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곤잘레스: 초대교회사(1- )

2009. 11. 19. 01:27목양자료/1.기독교자료

곤잘레스의 현대교회사를 모두 읽고 나니, 초대교회사를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그의 발트주의적 역사관이 초대교회사기록에 투영되어 있는지를 관찰해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빨리 이 책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압박도 늘어간다. 이전에 해두었던 독서노트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어딘가 묵혀있을 것을 생각하니 안타깝다. 다시 읽으라고 하는 신호로 여겨서 힘겹지만 노트해가면서 읽어가기로 했다. 한글책을 구해보기 어려운 상황 속에서, 타이핑하는 것은 복잡한 머리를 식히기 위한 방편이 되기도 한다.

 

p.15. 과거는 아직도 우리들의 속에 살아 있어서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기독교메시지를 이해하는 내용을 결정지으므로, 과거를 이해함이 없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구절을 읽을 때에, 마틴 루터는 우리들의 귀에 이 단어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지 속삭여주는 것이다. 마틴 루터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않은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셨다'는 말씀을 들을 때에 캔터베리의 안셀름은 우리와 함께 회중석에 앉아 있는 것이다. 안셀름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도 이 사실은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교회당 안에서 서있거나 앉아있거나 무릎을 꿇거나 혹은 찬송을 부르거나, 신경을 암송하거나, 혹은 암송하기를 거부할 때에 그리고 교회를 세우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우리가 미처 자각하지 못하는 과거가 우리들 행동의 일부 요인으로 개입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의 전통으로부터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아니하고 신약을 초대기독교인들과 동일하게 믿고 해석할 수 있다는 주장은 환상에 불과하며, 또한 위험한 환상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생각은 우리들의 해석을 절대화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혼란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험을 모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우리들의 시야를 채색하고 있는 과거를 이해하는 것이다. 색안경을 끼고 있는 사람이 온 세계가 바로 이러한 색깔이라는 결론을 피하기 위해서는 색안경 자체의 색깔을 의식하는 수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전통에 사로잡히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전통이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과연 우리들이 어떻게 현시점에 위치하게 되었는가? 그리고 우리 과거의 어떤 구체적 요인들이 현재 우리들의 시야를 채색하고 있는가를 아는 것이다. 이 때에 우리들은 비로소 과거,그리고 현재의 어떤 요인들을 받아들이고 거부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

  바로 이 싯점에서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역사를 만들어가는 작업과 연결된다. 과거 세대들의 생애와 사역을 공부하고 탐구하면서 이를 해석하는 것은 곧 역사를 하는(doing) 작업이다. 그러나 또한 미래의 세대들은 우리들의 시대를 과거의 역사로서 읽을 것임을 도한 기억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는 우리들의 행동과 무행동에 의하여 역사를 만들어 간다(making history). 이는 감격적인 기회인 동시에 책임이기도 하다. 이를 보다 신실하게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역사를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교회의 모든 부흥들, 역사 속에서의 모든 위대했던 시대들은 모두가 새로운 역사의 탐구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가 21세기를 준비함에 있어서도 같은 진리가 적용된다. 이러한 진리의 일부는 바로 이 책이 의도하는 바 대로 역사를 하는 것이다.

 

곤잘레스가 과연 자기자신의 신학적 전통에 매여 있는 그 위험에서 벗어나고 있는가? 제 3세계에 대한 관심이 보충된다고 해서 그러하다고 할 수 있는가?

 

p.23.보다 보수적 유대인들은 사두개파였다. 이들은 대부분 유대 귀족층에 속하였으며, 정치와 종교 양면에 모두 보수적이었다. 종교문제에 있어서 이들은 로마인들의 후원을 통하여 유지하였던 성전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사두개인들의 정치적 보수주의를 선호할 수 밖에 없었다.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의 많은 교리들을 근거없는 조작이라고 부인하였다.

  이러한 사실들은 곧 예수님과 초기기독교인들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반발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도록 주의할 것을 환기시키고 있다. 일반 민중들과 동행하였던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은 사두개인들보다는 바리새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기회가 더 많았던 것이다.

 

곤잘레스의 역사분석이나 평가가 문제가 있음이 드러난다. '보수주의'라는 말의 개념이 애매모호하다. 사두개인들이 '보수적'이었다는 것이 도대체 누구의 관점에서 보수적이었다는 것일까? 유대인들의 관점이냐 로마인의 관점이냐? 곤잘레스는 유대인의 관점이 아니고 오히려 로마인의 관점에서 사두개인들의 보수주의를 평가한다. 참으로 이상한 역사기술관점이다. 그런 관점에서 오히려 성경도 왜곡한다. 복음서에 사두개인들에게 대해서보다도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이 많이 나오는 것을, '일반민중들과 동행하였던 예수님과 그의 추종자들은 사두개인들보다는 바리새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기회가 더 많았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렇게 보기보다는, 그가 인정하는 것처럼, 오히려 후대에 미칠 바리새인들의 영향력을 감안한 복음서기자, 혹은 성령의 배려였다고 보아야하지 않을까? 이런 성경해석의 관점에 있어서조차도 그의 관점은 정통적이라기 보다는 신정통주의적이다. 주의하라.

 

p.27. 초대신자들은 선교활동 중 이방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기 위하여 70인역을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그리고 또 다른 이유들로 인하여 유대인공동체는 기독교인들이 쓰기에 부적합한 다른 번역판을 만들어내었으므로 결과적으로 교회가 70인역을 독점하게 되었다.

 

p.30. 당시의 혼합절충주의의 양상은 역사가들이 오늘날 '신비종교'들이란 부르는 사교들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그 옛날 올림푸스산에 살던 신을 믿는 것이 아니었다. 옛날에는 시민들이 일반적으로 자기들 출생지의 종교를 추종하였다. 그러나 알렉산더와 로마의 정복으로 말미암아 시민들은 종교를 선택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은 출생에 의해 신비종교에 속한 것이 아니라 입문을 통해서였다. 이러한 종교들 가운데 대부분은 우주의 기원과 생명의 보존, 그리고 신들의 생활에 기초하고 있었다. 이집트로부터는 나일강 및 기타 모든 생식을 기반으로 하는 아이시스와 오시리스의 신화가 도입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먼 옛날부터 아테네 근처에서 행해지던 종교의식을 제공하였다. 또한 인도-이란에서 생겨난 미스라(Mithra)교는 특히 군인들 가운데 성하였다. 또한 셈족으로부터 기원된 대모(the great Mother)을 섬기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이러한 사교들이 혼합절충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도대체 어느 교리와 어떤 의식이 어떤 집단으로부터 기원했는지 갈피를 잡기 어려울 때가 많다. 또한 이러한 신비종교들의 신들은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하나님처럼 배타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은 서로 다른 사교들로부터 자기가 예언하는 요소들을 선택하기도 하였다.

 

p.33. 스토아주의와의 관계도 이와 비슷하였다. 플라톤주의보다 약간 후에 생긴 이 철학파는 매우 고상한 윤리적 기준을 주장하고 있었다. BC 3세기경의 초대 스토아학자들은 만물이 불로부터 기인되었다는 물질주의자들이었으며,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세상의 모든 사건들을 주관하는 불변의 법칙들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확신하였던 결정론자들이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등장할 즈음에는 스토아주의가 변질하여 종교적 색채를 띠고 있었다. 스토아철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자기들의 지혜를 이용하여 사건전개의 방향과 진로를 바꾸기를 주장하고 있었다. 어쨌든 모든 스토아주의자들은 철학의 목적은 자연의 법칙을 이해하고 이에 순종할 수 있도록 적응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현명한 인간은 많이 아는 자가 아니라, 이성에 의해 주관되는 우주적 법칙에 조화되고 화합된 신성을 갖는 자였다. 이러한 경지에 도달하게 될 때에 걱정은 사라지고, 철학자는 비로소 일체의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생활인 아파테이아(apatheia, 관조)의 이상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으로서 개발해야 할 덕성에는 네 가지가 있다. 즉 도덕적 통찰력, 용기, 극기, 그리고 정의 등이다. 그런데 이들은 지혜로운 생활의 서로 다른 측면들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들 중 하나에 실패하는 것은 곧 모든 것들에 실패하는 것이다. 스토아주의자들은 또한 당시의 종교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왜냐하면 신들이 인간들을 보다 덕있는 생활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스스로의 욕망을 만족시키고자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또한 헬라문화의 전통적인 수구성을 배제하고 이성법칙의 우주성, 혹은 보편성을 주장하여 스스로를 세계의 시민이라 불렀다.

  역시 당시의 종교와 도덕들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기독교신자들에게 이는 매우 매력적일 수 밖에 없었다. 세계의 모든 인종들로 구성되었으므로 스스로를 가리켜 '새로운 인종'이라고 불렀던 기독교인들의 교회야말로 인류의 보편적 통일성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또한 지혜에의 인류의 보편적 통일성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증거였다. 또한 지혜에의 지침으로서 자연법을 주장하는 스토아적 개념은 기독교변증가들과 윤리학자들에 의해 채택되었다. 이들은 기독교인들의 생활이야말로 이러한 법칙에 순응하는 생활이라고 주장하였다. 편견과 야유, 그리고 박해에 대한 반응으로써 스토아적 아파테이아의 이상은 신자들에게 견인을 요구하였다. 또한 수많은 스토아철학자들이 당시의 신들에 대해 사용하였던 비판들이 기독교인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곤잘레스의 초대교회교인들에 대한 이해가 역부족이다. 세계의 모든 인종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인종'이 되었던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인종'이 되었던 것이고, 변증가들의 변증의 동기는 어떤 경우에는 그 당시 스토아철학의 이상과의 동질성을 추구한 것도 있었지만, 모든 변증이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의 견인을 아파테이아의 한 변형으로서 이해하는 것은, 그의 복음적 견인에 대한 이해가 철저하지 못함을 느낀다. 주의하라.

 

p.38.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를 부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신앙이야말로 오랫동안 고대했던 메시야의 완성이라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것이 예루살렘 교인들로 하여금 계속 안식일은 지키고 성전에 참석하게 했던 이유였다. 그들은 여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모였던 주일의 첫날을 첨가하였다. 초대교회의 성찬식은 주님의 고난이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시대의 여명을 가져왔던 그의 승리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그후 수세기가 지난 후에야 기독교 예배의 초점이 예수님의 죽음에 맞춰지게 되었다. 최초의 공동체에서는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행2:46) 떡을 떼었다.

 

역시 곤잘레스는 이상하다. 과연, 최초의 기독교인들은 유대교를 '부정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초대교회의 성찬식이 주님의 고난에 촛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나? 왜 고난과 부활이 동시에 강조되었다고 할 수 없었을까? 그들이 '기쁨과 순전한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떡을 "떼었다' - 부수었다 - 초대교회 교인들이 이렇게 떡을 '부수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을까? 과연 부활만을 강조했을까? 곤잘레스가 정통적 해석에 대해서 너무 성급하게 비난하고 있는 인상이다.

 

p. 40. 그후 얼마 안되어 예루살렘에 있던 기독교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요단강 건너편의 펠라로 옮겨 가기로 결정하였는데, 이곳의 주민들은 대부분이 이방인들이었다. 이러한 이동은 단지 유대인들에 의한 박해 때문만이 아니라, 동시에 이 새로운 종교운동의 정확한 정체를 의심하였던 로마인들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유대인들의 민족주의는 극도에 달하여, AD 66년 반란이 일어났고 결국 이 때문에 4년 후 로마군대는 예루살렘을 멸망시키게 된다. 기독교인들은 결국 다윗왕의 후예로서 유대인의 왕임을 주장하였기에 로마당국에 의해 십자가에 죽어야 했던 지도자의 추종자로 알려져 있었다. 이들은 그 후 야고보에 의하여 지도되었으며 야고보가 죽은 후에는 예수님의 또 다른 형제였던 시몬에 의해 이끌어졌다. 이러한 점에서 야기된 의심들을 피하기 위하여 교회는 펠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도 불구하고 의심은 계속되었으며 결국 시몬은 로마인들에게 처형되었다. 그 이유가 기독교신앙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다윗의 후손이었기 때문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이 모든 사건의 결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 의해 배척당했던 그 옛날 유대인교회는 점차 고립화되게 되었다. 비록 AD135년 일단의 유대인신자들이 예루살렘으로 귀환하였으나 나머지 기독교신자들과의 관계는 거의 끊어진 상태였고, 그 주도권은 이방인신자들에게 이전될 수 밖에 없었다.

  요단강 건너의 고립된 지역에서 유대인 기독교는 정통 유대교를 저버렸던 다양한 집단들과 연결되었다. 유대인기독교공동체는 나머지 교회들과의 연결이 절단되었으므로 독자적 노선을 걷게 되었고, 주위의 여러 분파들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수세기 후 이방기독교인들이 바로 이 잊혀진 공동체에 관하여 기록하고자 하였을 때에, 이들은 그들의 이단학설과 괴상한 관습을 기록할 수 밖에 없었다. 5세기경 역사에서 완전히 소멸하게 되는 이 교회에 관하여 거의 긍정적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

 

이 부분에 대한 곤잘레스의 역사적 견해는 수긍하기 어렵다. 좀 더 깊히 검토할 것.

 

p.52. 도마가 인디아를 방문했다는 전통이야말로 역사가들에게 고통거리이다. 이 기록은 일찌기 2세기 말에 쓰여진 것으로 보이는 도마행전에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이 기록 자체가 너무도 화려하게 꾸며져 있기 때문에 그 사실 자체를 믿을 수가 없다. 이에 의하면 당시 궁전을 지을 건축가를 찾고 있던 곤도파레스(Gondophares) 인디아 왕에게 건축가도 아니었던 도마가 자원했다는 것이다.

  도마가 왕궁의 건축기금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음을 발견한 왕은 그를 곧 투옥시켰다. 그런데 이 때에 곤도파레스의 형제 가드(Gad)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는 왕에게 그가 천국에서 본 수려한 궁전에 관하여 전해 주었다. 이 궁전은 도마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준 비용을 통해 지어졌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왕과 그의 형제는 회심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도마는 그 후 순교할 때까지 인디아의 다른 지방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물론 이러한 전설은 너무도 황당하게 보였고 역사에는 곤도파레스나 기타 이 사건들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역사가들은 이를 상상의 소산으로 무시해 왔다. 그런데 최근 실제로 이러한 이름의 왕이 있었으며, 그 왕에게 가드라는 형제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동전들이 발견되었다. 또한 인디아와 근동 사이에는 상당한 교역 관계가 있었으므로 도마가 이 나라를 방문했다는 가능성 자체를 전혀 무시할 수는 없게 되었다. 아마도 도마의 방문에 그후 온갖 화려한 이야기들이 덧붙여 장식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인디아에는 교회가 있었으며, 이 교회는 계속 도마를 자기들의 설립자로 주장한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도마행전 자체를 신빙성있게 볼 것은 아니지만, 도마가 왕궁건축을 지원하고 결국은 곤도파레스와 가드가 회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신빙성없는 것으로 볼 이유가 있을까? 곤잘레스가 도마행전의 신빙성을 질문한 것은 옳은 것이지만, 그 책의 내용을 소개하는 유일한 이 예화를 무조건 불신하(게하)는 경향은 문제가 아닐까?

 

p.53. 실제로는 대부분의 전도, 혹은 선교사역은 사도들이 아니라 여러가지 이유들, 즉 박해, 사역 혹은 전도열 때문에 각처를 여행했던 이름없는 신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름없는 신자들의 역할이 강조되는 것은 옳지만, 왜 사도들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가? 곤잘레스의 견해가 왜곡되어 있음을 느끼라.

 

p.56. 이러한 기독교에 대한 유대인들의 태도는 우리가 이들과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즉 이들은 자기들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바라보고, 단지 새로운 종파가 각처로 돌아다니면서 훌륭한 유대인들에게 이단이 되도록 종용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 뿐 아니라 많은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독립을 상실했던 이유가 자기들 선조의 전통에 충실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이 새로운 이단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분노가 다시 이스라엘에 임하시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은 당연하다.

 

당연하다? 그 당시 유대인들을 변호하고 있는 곤잘레스의 견해는 타당한가? 그 당시 유대인들의 태도와 생각의 문제점을 지적할 줄 모른다. 그러니 변호하는 것에 그칠뿐.

 

p.58. 그러나 이방인들 사이에 기독교개종자가 증가함에 따라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의 차이는 점점 더 명확해졌다. 또한 결국 로마에 대항한 반란으로 나타났던 유대인들의 민족주의가 열기를 띠어감에 따라 기독교신자들 - 특히 이방인들- 은 자기들과 이러한 독립운동 사이에 더 큰 거리를 두고자 노력하였다. 그 결과 로마당국은 점차 기독교가 유대교와는 판이한 종교임을 깨달아가기 시작하였다. 네로시절부터 콘스탄틴의 회심에 이르는 2세기반에 걸친 로마제국의 기독교박해의 기반에는 이러한 새로운 자각이 자리잡고 있다.

 

p.91. 그런데 모든 신자들은 우상숭배에는 합의하였으나 고전 이교도문화에 관하여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에는 의견이 분분하였다. 물론 이 가운데에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철학자들 등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철학자들의 사상과 작품들이 포함된다. 이들을 부인한다는 것은 곧 인간의 지성이 이룩한 최고의 업적들을 무시하는 것이 될 것이다. 반면 이들을 수용한다면 이는 곧 이교주의에 대한 타협이요 교회 속에 이교문화를 끌어들이는 계기로 보이기 쉽상이었다.

  따라서 고전문화의 가치에 관하여 기독교신자들은 두 가지 서로 상반되는 극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어떤 이들은 기독교신앙과 이교문화가 서로 상극의 입장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긴 터툴리안이다."아테네와 예루살렘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학교가 교회와 무슨 관련이 있는가?" 터툴리안이 확신을 갖고 이러한 기록을 남긴 것은 당시에 유행하던 이단들이 대부분 이교철학과 기독교교리를 조화시키고자 하는 시도의 결과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단의 가능성과는 별도로 고전문화와 철학에 대조하여 기독교의 '야만적'(barbaric) 기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이도 있었다. 그 중 한 예가 저스틴 마터의 가장 유명한 제자 타티안이었으니 그가 저술한 [헬라인에게 주는 글]은 헬라인들이 귀중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에 대해 정면공격인 동시에 '야만적' 기독교인들을 위한 변호였다. 당시 헬라인들은 자기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을 모두 '야만인'들이라 일컬었기 때문에, 타티안은 헬라어자체도 각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방언이 있음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 뿐 아니라 타티안은 자기들의 언어야말로 인류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라고 주장했던 바로 그들이 또하 수사학을 창안했음을 지적하였다. 타티안은 수사학이란 다름 아닌 가장 많은 값을 지불하는 자에게 언어를 매매함으로써 거짓과 부정을 변호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타티안은 헬라인들이 가진 것들 가운데 가치가 있는 것은 모두 야만인들로부터 취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들은 바빌로니아인들에게서 천문학을, 이집트인들에게서 기하학을, 페니키아인들에게서 문자를 빌어왔다. 또한 철학과 종교에 관하여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세의 저술은 플라톤, 혹은 호머보다 더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위 헬라인들이 소유한 문화와 히브리인들이나 기독교 '야만인'들의 종교 사이에서 존재하는 공통점은 헬라인들이 그러한 지혜를 야만인들로부터 배워왔기 때문이었다. 더우기 헬라인들ㅇ르 위해 불행했던 것은 이들이 '야만인들'의 지혜를 잘못 이해하여 히브리인들이 알고 있던 진리조차 훼손, 오염시켰다는 것이다. 따라서 소위 헬라인들의 지혜란 모세가 알고 있었고 기독교신자들이 설교하였던 진리의 희미한 반영이요,묘사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이것이 고전문화의 정수에 관하여 타티안이 말하는 것이라면, 과연 그가 이교신들에 관하여는 어떻게 말할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호머와 기타 시인들은 이들에 관하여 간음, 근친상간, 유아살해 등 온갖 수치스러운 말들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과연 어떻게 우리들보다 열등한 이런 신들을 섬길 수 있겠는가? 마지막으로 타티안은 부가하여 말하기를, 이교도들이 섬기고 있는 조상(statutes)들의 대부분은 조각가들이 모델로 사용하였던 창녀들의 모습임을 잊지 말라고 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인들이 열등한 사회계급에 속한다고 흉보던 이교도들 자신들이야말로 열등한 계급출신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기독교인들이 같은 입장을 취한 것은 아니었다. 저스틴은 기독교신자가 되면서 철학자의 직분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기독교철학'(christian philosophy)의 과어을 계승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 작업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름이 아니라 기독교와 고전적 지혜 사이의 관계를 증명하고 설명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타티안의 철학에 관한 부정적 견해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물론 이것이 그로 하여금 신앙을 타협하게 하거나 혹은 확신의 결여를 초래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신앙을 위해 일어서야 할 순간이 왔을 때, 그는 용기있게 죽에 맞섰으므로 그후 '저스티 마터', 즉 순교자 저스틴이라는 영광스런 이름으로 불리우게 되었기 때문이다.

  저스틴은 기독교와 이교철학 사이에 몇가지 접촉점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예를 들어, 가장 우수한 철학자들은 모든 다른 존재들이 그 존재 자체를 파생받은 지존의 존재(Supreme Being)에 관하여 말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육체의 죽음 이후에도 생명이 있음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바로 그가 죽는 모습을 통하여 이러한 신념을 보여주었다. 플라톤은 현세를 초월한 실재가 있음을 알았기에 영원한 실재들의 또 다른 세계를 가정하였다. 저스틴은 비록 그들이 이러한 진리들을 이해한 방법이나 태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았으나 이러한 결론 자체들은 기본적으로 정확하다고 보았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철학자들과는 달리 기독교인들의 소망은 영혼의 불멸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의 부활에 기초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저스틴은 단지 우연의 일치라고만 볼 수 없는 진리의 편린들이 철학자들 가운데 있음을 인정하였다.

출처 : 곤잘레스: 초대교회사(1- )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