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곤잘레스: 현대교회사(89- )

2009. 11. 19. 01:22목양자료/1.기독교자료

p.90. 고마루스와 알미니우스 사이의 논쟁의 초점은 과연 예정이 존재하는가의 여부가 아니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양자가 동의했다. 왜냐하면 이에 관한 성경의 언급을 충분히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예정의 근거에 관해 의견을 달리했다. 알미니우스에 의하면, 예정은 과연 누가 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할 것인가를 미리 알고 계신 하나님의 예지에 근거한다고 했다. 반면 고마루스는 신앙 자체가 예정의 결과로서, 세계의 기초가 놓이기 이전부터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과연 누가 신앙을 가질 것인가 말 것인가 자체를 결정한 것이라 주장했다.

  알미니우스는 이에 대해 예정이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중보자이자 구세주로서 결정한 사실이라고 응답했다. 이러한 결정자체는 어떤 의미에서도 인간의 반응에 의존하지 않는 주권적 명령이다. 그러나 각 개인의 궁극적 운명에 관련된 하나님의 경륜은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가 아니라, 그의 신적 예지에 기초한다고 했다. 신적 예지란 물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지는 구속의 기초에 대해 각 개인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미리 알았다는 의미이다.

 

p.95. 알미니우스파의 예배에 참석했던 평신도들에게는 막대한 벌금이 부과되었다. 교사들은 도르트 종교회의 결정에 승복하는 의미로 섬여해야만 했다. 어떤 교회는 교회의 오르간 연주자들에게도 비슷한 조처가 취해졌다. 당시의 한 반주자는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도르트신조에 따라 연주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빈정댔다고 한다.

 

곤잘레스의 편견이 도르트회의에 대해서 배여있다. 왜 이런 것들을 거론하고 있을까? 연주자에게 과연 도르트회의신조에 따라서 오르간연주할 것을 요구했을까? 도르트신조의 그 정신에 따라서 예배하라는 것을 곤잘레스는 이해하지못하고 있는 것인가?

 

p.99. 18,19세기에 극성기에 달했던 이성주의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이성의 능력에 관한 확신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13세기부터 서부유럽에서는 자연계에 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었다. 이때가 대 알버트와 토마스 아퀴나스 등이 신학의 기초적 수단으로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재도입한 시기이다. 그때까지 신학적 사고를 주도하고 있었던 플라톤주의에 반해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이는 곧 자연계를 관찰하는 것이 진정하고 중요한 지식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니, 이에 따라 대 알버트 -그는 동물들에 관해 저술했다- 의 시기부터 자연계에 대한 흥미가 증가할 수 밖에 없었다.

  추상적 사고를 불신했던 중세 후기에도 동일한 경향을 이어받았다.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인간의 육체와 자연계의 아름다움을 깊이 감상하고 표현했던 르네상스의 예술 역시 이러한 흥미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겠다. 17세기에는 많은 이들이 이성의 목적은 자연계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자연계에 대한 흥미와 함께 - 주로 르네상스의 시대에 - 이성의 능력에 관한 보다 강한 자신감이 출현하게 되었다. 이 두 가지 경향은 많은 경우 자연의 질서를 이성의 질서와 일치시켜 보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모습은 전체 자연계가 일련의 수학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지식의 이상형은 모든 현상들을 양적인 표현으로 축소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갈릴레오의 이론 속에서 여실히 살펴볼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노력들의 성공사례들은 이성의 힘에 관해 낙관할 수 밖에 없도록 했다.

 

p.103. 데카르트주의가 보다 깊은 철학적 신학적 발전을 낳은 분야는 정신과 물체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다....문제는 데카르트가 이들 두 개의 존재가 서로 어떻게 관련되는가에 관해 만족할 만한 설명을 제공하지 못한 데 있었다...이 어려운 질문에 관해 세 가지 해답이 제시되었으니, 곧 기회원인론(Arnold Geulincx, Nicholas Malebranche), 일원론(Baruch de Spinoza), 예정조화론(Gottfried Wilhelm Leibniz) 등이었다.

 

p.105. 반대로 그(John Lock)는 모든 지식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경험은 감각을 통한 '외부적 경험'과 우리 자신과 우리 지성의 기능을 알게 해 주는 '내면적 경험'을 둘 다 포함한다. 이는 곧 유일한 진정한 지식은 우리들의 세 가지 차원의 경험에 기초한 것들임을 의미한다. 세 가지 경험의 차원이란 곧 그 존재를 우리들이 계속 경험하고 있는 우리들 자신, 바로 우리들 눈 앞에 펼쳐진 외부의 실재, 그리고 그 존재가 자신과 그 경험에 의해 매순간 증명되는 하나님이다. 이 세가지 차원을 떠나서는 확실한 지식이 있을 수 없다.

 

p.106. 1695년 록크는 [기독교의 합리성]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그 가운데서 기독교야말로 종교들 가운데에 가장 합리적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기독교의 진수는 하나님의 존재와 메시야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다. 그런데 이 사항들은 이성과 판단을 올바르게 사용하기만 하면 이미 알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기독교는 실제로 그 외에 더 중요한 사항들을 첨가하지 못했다고 록크는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분석해 볼 때, 기독교란 결국 인간들이 자연적 능력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던 진리와 법칙들의 보다 명료한 표현이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교묘한 논리로 기독교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는가. 그 과정을 철저하게 분석할 것.

 

p.110. 이러한 경험론적 이성주의에 대한 비판(흄에 의한) 때문에 이신론은 종식되었다. 만약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진정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면, 이신론자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사용했던 방법, 즉 누군가가 이 세계를 야기시켰다는 이론은 더 이상 성립되지 못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단지 속성들에 관해서만 합리적으로 논할 수 있고, 이것들을 초월한 실체에 관해 논할 수 없다면, '영혼,그리고 '하나님' 등의 개념들은 별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p.117. 끝없이 게속되는 것처럼 보였던 도그마에 관한 논쟁들, 그리고 기독교신자들 사이의 편협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은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또한 정확한 교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보다 많은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지고 있었던 상류층만 선호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러한 교육기회가 없었으므로 신학의 복잡한 문제들을 의논하고 이해할 능력이 없는 자들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간주되었다. 그리하여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복잡한 도그마의 미로 속을 누군가가 인도해 주어야 할 대상으로 비치게 된 것이다.

 

p.120. "나는 이미 책은 충분히 읽었다. 만약 그리스도의 영께서 내 속에 거하신다면 성경 전체가 내 속에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책을 더 읽어야 할 필요가 있단 말인가? 내 속에 있는 것도 아직 다 배우지 못했는데 왜 내 밖에 있는 것을 토론한단 말인가?"(야콥 뵈메의 말)

 

야곱 뵈메의 말이 얼마나 모순되는가 지적해 보라. 사람들은 이런 말이 경건하게 들리는 모양이다.

 

p.134. 이 점에 있어서 스페너와 그의 추종자들은 루터보다는 칼빈에 가까웠다. 스페너 자신도 개혁주의 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받은 바 있었으며, 그는 루터란 교회가 성화의 필요성을 보다 더 강조해 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수많은 정통 루터란 신학자들은 스페너가 사실은 칼빈주의자라고 선언했다....

  어떤 점에서 생각해 볼 때 경건주의를 둘러싼 논쟁은 광녀 기독교신앙이 단지 일반적 도덕성을 답습해야 할 것인지, 아니면 신자들에게 불신자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생활을 요구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라로 볼 수 있겠다. 전통적인 설교가들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단지 정확한 교리와 일반적 사회규범에 맞는 도덕적 생활만을 요구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경건주의자들은 사회가 시민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다. 이러한 주장은 항상 안정을 누리고 있던 교회들에게는 매우 받아들이기 거북한 도전이었다.

 

곤잘레스가 이해하고 있는, 경건주의논쟁의 동기가 과연 옳은가?

 

p. 134. 스페너의 가장 뛰어난 추종자는 유복한 루터란 가정 출신인 아이구스트 헤르만 프란케(August Herrmann Francke)였다...그는 스페너보다도 훨씬 기독교인의 생활이 가져야 할 기쁨을 강조했다.

 

p.136. 경건주의가 기독교역사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겠다. 너무나도 처절하고 치열했던 프로테스탄트의 생존문제에 급급했던 16세기의 개혁가들은 사실 비기독교 세계를 향한 선교에 힘을 기울이지 못했다. 어떤 이들은 현대의 기독교신자들은 다른 국가나 민족에게 복음을 전할 의무가 없다고까지 했다. 이러한 명령은 오직 사도들에게만 주어졌다는 주장이었다. 처음에 경건주의자들도 비록, 학교, 고아원, 빈민구제소 등 다른 곤경에 처한 신자들을 위해서는 열심히 활동했으나, 세계선교에는 큰 관심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p.144. 비록 웨슬리가 휘필드의 초청을 수락하기는 했지만 휘필드의 감정적 방법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옥외에서 설교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가 후에 회고한 바에 의하면, 당시만 해도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일들을 엄격한 질서에 따라 수행하시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했으므로 교회 건물 밖에서의 영혼을 구원하는 것마저 죄라고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사역의 결과를 보면서, 그러한 형태의 설교들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항상 그처럼 감정적인 설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혐오했다.

 

p.149. 그리하여 그는 합중국 주민들의 영국 정부에 대한 반란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1784년 이 신생국가를 위해 두 사람의 평신도 설교가들을 장로로서 안수하고 앵글리칸 사제였던 토마스 코크(Thomas Coke)를 '감독'(superintendent)에 임명하였다. 그는 물론 이 단어가 헬라어로 '감독', 혹은 '주교'를 의미함을 잘 알고 있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스코틀랜드 및 다른 지방에서 사역할 자들을 성직에 임명했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러한 조처들을 행한 후에도 계속 영국국교와 결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의 동생 찰스는 신세계를 위한 교역자들의 성직 임명 자체가 이미 영국 국교와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밝혀 주었다.

 

요한웨슬리가 일부러 멍청한 적 한 것 아니었을까? 교활함인가?

 

p. 149. 감리주의가 성공했던 이유들 가운데 하나는 당시의 산업혁명 때문에 야기되었던 새로운 필요에 적절하게 대응했기 때문이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은 산업화라는 과정을 겪고 있었다. 이에 따라 수많은인구가 공업중심지로 이동해 갔다. 여러가지 경제사정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이들은 당시의 교구체제로서는 급격히 증가한 도시인구의 필요성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교회로부터 이탈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이러한 대중들 가운데 감리주의는 그 수요를 충족시켜 주면서 추종자들을 만들어 갔던 것이다. 그런데 북아메리카에서는 완전히 다른 과정을 보여 주고 있었다. 정착민들은 이들에게까지 영향력을 미칠 수 없었으므로, 수많은 인구가 전통적인 교회와의 관계를 상실하게 되었다. 바로 이러한 개척민들 가운데서 감리교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 북아메리카감리교는 영국의 감리교가 일찍이 공식적으로 독립교회가 되었다.

 

이렇게 산업화과정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던 감리교지도층의 저변에 깔려 있었던 동기, 특별히 신학적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본능적인 반응이었을까 아니면 지배욕구였을까 아니면 분명하고 의식적인 신학적 동기가 있었던 것일까? 있었다면 무엇?

 

p.150. 177년 웨슬리는 평신도설교자 프란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를 식민지에 파견했다. 감리교가 계속 서쪽으로 이동하는 국경과 보조를 맞추도록 조처한 것은 애즈베리였다. 13개식민주가 독립을 선언했을 때, 웨슬리는 이들의 반란에 반대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내 감리교 설교가들은 독립운동을 지지했으며, 최소한 중도적 입장을 취했다. 그 결과 미합중국내의 감리교신자들은 계속 웨슬리를 존경하면서도 더 이상 그의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미합중국내의 감리파가 결국 감리주의 감독교회를 조직한 것도 웨슬리의 뜻을 어기는 줄 알면서도 앵글리칸 성직자들이 부족했던 현지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감독'이라는 명칭 자체가 웨슬리의 뜻과는 정면으로 상치되는 것이었다. 웨슬리는 자신과 코크를 가리켜 감독이라는 의미를 지니기는 하지만, 보다 평범한 용어인 'superintendent'라고 칭했다. 그는 코크와 애즈베리가 자기를 가리켜 '감독'(bishop)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듣고는 크게 분노를 터뜨렸다. 이때부터 아메리카감리교는 영국의 감리교와는 달리 감독을 가지게 되었다.

 

현대의 영국감리교는 '감독'(bishop)이 없는가? 감리교회(methodist church)여! 진정한 방법주의자(methodist)들의 교회로 개혁되라!

 

 

 

 

출처 : 곤잘레스: 현대교회사(89- )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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