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5. 14:00ㆍ교회사자료/10.세계사
그리스 문학 (비극을 중심으로)
I. 들어가는 말 II. 그리스 문화 1. 노예경제와 그리스 문화의 기초 2. 그리스 문화의 특색 III. 그리스 문학 IV. 그리스 문학의 정수 - '비극' 1) 신화에서 비극으로 I) 신화란? ii) 서사시와 서정시 iii ) 합창서정시 2) 비극의 시대배경 3) 3대 비극시인의 작품관 V .나오는 말 ◎참고문헌
I. 들어가는 말
서양문화의 원류를 이루는 문화는 '그리스의 문화'이다. 문학, 철학, 미술 등 모든 분야에서 지금까지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것은 단지 고전의 가치를 넘어 모든 인류에게 진지한 성찰과 깊은 감동을 던져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또한 본인도 앞으로 문학도의 길을 걸어야하는 입장에서 그리스 문화의 정수인 비극에 대해 살펴본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서는 그리스 문화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비극'을 중심으로 그리스문화 및 문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II. 그리스 문화
1. 노예경제와 그리스 문화의 기초
그리스 역사상 가장 중요한 특성은 그 원숙한 문화와 민주정치의 확립에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시민의 경제적 번영과 이에 수반되는 여가 없이는 결코 생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여가를 시민에게 마련해준 것이 다름 아닌 노예들이었다. 그리스인의 역사적 업적은 노예경제라는 비옥한 토양에 뿌리를 박고서야 비로소 그 광체를 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윈래 그리스인은 경제활동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천시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노예제 성립의 바탕은 당초부터 마련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피정복자와 영세농민이 노예화하고 여기에 다시 해외에서 구입한 노예가 첨가됨으로써 노예제 사회의 기본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나 아메리카의 노예제처럼 대규모적인 것도 아니었고 또 노동의 종류에 따라서는 어느 정도 인권도 허용 받은 농노적 성격의 것도 있었다. 어떻든 시민은 노예의 노력 때문에 밥벌이라는 고역에서 해방되었고, 합리적 비판을 가능케 함으로써 마침내 서양적 이론과 학문이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이다.
2. 그리스 문화의 특색
우리가 지금 향유하고 있는 서양문화 가운데는 그리스 문화의 피가 맥맥히 흐르고 있다. 특히 그리스 고전은 초 시대적인 불후의 가치를 갖고 있어, 로마제국 때에 성립된 크리스트교와 더불어 서양 문화의 근원이 되고 그 지주로 되어 있다.
그리스 문화의 정수는 르네상스에 의하여 계승된 인간주의 정신에 있다. 그리스신화에 나타나는 신들은 우리네 인간과 같이 술도 마실 줄 알고 연애도 할 줄 알아, 오리엔트 세계의 존엄하기 이를 데 없는 신들과는 다르다. 이는 그리스인이 인간성을 존중한 데서 나온 것으로 지상의 인간의 발견은 실로 그리스인에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동양적 권위와 전통이라는 속박에서 탈피하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폴리스생활을 즐길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그들의 인간주의적 정신은 곧 인간성의 자유로운 전개를 수반시켰고 따라서 현세의 긍정과 이성에의 신뢰가 그 구조를 이루게 하였다. 그리하여 이것은 노예경제에 기반한 시민적 여유와 결부되어 마침내 그리스인에게 현실을 자유롭게 관찰하고 또 합리적으로 해석을 내릴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게 하였다. 진리를 사랑하고 추구하며,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합리적으로 규명하려는 그리스 문화의 본성은 모두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서야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III. 그리스 문학
그리스 문학은 신화와 결부시켜 민족의 오랜 전통과 내력을 서사시에 담아 표현한 것이 시초가 되었다. 호머(Homer)의 <일리아드(Illiad)>와 <오디세이아(Odyssei)>는 역사적 기록이 있기 전 그리스인의 생활과 전설을 담은 문학작품으로써 유럽 문학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B.C. 8세기에는 헤시오도스(Hesiodos)가 나타나서 <神統記(Theogonia)>를 저술하여 올림포스의 신의 계보를 작성하고 <노동과 나날(Works and Days)>에서는 노동의 신성함을 노래하고 귀족의 부정을 고발하였다.
B.C. 7-6세기에는 여류시인 사포(Sappho), 아나크레온(Anacreon), 핀다로스 (Pindaros) 등이 인간의 내면세계와 사랑을 노래하는 서정시를 씀으로써 그리스 문학에 새로운 경지를 열어 놓았다. 페르시아 전쟁이 끝난 뒤 아테네가 황금시대에 이르게 되자 문학은 보다 민중적 기반을 가지게 되어서 연극이 널리 상연되었다.
디오니소스 신에게 바치는 비극은 신의 정의와 인간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정면으로 대결하고자 하였다. 이 일을 위해서 아이스킬로스(Aiscllylos), 소포클레스(Sophokles), 에우리피데스(Euripides)등의 3대 비극작가들이 크게 활약하였다. 희극작가로서는 날카로운 사회비판 정신을 제기한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를 들 수 있는데, 그는 <기사>, <구름>, <벌> 등의 연극 작품을 남겼다.
IV. 그리스 문학의 정수 - '비극'
모든 민족은 초창기의 어느 시기에 불가사의한 전설이나 설화를 가지며, 그것을 사실이라 믿어 왔다. 그 전설에는 초자연적인 힘이나 존재가 중심이 되어 있는데 그리스의 경우에도 그러했다. 그리스인은 이 세계가 신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여 신들의 전능과 활약과 계보를 그렸고, 후대에 전했다. 이것이 그리스 신화이다.
그러나 그리스 신화는 다른 민족의 신화와는 달리 그것이 꾸며지고 전해지는데 있어 정치권력이나 종교의 교단적 입장에 의해 정리되지 않고 시인들에 의해 자유로이 윤색되었으며, 한편으로 농민이나 목축민의 생활에 입각한 생각이 반영되었다. 즉 그리스신화는 인간의 상상과 생활의 예지가 만들어 낸 가장 중요한 문화현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따라서 신화는 그리스인의 원초적인 사상이며, 동시에 매 시대마다의 사상의 반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뜻에서 그리스 정신사는 시대에 다라 나타나는 신화의 재현이라 하겠으며, 또한 신화를 가장 완벽하게 문학적으로 재현한 것이 비극이라 할 수 있다.
비극은 신화를 통해 시대의 사상을 반영한다. 비극시인은 신화를 통해 시대의 정치·종교·전쟁 등에 관한 자신의 생각이나 세간의 사조를 나타내기 마련이다. 10세기에 편찬된 <수이다스(Suidas)> 사전에 의하면,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이 있었던 해에 아이스킬로스는 그 전투에 참가했고, 소포클레스는 소년 합창대원으로 전송가를 노래불렀으며, 에우리피데스는 그 해에 탄생했다고 한다. 이는 시인들이 전쟁과 깊은 인연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이스킬로스는 페르시아 전쟁에 참전하였으나,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가 경험한 전쟁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 사이에도 끊임없이 싸움이 계속된 만큼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는 만성적 전쟁상태에 있었다 하겠으며, 따라서 시인들의 일생은 전쟁 속에 있었고 전쟁이야말로 그들 최대의 인생경험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을 행동의 모방이라 정의했는데, 그 행동이란 싸움이라는 행동일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스인은 원래 투쟁적인 민족이다. 플라톤의 <대화>도 대화의 형식을 통한 투쟁이며, 비극 자체가 투쟁의 형식인 경연으로 상연되었다. 투쟁이 극대화한 것이 전쟁이며, 따라서 전쟁은 비극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는 비극이 어떻게 성립되었으며, 그 배경은 무엇이며, 3대 비극시인의 작품관은 어떠한지를 알아보고자 한다.
1) 신화에서 비극으로
I) 신화란?
신화를 의미하는 그리스어 미토스(Mythos)는 원래 사람이 말하는 이야기를 뜻하는데, 비극의 테마나 희극의 줄거리, 이솝의 우화도 미토스이다. 미토스는 로고스(Logos)와 대립한다. 로고스는 논증하고 검증하는 이성의 활동, 합리적 사고를 말한다. 따라서 미토스와 로고스는 말의 양면이며 정신 생활의 두 가지 기본적 기능이라 할 수 있다.
네스틀레는 <미토스에서 로고스>라는 저서에서 신화적 세계에서 이성적 세계로의 발전이 그리스 문화의 근간을 이룬다고 하였다. 즉 그리스인은 자연의 불가사의한 힘을 신의 작용이라 믿고 그것을 미토스에 의해 설명한다. 여기에 이미 인과율을 추구하는 합리주의 정신의 맹아를 볼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미토스에서부터 이성적 사고를 진척시켜 합리적, 논리적, 과학적 설명(로고스)을 전개하기에 이른다. 이 미토스로부터의 탈피, 이성주의의 승리야말로 그리스 문화의 근간을 이루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합리적 사고가 전무한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합리적 사고로써 해결되는 문제는 합리적으로 해결한다. 그러나 인간에겐 합리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으며, 인간 그 자체가 근본적으로 불합리한 존재이다. 따라서 합리적 해결이나 설명이 불가능한 문제에 대해 비합리적 부조리적인 답을 주는 것이 미토스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미토스는 인간 事象의 비합리적인 면 일체에, 특히 미술, 문학 등 예술에 관여하지만 비극에서 가장 현저히 구체화 되었다.
ii) 서사시와 서정시
그리스 신화를 꾸민 것은 주로 서사시인들이었다. 기원전 8세기 경 그리스에는 폴리스 사회가 형성되어 바야흐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무렵 호메로스가 쓴 것으로 알려진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나타난다. 이 두 편의 대서사시는 역사의 서두에 나타난 작품이면서도 그 플롯, 언어, 작시상의 기교, 구성 등에서 최고도로 완성된 서사시였다.
이러한 걸작이 홀연히 출현할 수는 없는 것이며, 그 이전에 많은 시인에 의해 쓰여진 많은 작품이 있어 상당한 기간의 세련과정을 거친 결과라 생각된다. 실제로 두 작품의 무대인 트로이에 관련된 방대한 敍事詩圈이 존재했으며, 두 작품은 그 전설의 한낱 에피소드에 불과하였다.
트로이 설화 외에도 오이디푸스 왕 일족을 둘러싼 전설을 노래한 서사시도 존재했으나 작품은 모두 소멸되어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비극의 주제로 재생되어 현재 22편의 작품으로 남아 있다.
하긴 현존하는 두 서사시도 그 구성으로 보아 비극과 비슷한 점이 있다 할 것이다. <일리아스>는 15,000행에 이르는 장편시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한다.
노래하라 무사(시의 신)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저주에 찬 분노를
이 1행은 이 작품 전체 구성의 중심점을 한마디로 표현했다고 하겠는데,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와 거기서 야기된 사건들을 여러 가지 삽화를 섞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는 '발단', 여러 가지 전투장면의 '전개',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이라는 '절정',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화해라는 '하강', 가족들의 슬픔이라는 '종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전형적인 비극의 구성과 일치한다.
<오디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가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귀국 길에 겪게 되는 10년간의 방랑과 고초를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시는 10년의 방랑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작한다. 여신 칼리프소의 유혹으로 오기기아 섬에 묶고 있는 오디세우스(발단), 고국에서의 구혼자들의 횡포로 괴로움을 겪고있는 아내 페넬로페이아(전개), 귀국한 오디세우스와 구혼자들과의 대결(절정), 아내와의 상봉(하강), 농장에서의 평화로운 생활(종막).
이 작품도 <일리아스>와 같이 사건이 점차로 고조되어 마지막 수권에서 최고조에 달한 후 급격히 변하여 조용한 결말로서 끝나는 비극적인 구성으로 이루어져있다.
그러나 서사시가 그대로 비극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학적 형식으로 볼 때 비극은 서정시와 서사시의 결합이라고 볼 수 있다. 서사시는 민족이라는 의식으로 과거를 향하여 거기서 회상되는 기억들, 즉 신화 전설을 영광과 찬미 속에 노래한다. 서정시는 민족으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개인으로서 현재를 바라보고 거기에 나타나는 結晶(결정)을 心像(심상)에 비치는 대로 읊는다.
서사시와 서정시의 중간적인 위치에 있는 것이 헤시오도스이다. 호메로스와 동시대에 살던 헤시오도스는 서사시의 형식과 운율을 갖는 두 편의 장편시를 썼다는 점에서 호메로스와 유사하나, 그의 시의 언어와 내용에 있어서는 호메로스와 판이했다.
그의 <신의 계보(Theogonla)>는 복잡하고 혼돈된 신화에 대하여 질서를 부여하려는 시도로서,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생활을 지배하는 제사와 의례에다가 신화를 직접적, 체계적으로 결합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매우 새로운 발상이었다.
헤시오도스는 음유시인인 동시에 농민이기도 했으며, 농부로서 자기의 생각과 체험을 시로 옳은 것이 <노동과 나날>이다. 이 시의 중요한 테마는 자신의 가족의 내력, 농민의 생활, 그 노동과 일과, 농사에 사역되는 일꾼과 노예와 우마차, 농사와 연관되는 여러 가지 제사와 금기, 나날의 길흉에 관한 상세한 지식 등이며, 한편으로 귀족과 그들의 부정에 대한 비난, 재난과 빈곤에 대한 공포를 그리고 있고, 또한 일종의 세계사관이라 할 인류의 5종족의 내력과 노동을 통한 정의의 실현을 주장하기도 한다.
따라서 헤시오도스는 서정시의 선구일 뿐 아니라 최초의 철학자요 사상가라고 할 수도 있다. 이후 호담한 시풍의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와 섬세하고 탐미적인 시를 쓴 밈네르모스 등에 의해 서정시는 전개되어 나간다.
iii ) 합창서정시
서정시에는 개인이 노래하는 獨吟詩(독음시) 외에 제식이나 잔치에서 여러 사람이 함께 부르는 시라기보다 가요라고 할 합창시가 있었다. 합창시는 무용의 요소가 부가되면서 群舞(군무)의 리듬에 맞추기 위해 복잡한 형식으로 발달하였다. 이러한 시는 이미 호메로스 시대에도 민중사이에서 퍼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예컨데 로도스섬의 소년들이 집집을 다니면서 봄이 온 것을 알리는 봄의 온 것을 알리는 봄의 노래라든지 델로스 섬의 아폴론 제례에서 이오니아의 소녀들이 부른 <아폴론 찬가>가 그것인데, 소박하고 단순한 그러한 노래가 기원전 7~5세기 사이에 그리스 문학중 가장 복잡한 리듬과 가장 인공적인 언어기교를 구사하는 합창가로 발달한 것이다.
합창가의 서정시는 남이탈리아 레기온 출신의 이비코스(Ibices)를 거쳐 기원전 6새기 후반에서 5세기 전반 사이에 시모니데스(Simonides), 핀다로스(Pindaros), 바킬리데스(Bachylides)라는 3대 시인에 의해 정점에 달한다.
시모니데스는 각지의 부유한 파트론의 요청에 따라 아테네를 비롯한 그리스 전국과 시실리를 편력하면서 수 많은 시를 읊었다. 특히 마라톤 전투의 전몰자를 기리기 위한 묘비명이나 테르모필레 전투의 전몰자에 대한 송시와 같은 불후의 명시를 남겼다.
합창가의 최대의 시인 핀다로스는 문화의 불모지라 할 보이오티아의 테바이 출신이었다. 시모니데스가 주로 페르시아 전쟁과 관련된 시를 읊는 데 비해 핀다로스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못한 테바이 출신이었기 때문인지 전쟁에 대해 읊은 바가 없으며, 대신 그리스 세계 최대의 이벤트라 할 올림픽을 비롯한 피티아, 네메아, 이스트미아의 4대 경기의 승자에 대한 송시(Epinicia)를 무수히 읊었다.
특히 피티아 경기에서 우승한 소년을 위한 송가는 유명하다. 그의 시 가운데 완전한 형태로 전하는 것은 에피니키아뿐이기 때문에 그것만이 과대평가되고 있으나 에피니키아 외에도 무용가, 행진가, 挽歌(만가), 디티람보스(Dithyrambos) 등 다양한 작품을 읊었다.
원래 디티람보스라는 시의 형식이 정해진 것은 기원전 600년경 코린트에서 활악한 시인 아리온(Arion)에 의해서이다. 그 역시 각지를 편력하는 편력시인이었는데, 그는 디티람보스를 합창대에 의해 일정한 제목을 다루는 형식으로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주목할 것은 합창가의 중도에 노래가 아니라 이야기하는 대사를 삽입했다는 사실이다.
그의 작품이 전해지지 않아 그 대사가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비극의 맹아는 디티람보스의 합창가의 지휘자에 있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지휘자가 합창대에게 이야기하는 짧은 대사라고 추측되는데, 그것은 디티람보스에서 비극에의 중요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코린트에서 발달한 디티람보스의 형식은 아테네에 전해져 라소스(Lasos)라는 시인에 의해 디티람보스의 경연이 디오니소스 제례의 중요행사가 되었으며, 그 후 시포니데스, 핀다로스, 바킬리데스 같은 대시인도 참가함으로써 그 제례가 유명해졌다고 한다.
그리스 비극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제기되어 있으나 입증할 만한 결정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확실히는 알 수 없는 상태이다. 다만 디오니소스 제례에 부속한 합창가인 디티람보스가 점차로 발전하여 극의 형식을 갖춘 것으로 추측되는데, 비극의 형식을 형성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테스피스(Thespis)였다.
아테네 교외 아카리아 출신인 그는 합창대 외에 한 사람의 배우(Hypocrites)를 만들고 배우가 서는 무대(skene)와 배우가 역할을 바꿀 때마다 써야하는 가면을 창안했다. 그 후 소포클레스에 의해 배우의 수가 3명으로, 합창대의 누가 15명으로 증가되는 기술적인 변화가 가해지기는 했으나 비극의 기본형식은 여기서 완성된 것이다.
테스피스가 활약한 것은 기원전 6세기 중엽이었으며, 그때는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집권하던 시대라 비극도 참주가 강력히 추진하던 문화정책에 일환으로 출현하게 된 것이다. 테스피스의 작품은 전하지 않으나 탄생지인 이카리오스에 전례하는 자료로 한 것으로 예술적으로는 매우 미숙한 것으로 보이는데, 비극이 예술로서 완성되기 위해서는 이른바 비극의 3대 시인이 활약하는 기원전 5세기까지 기다려 야만 했다.
2) 비극의 시대배경
문학형식으로 본다면, 비극은 이미 비극의 틀을 갖추고 잇던 이오니아의 서사시와 시인의 주관이 표출된 서정시, 그 흐름을 타고 발달한 도리아의 합창서정시가 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비극을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동방종교, 특히 디오니소스 신앙의 유행과 시와 음악을 보호, 육성하는 참주의 출현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비극을 출현하게 한 것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정치력이었다고 한다면 그야말로 '극적'인 비극 작품을 창조하게 한 것은 페르시아 전쟁과 민주정이었다. 따라서 비극시인에 있어 중요한 관심사는 작품에 전쟁과 민주정을 어떻게 반영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그리스 사상 최대의 사건이었다. 기원전 6세기 중엽 키로스 왕에 의해 국가체제를 갖추게 된 페르시아는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사막의 부족국가에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병합한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하였으며, 기원전 5세기경에는 마침내 그리스 세계에 진출하게 된다.
그리스 본토의, 에게 해를 낀 對岸(대안)인 이오니아 지방에는 밀레토스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 식민시가 있었다. 상업활동으로 번영한 이들 도시는 원래 리디아의 종주권하에 있었으나 리디아가 페르시아에게 멸망한 후 페르시아 지배하에 들어간다.
리디아 치하에서 완전한 자치를 향유하던 그들은 페르시아 치하에서는 지배체제가 긴박해지자 민주정을 실시하려는 밀레토스를 중심으로 본토의 아테네와 에레트리아의 원병을 얻어 반란을 일으킨다. 한때는 페르시아의 주 수도인 사르디스를 점령하는 등 전세가 유리하였으나 결국 강대한 페르시아군에 압도되어 반란은 진압되고 만다.
페르시아의 다레이오스 왕은 이오니아 반란을 도운 아테네에 대한 보복을 이유로 내걸어 그리스 정복을 결심한다. 압도적인 페르시아군의 위협에 대해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크게 동요한다. 델피의 신탁도 페르시아에 대한 저항을 포기할 것을 충고했고 페르시아에게 투항하거나 영합하는 폴리스도 적지 않았다.
한 폴리스 내에서도 친 페르시아, 반 페르시아 파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아테네도 그러했다. 490년 초 페르시아 대군은 에레트리아를 점령한 후 아테네 동북부 마라톤만에 상륙한다. 과거 아테네에서 추방된 참주 히피아스가 선도 역을 담당했는데, 그는 페르시아 세력을 등에 업고 권토중래를 기했을 것이고, 따라서 아테네 내부의 친 페르시아적인 참주파의 호응을 기대했을 것이다.
아테네군은 믿었던 스파르타군의 원병이 없자 단독으로 싸워 기적적으로 승리한다. 이 싸움에 아이스킬로스도 참전했다. 10년 후 왕위를 계승한 크세르크세스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침공해오자 그리스는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여 동맹군을 형성한다. 테르모필레에서 스파르타 군을 전멸시킨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공략한다.
아테네는 노약자와 부녀자를 트로이젠으로 대피시키고 모든 성인남자를 배에 태워 살라미스에 대진한다. 페르시아 해군을 살라미스 만으로 유인한 그리스 동맹군은 다시 한번 기적적인 승리를 이끌어 낸다. 페르시아 전쟁을 계기로 아테네는 한 시골도시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위대한 도시로 발전한다.
정치적으로는 스파르타의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대항하는 델로스 해상동맹의 맹주가 되고 대내적으로는 민주정을 완성한다. 경제적으로는 종래 최대의 상업도시이던 코린트와 아이기나를 제치게 되고, 문화적으로는 조각, 건축, 비극,철학 등 모든 분야에서 고전문화의 전성기를 창출한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은 끝났으나 페르시아는 여전히 그 막강한 부와 세력을 통해 그리스 세계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리스 세계는 아테네 제국과 스파르타 동맹국, 양대 세력으로 갈라져 대립이 격화되며, 아테네 내부에도 민주파와 보수파가 대외정책으로는 반스파르타, 친스파르타파가 되어 대립하여, 마침내 민주파의 리더인 페리클레스의 적극적인 대외정책으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은 27년간 계속된다. 중간에 10년간의 휴전기간이 있기는 했으나 휴전이 엄격히 지켜지지는 않아 그리스 세계의 모든 곳에서 싸움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도 민주정은 지속되었으며 문화예술도 활동이 활발하였다. 아티카에 적이 침입한 상황에서 각종 제례는 생활의 일부로서 개최되었으며 비극과 희극도 여전히 상연되었다.
그러나 기원전 415년의 시실리 원정을 고비로 전세는 결정적으로 아테네에 불리해진다. 아테네는 국력을 총동원하여 300척의 군선을 만들어 니키아스와 알키비아데스를 사령관으로 하여 시실리로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알키비아데스가 스파르타로 망명함으로써 니키아스가 이끄는 원정군이 시라쿠사에서 전멸한 것이다. 그 후 전세를 만회하지 못하다가 404년 마침내 아테네는 스파르타에게 항복하고 만다.
기원전 5세기 100년간은 전쟁에서 시작하여 전쟁으로 끝나는 격동의 시기였다. 이 시기는 그리스 문화의 황금기이기도 했으니 특히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에우리피데스 등 비극의 천재들이 활약한 비극의 황금기였다.
주지하다시피 비극의 제재는 고래의 신화전설로 한정되어 있다. 물론 아이스킬로스의 <페르사이> 등 동시대의 사건을 다룬 작품이 몇 편 있기는 하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인 경우였다. 아이스킬로스의 경우, 현존 7편 중 <페르사이>를 제외하고는 테바이 전설을 취급한 <오레스테이아> 3부작 3편과 프로메테우스 신화 및 다나오스 왕가 전설 2편이 있으며, 소포클레스의 7편은 트로이 전설이 2편, 테바이 전설이 3편, 아트레우스 왕가 전설, 헤라클레스 전설이 각 1편이다. 에우리피데스의 17편 중 트로이 전설이 7편, 아트레우스 왕가 전설이 1편, 헤라클레스 전설이 2편, 나머지 5편이 아티카 전설이다.
비극이 신화전설로 국한된 것은 그것이 디오니소스 제례에서 파생했다는 종교성과 유관한 것으로 보인다 희극에는 자유로운 픽션이 허용되나 비극에는 그렇지 못했던 것은 픽션이 비극의 장엄한 종교적 분위기에 적합치 않은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인 듯하다.
제재가 한정되고 따라서 비극의 구성이 크게 제약됨으로써 작가는 두 가지 면에서 크게 고심해야 한다. 첫째는 익히 알려진 줄거리를 어떻게 극적으로 새롭게 제시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며, 둘째는 고대의 줄거리에 가탁하여 현재의 事象을 어떻게 그려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비극시인은 시인이기에 앞서 폴리스생활의 교사요 정신적 지도자였다. 따라서 그들은 시사문제에 대한 언급이 시인의 불가피한 의무라고 여기고 있었다. 전란의 세기에 살던 그들에겐 전쟁이 최대의 경험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전쟁에 대한 생각과 언급은 시대의 가장 여실한 증언이라 할 것이다.
3) 3대 비극시인의 작품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기원전 5세기는 전쟁에서 시작하여 전쟁으로 끝난 전쟁의 세기였다. 동시에 그것은 그리스 문화의 절정의 시대였다. 비극을 비롯해 철학, 조각, 건축, 역사, 변론술이 최고로 발달하고 또한 민주정이 완성된 시대이기도 했다. 전쟁은 영광과 비참, 창조와 퇴폐를 동시에 초래하는 것이다.
이 시대에 살던 비극시인들에게 전쟁은 생의 최대의 경험이었다. 일반적으로 애국시인이었던 아이스킬로스는 전쟁의 영광을 노래했고, 에우리피데스는 전쟁의 비참을 노래한 반전작가이며, 소포클레스는 전쟁에 초연한 태도를 지닌, 고고하고 순수한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은 아이스킬로스는 영광보다는 비참을 노래한 강렬한 반전작가이며,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하고 페리클레스와 그의 정책을 지지했던 소포클레스는 전쟁의 비참보다 영광을 의식한 시인인 듯하다. 에우리피데스는 애국적인 영광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시작하여 델로스사건과 시실리원정을 계기로 비참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다가, 끝내는 가장 순수한 시인으로 생을 마침으로써 시대의 세기말적 기운을 반영했다.
인생의 교사였던 세 시인의 이러한 태도의 차이는 개인적인 경험의 차이라기보다 당시의 세류와 사조를 반영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비극은 정녕 신화의 가장 문학적인 표현인 동시에 시대정신의 가장 문학적인 표현이기도 했던 것이다.
V .나오는 말
이상에서 그리스 문화, 문학, 비극에 대해 총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살펴본 바대로 비극은 그리스 문화를 대표하는 문학적 양식이다.
어떤 한 문학작품이 걸작으로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작가의 역량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즉 비극의 경우, 3대 비극시인들은 동시대의 사상과 가치를 작품 속에 무리 없이 투영시킴으로써 현재까지 '걸작'으로서 그 빛을 발하고 있다. 비단 비극만이 아닌 그리스의 여러 문화는 각각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 문화가 가진 가장 중요한 의미는 르네상스로 계승된 '인간주의 정신'의 본초라는데 있다 그리스 문화가 文化史上 혹은 歷史上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이러한 위치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를 지금 우리가 향유하고 있는 문화에 결합시킬 수 있는 역량을 키우는 것이야말로 그리스 문화가 우리에게 준 선물에 대한 진정한 보답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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