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곤잘레스: 현대교회사(1- )

2009. 11. 19. 01:21목양자료/1.기독교자료

p.26. 이러한 것들이 지루하고 잔인했던 전쟁(30년전쟁)의 직접적 결과였다. 그러나 비록 평화조약문서 가운데 나타나지 않았으나, 보다 중요한 결과들이 잉태되고 있었다. 웨스트팔리아 화약에 나타난 종교자유의 원칙들은 기독교의 박애정신을 보다 깊이 이해한 결과라기보다는 종교문제에 관한 무관심의 증가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인간들ㅇ느 이 전쟁을 통하여 종교문제를 무력으로 해결하고자 할 때 발생하는 처참한 고통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결국 무력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많은 이들은 세속 영주들이 종교적 신앙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들의 이익, 혹은 신민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책을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현대세속국가가 발전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이전 세대들이 당연하게 생각했던 문제들에 관한 회의적 태도가 출현하기 시작했다. 과연 어떠한 근거로 신학자들은 자기들만이 옳고 다른 이들은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했단 말인가? 30년 전쟁과 같은 참혹상을 발생케 했던 교리들이 과연 옳을 수 있단 말인가? 가톨릭이거나 프로테스탄트들을 막론하고 단순히 전통교리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보다는 보다 너그럽고 심오하며 보다 기독교적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길은 없단 말인가? 30년 전쟁의 결과 그리고 이와 유사한 다른 사건들의 결과로 17세기와 18세기에 나타난 의문들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었다.

 

p.30. 1622년경 마리 드 메디치의 세력은 약화되는 한 편, 리슐리외(Armand de Richelieu)추기경이 프랑스의 궁정에서 새로운 권력가로 등장했었다. 2년 후 그는 왕이 가장 신뢰하는 고문의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교활한 정치가로서 프랑스의 왕실과 자기의 권력강화만이 유일한 목적이었다. 비록 그는 로마 교회의 추기경이기는 했으나, 그의 종교정책은 신학적, 신앙적 측면에서가 아니라 단지 이해관계의 계산에 근거하여 수립 시행되고 있었다. 그는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가장 중요한 적수는 합스부르그라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30년 전쟁 중에 카톨릭황제에 대항한 프로테스탄트측에 막대한 자금을 비밀리에 제공했다.

 

p.34. 1685년 국왕(태양왕, 루이14세)은 폰택블루칙령(Edict of Fontaibnebleau)을 선언하여 낭트칙령의 조항들을 취소하고 프랑스 내에서 프로테스탄트가 되는 것을 불법으로 인정하였다. 곧 거대한 인구이동이 뒤따르게 되었다. 왜냐하면 수많은 프랑스인 위그노들이 스위스, 독일, 북아메리카 등지로 이주해 갔기  때문이다. 이러한 난민들 가운데 많은 수가 전문기술인들과 상인들이었으므로 이들의 이동은 프랑스에 거대한 경제적 타격을 초래했다. 그리하여 학자들은 폰택블루칙령에 의해 야기된 경제된 혼란이 그 후 프랑스 대혁명을 발생시킨 가장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한다.

 

p.36-37. 왕실에서는 이들['camisard']에게 허위약속을 한 후 이를 지키지 않는 수단을 동원하여 일부지역에서는 반란을 평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은 1709년에 마지막 카미사드 지도자들이 잡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때 이미 이들의 영웅적 저항은 여러 프로테스탄트 국가에서 전설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들에게 이렇다 할 원조를 제공하지 않았다. 1710년 영국에서 마침내 이들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 시기가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왜냐하면 반란의 마지막 불꽃이 꺼져버린 뒤였기 때문이다.

  한편 이들과는 또 다른 성격의 집단이 프랑스의 프로테스탄트들 가운데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들 지도자들은 어차피 출현하지도 않을 계시론적 환상을 신뢰하지 않았으므로, 명백하고 신중한 성경해석을 중심으로 한 예배를 개혁파 전통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했다.

  이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물은 1715년 최초의 프랑스 개혁교회 총회를 조직한 안토안 코트(Antoine Court)이다. 그는 세속정부가 하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요구를 할 때를 예외로 하고 모든 일에 있어서 이들을 존경해야 한다고 권고했으며, 이것이 곧 새로 조직된 교회의 공식정책이 되었다. 이 제1차 총회가 열린지 열흘 후 루이14세는 사망했고, 당시 5살이었던 그의 증손 루이15세가 왕위를 계승했다....1726년에 스위스 로잔에 망명신학교가 설립되었다. 프랑스인 목회후보생들은 고국으로 귀환하기 전에 이곳에서 훈련을 받았으므로, 프랑스의 개혁교회는 성경과 신학에 깊은 조예를 갖춘 일단의 설교가들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1729년에는 코트자신이 로잔으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설교가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코트는 망명지에 거주하면서도 계속 프랑스를 방문하여 개혁교회의 각종문제들을 지시하고 목회자들을 격려했다. 1767년 그가 83세의 나이로 사망했을 때, 프랑스 내에는 개혁파 프로테스탄트주의가 깊이 뿌리박게 되었다.

 

프랑스개혁파교회가 코트같은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그 성격을 무척 의심하게 한다. 코트는 이집트타롯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던 사람이다. 비판하기 위함인?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프랑스개혁교회의 성격을 좀 더 분석하고 평가해 보라.

 

현대교회사를 기술하면서 곤잘레스의 신학적 입장이 좀 더 분명해지는 것같다. 그는 청교도에 대해서 별로 긍정적인 것 같이가 않다. 그런데, 이런 책이 소위 한국개혁주의신학교에서 주교재로 사용되고 있다면.....문제로다!

 

p.66. 한편 제수잇의 해산으로 교황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교황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기 위해 설립된 이 수도회는 18세기의 절대주의 군주들의 환영을 받지 못했다. 또한 30년 전쟁을 불러 일으켰던 편협한 종교정책들을 제수잇에서 강력하게 지원한 것도 이들이 인기를 상실하게 된 한 가지 원인이었다. 특히 부르봉가는 자기들의 대적인 합스부르그가를 계속 편드는 제수잇들을 증오했다. 따라서 부르봉가의 세력이 점차 강해지고 합스부르그가 약화됨에 따라 제수잇들은 곤란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

 

p.67.이에 따라 부르봉왕가는 자기들의 지배영역에서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제수잇들을 제거해 버리고자 했다. 1769년 로마주재 부르봉가의 사절들은 교황에게 제수잇의 해산을 요구했다. 마침내 1733년 교황 클레멘트13세는 제수잇의 해산을 명령했으니, 이리하여 교황정책의 가장 강력한 실행수단을 상실하게 되었다.

  고올주의, 페브뢰우스주의, 그리고 제수잇에 대한 박해들을 살펴보면 교황들이 비록 전세계를 자기들의 통치영역으로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세력과 권위를 상실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 활동하고 있는 제수잇회는 언제 다시 부활되었는가?

 

p.67. 트렌트종교회의는 은혜와 예정론에 관한 루터와 칼빈의 일체의 입장들을 정죄했다. 그러나 카톨릭신자들 가운데에도 이처럼 프로테스탄트주의에 대항하여 극단적으로 반응하게 되면 성어거스틴의 가르침을 부인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때문에 카톨릭신자들 사이에서도 은혜와 예정론에 관한 일련의 논쟁들이 발생했다. 16세기말 살라만카 대학교의 제수잇들은 루이스 드 몰리나(Luis de Molina)의 지도 아래 예정은 하나님의 예지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하여 가장 뛰어난 카톨릭 신학자들 가운데 하나였던 도미니크파의 도밍고 바네즈(Domingo Banez)는 이러한 주장은 어거스틴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이므로 마땅히 정죄를 받아야 하는 것이라고 응답했다. 양측은 스페인 종교재판정에 출두하여 서로를 비난했는데, 제수잇들은 도미니칸인들이 칼빈주의자들이라고 했으며, 도미니칸인들은 제수잇들이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라고 주장했다. 스페인에서는 이 문제에 대한 판결을 내리지 못한 채 로마로 인계했다.

  교황은 오랫동안의 주저끝에 양측 모두의 비난이 사실과 다르다고 결정하고, 이들 모두에게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을 삼가하도록 명령했다. 그런데 루뱅대학교에서 발생한 이와 비슷한 논쟁은 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곳에서 마이클 베이유(Michael Maius)는 죄악에 물든 의지는 아무런 선한 것도 생산할 수 없다는 어거스틴과 비슷한 이론을 가르치고 있었다. 1567년 교황 피우스5세는 이와 유사한 교훈들을 기초로 하여 작성된 79개 신조문을 정죄했다. 베이유는 이에 따라 자기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철회했으나, 계속 비슷한 신조를 교수했다.

  어느 제수잇학자가 베이유를 공격했을 때, 루뱅의 교수들은 문제의 제수잇학자가 펠라기우스주의자라고 비난하며 이에 맞섰다.다시 이 문제들을 조정하기 위해 교황들이 나설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베이유의 신학은 루뱅대학교에서 계속 유포되었으며, 60년 후인 1640년 코넬리우스 얀세니우스(Cronelius Jansenius)의 저서를 통해 다시 표면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의 작품 [어거스틴]은 사후에 출판되었는데, 그 내용은 단지 은혜와 예정론의 문제에 관한 이 위대한 신학자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얀센니우스가 발견한 어거스틴의 가르침은 칼빈의 신조들과 너무나도 비슷했으므로, 1643년 그의 주장은 교황 우르반8세에 의해 정죄받았다. 그러나 이 때문에 논쟁이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프랑스에서 두브지에르(Jean Duvergier)가 얀센주의의 기치를 들었다. 그는 원장으로 재직하던 수도원의 이름을 딴 별명인 '세인트 시란'(Saint Cyran)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인근 포트 로얄(Port Royal) 수도원의 수녀들은 당시 성녀로서 존경받던 안젤리크(Mother Angelique)의 영도 아래 개인적 경건과 교회 개혁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는데, 세인트 시란은 이 운동에도 특히 관련되어 있었다. 그는 이러한 개혁가들의 종교적 열정이 정치에 방해가 될 것을 두려워했던 리슐리외에 의해 투옥당한 바 있었다. 그러나, 세인트 시란은 이미 작고한 그의 동료 얀센니우스가 정죄당했던 것과 같은 해인 1643년 옥에서 나와 포트 로얄 수도원을 중심으로 얀센주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제 얀센주의는 단지 은혜와 예정론 교리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보다 열정적 종교개혁운동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당시 제수잇들은 '개연성'(probablism)이론을 주장했는데, 이는 곧 어떠한 행동이 아무리 미약한 정도라도 올바른 개연성만 있다면, 이 때문에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얀센주의자들의 눈으로 볼 때, 이는 도덕적 무관심주의에 불과했다. 그리하여 이들은 그대신 엄격한 순결생활을 강조했으므로 포트 로얄의 수녀들은 당시 천사처럼 순결하고 악마처럼 교활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세인트 시란은 풀려 나온지 얼마 안되어 죽었으나, 그의 사상은 안젤리크 수녀의 남동새 안 트안 아놀드와 철학자 블레이즈 파스칼에 의해 계승되었다.

 

p.71. 1713년 클레멘트 11세는 칙령 우니게니투스(Unigenitus)를 발하여 얀센주의를 완전히 정죄했다. 그러나 얀센주의는 계속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보다 강성해지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얀센니우스의 가르침들, 혹은 세인트 시란이나 안젤리크의 개혁열정, 혹은 파스칼의 심오한 종교성과도 별로 무관한 것이었다. 이는 차라리 고올주의에 유사한 정치적, 지적 움직임으로 변모해 있었다.

  일부 하급성직자들은 고급성직자들의 교만과 향락에 대한 반항으로 이 운동에 참여했다. 또 어떤 이들은 이를 프랑스의 내적 문제에 관한 로마의 지나친 간섭에 저항하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또한 어떤 합리주의자들은 완고한 교리 우월주의적 권위에 대항하여 이 운동에 참여했다. 결국 얀센주의는 정죄당하고 핍박당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의 특징과 형태를 상실했기 때문에 사라지게 되었다.

 

p.74. 그러나 마담 기욘의 교리들은 의심을 받기에 충분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몰리노스(Miguel de Molinos, 영혼의 안내서,Spiritual Guide)의 교훈들을 보다 극단적인 방향으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나님에게 진정한 희생을 드리기 위해서는 신자들이 마음 속으로 혐오하는 죄들까지도 지어야 할 때가 있다고 가르치게 되었다.

  이러한 주장은 특히 라콤 신부와의 친밀한 관계 때문에 좋지 않은 소문들을 낳게 되었고, 이 때문에 파리대주교는 신부를 투옥시키고 마담기욘을 수녀원에 유폐했다. 라콤은 당국에 의해 여기저기 감옥을 옮겨 다니다가 결국 미쳐 죽고 말았다. 마담 기욘은 왕의 총신들 가운데 하나가 중재에 나서 옥을 나서게 되었다.

  이때 마담 기욘은 젊은 주교 프랑스와 페네론(Francois Feneron)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그녀처럼 극단적인 경향은 없었으나 그녀의 기본적인 교훈에 공감하고 있었다. 결국 정적주의의 문제는 페네론과 당시 가장 뛰어난 프랑스 신학자들 가운데 하나인 쟈크 베니 부셋(Jacques Benigne Bossuet)사이의 격렬한 논쟁으로 비화되었다. 비록 부셋이 국왕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나, 페네론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는 경건한 인물이었으므로 논쟁은 지속되었다.....많은 이들은 그(페네론)이야말로 빅토르 위고의 걸작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밀리엘 신부의 모델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빅톨위고의 밀리엘신부와 장발쟝의 회심이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는지 비평하라. 그들은 결국 신비주의와 낭만주의 사조의 결합이다!

 

p.78. 그러나 루터란 중에는 멜란히톤이 루터신학의 충실한 추종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이들이 있었다. 여러가지 문제 가운데서도 특히 이들이 중요시했던 점은 멜란히톤의 인문주의적 경향이었다. 루터가 에라스무스와 공식적으로 결별을 한 후에도 멜란히톤은 에라스무스와 계속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부분적으로 그 이유는 멜란히톤이 평화를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는 동시에 그가 인간이성을 '더러운 이성'이라고 부르면서 경멸했던 루터의 극단적 입장에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와 비슷한 이유로서 멜란히톤은 이신득의 교리를 인정하는 동시에 선행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물론 선행이 구원의 방법은 아니지만 그 열매이자 증거로서 중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과연 루터는 선행을 강조하지 않았었던가. 이성에 대한 루터의 견해가 '극단적'인가. 곤잘레스의 평가가 수상하다.루터는 평화를 사랑하지 않았던가.

 

p.80. 처음부터 '노예화한 의지'(enslaved will)라는 루터의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던 멜란히톤은 실제로 인간의지에 보다 많은 자유를 허용하는 입장으로 옮아갔으며, 결국은 성령, 말씀, 그리고 인간의지의 협동을 주장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분명히 루터에게서 벗어난 것이 아닌가. 루터가 의지의 노예문제를 그의 신학의 가장 중추적인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그 중추에서 벗어난 것이라면...

 

p.81. 엄수파루터란들(대표: Mattias Flacius)은 또한 당시 성찬에 주님께서 어떻게 임재하시는가에 관한 루터와 칼빈의 해석의 차이를 강조하고 있었는데, 멜란히톤의 입장은 칼빈의 그것과 보다 가까웠으므로 필립파(곧 멜란히톤파)는 실제로는 칼빈주의파라고 주장했다.

 

p.82. 셈니즈(Martin Cemnitz)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루터란과 가톨릭, 그리고 다른 형태의 프로테스탄트주의 사이의 차이점들을 강조하는 한편, 루터란주의 내에 공존하는 여러가지 입장들 사이의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 속에서 발생한 신학은 흔히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라 불리운다. 결국은 이러한 신학이 17세기와 18세기에 루터란진영을 주도했다. 그의 가장 특색은 조직적 사고의 강조에 있었다. 루터는 전혀 신학의 일반된 체계를 하고자 시도한 적이 없었다.

 

p.82. 프로테스탄트 스콜라학파와 중세신학의 두번째 유사한 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채용이라 할 수 있겠다. 루터는 진정한 신학자가 되고자 한다면 아리스토텔레스적 사고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었다. 그러나 16세기말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에 관한 흥미가 다시 불붙게 되었고, 얼마 안되어 대부분의 루터란 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 논리학과 형이상학의 기초 위에 자기들의 체계를 펴고자 했다. 어떤 이들은 역시 아리스토텔레스를 기초로 신학을 연구했던 제수잇신학자들의 작품까지도 사용했다. 그리하여 프로테스탄트 스콜라학파의 내용은 가톨릭과 전혀 달랐으나, 그 방법론이 색채에 있어서는 당시의 가톨릭신학과 매우 유사한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p.83. 17세기의 루터란 신학이 '스콜라적'이라고 불릴 수 있었던 세번째 이유는 이들이 대부분 학교들을 통해 산출되었기 때문이다. 이 신학은 전세기와는 달리 더 이상 교회의 실제 생활 속에서 산출되어 설교 및 영혼의 목회의 목적으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대학교들 속에서 우러나와 다른 학자들과 교수들을 그 청중으로 의식한 것이었다.

 

p.83. 프로테스탄트 스콜라주의는 18세기 말경에는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되었으나, 두 가지 중요한 유산을 뒤에 남겼다. 이는 곧 성경영감의 교리와 엄격한 고백주의의 정신이다. 루터는 구체적으로 성경영감의 문제를 취급한 적은 없었다. 물론, 그가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은 의심할 나위 없으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이 모든 신학적 논쟁의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영감의 성질을 논하지는 않았다. 그에게 있어서 중요했던 것은 성경의 본문 자체가 아니라, 이 본문이 증거하고 있는 신적 행위였던 듯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경은 독자들을 그에게 이끌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시다.

 

곤잘레스의 견해가 칼발트신학에 근거한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p.83. 그러나 스콜라적 루터란들은 성경이 어떠한 의미와 방법으로 영감받았는가를 문제삼았다. 대부분은 성령께서 그 내용을 저자들에게 직접 전수하셨다고 대답했다. 이는 아마도 당시 일부 카톨릭신학자들이 사도들께서 제자들에게 일부 사항들은 서면으로, 그리고 다른 사항들은 구두로 지시했다고 주장했으므로, 특히 이를 반박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루터란 스콜라학파에 따르면 사도들께서 성경 안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들을 제자들에게 구두로 가르쳐 주었는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가르침들은 - 혹시 이들이 진정 존재한다 하더라도 - 성경처럼 하나님에 의해 영감받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기록하도록 명령하신 것만이 교회를 위한 권위를 지닌다.

 

출처 : 곤잘레스: 현대교회사(1- )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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