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1. 19. 01:23ㆍ목양자료/1.기독교자료
p.151. "하나님께서는 결코 문명국가에서 종교가 강제로 성행되는 것을 요구하지 않으신다. 강제로 성립된 획일성은 조만간 내란을 일으키고 양심을 짓밟으며, 그리스도와 그의 종들을 박해하고, 수백만 영혼들의 위선과 파괴를 불러오게 된다"(로저 윌리엄스)
옳은 말이다. 아무리 옳은 진리라고 해서 강제되어서는 안된다. 로저 윌리엄스의 이 말조차도 강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p.154. 영국 국교내에서 청교도들이 영향력이 한창 극성이었을 때에, 버지니아 식민지가 창설되었으므로 많은 주주들과 정착민들은 이곳 식민지를 청교도적 원칙에 의해서 통치하고자 했다. 따라서 처음 이곳에서 시행된 법률들은 하루에 두 차례의 예배와 주일엄수, 그리고 야비한 욕설과 음탕한 옷차림에 대한 엄격한 처벌 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거룩한 식민지 건설의 꿈은 정치적 현실 앞에서 무산되었다. 국왕 제임스는 청교도주의를 혐오했으므로 버지니아에서 이러한 모습이 벌어지는 것을 그대로 놔 둘 리 없었다. 그는 1622년 발생한 인디언들과의 전쟁을 구실로 1624년에는 이곳 식민지를 자기의 직접 통치 아래 두었다. 이때 본국에서는 청교도들의 영향력이 감소되고 있었다. 후에 찰스 1세도 버지니아 일대의 청교도들을 배격했던 제임스정책을 답습하여 버지니아 중 거대한 지역을 빼앗아 매릴랜드 식민지를 건설하고,이를 가톨릭 신자에게 양도해 주었다. 한텬 처음에는 그다지 큰 경제적 가능성을 보이지 못했던 이곳 식민지들에서 담배가 경작되고 수출됨으로써 상당한 수입을 올리게 되었다. 그런데 담배경작에는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했으므로 1619년부터 이곳 식민지에서는 아프리카에서 노예들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버지니아 및 다른 식민지들의 특징처럼 되어 버린 노예를 기반으로 한 정치체제가 시작된다....
정착민들이 대부분은 계속 영국국교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이는 더 이상 과거의 청교도적 앵글리칸주의가 아니라, 보다 점쟎고 귀족적인 앵글리칸주의로서 대농장 소유주들에게는 적당한 것이었지만, 노예들이나 대부분 빈곤층들과는 서로 잘 맞지 않는 것이었다. 영국국교는 노예들의 개종에 별로 관심을 쏟지 않았다. 그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원래 초대교회로부터의 전통이 기독교인들은 다른 신자들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는데, 어떤 이들은 아직도 이러한 원칙이 유효하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여러가지 골치거리들을 피하기 위해 노예소유주들은 차라리 노예들이 세례받지 않기를 원했다.
1667년에는 세례 때문에 노예의 신분이 변화하지는 않는다는 법률이 통과되었다. 이는 곧 기성종교가 유력층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나 기꺼이 타협하는가를 보여주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법률이 통과된 후에도 노예들이 개종을 위한 조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많은 소유주들이 노예들을 무지 속에 버려두는 것만이 이들의 복종을 보장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p.159. 이처럼 날로 강성해 가던 청교도주의의 중심지들을 파괴해 버릴 계획을 하던 중, 찰스1세는 내란에 말려들어 왕위와 목숨을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전쟁 자체와 청교도들의 승리는 이주의 물결을 멈추게 했다. 왜냐하면 이제 미지의 대륙이 아니라 잉글랜드 자체 내에 청교도인들이 꿈구는 거룩한 왕국을 건설할 수 있다는 소망이 보였기 때문이다. 비록 신세계의 정착민들은 중립을 지켰으며 자기들의 영토를 넓히고 사회조직을 강화하는데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따라서 스튜어트의 왕조복고도 이곳 정착민들에게는 잉글랜드의 퓨리턴주의에 가해졌던 것처럼 극심한 박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p.162. 그런데 이(Zacharias Mayhew)보다 더 큰 결실을 맺었던 것은 1641년 모히칸족 사이에서 전도했던 존 엘리옷의 사역이었다. 그는 인디언들이야말로 이스라엘의 사라진 10지파라고 확신했으므로, 이들으 개종시키기만 하면 성경의 예언들이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다. 따라서 그는 개종자들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통치했던 촌락들 안에 수용했다.
p. 165. 대부분의 침례교도들은 재세례파가 아니라 자기들 나름대로의 신약연구를 통해 교리를 추출한 것이었다. 네델란드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일단의 침례교도들이 알미니우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영국으로 이 사상을 가지고 돌아갔다.
p.171. 그(조나단 에드워즈)는 앵글리칸이었던 휫필드를 자기 교회에서 설교하도록 초청했고, 휘필드가 설교하는 동안 목사인 에드워즈는 눈물을 흘렸다고 전해진다.
p.172. 처음에는 침례교에서는 이 운동을 저급하다고 간주하여 반대했다. 그러나 대각성운동은 많은 이들에게 침례교에 유리한 결론에 도달하도록 만들었다. 실제로 만약 회심의 경험이 기독교인의 생활에서 그토록 중요한 것이라면 이는 유아세례를 의심하도록 이끌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대각성 운동이 강조한 개인적 경험의 중요성에 치중했던 많은 회중파와 장로교인들은 유아세례를 부인하고 침례교신자들이 되었다. 한 교회의 전체 회중들이 이 길을 택한 경우들도 볼 수 있었다.
p.172-73. 마지막으로 대각성운동은 또한 심대한 정치적 영향을 남기게 되었다. 대각성운동이야말로 후에 미합중국을 결성하게 된 13개 식민주전체를 포용한 최초의 움직임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서로 다른 식민주들 가운데 일체감이 발생하게 되었다. 동시에 인권과 정부의 성격에 관한 새로운 사상들이 유포되었다. 바로 이러한 사상들이 식민주들 간에 날로 성장해 가던 일체감과 어울려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을 낳게 한 것이었다.
p.189. 이러한 진보 가운데 일부는 전통적 기독교가 가지는 교리주의적 태도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단지 '자연종교' 혹은 '본질적 기독교'(essential Christianity)만을 인정하게 되었다. 자연 이성 혹은 보편적 윤리를 통해 이해될 수 있는 것을 제외한 기독교회의 전통적 교훈들과 신앙은 과거의 유물로서 간주되어 마치 진보라는 이름의 배가 항해하는데 불필요한 화물처럼 생각되었다.
이러한 사상들은 그 후 하나로 결합하게 된 두 가지 운동을 통해 조직되었으니, 곧 유니테리언주의와 만인구원설이다. 전자는 실질적으로 독립과 함께 생겨나 더 이상 전통적 정통신앙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던 앵글리칸과 회중파 교회들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이 운동에서 결과된 교회들은 특히 삼위 일체의 교리를 부인했기 때문에, '유니테리언'이라고 불리웠으나 실제로 이들은 정통적 교리들과 많은 점에서 상이한 모습을 보였다. 이들은 특히 초자연적 신비와 인간의 죄성을 강조했던 정통 교리와는 대조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지적 능력을 보다 강조하는 이성주의자들이었다. 이들은 특히 뉴잉글랜드 지방의 상인들 사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종래는 모든 인간들이 다 구원을 받으리라는 교리를 주장하는 만인구원설은 원래 영원한 형벌의 교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던 영국 감리교신자들에 의해서 독립 직전의 식민주에 소개되었다. 미국 독립후 뉴잉글랜드에는 몇몇 만인구제설교리들이 설립되었다. 얼마 안되어 이 운동은 유니테리언들과 합류한다.
또한 이들로부터 소위 '초월주의'(Transcendaentalism)에 찬성하는 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가장 유명한 대표자로서 랄프 왈도 에머슨을 들 수 있는 이 운동은 이성주의와 낭만주의를 결합한 것이었다. 이들은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을 우주와 우주의 목적을 이해하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유니테리언주의와 마찬가지로 초월주의에 빠진 것은 주로 부유한 상인층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많은 주장은 결국 이 새로운 국가의 다른 부분들에까지 침투했다.
p.181. 처음에는 감리교 역시 같은 이유로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철저한 왕실지지자였으므로 식민지의 감리교 신자들에게 왕실에 대한 충성을 명령했다. 독립선언 후 애즈베리를 제외한 식민지의 모든 영국인 감리교 설교가들은 대영제국으로 돌아갔다. 이 때문에 미국측의 애국자들은 감리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애즈베리의 꾸준한 노력으로 아메리카 감리교는 특유한 성격을 형성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설교가들을 모집할 수 있었다. 마침내 1784년 '크리스마스회의'(Christmas Conference)에서 미국 감리교는 영국 감리교 및 앵글리칸 교회와 결별한 새로운 교회로서 탄생했다. 또한 미국내 감리교는 주교들에 의해 영도될 것도 결정되었다.
p.182. 정치적 생존을 위해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했던 종교적 복수사회 속에서는 이미 유럽의 교리우선주의가 불러 왔던 유혈극을 비판적인 안목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북아메리카의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은 교회를 모든 진정한 신자들로 구성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체로 파악하는 경향이 농후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교회들, 혹은 교파들은 신자들이 나름대로의 확신과 선호에 따라 창조하고 가입한 자발적 조직체들로 규정한 것이었다.
p.182. 이러한 미국식 기독교의 교파주의에 의한 반응으로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The Disciples of Christ) 교파이다. 이 운동의 창시자는 토마스 캠벨(1763-1854)과 그의 아들 알렉산더(1788-1866)로서 처음에는 새로운 교회나 표가를 만들 의도가 없었다.
p.189. 이러한 과정 가운데서 1801년 켄터키에서 발생했던 케인릿지 부흥(The Cane Ridge Revival)은 중요한 의밀르 지닌다.
p.190. 결국 개척지대에서는 이러한 부흥집회가 사회생활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으므로 감리교와 침례교는 양적으로 급성장했다. 이들 교파가 성장했던 또 다른 이유는 이들은 거의 교육을 받지 못한 설교가들을 기꺼이 사용하여 가능한 한 쉽게 기독교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교파들이 엄격한 교육수준을 요구했던 반면, 감리교와 침례교는 누구든 하나님께 소명을 받았다고 확신하는 이들은 가리지 않고 사용했다. 감리교의 선봉에 선 것은 주교들의 감독 아래 봉사한 평신도 설교가들이다.
침례교에서는 생업을 가진 농부들을 개교회의 목사로서 활동하도록 했다. 새로운 정착지에는 기꺼이 말씀 선포의 직분을 감당할 경건한 침례교 신자가 섞여 있기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감리교와 침례교는 새로운 지역에서 세력을 구축했으며, 2세기의 중반에는 미국내에서 가장 큰 프로테스탄트 교파가 되었다.
p.226. 신학발전과 선교활동을 제외한 가장 중요한 19세기의 문제들은 교회와 국가 사이의 점차 고조되는 분리관계로부터 발생한 것이었다.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프로테스탄트가 우세하게 된 국가에서도 이 새로운 교회는 가톨릭교회와 비슷한 관계를 국가와 유지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이후 이러한 현상은 변화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네델란드의 경우 프랑스가 이곳을 점령하여 '바티비안공화국'(Batavian Republic)을 건설했을 때, 국가와 개혁파 교회 사이의 유대는 깨졌으며, 왕정 복고후에도 교회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이전처럼 강력하지 못했다. 독일의 경우, 국가 통일을 위해 폐지되었던 옛날 법률들 속에는 종교의 통일성을 보장하는 조처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유럽 전역을 통해, 경제적, 정치적 자유주의도 비슷한 결과를 불러오게 되었다.
이데 따라 '자유교회'들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국고에 의해 유지되는 국교들과는 대조적으로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내는 헌금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다. 독일과 북부 유럽 일대에 걸쳐 감리교와 침례교가 퍼져 나갔다.
p.230. 요약해서 말하면, 19세기는 유럽에 거대한 정치적, 경제적 변화를 가져왔다. 일반적으로 가톨릭측은 프로테스탄트측보다 이러한 변화 때문에 더욱 큰 피해를 받았다. 따라서 19세기는 현대사상들에 대해 가톨릭측의 반동기라고 할 수 있다.
반면 19세기는 프로테스탄트측에 새로운 기회들을 부여했다. 대영제국과 독일 등 프로테스탄트 국가들의 영향력이 급증했다.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는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이를 주장한 이들은 이러한 자유, 진보주의야말로 이미 한물간 권위주의적 가톨릭측에 대한 미래로부터의 도전이라고 생각했다. 프로테스탄트는 각종 사회적 불의, 그 중에서도 특히 노예제도에 대항한 투쟁의 선봉에 섰다. 그 결과 가톨릭은 새로운 시대에 대한 경계와 의심에서 벗어나지 못한 데 반해, 수많은 프로테스탄트신자들은 거의 무조건적으로 미래를 낙관했다.
p.241. 어쨋든 새로운 대규모의 이민은 대륙의 종교생활에 막대한 중요성을 갖게 되었다. 이민들 가운데 많은 숫자가 프로테스탄트였으므로 몇몇 국가들은 처음에는 이민들에게만, 그 후에는 결국 모든 국민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허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이민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가톨릭교회에서 영세받은 인구가 급증했는데 반해 교회는 이들을 위해 실질적으로 아무런 종교교육도 베풀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라틴 아메리카의 가톨릭교는 점차 표면에만 흐르는 형식적 경향을 띠게 되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나 상파울로와 같은 대도시의 주민들 대부분은 스스로를 가톨릭신자라고 일컬었으나, 실제로 교회생활에 참여하는 이들은 별로 없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가톨릭의 교회정치가들은 단지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헛된 시도를 통해 이러한 문제들에 반응했다. 새로운 사상들이 널리 퍼지면 퍼질 수록, 이들은 더욱 격렬하게 이러한 사상들을 정죄했다. 결국 수많은 라틴 아메리카 카톨릭신자들은 신앙으리 교회의 권위와는 별개로, 혹은 이에 대항하는 것으로까지 간주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곳에 도달한 프로테스탄트신앙은 쉽사리 많은 개종자들을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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