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5. 14:08ㆍ교회사자료/10.세계사
로마사의 주요개념과 인물
▶ 성산 사건(B.C 493)과 호민관 제도(Tribuni Plebis) ▶ 12표법(Leges Duodecim Tabularum(B.C. 450) ▶ 리키니우스 ․ 섹스티우스 법(Lex Licinia-Sextia :B.C. 367) ▶호르텐시우스 법(B.C.287) ▶카르타고(Carthago) ▶포에니 전쟁(264~146 B.C) ▶칸나에 싸움(Battle Cannae ;B.C. 216) ▶한니발(Hannibal ;247-183 B.C.) ▶라티푼디움과 공화정의 변질 ▶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스파르타쿠스의 반란(B.C.73 - B.C.71) ▶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 ▶ 벌족파와 평민파 ▶ 마리우스와 술라 ▶제 1차 삼두 정치(Triumviri): ▶ 크랏수스(Crassus, Marcus Licinius ;112-53 B.C.) ▶ 율리우스 카이사르 ▶ 운명의 날 ▶부르투스의 웅변(세익스피어 작 줄리우스 시저) ▶ 안토니우스의 웅변(세익스피어작 줄리우스 시저) ▶ 율리우스 달력 ▶ 제 2차 삼두정치 ▶ 레피두스(Lepidus, Marcus Aemilius ;B.C. 90?-A.D. 13)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 ,B.C.31) ▶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 ▶ 로마의 중장보병과 도로 건설 ▶ 네로 황제(54 - 68) ▶ 로마의 평화(5현제시대) ▶ 콜롯세움(Colosseum) ▶ 공공 목욕장(Thermae) ▶ 아우렐리우스(Aurelius Marcus. Marcus Aurelius Aantoninus ,121~180) ▶ 군인 황제 시대(Soldier Emperors, Barrack Emperors: 235~285) ▶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230~316년) ▶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74경-337) ▶ 크리스트교의 성립(33년경)
▶사도 바울(PauIUs) ▶ 기독교 박해 ▶로마에서의 기독교 ▶ 삼위 일체설 ▶ 아리우스 파 ▶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Flavius ;346경~395) ▶ 콜로누스 ▶ 서 로마제국의 멸망(476) ▶ 키케로(Cicero, Marcus Tullius ;106~43 B.C.) ▶베르길리우스(Vergilius Mwo Publius ;70-19 B.C.) ▶ 에픽테토스(Epiktetos ;60?~140?) ▶ 리비우스(Livius, Titus ;B.C.S9~A.D.17) ▶ 플루타르코스(Plutarckus ;46?~120?): 풀타크 ▶로마의 미술
▶ 성산 사건(B.C 493)과 호민관 제도(Tribuni Plebis)
기원전 493년, 평민들의 참정권 요구가 귀족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자 평민 출신의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로마 시 부근의 구릉인 성산(Mons Sacer)에 이주하여 평민들만의 신도시를 건설하려 하였다. 이에 당황한 원로원이 양보하여 협정을 맺어 평민 가운데서 2명의 호민관을 선출하여 그에게 불법 압박을 당하는 평민의 보호 및 정무관의 행정․선거․입법 및 원로원 의결에 대하여 거부 혹은 간섭의 권한을 인정하고 그 신체를 국법에 의하여 불가침으로 하였다.
또한 호민관은 평민회를 소집하여 의결을 하였으며, B.C. 287년에는 그 의결이 법으로서의 구속력도 갖게 되었다. 호민관은 2명으로 한 사람이 거부권을 행사하여 동료의 행위를 간섭할 수 있었기 때문에, 원로원이 호민관 중의 한 사람을 매수하여 다 호민관의 제안에 반대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이우스 그락쿠스가 호민관으로서 평민의 이익을 대변했기 때문에, 귀족들이 적대시하여 술라 때에는 그 권한이 제한되었다. B.C. 70년에 그 기능이 완전히 부활되었으며, 아우구스투스에게는 종신 호민관 직권이 부여되었다. 제정 시대에도 이 관직은 존속되었으나, 본래의 호민관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호민관이 가지고 있던 거부권(Veto)은 소극적인 권한 행사였을 뿐 적극적으로 그 어떤 행정권이나 군사 통수권은 없었으므로 그 힘에는 한계가 있었다.
▶ 12표법(Leges Duodecim Tabularum(B.C. 450)
로마 최초의 성문법. 당시까지 행해지고 있던 관습법은 귀족에게 유리하고 평민에게 불리한 점이 많았다. 성산 사건 이후에도 사법권을 독차지하고 있던 귀족들이 관습법을 악용하여 평민들을 억압하였으므로 평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글로 분명히 적어 놓자고 궐기하여 기원전 451년 이를 구리판에 새겨 로마 시내에 세우게 되니 이것이 로마의 첫 성문법이다. 일명 12동판법으로 부르기도 한다. 호민관테렌 틸리우스의 제안에 의해 법을 성문화하게 되고, B.C. 451년 압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이하 10명의 입법관이 선출되어 10표로 이루어진 법을 제정했으며 이듬해에 2표가 추가되어 '12표법(Law of 12 Tables)' 이 됐다.
그 내용의 개략은 1표: 민사 소송 수속, 2표: 경쟁금 소송 금액, 4표: 가장권, 5표: 유산 및 후견, 6표: 소유권 취득의 법, 8표: 불법행위, 9표: 시민권 박탈, 11표: 귀족과 평민의 결혼 금지 등으로 되어 있다. 귀족과 평민의 통혼을 금지한 규정(제11표)을 비롯해 아직 평민에게 불리한 점이 많았지만, 귀족의 권리 남용에 한계를 그었고, 귀족의 사법권 독점을 제한했다. 따라서 이 12표법의 제정은 평민의 권리가 신장되는 한 계기가 됐다.
▶ 리키니우스 ․ 섹스티우스 법(Lex Licinia-Sextia :B.C. 367)
호민관 리키니우스 칼부스스톨로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가 제안하여 긴 논쟁 끝에 B.C. 367년에 가결했다. 정치․경제양면에 걸쳐 중요한 몇 개의 조항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은 2명의 집정관 중 1명은 평민에서 선출할 것과 신관 단체 중에 평민을 넣을 것, 그리고 어느 누구도 공유지 500 유게라(1유게라 는 약 2~3에이커) 이상을 소유할 수 없고 또 공유지에 100마리 이상의 소와 500마리 이상의 양을 방목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지금까지 지불한 이자는 원금 상각에 충당하고, 이후 이자의 원금 산입은 1년에 3회 이상 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 법은 그 후 확장되어 토지 소유자는 노예 이외에 일정한 비율의 자유 농민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추가되었다. 이로써 정치적인 문제는 해결되었으나, 경제적인 면에서는 일시적인 호도책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빈부의 차이는 더욱 심하여져 B.C. 2세기경에 그라쿠스 형제가 이의 개혁을 부르짖게 되었다.
▶호르텐시우스 법(B.C.287)
로마의 평민은 귀족과 오래 다투었는데, 기원전 287년쯤 채무법 문제가 생기면서 평민들은 티베르 강 맞은편 야니쿨룸 언덕에 새 도시를 세우고 분리하기에 이르렀다. 그 때 호르텐시우스(Hortensius)가 독재관으로 뽑혀 양자의 조정을 꾀했다. 그리하여 평민회의 의결은 그대로 국법이 되어 귀족을 포함해 모든 로마 시민에게 구속력을 갖는다는 법률을 만들었다. 이것이 호르텐시우스 법으로, 귀족과 평민의 법률상 평등이 실현되었다. 이로써 귀족에 대한 평민의 오랜 신분 투쟁은 대체로 끝이 났다.
▶카르타고(Carthago)
고대 아프리카에서 가장 번영한 페니키아의 식민 도시, 전설에 의하면 B.C. 814년에 티레 왕가 출신 페니키아인 일파가 북아프리카에 식민 도시 카르타고(Carthago)를 건설했다. 티레 왕 피그말리온의 누이 엘리사는 신관인 숙부 아케르바스와 결혼했는데, 아케르바스가 막대한 재산을 숨겨 두었다는 말을 들은 피그말리온은 그를 암살해버렸다. 왕에 반감을 느낀 귀족 일부를 포섭한 엘리사는 남편이 숨긴 재산을 갖고 도망해 키프로스를 거쳐 카르타고에 도달했다. 엘리사는 '쇠가죽으로 덮을 만큼' 이라는 원주민의조건에, 가늘게 자른 소가죽을 이어서 둘러쳐 그만큼 땅을 얻어 냈다.
카르타고의 발상지인 비르사 언덕이 그리스어로 '가죽' 이라는 뜻을 갖는 것은 이러한 전승에 유래한다. 시칠리아와 마주보며, 서지중해 동 지중해와의 교통이 요충에 있는데, 바그라닷 평원의 곡물을 이용하여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에스파니아 등의 페니키아 식민지의 패자가 되었다. 귀족 과두 정치의 지배를 받았는데, 귀족 중에는 대토지 소유자로서 농업 발전에 노력하는 자와 해상 상업에 종사하는 자가 있었는데 후자가 실권을 잡았던 것 같다. 서지중해의 해상 지배권을 둘러싸고 그리스인과 대립하더니, 에트루리아인과 동맹하여 B.C. 550년 경 전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나아가서 코르시카, 사르데냐, 에스파니아에 세력을 확대하여 그리스인과 항쟁, 결국 서시칠리아를 차지하였다. 또 처음에는 로마와는 우호적이어서 B.C. 508년 및 348년에 동맹 을 맺었으며, 280년 피로스 전쟁 때도 로마를 원조하였다.
그런데 로마의 세력이 확대되자, 카르타고와 의 사이에 포에니 전쟁이 일어나 B.C. 146년에 카르타고는 한때 괴멸하였다. 처음에 로마는 카르타고의 회복을 불허하였으나, 잔존한 카르타고 인은 응단 ․ 염료 ․ 보석 ․ 도기 ․ 램프 ․ 철직 ․ 재목 ․ 모피 등을 수출하여 농업 기술을 발전시켰다. 카르타고의 비옥한 땅은 로마의 매력을 끌게 되어, 가이우스 그락쿠스는 그 곳에 식민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케사르,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식민하여 속주 아프리카의 중심지가 되었다. 로마 총독은 아프리카의 곡물 교역을 지배하였으므로 황제에게는 위협이 되었으며, 종종 반란도 일어났다. 반달 왕국의 수도로서 1세기 이상 계속 되었으나,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장군 벨리사리우스의 공격을 받아 콜로니아 유스티니아나 카르타고가 되었다가, 698년 이슬람교도의 침입을 받아 도시는 파괴되고, 역사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포에니 전쟁(264~146 B.C)
이탈리아의 정복사업이 진행됨에 따라 로마의 상품이 동맹시 및 식민시에 판로를 얻어, 로마는 상업 도시로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때마침 일어난 남이탈리아의 정복은 로마의 역사에 중대한 의의를 가져 왔다. 그 하나는 헬레니즘 문화가 급속히 흘러 들어온 것이며, 다른 하나는 로마가 그리스인의 뒤를 이어 서지중해로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점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건너편 아프리카 북안에는 페니키아 인(로마인은 이를 Poem인이라 불렀다)의 식민지 카르타고가 있어 그리스 식민지의 몰락 후, 에스파니아,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시실리의 일부를 지배하여 이탈리아를 봉쇄하는 태세를 취하였다.
이에 따라 로마와 카르타고의 충돌이 불가피하게 되어 드디어 포에니 전쟁(Poemwar)이 시작되었다. 포에니 전쟁은 근 120년간 세 차례에 걸쳐 발발했다. 최초의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 시작되어 241년 로마의 승리로 끝이 났다. 이 무렵 로마는 아직 농업국이었기 때문에 경제력이나 해군력이 카르타고에 훨씬 미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강하게 결속된 시민군 덕택에 용병과 피정복민으로 편성된 카르타고 군을 무찌를 수 있었다. 이 전쟁에서의 승리로 로마는 막대한 배상금과 함께 시칠리아 섬을 수중에 넣었다.
제2차 전쟁은 기원전 218년에 일어났다 복수의 칼을 갈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은 보병 7만, 기병 1만 2천, 코끼리 37마리, 군선 30척을 이끌고 이탈리아 반도를 향해 진군을 시작했다. 에스파냐를 거쳐 피레네 산맥과 험준하기로 이름난 알프스를 넘는 대장정이었다. 피레네 산맥 기슭에 도달하는데만도 4개월이 걸렸다 험준한 산을 보고 기가 질린 병사들 중 상당수가 도망쳐 버리고 남은 것은 보병 5 만, 기병 9천뿐이었다. 악전고투 끝에 산맥을 넘은 한니발 군은 론 강을 단숨에 넘어 알프스로 향했다. 하얗게 눈 덮인 알프스를 넘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나 한니발은 과감하고 용의주도하게 알프스를 넘었으며 로마와의 첫 싸움에서 특유의 지략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듬해 벌어진 칸네 전투에서 8만의 로라 군은 전멸하다시피 했다. 위기에 처한 로마는 장군 스키피오로 하여금 카르타고 본국을 공격하게 했다. 본국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급보를 들은 한니발은 군사를 되돌려 급히 귀국, 자마에서 스키피오 군과 일대 회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니발의 작전이 먹혀들지 않았고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전쟁에 패한 카르타고는 로마에게 에스파냐를 비롯한 해외 식민지를 떼어주고 군함도 20척만 남기고 다 빼앗겼으며, 50년간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한니발은 로마 군에 쫓기다가 기원전 183 년 독약을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러나 로마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굴욕적인 강화 조건을 내걸어 결국 3차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전시가를 불태워 버렸다. 전쟁에서 자금을 대주었던 로마의 귀족들은 엄청나게 넓은 땅의 주인이 되었고 몰락하는 농민의 토지와 속주의 토지를 사들여 라티푼디움을 경영하고 전쟁에서 잡아온 포로들을 노예로 삼아 경작시켰다. 몰락한 소규모 농민들은 농토를 떠나 로마로 몰려들고 이로써 공화정의 기반은 근본적으로 무너져 갔다.
▶칸나에 싸움(Battle Cannae ;B.C. 216)
포에니 전쟁 중의 결전. 칸나에는 남 이탈리아의 고대 도시. 루키우스 파울루스와 가이우스 바로가 지휘하는 로마 군 8만 7천 명이, 한니발이지휘하는 기병 1만을 중핵으로 한 4만의 카르타고 군과 교전을 벌였다. 바로가 작전을 그르쳐 강을 앞에 낀 견고한 진지를 버리고 전군이 강을 건너, 넓은 벌판으로 진출한 틈을 타서, 한니발은 기병을 우회하여 도하시켜 측면으로부터 기습 포위하여 섬멸적 대타격을 가했다. 후세 전사상 포위 섬멸 작전의 대명사가 되었다.
▶한니발(Hannibal ;247-183 B.C.)
하밀카르 바르카의 장남으로, 아버지와 함께 에스파냐로 건너가서 로마에 대한 복수심을 고취받고, 26 세에 에스파냐 전군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B.C. 221). 그는 먼저 로마의 동맹시 사군툼을 공격하여 제2 포에니 전쟁을 일으킨 다음, B.C. 218년 에스파냐를 출발하여 알프스를 넘어 티키누스, 트레비아 강변 싸움에서 로마 군을 격파하였다. 트라시메누스 호반의 승리 (B.C. 217) 후 파비우스의 소극적인 전쟁으로 결전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칸나에 싸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결과 카푸아 등의 제 도시는 로마에서 이반하였는데, 로마는 굴하지 않고 군대를 재편성하여, 한니발 측의 보급 곤란을 이용하여 서서히 세력을 만회하였다 또한 로마 해군에 의한 마케도니아로부터의 원군저지, 로마에의 진군의 실패, 아우하스드루발의 메타우르스 강변에서의 전멸 등의 이유로 한니발은 궁지에 몰리었다. 그 사이에 로마의 장군 스키피오는 한니발의 아프리카 본거지를 공격, 자마 싸움에서 본국으로 소환된 한니발을 격파했다. (B.C. 202). 강화 후 시리아, 비티니아에 망명하였는데, 로마가 비티니아에게 그의 신병 인도를 요구하자 자살하였다.
▶라티푼디움과 공화정의 변질
로마는 기원전 3세기 지중해 진출을 위해 포에니 전쟁을 시작한 이래 해외 원정을 거듭하여, 2세기경에는 지중해 세계의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이들 정복지는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어 로마에서 파견되어온 총독에 의해 통치되었다. 이후 속주의 총독이 된 원로원 의원이나 징세 청부인, 그리고 해상 무역에 종사했던 상인들은 가혹한수탈로 거액의 부를 획득하였으며, 이러한 부의 축적은 수도 로마를 '벽돌의 도시'에서 '대리석의 도시'로 바꾸어 놓았다.
한편, 계속된 전쟁과 속주에서 들어오는 값싼 농산물로 인하여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중장 보병인 로마의 자영 농민들은 농토를 떠나 도시의 빈민으로 몰락하여 갔다. 대신 신흥 부유층들이 대부분의 미분배지(공유지)를 손에 넣고, 이웃의 토지나, 그 밖의 가난한 사람들의 얼마 안되는 땅을, 혹은 설득해서 사들이고, 혹은 불법으로 수탈하여, 토지라기보다는 대평원(라티푼디움)을 경작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대 토지의 경작을 위해 정복지에서 수입된 노예를 사 역하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유인으로서는 군인으로 징발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사정으로 유력자는 엄청난 치부를 하여 번영하였으며, 노예가 국토에 넘쳐흐르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빈곤과 과세와 종군에 시달려 그 수효가 감소되었다. 이로써 평민인 중장 보병을 기반으로 한 로마의 공화정은 그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라티푼디움은 라틴어의 'Latus(넓은)'와 'Fundus(토지)'의합성어로, 대토지 소유제를 의미한다. 이러한 경영이 상품으로서의 곡물 생산을 주로 하였는가, 아니면 자급자족을 위한 것인가는 학계의 논쟁이 되고 있다.
▶ 그락쿠스 형제의 개혁
로마는 대외 정복 전쟁으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고 막대한 공납으로 부유해졌다. 그러나 중소 농민들은 오랜 군복무로 영농을 계속할 수 없어 토지를 팔고 무산자가 되어 로마시로 흘러 들어왔다. 유력자들은 이들의 토지를 매점하고 공유지를 사유화하였으며, 여기에 전쟁에서 얻은 노예를 투입하여 노예제에 입각한 대 농장(라티푼디움)을 경영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빈부의 차이라는 사회적 문제만이 아니라 군대의 주력을 토지 소유 농민층에 의존하고 있던 로마로서는 군사력의 약화를 초래하는 것이었다.
기원전134년에 호민관 티베리우스 그락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전163~전132)는 토지법안을 민회에 제출했다. 공유지의 점유를 1000유게라로 제한하고, 규정 이상의 점유지를 국가에서 몰수하여 토지 없는 시민에 분배한다는 것이다. 군사력 강화를 위해서 중소 지주를육성할 필요는 지배층도 인정하고 있었으나 원로원을 거치지 않고 민회에 제안한, 그의 전통을 무시한 행위는 동료 호민관 옥타비우스(Octavius)의 거부권 발동을 초래했다. 티베리우스는 옥타비우스의 면직과 토지법을 민회에 걸어서 성립시켰으나 대농장의 소유자인 벌족파에 의해 암살되었다. 10년 후 호민관 가이우스 그락쿠스 (Caius Sempronlus Gracchus 전153~전121)가 형의 뜻을 이어받았다. 그는 값싼 곡물의 공급으로 무산 시민을, 그리고 속주아시아의 징세권으로 기사급의 사람들을 포섭하여, 기원전 122년 식민시 건설에 착수했다.
로마인 이탈리아인을 옛 카르타고에 입식시키는 안이 인정되어 가이우스는 그 준비를 위해 아프리카로 건너갔다 그 사이에 반대파인 호민관 드루수스가 유리한 대안을 제출하여 민회를 선동했다. 귀국한 가이우스는 B.C. 121년 벌족파에 쫓겨 티베르 강가에서 자살하였다. 그락쿠스 형제의 토지 분배는 그 나름의 효과가 있었으나 기원전 111년에 사실상 폐지되었다. 대토지 소유는 계속되고 정세는 불안정했다.
▶ 스파르타쿠스의 반란(B.C.73 - B.C.71)
로마 공화정 말기에 검투사였던 스파르타쿠스 주도하에 이탈리아의 카푸아에서 일어난 노예 반란 검투사는 글라디오토르(Gladiotor)였으므로 이 반란을 글라디오토르의 반란이라고도 부른다. 스파르타쿠스는 트라키아 출신으로, 중부 이탈리아의 카푸아 검노 양성소에 소속된 검투사였고, 용감하고 총명한 인격자였으므로 동료 검투사들의 신임이 두터워 B.C. 7,3년 70여명의 검투사들과 함께 검노 양성소를 탈출, 노예들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고, 로마 2개 군단을 격파하여 남 이탈리아를 석권하였다.
당시 이탈리아는 노예제의 최성기였으므로 노예제 대농업 경영의 보급으로 몰락한 농민들도 많았는데 반란이 일어나자, 트라키아 인 같리아 인. 켈트 인. 게르만 인 노예들과 다수의 무산자가 이에 합세하여 반란자의 수는 12만명으로 급증하였다. 스파르타쿠스 반란군은 로마 정부군을 또다시 격파한 후, 북 이탈리아 포 강 지역으로 진군하여 여기에서 갈리아출신 노예들을 귀향시키려 하였으나 이들이 응하지 않았으므로 방침을 고쳐 남진하여 세 번째로 로마 정부군을 격파하고 시칠리아로 건너가려 하였다. 그러나 해적 들과의 협상에 실패하여 바다를 건너지 못하고 B.C. 71년 남 이탈리아의 루카니아에서 크라수스가 이끈 로마정부군에 패하여 스파르타쿠스는 죽고 말았다. 북쪽으로 도망간 잔당도 폼페이우스에게 격파당하여 포로가 된 노예 6,000여명은 아피아 가도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처참하게 처형당했다. 스파르타쿠스는 이후 전설화해 훌륭한 신체와 용맹, 인간적인 따뜻함을 가진 전형적인 남성상이 됐다.
▶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이행
토지 개혁을 시도했던 그라쿠스의 연설은 중산 시민층의 몰락과 빈민화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있다. 키케로의 연설은 포에니 전쟁이후 대두한 신흥 지배층인 벌족과 기사들이 공화정 수호를 명분으로 토지 개혁에 반대했음을 보여 준다. 그라쿠스와 키케로의 입장이 대립하고 있을 때 군인 정치가가 등장하여, 몰락 농민과 빈민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추구하게 되었다. 결국 로마 공화정 붕괴와 제정출현의 근본적 원인은 자영 농민, 즉 중산 시민층의 몰락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 벌족파와 평민파
벌족파는 원로원의 유력자를 중심으로 한 보수적 집단이었으며, 평민파는 평민회를 중심으로 한 집단이었다. 전자가 원로원과 귀족들의 이익을 대변한데 반해, 후자는 평민의 이익을 대변했다.
'이탈리아를 배회하는 야수조차도 은거할 동굴과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거늘, 이탈리아를 위해서 싸우고, 이탈리아를 위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은 공기와 햇빛을 누릴 뿐, 집도 안식처도 없이, 처자를 이끌고 거리를 방황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의 장군이 병사들을 싸움터에 내몰고, 그들이 싸우는 것은 적으로부터 묘소와 사당을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외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집마다 대대로 내려오는 제단을 가진 자 없으며, 그들 가운데 단 한 사람도 조상이 고이 잠자는 묘소를 가진 자가 없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부귀와 사치를 위해서 싸우고 죽어 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세계의 정복자라 불리워진다 해도 그들은 한 줌의 흙덩이조차도 갖고 있지 못합니다. ' (티베리우스 그라쿠스의 연설)
'평민파임을 자처하면서 토지 점유자들을 내쫓기 위해 농지법들을 통과시키고자 하는 자들은 공화국의 주춧돌을 깎아 없애고 있다. 귀족은 기사의 지지를 바탕으로 공화국을 수호해야 한다. ' (키케로의 연설)
마리우스의 병제 개혁(B.C. 107)이후 로마의 군 지휘관은 징집된 병사들에게 무장을 지급하고, 전리품과 퇴역 상여금을 약속함으로써 군대를 사병화시켰다.
▶ 마리우스와 술라
기원전 146년, 카르타고가 로마의 속주로 되었을 때 그에 인접한 누미디아는 독립국으로 남아 있었다. 로마의 기사(상인) 계급은 누미디아의 풍부한 재물에 욕심을 내어, 기원전 111년에 누미디아와의 전쟁을 일으켰다.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는 로마의 장군을 매수하여 로마 군에게 오랫동안 저항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 민회가 가이우스 마리우스를 전쟁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자 상황은 급변하였다. 용감한 장군이었던 마리우스는 유구르타의 교섭에 응하지 않고 누미디아를 격파했다.
마리우스의 부관 술라가 유구르타를 생포함으로써 누미디아 토벌은 끝을 맺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마리우스는 민중들 가운데 매우 인기 높은 인물로 부상했다. 기원전 104년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마리우스는 군사 개혁을 단행하였다 마리우스는 지금까지 재산을 가진 자만을 군대에 입대시켰던 제도를 고쳐, 무산자도 군인이 되길 희망하면 군대에 입대시켰다. 이로 인해 군 복무 기간의 연장이 가능해졌고 군사 훈련도 보다 치밀하게 이루어져 전쟁 기술이 발전하게 되었다.
로마사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 마리우스의 군사 개혁으로 로마 군은 용병으로 충원되었으며, 또한 개인의 목적에 따라 군대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폰투스의 왕미트리다테스가 대병력을 모아 로마에 종속된 민족을 부추기며 반란을 일으켰다. 이제 노예주에게는 작금의 상황이 강력한 군사 독재자의 수중에 권력을 집중시키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인식되었다. 즉, 노예제 공화국의 구제도를 군인의 권력 체제로 바꾸고자 했다. 대 노예주와 귀 족들은 술라를 독재관과 총사령관의 후보자로 내세웠으나 중류 계급과 하층민은마리우스를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로마의 귀족당과 민주당 사이에는 격렬한 투쟁이 벌어지게 되었고 양파는 각기 자기들이 내세운 후보자를 당선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귀족당은 술라를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의 토벌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술라가 미트리다테스의 토벌에 나서자마자 마리우스의 지지자들이 로마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술라는 로마를 출발하며 마리우스를 쫓아내기 위해 마트리다테스와의 전쟁을 서둘러 끝마쳤다. 미트리다테스와의 강화를 체결한 후 술라는 4만의 대군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돌아왔으나 마리우스는 로마의 성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러나 격렬한 싸움 끝에 다음 해인 기원전 82년 술라가 로마를 점령하여 군사 독재를 시작하였다. 술라는 자기에게 반대하였던 마리우스 파의 명단을 작성하여 그 명단에 기재된 자는 보는 대로 죽여도 좋다는 명령을 내렸다. 더욱이 살해된 자의재산 일부를 살해한 자가 가질 수 있게 함으로써 이탈리아 전역에서 암살과 밀고 그리고 재산 몰수가 횡행하였다.
술라는 5개월의 임기에 한정된 독재관을 종신 독재관으로 바꾸고 자기가 그 자리에 취임하였다 이렇게 하여 민주 제도는 폐지되고 군사 독재 체제가 수립되었다. 호민관의 지위는 땅에 떨어지고 민회의 권리도 축소되었다. 원로원을 600명으로 늘려 술라의 지지자들로 충당했고 재판권도 원로원으로 되돌려졌다. 술라는 로마 공화국의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고 모든 노예주에게 힘을 합해 하층민의 혁명 운동에 맞서 싸울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종전의 공화제를 지지하는 사람의 반항 때문에 술라의 정책은 철저하게 수행되지 못했다. 게다가 그는 중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어 기원전 79년에 스스로 독재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다음 해 (기원전 78년)에 술라가 죽자 군사 독재권을 둘러싼 쟁탈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제 1차 삼두 정치(Triumviri):
B.C. 60년 케사르, 폼페이우스, 크랏수스의 사이에 맺어진 사적 맹약으로 이 3인은 국정을 독점할 목적으로, 크랏수스 및 폼페이우스는 B.C. 60년의 집정관이 되고, 퇴직 후 폼페이우스는 에스파냐, 크랏수스는 시리아를 5년 동안 지배할 ., 케사르는 B.C. S9년의 집정관이 되고, 퇴직 후 갈리아 키살피나 및 일리리쿰을 지배할 것을 약정하였다. B.C. S4년 케사르의 딸로서 폼페이우스의 처가 된 율리아가 죽고, B.C. S3년 크랏수스가 동방에서 전사하자, 맹약은 해소되고 폼페이우스와 케사르가 대립하였는데, 폼페이우스가 패하고 케사르에게 전권이 주어지게 된다.
▶ 크랏수스(Crassus, Marcus Licinius ;112-53 B.C.)
로마 공화정 말기의 군인 정치가로 제1차 3두 정치 때의 한 사람이다. B.C. 82년의 내란 당시 술라의 편을 들어 마리우스 파의몰수 재산으로 거부가 되었으며, 로마 실업계의 지도자가 되었다. B.C. 70년 스파르타쿠스의 난을 진압하여 무공을 떨쳤고, B.C. 71년 콘술이 된 후는 술라의 정치 체제에 대한 기사 신분들의 불만을 배경으로 하여 폼페이우스와 제휴, 원로원에 대항하여 술라 체제를 타파하였다 폼페이우수의 동방 원정 중 평민파의 지도자 케사르와 결탁하고, B.C. 60년 제 1차 삼두정치를 하였다. 파르티아 원정군의 지휘권을 장악, B.C. S4년 메소포타미아에 침입하고, 다음 해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순조로운 원정을 하다가, 카라에에서 패전하고 사망하였다.
▶ 율리우스 카이사르
케사르가 태어난 율리우스 가문은 오랜 귀족이었으나 그의 백모가 마리우스의 아내였기 때문에 민중파의 한 사람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선거나 인기 영합을 위해 아낌없이 돈을 뿌려 막대한 빛을 지게 되었다 종신적인 대신관 외에 법무관, 에스파냐총독을 거쳐 집정관이 되었고, 폼페이우스, 크랏수스와 함께 삼두 정치를 시행했다 1년간의 집정관 임기가 끝나자 기원전 58년부터 5년간 「알프스 이남의 갈리 아」와 이리리쿰의 지사가 되는 것을 민회에서 승인 받았다.
그는 또한 삼두 정치의 성립 후 첫 아내 코르넬리아와의사이에 낳은 딸 율리아를 30살이나 연상인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켜 뒤를 걱정할 염려 없이 갈리아에 부임하였다. 3인의 실력자가 로마 정치의 대강을 정해버리자 벌족파가 지배하는 원로원도 입을 열 수 없었다. 기원전 55년 케사르는 라인 강을 건너 침입해 온 게르만 인을 격멸하고 나아가 다음해 브리튼 섬(영국)까지 건너가 로마의 장군 중에서 라인 강을 건너고 브리튼 섬을 건너간 최초의 사람이 되었다.
9년에 걸친 케사르의 갈리아 정복은 완전히 목적을 달성했다. 갈리아인의 1/3은 싸움터에서 쓰러졌고 1/3은 포로나 노예가 되었다. 케사르는 전리품과 과세에 의하여 막대한 자신의 빛을 죄다 청산했을 뿐 아니라 이후의 정치 활동과 자신의 사병(클리엔테라)을 기르기 위한 풍부한 자금을 축적했다. 케사르가 갈리아에서 정복 전쟁에 종군하호 있는 사이에 삼두 정치의 균형이 무너졌다. 기원전 54 년 케사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 다음해 53년에는 크랏수스의 죽음이 알려졌다.
기원전 51년 이후 로마의 정계는 케사르의 처우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케사르는 로마에 귀환하여 성대 한 개선식을 행하고 다시 집정관에 입후보하여 당선되기를 바랐다. 그런데 개선식을 행하려면 군대의 지휘권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고, 집정관에 입후보하려면 관직에서 사퇴하고 한 사람의 사인이 되어야만 했으므로 이 두 가지는 양립할 수 없었다. 케사르는 로마로 귀환하지 않고 군대를 통솔한 채 다음 해의 집정관에 입후보할 수 있도록 요구했다. 마침내 기원전 49년 1월 원로원 회의에서 「케사르는 정해진 날까지 군의 지휘권을 내놓지 않으면 국가의 공적으로 간주 한다」 는 폼페이우스의 장인 스키피오의 제안이 압도적다수로 가결되었다.
케사르는 이제 행동할 때가 왔음을 절감하고 휘하의 관대를 이끌고 루비콘(Rublcon) 강가에 도착했다. 이 강은 케사르가 군 지휘권을 가진 갈리아와 이탈리아 본국 사이의 경계를 이루고 있어서 관대를 이끌고 이 강을 건너면 국법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잠시 동안 케사르는 맞은 편을 쏘아보다 마침내 결심을 하고 진군 나팔을 불게 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라는 그리스의 희극 작가 메난드로스의 대사를 읊으면서 그가 루비콘 강으로 말을 몰고 들어가자 전군도 그를 따라서 일제히 강을 건넜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그의 나이 51세 때의 일이다 이탈리아를 평정한 케사르는 그해 연말에 독재관에, 다음 48년에는 집정관에 선발되어 합법성을 취득했다.
패주한 폼페이우스는 예전에 그가 은혜를 베풀었던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Ptolemaios) 왕조에 보호를 요청했으나 이집트쪽 에서는 로마의 내전에 말려드는 것을 두려워하여 폼페이우스가 상륙하자마자 살해해 버렸다. 케사르가 폼페이우스를 쫓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했을 때에는 폼페이우스가 이미 암살당한 뒤였다. 그 무렵 이집트에서는 13살의 프톨레마이오스 13세가 이 나라의 관례대로 누나인 클레오파트라(Kleopatra)와 결혼하여 공동으로 통치하고 있었는데, 불화로 말미암아 서로 다투고 있었다. 재식을 겸비하여 남자가 좋아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던 클레오파트라는 케사르에게 도움을 청했다. 케사르는 클레오파트라의 매력에 사로 잡혀 알렉산드리아 시민을 상대로 싸우는 처지가 되었다.
케사르는 그 후 2개월 이상이나 이집트에 머물며 클레오파트라와 함께 나일 강을 거슬러 올라가 이디오피아 국경까지 갔다. 그것은 곧 신혼여행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집트를 평정한 케사르는 동방에 진출하여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 파르나케스를 향해 나아가 론토스 서부의 제라에서 단 네 시간의 전투로 이들을 격멸시켰다. 이 소식을 케사르가 로마에 있는 자신의 벗 한 사람에게 써서 보낸 것이 유명한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라는 단 세 마디로 무장다운 간결 명료한 표현이었다. 그가 장군이고 정치가인 동시에 일류의 문장가였다는 것은 그가 쓴 <갈리아 전기)에 의해서도 증명된다. 이 책은 자신의 업적을 서술함에 있어 「나는」 이라는 1인칭을 쓰지 않고 「케사르는」 이란 3인칭을 써서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서술하고 억지로 내세우는 방법을 쓰지 않아 자신의 공적을 정확하게 명기하고 있다.
케사르는 아프리카에서 개선한 후 여러 가지 개혁에 착수했다. 우선 로마의 역법을 이집트에서 불러온 천문학자의 의견에 따라서 개정했다. 즉, 기원 전 45년1월 1일부터 새로운 태양력을 채용하고 1년을 365일과 1/4로 하여 4년마다 2월에 하루의 윤날을 두었다. 다음으로 이제까지 팽창했던 곡물의 무료 수급자를 정리하여 32만 명에서 IS만 명으로 대폭 줄였다. 그리고 로마 시민권이나 라틴 시민권을 속주민에게 확대하여 실시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도시 국가 로마를 넓은 영토 국가 로마로 재편시켰던 것이다.
▶ 운명의 날
3월 15일 기원전 44년이 되자 케사르에게는 더욱 새로운 영예가 덧붙여졌다. 그의 조상을 로마를 비롯한 전 제국의 신전에 배치하는 것, 케사르가 태어난 달인 귄크티리스를 그의 씨족명 율리우스로 개칭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이는 줄라이(JUly)로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이리하여 공화정의 전통을 지키려는 사람들은 독재자 케사르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케사르는 크랏수스를 패배시킨 파르티아 토벌을 위한 출정 준비를 갖추고, 로마 출발 3일 전인 기원전 44년 3월 IS일에 원로원을 소집하기로 결정했다. 3월 14일 밤, 그의 부인은 갈기갈기 찢어진 케사르를 껴안고 있던 꿈 이야기를 하며 윈로원의 회의를 연기하도록 간청하고, 점장이 신관도 점괘가 불길하다며 회의를 연기하도록 권고했으나, 케사르는 이를 무시했다 원로원으로 가는 도중 암살 음모를 알리는 내용의 편지를 전달 받았으나 그가 그것을 읽으려 할 때 누군가 말을 시키는 바람에 종이를 든 채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다가 전날 '3월 15일을 조심하시오' 라고 외치던 신관을 만나 케사르는 그에게 '3월 15일인데 나는 무사하지 않소' 하자 점장이는 '아직 3월 15일이 지난 것은 아닙니다' 라고 했다.
케사르가 원로원에 들어서자 원로원의 의사당에는 음모파 중의 한사람이 기다리고 있다가 죄를 범해 해외로 추방된 형의 사면을 청원했다. 케사르가 이를 거절하자 그 남자는 케사르의 옷을 잡고 늘어졌다. 이것을 신호로 하여 각기 단검을 치 켜든40여 명의 도당이 일제히 케사르를 덮쳤다. 케사르는 몸을 돌려 칼날을 피하면서 단 한 자루의 芴을 무기로 삼아 용감하게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가 사랑을 기울여 돌보아온 마르쿠스 브루투스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보고 「브루투스여, 그대마저도!」 라고 한탄하면서 머리에서부터 옷을 뒤집어쓰고 저항을 포기했다.
쏟아지는 칼날에 찔려 전신에 스물 세 군데의 상처를 입고 그는 폼페이우스의 입상 앞 바닥을 피로 물들이면서 쓰러졌다. 케사르는 쓰러졌으나 음모파 사람들이 의도한 원로원의 권위와 공화정의 부활은 실현되지 않았다. 암살 다음날 브루투스 일파는 중앙 광장에서 전날의 행동에 대한 변명 연설을 했는데, 민중은분노도 칭찬도 보이지 않고 침묵을 지켜 케사르에게 애도의 뜻을 표명함과 동시에 브루투스를 외경하는 태도를 보였다. 음모파와 케사르파 사이에 즉석의 타협이 성립했다. 키케로의 제안으로 원로원은 암살자들에 대 대 사면령을 내렸다. 동시에 케사르를 신으로서 존중하고그 가 통치 중에 정한 일은 변경하지 않기로 했으며 공식 장례의 거행과 유언의 발표도 인정되었다.
3월 20일의 장례 때 안토니우스는 추도 연설을 했다. 그리고 로마 시민에게 한 사람당 3백세스테르케스(약 2개월 반의 임금에 해당)를 증여한 케사르의 유언을 공포했다. 뒤이어 케사르의 피투성이 겉옷이 보여지자 민중의 태도가 급변하였다. 민중은 암살자들에 대해 분격하여 케사르의 유체를 화장한 장작불을 횃불 삼아 암살자들의 집을 습격했다. 케사르의 누이의 손자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가 케사르의 유언에 따라 양자에 지명되고 가이우스 율리우스 케사르 옥타비아누스라고 개명했다.
▶부르투스의 웅변(세익스피어 작 줄리우스 시저)
나는 케사르를 사랑하였노라. 그러나 케사르보다도 로마를 더 사랑하였노라. 나는 찢어지는 가슴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그의 가슴을 찔렀도다. 왜냐하면 그 길만이 로마를 지키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 안토니우스의 웅변(세익스피어작 줄리우스 시저)
그때 안토니우스의 외침이 나왔다. 그는 케사르의 신임을 받는 부하로 부르투스와도 친구였다 그대들이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로 조금 전까지도 살아 숨쉬던 케사르가 흘린 피다. 케사르는 왜 죽어야만했는가? 로마는 과연 위대한 영웅을 죽여야 할 만큼 비겁해졌는가? 법과 질서를 사랑 하는 로마의 자존심은 어디로 갔는가? 보라 로마의 시민들이여, 그들은 자유와 공화정의 수호를 내세우고 스스로 해방자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의 세 치 혀와 케사르를 찌른 칼을 든 그 몸과 심장에는 무엇이 자리잡고 있는가? 야심이다. 권력을 잡으려는 검고 더러운 야심으로 가득 차 있다. 로마시민들이여, 저들은 해방자도 애국자도 아닌 로마의 영웅을 비겁하게 죽인 암살자들 일뿐이다. 안토니우스의 뜨거운 연설에 로마 시민들은 단번에 흥분하여 암살자를 처단하라는 함성과 함께 결국 부르투스 일당은 로마를 벗어나 도망 갈 수밖에 없었다.
▶ 율리우스 달력
로마에서는 예로부터 태음력이 사용되어 1년은 10개월이고 겨울은 없었다. 나중에 12개월이 되어 큰 달(31)이 네 번, 작은 달(29일)이 일곱 번, 28일인 달이 한 번 있었고, 1년은 355일이었다. 그 때문에 가끔 22일, 23일로 된 달이 삽입됐다. 1년의 시작은 대체로 지금의 3월에 해당하는 마르티우스 달이었다. 이러한 역법이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 무렴에는 태양력과 약 3개월이나 차이가 났다. 그리하여 그는 기원전 46년에 태양력을 채택해 로마 역법을 바꾸고 1년을 365일로 했다. 카이사르의 이름 율리우스(Julius)를 취해 이 역법은 '율리우스 력' 이라 일컬어진다. 1582년 교황 그레고리 13세가 이를 다시 고쳐서 지금 통용되는 '그레고리 력' 이 됐다.
▶ 제 2차 삼두정치
기원전 43년 11월말 북이탈리아의 보노이아(지금의 포로니아)에서 호민관 티티우스의 제안에 의해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가 회담하여 제2차 삼두정치가 성립됐다. 3인은 권력 지배를 합법화 하여 5개년간의 독재적 권력을 얻어 일체의 반대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3백 명의 원로원 의원과 2천 명의 기사 계급에 있는 자들을 살해했다. 또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는 필립피 싸움에서 브루투스와 캇시우스의 공화파의군대를 격파하였다. 그 뒤 3인의 세력 쟁탈이 일어나 브룬디시움(B.C. 40), 타렌툼 (B.C. 37)에서 3자가 회담하여 협약을 갱신하였으나 레피두스가 탈락하고,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가 대립하여 B.C. 31년 악티움 해전 결과 옥타비아누스가 단독 지배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 레피두스(Lepidus, Marcus Aemilius ;B.C. 90?-A.D. 13)
로마의 정치가로 시민 담당법무관(B.C. 49), 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의 총독(B.C. 48), 집정관(B.C. 46), 케사르의 기병장관을 역임하였으며, 케사르가 암살되자(B.C. 44) 안토니우스를 지지하고, B.C. 43년 옥타비아누스와 더불어 제2차 삼두 정치에 참여하였으며, B.C 42년 집정관으로서 이탈리아를 관리하였다. 필립피 싸움 이후 아프리카의 지배권을 얻고, B.C. 36년 폼페이우스와의 싸움에서시칠리아를 얻으려다 옥타비아누스와 대립하였다. 그 후 삼두 정치에서 제외되어 군대 속주의 지배권을 빼앗겼으나, 죽을 때 까지 대신관의 직위를 보유하였다.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우스는 동방의 속주에 세력 기반을 굳히고 있었는데, 여기서 클레오파트라와의 관계가 생겼다. 클레오파트라는 전에 케사르의 사랑을 받아 두 사람 사이에 낳은 아들 케사리온과 명목상의 이집트 왕이 되어 있던 막내 동생 프롤레마이오스 14세를 데리고 로마에 왔는데 케사르가 암살당하자 급히 이집트로 돌아갔다. 그리고 막내 동생을 죽이고 케사리온을 왕으로 삼아 천하의 형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기원전 34년에 그는 클레오파트라에게 로마 동방 속주의 중요한 부분을 주었는데 이것으로 로마인에 대한 그의 배반행위가 명백해졌다. 기원전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선전을 포고했으나 그것은 형식상 클레오파 트라에게만 향한 것이었다. 옥타이아누스 대(펴) 클레오파트라 ․ 안토니우스는 9월 2일 그리스 서북안의 악티움의 해전에서 천하의 패권을 다투었는데 승패는 어이없이 쉽게 결판이 났다. 다음해 옥타비아누스가 알렉산드리아에 가까이 왔을 때 안토니우스는 자살했다.
클레오파트라는 다시 한 번 옥타비아누스의 환심을 사려했으나 냉정한 그는 흔들리지 않았고, 그녀를 포로로 잡아 로마의 개선 행렬에 끌고 가겠다는 결심을 알려 주었다. 그렇지만 긍지 높은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클레오파트라는 살아서 포박 당하는 치욕을 받을 수 없다하여 무화과 바구니 속에 숨겨져 있던 독사에게 손을 물게 하여 자결했다. 이리하여 헬레니즘 동방국가 중 마지막 남은 이집트도 멸망하여 로마는 지중해 세계의 통일을 완성했다.
▶악티움 해전(Battle of Actium ,B.C.31)
로마에서 제2회 3두 정치가 붕괴된 후 B.C.31년에 동방 헬레니즘을 대표하는 안토니우스와 서방 로마의 전통을 대표하는 옥타비아누스사이에 벌어진 해전. 안토니우스는 200척이 넘는 대형선을, 클레오파트라는 60척의 요조선을 거느린 데 대하여 옥타비아누스는 기동력이 있는 소형선을 이끌고 싸웠다. 옥타비아누스 측의 선대가 클레오파트라의 선대의 측면에 기습 공격을 가하여 패퇴시키니 안토니우스의 본대는 혼란에 빠져 클레오파트라의 뒤를 따라 이집트로 패주하였다. 그들의 남은 병선 300척은 불태워지고, 5천의 해병이 손실되었으며, 또 잇따른 육전에서도 이집트 군은 모조리 패배, 항복하였다. B.C. 31년 9월,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로마 세계의 지배권을 장악하였다. 후년에 아우구스투스는 이 땅에 아폴론 신전을 건립하고 니코폴리스(승리의 여신의 도시)를 창건하여 전승을 기념하였다.
▶ 아우구스투스의 원수정
용의주도한 아우구스투스는 공공연히 절대 군주임을 자처하지 않았다. 케사르의 죽음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애써 공화제의 형식을 지키고자 했다. 공화제의권력 기관 (원로원, 민회, 민선 관리)은 그대로 존속되고 옛 풍속과 관습도 부활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케사르와 마찬가지로 공화제의 중요한 직책은 혼자 다 거머쥐었다. 그는 최고사령관(임페라토희)으로서 모든 군직의 임명, 군대 모집, 선전포고, 강화 체결 등의 권리를 가졌으며 북부 에스파니아, 갈리아, 시리아, 이집트 등 중요한 속주의 통치권도 장악하였다.
그 외에도 그는 호민관, 집정관, 치고 신관, 감찰관 등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 체제는 원수 정치 즉, 국가의 제 1 인자 프린켑스의 통치라고 말해진다. 이것은 공화제의 허울을 쓴 군주제이며 공화제의 형식을 빈 독재 권력이었다. 아우구스투스는 민중의 불만을 가라앉히는 수단으로 생활 보조금의 지급과 민중 오락의 보급을 중시 하였다. 로마의 빈민 20만 내지 30만명이 곡물이나 돈을 생활 보조금으로 받았다. 아우구스투스는 또 때 때로 검투사의 시합을 개최하여 민중에게 소일거리를 제공하였다. 어떤 경우에는 1만여 명의 사람과 3 천 5백 마리의 맹수들이 함께 겨루는 시합도 개최되었다. 심지어다이바 강변에서는 3만여 명의 사람이 30척의 대형 함대와 수많은 소형 선박에 각기 분승하여 일대 해전을 벌이는 구경거리도 있었다.
▶ 로마의 중장보병과 도로 건설
로마 군의 주축은 평민이었다. 이들은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전쟁이 터지면 병사가 되어 전선에 나갔다. 이들은 무장을 모두 자비로 충당했는데, 긴 창과 양날 단검, 갑옷에 방패를 들고 무기를 자기 몸의 일부처럼 다루며 용감하게 싸웠다. 그 중에는 공병도 있었다. 공병의 임무는 점령지와 로마를 잇는 도로를 건설하는 일이었다. 이들이 만든 도로는 실로 견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게다가 로마인들은 「도로는 일직선이어야 한다」 고 생각했기 때문에 높은 산에 굴을 뚫고, 골짜기에 다리를 놓는 난공사를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건설된 도로의 총 길이는 8만 5천km, 그 숫자는 372개에 달했다.「팍스 로마나」 는 점령지와 로마를 연결하는 도로의 발달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 네로 황제(54 - 68)
네로 황제는 17세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권력욕이 강한 어머니로 인해 깊은 마음의 상처를 입고 있었다. 네로는 명배우를 자처하며 여러 번 직접 무대에서 연기를 하였다. 황제 배우에게서 별 감동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박수치는 일도 곤욕스러운 것이었다. 네로의 치세 동안 사회 불안이 더욱 가중되었다. 이러한 불만을 더욱 가중시킨 것은 6일 간이나 계속된 로마의 대화재였다. 이로 인해 로마 시의 14개 구 가운데 온전하게 남은 것은 4개 구에 불과했고 3개 구는 완전 소실, 7개구는 그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네로가 옛 로마를 불태우고 그 잿더미 위에 다시 화려한 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로마 시에 불을 지르라고 명령했다는 소문이 로마 전역에 퍼졌다. 네로는 동생에게 황제의 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살해했고, 권세욕이 강한 어머니가 귀찮다는 이유로 죽였다. 그는 또한 젊은 날의 스승이었던 세네카도 반역을 음모했다는 혐의로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들었다. 한편 그는 급료를 인상하고 구경거리를 자주 제공하여 친위대와 도시 빈민의 환심을 사기도 했다. 로마의 속주에서 제일 먼저 네로의 폭정에 항거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최초로 갈리아가 반기를 들고 그 뒤를 이어 에스파냐가 그에 합류했다. 이 때 로마에서는 친위대가 반란을 일으키고 원로원은 네로를 <조국의 적>으로 선언함으로써 긍지에 몰린 네로는 로마로부터 도망치다가 도중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68년)
▶ 로마의 평화(5현제시대)
아우구스투스 이래 로마의 역대 황제들은 대부분 평온한 죽음을 맞지 못했다. 음욕으로 이름 높았던 칼리굴라, 그 뒤를 이은 클라우디우스는 모두 암살당했고, 네로는 자기 어머니를 죽였으며 자신도 자살하고 말았다. 폭군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한 후 원로원은 원로원 의원 출신인 네르바를 즉위케 했는데, 그는 지금까지의 세습제를 바꾸어 게르마니아 총독 트라야누스를 양자로 지명했다. 이때부터 가장 유능한 인물을 양자로 맞아 제위를 계승케 하는 관례가 이어져 연달아 다섯 명의 현명한 황제가 등장, 로마는 최고의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이때를 5현제 시대라고 한다. 트라야누스는 활발한 정복사업으로 로마 제국 최대의 판도를 이룩하였으며, 그의 뒤를 이은 하드리아누스는 치세의 절반을 속주 시찰 여행으로 보냈다. 그는 트라야누스가 이룬 판도를 유지하는데 힘을 기울였다
안토니우스는 근검절약하고 공정한 재판을 행해 원로원으로부터 피우스, 즉 「경건한자」 라는 칭호를 받았다. 그는 두 명의 양자를 지명하여 로마 제정 이래 처음으로 두 사람의 황제가 공동 통치하는 전례를 만들었다. 그 중 하나인 루키우스 베루스가 재위 8년만에 죽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단독 집권했는데, 그는 외적의 침입을 막아내어 로마 제국의 판도를 유지하는 한편 (명상록) 을 집필한 스토아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관례를 깨고 친자식인 코모두스에게 제위를 물려주었다. 그는 아버지와 달리 무능하고 타락한 정치를 펴다가 근위 사령관과 애첩의 공모로 욕실에서 살해되고 말았다.
5현제 시대에 로마 제국의 판도는 최대를 이루었다.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팍스 로마나」 ,곧 로마의 평화가 유지되었다 로마를 중심으로 포장도로가 사방팔방으로 만들어져 식민지의 물자들이 활발히 이동되었다. 그야말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했다. 군사 제도는 용병제로 바뀌었으며, 이때는 100킬로나 떨어진 곳에서 수도관으로 늘 깨끗한 물을 썼고, 대형목욕탕을 운영했고, 분수도 만들었다. 로마는 놀고먹기를 즐겨 1년에 150일 정도가 공휴일, 거기에 100일은 늘 행사나 축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로마의 축제일에는 각종 경기와 흥행이 벌어졌다.
거대한 원형 경기장(콜로세움)에서는 5만 명 이상의 관객이 환호하는 가운데 노예검투사와 굶주린 맹수, 혹은 검투사와 검투사 간의 혈투가 펼쳐졌다. 이보다 더 큰 대경기장에서는 26만 명의 관객이 운집한 가운데 좁은 트랙을 달리는 요란한 전차 경주가 열리곤 하였는데, 엄청난 인파로 인하여 깔려 죽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잔혹한 흥행은 모두 정부가 주최하였다. 그 목적은 대부분 몰락한 농민 출신인 로마의 빈민들을 이러한 흥행에 몰두하게 하여, 그들의 관심이 현실의 정치, 경제적 문제에 쏠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의 불평불만은 곧장 정부를 향해서 날아가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당시의 로마의 빈민들은 오직 두 가지 일 외에는 관심을 갖지 않게 되었으니 그 하나가 바로 투기 시합이었고, 다른 하나는 정부가 무료로 배급해 주는 빵이었다.
'빵과 흥행' 그것은 로마의 골치 아픈 빈민들을 통치하기에 더 없이 좋은 정책이었다. 찬란한 「로마의 평화」 의 그늘에는 수많은 노예들, 그리고 식민지 주민들의 희생이 숨어 있었다. 로마 시민에게 빵과 서커스, 원형극장에서 펼쳐지는 검투 경기가 무료로 베풀어지는 동안 밀가루 생산지였던 이집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다.
▶ 콜롯세움(Colosseum)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 저택을 파괴한 자리에 만든 원형 경기장 옆에 네로의 거상이 있었으므로, 중세 말기에 콜롯세움이라 일컫게 되었다. 지름이 188~156m, 높이 48.56m 이며 좌석 수는 약 5만으로, 완성된 것은 A.D. 80년이었다. 완성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 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검투사의 경기, 맹수와의 싸움이 즐겨 행해졌으나, 전자는 400년경에 금지되고, 후자는 6세기 테오도리크 대왕 때까지 계속되었다. 제정 초기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에는 많은 신도가 이 콜롯세움에서 야수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다.
▶ 공공 목욕장(Thermae)
로마 시대의 오락 시설의 하나로 그리스어 therme(따뜻함, 온천)또는 thermos(따뜻함)에서 나온 말, 어원이 나타내듯이 로마 사람들은 공공 욕장의 풍습을 그리스 사람에게서 배웠다. 카라칼라 욕장이나 디오클레티아누스 욕장의 거대한 규모는 지금도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이들 욕장은 수 천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었고, 목욕 값은 저렴하여 서민들도 매일 목욕할 수 있었다. 목욕물을 데우는 방법은, B.C. 80년 세르기우스 오라타가 발명한 증기 난방 설비를 응용하였으며, 중앙에 있는 솥에서 물을 데워 이를 욕조로 끌어들였다. 또한 남녀 혼욕장 뿐 아니라, 욕장 내에서 산책할 수 있는 정원과 무도 ․ 강연 등을 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었다. 이 목욕 풍속은 민족 이동 후에까지 남았으며, 중세에는 혼욕도 행해졌다. 교회는 이를 반대하고, 1500년 시아그리우스의 운동이 주효하여 공공욕장은 폐 쇄 되었다.
▶ 아우렐리우스(Aurelius Marcus. Marcus Aurelius Aantoninus ,121~180)
로마 5현제의 한 사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사랑을 받고 수사학 ․ 문법 ․ 철학 ․ 법학 등을 교육받았다. 138년 루키우스 베루스와 함께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의 양자가 되고, 그의 후계자로 결정되었다. 146/7년 코르넬리우스 프론토로부터 스토아 철학을 배웠다. 스토아적인 윤리적 엄격성에다가 로마적 순박성을 지녔으며, 또한 교양과 학문을 사랑했다. 바쁜 정치 생활과 전쟁 속에서도 틈을 내어 '명상록' 을 기술하였다 162~165년 메소포타미아의 파르티아 인을 토벌하고, 166~175년 및 177~180년에 보히미아, 오스트리아에 살던 마르코만니 족, 쿠아디족, 야치게스 족 등과 싸웠는데, 그 전황은 오늘날 남아 있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기념조각에서 엿볼 수 있다. 그의 저서 '명상록' 은 그리스어로 쓰여 졌으며, 독창적은 아니나 스토아 철인으로서의 그의 고결한 사상이 담겨 있다.
▶ 군인 황제 시대(Soldier Emperors, Barrack Emperors: 235~285)
로마 제정 말기 군대가 황제를 마음대로 옹립하고 폐위시킨 내란의 시대. 3세기 전반, 문약한 황제 세베루스가 235년 라인 강 유역의 게르만인 토벌 중 그의 병사의 손에 암살된 후,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에 의해 강력한 전제 군주정이 수립될 때까지, 각지의 군대는 각자의 사령관을 황제로 옹립하여 상호 항쟁하였다. 이미 2세기말 콤모두스 황제 시절, 문약에 흐르고 향락에 빠졌기 때문에 병사의 규율이 문란해져서 무력으로 원로원을 누르고 황제를 좌우하였다.
이러한 중앙의 난맥상이 지방으로 전파되어 시리아, 다뉴브 강 지방, 브리타니아의 주둔병은 각각 자기네의 지휘자를 황제로 옹립하려고 하였다 셉티 미우스 세베루스에 의해 질서가 회복된 후 카라칼라,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를 무사히 보냈으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암살 후엔 재차 질서가 문란해져 황제는 각지의 군대에 의해 자의로 옹립되었다. 이 반세기 동안에 18명의 황제(공동 통치를 합하면 26명)가 통치하였으며, 그 중 자기 수명을 다한 자는 불과 2명 뿐 이 다
▶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230~316년)
달마티아(일리리아 지방)의 디오클레아 태생으로 해방 노예의 아들로서 일개 사병에서 결국 누메리아 누스 황제의 친위 대장이 됐다. 누메리아누스가 암살되자 군의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됐다(284년). 동료 막시미아누스(Maximianus)를 부황제(Caesar)로 삼고 갈리아의 바가우다이인의 반란을 진정시켰다(285년). 그 공으로 막시미아누스를 황제(아우구스투스)가 되게 해 제국의 서부를 통치케 하고, 디오클레티아누스 자신은 동부의 황제가 됐다(293년). 황제 밑에는 각각 부황제를 두어 제국의 사분 통치가 시작됐다. 각각의 부황제가 결국 제위를 잇는 것으로 되어 있었는데, 후계자를 정해 군인 황제 시대와 같은 혼란이 재발하지 않도록 고안된 제도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지금까지의 '원수정'(프린켑스)을 '전제 군 정'(도미나투스)으로 바꾸어 로마는 명실공히 제정이 됐다. 그는 동양의 전제 군주적인 의례를 채택하고 황제에 대한 예배를 성대하게 해 황제의 위엄을 높이려고 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257년) 이래 탄압이 일시 중지되고 있는 사이에 기독교 교도의 반국가적인 태도가 빠르게 증가했다 이들이 그의 심기를 건드려 303년에서 305년 사이에 걸쳐 교회 폐쇄, 성서 파기, 이교도의 희생의례 강행 등을 명령하는 칙령이 가끔 나오는 등 기독교 교도에 대한 박해를 했다 이는 마지막 대 박해였다.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병에 걸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 달마티아의 살론나이로 돌아갔다 막시미아누스도 함께 퇴위해 부황제들이 황제가 되었다.
▶ 콘스탄티누스 1세(Constantinus I; 274경-337)
로마 황제(재위 324~337년)로 '콘스탄티누스 대제' 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황제이며 여관집 주부였던 헬레나와의 사이에 난 아들이다. 아버지가 죽은 뒤 황제를 칭하며 다투는 자가 6명이나 있었다. 그 한 사람인 막센티우스와 312년 로마의 북방 밀비우스 다리 부근에서 싸울 때 공중에서 빛과 십자가와 '여기서 이기리라' 는 문자가 나타났는데 그때 그는 '그렇다. 저건 분명 기독교의 신이 나를 도우려고 한다' 고 생각하고 곧 군사들로 하여금 십자가를 만들게 한 후 싸움터에 나가 승리를 거두었다고 한다.
308년 리키니우스가 동부 제국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누이 콘스탄티아를 아내로 삼고 콘스탄티누스와 손잡고 있었다. 론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313년 기독교 박해를 중지하는 협정을 맺고 연명으로'종교 관용령' 을 발표했다. 이것이 밀라노 칙령(Edict of Milan)이다. 이것은 크리스트교의 신앙과 교단 결성의 자유를 인정하고, 교도의 복권, 몰수 재산의 반환 을 규정하는 등 다른 종교와 평등한 대우를 보장하여 교회 발전의 길을 터놓은 획기적인 문서로 콘스탄티누스는 이를 실행하였으나 리키니우스는 무시해, 이후 두 사람은 대립했는데 콘스탄티누스는323~ 324년 리키니우스를 해전과 육전 모두에서 격파한 뒤 처형해 버린다.
이리하여 디오를레티아누스 이후 갈라졌던 로마는 다시 통일되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전제 군주제를확립해 화폐 제도의 개혁, 관료제도 정비 따위를 단행하였으며 직업 선택의 자유를 제한하고 롤로누스 제도를 확립하여 소작인을 토지에 속박시키는 명령을 내렸다 그럼으로써 로마사회에서는 신분과 직업이 고정되기 시작하게 되어 차츰 중세적인 사회로 이행해 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는 교통과 군사의 요지이며 오래 전부터 그리스의 식민지로 번영하였던 비잔티움을 두 대륙을 통치하는 최선의 장소로 선택하여 도읍을 옮기고(330), 자신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이라 하였다. 그 뒤, 제국의 정치 중심은 동쪽으로 옮겨지고, 그리스(동),라틴(서)의 양 세계가 분리되는 경향을 띠게 되었다.
그의 업적 중 가장 중요한 것은, 크리스트교 정책으로서, 밀라노 칙령으로 크리스트교를 공인했고, 325년 니케아에 종교 대 회의를 열어 교회 질서에 간섭했고, 또한 아타나시우스와 아리우스의 논쟁에 대해서는 전자의 정당성을 인정하였다.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는 어느 누구보다 열성적인 기독교 신자였다. 그는 베들레헴에 큰 교회당을 세웠고, 황제도 베드로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자리에 교회당을 세웠다. 일요일을 안식일로 정하여 하루를 쉬게 한 것도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부터이다. 그러나 정작 황제 자신은 죽기 직전 침대 위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 교도가 되었다고 한다.
▶ 크리스트교의 성립(33년경)
기원전 4년경, 로마 제국의 식민지 유대 땅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이름은 예수, 목수인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첫 번째 아들이었다. 예수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유대에서도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역인 갈릴리에서 살았고, 아버지처럼 목수 일을 했다는 것밖에는. 그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30세가 되어서였다. 유대인에게는 언젠가 여호와가 보낸 메시아가 나타나 자신들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여러 종류의 당파로 갈라져 있었다. 왕 헤 롯과 사두개 인은 친 로마파였다. 사두개 인이란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상류층을 차지하는 종교 귀족을 말한다. 이들은 로마에 빌붙어 자기 한 몸의 영화를 지키기에 급급했다.
바리새인은 중류 지식층에 속하는 사람들로서 로마의 지배에는 반대하고 있었으나 무력을 사용하여 로마에 대항하는 일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한편, 무장 봉기를 통해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열심당(젤롯당)이 있었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로마에 대항했다 반면, 에세네파는 속세를 떠나 황야로 가서 금욕 생활을 했다. 예수에게 세례를 준 세례 요한은 에세네파 출신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가르침은 그 어느 파와도 달랐다. 그의 가르침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멸시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사람들 가슴에 파고들었다. 그는 회개하면누구든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제사장이나 율법 학자들처럼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들지 않고, 신분이 낮은 비천한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려 먹고 마셨다. 그런가 하면 부와 권력을 믿고 위세를 부리는 자들을 신랄하게 비난했다. 예수는 사두개 인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위험 인물이었다. 알기 쉽고 힘찬 예수의 말이 사람들을 매혹시킴에 따라 반대의 소리도 높아갔으며, 이윽고 배반자도 나왔다 예수가 예루살렘 신전에서 「채찍을 들고」 상인을 내몰았을 때, 사두개 파는 특권의 침해, 수입의 감소를 두려워했다. 계율엄수를 위선이라고 비판받은 바리새파는 격노했다. 그리고 열심당 (젤롯당)은 예수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나라」 가 현세의 국가가 아니고, 또한 예수가 정치적 메시아 (Messiah)가 아닌 것에 실망했다.
사람들이 예수로부터 멀어진 기회를 틈타서 사두개 파 ․ 바리새 파는 예수의 12명의 제자 가운데 하나인 가롯 유다를 매수하여 고발시켰다. 유대의 최고 평의회는 예수를 체포한 다음, 사람들을 선동하여 왕이 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사형을 판결하고 집행을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위임했다(유대인에게는 사형집행권이 없었다). 빌라도는 로마 지배에 대한 반역을 꾀했다는 예수를 조사하여 본 결과 실은 종교 문제의 분쟁이 원인이라는 것을 알고 석방하려고 했지만, 사두개 파에게 선동된 민중데모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 교외의 골고다 언덕에서 로마에 반역한 정치범으로서 '유대 인의 왕' 이란 팻말을 달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았다.
예수가 생각했던 것은 인간이 만들어 낸 온갖 고통과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었으며, 나 혼자만의 구원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이었다. 그의 사상은 열심당의 무장 봉기나 에세네 파의 금욕 생활을 뛰어넘어 인간 평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예수가 죽은 후, 그 부활을 믿는 사람들은 결속하여 전도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형제, 자매라 부르고 기도와 식사를 함께 하고 서로 도왔다. 지도자는 예수의 사도 12인과 예수의 형제 야고보, 그밖에 또 교단의 사무를 담당하는 7인 위원이 있었다. 그들은 유대교의 한 종파로 인정되었고 그들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7인 위원인 스데반이 율법의 전통적인 해석을 비판한 것이 원인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쫓겨남으로써, 비로소 유대교와 다른 크리스트교로써 자각되기 시작했다.
▶사도 바울(PauIUs) : 크리스트교인들은 처음에는 각지의 유대인에게 유대 교회에서 크리스트교를 가르쳤는데, 반대가 심하기 때문에 타국인에게 전도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최대의 공헌자가 바울이었다. 그는 예수를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로마 시민권을 가진 지식인이었다. 사실 바울은 예수의 사상을 크리스트교라는 종교로 만든 장본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은 소아시아, 마케도니아, 그리스에서 로마에 이르는 각 지역에 전후 3회의 전도 여행을 10년간 하였고, 하나님의 아들 크리스트의 죽음은 「인류」 의 죄를 스스로 대속한 것으로서, 크리스트를 믿는 자는 민족 ․신분의 구별 없이 모두가 동포라고 가르쳤다. 신에게 선택된 민족(유대인)의 우월을 부정하는 크리스트교는, 세계적 종교로서 로마 제국 내에 뻗어갔다. 한편 유대 본토에는, 예수를 모세의 재림이라고 생각하는 민족 종교적 크리스트교(야고보 시몬 등)가 있었지만 점차 쇠퇴해 갔다.
▶ 기독교 박해
로마 제국의 식민지 유대에서 탄생한 크리스트교가 로마 제국의 심장부로 전파됨에 따라 지배자의 박해가 시작된다. 일반적으로 제국의 통치에 전념하고 전통적인 다신교로 정신적 결속을 강화하려는 입장에서 박해를 했다. 최초의 박해자로서 악명 높은 네로는 이때에 베드로(Petrus), 바울(Paulus)이 순교했다는 전설 때문에 유명해진 것 같다. 황제 숭배를 거부하기 때문에 크리스트교를 믿는 것이 범죄라고 박해한 것은 도미티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이며 조직적인 대 박해를 실행한 것은 데키우스(3세기 중반경), 아우렐리아누스(3세기 후반), 디오클레티아누스였다.
▶로마에서의 기독교
네로가 권좌에 앉아 있던 서기 64년 로마의 중심가에서 원인 모를 대형 화재가 발생했다. 때마침 교외 별장에 있던 황제 네로는 급히 로마로 돌아와 사태를 수습했으나 시민들 사이에서는 네로가 불을 질렀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이에 네로는 시민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희생양으로 선택된 것이 기독교인이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투기장 등에서 무참하게 학살했다. 이를 피해 로마를 탈출하던 베드로는 도중에 크리스트를 만났다. 그는 크리스트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었다. 크리스트가 '로마에 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련다' 라고 말하자 그는 자신의 비겁함을 참회하고 로마로 돌아와 십자가에서 순교했다는 전설이 있다.
이 사건을 주제로 한 것이 영화로 더욱 유명한 소설 (:퀴 바디스(Quo Yadis)』 이다. 그런데 기독교도에 대한 박해는 네로 시대에 그치지 않았다. 교세가 크게 확장되어 가던 2세기 이후 박해는 점점 심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최대의 박해가 있었는데, 칙령을 발하여(303) 교인의 집회를 금지하고, 교회를 부수고 성경을 불태울 것을 명했으며 신자로부터 모든 관직을 박탈하고 자유민인 경우 법의 보호마저 박탈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쇠퇴하기는 커녕 더욱 교세가 확장되어 갔고 마침내 국교로 인정되기에 이르렀다.
예수의 사후 사도 바울과 베드로 등의 노력으로 로마 내에서 포교의 발판을 갖춘 기독교는 교세가 날로 확장되어 갔다. 초기에 빈민들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로마 제국이 쇠퇴해 감에 따라 중산층 나아가 부자들에게까지 퍼져 나갔다. 제국 말기가 되면서 정치, 사회가 혼란해지자 사람들 사이에서는 정신적인 공허감과 현실 도피적인 사고 방식들이 퍼져 나갔는데 이러한 상태가 기독교가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교세가 미약했던 초기에 로마 제국은 기독교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으나 교인들이 황제에 대한 예배를 거부하고 병역을 거부함에 따라 기독교를 불온한 사상을 전파하는 종교로 규정하고 박해하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에는 기독교도의 재산을 몰수하여 재정을 보충하려는 의도도 작용 했다. 이런 대 박해가 행해진 것이 3세기 데키우스 황제(Decius, 249~51) 때와 앞서 말한 디오클레티아누스 때였다. 하지만 가장 박해가 심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시대가 박해의 마지막이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할 수밖에 없었다 (밀라노 칙령).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어떠한 박해도 기독교를 종식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해가 가해져도 기독교는 계속 늘어갔고 심지어 군인이나 고위 관리, 황실 인사 중에서도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이 나타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기독교의 성격 변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가 발생할 당시 기독교는 압박 받는 자의 운동 형태를 띠고 있었다. 현실의 비참함을 메시아의 도래로 보상받고자 하는 민중의 심정이 종교적으로 표현된 것이 기독교였고 따라서 예수가 죽은 후의 초기 교회는 빈민들의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2세기 말, 3세기에 이르러 중산층, 나아가 부자들까지도 현실의 정신적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기독교를 믿기 시작하자 교회의 성격은 어느덧 보수적으로 바뀌었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공인될 무렵에 교회는 억압하는 자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신에 대한 순종만을 설교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두로서는 기독교를 승인하여 그것을 다른 저항 운동에 대립시키는 편이 유리하다 판단했던 것이다.
▶ 삼위 일체설
크리스트교 기본 교리의 하나이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정통 교리로 채택되었는데, 크리스트의 신과 인 간의 양면성을 인정하는 (동일 본체설)에 기초를 두고 이것에 성령을 부가해서 성부. 성자(예수). 성신 (성령)의 위치를 하나의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하는 설이다. 381년의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에서 정통파의 교의로 확인되었다.
▶ 아리우스 파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아리우스(256-336)는 정통파의 삼위 일체설에 반대하여 아버지인 하나님과 아들인 예수의 동질성을 부정하고, 신과 인간의 중간자로서의 예수의 인간성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 크리스트교계를 뒤흔드는 논쟁이 일어났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소집한 터키의 이스닉에서의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는 318명의 각국 대표가 참가하여 예수의 신성에 대해 논의하였다. 그 결과 아리우스는 파문되고 삼위 일체설이 정통적 교의로써 채택되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의 게르만 부족들에 대한 전도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 테오도시우스(Theodosius, Flavius ;346경~395)
에스파니아 태생으로 군인으로 무공을 세워 그라티아누스 황제에 의하여 동부 제국의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379). 훈족의 압력에 밀려 다뉴브 강을 건너서 침입한 게르만 인의 침입을 무력과 화해로써 극복하였으며, 그 일부를 다뉴브 남쪽 연안에 동맹자로서 정주시켰다 383년 그라티아누스 황제가 암살된 후, 서부 로마 제국을 공격하여 394년 전 제국을 통일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제2회 종교회의를 개최하여, 앞서 니케아 종교 회의에서 결정된 바 있는, 아리우스파 교의의 금지 와아타나시우스 파 교의의 승리를 확정시켰고, 391년 크리스트교를 국교로 정하고 이교를 엄금했으며, 393년에 올림피아 경기를 금지시켰다. 죽기 직전, 제국을 한 사람의 황제가 통치하는 것이 곤란함을 느껴,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두 아들 아르카디우스(동로마 제국)와 호노리우스(서로마 제국)에게 분할하였다.
▶ 콜로누스
콜로누스는 제정 말기 지주에게 예속된 농민을 의미한다. 콜로누스는 노예보다는 상위에 있지만 이전 의 자유 및 직업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존재였으며 약간의 재산을 소유할 수는 있지만 농장주에 대한 예속성이 매우 강했다. 그들은 법적으로는 자유로웠으나, 332년 칙령에 의해 이동의 자유가 없이 거의 토지에 매어 달린 노예가 되었는데, 이는 중세 농노의 선구가 되었다 노예와 자유농민의 중간적 지위를 가진 부자유 농민이었다.
▶ 서 로마제국의 멸망(476)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로마를 4분 통치하기 시작했을 때, 그 자신은 제국 동쪽의 황제가 되고 수도를 니코메디아에 두었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에 둔 것처럼, 로마 제국의 경제적 중요성은 동방으로 옮겨져 있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두 아들에게 제국을 이분해 주었을 때도 큰아들 아르카디우스에게 동 로마를 주고차남 호노리우스에게는 서 로마를 주었다. 제국이 이분된 뒤에 서로마는 약 80년간 계속되어 약 10인의 황제가 뒤를 이었으나 그 권력은 허약했다. 서 로마가 알라릭이 지휘하는 서고트족(410), 가이세르크 왕 휘하의 반달족(495)에 점령되고, 이때 서 로마 제국을 지킨 것은게르만 출신의 사람(반달인 스틸리코, 서고트인 리키메르 등)이었다.
서 로마 제국의 실권을장악한 리키메르가 세 사람의 전제 군주(마요리아누스, 리비우스 세베루스, 안테미우스)를 차례로 죽인 후, 네포스가 일어났으나 오레스테스에게 폐위 당하고 서 로마 마지막 황제 로몰루스 아우구스툴루스(Romulus Augustulus)가, 475년 아버지 오레스테스에 의해 황제가 되었다.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는 게르만 족 출신으로 안테미우스 황제 때(470년) 라벤나에서서 로마 황제의 친위병이 됐다. 게르만인 용병들은 이탈리아에 확고히 정주할 것을 요구하며 오도아케르를 왕으로 추대했으며 로물루스는 폐위되어 캄파니아로 유배됐다(476년).
소멸해 가고 있던 서 로마 제국의 불꽃은 완전히 꺼졌다. 로물루스가 건국한 로마가 같은 이름의 황제 때에 멸망한 것은 참으로 묘한 인연이다 오도아케르는 황제위를 나타내는 표장을 동 로마 황제에게 반환하고, 동 로마 황제는 그를 제국 서쪽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이는 로마 제국이 다시 통일되었다는 형식이지만, 사실은 서 로마 제국의 멸망이었다. 동 로마 황제제노(재위 474~491)는 그 무렵 동 로마를 괴롭히고 있던 동고트 족을 쫓아내기 위해 서 로마를 지배 아래 둘 것을 노리고 동고트의 테오도리크를 시켜 이탈리아를 공격하게 했다. 오도아케르는 테오도리크 군에게 잘 저항했지만 493년에 암살당했으며, 테오도리크가 그를 대신해 이탈리아의 지배자가 되었다.
㉠ 만민법(Jus Gentium) : 시민법(ius civile)은 시민 공동체에 소속한 로마 시민에게만 적용되는 법이다. 한편, 만민법(iusgentium)은 도시 국가 로마 이외의 이탈리아 인,속주인 등 로마 제국 영내에 사는 모든 자유민에게 적용되는 법으로서, 서로 다른 고유한 전통을 포섭하여 형평과 신의를 모든 민족에게 공통되는 원리로 하여 제정 되었다. 이는 시민법이라는 특별법에 대응하는 보통법이며, 일반적 보충적 관계에 서서 로마인의 생활을 규제하였다. 로마의 정복 사업이 진전됨에 따라 이 법은 더욱 발달하여 제정 시대에 들어와서 전 자유민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자 시민법보다도 만민법이 로마법의 실체를 이루게 되었다. 이 때부터 만민법의 명칭이 없어지고 자연법 사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만민법의 근원은 이탈리아 반도에 살던 여러 민족들 사이에 행하여졌던 씨족 사회의 관습에 기원했는데, 뒤에 가서는 세계 각국의 관습 중 특히 그리스의 관습이 중시되었다.
▶ 키케로(Cicero, Marcus Tullius ;106~43 B.C.)
로마의 웅변가, 펑치가, 철학자로 아르피눔의 기사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로마에서 수사학 펄학 ․ 법률을 배웠는데 당시의 로마는 귀족과 평민의 반목이 날로 격화되어 가는 상태여서 출세의 길은 웅변술에 있다고 판단한 그는 이 길을 택했다. B.C. 81년 최초의 변론 「퀸투스를 위하여」 로써 로마 일류의 변호사호르텐시우스와 싸웠고, 이듬해 로스키우스를 변호하여 반 술라적인 태도를 밝혔다. 그 후 건강과 수사학 연구를 위하여 아테네, 소아시아, 로도스 섬을 여행한 후 B.C. 76널 로마에 돌아와 로마에서 손꼽히는 웅변가가 되었다.
B.C. S1년 집정관으로서 킬리키아로 갔다가, 로마에 돌아왔을 무렵은 케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무력 충돌이 발발한 때였다. 그는 폼페이우스를 지지하였으나, 파르살로스 싸움에서 패배하였고, B.C. 47년 케사르의 사면을 받았다. 이후정계에서 은퇴하고, 철학 ․ 윤리학 ․ 법학 등을 연구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B.C. 46년 카토(소)를 지지하는 연설을 하여 케사르와의 불화를 가져왔다. 케사르가 암살된 뒤에 다시 정계에 복귀, 공화 정치의 부활을 위해서 안토니우스를 공격했다. 그런데 제 2차 삼두 정치의 출현으로 그의 발판이 없어졌고, 결국 안토니우스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의 정치적 지조는 비난받을 만한 데도 있으나, 위대한 웅변가로서, 또 그리스 철학을 라틴어로 번역하고, 고전 문화에 대하여 이룩한 공헌은 지대한 것이었다. 주요한 저작으로 '국가론' '법률론' '의무론' 등이 있으며, 또한 그의 연설로서 현존한 것이 58편이 있다.
▶베르길리우스(Vergilius Mwo Publius ;70-19 B.C.)
로마 최대의 시인으로 그의 일생은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한 통일과 번영의 시대에 해당한다. 이탈리아의 만토바 근처에 있는 안데스의 농가에서 출생하여 크레모나, 밀라노에서 교육을 받고 로마에서 철학과 수사학을 수학하였다. [농경가] 에서 농사 ․과수 재배 목축 ․ 벌치기 등의 안정된 생활과 아름다운 에피소드에 가득 찬 생활의 즐거움을 노래하였다. 또 그의 이름을 불후의 것으로 만든 '아에네이스' 는, 아에네이스의 표류와 라티움을 점령하려고 하는 트로이 인의 용감한 싸움을 노래하였는데 호메로스를 모방한 데가 있으나, 로마인의 국민시임에는 틀림없다.
[아에네이스]는 전 12권으로, 로마 건국 신화를 노래한 장편 서사시로 종교적 ․ 국민적 경향, 극적인 행위, 현상에 대한 심리적 정신적인 내면화, 성숙된 언어 구사 및 세련된 시의 형식은 그의 천재성을 보여 준다 아우구스투스에게 아낌을 받아 궁정 시인의 자격이 주어졌다. 만년에 그리스로 갔다가 귀국 도중에 메가라에서 죽어 한때 은거했던 나폴리에 묻혔다.
▶ 에픽테토스(Epiktetos ;60?~140?)
제정 시대의 철학자로 프리지아의 히에라폴리스의 노예 출신으로, 해방되어 로마 및 니코폴리스에서 가난한 철학 교사가 되었다 저작은 없고, 그의 제자 아리아노스가 그의 연설을 속기로 기록한 것이 남아 있다. 여기에는 그의 목표는 윤리적 인격의 육성에 있으며, 이를 위하여 금욕적인 육체 훈련이 필요하다고 주장이 담겨있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영향을 주었다.
▶ 리비우스(Livius, Titus ;B.C.S9~A.D.17)
로마의 역사가로 파타비움에서 출생.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친교를 맺었으며, 로마 건국에서 B.C. 9년 드루수스의 사망까지를 서술한 「로마서' 를 저술하였다. 총 142권 중 현재 처음의 10권(B.C. 293년~제3 삼니움 전쟁)과 21~45권의 25권(제2 포에니 전쟁 ~마케도니아 정복)의 35권만이 남아 있다. 그는 서술 형식을 중시하는 시대의 풍조를 좇아 전승적 소재를 문학적으로 표현하기에 힘썼으며, 사료 비판에의 한 객관적 사실을 연구하는 과학적 역사가는 아니었다. 그는 고대의 로마적 감각과 도덕을 찬미하고, 낭만적 입장에서 과거를 이상화하였다.
▶ 플루타르코스(Plutarckus ;46?~120?): 풀타크
로마 제정 시대 그리스의 역사가로 아테네에서 배우고, 케로네아의 사자로서 로마에 가서 트라야누스 황제의 환대를 받았다. 가장 저명한 작품은 ․영웅전' 으로 그 중 46편이 남아 있다. 그리스, 로마의 영웅, 저명 인사 중 비슷한 사람을 골라 그 도덕성 심리 ․ 업적 등을 비교하면서 평가하였다. 또 통속적인 철학 논문을 썼으나 오늘날 그것은 '윤리' 로서 총괄되어 있는데, 어린이의 교육, 스토아 철학의 모순, 건강론 등 일반적인 문제를 논하고 있다.
▶로마의 미술
많은 부분에서 그리스의 모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하면서도 가장 로마적인 특징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건축 분야이다. 실용성을 중시한 로마 건축은 외관의미를 추구한 그리스 건축과는 달리 거성에 기초를 두고 내부 공간의 충실화를 기하였다. 로마의 건축은 기둥과 들보로 이루어진 그리스 건축과 에트루리아의 분묘나 성문에 사용한 아치형식 또는 궁륭식을 채용함으로써 돌이나 벽돌을 쌓아 올리고 다시 그 위에 분말로 된 일종의 시멘트를 사용하는 공법을 도입함으로써 거대한 건물의 건조를 가능하게 했다.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건축은 먼저 두 가지 기능적인 면에서의 구획이 가능하다. 하나는 실용에 입각한 건축이며, 또 하나는 실용성보다는 기념설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예컨대 주거 공간이라든가 공공 건축물은 실용 건축인 반면, 기념주나 기념물은 어느 특정한 사건이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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