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곤잘레스: 현대교회(361- )

2009. 11. 19. 01:28목양자료/1.기독교자료

p.361. 히틀러는 또한 독일내의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을 통일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를 통해 독일민족의 우수성과 신으로부터 받은 사명이라는 그의 메시지를 전파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에 의해 재해석된 전통적 기독교신앙과 인종적 우수성의 관념과 독일민주주의를 한데 합친 '독일기독교당'(German Christian)이 출현했다. 이들의 의도들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를 유대교에 상치되는 개념으로 재해석하여 당시 독일제국의 반유대정책에 공헌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부의 시책에 부응하여 1933년에는 연합독일복음주의교회(United German Evangelical Church)가 결성되었다.

 

p.364. 이때의 서신들과 그가 남긴 유작들을 통해, 그는 후세대들에게 커다란 연구과제로 남겨졌던 새로운 사상들과 씨름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그는 이 세계가 '성숙'단계에 있으며, 이러한 세계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는 현명한 부모와 비슷한 것으로서, 아이들이 자람에 따라 뒷전으로 물러간다고 묘사했다. 이와 연결하여 그는 존경하고 있었던 바르트를 비판했다. 왜냐하면 바르트는 사실상 계시의 한계성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를 뛰어넘어 '계시의 실중주의'(prositivism of revelation)을 주장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부문에서는 바르트의 주장을 수용하여 과감하게 바르트의 원칙들을 적용해 보고자 했다. 예를 들어 바르트는 종교란 우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숨기 위한 인간들의 노력이라고 선언한 바 있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본회퍼는 '종교없는 기독교'를 주장했다. 후세인들은 이러한 암시들을 서로 다른 몇가지 방법들로 따르고자 했다.

 

p.365.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우, 마르크스주의자와 기독교의 대화는 프라하 코메니우스신학원(Comenius Facutly of Theology)의 학장이던 요셉 로마드카(Joseph Hromadka)에 의해 주도되었다. 그의 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헝가리가 후스의 출생지였으며, 이곳의 30년전쟁의 피해를 극심하게 경험했던 지역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때 이후 이곳의 프로테스탄트들을 가톨릭을 자기들의 박해자로 간주했다. 따라서 공산주의정부가 모든 교회들을 평등하게 취급하겠다고 선언했을 때, 체코의 프로테스탄트들은 이를 하나의 해방으로 받아들였다. 바티칸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새정부를 반대하고 나서자, 프로테스탄트신도들은 이를 가톨릭측에서 상실했던 주도권을 다시 탈환하고자 하는 시도로 받아들였다. 또한 외국침략군에 대항한 후스파의 저항시대부터 기독교신앙은 개인적이 아니라 사회 속에서 보다 강렬한 정의를 수립해야 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로마드카 및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정권에서 적극적으로 접근했다. 그런데 로마드카는 세계 2차대전이전부터도 러시아식 공산주의자야말로 세계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으로서, 새로운 시대에서는 사회정의가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또한 1933년에 이미 그는 또한 나치주의의 위험들을 경고했다. 독일이 고국을 침공하자 그는 미국으로 망명하여 8년간 킹스턴 신학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이 때의 경험을 통해 미국에서 소위 기독교라고 칭하는 것은 단지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및 자본주의의 정당화에 불과하다는 자기 원래의 신념을 재확인하게 된다. 그 뿐만 아니라, 기독교신자들은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에 그다지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인하는 하나님의 존재란 상상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성경과 기독교신앙이 계시하는 진정한 하나님은 공산주의가 부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쓸데없는 마르크스주의의 무신론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한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냉전으로 인한 세계의 양극화가 가져오는 차이점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쟁 이전 체코슬로바키아에 존재하고 있었던 자본주의사회의 불의를 그냥 인정해서는 안된다.

  유럽의 또 다른 지역에서도 기독교신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대화가 활발하게 나타나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대화에 참여했던 마르크스주의측 인사들은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가 아니라, 역사와 사회의 분석에 관한 마르크스의 근본요소에 찬성하면서도, 이를 자기 나름대로의 방향으로 추구해 보고자 했던 수정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운동의 지도자는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이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였던 그는 종교 일반, 특히 기독교가 역사상 대부분의 기간 동안 박해자들의 도구로 사용되었다는 데에 찬성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초기사상에 나타난 이론인, 초대기독교는 또한 박해에 대항한 운동이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블로흐는 기독교신조들과 성경에 나타난 교훈들을 긍정적 가치들을 가지고 재해석하고자 했다. 그는 이러한 가치가 소망의 메시지 속에 자리잡고 있다고 보았다. '소망의 원칙'이야말로 초대기독교가 인간역사에 미친 가장 위대한 공헌이었다. 이러한 모습이 그토록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소망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인간들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다른 마르크스수정주의자들의 사상과 함께, 이러한 소망의 개념은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양자 사이의 대화를 위한 통로를 열었다. 이러한 대화 - 특히 블로흐의 사상 - 는 20세기에 있어 프로테스탄트신학의 가장 중요한 특성에 공헌했으니, 이는 곧 기독교신학의 기본적인 주제로서 소망과 종말론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p.370. 1936년 프랑스에서는 감리교와 회중파내의 개혁파신자들이 연합하여 프랑스개혁교회를 결성했다. 이 교회는 특히 공업화된 지역내에서 전도와 선교에 투신했다. 마찬가지로 서독의 경우, 프로테스탄트교회들은 13만명의 인원들을 동원하여 독일 및 해외의 사회문제 및 구제사업에 헌신했다. 이러한 운동 뒤에는 세속화가 아닌 순종을 가장 주용한 명제로 받아들였던 수백만 명의 헌신적 신자들이 자리잡고 있다. 동독의 경우, 공산주의 정부가 교회출석을 탄압한 지 40년 후에도 전 인구의 2/3가량이 기독교신자임을 고백하고 있다. 마침내 1978년, 정부는 교회와 합의에 도달하여 기독청년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종식시키고, 지역적 전국적 집회를 허락하며, 몇몇 교회건물의 건축을 인정하기로 했다. 1983년 정부와 교회들 - 로만카톨릭을 포함하여 - 은 연합으로 루터의 탄생500주년을 기념했다. 비록 20세기의 획기적, 충격적 사건들에 의해 영향을 받고, 어떤 곳에서는 소수화하기도 했으나, 유럽의 프로테스탄트주의는 그 생명과 활기를 잃지 않았다.

 

p.372. 1926년까지 평화운동을 지지했던 교회들은 이제 전쟁을 위한 선전에 가담했다. 자유주의와 근본주의자들을 막론하고 '문명을 구원할' 필요성을 역설했으며, 보다 극단적 근본주의자들 중에는 당시 사건들을 다니엘서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예언의 성취로 해석하기도 했다. 전통적으로 평화주의노선을 고수해 온 메노나이트와 퀘이커들을 제외하고, 교회들은 전쟁의 열기와 국가적 우월감에 사로잡혔으며, 일부 강단에서 목사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전체 독일국민들을 멸종시키라고 고함치기도 했다.

 

p.373.유명한 전도자 빌리선데이는 '과격파'들을 추방하는 것은 충분한 처벌이 되지 못하므로, 대신 이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총살시키자고 소리질렀다.

 

p.373. 자유주의자들과 근본주의자들 사이의 갈등은 전후에 특히 격화되었다. 바로 이 때가 근본주의자들이 공립학교에서 진화론의 학습을 금지시키고자 했던 노력의 절정을 이루었던 유명한 '스코프스재판'(Scopes trial)이 발생한 시기였다. 거의 모든 교파들이 근본주의문제로 갈라지게 되었는데, 특히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성경의 무오설이었다. 성경의 무오설이야말로 근본주의정통신학의 근간이라 할 수 있다. 후에는 이러한 분리가 공개적인 분파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북장로교근본주의의 지도자였던 프린스톤대학의 교수 그레셤 메이쳔dms 1929년 미국 근본주의신학의 아성이 되었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설립했으며, 결국은 이를 중심으로 정통장로교회가 성립되었다(1936년).

 

모든 교파들이 근본주의문제로 갈라졌다고 하는 곤잘레스의 평가는 이렇게 또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교파들이 자유주의문제로 갈라졌다" 어떤 표현이 옳은가? 곤잘레스의 평가가 편향적인 것이 아닐까? 어떤 견해가 초대교회부터 유지되어 온 견해인지를 살펴보라. 진화론이 초대교회때부터 유지되어온 신조였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는가? 그렇지 않다면, 교단교파의 분열은 바로 진화론때문이고, 이것을 교회내에 끌고 들어오려고 했던 자유주의자들이라고 해야 한다. 토를 달 부분들이 참으로 많다.

 

p.375. 세계 1차대전과 그 후 10년 동안 미국인들은 일반적으로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었다. 전쟁과 그 참혹상은 먼 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막연한 환상에 불과했다. 미합중국 내에서는 아직도 인류의 진보를 확신하고 있었다. 교회들과 강단에서는 유럽에서 이미 전세계들의 낙관론을 경험한 후 생성되었던 새로운 신학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은 아직도 '자유인들의 나라이자 용사들의 고향'이라는 미국의 위대성을 찬양하고 있었다. 바로 이 때에 불황이 닥쳐왔다.

 

p.376. 바로 이때 보다 덜 낙관적인 신학들이 미국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주식시장 붕괴직전 영어로 출판되었던 칼발트의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말](The Word of God and Word of Man)은 경제 대공황을 통해 바르트 및 그의 세대가 제1차대전으로부터 받은 충격과 비슷한 경험을 한 미국인들에게 비로소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라인홀드 니버(1892-1970)와 리챠드 니버(1894-1962 형제의 신학이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리쳐드 니버는 [교파주의의 사회적 기원](The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을 통해 '미합중국의 교파주의는 사회내 다양한 인종 및 사회경제학적 계층을 복음이 적응한 결과라고 주장하고 따라서 이는 곧 복음의 윤리성보다 계층과 교회의 자기보존윤리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민족적, 경제적 생활의 사회적 세력에 그 주도권을 넘겨주는 기독교는 분열된 세계를 위한 소망을 제공할 수 없다'고 한 그의 결론은 인류가 이제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최악의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므로 더욱 더 절실했다. 그는 또한 1937년 [미국내의 하나님의 왕국](The Kingdom of God in America)을 통해 이러한 종교는 '분노할 줄 모르는 신이 죄가 없는 인간을 십자가를 지지않는 그리스도를 통해 심판없는 왕국 속으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한편, 1928년까지 디트로이트에서 목회했던 그의 라인홀드는 자유방임적 자본주의야말로 인류의 적이라고 결론짓고, 1930년에는 일단의 동료들과 함께 사회주의기독자연맹(Fellowship of Socialist Christians)을 조직했다. 그는 아무런 구속장치가 없을 경우, 집단으로서의 사회는 그 구성원들의 본성보다도 더 윤리적으로 악할 뿐만 아니라 위기적이라고 확신했으니, 그 유명한 저서 [도적적 인간과 부도덕한 사회]가 그의 논문이었다. 인간의 본성 및 능력에 관하여 신정통주의적 회의를 간직하고 있던 그는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항하여 자기의 저서이름을 차라리 [부도덕적 인간과 이보다 더 부도덕인 사회]라고 붙이는 것이 정확할 뻔했다고 언급했다. 그는 인간의 죄성과 그 영향과 은혜의 심오한 이해를 통해 기독교인들이 보다 균형있는 인간본성에 관한 평가를 내릴 때가 왔다고 선언한 것이었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1941년, 1943년에 출판된 두 권으로 된 저서 [인간의 본성과 운명](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에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p.378.1934년 라인홀드 니버의 후원 덕분으로 독일신학자 폴 틸리히가 유니언신학교에 부임했다....그는 신정통주의라기보다는 문화신학자로서 현대세계를 향하여 복음과 그 관계성을 해석하기 위해 실존주의철학을 이용했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또한 사회주의자였던 그는 서구문명의 결함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상당히 수정된 형태의 마르크스주의의 분석을 적용시켰다. 그러나 미국으로 옮겨온 뒤에는 그의 사상 가운데 이 특정요소는 실존주의 및 현대심리학에 대한 그의 관심에 가려 빛을 잃었다.

 

p.380. 루즈벨트의 뉴딜정책의 등장으로 교회지도자들이 주장해온 '사회주의적' 정책들이 실행에 옮겨지게 되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당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노동인구의 안정을 보장했던 온건한 정책들이 미국내 자본주의의 경제체제를 구원했다고 평가한다. 어쨌든 뉴딜정책을 통해 빈민층의 상태는 개선되었으나, 대공황은 1939년에야 종식된다. 이때 이미 미국은 전쟁의 불가피성을 실감하고 이에 대비해야만 했다. 어떤 면에서 볼 때에는 뉴딜이 아니라 전쟁이야말로 대공황을 종식시킨 장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참전의 결정은 외부에서 왔다. 1941년 12월7일 일본제국의 해군은 진주만을 기습했다. 그후부터는 누구든 전쟁에 반대하는 인물은 국가에 대한 불충성분자로 간주되었다. 특히 일본계 미국인들은 얼마나 많은 세대 동안 미국에 거주해 왔는가를 막론하고 잠재적 스파이 취급을 받았다. 교회는 이들이 재산과 사업체를 빼앗기고 강제 수용되는 모습을 보면서도 침묵을 지켰다. 그런데 교회는 일반적으로 그 이전의 경험을 살려서인지, 조심스러운 태도로 전쟁을 지지했다. 군인들을 위해 종군목사들을 제공하고 나치스의 범죄에 대한 분노를 발산했다.

 

p.382.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교외의 교회들은 급성장했다. 1950년대와 1960년 초기야말로 각처의 유복한 교인들이 아름다운 예배당과 교육관, 기타 교회건물들을 지었던 교회건축시대라 할 수 있다. 1950년대에는 빌리 그레이엄복음협회가 설립되었다. 이는 단순한 미국의 전통적 부흥회의 연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기관은 풍부한 재정지원을 이용하여 가장 뛰어난 대중전달매체와 기구들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빌리 그레이엄협회는 공식적으로 보수적 신앙노선을 겸비했으나, 가능한 한 다른 경향의 신자들과의 마찰을 회피했다. 동협회는 곧 세계전역에서 사역했으며, 이를 통해 모든 대륙에 미국적 부흥회 전통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교회의 일들이 잘 되어간 것만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대교파 교회들은 이제 가난한 자들과 소수민족들이 점거한 도시들을 포기했다. 물론 일부 예외적인 인사들은 있었으나, 대교파지도자들은 새로이 구성되기 시작한 풍요한 교외지역들의 상황에 적응해 버리고, 대교시 및 시골지방과의 접촉을 상실하게 되었다. 시골의 경우, 전통적인 교파에 계속 남아있던 신자들은 점차 새로운 지도층들을 의심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성결교회가 이러한 공백을 메꾸고자 했으나, 주민들 대다수는 결국 모든 형태의 기성기독교와의 접촉을 상실하게 되었다.1950년대의 대부흥현상 20년 만에 도시를 구조하자는 새로운 목소리가 높아갔다. 그러나 과연 어떻게 이 과업을 이룰 수 있을 지 분명한 아이디어를 가진 이들은 별로 없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야 도시 속에서 종교적 활력이 재생되었다. 그러나 이 때에도 그 현상은 상당히 부유한 층들이 다시 도시로 귀환했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전후 기독교부흥의 또 다른 특색은 기독교신앙을 내부적 평화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해했다는 점이다. 이 당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종교저술가들 중 하나는 노만 빈센트 필이다. 그는 정신건강과 행복에 이르는 수단으로 신앙과 '적극적 사고'를 주창했다. 역사가 시드니 알스트롬(Sydney E.Ahlstrom)은 이 당시의 종교성을 가리켜 '신앙 자체에 대한 신앙' 즉 '마음의 평호와 자신있는 생활'을 약속했던 신앙에 대한 동경이라고 정확하게 표현했다. 이러한 모습의 종교성은 시대와 부합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는 혼란된 세계의 한 가운데에서 평화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사회적 책임에 관해선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냉전식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미국내의 정치여론을 극우적으로 몰아갔던 이들과의 대결도 회피했다.

 

p.384.정부는 1949년 군대내에서의 인종분리를 철폐하고, 1952년 역사적인 대법원판결을 통해 공립학교내의 인종통합을 명령했다. 일부 백인들도 이러한 인종분리정책을 지지했으며, 이들의 활동은 큰 힘이 되었다. 전국교회협의회(The National Council of Churches)와 여러 대교파들도 인종분리정책을 반대했다. 그러나 이 운동을 이끌고 간 것은 물론 흑인들 자신의 적극적 참여와 지도력 때문이었다.

 

p.386. "보편적으로 차별당하고 착취당하는 이들과 일체성을 갖지 못하는 기독교신학은 존재할 수 없다. 핍박당하는 자들의 공동체로부터 출발하지 않았다면 이 신학은 복음의 신학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 속에서 자기를 계시하셨던 하나님,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의 하나님, 그들을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는 이스라엘 역사 속의 하나님은 아니기 때문이다"(제임스 콘).

 

p.388. 이처럼 수많은 흑인들과 여성들이 관련된 움직임들과 함께 또 다른 국제, 국내정세들이 미국의 사고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동남 아시아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전쟁이다. 처음에는 소규모군사작전으로 시작되었던 것이 1965년에는 미국이 참전했던 가장 장기간의 전쟁으로 화했다. 원래에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전선에 뛰어들었던 미합중국이 부정부패로 가득 찬 정부들을 지원하게 되었고, 약소국들을 상대로 막대한 화력을 쏟아부으면서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언론은 전쟁의 참혹상을 국내의 각 가정에게 보여주었다. 그러나 미국민과 의회는 전쟁확장의 주원인이 되었던 '통킨만 사건'에 관해 오도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반전데모, 실망과 좌절이 대학가를 휩쓸었다. 결국 학생데모를 진압하기 위해 무력이 동원되어 켄트주립대학과 잭슨주립대학에서 사망자가 발생했다. 결국 미합중국은 역사상 최초로 패전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보다 중요한 것은 미국이 그 순결을 잃었다는 것이다. 국내의 자유와 정의, 그리고 해외에서의 자기방어를 상징하는 '자유인의 나라, 용자들의 고향'이라는 개념이 의심을 받게 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공업의 발전과 생활의 풍요로 인해 일부인사들은 미국이 의존하고 있는 경제체제 자체가 인위적으로 전쟁을 발발시켜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되었다. 여기에다 워터게이트사건으로 인한 미국민들의 분노와 회의 속에서 닉슨대통령이 사임했다.

 

p.389. 이처럼 다채롭고 다양한 신학들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세가지 공통된 주제가 존재한다. 즉 미래지향적 태도와 사회정치학적 현실에 대한 관심, 그리고 이 두 가지를 한데 묶어 정해 보려는 노력이다. 다시 말해, 이렇나 신학들이 택했던 길은 종말론을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회복해 보고자 한 것이니, 다시 말해 현대의 사회 속으로 깊이 참여해 보고자 한 것이다. 이에 따라 예배의 종말론적 차원과 그 사회적 당위성을 강조하는 예배의식의 부흥이 있었다.

 

p.390. 1973년 이러한 사상을 함께 하는 일단의 기독교지도자들은 '시카고선언'을 채택했다. 그 내용은 미합중국내의 신자들 가운데 점차 고조되고 있는 확신을 대변하는 듯하다....이 선언문이 서로 다른 상황 속에서 살고 있던 전세계의 다른 기독교신자들에 의한 각종 선언문들과 비슷하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신학적 배경 속에서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다. 전세계신자들의 눈으로 볼 때, 미합중국내의 교회들이 마침내 콘스탄틴 이후 시대와 에큐메니칼시대의 도전에 비로소 응답하는 듯 보였다. 이는 또한 교회가 '우주시대'의 새로운 비젼에 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우리들은 이때 비로소 처음으로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볼 수 있었다. 지구는 마치 언약한 '우주선'과 같았으며, 그 속에서 우리들은 함께 공존하든지, 함께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깨달았다. 

 

p.395.세계교회협의회의 설립이 가져온 또 다른 중요한 움직임은 '신앙과 규범'운동이다. 여러 사람들의 의심을 회피하기 위해 1910년의 세계선교사협회는 신앙과 규범에 관한 문제를 일부러 취급하지 않았다. 교회들의 신조나 성직임명 및 성례에 관한 이해와 의미 등에 관한 서로 다른 신학적 이견들을 취급하지 않았던 것이다. 비록 이는 가능한 한 많은 회원들을 포용하기 위해 필요한 조처이기는 했으나, 역시 이 문제들을 언젠가는 다루어야 한다는 의견들을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은 성공회 감독이었던 찰스 브렌트(Charles H.Brent)이다. 그의 재촉에 따라 앵글리칸 교회가 신앙과 규범에 관한 문제를 의논할 회의를 소집하는 데 앞장서게 되었다. 다른 기관들도 이에 합류했으며, 세계 1차대전으로 말미암아 약간의 중단이 있은 후, 1927년 스위스의 로잔에서 신앙과 규범에 관한 제 1차 세계회의가 소집되었다. 프로테스탄트, 정교회,그리고 전통 가톨릭교회 - 이들은 교황무오성교리에 반발하여 로마교회를 떠난 가톨릭일파이다 - 등을 망라한 108개 교회400명의 대표들이 참석했다. 이들 중 많은 숫자가 이미 학생기독운동(Student Christian Movement)을 통해 각종 국제회의, 에큐메니칼운동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학생기독운동이야말로 에큐메니칼운동의 지도자들을 배양했던 근간이기도 하다.

 

p.400. 제2차세계대전 중에는 정부의 압력 아래 일본 그리스도교회(Church of Christ in Japan, 혹은 교단)가 42개 교파들을 망라하여 조직되었다. 전후 이들 중 일부는 탈퇴했으나, 대부분은 잔류했으니 이는 복음에 대한 순종이 공통적 증언을 요구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곤잘레스가 한국기독교의 상황을 한국기독교장로회측의 역사관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분명하다. 기장측의 신정통신학과 일체감을 갖는 모양이다. 주의할 것이다. 한국장로교가 일본기독교단에 예속된 것이 오히려 "복음에 대한 순종"이요 "공통적 증언"이라고 보는 그의 견해. 할 말이 없다.이런 자료가 예장측 신학교들에 의해서 교재로 사용되고 추천도서목록에 있다니....

 

p.401. 선교초기에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들을 막론하고 신생교회들은 기독교신학 발전에 큰 역할을 담당할 수 없으리라고 간주되었다. 기껏해야 이들 현지교회들은 자기들 고유의 문화 환경 속에서 서구적 신학을 표현할 수 있으리라는 정도로 기대되었다. 그런데 에큐메니칼 운동, 식민지주의의 종식, 그리고 신생교회들의 자신감 획득 등에 따라 이들은 원래 피선교교회들이 예기치 못했던 모습을 보였다. 왜냐하면 이들 교회들 가운데 일부는 단순한 전통적 서구신학의 적용이 아니라 이에 대한 도전의 양상을 띤 질문과 해답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프로테스탄트진영에서 최근 수십년 동안 이러한 기능을 담당한 저서들이 출판되었다. 아시아의 경우, 태국에 갔던 일본출신 선교사 코야마 코수케(Kosuke Koyama)가 [물소신학,Waterbuffalo Theology]을 저술했다. 수년 후에는 중국인 초안 셍송(Choan-Seng Song)이 [제3안의 신학: 아시아의 현실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신학,Third-Eye Theology:Theology in Formation in Asian Settings]과 [인자하신 하나님,The Compassionate God]을 출판했다. 아프리카에서는 남아프리카의 인종분리정책에 대항한 투쟁의 와중에서 알란 뵈삭(Allan A.Boesak)이 [순수여, 안녕, Farewell to Innocence]을 저술했다. 라틴 아메리카의 경우, 아르헨티나 출신의 감리교도 호세 미구에즈 보니노(Jose Miguez Bonino)가 [혁명적 상황 속에서의 신학작업,Doing Theology in a Revolutionary Situation)과 [기독신자와 마르크스주의자,Christians and Marxists]를 저술했다.

  이들은 상호간에 상당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한 가지 공통점을 공유한다. 즉 기독교신학 전체를 전통적 입장과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조망한 것이다. 대부분 이처럼 상이한 관점을 택하게 된 것은 단순히 문화적 배경들만이 아니라 피압박자들의 사회적 경제적 저항을 감안했기 대문이었다.

 

p.403. 이러한 주장의 배경에는 복음이 결국 교회는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설 것을 요구한다는 결론에 도달한 일단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해방신학자들'의 지도자들 가운데 구스타보 구티엘레즈(Gustavo Guterrez)와 후앙 루이스 세군도(Juan Luis Segundo)가 있다. 이들이 제안했던 것은 단지 해방의 문제에 국한된 신학이 아니라, 기독교신조와 생활전체를 하나님에 의하여, 그들의 표현에 의하면, '아래로부터' 힘을 받은 가난한 자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은 이러한 관점이 비록 전격적으로 새로운 모양이기는 하지만, 정통기독교신조로부터 찾아낼 수 있다고 했다. 이들은 특히 성경 속에서 전통적 신학이 무시했거나 추상화했던 요소들을 발견했다. 이리하여 그들의 활동은 라틴 아메리카의 권력자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새로운 복음해석에 응답하여야 했던 전세계에 걸친 기독교공동체에 대한 도전이 되었다.

  그 반응은 곧 나타났다. 로마당국은 라틴아메리카주교들에게 압력을 가했으며, 주교들은 다음 회의에서는 메델리선언으로부터 한걸음 후퇴할 것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의외로 1978년 멕시코 푸에블라(Puebla) 회의에서 주교들은 자기들의 원래 입장을 고수했다. 서구의 언론에서 해방신학은 동서간의 분쟁이라는 배경 속에서 해석되어, 흔히 '마르크스신학'으로서 지나치게 단순하게 이해되었다. 라틴 아메리카 자체에서도 이에 극렬하게 반대한 인물들이 많았다. 투쟁이 점차 격화됨에 따라 반대파들도 단결했다. 엘살바도르(El Lavador)의 대주교 오스카 로메로(Osca A.Romero)는 그를 기존질서에 대한 위협으로 본 집단에 의해 피살되었다. 바젤에서는 새로운 질서를 부르짖는 주교들을 헬더 카마라(Helder Camara)와 파울로 에바리스토 아른스(Paulo Evaristo Arns)가 영도하고 있었다. 니카라과에서는 샌다니스타(Sandinista) 공산정권과 기독교사이의 대결이 고조되었다. 과테말라 및 인근제국에서 수백 명의 가톨릭신자들이 반역혐의를 쓰고 살해 당했다. 미국과 유럽의 일부 신학자들은 이 새로운 신학을 부인하거나 무시했으나, 수많은 신학자들과 기독교지도자들은 이를 복음이 시사하는 바를 또 다른 측면에서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과연 이러한 논쟁들과 대결들이 어떠한 양상으로 진전될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20세기 말은 북부와 남부 사이의 점차 증가하는 긴장 상태로 점철될 것이다. 부부인들의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동서방진영의 대결이다. 미국과 유럽의 많은 기독교신자들에게 있어서 이는 곧 일방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반대편의 공산주의와 전체주의 체제사이의 대결을 의미한다. 그런데, 남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중대한 문제 자체가 달라진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제3세계를 더욱 더 극심한 빈곤과 결핍으로 밀어 넣지 않을 새로운 경제질서의 확립과 국가간의 부의 재분배, 그리고 북부에 존재하는 강대국들을 위한 대리전쟁의 참혹한 전장으로 화할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사건들이 진전되는 가운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북반구가 점차 기독교화하고 있는 반면 숫자적으로 볼 때 교회는 남반구에서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중요하게 취급받지 못했던 남반구의 교회들이 새로운 활기와 활력을 보여주고 있다. 1900년에는 전체 기독교신자의 49.9%가 유럽에 거주했다. 1985년에는 그 추세가 27.2%로 추산된다. 또한 1900년에는 전체 기독교신자의 81.1%가 백인이었다. 그러나 현재의 추세로 나아가면 서기 2000년에는 그 숫자가 39.8%로 감소할 것이다. 따라서 제3세계에서 출현하고 있는 여러가지 신학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유보한다 하더라도, 21세기에는 남반구가 북반구를 향해 거대한 서교사역을 펼칠 것이 예상된다. 그리하여 1세기 전만해도 '세계의 끝'이라고 간주되었던 나라들이 이전에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했던 자들의 후손에게 복음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출처 : 곤잘레스: 현대교회(361- )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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