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의 문화 창조

2008. 10. 15. 14:06교회사자료/10.세계사

로마인의 문화 창조

 

1. 로마인들의 고전고대 문화세계의 형성/ 로마의 초기문화/ 계급투쟁과 공화정의 발전 /로마의 반도통일과 통치방법 2. 지중해 세계의 통합과 공화정의 위기 / 포에니 전쟁/ 로마공화정의 변질과 위기 /3. 지중해 세계제국의 성립과 변질 아우구스투스와 지중해 세계제국 / 3세기의 내란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중흥책과 고대세계의 변질 4. 로마의 문화 로마의 초기 문화 /로마문화의 개요 /로마법/로마의 건축/ 로마의 복식/로마의 교육/로마의 문학/볼루멘과 코덱스/ 로마의 헬레니즘 예술 /로마제국 후기의 예술 혁신/ 기독교 제국에 의해 전승된 로마 문화/ 문자문화의 퇴조/ 로마의 언어/로마의 가부장 제도/ 로마의 종교와 신/로마의 목욕탕 <참고 문헌>


1. 로마인들의 고전고대 문화세계의 형성


로마의 초기 문화


기원전 4세기 후반부터 희랍 문화세계는 쇠퇴와 변질 그리고 다른 차원의 문화 단계에 들어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문화 세계가 형성되게 되었다. 그러나 서양문화의 원류로 볼 수 있는 희랍의 문화유산을 계승하여 서양의 고전문화를 완성시킨 것은 로마인들이었다. 로마인들의 활동무대가 된 이탈리아 반도도 다른 지역과 같이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거쳐 금석병용기 시대를 거쳤다. 초기의 인종은 리구리아인과 이베리아인이었다. 기원전 1700년경과 1200년경에 로마사의 형성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이탈이라인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호상주택에서 살다가 육지 생활을 하였고, 청동기구를 사용했으며 화장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들은 테라마레인이라 하며, 그들이 남긴 문화를 테라마레 문화라고 한다.

 

다음에는 움브리인, 라틴인, 삼니트인들이 들어왔다. 이들은 이탈리아에 철기 문화를 전하였고 선주민들을 추방하거나 융합하면서, 움브리인들은 반도의 북부와 중앙지대, 라틴인들은 티베르강의 하류지방, 삼니트인들은 반도의 남부지방의 산악지대와 하천가에 정착하였다. 반도의 서부해안지대는 기원전 10-8세기 무렵 이래로 에트루리아인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헤로도투스에 의하면 이들의 원주지는 소아시아 지방이었으나 기원전 10세기와 8세기 2차에 걸쳐서 이동하여 반도의 서부 해안 투스카니 지방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도시국가를 창설하고 종교적 연맹체를 형성하면서 영토를 확장하였다. 반도의 남부 해안지대에는 기원전 8세기 이래로 희랍인들이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후일 로마인들은 이곳을 마그나 그레시아라고 불렀다. 아프리카 북부 해안지대와 반도 남방에는 포에니키아인들이 카르타고시를 중심으로 지중해 세계의 해상권을 독점하였고, 반도 북부에는 갈리아인들이 있었다.

 

로마인들은 이와 같은 환경 속에서 일개 도시 국가로 출발하여 세계제국적인 문화를 건설하고 서양의 고전문화 세계의 완성자가 되었다. 초기 로마인들의 역사적 발전에 관해서는 그들과 에트루리아인들의 관계 때문에 구구한 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는 로마인과 에트루리아인 사이에 종교, 정치, 군사, 사회, 언어상의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특히 초기 로마인들의 여러 제도에 에트루리아인들의 제도들이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로마 초기의 왕정에 있어서도 로마인과 에트루리아인과의 관계가 밀접하여 대체로 왕들 중의 몇은 에트루리아 출신으로 보고 있다. 즉 이민족인 에트루리아인들이 한때 로마를 지배하였거나, 에트루리아인들의 한 도시 국가로서 로마가 출발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기원전 6세기 말 경에 로마인들은 왕정을 추방하고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이것은 로마 민족 내에서의 정치적 혁명이라기보다는 에트루리아 왕권에 대한 로마인들의 민족적인 해방운동의 결과로 볼 수 있겠다.

 

로마인들은 수렵생활에서 목축생활을 거쳐 농업 경제생활을 하는 한편, 대외전쟁을 빈번히 수행했기 때문에 로마의 신들은 이들과 깊은 관계에 있었다. 그리고 절대적인 가부장권하의 가족제도가 사회의 근저를 이루고 있었다. 사회의 구성요소로는 귀족과 평민 및 예속민 등이 있었으나 귀족만이 완전시민권을 소유하였다. 시민권에는 공권과 사권이 있었는데, 공권에는 참정권과 선거권 및 피선거권이 있었고, 사권에는 통혼권과 소유권이 있었다.

 

귀족에게는 국가재정을 부담할 것과 국가방위의 군사복무가 의무로 되어 있었다. 이들은 로마의 창설 당시의 3개 부족의 자손들이었다. 전통적으로 혈통의 순수성을 자부하였기 때문에 다른 신분과는 통혼하지 않았다. 한편 평민은 그 구성이 복잡하였고, 권리나 의무도 없이 이방인과 같은 존재였다. 그들은 로마 초기에는 숫적으로 적었으나 기원전 6세기 말경에는 그 수가 증가하였고, 공화정 초기에는 귀족의 수를 능가하게 되었다. 귀족은 엄격한 혈연결혼과 빈번한 대외전쟁에서 인명과 재정상의 희생이 많았기 때문에 그들의 수는 감소되고 있었다.

 

로마사회에서 평민들은 정치적 권리와 거주지의 차별 및 혈연상의 차별을 받았고 경제적으로 불리한 환경에 있으면서도 숫적으로 귀족을 능가하였기 때문에 감소일로의 귀족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었다. 그러나 귀족은 대외전쟁을 수행하여야 했기 때문에 평민의 군사적인 원조가 불가피하였다. 이에 이질적인 계급사이에 각종의 문제가 야기되고, 마침내 투쟁이 전개되었으나 그때마다 상호화합하여 공화정을 더욱 발전시켰다.


계급투쟁과 공화정의 발전


  평민이 귀족을 상대로 투쟁한 주목적은, 귀족과 동등한 정치적 권리를 획득하고 사회, 경제면에서 귀족과 동등한 환경을 조성하자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기원전 5세기 초에 가혹한 부차법과 불평등한 공지분배 등의 시정을 귀족에게 요청하였으나 거부되자 분리운동을 전개하여 평민만의 독자적인 국가건설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때마침 로마의 대외 정세가 위급해지자 귀족은 평민의 요청을 승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민의 권리를 옹호할 수 있는 호민관을 두고 그의 권리가 신성불가침이라고 규정하는 한편, 평민의회의 설치를 허가함으로써 평민자체 내의 선거권, 입법권, 재판권 등을 행사할 수 있게 하였다.

 

이제 평민은 로마 국가가 인정한 자치기구의 보호하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이 기구를 중심으로 여러 면에 걸친 계급투쟁을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450년경에는 귀족 중심의 관습법이 없어지고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12표법이 제정되어 귀족과 평민 두 계급이 법 앞에 평등하게 되었다. 이 법은 로마 청소년들의 유일한 교과서였다고 한다. 그러나 12표법 중의 제 11 표는 귀족과 평민의 통혼을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평민들은 이 조항의 삭제를 목표로 투쟁을 전개하였다. 즉 귀족의 출생성분의 순수성을 부정하고 두 계급 사이의 출생성분에서 오는 차별을 철폐하자는 것이기 때문에 귀족은 이 제안을 거부해 버렸다.

 

이에 이 법안의 제안자인 호민관 카눌레이우스가 평민은 앞으로 일체 군사소집에 응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위협하였다. 이 시기에도 대외전쟁을 수행 중에 있었기 때문에 귀족은 평민의 위협 앞에 굴복하고, 12표법 중에서 제 11 표를 삭제하였다. 이제 로마법의 이론상의 두 계급의 출생성분으로 인한 하등의 차별이 없어지게 되고, 기원전 4백년 경부터는 평민도 원로원 의원이 될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377년부터 기원전 367년까지의 10년 동안에는 리키니우스법안을 통과시키기 위한 운동이 전개되었다. 로마는 그때에도 대외군사 작전에 있어서 중요한 시기였기 때문에 귀족은 부득이 리키니우스 법안을 승인하였다. 이 법에 의하여 통령 2명중에서 1명은 평민에서 나오게 되었고, 개인의 공지 점유량과 가축 소유량에 제한을 가하였으며, 지주는 노예만을 고용할 것이 아니라 평민도 그들의 농토에 취업시키도록 하였다. 그리고 평민도 종교상의 신관이 될 수 있게 되었으며, 가혹했던 부차법이 평민을 위해 대폭 수정되었다.

 

기원전 326년에는 채무로 인한 인신구속이 금지되어 채무자를 노예로 매각처분할 수 없게 하였다. 기원전 287년에는 호르텐시우스 법이 통과됨으로써 평민의회의 결의 사항이 귀족에게도 적용되었다. 이것은 평민의회의 제정법이 전 시민을 제재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민권의 승리였다.   이와 같은 계급투쟁의 과정을 거쳐 로마 공화정이 형식상으로나 법이론상으로 완성되었다. 로마 공화정의 발전과정에 있어서 로마의 이질적인 두 계급은 대내적으로는 장기간에 걸쳐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대외적으로는 로마 영토의 확장을 위하여 항상 단결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도시국가 로마는 희랍적인 분립주의가 아니라 영토적인 민족국가 또 후에는 인류를 하나의 공동체에 포용하는 세계국가를 건설할 수 있었다.


로마의 반도통일과 통치방법


 로마인들은 대내적으로 공화정을 발전시키는 한편 대외적으로 꾸준히 반도통일을 위하여 싸웠다. 기원전 5세기 초에 체결된 라틴 동맹을 그 출발점으로 하여 이후 볼스키족과 아에쿠아족 및 사빈족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기원전 5세기 전반에는 에트루리아족과 백년 동안 싸워 승리하였고, 4세기 초에는 갈리아의 위협을 받아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결국은 물리쳤고, 4세기 중엽에 라틴전쟁에서 라틴 도시들을 굴복시켜 로마에 예속 시켰다. 4세기 후반에는 전후 3차에 걸쳐 삼니트 족과 싸워 이겼다. 마지막으로 3세기 후반에는 마그나 그레시아를 반도 내에서 몰아냈다. 이렇게 하여 기원전 270년경에는 반도통일이 거의 완성되었다.

 

반도통일의 과정에서 로마는 점령지역의 1/3 혹은 1/2을 로마의 공지(ager publicus)로 지정하였고, 특히 완강하게 반항한 적은 그들 농토의 2/3를 몰수하여 로마의 공지로 지정하였다. 이 공지에는 로마 공화정의 원칙에 따라 로마 시민들과 라틴인들을 이민시키고 그 점유권을 부여하였다. 식민방법에는 로마시민만을 이민시켜 정착케 한 것과 로마 시민과 라틴인을 혼합하여 이민시켜 정착케 한 것 등 두 가지가 있다.

 

한편 피정복 도시는 자치도시와 동맹시로 구분하여, 자치도시에는 자치권을 승인하되 로마 시민권의 일부인 결혼권과 통상권만 인정하고 군사권과 외교권은 로마가 장악하였다. 따라서 피정복 도시들 상호간에는 정복자인 로마에 대항하기 위한 동맹을 체결할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군사행정도 일체 불가능하였다. 로마는 이와 같은 분리통치에 따라 이탈리아 반도통일을 유지할 수 있었고, 반도 내에서 그 지위를 확고히 했던 것이다. 당시 로마의 국력을 살펴본다면 초기 로마는 불과 1천 평방 킬로미터에 13만 명 정도의 시민밖에 없었으나 점차적으로 그 영토가 확장되고 시민수도 증가하여, 포에니 전쟁이 시작(기원전 264)될 무렵에는 영토가 2만 7천 평방킬로미터로서 이탈리아 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고, 시민수도 28만 2천명으로 증가 되었다. 또 이 무렵 군사동원이 가능한 수는 로마 시민군과 로마 동맹군을 합하여 74만 8천 3백명이나 되었다. 로마는 이때부터 이탈리아 내의 전 역량을 동원하여 지중해 세계제국의 역사를 창조할 모든 준비를 갖추었다고 볼 수 있겠다.


2. 지중해 세계의 통합과 공화정의 위기


포에니 전쟁


로마인들은 지중해를 ‘우리들의 바다’라고 하는 신념을 품고 있었다. 반도 통일을 성취한 후 그들은 지중해를 정복하여 제국을 건설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그 역사적인 전환점이 된 것이 바로 포에니 전쟁(기원전 264-146)이었다. 이 전쟁 이전의 로마는 이미 도시국가도 아니고 악티움 주도 아닌 이탈리아 반도를 기반으로 한 고대세계의 방대한 영토적인 통일국가로 변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법률, 정치제도 조직은 아직도 도시국가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경제면에 있어서도 농업경제를 토대로 한 자연경제 체제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군사면에 있어서도 시민군과 동맹군으로 구성된 육군은 있었으나 해군이 없었다. 한편 페니키아인의 카르타고는 당시 지중해 세계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해군국이었으며, 상업면에 있어서도 지중해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는 지중해에서의 전쟁에는 불리한 처지에 있었다.

 

포에니 전쟁은 전후 3회에 걸친 백여년 동안의 장기전쟁이었다. 제 1회전(기원전 264-247)에서 승리한 로마군은 3천 2백 탈렌트의 배상금과 시칠리아 사르디니아 및 코르시카 등을 영유하게 되었고, 제 2회전(기원전 218-201)에서는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대군을 거느리고 이탈리아 반도까지 침입하여 로마에 큰 타격을 주었으나, 로마의 스키피오가 자마전투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 때 전승의 결과 로마는 이베리아 반도와 거액의 배상금을 얻었으며, 카르타고의 군함 보유수를 10척으로 제한하고 나머지는 모두 인수해 버렸다. 그리고 로마군의 사기가 충천하자 동부 지중해로 진출하여 마케도니아 왕국을 멸망케하고 시리아 왕국을 굴복시켜 소아시아를 점령하였다. 희랍도 그 때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제 2회전에서 패배한 카르타고는 해외의 모든 영토를 로마에 양도하였기 때문에 한 도시만을 영유한 소국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에 대한 그들의 적개심이 강했기 때문에 서서히 국력을 회복하여 올리브, 포도, 포도주 등의 생산량을 증가시켜 수출에 주력한 결과 로마와 이탈리아 반도 내의 대토지 소유자들의 수출에 타격을 주었다.

  이에 로마 원로원의 카토를 비롯한 대지주들이 카르타고를 멸망시킬 것을 주장하여 마침내 제 3회전(기원전 149-146)이 시작되었다. 로마의 스키피오가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이를 로마의 속주로 지정하였다. 이제 지중해는 로마의 내해가 되었고 이탈리아 반도의 역사는 지중해 세계사로 전환되었을 뿐 아니라 로마는 고전고대 세계의 육, 해를 지배하게 되었다.


로마공화정의 변질과 위기


지중해 세계제국을 이룩한 로마는 광대한 영내의 이질적인 지연, 전통, 종교, 언어, 인습을 가진 민족들을 어떻게 통치할 것인가 하는 중대 문제를 해결하여야 했다. 따라서 종래의 동맹정책과 융화정책을 버리고 총독정치를 실시하였다. 즉 이방인들을 협력자나 동조자로 볼 것이 아니라 피정복자로 보게 되었다. 모든 속주에는 총독을 두고 행정권 외에 군대를 주어 군사정치를 실시케 하였다. 그러나 토지를 몰수하거나 식민지를 건설하지는 않았다. 토지소유권은 어디까지나 전 소유자에게 있었고 로마는 다만 피정복자들로부터 징세를 할 뿐이었다.

 

총독의 주된 임무는 징세였는데 속주의 행정비와 군사비를 제외하고는 모두 본국에 바쳤다. 그들의 임기는 1년뿐이었기 때문에 그 동안에 독재권을 행사하여 사재의 축재에 전력을 다하는 자들이 있었으므로 속주민들은 과중한 착취를 당했다. 뿐만 아니라 조세청부인들에게 한 지방의 조세 징수의 청부권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조세를 선납케 한 다음, 조세징수의 청부인들은 강제수단에 의하여 거액의 징세를 감행하였고, 또한 총독은 속주 내의 건축과 토목사업에도 관여하거나 고리대금업을 하여 축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획득한 자본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및 아프리카 등지의 토지에 투자됨으로써 소유제가 더욱 발전하였다. 당시 로마인들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직업 중에서 농업보다 더 만족스럽고, 더 유쾌하고, 더 부유하게 하는 것은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본이 토지에 투입된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한편 무수한 전쟁포로가 대농장에 투입되자 큰 타격을 받은 것은 중소 자영농민층이었다. 즉 값싼 노예노동력에 의한 대농장의 경영과 속주로부터 곡물의 수입, 장기전에 의한 인명과 재산상의 피해 등은 로마의 영토적 확장을 위하여 투쟁한 중소자영농민층을 영락의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 따라서 이농현상이 증가하였고 총독의 가혹한 지배 때문에 각 지방에서 반란과 불안의 기운이 조성되었으며, 노예제에 의한 농업의 발달을 노예노동을 가중케 하였기 때문에 기원전 2세기 전반에 노예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사회, 경제면뿐만 아니라 로마 시민정신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본래 로마인들은 강직하고 소박하였고 유년시절부터 가부장권에 복종하던 습성으로 청년시절에는 사회와 국가에 순응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정신은 로마의 세계적인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전후에는 로마의 시민정신이 헬레니즘의 영향으로 종래의 생활태도에 광범하고도 발전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헬레니즘 문화가 로마인들의 교육과 교양을 위하여 활용되었고, 헬레니즘 문화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추종하는가 하는 것이 유식함을 나타내는 한 척도가 되었다. 이 같은 현상은 로마인들의 시민정신에서 본다면 한 위기라 하겠지만, 사실상에 있어서는 시대정신의 변화요, 후일 기독교의 발전을 위한 기반의 형성인 동시에 유럽문화의 기초적인 분위기의 조성이었다는 점에서 발전적인 현상인 것이다.

 

그러나 그 같은 현상에도 불구하고 큰 결함은 중소자영농민층을 위한 공지의 점유를 제한하는 문제였다.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락쿠스와 가이우스 그락쿠스의 개혁 운동은 공지의 점유에 양적 제한을 가한 리키니우스 법을 부활시키고 양곡배급을 실시함으로써 영락한 중소 자영농민들을 부흥시키는 동시에 국가적 번영을 이루자는 것이었다. 이들은 농민부흥운동은 대토지소유제에 상당한 제한을 가하게 되므로 원로원 중심의 귀족들에게 타격을 주는 법안이었다.

 

이 법안들이 제출되자 로마 사회에서는 부의 차에서 발생한 신인 귀족층과 빈민층 사이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법안들의 내용은 당시의 정세에 알맞으며 또한 온건한 것이었으나, 운동의 전개방법이 과격한 데다 신인귀족층의 획책 등으로 실패하였으며, 개혁자들과 그 일파는 피살되고 말았다. 이 사건은 로마 공화정의 발전사상에서 최초의 유혈사건이었다. 이것을 계기로 로마 공화정의 후기 사회에서는 혼란이 야기 되었다. 그러나 그 혼란은 차원이 다른 역사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본래 로마 시민군은 주로 중산층에 의해 구성되었다. 그러나 중산층의 영락은 국방력을 약화시켰기 때문에 용병제를 실시하여 무산시민도 구제하고 국방력도 강화하려 하였다. 로마 고유의 시민개병제와 군사복무의 자판제라는 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용병은 결과적으로 장군의 사병으로 되었다. 이 용병제에서 생겨난 장군의 사병화는 군벌을 강화할 뿐 중산층의 구제에는 별로 도움이 되지 못했다. 더구나 유굴타 전쟁, 동맹시 전쟁, 미트라다테스 전쟁 등으로 인한 대외정세의 악화는 유력한 정치가에 의한 사병주의의 발전을 촉진하였다.

 

또한 사당파 싸움이 노골화하여 공화정의 말기 사회는 유혈의 참사를 거듭하게 되었다. 빈민층의 마리우스나 신인귀족층의 술라는 사당파의 대표적인 인물들이었다. 그락쿠스형제의 개혁운동은 의외의 방향으로 전개되어 당파투쟁의 씨만을 뿌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파벌투쟁이 악화됨에 따라 신인귀족층을 대변한 폼페이우스는 중산층을 대표한 케사르 및 로마의 대부호 크랏수스 등과 합작하여 제1회 3두정치(기원전 60)를 실시하였다. 이들은 서로 지배영역을 정하고 영토확장에 나섰으나, 이것은 공화정의 로마 법리론에서 본다면 위법적인 것이다.

 

제2회 3두정치는 케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와 장군 안토니우스 및 대부호 레피두스 등에 의해 실시되었다(기원전 44). 이들도 지배영역을 확정하였으나 결국 이탈리아 이서를 맡은 옥타비아누스와 희랍이동을 맡은 안토니우스가 악티움 해전(기원전 31)에서 충돌하였다. 이 해전은 당시 반목과 혼란을 거듭하던 로마세계에 있어서 필연적인 것이었으나,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 최후의 여왕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결탁함으로써 헬레니즘 세계의 전제왕조가 서방을 지배하고자 계책한 외부적인 원인도 이에 첨가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해전에서 서방을 대표하는 옥타비아누스가 승리함으로써 전 지중해세계가 그에 의해 통일되었다.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운동에서 발단된 로마 내부의 혼란과 무질서는 약 1세기만에 일단 종결된 셈이다. 그러나 로마의 대중들이 그다지도 갈망하여 창제한 로마공화정은 실제로 사라졌고, 그 회복을 위한 과제는 근대인들에게 넘겨지게 되었다.


3. 지중해 세계제국의 성립과 변질


아우구스투스와 지중해 세계제국


악티움 전승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내란을 평정하기 위해 그에게 부여되었던 예외적 명령권을 원로원과 민회에 반납했다. 그러나 기원전 27년 원로원과 민회는 그에게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이때부터 아우구스투스는 지중해를 주축으로 한 로마세계의 제 1인자가 되었고, 그에 의한 통치로 지중해 세계 제국은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역사가들은 이때부터 로마제정(또는 원수정)이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리고 로마인들에 의해 이 체제 및 그 뒤를 이은 체제가 장기간에 걸쳐 지속되었기 때문에 이 세계를 ‘지중해 세계제국’이라 한다.

 

아우구스투스가 구상한 정체는 제 1인자에 의한 원수정이었다. 그는 이미 케사르에 의한 전제정치가 아니라는 것도 시인하고 있었다. 이에 아우구스투스는 로마의 내외정세와 자신의 정치적 생명을 위해 전제군주정과 공화정을 절충한 지배형식을 택했다. 프린캡스는 시민들 중의 제 1인자라는 뜻이며, 다른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소유한 존재일 뿐, 초시민적인 존재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사실상 원수정은 군주정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는 아프리카와 마케도니아를 제외하고 로마 군단이 주둔하고 있는 모든 속주에 대하여 종래의 명령권을 계속 장악하고 있었다. 속주들 중에서도 중요한 곳은 황제령으로 지정하고 그 재정을 관장함으로써 근위병제를 확립하는 동시에 상비함대를 설치하고 관리를 위한 은급제를 실시했으며, 공공건물, 군용도로, 교량, 상하수도, 빈민구제 등에 필요한 비용을 지급하였다.

 

이와 같이 그는 군대와 재정의 대권을 장악함으로써 황제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또 로마 시민들과 속주민들에게는 평화와 질서를 회복해 주었고, 종래 착취의 소굴이었던 속주에서의 조세청부제를 폐지하여 직접 징세함으로써 지중해 제국의 모든 주민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한편 그는 국경선의 방비를 강화하여 북방은 도나우강과 라인강에, 동방은 유프라테스강과 아라비아 사막에, 서방은 대서양에, 남방은 사하라 사막에 접하고, 브리타니아 섬의 남부를 포함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각 국경지대에는 군단을 파견하여 천연의 요새를 이용하여 국경을 수비하게 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이래 역대 황제들 중에는 네로와 같이 낭만적이면서도 기독교를 박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황제도 있었으나,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우스 티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 5현제 시대(96-180)도 있었다. 기원전 27년 아우구스투스가 제위에 즉위할 때부터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의 약 200년 동안에 로마정치는 대체로 안정되고 조직화 되었으며, 전 제국 내에서는 각종의 교역이 하등의 장애 없이 자유로이 발전하여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 사건들과 역대 황제들의 전제정을 염두에 두고 그 2백년을 볼 때, 특히 로마시 주변의 무수한 카타콤 내의 음성적인 존재였던 기독교도를 생각해본다면 순수한 평화시대라 보기는 어렵다.


4. 3세기의 내란시대


5현제 중 마지막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서 계몽적 군주정이 종결되고 콤모두스 황제로부터는 내란의 시대에 들어갔다. 원래 프린키파투스의 권위는 시민의 협찬과 추대를 받고, 군대가 그 배후에 있을 때 유지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정초기부터는 국경선의 경비를 강화하였을 뿐, 이방인의 침입에 대해서는 수세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공세가 약화되었다. 이틈에 이방인들을 국경선을 따라 공세를 취함으로써 그 수비를 담당한 속주군인들의 정치에 대한 발언권이 강화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침내 군인들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군인들은 황제를 옹립하거나 폐위하고, 옹립한 황제를 통하여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코자 하였다. 이제 프린키파투스의 권위인 시민의 협찬과 추대, 군대의 배후보장인이란 이름뿐이고, 사실상 군대가 제위의 추대자인 동시에 폐위권도 갖게 되었다. 원리보다 무력이 우위에 있었다. 귀족 출신 황제보다 군인 출신 황제가 더 존대되었고, 군인들은 자신들의 장군을 제위에 오르게 하기 위하여 분쟁을 일으켰다. 그래서 192년 이래의 황제를 ‘병영황제’라 하고 235-285년까지의 황제를 ‘군인황제’라고 한다. 이 50년 동안 26명의 황제가 교체되고 그 중에 25명이 살해되었다는 것을 보아도 로마의 질서가 얼마나 혼란했었는가를 알 수 있겠다. 로마인들의 지중해 제국은 군대에 의해 통치되었고, 경제는 전적으로 군대를 부양하기 위한 것으로 되었다. 특히 이 시기의 중요한 문제는 로마 군대의 변질이다. 즉 중산시민층의 쇠퇴와 더불어 게르만인, 시리아인, 트라키아인 등 이방인들이 군대에 편입되어 군의 요직에 앉았다. 로마의 제위를 좌우한 군대는 이미 시민군이 아니라 이방인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제국 내의 혼란은 외부로부터의 위협을 초래하였다. 즉 색슨족은 브리타니아 연안에, 북방에서는 갈리아족이, 프랑크 족과 알레만니족은 중앙과 남방에서, 마르코만니족은 도나우 강의 국경지대에서, 페르시아의 사산왕조는 동방에서부터 각각 제국을 위협해 왔다. 3세기 전반에 걸친 로마의 내우외환이 로마 시민을 자극하여 제국의 권위를 회복하려는 기운이 조성되는 가운데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가 즉위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중흥책과 고대세계의 변질


  군인황제 시대를 거쳐 제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284-305)는 내우외환을 물리치고 프린키파투스가 아닌 다른 정책을 채택하였다. 즉 자신을 임페라토르가 아닌 도미누스라 칭하고 시민들은 수비엑트(Subiect, 신)라고 불렀다. 도미누스는 시민과 동일한 개인이 아니라 초개인적인 존재였고, 도미누스로서의 황제는 시민의 추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제 원로원의 권위와 시민의 특권이 없어졌다. 황제 자신도 군대의 세력을 배경으로 즉위하였으나, 제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군대가 황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피해야 했으므로 군대의 정치간섭을 배제했다. 그는 또 확대된 영토를 일인 통치로 관장할 수 없음을 자인하고, 제국의 통일을 저해하지 않는 동서분할의 통치책을 택하여 각각 정제와 부제를 두었다. 즉 자신이 계속 독재적 지배자이면서도 공동 통치자를 두어 서방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했던 것이다.

 

공동통치자들은 다시 그들의 영토를 2분하여 각각 부황제를 두고 분할 통치할 뿐 아니라 차기의 황제로 지명하기도 했으므로 제위의 계승문제까지 미리 해결했다. 프린키파투스와는 전혀 다른 도미나투스(전제군주제)였다. 그리고 동방식의 황제숭배를 장려하였다. 분할통치와 제위계승문제를 확립한 주요목적은 시민의 복지보다도 국권의 회복과 그 강화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주요 직무는 국가방위와 군대지휘에 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군사개혁을 단행한 것도 국가 방위에 주목적이 있었다. 군사개혁의 단행은 결과적으로 군대 규모의 확대와 장교 수의 증가, 군대의 질적인 저하 등을 가져왔다. 또 군인은 이탈리아 인이나 속주인들보다 게르만인이 더 많았고, 이들이 요직에 앉았다. 이것은 로마군대가 게르만화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다음은 그의 행정개혁이다. 즉 조세의 징수를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제국을 4개 도와 17개 주 및 101개 현으로 구분하고 각종 관리를 임명하는 한편, 자신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비밀경찰을 두는 동시에 궁정에는 궁내장관을 두었다. 이 같은 행정개혁으로 관리의 수적 증가와 질적 저하를 초래하였다.

 

이와 같은 2가지의 중흥정책은 국고의 지출을 과중케 하였는데, 그 재원은 과거 백년 동안 내란에 지쳐버린 속주민과 시민들에게 부과되었다. 일반 조세 이외에 군대 유지를 위한 현물세가 징수되었고, 농민과 수송업자에게 군수품의 수송을 강요당하였다. 군인황제 시대의 불법적인 조세가 이제 합법화되었다. 군수업, 모직업, 제방업과 같은 중요 부분에 있어서도 무상으로 일정량을 제공케 하는 등 여러 가지 책임을 부과했다. 책임을 이행 못할 경우에나 업체가 파산하는 경우에도 강제로 유지하게 하였다. 자유노동자의 경우에도 직장 이탈을 국가가 엄금하여 직업을 고정시켰다.

 

농민의 경우도 과중한 조세와 강제노동을 피하기 위해 거주지와 직업을 이탈하려 했는데, 국가는 그들을 토지에 얽매어 두기 위하여 노예에 의한 대규모의 농업 대신에 콜로누스제를 택했다. 콜로누스들은 법적으로 자유민이었지만 그들의 경작지를 이탈할 수 없었다. 이 같은 소규모의 농업경영 체제는 자연경제를 전제로 하는 것으로 디오클레타아누스 시대 이래로 광범하게 파급되었기 때문에 국내외의 교역이 점차 침체되었다. 이 시기에 있어서 직업의 세습화, 토착농부제의 파급, 교역의 침체가 초래되고 자연경제가 중시되었다는 것은 벌써 중세로 넘어가는 한 과정이 조성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다음에는 한때 지배자 사이에서 정쟁이 벌어졌으나 최후의 승리를 획득한 콘스탄티누스가 제위에 올랐다. 그는 제위를 콘스탄티누스 가문이 세습해야 함을 주장하고, 동방적인 전제주의를 확립하였다. 황실은 초월적인 가계로서, 제위나 제국은 가장인 황제의 소유물이 되어 버렸다. 즉 왕조가 성립된 것이다. 이 왕조는 군대의 충성과 기독교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통치의 원리가 달라졌을 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분야에서 그 중심이 동방으로 이동하는 경향이 뚜렷했다. 황제도 소아시아의 니코메디아에 상주하고 있었다. 기원전 325년에는 비잔티움으로 천도하였다. 이곳은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불가능하다는 것과 동방식의 전제정치를 하기위해서는 공화주의의 구세력이 잔존한 로마시를 떠나야 한다는 것 그리고 경제적으로 동서의 요충지대라는 것 등이 그 주요 이유였다. 그 명칭도 헬레니즘 식으로 황제의 이름을 붙여 콘스탄티노플이라 개칭하였다(330).

 

그러나 제국의 통일과 평화는 실현될 수 없었다. 동방에서의 페르시아의 위협, 서방에서의 게르만 민족의 이동이 끊이지 않았다. 이 같은 시기에 데오도시우스(379-395)가 즉위하였는데, 위기의 해결책으로 제국을 2분하여, 장남 아르카디우스에게는 비잔티움을 수도로 한 동로마제국을, 차남 호노리우스에게는 로마를 수도로 한 서로마제국을 각각 통치케 하고, 동로마 제국의 황제가 서로마제국의 황제보다 우위에 서게 하였다.

 

이 분할 통치는 처음에는 편의상 위기의 해결책이었으나 결국에는 영원한 것이 되고 말았다. 분할된 이래 서로마제국은 약 80년 동안 그 명맥을 유지하다가 476년에 그 제권을 상실하였다. 이제 통일적 고전 고대세계의 통일성이 지배구조상에서는 와해되었다. 고전 고대 문화는 로마제국의 유민과 이동민으로서의 게르만 족에 의해 계속 유지되면서 복합적인 성격을 형성하였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유럽 중세를 통해 존속했다(1453년 멸망).

 

4. 로마의 문화

로마문화의 개요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교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하였다. 또한 예링은 <로마법의 정신) 제 1권 제 1면의 첫머리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갈파한 바 있었다.


  이처럼 로마는 서양 고대사의 집약적 대성을 이룸으로써 지중해 연안의 세계 문화를 완성한 문화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종전에는 로마의 문화를 그리스 문화의 단순한 모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지금은 로마 문화에 보다 더 넓은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로마 문차의 전체적 특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절충적 성격인데, 로마인들은 선진문화권이던 에트루리아인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이는 등 선행하는 모든 문화를 거의 다 흡수하여 폭과 깊이를 부여하였다.


  둘째, 실용적, 실제적인 성격을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추상적이고 명상적인 면보다는 실용적인 토목 공법이나 의학을, 창작과 미학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과학 기술과 법률을 발달시켰다. 예컨대, 로마의 외과의들은 정교한 핀셋과 수술용 기구를 사용하고, 갑상선 종양, 편도선, 결석 등의 치료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며, 제왕절개 수술도 개발하였다.


  세 번째는 로마 문화의 교량적 역할을 들 수 있다. 로마에 의해 그리스 및 그 이전의 고전문명의 '유럽화'가 달성되었다 철학은 그리스철학을 보존하였으며, 법 개념은 오늘날까지 통용된다. 또한 라틴어는 많은 유럽 언어의 모태가 되었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앵그로 색슨어에서 유래된 영어도 라틴어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예컨대 영어 language는 혀를 의미하는 라틴어 lingua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의 문화유산 가운데서도, 로마의 정치제도와 로마법은 오늘날의 유럽의 정치체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회계 연도, 상원제도, 시민권, 지방자치, 국세조사와도 같은 용어는 물론재산(property), 계약(contract), 대리인(agent), 유언(testament), 재판관(judge), 배심(jury),범죄(crime) 등 경제, 법률, 사법상의 많은 용어들이 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사회계약설, 인민 주권 개념 및 견제와 균형을 내용으로 하는 삼권 분립의 원리 , 법치주의 등 후세에 확립된 정치사상의 기저는 로마의 유산이다. 특히 로마의 법률은 미, 영국을 제외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일본, 스코틀랜드, 남아메리카 제국등 그리고 우리나라 등 여러 근대 국가의 법률적 근거가 되었다.


로마법

 

로마법의 발전단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불문법의 단계인데, 이는 종교적 관습과 혼합된 매우 엄격한 신법의 시대를 말한다. 그 다음이 12표법이다. 그리스인의 교과서가 호메로스라면, 로마인의 것은 12표법이라 할 정도로 이것은 중요하다. 이는 신법이 시민법으로 바뀌는 법의 세속화 현상과 법과 관습의 성문화의 시작을 의미한다. 재산의 사유권과 노예제도, 계약, 동업 및 구매와 판매의 원칙 등의 민법과 약간의 공법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따라 로마의 법률 기관이 확장되고 법무관(Praetor)직이 창설 된다. 시민법은 근본적으로 로마와 로마 시민들의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 황제의 칙령, 법무관의 훈령, 일반 법관의 판례, 고대 관습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 후 로마는 영토를 확대해가면서 이민족의 관습을 법체계 속에 섭렵하기 시작했다. 독자적인시민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인간의 법률관계를 보편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발생하게 된 것이 만민법이다.


  만민법은 국적에 관계없이 모든 지역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으로서, 재산의 사유권, 노예 제도와 계약, 상거래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법은 시민법보다 우위에 있지는 않으나, 로마제국 내 이민족들에게 적용되어 시민법을 보충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법학자인 라베오와 카피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율리아누스, 폼포니우스, 가이우스, 알렉산더 세베루스 치세하에 활약한 울피아누스 등의 영향하에 로마법은 더욱 발달하게 된다. 마침내 제정 초기의 몇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법률사조와 학문의 경향을 흡수하여 자연법이 발달한다.


  자연법은 모든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와도 같이 영원불변한 보편적 법률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법률이 유래한다. 자연법은 사법적 관행의 산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산물이며 스토아 철학에 그 근원을 둔다.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국가가 침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론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로마 자연법의 아버지는 황제로서, 그는 진실한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과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이라고 정의한다. 이 법은 국가보다 우위에 있어서, 이를 무시한 통치자는 자연히 독재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어쨌든 법적 원리로서의 자연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발전은 로마법의 탁월한 업적에 속한다. 자연법은실정법보다 우월한 만고불변의 자연권에 연결된 고정법이다 현실적으로는 원로원 등 전통기득권층의 특권을 초월하여 황제의 명령권, 입법권 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능을 가졌다. 이 같은 과정으로 발달한 로마법은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 등의 3개의 커다란 줄기로 한다. 로마법은 6세기 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에 이르러 법학자 트리보리아누스(?-545) 등에 의해 학설집, 법학제요, 칙령집 등으로 이루어진 로마법 대전으로 집대성된다.


로마의 건축

 

로마 문화의 특색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분야는 건축이다. 로마의 건축은 국가 생활의 표현으로서 확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로마는 정복자로서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수많은 조각, 구조물, 대리석 기둥 등을 약탈하여 그들의 호화스러운 저택을 장식하였다. 원수정 초기에 제국을 에워싸고 있던 국가적 영광의 분위기 속에서, 건축 분야는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라틴적인 특징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로마의 권력과 영광을 기념하기 위한 거대한 구조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로마인들이 대규모의 토목 건축, 예컨대 도로, 교량, 댐, 저수지, 항만, 상하수도 시설 등을 축조하게 된 동기는 광범한 제국의 통치깅에 필요한 실용성 때문이었다. 건축 양식은 그리스, 에트루리아 혹은 메소포타미아 등의 양식들을모 방하였으나, 그 구조가 견고하며 착상의 규모가 크며 장식적인 특색이 있다.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로부터 배운 원형 아취를, 기둥에는 그리스의 세 양식을 사용하고, 로마인 독자적인 것으로는 도옴, 특히 궁륭을 독특한 교차형으로 발전시켰다.


  건축의 주재료는 석재, 콘크리트, 벽돌, 대리석 등이었다. 로마인이 처음 시작한 콘크리트법(이탈리아 지질이 화산질 지형으로 주위에 흔한 화산재와 석회석을 혼합)은 건축물을 매우 견고하게 하는 공법이었으며, 근세에 부활되었다 로마인이 만든 교량이나 도로는 전대의 어떠한 민족도 능가하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 스페인의 세고비아의 수도라든지 로마의 아피아 로는 오늘날까지도 아직 사용되고 있다. 그 외 신전, 포룸, 극장, 투기장, 경마장, 욕탕, 기념 건조물, 바실리카와 같은 대규모 공공 건물이 있다.


로마의 대표적인 신전은 돔 양식의 판테온 신전(아그리파 건축, 하드리아누스 개축)인데, 직경 43.2미터의 거대한 원형 신전으로 북쪽 입구 부분에 코린트 양식의 기둥을 붙박은 돌출부를 갖추었다. 내부는 천장에 있는 직경 9미터의 천공에서 원형의 공간에 쏟아지는 빛이 대리석 바닥의 구석구석까지 비추고 있으며, 주위에는 일곱개의 커다란 벽감이 있어, 마르스, 비너스 등의 신상이 세워져 있다. 그 외 목욕탕과 경기장등이 유명 하다.


로마의 복식

 

마지막으로 로마인들의 의복생활을 살펴보도록 하자. 로마의 복식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양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로마의 시대 상황에 맞게 변화되었다. 영토가 확장되면서, 복식의 재료와 형태도 다양해졌다 로마인들이 의복을 입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였는데,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자신이 속한 사회계급을 나타내고,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로마인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 부, 나이 등을 자신들의 의복으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토가는 시민의 유니폼 같은 것이었는데, 점차 의례용의 관복이 되면서 색과 장식선, 입는 방법 등이 엄격해졌다. 대개 표백하지 않는 양모(후일 실크가 수입되면서 실크도 사용)로 된 키의 세배(약 8.3제곱미터 가량)나 되는 타원형의 긴 천으로 어깨에서 발끝까지 감싸게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의 회합에는 보통 베이지나 갈색의토가의 물결을 이루었는데, 다만 입후보한 사람들만이 눈에 두드러지게 새하얀 토가를 입었으므로, 횐 색깔을 의미하는 'candidus'라는 라틴어에서 후보자 'candid'라는 말이 나타났다. 원로원 의원이나 집정관들은 진홍색 혹은 자주색의 띠로 장식하여, 서열에 따라 휘장을 달리하여 신분을 구별하였다.


  지붕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는 토가는 공공 생활에서 덮어주고 감싸주고 점잔을 떠는 옷이었으나, 그리 편리하지는 못하였다. 여름에는 무겁고 겨울에는 추웠는데다가, 무엇보다도 왼손으로는 토가의 왼쪽 자락 끝을 잡고 있어야 하였으므로 오른 손만이 자유로왔던 것이다. 이는 즉 평화시의 옷이라는 의미로서 전쟁시의 병사들의 옷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인들처럼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고 드러내지 않았는데, 토가를 입었을 경우 머리와 손만 노출되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로마 인들은 '머리와 토가와 오른 손'의 세가지로 대표되어 졌다. 그 외 토가 아래 입는 튜니카 등이 대표적인 의상이었는데, 남녀 어느 계급에서나 보편적으로 착용되었다.


  튜니카는 길이가 무릎에 미치는 셔어츠로서, 초기에는 넉넉한 실루엣에 소매 없이 허리띠를 맨 형태에서, 후기에는 간단한 T자형의 원피스형태가 되고, 신분에 따라 지위나 계급을 상징하기 위해 끌라비라는 수직선 장식을 하였다. 일을 할 때나 걸어 다닐 때는 남자는 튜니카만을 입으면 되었는데, 잠옷으로도 사용되었다. 떼베나는 프릴이 달린 소형의 숄로 튜니카 위에 걸쳐 입는 상류 계급의 복식이었다. 형태는 만원형, 장방형, 원형 등이 있었다. 그 외 팔루다멘툼은 귀족 계급이 착용하는 일종의 망토형의 군복으로 제정시대 중기부터 착용되었으며, 울이나 실크가 주로 쓰여 졌다. 여자들은 스톨라라는 긴 겉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이를 튜니카 위에 입고 허리께를 벨트로 묶었다. 귀부인들은 파라솔과 부채를 아울러 갖고 다녔다.


로마의 교육

 

로마와 그리스 문화는 소수의 폐쇄적인 집단 내부에서만 계승이 되었다. 기초교육을 담당할 학교는 있었지만, 공적인 혹은 사적인 보조금이 체계적으로 지원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수가 매우 적었다. 따라서 극소수의 로마인들만이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BC 2세기경까지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인구는 5%를 넘지 않았다. 기원 초에도 자유시민 남성 중 10분의 1만이 글을 읽고 쓸 수 있었다. 13세기경 유럽 제국에 비견할 만한 이 정도의 수치를 보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된다 로마에서 글을 러고 쓸 수 있는 인구는 사회, 경제 부문의 엘리트들이었으며, 그 외에 몇몇 장인들, 소수의 귀부인들(아마 전체의 10%에 못 미치는 정도일 것이다), 그리고 행정일을 담당하는 노예와 자유노예들(이들의 수는 가변적이었다)이 있었다. 이처럼 문자를 사용할 수 있는 계층은 대부분 도시에 집중되었다. 학교교육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로마시대에 공교육은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교육은 가장과 가족들의 몫이었다. 학교의 교사는 회랑이나 상점의 뒷방에 학생들을 모아놓고 가르쳤다. 학생들은 부유한 가문의 아들이거나(가정교사가 없는 경우) 주인이 행정적인 일을 시키기 위해 맡겨놓은 노예들이었고, 이따금 예외적으로 장인의 아들들이나 젊은 여자들이 끼여 있는 경우도 있었다. 엄밑한 의미의 문화와 문법, 수사학(그리스 말고 문자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한 것) 등은 보다 세심하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가르쳤는데, 극소수의 엘리트들 말을 대상으로 공공장소에서, 예를 들면 로마의 트라야누스 포룸이나 그리스 지역의 팔라이스트라(고대 그리스의 레슬링 경기장)에서수업을 했다.


  철학이나 법률 같은 과목은 몇몇 도시(로마, 아테네, 베이루트)에서만 교육이 이루어졌다. 시민들은 전문가들이 자신의 직무(집정관, 사제, 군인, 법률가)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말해 주는 것을 들음으로써 실용적인 지식을 습득했다. 좋은 가문의 젊은이들은 어느 정도 성숙하면 아버지의 주변 사람들로부터 공공의 문제나 법률적인 논쟁, 군대에서 취해야할 행동 등 실생활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4세기경부터는 점차로 기독교의 교리가 이런 상류층 문화의 내용 속에 더해지게 된다.


로마의 문학


  BC 2세기에서 기원 초에 이르는 200여 년간, 당시 문화의 절대적인 모델이었던 그리스 문학의 한켠에 로마 문학이 자리를 잡게 된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원 초에 이르러 절정을 맞는다. 그리스 세계의 풍속을 본떠 수많은 롬의 지식인들이 재미삼아, 혹은 거의 '직업적으로'책을 썼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의 내전이 일어날 무렵 마르쿠스 테렌티우스바로의 저택이 약탈당하는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그의 서재에는 490여 권에 달하는 위대한 석학들의 책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러나 라틴어 문학이 부흥했다고 해서 로마 제정기에 꽃을 피운 헬레니즘의 제2차 부흥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한동안 침체와 쇠퇴기를 맞았던 그리스의 웅장한 예술은 서기 2세기경에 이르러 다시 황금기를 맞는다. 이것이 '제2차 소피스트 운동'이다. 그리스의 철학은 더 이상 침묵을 지키지 않았다. 헬레니즘 시대의 철학(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 에피쿠로스)뿐만이 아니라 키케로에 의해 재발견된 플라톤의 사상들까지, 지중해 문명전체를 지배함으로써 후대에 되살아난 것이다. 플루타르크의 수많은 걸작들이 도미티우스황제(81~96)와 트라야누스 황제(98~l17) 시대에 간행되었고,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지리학자 프톨레마이오스와 의사 갈리아누스, 감미로운 풍자시인 루키아누스가 2세기 중반 경 그리스어로 책을 집필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문학을 오늘날 유럽 문학과 같은 관점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 당시에는 문학도 역시 소수의 집단 내부에서, 문자를 사용할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이루어진 제한적인 행위였다. 그러니 작품은 널리 읽히게 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문학 행위의 한 부분일 뿐이었고, 그것도 소수의 사본에 의해서나 가능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친구에게 빌려주어서 베끼게 하거나, 또는 아예 기증하는 방식으로 책이 전파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도서관의 역할을 하는 곳이 있기는 했으나 대부분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나마 소수에 불과했다.


볼루멘과 코덱스


  책이란 사치스럽고 비싸고 보관하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에 창작 행위는 그다지 확산되지 않았다. BC 2세기경의 책이란 것은 3미터가 넘는 길이에 높이가 30센티미터에 이르는 파피루스의 두루마리(V0lumen)였기 때문이다. 잉크를 사용하여 일반적으로는 대문자로 쓰여졌던 당시의 책은 두루마리의 옆면을 아래로 하여 보관했다. 오른손으로 무릎을 받치고 왼손으로 두루마리를 풀어 펼치며 읽는 모습이 그리 흔했던 건 아니다.


  대개 혼자 책을 읽을 때도 크게 소리내어 읽었다. 또 비서가 읽어주거나 책을 읽어주는 사람을 따로 두는 일이 많았다. 극장이나 공중목욕탕 등에서는 많은 수의 청중을 위한 낭송이 열리기도 했다. 이런 두루마리 말고도 로마인들은 일상생활이나 행정적인 업무에 밀랍 칠을 하고 간혹 책처럼 제본한 얇은 판을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를 코덱스(Codex)라 불렀다.


  3~4세기경부터 야피지를 사용하여 제작한 이런 형태의 책은 놀랍게도 오늘날까지도 변형되지 않고 전해지고 있다. 보관도 편리하고 경제적이며 공간을 적게 차지했던 넓은 의미의 독서에서 텍스트에 의한 좁은 의미의 독서로 빠르고도 용이한 변화를 의미하는 지표였다. 다시 말해서 코덱스의 출현은 지식에 변모를 불러일으킨 것이며, 이로써 지식은 보다 더 분석력을 키워갈 수 있었다. 문화가 기독교화 되었던 것도 분명 이러한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로마의 헬레니즘 예술


  문학과 마찬가지로 로마 예술은 그리스의 전통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스의 전통은 오래전부터 로마 제국의 동부 지중해 지역과 이탈리아에 형식과 내용을 제공했고, 로마 제국과 전혀 다른 전통을 가지고 있는 지역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 남부 갈리아의 가난한 도기공들은 여전히 켈트식의 이름을 썼고, 라틴어는 거의 할 줄 몰랐지만, 인장무의가 새겨진 도자기에 그리스 신화의 장면들을 그려 넣음으로써 이를 널리 퍼뜨렸다. 신인동형론과 신에게 형체를 부여하려는 움직임에 거세게 저항했던 민족들조차 고대 말기에 이르면 거의 이 이론을 받아들이는데, 유태교회당의 모자이크를 보면 그것을 잘 알 수 있다. 가령 베트 알파의 모자이크를 보면 이삭의 희생과 천체의 황도, 그리고 4절기를 연결시키고 있다.


  로마가 그 위세와 부로 전 세계에 일정한 색채를 부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솜씨 좋은 장인들이 어디에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같은 주제, 예를 들어 2세기 초반 오늘날의 루마니아인 다키아 지역의 정복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도 로마 트라야누스 기념비의 조각과 루마니아 도브루자 지방에 있는 아담 클리시의 조각은 그 양식이 아주 다른데, 사실 아담 클리시의 조각은 매우 어설퍼 보인다. 어떤 지역에서는 그 지방의 장인들을 신분의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갈로로맹의 도기공이나 동방과 아프리카의 모자이크 세공인들이 그러한 경우로, 이들은 이탈리아의 작품들을 압도할 만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로마는 예술의 주요한 흐름과 동떨어져 있기도 했다. 예술이 주류는 오히려 멀리 떨어진 지역의 예술과 직접 접함으로써 형성되기도 했다. 그래서 소아시아 카리아에 있는 아프로디시아스이 조각가들은 트리폴리텐의 레프키스 마그나를 위해 작업했으며, 그리스인 제노도루스는 오랜 기간 동안 퓌드돔의 메르쿠리우스 신전에서 헌신적으로 일을 했다.


  결국 전형적인 이탈리아 양식 가운데 일부는 세계를 정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흑과 백을 주로 한 로마의 모자이크 양식은 널리 퍼져나가지 못했다. 오리려 화려한 색채의 모자이크가 세계적인 주류였다 이 부문에서 로마는 오히려 변두리였던 셈이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지방에서 모델로 삼는 작품이 생산되는 곳은 역시 수도-작업실, 행정관청, 궁전 등-였다.


  이전파의 경로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논란이 있다 복사본이나 스케치 노트만 봤던 것인지, 아니면 영감을 얻기 위해 장인들이 직접 로마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편 공공 예술작품 다른 경로를 통해서 전파되었다. 황제의 초상을 새긴 동전과 화려한 조상들, 왕조의 신전 양식 등이 그 주된 경로였는데, 로마 아폴론 신전의 경우에는 님의 메종 카레에 재현되었다. 예술은 또한 일상생활 영역에도 영향을 끼쳤다. 개인 가옥의 벽화들은 공공예술에서 형태를 빌려 온 것이다.


  서유럽 제국은 공식 예술이 잘 확산된 예를 보여준다. 황제를 칭송하고자 세운 종교건물들이 그 예인데, 지방의 후원자들이 건설하긴 했지만, 황제가 파견한 관리가 통제를 했다.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세워진 파리 센강의 뱃사람 기념물은 보면, 고전적인 위대한 신들(주피터, 불카누스)뿐만 아니라, 켈트족의 신들(에누스, 머리사 세 개인 타우루스)도 등장시키고 있다. 또 1세기를 지나서 네로 황제 시대에 마이엔스의 군대 주둔지 주변의 상인들이 주피터 신에게 바쳤던 원기둥을 보면 거기에 새겨진 초상화들은 더 이상 토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 결국 '지역적인 색채'란 묘비 같은 개인적인 예술에서나 극히 미미하게 통용되는 말이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부조는, 특별한 경우에 지역적인 신을 나타내기 위해 로마의 전통적인 초상에 의존하는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이시스 여신이나 갈리아의 로스메르타 신을 나타내기 위하여 로마 여신의 형상을 빌려오기도 했다)


로마제국 후기의 예술 혁신


  4~5세기경 로마 제국의 도시와 기념물과 가옥의 형태에서는 당시 전반적으로 퍼지던 쇠퇴나 체념의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다. 410년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로마를 약탈했을 때도 로마의 문명까지 파괴하지는 못했다. 아치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바실리크 성당, 론스탄티노플과 트리에르의 궁전, 거대한 조상들, 황제의 석관묘 등, 로마 예술의 중요한 유산을 만들어낸 것은 오히려 제국 후기였다. 이 시대에도 다양한 색채를 사용한 모자이크가 유행했으며, 엷은 인장무의를 새긴 도자기가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물론 기독교 세력이 커짐에 따라 많은 예술 형식들이 나타났다. 건축 분야에서는 사원 밖에 제단을 설치하고 장례식을 거행하던 과거의 형식과는 달리, 건물 내부에 추모행렬이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교회당이 등장했다. 크고 작은 바실리크 성당들이 세워지면서 마을의 모습이 달라졌고 지도도 다시 그려야 했다. 조형예술 부문에서는 장식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회화 분야에서는 카타콤의 벽화가 점차 수수해지기 시작한 반면, 성서나 복음서의장면을 그린 그림이 부자들의 석관묘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 역시 로마 예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공화정하에서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 이들은 형편이 보다 열악했으며, 이 점 때문에 훗날 역사가들은 이들의 예술을 '서민예술'이라 부른다 - 표현력이 풍부한 조형예술에 많이 의존했다. 로마의 엘리트들은 공공주도의 헬레니즘 예술을 존중했지만 새로운 예술 경향은 헬레니즘 시대의 특징인, 이상화된 자연주의의 형식이나 자연스러운 비율을 따르지 않았다. 3세기경부터 이러한 예술 경향에 혁신이 일어나면서 점차 기독교화 된 로마의 주요 예술양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에는 몇 가지 새로운 기준에 따라 만들어진 장면이 있는데, 이는 헬레니즘의 자연주의 형식으로 만들어진 부조와는 상당한 대조를 이룬다.


  '서민 예술'에서 시작된 이 표현력이 풍부한 예술은 5세기경에 로마 예술과 비잔틴 예술을 탄생시킨다.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의 바실리크 성당은 로마의 모든 건축술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에도 불구하고 고전적인 형식은 모든 영역에서 그대로 남아서 필사본의 세밀한 삽화에서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기독교는 특히 조형예술에 새로운 종교적인 내용을 도입했지만, 그 내용을 담은 형식은 여전히 과거의 틀 안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기독교 제국에 의해 전승된 로마 문화


  이렇듯 새로운 기독교 문화는 전통 문화와 단절은 선언하지 않았다. 기독교도들이 극장과 원형경기장과 공중목욕탕의 집단적 유희를 포기하지 않은 것처럼 이교도의 예술과 문학과 사고방식의 유산도 완전히 버리지는 않았다. 로마에 있는 비아라티나 카타콤이나 영국의 힌턴 세인트 메리의 저택 장식을 보면 신화적인 주제(헤라클레스, 벨레로폰)와 성서의 장면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이 얼굴에까지 고전 미학에서나 나타나는 생동감이 표현되어 있었다.


  4세기경부터 시작된 '새로운 제국'에서도 로마의 전통 문화는 계속 이어졌다. 더 이상 확산되지는 않았지만, 그 생명력만은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 예로, 이시기에 전개된 활발한 지적 활동을 꼽을 수 있다. 성 아우렐리우스 암브로시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은 성직자들의 책 이외에도 많은 저술들이 간행되었다. 백과사전(마크로비우스 테오도시우스의<사투르날리아>이 편찬되었고, 고대 작가들의 작품에 대한 주석집(세르비우스가 쓴 베르길리우스의 주석과 같은)이 발간되었다.


  문헌학 분야의 작업이나 문학작품과 성서의 복제작업이 이루어져서, 그 덕분에 수많은 작품들이 사라질 뻔한 위기를 넘겼다. 히브리어나 아랍어(고대 시리아,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언어), 그리스어로 쓰여 있던 성서와 복음서는 성 제롬이 라틴어로 번역했다(불가타). 학자들은 종교 분야의 갖가지 내용을 성문화했으며(탈무드).이런 작업은 법률분야에서도 이루어졌다 로마 황제들이 공포했던 법률들이 테오도시우스법전 속으로 흡수, 편입되었으며, 이는 훗날 근대 시민법의 바탕을 이룬다. 요약하자면, 우리가 그리스 로마 세계의 문화에 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이 시대의 저술과 정비작업덕분에 오늘날가지 전해지고 있다


문자문화의 퇴조


  후기 제국 문화의 눈부신 성과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4세기경부터 문자문화는 퇴조하기 시작했다. 기독교 제국의 엘리트들은 더 이상 과거의 제국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개방된 학교를 세우는 문제를 두고 고심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지식층은 조금씩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기독교가 교양이 부족하다거나 순진하지만 어리석은 이들에 대해 동정적인 정서를 지니고 있었는데도 성직자와 승려는 당연히 글을 읽고 쓸 줄 알아야 한다는 인식이 더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이와 더불어 기독교에서 서적이 중요성이 증가함에 따라 서구에서는 라틴어의 영향력이 커졌으며, 이집트의 콥트어(변형된 그리스 알파벳으로 쓰여진 고대 이집트어)와동방의 고대 시리아어가 교양어로 대접받게 되었다.


  그러나 일부 지방에서는 도시화의 정도와 군사, 경제적인 여건에 따라, 엘리트 계층을 제외하고 문자를 해독할 수 있는 사람들의 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 이와는 반대로 이집트, 아프리카의 로마 점령 지역, 갈리아와 몇몇 그리스어권의 지역에서는 6세기 이전까지 어떠한 근본적인 변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하지만 5세기경에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것이 일상생활에서 더 이상 약점이 되지 못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문자가 관청과 수도원에서 빠져나와 일상으로 들어오기까지는 다시 또 한 세기를 기다려한 할 것이다. '우리는 모두 로마의 시민이다'(클로드 니콜레)


로마의 언어

 

로마는 우리에게 어떤 유산을 남겼는가? 그들은 유럽의 교양어 중 하나인 라틴어를 우리에게 전해 주었고 수많은 로망어를 남겨주었다. 또 로마의 법률과 공화정 체제, 그리스 문화, 지중해 지역의 두 종교-유대교와 기독교-를 중세와 근대 세계로 넘겨주었다. 이 모든 로마의 유산은 로마의 정복활동과 세계통일에 힘입어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유산들이 전해진 방식 또한 로마 문화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유럽인은 모두 로마의 시민이다 그들 모두는 로마가 고대 세계로부터 전승하여 고르고 개선하여 후대로 넘겨준 다양한 문화유산의 수혜자인 것이다.


로마의 가부장 제도


  로마인들은 작은 언덕마을에서 시작해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때까지 변함없이 가부장제를 지켰다. 처음부터 다양한 문명권과 접촉함에 따라 정치와 문화, 사회구조는 수시로 달라졌는데, 유독 가부장제만 보존된 이유는 로마 사회의 고유한 특성에서 찾을 수 있다.


  가부장제는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아주 흔한 제도였다. 하지만 로마의 경우 그리스나 중세유럽 국가들의 그것과 다른 면이 있었다. 영어 패밀리(family)의 어원인 라틴어 파밀리아(familia)는 오늘날의 가족과는 다른 개념이다. 로마에서 가족은 혈연이나 결혼으로 맺어진 집단 뿐 아니라 한 집안에서 생활하는 모든 구성원을 아우르는 것이었다. 부모 형제 외에도 부계 혈족과 노예, 피해방민, 심지어 조상들의 혼령까지 망라했다. 가부장의 개념도 달랐다. 가부장은 반드시 혈육상의 아버지를 지칭하는 게 아니라 가족의수장을 의미했다.


  그는 국가를 제외한 어떠한 권력에도 종속되지 않고 가족과 그들이 지닌 재산에 대해 절대적인 권한을 누렸다. 가족들은 사회적 지위가 아무리 높다 해도 가부장의권한 아래 놓여 있었다. 자기가 혼자 벌어 모은 재산이라도 재산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형제나 아들들은 가부장이 사망해야만 그의 권한에서 벗어나 자신이 가부장권을 지니는 새로운 가족을 이룰 수 있고, 딸도 결혼하기 전까지는 후견인의 보호를 받아야 했다. 가부장의 권한이 얼마나 강했는지 잘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가부장인 아버지가 말을 타고공무를 보러 가는 콘술 아들에게 말에서 내려 제대로 인사하라고 호령했다. 아들은 최고 정무관의 권위를 잃게 된다면서 아버지의 명령에 불응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콘술직 임기가 끝나자 다시 아버지의 가부장권에 복종해야 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가부장제가 워낙 기승을 부리자 군단 병력을 확보하기 위해 군복무 중 받은 급료만큼은 아들의 재산으로 인정하는 법을 제정할 정도였다 아우구스투스는 한때 가부장이 갖고 있는 가족들의 생산여탈권을 빼앗아 국가 재판권을 강화하려고 했지만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한 세기도 채 지나지 않아 가부장들이 그 권한을 되찾아간 것이다. 그만큼 가부장제의 뿌리가 깊었고 국가에서도 사회를 안정시키는 수단으로 가부장권의 위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농경활동과 국토 방위라는 과제를 효율적으로 감당하기 위해 가족의 수장에게 책임과 권한을 집중시킨 초기 로마의 유산이다. 그러나 영토와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가족의 분화현상이 심화하고 자식들이 분가해 나가는 상황에서도 가부장권은 그대로 유지됐다. 가부장의 권위에 복종하는 가족들이 모두 풍성심이 강한 시민이었고 가부장들의 지도력이 국가 경영에 유익하다는 공감대가 이뤄진 까닭에 이 제도는 끝까지 존속한 것이다. 로마 사회가 규모에 비해 비교적 적은 인력으로 효율적인 운영을 할 수 있었던 데는 가부장제의 역할이 컸다 사회의 기본 단위인 가족을 잘 통제해 사회를 안정시키고 이를 국가 이익으로 연결시키는 이른 바 민치의 원리를 로마 지도부는 적절히 활용한 것이다. 얼핏 보기에도 불합리한 요소가 적잖게 드러나는 가부장제를 로마인들이 존속시킨 데는 이런 깊은 뜻이 숨어 있다


 로마의 종교와 신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종교는 다신교였다. 양자는 유사성이 많지만, 전체적으로 그리스다신교가 나무가지들처럼 위로 번성하여 꽃처럼 나타났다면, 로마의 다신교는 뿌리처럼 번져가 열매 맺었다고 볼 수 있고 전해진다. 특히 고대 로마 종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지역적이며 가정적이라는 것인데, 각 신들은 특정 지역, 활동과 연결되어 있었다. 신들의 숫자는 무한하였으며 각 신의 역할은 분담되어있었는데, 예컨대 Aius Locutius(일어나 말하라) 신은 갈리아인의 접근을 알리는 경고를 발하는 것이 그의 유일한 활동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신들은 일종의 '활동'이었다. 모든 행동은 특정신의 권위 하에 있었고, 의식은 그 신에 합당한 장소에서 행해져야 하였는데, 그것을 어기는 것은 불경이었다.


  예컨대 은밀한 침실이 사랑의 여신 베누스의 영역이었으므로, 야외에서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불경한 행위에 속하였고, 마찬가지로 군신인 마르스는 싸움터가 아닌 도시 내에서는 별 볼일이 없었다. 특히 이러한 영역의 개념과 관계한 재미있는 신으로서는 테르미누스신과 야누스 신이 있었다. 경계의 신이라고 볼 수 있는 테르미누스신을 섬기는 매년 2월 25일 테르미날리아 축제일에는 각 경계에서경계석에 화관을 걸고 과자를 바치는 등의 행사를 가졌는데, 이는 자신의 영토를 지키고 이웃간의 영토분쟁을 막는 의미도 지녔다.


  문의 신 야누스는 다른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신이라고 믿어졌는데, 시골에서 도시로, 자기 집에서 거리로, 혹은 전쟁에서 평화로의 전환에서도 로마인들은 야누스의 문을 지닌다고 생각하였다. 12월을 보내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는 1월달 (lanuarius, 영어로 January)이 이 신의 이름으로 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플루타르코스에 의하면 야누스는 오랜 옛날에 야만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들에게 질서를 가져다준 신 혹은 왕이라고 한다. 야누스신의 얼굴이 둘인 이유는 사람들의 생활을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옳게 주었다는 것을 뜻한다는 것이다.


  로마에 있는 야누스의 신전은 문이 둘이며, 이 신전을 전쟁의 문이라 불렀다. 전쟁을 새로운 문을 여는 것이라고 생각한 로마인들은, 이 야누스 신전의 문을 전쟁시에는 열어 놓고, 평화시에는 닫았는데, 전쟁을 계속한 로마인들에게 이문은 거의 항상 열려 있었다. 또한 경계나 문을 넘는 것에는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첫 행동, 첫말은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데, 만약 문간에서 비틀거리든가 문지방에 왼발을 먼저 들여놓는 것은 재수 없음을 의미하였다.


  로마인들의 종교 행위는 그것을 관장하는 신들에 대한 숭배 행위였다고 볼 수 있다. 더들리에 의하면, 로마인들의 종교는 로마인들의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는 것으로, 초기 단계의 로마의 종교는 관념의 원시성과 의식의 법적 제도화라는 두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인들에게 종교 행위의 목적은 신을 불러내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활동을 하게 하는 것으로, 'do ut des', 즉 '...하니까 ‥‥ 해달라' 혹은 '... 해주면 ..(보답)하겠다' 는 일종의 거래와도 같았다. 로마의 '종교'는 오늘 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개념과는 달랐다고 볼 수 있는데, 일종의 복잡한 희생 의식이고, 도덕률을 내포하지는 않았다. 즉 신을 달래고 신에게 희생의식을 바칠 필요는 있었으나, 믿음이 로마인들의 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예컨대 키케로는 “쥬피터는 가장 위대한 최고의 신인데, 그 이유는 그가 우리를 정의롭거나 진실하게 만들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우리에게 건강과 부와 번영을 주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당시 신의 뜻을 묻는 방법은 대체로 세가지였는데, 첫째, 새의 움직임, 천둥, 번개 등을 보고 징조를 구하는 ”augures'로서, 복점관들(augurs)에 의해 행해졌다. 특히 그들은 새들을 보고 점을 쳤다. 이 때문에 로마 병사들은 행군시에도 반드시 이들 '신성한 닭'같은 새들을 새장에 넣어 가지고 다녀야 하는 등 번거로웠으므로, 후일 이런 관습은 서서히 쇠퇴하게 되었다.


  두 번째, “haruspices'라고 하여 희생 의식에 쓰인 동물 내장을 보고 신의 뜻을 헤아리는 것이다. 이런 관행은 계속 번성하여 로마제국 멸망시까지도 계속되고 있었다. 세 번째는”quindecimviri“라는 시빌린 신탁의 보유자들이 국가적 예언서인 시빌린에 따라 충고와 조언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신탁은 정치적으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예컨대 카에사르파들은 당시 파르티아 원정을 앞두고 있던 카에사르를 부각시키면서, 왕이 아니면 파르티아원정에 성공할 수 없다는 시빌린 신탁의 예언을 유포시키면서 카에사르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부심했다는 것이다.


  로마인들에게 “경건”하다는 것은 국가의 신들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하였고, 따라서 엄격한 절차에 따라 준수되는 종교 의식이 믿음보다 더 중요하게 간주되었다 많은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로 매도한 이유도, 그들의 열렬한 신앙심에 상관없이, 기독교인들이 로마의 국가 신들을 거부하였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신관들은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는 공무원과도 같았는데, 사제단 (Pontifices)이 있었으며, 그 수장은 'Pontifex Maximus'였다.


  카에사르와 옥타비아누스 이래 그들의 선례에 따라, 로마의 황제들이 'Pontifex Maximus'를 겸임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로마에서 흥미 있는 종교 현상 중 하나는 바로 '황제 숭배'이다. 그 기원은 옥타비아누스 때부터이다 당시 이집트까지 손에 넣은 로마제국은 아주 다양한 언어, 민족, 문화, 습관의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제국민을 하나로 묶어주는 결합점을 종교에서 찾으려 하였다. 그리하여, 정치적 통합과 종교의 개념이 융합되어 “황제 숭배 사상”으로 나타나고, 황제와 제국은 하나로 인식되게 되었다. 이런 발상은 아시아의 전통적인 통치자 숭배 의식에다 로마 전통의 조상 숭배 관습이 합해진 것이다. 이에 따라 죽은 옥타비아누스의 양부인 카에사르는 신격화되었으며. 옥타비아누스는 신의 아들(Divus Filius)로 인식되었다.


  여기서 한 가지 밝혀둘 것은 로마의 다신교에서 보이는 신의 개념은 기독교의 엄격한 하나님의 개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고대 사회에서 '신'은 매우 다양한 의미를 지니는데, 일종의 위대한 인간이라는 개념도 함축하였다. 신의 기원도 인간이라고 보는 경향이 강하였는데, 위대한 인간이 죽은 후 그의 공적에 의해 신이 된다는 것이며, 따라서 황제도, 그가 몹쓸 황제만 아니었다면, 죽은 후 신이 된다. 이러한 황제 숭배는 정치와 종교의 결합 현상으로, 도시 로마를 의인화한 '로마' 여신의 숭배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아울러 신들은 황제의 보호자(conservator) 혹은 동료(comes)가 된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의 4두정(Tetrarchy)하에서 황제는 제우스, 부제는 헤라클레스에 비유되기도 하였다 로마의신들은 로마 고유의 신들과, 외래 신으로 이루어진다. 외래 신들은 영토 확장으로 인한 외부와의 접촉으로 들어온 신들을 말한다.


  우선 라틴 고유의 신들로서 재미있는 것을 들면 세이아(땅속에서 옥수수를 지키는 신), 세게티아(곡식의 성장을 관장), 플로라(꽃의 신, 특히 옥수수 꽃의), 포모나(과수 재배의 신), 룬키나(땅 위에서 옥수수 수확을 관장하는 신), 투틸리나(창고에서 옥수수를 돌보는 신) 등이 있었다. 이들 신들이 실생활 특히 농작물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 앞에서도 살펴본 야누스신(문의 신으로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신)과 테르미누스 신(농장의 경계 관장), 페나테스(찬장의 신), 라레스(페나테스와 더불어 가정의 신), 팔레스(가축과 목장의 신), 제니우스(집안 정령), 벨로나(전쟁의 여신)등의 신들이 로마인들의 가정과 일상생활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 에트루리아인들의 종교가 유입되기 시작하였는데, 유피테르. 유노, 미네르바, 마힌스, 사투르누스, 특히 베스타의 불 숭배가 그러하다. 그 후 제2차 포에니 전쟁을 기점으로 아폴론신 등 그리스의 제신들이 공식적으로 로마에 영입되기에 이른다. 이는 한니발의 침공에 의한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조처로 이루어졌는데, 시빌린 신탁집의 예언에 따른 것이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드디어 로마의 12신이 공식적으로 성립되었다. 쥬피터(제우스), 쥬노(헤라), 넵튠(포세이돈), 플루토(하데스), 베스타(헤스티아), 세레스(데메테르), 아폴론, 베누스(아프로디테), 불카누스(헤파이스토스), 디아나(아르테미스), 미네르바(아테네), 마르스(아레스), 메르쿠리(헤르메스)등이 그것이다. 특히 쥬피터, 쥬노, 미네르바의 세 신이 가장 존경을 받아, 카피톨리노 언덕에는 세 신의 조상이 세워져 로마를 굽어보고 있었다. 그 외 박쿠스(디오니소스 혹은 리베르), 헤라클레스, 큐피드 등의 신들도 인기가 있었다. 또한 로마에는 오리엔트 지역의 여러 종교들도 전래되어 종교의 박람회장이 되기도 하였는데, 오리엔트에서 들어온 종교로서 대표적인 것으로는 먼저 소아시아 출신의 키벨레 여신숭배를 들 수 있다. 이 역시 포에니 전쟁 당시 로마인들이 한니발을 물리치고자 영입한 것이며, 로마가 공식적으로 승인한 최초의 오리엔트 종교가 되었다. 이후 이시스, 오시리스, 호루스, 세라피스 등의 이집트 신들, 페르시아와 시리아의 태양신(미쓰라 및 헬리오 가발 등), 그리고 무엇보다도 크리스트교가 전래되고 전파되기에 이르렀다.


로마의 목욕탕


  로마인은 아마 문명화된 민족 중에서 가장 깨끗한 민족이었을 것이다. 11개의 수로를 통해서 로마로 공급되는 물의 대부분은 공중목욕탕에서 사용되어졌다. 기원전 2세기에 비롯된 목욕탕은 서기로 넘어갈 무렵 극도로 대중화되어 기원전 33년에 170개 정도였던 목욕탕이 2세기 후에는 1000개로 늘어났다. 로마에는 아무리 작은 마을이라도 공중목욕탕이 있었고, 사람들은 거의 매일 무료로 목욕을 할 수 있었다. 로마인이 가장 즐기던 오락이 목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로마의 목욕탕은 일종의 사교장이었다. 목욕탕에는 도서관, 세탁소, 열람실, 정원, 이발소, 수면실, 와인가게, 레스토랑, 체육관 등이 갖추어져 있어서 목욕뿐만 아니라, 게임, 연설 음악연주, 미용체조도 즐겼고 한담을 나누는 장소가 되었다. 어떤 목욕탕은 밤이 되어도 1,000개 이상의 램프를 사방에 켜두고서 손님을 받았다. 오늘날 남아있는 공중목욕탕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카라칼라 황제의 목욕탕이다. 하루에 6000명의 사람을 수용할 수 있었던 이 목욕탕은 크기가 풋볼 경기장 15개를 합한 정도라고 한다. 한마디로 카라칼라 대욕장은 빛깔 있는 대리석, 타일, 장식띠, 돌림띠로 근사하게 치장된 거대한 종합체육시설이었다.


  하지만 규모나 사치스런 내부장식 보다 더 놀라운 것은 난방과 환기, 주도면밀하게 설계된 송수 시설과 하수 시설이다. 거미줄처럼 얽힌 운하와 수로가 도로와 벽을 따라 건설되어 매일 수백만 리터의 물이 냉탕, 온탕, 수영장으로 공급되었다.


  폼페이의 주민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매일 목욕을 했다. 남자들은 중앙입구(1)를 통해서 들어왔다. 탈의실(3)에서 옷을 벗은 후, 실외운동장소에서 운동으로 땀을 많이 흘린 후에 탈의실로 돌아가서 때를 밀고 마사지를 했다. 몇몇 경기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포장된 alley(4)를 따라 하던 볼링이었다. 그런 후에 수영이 하고 싶으면, 수영장(10)에 들어가기 전에 발을 깨끗이 하기 위해 물이 얕은 욕실(9)을 걸어 지나갔다. 북쪽에는 공중화장실(7)이 있고, 그 위에는 거대한 물탱크(8)가 있었다. 화장실의 3면을 따라 높은 곳에서 들어온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게 되어 있었고 그 위에 돌로 된 의자(변기)들이 있었다. 의자에는 U자 모양의 구멍이 있었고, 의자 앞으로 약 30cm거리에 물이 흐르는 알은 흠이 파져 있었다. 사람들은 막대기 끝에 달린 스폰지로 닦은 후에 그것을 얕은 홈의 흐르는 물에서 헹구었다.


  원래 여성들 욕실은 목욕탕의 나머지 부분들과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는데, 후에 실내운동장소로 갈 수 있는 통로가 지어졌다. 여성용 온탕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욕조가 있는데, 그 오른쪽 끝에 반원형의 구멍이 있었다. 이 속에는 청동으로 만든 반원추형의 통이 욕조보다 약간 낮게 위치하고 있어서 식은 욕조의 물은 가라앉아서 반원추 통으로 흘러 들어가고 여기에서 다시 뜨거워져서 올라가게 되어있었다. 이렇게 해서 욕조의 물을 계속 뜨겁게 순환시킬 수 있었다. 방이 너무 뜨거워서 사람들은 발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나막신을 신어야 했다. 앞쪽에 수건을 들고 서있는 흑인은 노예이며(목욕을 할 수는 없었고) 바깥에서 기다리거나 주인을 따라 들어와서 매를 밀어주고 오일을 발라주는 등 시중을 들었다.





<참고 문헌>


< 로마인 이야기 ) / 시오노 나나미 / 한길사 / 1997

< 로마제국 > / 한국일보 타임라이프 / 1990

< 로마문명사 ) / 도널드 R.더들리 / 김덕수역 / 1997

< 로마인이 삶, 축복받은 제국의 역사 > / 존 셰이드, 로제르 아눈 / 손정훈역 /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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