다. 그는 개인적 매력 때문에 친구와 적들에게서 존경을 받기도 했다. 그의 재임 기간 초기는 역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얼룩져 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지자 이탈리아를 전쟁으로부터 구하고자 노력했고, 히틀러를 전복시키기 위한 음모를 지원하기도 했다. 일단 전쟁이 발발하자 피우스 12세는 언젠가 때가 오면 중재자의 역할을 담당할 욕심으로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중립의 위치 때문에 나치의 잔악한 유대인학살사건을 방관할 수 밖에 없었으니, 그는 이 때문에 후에 심한 비판을 받게 되었다. 그를 지지하는 이들까지도 당시 교황이 독일에서 벌어지고 잇는 학살상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또한 이들은 교황의 항의도 이를 방지하지 못했으리라는 구실로 그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기도 한다.

 

p.338-339. 그러나 요한23세라는 칭호를 택한 나이많은 교황의 짧은 재임기간(1958-1963) 중 역사적 변화들이 발생했다. 그가 일찍이 아비뇽 교황시대와 피사에 거주했던 반교황(anti-pope), 요한23세에 의해 얼룩진 요한이라는 칭호를 택한 것만 보아도 그가 무언가 새로운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막중한 임무에 비해 나이가 너무 많았음을 자각했던 요한23세는 신속하게 행동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교황선출 후 3개월만에 에큐메니칼종교회의를 소집할 계획을 발표했다. 교황청내의 많은 인사들은 이러한 생각에 반대했다. 과거의 종교회의들은 대부분 교회가 당면했던 시급한 문제들 - 특히 위험한 이단사상들 -을 처리하기 위해 소집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제1차바티칸공의외에 의해 교황무오성의 교리가 반포된 이후에는, 이미 종교회의시대가 막을 내렸으니, 이제 교황은 절대적 군주로서 교회를 통치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도 많았다. 실제로 피우스9세 이루 카톨릭교회는 일련의 중앙집권화 현상을 경험했다. 그러나 교황 요한의 시각은 달랐다. 그는 다른 주교들을 '나의 형제들'이라 불렀으며, 이들에게 명령하기보다는 충고를 듣고 싶어했다. 그는 또한 교회를 전면개혁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확신했으며, 이러한 작업은 전체 교회주교들의 단결된 지혜와 관심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p.343. 수백년 동안 가톨릭교를 지배해 온 고루한 사상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역시 종교의 자유 및 현대 세계 속에서의 교회의 역할에 대한 문서들이다, 전자는 집단 뿐만 아니라 개인들의 종교자유가 존중되어야 한다고 선언했다. 또한 모든 종교단체들은 '인간의 생활에 필수적인 공공질서를 침해하지 않는 한' 자기들의 원칙에 따라 조직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했다. '현대세계 속에서의 교회에 관한 목회헌법'(Pastoral Constitution on the Church in the Modern World)은 공의회에 의해 발표된 가장 긴 서류이며, 19세기에 고수되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인다. 신앙과 윤리에 관한 가톨릭교의 원칙들을 주장하는 동시에 그 내용은 현대생활의 여러 방면에 관하여 적극적 개방성을 보여 주고 있으며, 가정생활, 경제와 사회문제, 정치, 기술과 과학, 인간문화의 중요성과 다양성 등을 깊이있게 다루고 있다. 다음과 같은 서두를 보면 그 전체 내용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압박받는 자들의 기쁨과 소망과 슬픔과 고통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이들의 기쁨이요, 소망이요, 슬픔이요 고통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룩하고 모든 이들을 위해 마련된 구원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전진하는 이들의 공동체가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공동체는 스스로 인류 및 그 역사와 깊이 결합되어 있음을 자각한다.

 

p.345. 가톨릭 교회의 내부사정을 잘 모르고 있었던 세계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보여준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건을 낳게 한 신학적 작업은 이미 50년 이상이나 계속되고 있었다. 신부의 노동현장 개인운동과 같은 실험은 로마당국이 찬성하지 않았던 신학적 탐구의 결과였다. 무엇보다도 가톨릭신앙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바티칸에 의해 무시되거나 부인되었던 신학자들의 존재를 잊을 수 없다.

 

p.346-348. 테이야르는 진화론의 일반적 원칙을 받아들이면서도 '적자생존'이 진화를 가능케하는 원동력이라는 다윈의 제안을 부인했다. 그는 대신에 '복잡화 및 지각에 관한 우주법칙'(sosmic law of complexity and consciousness)를 제안했는데, 이는 보다 복잡하고 보다 높은 지각을 향해 진화가 이루어지도록 작용하는 힘이 있다는 의미였다. ...

  그리스도 속에서 인성과 신성이 완전하게 결합하듯이 우리들도 최후에는 완전한 우리들 자신임과 동시에, 완전하게 하나님과 연합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몽인 교회야말로 종착점에 중심을 두고 있는 역사적 실재이다. 따라서 데이야르는 과학과 신학, 그리고 신비적 요소까지를 한데 결합했다. 그러나 그는 대부분의 신비주의적 전통과는 달리 이 세상을 인정하는 신비주의자였다.

  이러한 테이야르의 전우주를 포괄하는 체계를 다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 속에서도 그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진화과정을 '끝에서부터 시작하여 태초로' 관찰하고자 했던 그의 시도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망라한 현대신학자들로 하여금 종말론에 큰 관심을 갖도록 했다. 바로 이러한 영향 때문에 현대신학에서 종말론은 다른 신학들에 첨부된 부록으로서가 아니라, 중요한 시발점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둘째로, 진화과정의 계속성과 이 가운데 참여하는 우리들의 의식적 노력을 강조했던 테이야르의 덕분으로 다른 신학자들도 하나님의 경륜 속에 참여하는 인간의 모습을 중요시하게 되었으며, 역사를 형성하는 과정 속에서 인간이 적극적 동인으로 간주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그가 주창했던 이승적 신비주의는 많은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경건생활을 정치적 행동주의와 연결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p.348. 루백(Henri de Lubac)은 테이야르처럼 광범위한 우주적 관심에 기울어지지는 않았으나, 초기 기독교전통에 관한 그의 심오한 지식 때문에 가톨릭신학에 보다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러나 그 역시 테이야르와 마찬가지로 인류는 한 개의 목표를 가지고 있으며, 전체 역사는 이러한 목표의 관점으로부터 가장 잘 이해될 수 있는데, 이 목표는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의 법률적 기구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영체로서의 교회야말로 세계의 한 가운데에 존재하는 성레(sacrament)였다.

 

p.349.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했던 또 다른 전문가인 이브 콩가르(Yves Congar) 역시 비슷한 경향을 띠고 있었다. 그는 1939년 프랑스군 병사로 참전하여 1940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에서 전쟁포로생활을 했다. 그리하여 그 누구보다도 현대인들의 잔인함을 몸소 체득한 바 있었다. 도미니크 수도사였던 그는 후에 스트라스부르크에 있는 도미니크수도원의 감독이 되었다.

  그는 루백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각종 신학논쟁에 대한 반동으로 그 전통의 범위를 좁혀 왔기 때문에, 원래의 전통이 가지는 풍성함을 상실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특히 교회의 자기이해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당시 지도자들 사이에 만연하고 있던 바 교회를 법률적 계급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원래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로 이해되어 왔으며, 그 속에서 평신도야말로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20세기초의 많은 가톨릭신학자들과는 달리 다른 교파에 속한 신자들에게도 매우 개방적 태도를 보였다.

 

p.350. 라너는 생전 3,000편 이상의 책들과 논문을 남겼다. 그 내용은 가장 심오하고 복잡한 신학문제부터, '우리는 왜 밤에 기도하는가' 등 평범한 일상생활까지 총망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방법론은 모두 비슷했다. 그는 전통과 현대세계를 모두 인정하고서, 일반사람들이 생각지 못했던 질문을 전통을 향해 던지는 것이었다. 그는 우주의 신비를 해결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신비적 본질 자체를 확실하게 보여줌으로써 신비성을 일상생활에 도입하는 것이었다.

  철학적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와 실존주의의 지도자이자 그의 교수였던 마틴 하이덱거의 영향을 깊히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단지 기독교의 가르침을 전파하는데 도움이 되는 한에서만 철학에 관심을 가졌다.

  또한 일반 평신도들을 위한 저술은 매우 적었으며, 주로 신학자들을 상대로 글을 쓰면서 이들로 하여금 전통의 새로운 해석에 눈을 뜨게 하고자 노력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가 그때까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던 전통적 해석들과는 다른 해석을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프팡스인들처럼 로마 당국에 의해서 금령을 받지 않았다. 그의 영향은 직접 간접적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모든 선언문들에 미쳤으나,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야는 역시 감독제도의 기능에 관한 문제일 것이다.

  실제로 수세대 동안 로마카톨릭 교회는 왕실 정치의 본을 따라 로마의 권력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라너는 감독제도의 개념을 탐구하여, 로마의 우위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감독제도의 집단지도체제적 성격을 강조했다. 이는 곧 로마가 진정한 의미에서 카톨릭, 즉 보편성을 갖게 됨을 의미했다. 로마나 서구 유럽적인 관점을 진리의 기준으로 고집하지 않고, 서로 다른 문화권에서 적응해 나간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보편성과 집단성의 개념이 단지 감독제도뿐만 아니라, 일상용어의 사용, 그리고 각양 문화의 상황에 따른 예배의식의 적용 등에 관한 공의회결정의 배경을 이루었다.

  건전한 신학적 학문과 전통의 이해와 재해석, 그리고 이러한 전통이 새로운 시대에 적용할 수 있도록 발전시킨 라너의 모습은 그후 나타난 각종 신학들, 특히 우리가 최종적으로 살펴볼 라틴아메리카의 해방신학들을 수용하고 평가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따라서 20세기 로만카톨릭의 모습은 수세기에 걸쳐 현대세계의 도전을 단지 대결과 정죄로 일관했던 입장을 벗어나, 이 세계와 새로운 대화를 모색했던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러한 대화의 결과 가톨릭 신도들 뿐만 아니라 프로테스탄트신자들, 그리고 비기독교인들까지도 기대하지 못했던 새로운 에너지를 가톨릭교회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즉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개최되기 오래전부터 로마당국이 경원했던 신학자들에 의해 이처럼 예기치 못한 발전을 위한 길이 닦여지고 있었다.

 

p.354. 19세기에 가톨릭교가 현대세계의 도전들에 창조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결과 프랑스에서는 회의주의와 세속주의가 창궐했다.

  20세기에 들어서는 자유쥬의 및 그 낙관적 희망의 실패로 말미암아 독일, 스칸디나비아, 영국 등 전통적으로 프로테스탄트가 득세했던 지역에서도 역시 회의주의와 세속주의의 세력이 득세한 것을 찾아 볼 수 있다. 20세기중반에는 이미 북부유럽이 프로테스탄트의 본진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했으며, 그 지도적 위치는 다른 지역들로 이전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의 결과

 

  1914년 전쟁이 발발할 즈음, 수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유럽에서 고조되어가는 긴장을 감지했으며, 교회들의 국제적인 조직을 이용하여 전쟁을 방지해 보고자 했다. 이러한 시도가 실패했을 때, 이러한 지도자들 가운데 이루는 국가주의적 감정에 휘말려 들기를 거부하고, 교회를 화해의 통로로 사용해 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중심인물은 1914년부터 루터란의 웁살라 대주교였던 나단 죄더블롬(1866-1931)이었으니, 그는 전쟁에 참여한 양측을 망라하는 지기들을 통해 기독교가 가지는 교제의 보편적이고 초국가적인 본질성을 과시하고자 했다. 전쟁 후, 평화애호자로서 명성과 노력을 통해 그는 초기에큐메니칼 운동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프로테스탄트 진영에서는 시대의 사건들을 이해하고 이에 대응할 수 있는 해답을 제공할 신학을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인간의 본질과 능력에 관하여 한없이 낙관적이었던 자유주의는 당시의 상황에 대처할 수 없었다. 죄더블롬 및 기타 스칸디나비아신학자들은 루터 및 그의 신학에 관한 연구를 재개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했다. 19세기 독일의 자유주의학자들은 루터야말로 자유주의의 선구자이며, 독일정신의 진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제 스칸디나비아 및 독일신학자들은 루터의 신학을 보다 깊이 탐구하면서, 그 이전의 해석과는 상이한 점들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부문에서 중요한 업적들은 구스타브 아울렌(Gustav Aulen)의 [크리스투스 빅토르,Christus Victor]과 앤더스 니그렌(Anders Nygren)의 [아가페와 에로스]라 할 수 있겠다. 이들은 모두 악의 세력에 대한 새로운 자각과 조건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는데, 이는 그 전 세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p.358. 바르트는 전면 수정된 [로마서주석]의 제 2판을 끝내자마자 괴팅겐의 교수로 갔다. 그는 그후 뮌스터, 본, 그리고 바젤 등에서 계속 교수로 재직했다. 바르트의 [로마서주석] 제2판에서는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뚜렷이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시간과 영원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간격, 인간의 업적과 하나님의 행동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 등을 주장한 데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많은 이들은 바르트의 [로마서주석]개정판이야말로 일찍이 키에르케고르가 저술했던 [기독교권에 대한 비판](Attack on Christendom)의 바르트판이라고 말해왔다.

  바르트가 가르치기 시작할 때에는 이미 그가 나름대로의 새로운 학파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학파는 흔히 '변증법적 신학' 혹은 '위기신학' 혹은 '신정통주의'라 불리웠다. 그의 신학은 절대로 우리들의 소유가 될 수 없이 항상 우리들에게 대치하고 있는 하나님의 신학, 이 하나님의 말씀은 동시에 '예'이면서도 '아니오', 즉 동시에 긍정과 부정이 될 수 있다는 신학, 하나님의 임재가 우리들의 노력에 안식과 영감이 아니라 위기를 가져다 준다는 신학이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불트만과 고가르텐은 바르트의 사상이 그 접근방법에 있어서 지나치게 정통적이며, 현대인들의 회의에 정면으로 해답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 집단을 떠나게 된다. 또한 브룬너 역시 자연과 은총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바르트와 동의하지 못했으므로 갈라서게 되었다. 브룬너는 은혜가 행동하기 위해서는 인간들 속에 '접촉점'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바르트는 그렇게 할 경우 자연주의신학이 다시 도입되게 될 뿐만 아니라, 은혜가 스스로 그 자체의 '접촉점'을 마련한다고 믿고 있었다.

  어째튼 바르트는 그의 신학적 순례를 계속했다. 1927년에는 [기독교교의학] 제 1권이 출판되었다. 바르트는 그 가운데에 신학의 목적은 슐라이마허나 다른 이들이 주장했던 바처럼 기독교신앙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 했다. 그의 작품의 분위기 역시 변화했다. [로마서주석]에서는 과의 오류를 지적하는 선지자의 모습이었으나, 이제 그는 또 다른 조직신학을 수립하고자 애쓰는 학자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하여 위기의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의 신학이 되었다. 그런데 그는 이 전체계획이 사실은 출발점에서부터 잘못되어 있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바르트는 안셀름을 연구하고, 19세기의 프로테스탄트신학을 살펴본 결과 자기의 [기독교교의학]이 지나치게 철학에 양보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그는 [기독교교의학]에서 신학은 우리들의 가장 깊은 실존적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준다고 제안했으며, 자기의 신학을 대신할 기본구조로서 실존주의철학을 사용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 해답뿐만 아니라 질문까지도 부여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예를 들어서 죄의 문제만 하더라도, 우리가 처음부터 죄를 자각하고 복음이 이에 응답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은혜의 말씀이 죄를 깨닫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말씀을 모르고는 은혜도 죄도 알 수 없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 때문에 바르트는 그의 거대한 조직신학적 작업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신학의 교회적 지표를 강조하기 위해 이를 [교회교의학]이라 이름했다.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던 이 13권으로 된 저술들은 1932년에서 1967년 사이에 출판되었다.

  그의 [교회교의학]이야말로 의심할 바 없이 20세기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신학작품들 가운데 하나이다. 많은 이들이 체계화된 신학은 과거의 유물이며, 신학은 기껏해야 전공논문으로 이루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즈음, 바르트는 가장 뛰어난 신학을 위한 새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그의 [교의학]을 읽노라면 그가 초대교회로부터의 기독교전통에 통달하고 있음을 즉각 알게 된다. 또한 거의 40년에 걸쳐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전체작품이 일관성있는 흐름을 유지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물론 제목에 따라 그의 강조점은 바뀌지만, 전혀 새로운 출발점은 찾아볼 수 없다. 또한 특기할 만한 것은 전체적 신학 작업에 대해 가지고 있는 바르트 자신의 자유와 비판의 정신이다. 그는 신학을 하나님의 말씀과 혼동하지 않는다. 그는 신학이란 아무리 진실되거나 정확하다 할지라도 결국은 인간의 작업에 불과하며, 그렇기 때문에 항상 자유스러움과 기쁨, 그리고 유머까지를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처 : 곤잘레스: 현대교회사(320- )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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