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와 지중해의 세계

2008. 10. 15. 14:01교회사자료/10.세계사

로마와 지중해의 세계

 

I. 로마제국의 의미 1. 로마는 하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2.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3. 로마제국의 실체 Ⅱ. 로마 제국의 건설 Ⅲ. 로마제국의 쇠퇴 Ⅳ.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이행의 문제

 

 

I. 로마제국의 의미


1. 로마는 하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역사상에는 로마뿐 아니라 실로 많은 국가와 제국이 출현했다. 이 중에서도 로마가 차지하는 세계사적 성격은 특별한 것이다. 그것은 로마에 대한 두 가지 격언 '로마는 하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라는 말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는 말이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첫째로 로마는 세계사상 보기 드물게 장구한 세월에 걸쳐 전무후무한 대제국을 건설했고, 또한 그것을 유례없이 오랜 세월동안 유지 발전시킬 수가 있었다는 하나의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로마는 그리스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다음 세대의 여러 세계로 전달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이 로마의 세계사적 성격을 단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로마는 단순히 그 곳에 살고 있는 모든 민족을 단순히 지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중해 세계라고 부르는 하나의 역사적인 세계를 만든 것이었다. 여기서 지중해 세계라는 것은 지중해의 자연 풍토 기후 등의 영향 아래 생긴 지중해 특유의 문화를 공유하는 세계가 아니라 로마가 역사상에서 이룩한 역사적 개념이다. 로마 멸망 후 로마가 통일한 세계를 다시 정치적으로 통합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만 가지고서도 로마가 전무후무한 제국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점에서 지중해 세계는 현대 세계와 많은 점에서 구조적인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중해 세계는 로마가 이룩한 제국과 그에 의해 유지된 로마의 평화에 의해 이룩된 것이다. 발전의 정도가 다른 민족과 제국국가에 의해 구성된 지중해 세계는 현대 세계에 있어 지배와 평화라는 생각하는 데 좋은 본보기가 된다. 우리는 로마의 세계사적 의미를 현대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데 하는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또한 로마의 현대적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로마의 번영과 발전 그리고 멸망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2.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우선 로마의 지배와 더불어 그 평화를 유지한 지중해 세계에 있어서는 무엇이 어떻게 그토록 번영하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이 생긴다. 전세계가 로마의 손에 의해 지배되고 있었을 때, 세계는 오직 하나의 폴리스라는 개념인 로마가 있을 뿐이었다. 로마제국 내에는 각각 그들의 조국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출생과 인종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중심도시로서의 로마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는 거대한 영토를 하나의 폴리스로 만들었다. 어디를 가나 폴리스와 같은 영역에 속해 있다 이러한 폴리스를 벗어날 수 없었고 로마는 하나의 경제, 하나의 행정을 이룩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공통되는 법률과 습관을 가지게 되었다 말하자면 하나의 폴리스론 이나 공통의 국제론 이라는 폴리스적 정체론으로 로마 제국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로마 사람들은 이제 전세계의 사람들을 그리스인과 야만인으로 나눈 것이 아니라, 로마인과 비로마인으로 나누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로마인은 탄생하면서부터 지배자였으며, 비로마인을 신하와 피치자로 삼은 것이다. 그리고 로마인의 테두리를 폐쇄하지 않고, 현명하게도 새로운 성원을 찾아 그 테두리를 보충하였다. 그래서 언제나 로마인은 번영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러면 외형적인 발전요소를 찾아보면 도로망의 정비로 볼 수 수 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로마와 로마의 길과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이다. 로마는 매우 광대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다.


  생산성이 낮은 농업기술로써 수백 년에 걸쳐 전 영토를 지배하게 했던 최대의 비밀의 하나는 전제국의 걸친 도로망의 정비였다. 로마의 도로는 거의 군사적 목적을 위해 건설된 것으로서 영토의 확대에 따라 도로가 건설되었다. 그러나 군사적인 목적으로 건설되었지만 건설기술의 정확성은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었다 이러한 도로망의 정비는 번영의 기본 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이 기본적 조건이 경제적인 번영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이 뒤따라야 한다. 왜냐하면 로마의 길은 본래 군사적 정치적 목적에 한해서 그 사용법이 정해져 있었고, 개인의 활동 특히, 상업적인 활동을 쉽게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테이데스는 도로망의 정비 이외에 도시의 건설, 모든 도시에 있어서의 주량 경기장, 신전, 학교의 건설 등 도시문명의 외양적인 확대를 찬양했다. 또 그리스인이나 야만인이 촌락과 하천, 그리고 항구로부터 철따라 생산한 것을 바다와 육지로부터 실어온 것에 언급 이러한 물자 교류에 의해 하나의 경제가 이룩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3. 로마제국의 실체


  경제 체제속에서 농업은 경제적 기초가 되었다. 로마제국 시대의 평균적인 도시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다. 그러나 농업이 제구의 주요 산업이었다는 것은 농민이 부유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일반적인 농민은 자급자족했고, 국가에 세금을 바치고 소작인은 지주에게 지대를 바쳤다. 농업과 더불어 그들은 상공업도 영위하면서 도시경제를 발전시켰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경제에서 상공업에 대한 농업의 중요성은 압도적이었고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렇지만 농민 일반이 풍요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대로 농민은 기아선상에 놓여 있었고 상공업자들도 상황은 마찬가지 였다.


  로마 제국의 경제적 번영 현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들은 농업 부분에서 토지경영을 하고 있는 지배적인 상층이라는 것에 눈을 돌리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지배계층이 어떠한 방법으로 재산을 형성했는가는 로마의 번영의 성격을 방향 지을 수 있다. 공화정말기에 로마가 행한 끊임없는 전쟁은 일반 로마인 즉 농민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지만 로마의 지배층에게는 막대한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이로써 로마는 제국주의 적인 확대의 길이 가능해 진 것이었다. 전쟁에서의 승리로부터 얻은 수입은 크게 나누면 지배자 집단인 로마 시민에게 환원되어 분배되고 다음 전쟁에 대한 준비금으로 충당된다. 그러나 제국 지배의 결과로 얻은 수익의 불평등 분배로 인해 심한 계층분화를 야기 시켰다. 더 나아가 속주 통치를 담당한 원로원 의원과 정치가들은 부정하고 부당한 방법으로 수뢰와 착취를 일삼았다. 이처럼 말기에 가서는 로마제국의 번영과 그것을 유지한 경제 대국으로서의 로마는 매우 한정된 계층에 의해서 유지되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점을 포함하고 있었다. 소수의 로마인이 대토지를 소유하게 되자 점차적으로 대농장을 경영하기 위한 소작제가 취해졌다 로마제국의 실체를 간단히 살펴보았다.


Ⅱ. 로마 제국의 건설


  로마하면 우리는 공화정, 멀고도 긴 역사, 웅장한 건물들, 삼두정치, 케사르, 아우구스투스 황제, 기독교, 교황, 유스티니아누스 법전 등 얼마든지 생각해 볼 수 있다. 로마는 동, 서로마를 합쳐서 2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서양 세계를 지배한 나라로 삼척 동자도 다 아는 일이지만 어떻게 그렇게 장기간 그렇게 넓은 영토를 통일 국가로 형성, 유지할 수 있었으며, 그 지배 수단이 무엇이었는가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이중에서도 역사의 전환을 가져온 사건이라면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나는 어느 특정한 사건보다는 서구 민주정치의 토대라 할 수 있는 그리스 민주 정치를 보다 조직화하고 완성시킨 로마의 정치제도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우리의 현재 모습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이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로마에 관한 속담을 보면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든가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인은 지중해를 가리켜 우리의 호수라고 불렀다고 하는 말들이 많다. 이런 말들은 모두 로마의 긴 역사와 넓은 영토를 말하는 것으로, 세계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렵다. 더구나 로마제국의 불후의 공적은 그토록 긴 세월과 광대한 공간에서 일어난 생활과 문명, 문화 특히 티그리스 및 바빌로니아와 이집트 등 인류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고대 오리엔트 문화와 고전 고대문화의 꽃을 피운 그리스 문화를 수용 통합 지배 하였는 바, 그 통치기술에 대하여는 누구나 다 의아해 하는 바이다


  그러나 로마의 역사는 너무나 오래된 역사이기 때문에 그들의 문화와 이기, 생활상들을 생생하게 알려주는 자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더구나 로마가 반도를 통일하기 이전의 종족들과 민족성 내지 생활상들은 찾을 길이 없으며, 많은 역사서들에서도 로마공화국이 수립되기 이전의 왕정에 대하여는 기술한 사람들이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공화정 이후의 역사를 알아보는 데 만족하지 않을 수 없다.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세계의 강대국이 되려면 그 나라의 영토, 지리적 조건, 그리고 국민의 수와 민족성 또 그들이 사용하는 지배 수단이 훌륭하여야 한다. 그 외에도 훌륭한 인물들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로마는 이러한 것을 모두 갖추고 있는 유일한 국가이기도하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모두 균형있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국민들의 정치의식과 정부에 대한신뢰이며 이는 로마 공화정의 민주 정치 제도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로마가역사의 전환을 가져온 많은 일 중에 로마의 민주정치에 대해 알아보겠다


1. 이탈리아의 통일


  로마의 역사는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 1단계는 공화정의 시대로 통일국가의 형성기이고, 제 2단계는 세계국가의 형성과 공화정의 붕괴이며, 제 3단계는 로마제국의 전성기로 제정이 시작된 때로부터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이다. 로마 역사의 1단계는 이탈리아 반도의 통일이었다. 기원전 8세기경 이탈리아 중부지역인 라티움 평야에 정착한 원주민인 파트리키(patrici)들은 도시국가를 형성하여 오다가 기원전 510년에는 왕의 강권에 못 이겨 반란을 일으키고 로마의 7번째 왕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추방하고 로마 공화정을 수립하였다.


  그들은 1백인 대회의에서 1년 임기로 선출된 2명의 집정관이 최고의 직위를 차지하였는데, 2명이 한 달씩 번갈아가며 집무할 뿐 아니라 상호간의 완전한 합의가 필요했으므로 그 이전의 왕보다 권력이 약하였다. 더욱이 집정관도 범죄를 범하면 임기 전에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했다. 그러나 로마는 불완전하게나마 민주정치를 하였기 때문에 국민단합이 가능하였고 또 반도를 통일하기에 적합한 국내외적 여건을 잘 이용할 수가 있었다. 당시의 로마의 인민들은 귀족, 평민, 노예의 3계급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귀족은 파트리키족으로 씨족 10개 단위로 1개 쿠리아(curia)를 만들고, 다시 10개의 쿠리아가 1개의 트리부스(tribus)를 만들었는데, 트리부스는 모두 3개였다.


  따라서 파트리키 씨족의 장로 3백 명이 원로원을 구성하였다. 모든 성년 남녀는 각 쿠리아에서 집회를 열고, 대표 선출, 선전 포고, 강화 조약의 체결 등 중대사를 결정하였다. 평민들은 트리부스라고 하는데, 이들은 파트리키에 소속되지 않은 로마 공동체에 의하여 정복된 종족으로 자유민이긴 했으나 시민권은 없으며 민회에 출석할 권리도 군무를 맡을 권리도, 파트리키의 종교의식에 참여할 권리도 없었다. 또한 파트리키와의 결혼도 허용되지 않았다. 노예는 전쟁포로로서 이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러나 부족간의 전쟁이 잦아짐에 따라 평민들의 세력은 강화되어서 귀족과 평민의 신분투쟁은 자주 벌어졌는데 귀족들은 평민들에게 호민관의 선출권을 줌으로써 양자간의갈등은 해소되고 서로 협력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기원전 326년에는 시민의 노예화를 금지하는 법률까지 공포하기에 이르렀다.


2. 파트리키(지배층)와 노블레스(지도적 평민)에 대한 논쟁


  그리스의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기원전 2세기 로마 공화정의 정치체제에 대한 서술에서 로마의 정치체제는 한니발 전쟁 당시에 가장 완전한 형태에 이르렀다고 하고 로마국제가 콘술로 대변되는 군주정적 요소와 원로원으로 대변되는 귀족정적 요소 그리고 민회로 대변되는 민주정적 요소가 혼합된 혼성체제임을 인정했다. 그는 또한 로마인들 자신도 로마의 정치체제가 귀족정인지민주정인지 또는 군주정인지 확실하게 말할 수 없을 정도라 하고 콘술이 갖는 국내에서의 공무에 관한 제권리와 야전에서의 거의 절대적 권한을 열거하는가 하면 원로원의 권한으로는 세입과 세출을 위시하여 대외 문제에 관한 거의 모든 관계에 있어 원로원의 막강한 권한을 인정하였다. 그리고 그는 시민이 보유한 권리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였다.


  그에 따르면 영예를 주거나 처벌을 할 유일한 권한, 사형에 해당하는 중대 사건의 재판을 담당할 권한, 공직을 줄 권한, 법안을 승인하거나 거부할 권한, 전쟁과 평화의 문제를 심의 결정할 권한, 동맹의 결성, 적대 행위의 종식, 조약의 체결 등과 같은 문제에 있어 모든 문제를 비준하거나 거부할 권한을 갖는 것은 시민이었다. 국제상 시민이 갖는 이러한 권리의 측면을 강조하여 최근 로마 공화정의 정치체제를 과두정이 아니라거나 심지어는 민주정으로 보려는 경향이 최근에 강하게 대두되었다. 이의 대표적인 학자로는 브런트(Brunt)와 밀러(Millar)이며 그들의 이론을 지지하는 학자도 최근 등장하였다. 브런트는 로마의 정치체제가 노빌레스 지배하의 과두정이라는 기존의 주장에 대해 과두정의 지배집단으로 인식되어 온 노빌레스의 배타성과 폐쇄성에 대한 논의에서 한니발 전쟁 이후 150년간의 콘술 역임자들의 출신 성분을 분석을 통해 노빌레스의 배타성은 과장되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폴리비우스가 로마 국제가 혼성체제임을 인정하면서도 원로원이 과두정이 아닌 귀족정적 요소가 지배적이었다고 인정했다고 하면서 로마 공화정이 과두정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로마 정치에 있어 민회의 중요성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기존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였다. 그러나 브런트의 이러한 주장에도 불구하고 귀족정은 혈통과 재산에 따라 결정된 정부형태인데 그러한 것들은 로마에서는 지배층의 구성요건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사실 로마 공화정의 정부형태는 귀족정이 아니었다. 엄격한 의미에서 노빌레스는 공화정 초기 파트리키와는 달리 최고의 정무관인 콘술과 그의 후손에게 적용된 용어였으며 그들의 권력은 가문이나 부를 통하여 결정되지 않았다.


  비록 일정액 이상의 재산을 보유함으로써 공직에 취임할 자격을 부여받았고 권력 유지에 가문과 조상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지라도 노빌레스의 권력의 척도는 최고의 관직인 콘술직 보유 여부에 있었다. 그리고 그가 브런트가 민회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한 시민 집회는 언론의 자유가 전적으로 보장된 곳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연설할 수 있는 사람은 주제 정무관에 의해 연설하도록 허락받은 사람 그것도 대부분 지도적 원로원 의원에 한해서였으며 시민대중의 참여는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시민 집회에 로마 시민은 물론 동맹시민이나 해방노예, 심지어는 노예까지도 비교적 자유롭게 참석할 수 있었으나 그들은 단지 연설자의 말을 듣고 찬반의 표시로서 고작 환호나 박수갈채 또는 비난의 고함만을 칠 수 있었을 뿐이었다.


  한편 밀러는 일반적으로 공화정기 로마 과두정의 지배층으로 알려진 파트리키와 지도적 평민으로 구성된 노블레스는 여러 가지로 잘못된 것이며 노빌레스는 법적으로 규정된 폐쇄된 그룹을 지칭하는 전문 용어가 아니라고 하였다 더구나 그는 이 용어가 기원전 2세기 문학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고하여 기존의 노블레스에 대한 주장을 부정하였다. 특히 그는 정무관의 시민에 의한 직접선출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실 그는 로마의 정치를 굳이 민주정이라 하지 않았지만 민주정의기본 요소라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면을 들며 아테네 민주정과 대비하고 주요한 대내외적 결정과정에서 시민의 역할을 강조하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선 원로원의 고유 권한이었던 해외사절파견의 사안을 제외하면 시민은 대외문제의 결정이나 인준에서 배제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무엇보다 민주적 잠재력을 가진 중요한 요소로 중요했던 것은 입법민회로서 기원전 2세기 중엽의 일련의 중요한 입법들이 시민의 결정에 의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Ⅲ. 로마제국의 쇠퇴


  콘스탄티노플에 자리 잡은 동로마는 바잔틴제국(ByBantine Empire)으로 IS세기 중엽까지 그 명맥을 유지했지만, 로마가 발흥한 본고장인 이탈리아 반도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제국은 몰락하였고, 이로써 역사가들은 그리스의 성장과 발전으로부터 시작된 유럽의 고전고대는 막을 내린 것으로 보고 있다. 말하자면 한 인간의 생명주기와 같이 그리스, 로마 문화는 탄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 생명의 주기를 끝마쳤다는 것이다.


  로마의 엄청난 기념물, 신전, 궁전, 욕탕을 보았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거대한 원형극장은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미 허물어진 로마 제국의 조직을 재건하고 회복시켜 보려는 노력은 되풀이됐으며, 로마 제국의 칭호는 칼 대제와 오토 대제 그리고 중세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에 의해 계속 사용되었다. 그러나 당시 지성을 갖춘 사람들은 5세기 서방 속주의 입장에 있어 로마제국의 몰락이 하나의 신기원을 이룩한다는 사실과 로마 제국이 향유했던 권위는 결코 회복할 수없음을 인식하였다.


  그들에 의해 알라딕이 지휘하는 고트족이 410년 로마에 진입한 때부터 로마 제국의 몰락 원인 규명은 중단 없이 계속 논의랬다. 그 논의는 오늘날에도 계속 되었다. 사람들은 당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왜 '로마제국은 몰락하였는가'를 끊임없이 묻고, 역사가, 철학자, 신학자들은 각양 각색의 해답을 내놓았다. 크리스트교의 유포에 그 원인을 돌리는 유명한 기번의 견해로부터 토지의 생산력의 고갈과 기후의 변화에 따른 한발의 계속을 지적하는 견해, 또는 하다못해 저질의 이민족과 혼혈로 인한 로마인의 인종적인 타락을 강조하는 극단적인 견해까지 제시되었다. 이러한 인종설이나 지력의 고갈 내지 기후의 변화 등의 견해는 별로 근거 없는 의견으로 취할 바가 못되는 것이지만 비교적 타당한 견해라 하더라도 어느 특정한 요인만을 지적하거나 강조하는 것은 역시 옳지 않다.


  로마제국의 몰락에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신적인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고대문명의 기반은 그리스를 포함하여 노예제에 입각한 도시문명이었고, 로마는 여기에 이질적인 오리엔트와 미개발지역인 유럽대륙을 포섭하여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고 이를 강력한 황제권으로 통치하였다. 그러나, 광대한 제국통합의 핵심인 황제권은 오랜 전통을 지닌 기능적인 제도의 뒷받침을 가진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공화정에 접목된 타협의 산물에 지나지 않았으며, 실질적인 권력의 원천은 이집트를 포함한 광대한 황제령과 강력한 군대의 장악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의 계승권조차 애매하였고 황제의 신격화는 우매한 민중에게는 효력을 발휘하였으나 문무의 지배층에게는 큰 효력이 없었다.


  그리고 로마제국의 번영은 정복에 의한 영토의 확장과 이에 수반된 전리품과 공납의 산물이었고, 기술의 개발이나 혁신을 수반한 참된 생산적인경제발전의 혜택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정복사업이 한계에 도달하였을 때, 경제적 쇠퇴는 자명한 일이었고, 황제권이 동요함으로써 제국은 해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제정의 성립과 더불어 황제의 계승을 둘러싼 궁정음모는 5현제시대를 제외하고 제정기 전체를 통해서 고질적인 것이었다. 3세기의 군인황제시대는 그 가장 두드러진 것으로서 이 단계에서는 군대가 제위계승에 개입하고 황제옹립을 위한 내분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는 로마 제국의 통합과 그 핵심이 되는 황제권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제국은 분해의 징조를 보이고 중앙의 통제권은 현저하게 약화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를 수습하기 위하여 동방적인 전제군주제를 도입하였으나 영속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콘스탄티누스의 사후 사태는 더욱 악화할 따름이었다. 이러한 사태악화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는 군대의 질적 변화ffh다. 로마팽창기의 로마군대는 로마 내지 동맹시의 자유로운 중산적인 시민으로 구성된 국민병(nationalarmy)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으나, 공화정 말기에는 여기에 용병대의 성격이 첨가되면서 사병화하 되고 제정 후반으로부터 말기에 갈수록 속주민과 야만족 출신의 비중이 커지면서 로마에 대한 충성심을 거의 기대할 수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정복전쟁의 종식은 값싼 대량의 노예 공급원 소멸을 뜻하는 것이었고, 그리하여 노예 노동이의존하는 대농장경영은 점차로 콜로누스로 알려진 소작제로 변화해 갔다. 그나마 166년의 페스트의 유행을 비롯한 거듭되는 질병과 내란 등으로 인구가 감소하고, 노동력이 희귀해져서, 처음 자유로웠던 콜로누스의 지위가 점차로 토지에 결박되는 부자유한 것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위관직자를 비롯한 유력한 지배층은 대지주로서 그들의 지위와 권세를 이용하여 면세특권(immmunity)을 획득하여 중세에 허덕이는 자유민조차, 자유를 버리고 대지주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부자유한 콜로누스로 전락하게 되어, 제정 말기의 로마사회는 봉건화의 징조를 보이게 되었다.


  기간산업인 농업이나 수공업은 앞에서도 설명한 것처럼 새로운 기술의 개발이나 과학적인 경작 또는 대자본의 투하와 경영의 합리화 등이 행하여지지 않고, 오히려 영세화하여 생산력이 저하하는 경향을 보였고, 이러한 생산력의 저하는 다른 요인과 결합하여 화폐경제와 병행하여 자연경제의 경향을 낳게 하였다. 상업은 계속되었으나 이것 역시 거듭되는 내란으로 큰 장애를 받고 미개발상태에 있던 속주들이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여 자급자족의 단계에 도달하자 상류층의 사치품을 취급하는 국제적인 무역이 상업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러한 상공업의 쇠퇴, 자연경제의 등장, 농촌의 봉건화 경향 등은 필연적으로 도시의 쇠퇴를 초래하게 되었으나 이에 치명적인타격을 가한 것은 날이 갈수록 가중되는 세금의 압박과 이를 징수하기 위한 방편으로 마련된 직업과 신분의 고정과 세습화였다. 거대한 수입을 가져 왔던 정복전쟁과는 달리 국경선에서의 만족과의 전쟁이나 제위를 둘러싼 내전은 완전한 소비였고, 방대한 군대의 유지와 전비, 그리고 디오

클레티아누스의 개혁으로 발생한 수많은 관료, 그나마 날로 부패하고 무능해지며 면세특권이나 노리는 관료들에 대한 보수, 그리고 계속되는 대 건조물의 축조 등, 날로 늘어가는 지출을 증세와 이의 철저한 징수밖에 달리 메울 도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사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격심한 인플레의 진행으로, 이를 감당하기 위한 악화의 주조는 한 마디로 악순환의 되풀이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한 때 명예로웠던 도시의 참사원직을 비롯하여 모든 직업과 신분, 그리고 조합까지 고정되고 세습화되어 도시는 자발적인자치능력을 상실하고 중세에 허덕이면서 생기를 잃고 사회전체가 경직화현상을 나타냈다. 사람들은 현세에 희망을 걸지 못하고 내세를 바라보게 되었으며, 지배층은 지배층대로 언제 그 지위와 권세가 없어질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허무함을 느꼈으며, 절대대수를 차지하는 민중과 노예는 빈곤과 생활고에 지쳐 멀리 동방으로부터 전해진 크리스트의 새로운 복음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이래 정제가 자리 잡은 동로마를 피하고 게르만족이 노도와 같이 라인강을 넘어서 로마로 침입하였을 때, 이를 목숨을 걸고 지키려는 군대도 관리도 민중도 없었다.


Ⅳ. 공화정에서 제정으로의 이행의 문제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옮긴 기원후의 로마는 그 정치체제가 동방적 전제군주제와 다른 것이었으며 오히려 다분히 공화제의 전통을 존중한 비세속적 군주제였다. 그러나 3세기 후에는 제정이 강화되었으며 동방적 군주제에 매우 가까운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제정은 공화제적 전통이 남아있는 프린켑스제(Principatus)의 시대(27 BC~AD 284)와 전제군주제라고 간주될 수 있는 도미네제(Dominatus)의 시대(284~476)로 양분될 수 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국가질서 재건 3인위원회가 5년 임기로 구성되었다(BC 43). 그러나 국내의 공화주의자들의 세력이 거의 쇠퇴한 후 이 위원회는 제2차 삼두정치로 전환되었다. 옥타비아누스 (Octavianus)는 서방 속주, 레피두스 (Lepidus)는 아프리카 지방, 안토니우스 (Antonius)는 소아시아 및 이집트를 관장하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안토니우스의 직권을 박탈하고(BC .:2), 클레오파트라에 선전포고하였다. 이 싸움은 서방적인 지배체제와 헬레니즘적 군주제 전통과의 충돌을 의미하였다. 악티움(Actium) 해전(BC 31)에서 옥타비아누스의 해군은 아그리파의 지휘하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를 격파하였다. 악티움해전의 승리로서 전 지중해 세계가 로마의 세력권 안에 완전 통합되었으며, 로마 안의 공화제 전통을 고수하려는 공화파가 완전히 후퇴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국내외의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에게 위임된 권력 일체를 로마원로원과 시민에게 반환하였다(BC 27).


  그것은 카이사르 군주적인 지위를 유지하면서 들었던 독재자라는 소리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러한 옥타비아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에게 공화제하에서 가능한 최고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즉 종신 집정관, 최고재판관, 원로원 의장 등을 겸임한 그에게 임페라토르(Imperator, 전승장군의 의미)와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사람)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나라의 제1시민(Princeps)이라 칭하였으나, 로마의 정치체제는 실질적인 제정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그를 아우구스투스 대제라 칭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취한 통치형태는 카이사르의 군주정(monarchia)이나 나중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의전제정과 상이하였다. 직권에 있어서는 공화제적 전통 내에 머물러 있는 것이긴 하였으나, 그는 국민의 누구보다도 우월한 개인지배의 체제를 취하였다. 자기 자신이 쓴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 (Res gestae divi Augusti) 34항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져 있다. '나의 제6차 및 제7차 집정관직 재임 중 내란을 진압한 후 전 국민의 동의를 얻어 국가주권을 나 자신의 권한으로부터 로마 원로원과 국민에게 이양하였다. 나의 이러한 공적 ․봉사 때문에 원로원 의결에 의하여 나는Augustus의 칭호를 받았다‥‥‥‥ 그 이래로 나는 권위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도 우월하지만, 그러나 관직에 있어서 나의 동료들보다 더 이상의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다. ' 간단히 말해서 아우구스투스의 제정은 당시의 시대적 과도기를 고려하여 성립한, 공화제의 명분 아래 이루어진 독재체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정치의 2대 기본은 군재와 재정이었다. 그는 군편제를 개편하여 18군단(Ipgion)으로 줄이고, 복무연한을 16년에서 20년으로 연장하였다. 상비군은 외적과 근접한 지방에반영구적으로 장기주둔하도록 했다. 근위군은 로마에 주둔하였는데 9대대로서 9,000명 가량이었다. 국가 재정면에서 본다면 관리와 같이 무보수인 로마의 군대는 전리품이나 사재를 몰수하여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징세청부제는 폐지되고 그 대신 관리가 파견되어 징세하였다.


  속주의 경우 국고는 원로원의 소속 (aerarium)과 황제의 소속(fiscus)으로 양분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가 전반적으로 현상유지 및 방어 ․정비의 체제를 취하게 됨에 이르러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시작되었다. 평화시대의 로마는 국가영토의 극대화를 달성했으며, 대내적인정치 및 경제를 안정시켜 적어도 사회적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였고, 학문 예술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로마제국 내의 많은 도시에 교량과 수도가 설치되고 도로가 정비되었다. 수도 로마시는 벽돌의 도시에서 대리석의 도시가 되었다. 상공업은 활기를 띠고 사회전체에 평화와 안정이 이루어졌다. 전통신앙은 회복되고 신전이 세워지며 라틴문학의 황금시대 이른 바 아우구스투스 시대가 도래하였다.


  76세의 나이로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AD 14) 양자인 티베리우스(Tiberius) 및 친족 4명이 연이어 재위를 계승하였으나 칼리굴라(Caligula)와 네로(Nero) 등 대체로 무능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기반은 동요되지 않았으며, 이른바 5현제시대(Nrrvagf~98 -1 Trajanus, 99~ 117 -1 Hadrianus, l17~138 -1 Antonius Pius, 138~161 -'MarcusAurclius, 161 ~ 180)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지속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로마제국은 그리스 문화를 확대한 대규모의 보편문화를 형성하여 찬란한 외관을 보인 안정기였으며, 수도 로마시가 거대한 로마제국의 통치중심이었다. 그러나 각 지역마다 주요도시가 있어서 지역적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는 한편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들이 매우 발달되어 제국은 전체적으로 내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로마제국은 많은 도시들이 집결된 거대한 망상(』티란)조직체라고 볼 수 있었다. 기원전 1세기 초에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들은 로마시와 동등한 위치로 격상되었으며, 속주의 도시들도 점차 자치를 획득하고 자유시 (municipia)의 특진을 얻게 되었다.


  속주에서 도시가 발생하게 된 사정은 도시마다 상이하였다. 즉 스페인이나 갈리아 지방에서는 대체로 식민으로 도시가 발생하였으나, 특별히 스페인의 타라코(Taraco)나 갈리아의 리옹(Lyons) 혹은 영국의 요크(York) 등은 행정 및 종교행사의중심이었으며, 군대가 20~25년 장기 주둔하는 변경에서는 병영을 중심으로 여관 ․술집 ․상점 등이 모여 도시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는 막대한 인구가 거주하였고, 상 ․하수도를 비롯하여 극장․공동목욕탕 ․경기장 등의 공공건축물과 문화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제정 초기의 경제는 방대한 영토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증대한 지하자원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그 러나 전통적이며 기본적인 경제활동인 농업은 갈리아, 스페인, 브리타니아 등에서 곡물이 유입됨으로써 위축되는 경향에 있었다. 그리하여 반도 안에서의 농업생산은 포도 ․올리브 등의 과수재배로 전환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제국의 총 경지면적은 증가하였으나 로마인에 의한 농업생산은 저하하였다.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가진 자영농의 수는 줄어들고 대지주의 대농장이 소작인(coloni)에 의해 경작되었다. 이와 같은 경제적 변동으로 사회적 변화가 수반되었다. 토지를 잃은 무산자는 증가하고 노임은 하락하였다. 토지를 소유한 종래의 구귀족은 몰락하고 속주에서의 경제활동을 바탕으로 한 신귀족이 그들을 대신하여 사회적으로 대두하였다. 이와 같이 사회계층의 변동에 있어서 사회적 불안의 요인은 항상 잠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I~2세기에는 자영농이거나 노예층이거나 전체적으로 로마 국민은 안주하는 외관을 보였다. 따라서 사회적 동요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2세기말에서 3세기에 걸친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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