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9. 01:23ㆍ목양자료/1.기독교자료
p.277. 19세기의 눈부신 지리적 확장은 오직 16세기의 그것에나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16세기가 카톨릭확장기라고 한다면, 19세기는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확장시대였다.
이처럼 거대한 움직임의 정확한 결과를 아직도 확실하게 평가할 수는 없지만, 기독교의 역사에서 볼 때, 19세기의 가장 중요한 사건이야말로 모든 인종들과 국가들로 이루어진 진정한 우주교회의 설립이라 할 수 있겠다. 반면 이러한 모습이 식민지주의와 경제적 제국주의의 기틀 아래 이루어졌음을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이러한 구조는 그 후 교회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러한 그의 교회관이 과연 성경적인가? 신정통주의의 신학적 견해를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p.280. 서구세계의 많은 이들은 물론 이러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일부는 이러한 식민지의 확장이 자기들의 국익에 위배된다는 이유에서 이를 반대했다. 그러나 대부분 기독교신자였던 또 다른 집단은 식민지화된 현지의 주민들에 대한 착취에 반대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식민자들은 피식민지들이 누릴 혜택에 따라 자기들의 행동이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즉 하나님께서는 백인들의 수중에 서구문명과 기독교신앙을 맡기셨다. 따라서 유럽인들과 북미인들은 세계의 나머지 인류와 이를 공유해야 한다는 이론이었다. 나머지 세계에까지 공업화, 자본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기독교의 혜택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 '백인들에게 주어진 사명'이었다.
물론 이러한 환상을 꿈꿀 근거들도 있기는 했다. 예를 들어 의학의 혜택이 오지에까지 전파되어 수많은 인명들을 구했다. 교역과 공업발전은 여러 지역의 부를 증가시켰는데, 이러한 이유 때문에 현지인들 가운데 일부 계층은 기꺼이 협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수많은 현지인들이 농토를 빼앗기고 방황하게 되었으며, 수백년 동안 현지를 이끌어 왔던 문화와 전통이 파괴되었고, 전세계에 걸쳐 부자와 가난한 자들 사이의 생활수준의 차이가 커져가기만 했다. 어쨌튼 이러한 전체식민주의의 기반을 이루고 있던 인종적, 문화적 자만심은 20세기 중반을 특징짓는 반식민적 반동을 불러 올 수 밖에 없었다.
p.281. 또한 선교사들이 식민지주의의 열려진 문을 통해 들어갔다는 주장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선교사들이 식민지에서 사역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백인상인들이나 정복자들보다 먼저 오지에 들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부분의 경우 식민지의 관리들이나 상인들은 선교사역을 반대하고 훼방하곤 했다. 왜냐하면 현지의 종교적 갈등이 교역을 방해할까 겁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구 제국의 식민지 확장과 선교영역의 확장이 중복되었던 것은 사실이며, 이들 양자는 상황에 따라 서로를 돕기도 하고 갈등을 겪기도 했다.
p.282.이러한 협회들의 출현은 19세기 선교운동의 또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즉 일반신자들에 의한 폭넓은 지원이다. 그 이전의 수백년 동안 대부분의 선교활동은 국가의 공식적 지원 아래 이루어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있어서 대부분의 서구정부들은 선교활동과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같은 경우는 자기들의 교역지에 선교사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방해했다. 대부분의 유럽 정부들과 미국은 선교사들과 그 사역에 대하여 중립적인 -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약간 적대적인 - 태도를 견지했다. 이론적으로 불 때 선교사들은 다른 자국민들보다 더 특별한 보호를 받지는 못했다. 그런데 특히 재정지원의 측면에서 볼 대, 현대의 선교사들은 그 이전의 현상과는 큰 대조를 이룬다. 선교활동을 위해 자금을 제공하는 정부나 교회들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선교지로 나가고자 하는 이들은 대중들에게 직접 호소해야만 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선교협회가 성장하고 번성했던 것이다.
p.284.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신자들 가운데에서는 여성선교사들이 고국에서는 금지되어 있던 설교나 교회개척 등의 책임을 수행하기 시작했다(특히 당시의 인종차별로 말미암아 열등한 인종들에게는 백인여성들이 성경을 가르치는 것도 괜챦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결국 이러한 여성들의 모범과 이들의 성공담에 힘입어 유럽과 미합중국내의 여성들은 자기들에게도 이러한 기회를 줄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선교활동이야말로 서구의 프로테스탄트들 사이에서는 여성운동의 근원 중 하나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선교활동의 중요한 결과 가운데 하나는 서로 다른 여러 교파들 사이에 발생한 협동정신이라 할 수 있겠다. 유럽이나 미합중국내에서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던 교파들 사이의 경쟁이 인디아나 중국의 선교 사역현지에서는 큰 장애물이 되었다. 따라서 수많은 선교사들과 이들을 통한 개종자들은 교파간의 울타리를 낮추고자 노력했다. 어떤 선교협회는 여러 교파로 구성되었다. 또한 선교지에서는 경쟁을 회피하고 서로 협력할 수 있는 길을 항상 간구했다. 그리하여 적어도 프로테스탄트진영에서는 에큐메니칼운동이 19세기와 20세기의 선교활동의 경험으로부터 연유한다고 할 수 있겠다.
p.302. 두 가지 의미로 볼 때, 이는 에큐메니칼 운동의 발생을 뜻한다. 첫째로, 에큐메니칼이라는 단어 자체가 '사람이 사는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 따라서 19세기에 들어서야 기독교는 실질적 의미에서 '에큐메니칼'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둘째로, 만약 '에큐메니칼'이라는 것은 기독교인들의 연합, 혹은 통일과 관련지어 생각한다면, 현대적 기독교통일운동을 불러온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 선교활동임을 쉽사리 알 수 있을 것이다.
p.311. 그리하여 스스로를 '제 3의 로마'라고 자칭하고 있었던 러시아교회는 마치 터어키의 침략 아래 비잔틴교회가 놓여던 상황과 비슷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새 정부 역시 전쟁을 포기했다. 그러나 국제여론과 교호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반혁명주의자들에 대항한 내란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적군이 승리하게 되었을 때, 소비에트정부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교회야말로 자기들의 숙적임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p.312. 유럽에서는 많은 이들이 국제연맹을 통해 세계제1차대전과 같은 비극적 사건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랐으나, 파시즘의 출현으로 이러한 소망은 무산되었다. 처음 뭇솔리니의 지도 아래 이탈리아에서 강화되었던 파시즘은 전쟁을 신성화하여 상처난 국가적 자존심을 이용했으며, 국가전체를 전체주의적 병기로 변화시켰다. 이들의 사회문제에 관한 정책은 혼란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처음에는 과격한 혁명분자들과 합세했으나, 곧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를 이용하여 산업자본가들과 연합하고, 권력과 경제력을 독점한 새로운 귀족층을 창조했다. 어째튼 민족주의를 강조함으로써 국가적 자존심을 자극하고, 민주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를 증오하면서 일부 자본가들을 위한 독재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파시즘의 전체적 양상이었다.뭇솔리니의 표현대로 이들은 '아이를 낳는 것이 여성의 임무라면, 전쟁이야말로 남자들의 의무'라고 부르짖었다.
p.313. 기독교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태도는 여러가지였다. 스페인의 경우 프랑코는 가톨릭 교회의 충실한 아들이라고 선언했다. 뭇솔리니의 태도는 상황에 따라 항상 변했다. 히틀러는 인류에 대한 사랑 및 다른 뺨까지 돌려대는 기독교의 윤리의 교훈이 정복과 권력을 부르짖는 그의 궁극적 목적에 상치된다고 생각했으나,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고자 했다.
파시즘의 매력 중 하나는 그 옛날의 영광을 되찾겠다는 것이었다. 뭇솔리니는 로마제국의 재건을 약속했다. 그리스의 파시스트들은 스파르타식 군국주의와 비잔틴제국의 영광을 약속했다. 스페인의 팔랑헤당(Falagistas)은 스페인제국의 '황금시대'를 중흥시키겠다고 했다. 물론 이러한 여러가지 약속과 소망들은 상호모순적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배경에 자리잡은 전쟁의 신격화, 언론의 자유에 대한 혐오, 전체주의적 민족주의, 그리고 일체의 평등주의에 대한 반대 등을 기반으로 파시스트의 운동들은 한데 뭉쳐 일체의 민주주의, 자유주의, 혹은 평화주의에 대적했다.
p.317. 이러한 새로운 변화 속에서 미합중국 뿐만 아니라 유럽의 전통적 국가들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러한 서구제국들의 많은 이들은 제국주의정책이야말로 고상한 이상의 결과라고 배우면서 자라났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반식민지적 반동은 혼란을 가져올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움직임이 제3세계 국가와 주민들에게도 결국은 해독을 가져올 사악한 음모의 결과라고 설명할 수 밖에 없었다. 반식민지운동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냉전'의 관념에 의해 더욱 심화되었다....
한편, 서구세계에서도 비슷한 변화들이 발생하고 있었다. 최근까지만 해도 2등시민으로 만족하고 있던 계층 - 특히 여성들과 흑인들 - 이 갑자가 정책결정과정에 참여하고자 했다. 이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세계3차대전의 예측과 관련되어 있다. 즉 기성지도자층이 세계를 이런 참화 속에 몰아 넣었담녀, 이제 또 다른 계층이 지도적 기능을 담당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2차세계 대전 중 미합중국의 흑인들과 여성들은 국가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종전 후 이들은 다시 원래의 피압박 상태로 돌아가기를 거부했다. 민권운동과 여권신장운동은 흑인들과 여성들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그때까지 세계를 지도해왔던 백인남성들에 대한 비판세력으로서도 존재했다.
이 모든 상황 속에서 교회가 존재했다. 그 어떤 국제기구나 회사나 정치적 운동보다도 교회는 국경과 계층과 정치적 이념을 초월하고 있다. 실제로 19세기가 남긴 가장 위대한 유산이야말로 역사상 최초로 진정한 우주교회가 태어났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20세기의 몇몇 학자들은 전 세대의 선교사들을 비현실적인 몽상가들로 간주하기도 했지만, 실제로 바로 이 선교사들이 모든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는 거대한 기독교의 연락망을 구축해 놓았다.
이러한 국제적 규모의 교회에게 있어서 20세개의 과제들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전쟁과 인종과 계층간의 분쟁이 이전의 신학적 차이점들과는 별 상관이 없는 모습으로 교회를 분열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교회는 박해를 받기도 햇으며, 또 다른 목적을 가진 이들에게 이용당하기도 했다. 20세기의 혼란 속에서 신자들은 분열되고 방황하고 겁을 집어먹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전쟁과 박해와 혼란 속에서도 이들은 영원한 평화와 정의의 통치를 이루실 그 분을 증거했다.
p.319. 20세기 기독교인 모두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들 가운데 하나는 어떻게 '콘스탄틴 이후시대'를 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이른 다시 말해 교회가 어떻게 콘스탄틴 이래 당연히 누려온 정치적 지원 없이 생존해야 할까 하는 의미이다. 프랑스 혁명 때부터 서방기독교는 항상 기독교에 적대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세속국가들의 도전에 직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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