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곤잘레스: 초대교회사(140- )

2009. 11. 19. 01:28목양자료/1.기독교자료

p.140. 셀티무스 세베루스황제는 3세기초에 그 동안 제국을 위협시켰던 일련의 내란을 평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거대한 지역을 다스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라인강과 다뉴브강 건너에 살고 있던 '야만인들'은 계속되는 위협이었다. 제국 내에도 반대파들이 있었으며, 특히 군부가 반란을 일으켜 자기들이 원하는 황제를 지명하고 새로운 내란을 시작할 위험은 상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황제는 제국내의 종교적 통일성을 유지할 필요를 느껴 혼합절충정책을 수행하기로 하였다. 그는 국민들에게 솔 인빅투스(So inbictus),즉 정복되지 않는 태양을 예배하도록 명령하였다. 바로 이 태양이 지존의 신임을 인정하기만 하면 모든 다른 신들을 허용할 생각이었다....

  그 결과 2세기와 같은 지역적인 박해가 계속되면서, 이제는 특히 새로운 개종자들과 혹은 전파자들을 겨냥한 보다 혹심한 박해가 가증되었다. 따라서 셉티무스 세베루스의 칙령이 발해졌던 서기 202년은 기독교박해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이룬다. 한 전설에 의하면 바로 그 해에 이레니우스가 순교했다고 한다.

 

p.144-5. 이러한 상황 속에서 데시우스의 박해는 그 이전의 것들과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지닌다. 황제의 목적은 순교자들이 아니라 배교자들을 낳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50여년 전 터툴리안은 순교자들이 피가 교회의 씨앗이라 설파한 바 있었다. 왜냐하면 더욱 많은 피가 흐를수록 교인들의 숫자는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옛날 기독교신자들의 용기있는 고결한 죽음은 목격자들을 감동시켰으며 이에 따라 박해는 오히려 기독교확장을 가져온 듯 하였다. 따라서 만약 기독교신자들을 살해하는 대신에 이들을 협박하고 회유시켜 변절시킬 수만 있다면 그 옛날의 이교(paganism)을 부흥시켜려는 데시우스에게 승리를 가져오게 된다....황제의 칙령에 따라 국민들은 모두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데시우스의 조상 앞에 향불을 밝혀야 했다. 이에 순응하는 자들에게는 그 사실을 증명하는 증명서를 발부해 주었다. 이러한 증명서가 없는 자들은 황제의 칙령을 어긴 범죄자들로 간주되었다.

 

p.147. 이러한 박해의 결과 교회내에 새로운 칭호가 생겼으니 곧 '고백자'라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체포되어 신앙을 끝까지 지킨 자들은 대부분 순교자가 되었다. 신들과 황제들에게 제물을 바친자들은 배교자(Apostate)라 불렀다. 그러나 데시우스에 의해 수행된 정책으로 말미암아 잔인한 고문 속에서도 계속 신앙을 지켰으나 순교의 면류관을 얻지 않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처럼 신앙을 지키고 생존한 인물들에게 '고백자들'이라는 칭호가 주어졌으니 이들은 물론 다른 신자들에게 높이 존경받았다. 데시우스의 박해는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AD 251년 황제 위에 오른 갈루스(Gallus)는 전임자의 정책을 중지하였다. 6년 후 데시우스의 친구였던 발레리안(Valerian)이 새로운 박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곧 페르시아인들에게 포로로 잡혔으며, 교회는 약 40년 동안 비교적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p.148. 데시우스의 박해가 비록 그 기간은 짧았으나 교회로서는 커다란 시련이었다. 이러한 시련은 박해 자체의 문제 뿐만 아니라 그 후에 교회내에 발생한 문제들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교회 앞에 던져진 큰 문제는 과연 '변절자'(lasped), 즉 박해 기간 동안 어떤 형태로든 신앙을 저버렸던 자들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복잡한 요인들이 있었다. 우선 모든 이들이 다 같은 정도로 혹은 같은 형태로 신앙을 저 버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황제의 칙령이 발포되자마자 기꺼이 제사를 지낸 자들과 위조증명서들을 구입한 자들과, 혹은 일시 신앙이 약화되었으나 아직 박해 기간 중에 다시 교회로 돌아온 인물들을 다 동일하게 취급할 수는 없었다.

  교인들 가운데 일부는 다름 아니라 당시 크게 존경받고 있던 고백자들에게 이 문제를 처리할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특별히 북아프리카 지방의 일부고백자들은 이러한 권위를 스스로 주장하면서 일부 변절자들을 다시 교회로 귀환시켰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특히 많은 감독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즉 교회의 기존 체제만이 변절자들을 다시 받아들일 권위가 있으며, 오직 원래의 교회조직만이 통일성있고 정당한 방법으로 이러한 조처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밖에 어떤 이들은 고백자들과 감독들이 모두 변절자들을 지나치게 두둔한다고 생각하여, 변절자들은 보가 혹심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을 통해 두 인물이 특히 결정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는데, 곧 시프리안과 노바티안이다....

  박해 직전에 감독의 직분에 올랐던 시프리안은 다른 기독교지도자들과 함께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여, 방대한 서신왕래를 통해 교인들을 계속 지도하는 것이 자기의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가히 짐작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많은 이들이 이러한 행동을 비겁하다고 간주하였다. 예를 들어 당시 로마교회는 박해 때문에 감독을 잃게 되었었는데, 이곳의 성직자들은 시프리안의 결정에 의문을 표하는 서신을 보내었다. 시프리안은 자기가 비겁해서가 아니라 교인들을 위해 피신했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러한 용기와 신념은 수년 후 기꺼이 순교자의 최후를 맞음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그러나 어째튼 당시 그의 권위가 상당히 실추되었으며, 시프리안보다는 오히려 신앙때문에 곤경을 겪었던 칼타고의 고백자들이 특히 변절자들의 복원문제에 있어서 그보다 더 많은 권위를 지닌다고 주장하였다.

 

p.150.시프리안이 이처럼 변절자들에게 교회의 교제에 다시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자 노력한 이유는 그의 교회관때문이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 머리의 승리에 함께 참여할 것이다. 따라서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가질 수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이 물론 신자가 교회의 계급제도에 전적으로 동의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프리안 자신도 로마의 교회체제와 동의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근느 역시 교회의 통일성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 확신하였다. 그런데 고백자들의 행동이 바로 이러한 통일성을 위협하고 있었으므로 시프리안은 이들의 행위를 거부하고 감독회의에서 변절자들에게 관한 문제를 결정해야만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시프리안은 터툴리안의 열렬한 숭배자로서 그의 저술들을 열심히 연구하였다. 터툴리안의 엄격한 경향은 시프리안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므로, 그는 변절자들을 지나치게 쉽게 다시 복원시켜 준다는 의견에 반대하였다. 즉 교회는 성도들의 공동체였으므로 우상숭배자들과 배교자들은 함께 참여할 수 없었다.

 노바티안의 입장은 시프리안의 그것보다 더 엄격한 것이었다. 그는 당시 로마 감독이었던 고넬리우스(Cornelius)와 정면으로 충돌하였다. 왜냐하면 노바티안의 눈으로 볼 때에 변절자들이 너무나 쉽게 다시 교회로 영입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보다 수년 전에 같은 로마 안에서 유명한 신학자였던 히폴리투스(Hippolytus)와 칼릭스투스(Calixtus) 감독 사이에 비슷한 갈등이 있었다. 왜냐하면 간음죄를 저지른 자라도 회개했을 경우에 칼릭스투는 다시 교회에 받아들이고자 하였으나 히폴리투스는 이를 반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이 문제의 결과 분파가 생겨서 로마에는 두 명의 감독이 존재하게되었다. 노바티안의 경우에도 결과는 동일하였다. 교회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문제들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건의 핵심은 결국 순수성, 혹은 용서하는 사랑 중 무엇이 교회의 특성으로 우선하는가 하는 것이었다. 히폴리투스의 분파는 그다지 오래 계속되지 않았다. 그러나 노바티안주의자들의 분파는 그후 수세대를 계속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이미 초대교회때부터 변절자들을 복원이 서방교회의 주된 관심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세례받은 후 죄를 범한 신자들의 처리문제를 두고 그 후에도 서방교회는 몇 번이나 분열을 반복하였다. 바로 이 때문에 그 후 고행제도가 발전하게 되었다. 그 후 나타난 프로테스탄트종교개혁은 어떤 면에서 볼 때 바로 이러한 체제에 대한 반항이었다.

 

p.155. 그러나 이처럼 어리석으리만큼 순진한 것 때문에 당시의 보통신자들을 멸시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이들과 보다 학식있는 기독교신자들의 신학을 비교해 볼 때에 반드시 후자들이 더욱 우수하다고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이러한 이야기들 속에 나타난 적극적이고 주권적이며 공의로운 하나님은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가 묘사하였던 감히 인간들이 접근할 수 없이 먼 곳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보다 오히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 뿐 아니라 유명한 변증가들이 기독교신앙과 제국의 정책들 사이에 근본적인 충돌이 없다는 점을 애써 주장하고 있었던 반면, 일부 평범한 신자들은 제국의 목표들과 하나님의 목적 사이에는 서로 피할 수 없는 충돌이 존재한다는 점을 깊이 자각하고 있었다는 점을 시사해 주는 자료들이 남아 있다. 이러한 신자들 가운데 하나가 제국 당국에 체포되었을 때에 그는 황제의 권위를 인정하기를 거부하고 선언하기를 그리스도야말로 "나의 주인이시며 모든 왕들과 나라들 위에 군림하시는 황제"라고 하였다. 또한 일부 보다 학식있는 기독교신자들이 기독교적 소망을 상징화시키고 영화시킨데 반하여 일반 교인들의 신앙 속에는 당시의 질서를 능가할 하나님 왕국의 비젼과, 당시 로마 제국의 사회 제도 속에서 흘려야 했던 고난의 눈물들을 하나님께서 씻어주실 새예루살렘의 이상이 살아 있었다.

 

p.161.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지켰던 가장 오래된 축일은 1월6일의 주현절(Epiphany)이었다. 원래는 주현절이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었다. 그후, 라틴계의 서방에서 12월25일이 그 자리를 차자하기 시작하였다. 12월25일은 원래 이교도들의 축제일로서 콘스탄틴황제 이후 크리스마스(Christmas)로 대체되었다.  

 

p.161. 그러나 점차 교회내의 이방인들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세례식을 위한 교육과 준비를 행할 기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이 곧 세례준비기간(catechumneanate)으로서 3세기초부터 실시되었다. 이러한 세례 준비기간은 대개 3년 동안이었다. 이 기간 동안 세례 준비자들(catechumen)들은 기독교리에 관한 교훈을 받았으며 자기들의 신앙을 생활 속에서 증명하여야 했다. 마지막으로 세례받기 직전 이들은 시험을 통과해야만 세례를 받고 세례자 명부에 그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세례는 일반적으로 1년에 한 번 부활절 날 행해졌다. 3세기초부터 세례를 받는 이들은 금요일과 토요일에 금식한 후, 예수님이 부활하신 시각인 주일 아침 세례받는 것이 보통이었다. 세례는 완전 나체로 행해졌으며, 물론 남자들과 여자들은 서로 분리되었다. 이들은 물에서부터 올라오면서, 그리스도 안의 새생명을 상징하기 위한 흰옷을 발랐다(골3:9-12; 계3:4). 이들에게는 마실 물이 주어졌는데, 이는 이들이 그 외부와 내부에 걸쳐 완전히 정화도었다는 의미였다. 그 후에 기름을 발라 제사장의 신분이 되었음을 표시하였고 이들이 들어가고 있는 약속된 땅(Promised land)의 의미로서 우유와 꿀을 발랐다.

 

p.163.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교회는 2세기말부터 3세기 초에 걸쳐 발생한 이단들에 대응하여 감독들의 권위와 사도전승 이론을 특히 강조하였다. 교회내에 이방인들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이단들의 위험도 커졌으며 이 때문에 감독들의 권위를 강화시킬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 있어서 여인들의 기능과 위치는 특히 주의할 만하다. 2세기 말 남자들이 교회의 지도적 위치를 독점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초기처럼 그다지 간단하지 않다. 특별히 신약시대에 있어서는 여인들이 지도적 위치를 차지했다는 시사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페베는 겐그리아교회의 여집사였으며, 유니아는 사도들과 동등하게 그 이름이 기록되었다. 아마도 2세기 이단들에 대항하기 위해 교회가 그 권위를 중앙집권화하면서, 이런 과정의 한 결과로 여인들은 교회 지도층에서 이탈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세기 초에도 플리니는 트라얀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자기가 두 명의 기독교 '여성목회자들'을 고문했다고 보고하고 있다....

  따라서 교회는 곧 과부들을 부양하면서 이들에게 특별한 책임을 맡기게 되었다. 이러한 과부들 중에는 순교의 최후를 맞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카테쿠멘들의 교육에 전심한 과부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과부'의 의미가 시대에 따라 변화하게 되었다. 즉 남편을 잃은 여성 뿐만 아니라 교회를 위해 특별한 기능을 수행하고 교회에 의해 부양받는 여성들을 지칭하게 된 것이다.

 

p.166. 또 한 가지 기독교 초대사를 살펴보면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신약 시대 이후에는 바울이나 바나바같은 순회전도자들을 찾아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초대교회 시디에 나타난 폭발적 복음의 전파는 전문인 전도인, 혹은 선교사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업이나 공무를 위해 여행해야 했던 수많은 기독교신자들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출처 : 곤잘레스: 초대교회사(140- )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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