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멸망원인

2008. 10. 15. 14:06교회사자료/10.세계사

로마의 멸망원인

 

서론 1. 내부적 요인   (1)정치적 요인, 경제사회, 문화적 요인 2. 외부적 요인  결론

 

서론

로마의 문명은 후대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로마의 건축은 비록 그 정신은 이어지지 않았으나 그 형식만은 중세의 교회 건축에서 그대로 유지되었고, 오늘날까지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조각 역시 거리와 공원을 장식하고 있는 기사상, 기념물로 세워진 아치와 원주, 정치가 및 장군의 석상 등에서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다. 새롭게 해석될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로마의 위대한 법학자들이 연구한 법 체계는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고, 그것은 중세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다. 더욱이 오늘날 유럽대륙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채택된 법률체계는 로마법의 상당부분을 수용하고 있다.

 

  또 다른 로마의 문학적 업적이 학문의 부활(12세기에 유럽으로 확산되어 르네상스에서 그 절정에 달했던)에 영감을 제공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로마 가톨릭 교회가, 그 의식은 물론 조직에 이르기까지 로마의 국가제체 및 종교 체계로부터 많은 부분을 받아 들였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가 후세에 미친 가장 큰 공헌은 그리스 문명을 서유럽에 전했다는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이후에 그리스적 이상으로 충만된 문화가 이탈리아에서 발달했다는 것은, 종전에 동방에서 그리스 지향적인 문명이 압도했던 사실에 비추어 동서간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했다. 로마가 진출하기 전까지만 해도 유럽서북부(현대의 프랑스, 베네룩스 3국, 독일 서남부, 잉글랜드)의 문화는 부족적인 문화였다. 로마는 이 지역에 도시와 그리스적 이상을 가져다주었으며, 무엇보다도 고도의 분화된 도시 생활의 발달과 더불어 등장한 인간의 자유의 개념과 개인적 자율의 개념을 심어 주었다. 물론 자유의 이상은 실제로는 번번이 묵살되곤 하였다. 그것은 로마의 노예제와 여성의 예속을 완화시키지도 못했고, 정복지에 대한 로마의 착취적 억압적 지배를 막아내지도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의 역사는 진정한 의미에서 서양 역사의 참다운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찬란한 역사를 지니고 있고 오늘날까지 그 여향을 미치고 있는 대제국 로마는 왜 멸망하였을까? 이 주제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로 사람들에게 다가왔고, 숱한 가설을 내놓게 되었다. 기독교의 유입을 그 원인으로 삼는 Gibbon부터 시작하여 로마의 멸망은 숱한 학설을 내놓게 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멸망은 어느 하나의 요소에 의해서 유기적으로 작용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로마의 멸망의 원인에 대해서 제기되었던 여러 학설들을 살펴보고 그 타당성에 대해 알아보기로 한다.


1. 내부적 요인


(1)정치적 요인


  로마제국의 정치적 혼란은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그 동안의 원주정 대신에 동방식 전제정을 채택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 개혁을 단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전제정을 유지하기 위한 필연적으로 관료제가 출현하였으며, 군대유지로 이미 휘청거리던 황실제정은 직업적 관료제의 출현으로 압박받게 되었다. 황제들은 재정문제의 해결을 주로 세제개혁에 의존하였다. 제정초기에는 황제의 직할령에서 나는 수입에 의존하였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황제직할령의 수입만으로는 부족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을 4등분하고 속주를 세분화하여 관료들의 수요를 대폭 늘리면서 더욱 심각해졌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이후 조치들은 세금을 늘려 이러한 확대된 관료제를 유지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제국의 경제와 사회구조에 미친 영향은 실로 심각하였다.

 

  각 시의회 의원 및 도시의 각종 직업들은 세습화되어 강제로 세금을 내게 되었고, 농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되자 도시민들은 과중한 세금압력에서 벗어나고자, 도시를 떠나기 시작하였으며, 각 속주의 대지주나 농민들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잃어가고 있었다. 자영농들은 아예 스스로 대귀족에게 토지를 바치고 그들의 소작농이 되어, 무거운 부담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이로써 서방속주에는 점차 중앙권력과는 동떨어진 독립당국에 가까운 대영주들이 출현하였다. 이들의 생산품이 중앙으로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으며, 황제들은 관직매매로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려 하였으나, 장기적 안목으로는 오히려 관직매매는 세원을 감소시킬 따름이었다.

 

  걷힌 세금도 생산적 투자보다는 전제정하에서 비대해진 관료제와 군대를 유지하기에 벅찬 형편이었다. 서방 속주들의 대지주들은 점차로 독립적인 왕국에 가까워졌으며, 국가에 대한 충성심은 희박해져 갔다. 대지주 귀족층들은 국가기구를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과 목적에 부합하게만 조종하였으며, 국가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다. 게르만족이 쳐들어왔을 때, 그들은 간단하게 충성의 대상을 로마 중앙정부에서 이민족으로 바꾸었던 것이다.

 

  이러한 지배계급 내 분열만이 아니라, 하층 피지배계층의 봉기 또한 로마제국을 밑에서부터 뒤흔들어 놓았다.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은 무거운 세금과 착취였다. 그것은 국가와 귀족의 착취에 대한 하층민들의 반항이었다. 5세기가 시작될 무렵 지대의 견딜 수 없는 중압, 원로원의 복권 후 변경의 황폐와 동요의 와중에 반란은 계속 확대되었고, 심지어 국가를 건설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서방의 사회적 양극화는 암울한 결말로 끝났으나, 제국은 밖으로부터 일격이 가해지기 전에 이미 안에서부터 위아래에서 분열되어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2)경제적 요인


  경제적 요소를 강조하는 설명은 매우 다양하다. 로마 경제구조의 취약성 심각한 무역수지 적자 등이 대표적인 설명이다. 로마 경제구조의 취약성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로스토프체프이다. 로스토프체프는 고대의 경제발전을 국가가 주도했고, 그나마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이룩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작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이런 한계 속에서 국가의 안전이 자유 경제체제와 양립할 수 없는 상황이 오자, 자유경제체제가 와해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국가의 강압성이 로마 멸망의 주원이라는 설명과 취지가 같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고대를 노예제 사회로 파악했고, 노예제는 그 비효율성 때문에 한계에 다다르게 되고, 결국에는 농노제 사회로 이행한다고 파악했다. 즉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따르면 이행기인 고대 후기는 노예제의 비효율성이 명확히 드러난 시기이고, 고대세계는 그 제도적 결함 때문에 결국 망할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스타이어만은 노예제의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위기를 발생시키고, 위 위기가 도시의 몰락과 봉건적 영지의 성장을 야기하였고, 결국 후기제국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 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설명은 매우 도식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 역사가 연속적인 발전을 한다는 설명은 하나의 명제일 뿐이지 증명된 사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노예제도 자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아도 노예제의 폐해와 그에 대한 반발이 심했을 때는 기원전 2-1세기였다. 후기 로마제국기에는 노예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된 적이 거의 없었다.

 

  로마의 무역수지 악화에 대해서 프리니우스는 동방 무역으로 막대한 부가 유출되어서, 로마가 심각한 무역수지 적자를 당하고 있었고, 재정적으로 심하게 압박을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일찍이 기번이 이 설명을 반박하였고, 이후 학자들도 이 설명을 별로 주목하지 않았다. 화폐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인도, 심지어 중국에서까지 로마의 데나리우스화가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로마의 부가 외부로 대량 유출되었음에 틀림없다. 또한 3세기 이후 로마제국은 심각한 자금의 부족을 경험하였다. 따라서 무역수지의 적자가 로마의 쇠망에 영향을 끼쳤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후기 로마제국기의 경제가 너무 악화되어 로마 제국이 멸망했다고 볼 수는 없다. 4세기에 로마는 상당한 부흥을 이루었으며, 경제의 쇠퇴로 인한 심각한 내부적인 갈등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국이 해체된 여러 가지 근본적인 원인들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는 것이 바로 고대 사회의 귀족적 가치관이다. 귀족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 중 하나는 독립된 권력을 갖춘 부유한 대지주가 되어 전쟁이나 공무에는 참여하지 않고 문화생활을 즐기며 편안하게 사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초기 그리스의 그것과도 유사하였다.

  로마 귀족들은 기계를 만지는 혹은 실질적인 직업들을 하찮게 여겼다. 생산을 위한 노동과 장사도 노예들과 삵군들 같은 천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었으므로 별로 가치를 두지 않았다. 그들은 고대적인 기준으로 볼 때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저급하고 천한 사람들로 대했다. 노예는 다른 사람의 재산이었고, 일꾼은 생계를 위해 고용인에게 예속되었으며, 상점 주인들은 고객들의 후원에 의지해서 살았다.

 

  이러한 태도들이 교육제도에 반영되었을 뿐 아니라 그 제도에 의해 조장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교육제도는 자유 학예(즉 자유로운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과목들, 교양 있는 귀족의 특징이 되고 수사학과 법학을 통해서 정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언변과 추상적 지식)훈련만 강조하였다. 그 결과 고대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추상적인 사고를 실질적이고 생산적인 경제적 목적에 적용하는 일이 드물었다. 그들은 노동에 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그러므로 노동을 좀더 쉽게 만들거나 생산성을 높이는 데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돈이 있으면 그저 토지와 대규모 재적 혹은 상업적 사업에 투자했고, 노동에 관해서는 노예들과 고용한 관리인이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예들과 소작인들과 가난한 농민들은 교육을 받지 못했고 받을 기회도 없었으며, 노동력을 절감하는 과학 기술적 혁신에 몰두할 의욕도 없었다.

 

  지배적인 가설들의 견지에서 볼 때 귀족들은 오히려 과학기술의 혁신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하층민들이 자신들에게 계속해서 의존했기 때문에 큰 혜택을 입었다. 대 귀족이 되었다는 표시의 하나는 그간 행사하는 후원활동의 범위가 얼마나 넓으냐 하는 것이었다. 피보호인들과 예속인들을 더 많이 거느리고 있을수록 그의 신분도 높게 평가되었다. 그러한 태도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잘 예시해준다. 그는 콜로세움을 건축할 때 노동력을 절감하는 기중기를 제작하자는 착상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 착상을 낸 사람이 왜 기중기를 사용하지 않느냐고 묻자, 베스파시아누스는 될 수 있는 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많이 고용하기 위함이라는 취지로 대답을 하였다. 황제로서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인 로마에서 가장 위대한 후원자임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제국의 가장 암울한 시대에조차 황제들이 계속해서 막대한 자금을 단지 제국의 두 수도의 빈민들을 먹이는 데만 사용하지 않고 오락을 후하게 제공하는 데도 사용했던 이유는 베스파시아누스의 그러한 태도가 잘 설명해준다.

 

마찬가지로 귀족들에게서 유래한 도시 개념도 경제적으로 역효과를 냈다. 고대의 도시는 대개 전쟁 수익과 투자의 대리 경작으로 돈을 번 부유한 귀족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그들에게 도시는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후원자로서의 지위를 과시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의 도시들을 웅장하게 장식하게 위해 경쟁을 벌이고 생산과 거리가 먼 개선문들과 신전들과 극장들과 원형 극장들과 경기장들과 목욕탕들을 건축하여 자기들의 권력과 신분과 고상한 취향을 자랑하였다. 제국을 악화시키는데 기여한 정치불안과 내전들은 귀족들이 권력과 명예와 영광에 정신이 팔려 있음으로 해서 갈수록 증가했다. 그것이 바로 과거에 공화정을 약화시킨 주 원인이었다. 황제가 된다는 것은 그 지위에 따르는 최고의 권력과 명성을 얻는 것을 뜻했다.

 

그러므로 외침의 위기가 존재해 있는 중에라도 내전을 일으키면서까지 황제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잡으려는 유혹이 언제나 컸다. 반면에 권력이 황제의 수중에 집중되다 보니 많은 귀족들이 한때 그들의 권력에서 핵심 내용이었던 공직들을 포기하는 일이 생겼다. 대신에 그들은 막대한 재산과 화려한 사치와 시골의 대저택들,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중앙정보를 무시하고 세금을 피할 수 있게 해준 사적인 군대 같은 귀족으로서의 사적인 표지들을 개발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제국을 보존하는 쪽보다는 약화시키는 쪽으로 기여했던 셈이다. 출신성분이 대 귀족이 아니었던 사람들은 그들의 이상을 흉내 내고 그들처럼 되고 싶어 했다. 제국 후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실질적인 권력을 지닌 사람들은 그 권력을 이용한 압제와 독직으로 재산을 긁어모을 수 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그렇지 않아도 능력 이상의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던 생산력 있는 중간층과 하류층을 약화시키고 소외시킬 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제국의 인력부족과 경제적 문제들은 한층 더 가중되었다.


(3)문화적 요인


  문화적 요소를 강조한 설명 중 대표적인 것은 기독교의 전파가 로마를 멸명시켰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는 종교의 비합리주의에 반대하거나 고전 문화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서기 5세기까지 로마문화를 주도하고 그리스도교를 배척한 이교 지식인들의 편견을 그대로 취한 여러 사상가들 사이에 인기가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시국의 군사적 열의를 침체시킨 위험한 평화주의를 조장했고, 소중한 병력자원을 수도원으로 빼냈고, 갈수록 위태로워지던 국가를 구하는데 필요한 우수한 인재들을 교회의 성직자들로 끌어들였으며, 타종교들에 불관용하고 내부적인 교리 분쟁을 일삼음으로써 위기 때에 국가를 지키는 데 필요한 내부의 통일을 파괴했다고 주장하였다

 

  피상적으로 생각하면 이런 비판이 정당해 보일 수가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교인들이 종교적 이유로 군 복무를 거부하는 사례들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황제들의 군사정책은 다른 많은 황제들의 정책을 따랐으며, 심지어 그리스도교 주교들이 자기들의 도시들을 방어하는 데 앞장선 사례들도 있다. 많은 유능한 성직자들은 국가를 위해 봉사하기를 거부한 게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속사에 참여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법률이 그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많은 그리스도교의 과오가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와 상관없이 존재하던 삶의 압박에서 도피하고 있었고, 비록 수도원이 없었을지라도 다른 피난처를 찾았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분열을 초래한 그리스도교 교리 투쟁들이 제국에 해를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 투쟁들은 그리스도교가 존재하지 않았더라도 다른 투쟁들을 낳았을 좀더 깊은 사회, 경제적 문제들의 징후들인 경우가 많았다. 이러한 설명들은 계몽주의 시대의 사조를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기독교를 성장시킨 것이 로마 제국의 중요한 업적이며, 기독교의 발전이 문화와 정치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는 주장이 늘고 있다.


(4)지리적 요인


  2세기말경에 로마제국의 영토는 최대로 확대 되었다. 이 때 제국은 군사적으로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내정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한계를 초월하였다. 제국의 지리적 구조는 마치 도우넛을 길게 늘여놓은 형태로서 지중해가 중간에 크게 뚫린 구멍에 해당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 구멍은 크나큰 자산이었다. 왜냐하면 지중해 연안 전역을 단일 제국으로 묶어둘 수 있게 했기 때문이었다. 반면에 제국의 이러한 지리적 구조는 육지의 국경선이 거주 가능한 영토의 면적에 비해 지나치게 길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국경지대들이 심각한 위협을 받을 때 그 지역들을 방어하는데 막대한 인력과 자원이 들었으며, 복잡한 문화를 유지하기에 필요한 다른 중요한 활동들에는 상대적으로 적은 인력과자원이 할애되었다.

 

서방에서는 특히 그랬다. 서방은 동방에 비해 더 길고 취약한 국경지대들을 갖고 있었다. 야만족들이 라인강과 도나우 강으로 이어지는 2400킬로미터의 국경선을 넘어 침공해 들어온 일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동방이 아르카디우스 때 일리리쿰의 320킬로미터를 인수 할 때까지 도나우 강 하류 지대를 제외한 전 지역을 방어할 책임은 모두 서방의 몫이었다. 더욱이 도나우강 하류를 건너온 야만족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철옹성 같은 방어에 가로막히면 불운한 서방으로 기수를 돌리는 때가 많았다. 브리트니아도 하드리아누스 장벽을 넘어오려는 야만족과 해상침략자 앵글로색슨족에 맞서서 방어해야할 지역이 이만저만 넓지 않았고, 북아프리카 서부도 무어족으로부터 방어해야 했다. 동방은 이집트에 훨씬 안전한 국경지대를 두고 있었고, 페르시아와 가끔 전쟁을 치르기도 했지만 문명국이었던지라 외교를 통해서 관계를 조정할 수 있었다.


(5)인력의 감소


  지리적 요건과 더불어 로마의 방어체제를 약하게 만든 요인은 인력의 부족이다. 방어해야할 국경지대는 광할하고 야만족의 침입은 늘어만 가는 상황에서, 후기 제국은 군대에 병력자원을 공급하고 점점 증가하는 비용을 뒷받침 하는데 필요한 수준의 경제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인력이 부족하여 시련을 겪었다. 제국의 인구가 전염병이나 그 밖의 원인들로 인해 심각하게 감소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갈수록 늘어만 가던 인력 수요에 비추어 볼 때 인력 부족 현상이 심각하게 대두되었던 것이다. 도시가 발달한 동방에 비해서 인구가 훨씬 적으면서도 방어해야할 영토는 더욱 넓었던 서방은 이 인력 부족 현상을 훨씬 더 뼈저리게 느꼈다.

 

그러므로 서방은 갈수록 강력한 게르만족 군사 지도자들에게 의존하게 되었고 결국은 그들이 서방자체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인구의 감소를 주장한 대표적인 학자는 보크이다. 보크에 따르면 2세기 후엽부터 흑사병, 전쟁, 기아, 강제추방 등으로 인구가 대폭 감소했고, 그 정도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심해졌다. 4세기 초에 일시적인 개선이 이루어졌지만, 로마 제국의 경제, 군사정책은 계속해서 인구의 감소를 촉진시켰다. 인구의 감소는 이용할 수 있는 인력을 감소시켰고, 결국 로마를 멸망시켰다. 실제로 로마제국말기에 인구가 심각하게 감소했다면 로마제국의 몰락에 인구의 감소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감소를 주장하는 설명에는 큰 약점이 있다. 4-5세기에 인구가 회복되었다는 사료들이 몇몇 있거니와 인구감소를 증명할 통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최근 고고학 연구들에 의하면 일반적인 주장과 달리 후기 로마 제국시기에도 농촌 지역에 여전히 인구밀도가 높았다. 가령 이탈리아 남부의 부치노 유적지에서는 4세기 내내 인구밀도가 매우 높았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발견되었다.


2. 외부적 요인


  이 견해는 로마가 멸망한 결정적 원인을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보고 있다. 이 견해를 바탕으로 로마가 게르만족의 침략으로 멸망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363년 율리아누스 황제가 죽은 뒤, 로마에는 동방에서나 라인, 다뉴브강 쪽에서 이민족의 침입이 되풀이 되었다. 서부를 통치하던 발렌티니아누스 1세(재위 363-375)와 그의 동생 발렌스(재위 364-378)의 활약도 소용없이 서부에서는 알라만인이 침입하고, 갈리의 바가브타에란도 격화되었으며, 브리타니아, 파노니아, 북아프리카 등도 어지러웠다.

  한편 동부에서는 365년 고트족이 반란을 일으켰고, 376년 흉노에게 쫓긴 서고트족이 제국 안에 정주할 땅을 찾아 남하하여 고트족들과 함께 트라키아 전토를 짓밟고 마침내 발렌스 군대를 괴멸시켰다. 내외의 위기를 헤쳐 나가기 위하여 로마는 완전히 군사국가화 하였으나 그 군대는 거의가 야만인으로 구성되었고, 한편 경제활동의 정체는 극도에 달하였다. 고트족은 한때 테오도시우스(재위 379-395)에게 쫓겨났으나 결국 382년의 협정에 따라 제국 영내에 정주할 것을 허락받았다.

  그 동안 테오도시우스 1세는 교리논쟁과 종교개혁을 통하여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하고, 전통적인 제의를 금지, 이단을 억압하였다.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제국의 전토를 통치할 수 있었던 마지막 황제로서 그가 죽자(395) 제국은 최종적으로 동서로 분리되어 동반부는 아르키디우스, 서반부는 호노리우스가 영유하였다.

  서로마 제국에서는 정치의 실권을 게르만인 무장인 스틸리코가 장악하였으나, 그가 처형된 뒤 각지에 황제가 난립하여 정정은 어지러웠다. 410년에는 알라리크왕이 거느리는 서고트족이 로마시를 점령하였다. 그 뒤 서고트족은 방향을 돌려 에스파냐로 이동하였으며, 역시 게르만인인 반달족은 아프리카로 진출하여 각각 왕국을 세웠다.

  또 부르군트족과 프랑크족도 갈라아에 침입하고, 색슨족은 브리튼섬으로 건너갔다. 한편 로마의 장군 아이티우스가 서고트와 프랑크의 힘을 빌려 카타라우눔 전투에서 아틸라가 이끄는 흉노족을 격퇴하였으나(451), 455년 로마시는 반달족에게 약탈당하였다. 그 후에는 게르만인 장군이 로마의 정치적 실권을 쥐었으며, 결국 게르만인 용병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 황제를 폐하여 서로마 제국은 멸망하였다(476).


3. 부수적 요인들


  로마의 멸망원인을 파악할 때 가장 큰 기준으로 설정할 수 있는 것은 내부적인 요소를 강조하는가 아니면 외부적인 요소를 강조하는가이다. 내부적인 요소를 강조한다는 것은 로마제국이 내적 약화로 인해서 스스로 병들어 가고 있었고 그 병이 악화되어 결국 멸망했다는 설명이다. 이에 반해서 외부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설명은 외적의 침입에 의해서 로마 제국이 붕괴되었다는 설명이다. 물론 내적인 요소를 강조한다고 해서 최종적으로 서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에 의해서 멸망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외적인 요인을 강조하는 설명들이 반드시 로마제국이 내부적으로 약화되어 가고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궁극적인 원인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이렇게 나눌 수 있을 뿐이다. 이 범주에 들지 않는 설명들도 상당수 있는데,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다.


1). 인종혼합: 초기의 로마인들을 동방에서 온 열등한 인종들과의 혼합으로 생물학적으로 압도된 아리아계의 우수한 인종으로 본 불합리한 견해에 기초를 둔 주장이다.

2). 납중독: 이 견해는 핵심 지도 계층사람들이 납으로 만든 상수도관을 통해서 가정까지 물을 끌어다 쓰고 옹기 대신 납그릇들로 요리를 할 만한 경제적 여유가 있었기 때문에 물과 음식으로 지나치게 많은 양의 납을 흡수하여 죽었다는 설이다.

3). 토양의 황폐: 일부 학자들은 제국의 토양이 황폐화하고 그로 인해서 치명적으로 중요했던 농업경제가 쇠퇴함으로서 제국이 멸망했다고 주장했다.

4). 기후변화: 어떤 학자들은 장기간에 걸친 기후 건조와 그로 인한 생산감축으로 인해 제국의 농업이 쇠퇴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들은 로마제국의 멸망에 대한 특정한 원인을 찾을 수 없고 그것이 우발적인 사건이었거나, 필연적인 사건이었다.


결론


  이상에서 로마 제국의 멸망에 대한 여러 설명들을 가능한 한 무리 지어서 살펴보았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매우 위험하고, 부적절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 하나의 원인에 의해서만 로마 제국이 멸망했다고 믿는 학자들은 드물다. 그리고 특정한 한 요소를 강조한다고 해도, 다른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이 때문에 한 학자의 주장을 하나의 틀에 넣고 분류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그리고 특정학자의 강조점이 명확하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요소에 속하는지 분류하는 것이 힘들 수도 있다.

  이 문제를 연구한 학자들은 자기 시대의 사상이나 시대조류를 그대로 로마 제국의 멸망문제에 투영하곤 했다. 이렇게 로마제국의 멸망문제를 연구한 학자들이 대부분은 서구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동로마 제국의 존재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최근에 이런 문제점을 인식하고 특정한 몇 가지의 이론으로 로마의 멸망을 설명할 수 없고, 오히려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로마의 문명이 지속되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학자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지금까지 로마의 멸망을 설명하려는 노력들은 그 자체에 많은 편견과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서로마 제국은 결코 독립적이고 고립된 국가가 아니었고 동로마제국과 서로마 제국사이에는 긴밀한 융화와 협조관계가 있었다. 또한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정착한 게르만족들은 문명의 파괴자가 아니라, 로마문화를 배우려는 도제들이었다. 게르만족들이 이런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로마 문화는 단절되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로마인들도 게르만족들을 적대시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동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따라서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로마제국시대에 게르만족과 로마인들간에 이루어지고 있던 문화의 전파와 변용을 촉진시킨 사건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로마제국의 멸망이라는 문제도 이 각도에서 바라보아져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로마 제국사, 인드로 몬타넬리 저, 김정하 역

로마사, 프리츠 하이켈하임저, 김덕수 역

로마제정사연구, 허승일외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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