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곤잘레스: 현대교회사(243- )

2009. 11. 19. 01:23목양자료/1.기독교자료

p.250. 신학의 기능은 의존의감정을 세 가지 차원 속에서 탐구하고 해석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자와 세계의 관계, 그리고 자아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의존의 감정에 관련되지 못한 것은 신학 속에서 아무런 자리도 차지할 수 없다. 예를 들어서 창조론을 생각해 보자. 이 신조는 절대 의존의 감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이는 일체의 존재가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이를 부인하는 것은 기독교적 종교감정의 중심을 차지하는 의존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반드시 우리가 특정한 형태의 창조를 인정해야 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창세기에 표현한 창조는 역사적으로 정확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 슐라이마허는 이것이 사실적인 묘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그러나 어쨌든 이것인 신학탐구를 위한 정당한 대상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는 의존의 감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모세에 관련된 사건들이 초자연적인 것이라 할 지라도 '이 정보는 우리들이 의미하는 신앙의 신조가 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절대 의존의 감정은 이에 의하여 새로운 내용이나, 새로운 형태나, 혹은 보다 명백한 정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천사들의 존재, 사탄의 역할 등에 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이유에서 자연과 초자연 사이의 전통적 구분은 포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들이 현대과학에 위배되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구분은 초자연이 드러난 사건이나 장소들에 대한 우리의 의존의 감정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슐라이마허는 종교가 지식과 다르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들을 과학의 발견들과 모순되지 않도록 해석할 수 있었다.

 

p. 251. 칸트의 비판 이후 남겨진 또 하나의 길은 인간의 지성이 일체의 지식을 인증한다는 데에 그와 동의하면서도 이를 이성의 제한성을 보여주는 증명이라고 인정하는 대신 이성이 실재 자체라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성은 우리가 실재, 혹은 현상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로서 우리들의 지성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성이야말로 실재이며 유일한 실재이다.

  헤겔(1770-1831)은 이러한 길을 추구했다. 헤겔은 신학 분야에서 학자로서의 수업을 닦았다. 그러나 후에는 신학이 학문탐구의 영향으로서는 너무 협소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종교뿐만 아니라 실재 전체를 이해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실재는 서로 관련되지 않는 일련의 사물들이나 사건들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파악해야만 한다. 그는 이성과 실재가 동일하다고 인정할 때에 이러한 작업을 이룩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 실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성의 문제가 아니며, 혹은 실재가 이성을 제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성이 곧 실재이며, 유일한 실재는 이성이다. 그가 말한 바와 같이 '합리적인 것은 존재하며, 존재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그런데 헤겔이 언급한 '이성'이란 단지 이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며, 혹은 논리의 결론들을 가리키지도 않는다. 이는 오히려 사고과정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각할 때에 어떠한 사상을 연구하기 위해 고정된 사상 앞에 서지는 않는다. 반대로 우리는 하나의 사상을 제시하고, 이를 초월하기 위해 점검하거나, 혹은 다른 사상을 선호하여 이를 부인하며, 마지막에는 이전의 두 가지 사상 속에 담겨 있던 가치를 포함한 일체를 포괄하는 제 3의 사상에 도달하게 딘다. 이처럼, '테제'를 제안하고, '안티테제'으 ㅣ방법으로 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여 결국에는 '합'에 도달하는 과정을 가리켜 헤겔은 '이성'이라 불렀다. 따라서 이는 동적 이성, 계속하여 발전하는 운동의 형태를 띠고 있다. 또한 이러한 이성은 단지 인간의 지성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적 이성 - 헤겔은 이를 가리켜 우주정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 이야말로 실재의 전부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바로 이러한 우주정신의 변증법적이고 동적인 사고이다....

 

p.253. 헤겔은 기독교야 말로 절대종교라고 확신했다. 이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을 부인한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헤겔이 볼 때 기독교야말로 모든 종교들의 종합으로서 인간의 종교적 발전의 전체과정을 종합한다는 의미였다. 종교의 중심주제는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이다. 그 관계가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성육신의 교리에서 절정에 달한다. 왜냐하면 성육신 속에서 신과 인간이 완전히 연합했기 때문이다. 다른 초기의 종교들 속에서 은연 중에 잠재해 있었던 신과 인간의 연합이 이제 성육신을 통하여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게 디었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의 교리도 하나님에 관한 사고의 종합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궁극적 실재의 동적인 본질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의 변증법은 세 가지 움직임을 포함한다. 우선 신은 영원한 사념으로서 우리가 흔히 창조라고 부르는 합리적 실재의 발전을 초월해서도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곧 '아버지의 왕국'이니 이는 다른 일체의 존재들로부터 하나님을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이다. '아들의 왕국'은 우리가 흔히 창조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세계로서, 그 결정은 신과 인간 사이의 궁극적 일체성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성령의 왕국'은 이러한 신과 인간의 종합을 뒤따른다. 그리하여 공동체 속에 있는 하나님의 존재 속에서 나타난다. 이들을 종합한 것이 '하나님의 왕국'으로서 도덕적 생활과 국가의 질서 속에서 역사적인 열매를 맺게 된다. 이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헤겔은 국가의 개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헤겔은 이러한 결과 일체의 교조적이고 부분적인 체계들의 편협성을 탈피하는 철학이 성립된다고 보았다.

 

p.254. 헤겔 이후 역사는 더 이상 영원한 실재를 연구하는 이들에게 있어서 2차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이제 드디어 역사야말로 영원한 실재들을 파악할 수 있는 배경으로 간주되었다. 후기신학자들로 하여금 성경적 관점의 많은 부분을 회복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던 이러한 관념이 헤겔 및 19세기가 남긴 유산의 일부라 할 수 있겠다.

 

p.256.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서 기독교의 큰 대적은 기독교권이었다. 기독교권은 너무나도 쉽게 기독교인이 되는 것을 사람들에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단지 유대인이나 모슬렘이아니라는 이유로 스스로를 기독교 신자라고 부르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는 자들은 이교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처럼 아무런 고통이나 대가를 지불할 필요가 없는 '값싼' 기독교는 마치 전쟁놀이와 같다. 그 속에서 장난감 병정들은 이리저리 이동하고 요란한 소리도 내지만 실제 위험부담이나 고통이 없기 때문에 진정한 승리도 없는 것이다. 이들이 흔히 '기독교'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기독교인놀음'을 흉내내는데 불과하다. 많은 설교가들이 기독교를 쉬운 것으로 설교함으로써 이러한 놀음을 촉진하고 있다. 이야말로 기독교를 유희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하나님을 바보'로 생각하는 '기독교권의 범죄'인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이런 식으로 논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를 깨닫는 이가 별로 없다는 것이야말로 비극이다.

  이러한 기독교권의 비극에 대응하여 키에르케고르는 '기독교를 어렵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자기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이는 물론 그가 사람들에게 기독교신앙이 잘못이라고 납득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설교를 듣고 가르침을 받았던 내용들은 진정한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진정한 기독교신자가 되기 위해서는 신앙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하고,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한다. 이러한 고통없이 우리는 기독교권의 한 구성은 될 수 있을 지 모르나 기독교신자는 아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단지 지성이 아니라 한 인간의 존재 자체와 관련을 가진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체계'의 환상을 부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체계는 물론 그가 헤겔의 철학을 조소하여 붙인 명칭이었다. 헤겔과 그의 추종자들이 한 것이란 고통과 회의와 절망 속에서 발생하는 인간의 진정한 존재가 설 자리가 없는 구조물을 지어낸 것이었다. 이들은 마치 화려한 궁전들을 지어놓고는, 그 궁전이 너무나도 화려하기 때문에, 헛간에서 살기로 결정한 자들과 같았다. 진정한 고통의 인간의 존재는 본질에 우선하는 것이며, 본질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다. 이처럼 존재에 관한 강조 때문에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주의의 창시자라고 불린다.

  그러나 물론 후대의 실존주의자들은 그와는 판이한 흥미와 관심을 추구했다. 존재란 투쟁이다. 무엇인가가 형성되고 태어나기 위한 고통의 투쟁이다. 이처럼 존재를 사물의 중심에 놓을 때, 인간은 헤겔주의뿐만 아니라 모든 다른 체계들을 포기해야 하며, 어떤 일관성있는 체계를 향한 희망까지도 저버려야 한다. 비록 현실 자체가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체계라 할 지라도, 존재의 한 가운데 있는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키에르케고르는 특별한 형태의 존재, 즉 기독교적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역시 어떤 체계로서 축소될 수 없었다. 기독교권, 즉 쉬운 기독교의 비극이란 이러한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모험이나 계속적 위험이 되지 못하고, 도덕 혹은 교리 체계의 형태로 전락했다는데에 있다. 따라서 만인들에게 계시하고자 했던 키에르케고르의 거대한 문제는, 우리가 기독교권의 한 가운데에서 살아하는 약점을 안고 있을 때에 어떻게 하면 진정한 신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p.259. 교회사의 연구 역시 동일한 진로를 따른다. 기독교교리가 여러 세기를 통해 진화했다는 사상은 많은 이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어떤 이들은 이러한 진화는 단지 초기 기독교 당시 이미 잠재해 있던 가르침들이 점차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또 다른 이들, 특히 아돌프 폰 하르낙(1851-1930)은 도그마의 발전은 초대교회의 신앙의 점차적 포기로서, 원래의 예수님의 가르침들로부터 예수님에 관한 가르침들로 옮겨가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하르낙에 의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성과 인류의 형제애, 인간 영혼의 무한한 가치, 그리고 사랑의 명령을 가르치셨다. 그러나 후일에 장기간에 걸친 과정을 거려 예수님과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기독교 메시지의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p. 260. 그러나 기독교는 또한 사건들, 특히 예수님의 사건들에 관한 사실적 지식에 기초해야 한다는 점에서도 실제적인 것이다. 실제 생활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 속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적 계시이다. 신학이 이를 망각할 때 이는 이성주의, 혹은 신비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오류들에 대항하여 역사의 연구는 예수님이 남기신 교훈의 중심에 하나님의 왕국과 '사랑에 기초한 행동을 통한 인류의 조직'이라는 윤리가 자리잡고 있음을 밝혀준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리츨의 신학은 앞에서 거론했던 라우센부쉬의 사회복음의 기초가 되었다.

 

p.266.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재위했던 피우스9세(1846-1878)는 당시의 패러독스를 여실히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런 패러독스들 가운데 가장 뚜렷한 것은, 교황들이야말로 무오하다고 선언했던 이 때에 이들은 권력을 상실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권력의 상실 속에서 피우스 9세는 단지 종교적 문제에 관해서라도 자기의 주권을 옹호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1854년 그는 성모무염시태의 도그마를 선언한다. 이 교리에 의하면,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택정받았기 때문에, 마리아자신도 원죄를 포함한 일체의 죄 및 그 영향으로부터 순수하게 보존되었다. 이는 이미 카톨릭 신학자들이 아무런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 채 수세기 동안 논쟁을 거듭한 문제였다. 그런데 역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한 점은 이 도그마를 교회의 공식 교리로 선포함으로써 피우스 9세는 종교회의의 지원없이 독단적으로 도그마를 정의한 최초의 교황이 되었다는 점이다. 어떤 점에서 볼 때 성모무염시태의 도그마를 선언했던 교황의 칙령 [인에퍼빌리,Ineffabilis]야말로 세계가 그에게 어떻게 반응하는가를 알아보기 위한 시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칙령에 대해서 별다른 반론이 없었으므로 교황무오설의 교리가 그 뒤를 따르게 된다.

 

p.270. 그런데 이러한 교황 무오류성의 선포는 사람들이 예상했던 바와 같은 반발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네델란드와 오스트리아, 그리고 독일의 일부 카톨릭신자들은 교황청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보수카톨릭 교회로서 독립했다. 그러나 어쨌든 이에 대한 저항과 비판은 대단한 것이 못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정치적 세력을 상실한 교황은 더 이상 중요한 존재가 아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고올주의자들과 교황권 지상주의자 사이의 투쟁에서 결국 후자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이전에 고올주의자들이 두려워했던 교황청의 권력이 약화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p.275. 어쨌든 이러한 움직임의 결과 세계 제 1차 대전 당시, 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소원한 관계에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카톨릭교회를 지나간 과거의 유물이라고 생각했으며, 가톨릭측에서는 프로테스탄트주의야말로 현대 세계의 도전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그 이단적 특성을 드러내었다고 확신했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는 한 서방기독교의 양대 진영 사이의 화해의 가능성은 거의 없는 듯 했다.  

출처 : 곤잘레스: 현대교회사(243- )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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