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공화정

2008. 10. 15. 14:09교회사자료/10.세계사

로마공화정

 

  지금까지의 세계 역사 중 가장 위대한 문화를 가진 국가로 손꼽히는 나라 중 하나가 바로 로마이다. 로마의 탄생과 공화정 초기에 대한 자료는 거의 없으나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많이 남아 전하는데, 그 가운데는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이 숨어 있다.


  전설에 따르면 B.C 12세기 에트로이 장군 아이네아스가 로마 주변 라티움에 자리 잡았고 500년 뒤에는 라틴족인 로물루스가 로마 시를 세웠다고 한다. 아이네아스 이야기는 청동기시대 말기에 동방에서 항해자가 찾아온 사실을 에트루리아족이 아이네아스라는 인물과 접합시켜 만든 듯하고 로물루스 이야기 또한 BC 8세기 팔라티누스 언덕에 라틴계 유목민이 모여 살게 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 뒤 로마는 서서히 도시의 틀을 잡아가다가 BC 7세기에 에트루리아족의 세력아래로 들어갔고, BC 550년경에는 에트루리아족에게 직접 통치를 받았다. 이를 계기로 로마는 빠르게 성장하여 라티움에서 압도적인 영항력을 행사하는 도시로 발돋움 했다. 로마인은 종교와 문화에서 에트루리아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특히 그들에게서 알파벳을 배웠다.


  로마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씨족(gens)이었는데, 씨족 아래에는 강력한 가부장이 거느리는 가족이 있었다. 그러나 혈연관계 없이 부조와 지원을 받기도 하고 보호자에게 매인 예속자들도 있었다. 왕정시대에 파트리키(귀족)와 플레브스(평민)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로마의 종교적 구조는 일찍부터 확립되었으며 왕정시대에는 왕에게 종교적 권위가 있었다. 그러나 공화정시대에는 그 권력이 종신 사제 1명에게 넘어가 사실상의 종교적 권위는 제의를 행하는 사제, 점을 치는 아무구르, 성스러운 지식을 지키고 알리는 신관들이 가지고 있었다.


  왕정시대에는 왕이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갖고 있었다. 임페리움(imperium)이라고 하는 이 권력은 원래 군대지휘권에서 나왔지만, 종교 영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로마왕정은 세습제가 아니었다. 왕은 로마 시민을 세 트리부스(부족)로 나누었는데. 1개의 트리부스에는 10개의 쿠리마가 있었다. 모두 합쳐 30개가 되는 꾸리아는 코미티아 쿠리아타(쿠리아회)를 구성했는데, 이 회의체는 왕을 뽑고 여러 가지 입법권과 사법권을 행사했다. 이러한 통치구조는 안정된 동시에 융통성도 갖추고 있어 로마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로마의 역사중에서도 이 과제에서 얘기하려는 것은 공화정 시대의 모습이다. 에트루리아 왕조가 BC 509년에 로마에게 무너진 뒤 공화정이 모습을 갖추기 시작했다. 공화정의 성립은 일정한 수의 가계가 왕의 군사 지휘권, 왕의 사법적 권한, 왕의 제사적 기능을 이어받은 것을 뜻한다. 원래 왕이 가졌던 권력은 프라이토르 막시부스(praetormaximus)라는 행정관에게 넘어간 듯 하지만 그 뒤 2명이 임기가 1년인 콘술(집정관)로서 권력을 갖게 되었다.


  원래는 평민도 콘술이 될 수 있었던 것 같으나. 귀족이 곧 콘술직을 독점했으며 4세기 중엽에야 콘술 가운데 하나는 반드시 평민 출신이어야 한다는 법 규정이 나왔다. 국가가 비상사태인 때에는 2명의 콘술 중 1명에게 딕타토르(독재관)를 입명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며 이 딕타토르는 최고 6개월 동안 임페리움(국가의 최고권력자)이 되었는데 실제로 딕타토르가 임명된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처음에는 콘술만이 임페리움을 행사했으나 BC 386년경에 콘술보다는 격이 좀 떨어지나 역시 임페리움을 지닌 프라이토르(법무관. 뒤에는 집정관)직이 창설되었다. 프라이토르는 원래 로마 시에서 사법행정을 맡았는데, 뒤에 로마가 팽창해 속주들이 생겨남에 따라 점점 그 수가 늘어났다. 또한 켄소르는(감찰관)는 5년마다 2명이 선출되었는데 이들은 인구와 재산을 조사하고, 도덕이 문란해지지 않도록 감찰하는 일을 맡았다. 행정이 차츰 복잡해지자 재정을 담당하는 콰이스토르(재무관)와 공공건물을 관리하고 축제행사를 책임지는 아이딜리스등 더 많은 관리직이 신설되었다.


  로마인은 아주 일찍부터 법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BC 8세기 무렵 이미 전쟁에 관한 법이 있었다고 하며, BC 5세기 중엽에는 로마 최초의 성문법인 이른바 12표법이 제정되어 12개의 청동판에 새겨졌는데, 이것은 모든 법의 원천으로 간주되었으며 더할 나위 없이 중요했다. 이 법은 이때까지 법이 구전되어오던 것을 행정관들이 멋대로 적용한다고 비난해온 평민의 요구에 따라 콘술 대신에 BC 451년과 BC 450년 두 차례에 걸쳐 뽑힌 데켐비리(10인 위원회)가 만든 것으로 보인다.


  공화정에서 드높은 권세를 누린 원로원(세나투스)은 왕정시대의 원로원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콘술이 소집하고 또한 콘술의 협의에 따르는 기관이었으나 실제로는 공화정에서 가장 안정된 최고권력 기관이었다. 원로원은 원래 유력한 씨족들의 우두머리로 구성되었으나 곧 모든 전임 행정관들도 원로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원로원 의원은 처음에는 콘술이, 뒤에는 5년마다 1번씩 켄소르가 임명했다. 임기는 종신이었고 의원들의 서열은 그들이 지냈던 직책의 등급에 따라 정해졌다.


  원로원은 민회에서 이미 표결된 법률들을 비준할 뿐이었으나 BC 4세기 후반부터는 민회에 법률을 제안하는 권한까지 가졌다. 또한 원로원은 행정관에게 조언을 했는데, 행정관들은 대체로 그 조언을 따라야만 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법 효력을 갖게 되었다 공화정 말기에는 속주를 다스릴 행정관을 배치하는 중요한 기능도 맡았다. 원로원에게는 그밖에는 외국으로 보낼 사절을 뽑는 권한도 있었다. 원로원은 종교문제에도 관여해 인습적인 의식과 제식을 유지시켰으며, 국고를 도맡아 공공재정을 운영했고 지출과 과세를 최종 결정했다. 이처럼 원로원이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므로 로마 공화정은 사실상 과두정부였다. 대토지를 소유한 원로원 의원들은 유능한 행정가들이었다. 그들의 진정한 어려움은 이민족을 정복한 이후 넓은 제국을 통치해야 하는 책임을 떠맡게 된 데 있었다.


  이러한 체제 아래서 플레브스(평민)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공화정의 첫 2세기 동안 그들은 참정권을 얻어내 파트리키(귀족)만의 특권을 하나씩 잠식했다. 싸움은 경제문제에 있어서도 플레브스들은 정복으로 늘어나는 국유지를 자신들도 점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들은 공화정 초기의 BC 493~492년 전쟁에서 돌아오다기 무장한 채로 성산으로 몰려가 플레브스의 권리를 보호해줄 정부관직을 창설하라고 원로원에 요구했다(성산사건). 그 결과 만들어진 신성불가침의 트리부누스(호민관)는 행정력의 납용으로 피해를 입는 플레브스를 도울 수 있었으며 콘술이나 원로원 ․민회의 결정을 거부할 권한도 가졌다. 플레브스 계급의 조직은 코미티아 켄투리아타처럼 재산에 띠라서가 아니라 주거지에 따라 조직된 평민회(Concilium Plebis)가 생겨남으로써 마무리 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로마는 대외적으로 팽창해갔다. 에트루리아족이 라티움에서 밀려났으나 아직 힘이 약했던 로마는 라틴 동맹에 가입해 동맹이 결정한 정책을 따라야 챘다. 그러나 로마는 로마 특유의 문제 때문에 동맹과 별개로 행동했다. BC 5세기에 로마는 아펜니노산맥 중부에 삼던 여러 종족의 침략을 물리쳤고 동시에 에트루리아인의 도시 베이를 마침내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 뒤 로마는 켈트족의 침입을 받아 로마 시가 함락당하는 재난을 입었다. 다행히 얼마 안 되어 켈트족은 북쪽으로 물러갔고 로마가 함락당할 때 전혀 도와주지 않았던 라틴 동맹이 내분을 겪자 로마는 이를 틈타 라티움의 이웃 도시들을 제압했다. 그다음 로마가 삼니움족과 전쟁을 하자(제1차 삼니움 전쟁) 리틴 동맹은 로마에게 싸움을 걸었지만 그들을 물리친 로마는 동맹을 해체하고 라티움을 지배했다. 삼니움족이 계속 욕심내던 캄파니아에 로마가 세력을 뻗치게 되어 제2차 삼니움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번에도 승리를 거둔 로마는 중부 에트루리아로 진격했다. 에트루리아족 ․켈트족 ․삼니움족이 연합해 로마와 맞섰지만(제3차 삼니움 전쟁) 또 로마가 이겨 BC 263년 에트루리아 전역을 손에 넣었다.


  로마가 남쪽으로 팽창하자 마그나그라이키아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였던 타렌툼은 자극을 받아 메페이로스(에피루스)에 원조를 요청했다. 에페이로스는 로마군을 오래지 않아 패배시키고 당시 로마에 우호적이었던 카르타고에게서 시칠리아의 여러 도시를 빼앗았지만 얼마안가 퇴각해야만 했으며, 타렌툼은 마침내 로마에게 항복했다. 이로써 로마는 지중해의 큰 세력으로 급속히 발돋움했고, 포에니 전쟁이 벌어지기 바로 전까지 헬레니즘 세계의 광범위한 경제 유통망에서 큰 몫을 차지해 그리스 세계로부터 경계심을 살 만큼 중요한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포에니 전쟁 때의 서부 지중해 지역 시칠리아는 이제 이탈리아를 통일한 로마와 카르타고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곳이 되었다. 외부 세력이 이탈리아 반도를 간섭하지 못하도록 방어하기 위해서 로마는 이웃한 시칠리아 섬이 강력한 나라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아야만 했다. 카르타고 역시 서부 지중해를 지배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거점인 시칠리아를 정복해야 했다.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사이의 해협을 장악하고 있던 메사나(메시나) 시에서 로마와 카르타고는 처음으로 맞섰다. 캄파니아 용병대는 부력으로 메사나를 장악했는데 그 뒤 이웃한 시라쿠사에게서 압박을 받자 BC 264년 로마와 카르타고 양국에 원조를 요청했다. 이에 카르타고가 먼저 메사나를 점령하고 시라쿠사와 협약을 맺었으나 로마군은 강제로 카르타고군을 철수시켰다. 그 결과 로마는 카르타고와 시라쿠사의 연합군을 상대로 싸우게 되었으나 메사나를 공격한 연합군을 물리친 뒤 시라쿠사로 진격하여 시라쿠사와 협약을 맺고 동맹을 이루었다. BC 260년에 처음으로 대함대를 건설한 철마는 코르시카에서 카르타고 세력을 몰아내고(BC 259) 여러 해전에서 카르타고 해군을 쳐부순 뒤 아프리카에 상륙했다(BC 259). 카르타고는 휴전을 요청했으나 로마가 내건 조건이 너무 가혹하자 새로이 군대를 소집해 마지막 결전을 감행해 카르타고가 크게 승리를 거두었다.


  그 뒤 시칠리아에만 힘을 쏟았던 로는 야전에서는 크게 이겼으나 해전에 패한데다가 폭풍으로 해군이 큰 손실을 입자 시칠리아 공격을 미루게 되었다. 한편 카르타고도 전쟁으로 궁핍해져 병력을 줄여야 했으므로 반격을 하지 못해 전쟁은 소강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그 동안 해군을 강화한 로마는 BC 242년 시칠리아의 릴리바이움을 봉쇄하고, 카르타고의 지원군을 무찔러(BC 241 3 10)시칠리아를 장악했다.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와 리파리 제도를 로마에 넘겨주고 전쟁배상금 3200탈렌트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로마와 평화조약을 맺었으며 전쟁은 끝났다.


  카르타고는 제해권을 빼앗김으로써 서부 지중해에 대한 패권을 잃었다. 게다가 로마가 공격을 재개할 경우 카르타고의 해상제국은 괴멸될 것이므로 카르타고는 로마를 분쇄해야만 했다. 이에 카르타고는 하밀카르 바르카 장군의 주도 아래 시칠리아․사르데냐․코르시카를 잃은 보상을 얻기 위해 히스파니아(스페인)에 신제국을 수립하고 있었다. 하밀카르는 BC 237년 조국 카르타고에서 히스피니아로 건너왔는데, 당시 9세이던 그의 아들 한니발이 아버지의 위업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이를 경계한 로마는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와 분쟁을 일으켜 제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되었다.


  한니발은 로마 영토의 중심부를 공략해 이탈리아 동맹물 분열시키려 했다. 로마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히스파니아에서 갈리아를 거쳐 알프스를 넘는 매우 힘겨운 육로를 통해 이탈리아로 침입했다.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이 북이탈리아의 침략을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BC 218년 한니발은 로마군을 연파하고 북이탈리아를 점령했다. BC 217년에는 에트루리아에서도 로마에게 대승을 거두어 로마 시를 위협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병력을 더 강화한 다음에 로마 시를 공격하기로 하고 남부로 진출했기 때문에 로마는 반격할 여유를 갖게 되었다. 그 뒤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가 로마에게 등을 돌리게 되었지만 그래도 로마의 힘은 완전히 꺾이지 않았고 더구나 로마 내부에서 플레브스와 파트리키사이에 갈등이 있어왔는데 이것이 해소되어 단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뒤로도 로마는 카르타고군에게 정면으로 대응할 힘이 없었고 한니발은 새로운 동맹자들을 보호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로마 공격에 투입할 병력이 없었다. 전쟁은 잠시 중단되었다. BC 214년 카르타고 주력부대는 풀리아베서 타렌툼으로 옮겨가 남부 해인지대를 공략했다. 그러나 BC 212년 로마군은 카푸아를 봉쇄하고 이듬해 함락시켰다. BC 209년 타렌툼을 되찾은 로마는 한니발을 서서히 반도 남쪽 끝으로 몰아내기 시작했다. BC 207년에는 히스파니아에서 카르타고의 지원군이 침입해 이탈리아 중부에서 한니발 군과 로마 시를 공격하도록 되어 있었다. 메타우루스에서 카르타고 지원군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로 이탈리아에서 사실상 전쟁이 끝나 BC 203년 카르타고군은 이탈리아에서 철수하고 한니발은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동안 이탈리아 국외에서는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BC 214~205)이 있었다. 킨나이 전투에서 로마는 패배했지만 마케도니아와 카르타고의 동맹을 막을 수 있었다. 로마는 식량공급원인 사르데냐와 시칠리아 전투에서 카르타고를 물리쳤다. 한편 카르타고의 보급창인 히스파니바에서는 로마가 졌으나 카푸아를 장악해 이탈리아에서 히스파니아로 병력을 옮겼다. BC 210년에는 당시 로마에서 가장 훌륭한 장군인 스키피오가 사령탑을 맡으면서 전세는 역전되었다.


  스키피오는 카르타고군의 이탈리아 진출을 막지는 못했지만 히스파니아에 남아 있던 적군을 분쇄해 BC 206년말 히스파니아를 완전 정복했다. BC 205년 콘술이 된 스키피오는 여세를 몰아 카르타고의 본거지를 공격하고 크게 승리했다. 한편 카르타고는 다시 한니발을 기용해 전투를 벌였으나 마지막 결전지인 자마 전투에서 로마군 기병의 활약으로 스키피오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의 조건을 받아들여 전함뿐 아니라 지중해의 여러 섬을 로마에 양도했고 전쟁배상금으로 1만 탈렌트를 지불했으며 전쟁과 외교에 관한 자주권을 포기했다.


  서부 지중해를 장악한 로마는 이제 헬레니즘 세계로 눈을 돌렸다. BC 205년 마케도니아와 화약을 맺은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끝나자 그리스 해방을 위해 BC 200년 마케도니아에 전쟁( 제2차 마케도니이 전쟁)을 선포했다.


  로마는 아이톨리아 동맹과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카이아 동맹을 확보하고, 소아시아에서 마케도니아 때문에 자극받고 있던 페르가몬 ․로도스를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인 뒤 마케도니아에 쳐들어가 BC 197년에 승리를 거두고 평화협정을 맺었다. 그러나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유럽 쪽에 영토를 갖고 있던 시리아가 소아시아 서부로 진격해 들어오고 로마에 반기를 아이톨리아 동맹의 요청을 받아들여 그리스까지 건너오자, 로마는 다시 그리스로 군대를 투입해 시리아와 전쟁을 벌여 승리한 뒤 BC 190년 평화협정을 맺고 시리아가 아시아의 타우루스 강 서쪽과 유럽에 갖고 있던 영토를 넘겨받았다.


  BC 189년에는 아이톨리아 동맹도 로마에 항복해 예속된 동맹자가 되었다. 같은 해 로마는 소아시아의 갈라티아도 정복했다. 한편 로마와 아카이아 동맹 사이에 스파르타 문제를 둘러싸고 분쟁이 있었으나 뒤에 아카이아가 로마에 대한 무조건적 지지를 표시해 전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일으킨 책임은 상당 부분 로마에 있었다. 시리아와의 전쟁 때 마케도니아는 로마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했으나 로마는 그에 걸맞는 보상을 해주지 않았다. 게다가 마케도니아의 왕세자와 로마에 인질로 잡혀 있던 왕자 사이를 이간질해서 마케도니아 왕가를 분열시키려 하여 마케도니아의 분노를 샀다.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북방 팽창을 이탈리아 침략에 대한 준비로 보고 경계하는 힌편 마케도니아가 북방 팽창 정책에서 그리스인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방향을 바꾸자 의심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하여 BC 171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어났다.


  BC 168년 마침내 로마는 이 전쟁에서 이겨 마케도니아를 4개의 독립공화국으로, 그리고 마케도니아를 편든 일리리아를 3국으로 나누었다. 또 로마는 페르가몬과 아카이아 동맹, 로도스 등을 마케도니아의 동 조국으로 의심해 인질을 요구했는데. 특히 로도스의 경우에는 협박을 해서 영토를 빼앗았다. 로마는 이전에도 시리아를 무찔러 시리아 해군세력을 약화시킨바 있는데 이번에는 로도스 세력을 위축시켜 해상질서를 바로잡던 세력들을 없애버림으로써 지중해는 해적의 천국이 되었다. 그 결과 다음 세기에 로마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만 했다.


  로마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세력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BC 168년 시리아의 이집트 침략을 막았고 BC 151~146년에는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아카이아 동맹과 맞서 싸워 그들을 복속시킴으로써 아프리카와 발칸 반도까지 영토를 넓혔다. 아프리카에서 카르타고는 누미디아가 그들 영토에 침략해오고 로마군이 잇달아 도발해 봤음에도 로마와 맺었던 조약을 충실하게 지켜 군사적 대응물 삼갔으며 BC 2세기경에는 그들의 상업 활동이 매우 빠르게 회복되었다.


  로마인들은 그에 경계심을 품어 이제는 카르타고를 멸망시켜야 한다는 여론을 앞세웠다. BC 150년 카르타고가 누미디아의 공격에 맞서 저항하자 로마는 조약을 위반했다는 구실로 카르타고를 공격해 BC 147년에 마침내 함락했다. 로마는 포로를 노예로 팔아넘기고 도시를 완전히 파괴한 뒤 BC 146년에 카르타고 영토를 아프리카 속주로 만들었다. 마케도니아는 BC 149년에 일어난 반란을 계기로 BC 146년 속주로 개편되었고, 같은 해 코린트를 증심으로 한 아카이아 동맹은 스파르타 독립 문제로 로마와 싸웠으나 패하여 로마에 병합되었다. 한편 독립왕국이었던 페르가몬은 BC 133년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마지막 왕이 죽으면서 나라를 로마에게 기증함으로써 7번째 속주인 바시아 속주가 되었다.


  로마 제국은 이처럼 속주를 점점 넓혀가면서 발전해갔다. 각 속주에는 그 속주를 정복한 장군이 10명의 원로원 의원으로 이루어진 위원회와 혐의해 제정한 헌법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각 도시의 지위와 세금에 대한 규정이 들어 있었다. 속주를 다스리는 총독은 명칭을 프라이토르라고 했는데 로마의 프라이토르(법무관)와 비슷한 기능을 맡았다. 따라서 속주가 늘어남에 따라 프라이토르의 수도 증가했으나 전쟁 때문에 군대를 지휘할 더 많은 프라이토르가 필요해지자 총독인 프라이토르의 임기를 늘리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 총독은 1년 동안 프라이토르를 지낸 뒤 임페리움을 그대로 지닌 채 칭호만 프라이토르 또는 프로콘술로 바뀌었다. 콘술(집정관)은 속주에서 큰 전쟁이 벌어질 때에만 그 속주의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제국에 대한 통치권은 원로원에게 있었으나 아직은 명목상일 뿐이어서 속주에서 실정과 부패가 생겼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속주 통치에 개입했다.


  로마의 경제는 로마가 전쟁에서 이겨 새로운 속주들을 획득한 결과 빠르게 팽창했으나, 속주에서 무더기로 흘러들어온 값싼 곡물은 이탈리아 농업에 타격을 입혔다. BC 167년에는 이탈리아 반도의 로마 시민에 대한 재산세가 철폐되어 시민 모두에게 얼마간 혜택이 돌아갔다. 속주들 가운데 섬 지방은 로마 정부를 거의 괴롭히지 않았으나, 히스파니아에서는 BC 154년부터 줄곧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밖에도 오랫동안 갈리아인과 싸워 이탈리아 북부를 평정하는 가운데, 라틴인들을 요충지에 이주시키고 군사 목적으로 커다란 도로를 건설했으며,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해안 방어를 위해 중요지점에 로마인을 정착시켜 소규모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로마 자체에서도 통치체제의 틀이 잡혀갔다. 역사가인 폴리비오스는 로마가 성공한 요인으로 로마인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과 전통 존중. 그리고 로마군의 두드러진 효율성을 들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군주정(콘술)과 귀족정(원로원) 민주정(코미티아)의 3가지 요소가 안정된 세력균형을 이루고 있는 것에 크게 감탄했으나 콘술의 지위를 너무 과장해 쓰기도 했다. 실제 주권은 원로원과 로마 인민(Senatus Populusque Romanus)에게 있었는데, 원로원 의원은 5년마다 뽑히는 켄소르(감찰관)가 전임 행정관들과 기존 의원들 가운데서 지명했고, 그 명단에서 가장 앞머리에 나오는 의원을 제1원로(프린켑스 세나투스)라 했다.


  BC 2세기 초에는 공직 승진규칙이 마련되었다. 이에 따르면 프라이토르를 거쳐야 콘술이 될 수 있었고, 각급 행정관이 될 수 있는 연령의 하한선이 규정되었으며, 콰이스토르가 되려면 반드시 일정 기간 군대에 복무해야 했다. 콘술 2명이 모두 로마에 있을 때는 그들이 달마다 번갈아 원로원을 관리했으나, 큰 전쟁으로 2명의 콘술이 다 외지에 나가 있을 때는 프라이토르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콘술은 매해 말에 실시되는 선거를 관리했는데, 그들이 자리를 비워 로마로 돌아올 수 없는 경우에는 딕타토르(독재관)를 임명했다. 콘술과 프라이토르는 점점 더 많은 군 지휘관과 총독이 필요해지면서 1년 임기를 채운 뒤에도 임페리움을 그대로 지니는 경우가 많았다.


  민회가 있기는 했지만 주된 정치 문제는 원로원에서 논의되었다. 원로원은 일정한 유력가문이 지배했는데, 이들은 코미티아 켄투리아타(병사회)에 영향을 미쳐 자기 가문 출신이 콘술과 프라이토르로 뽑히게 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유지했다. 원로원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을 승전케 함으로써 더욱 권력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전쟁을 선포하고 평화조약을 맺는 것은 명목상 인민의 권한이었으나 평화조약이 맺어진 뒤에 따르는 업무는 원로원이 맡았다.


  민회 가운데 가장 오래된 코미티아 켄투리아타는 민주적인 회의체는 못 되었다. 재산에 따라 나누어진 5개 계급에서 가장 높은 계급과 귀족에게 코미티아 켄투리아타를 이루는 193개의 투표권 가운데 88개나 주어졌기 때문이었다. 코미티아 트리부타(트리부스회)는 좀더 민주적인 기구였지만 농촌 트리부스(부족)에 속한 사람들은 부자를 빼고는 대개 투표를 하기 위해 로마까지 가기가 힘들었으므로 투표 결과는 부자와 귀족에게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BC 2세기에는 몰락한 농민이 로마로 몰려들었는데, 이들은 원래의 트리부스에 그대로 속한 상태여서 코미티아 트리부타는 평민회와 마찬가지로 로마 시민들의 회의체나 다름없었다.


  코미티아 켄투리아타와 코미티이 트리부타는 원로원이 이미 승인한 법안만을 표결할 수 있었으나 평민회는 BC 287년 호민관들의 권한 아래 독자적으로 입법할 권리가 주어졌다. 하지만 제각기 거부권을 지닌 10명의 호민관 가운데 상층계급이 1~2명을 회유하기란 쉬운 일이었고, 투표가 공개로 이루어지는 한 유권자들을 협박해 투표를 통제할 수도 있었다. 매우 일찍부터 로마 시민은 인민으로부터 탄핵을 받은 뒤에야 처형당할 수 있다고 규정되어왔으므로, 코미티아는 로마의 최고 형사법정 기능을 갖고 있었지만 후에는 프라이토르가 관장하는 상설 형사법정에 그 임무가 넘어갔다.


  BC 218년에는 원로원 의원과 그 아들들이 필요 이상의 상업활동을 하는 것이 법적으로 금지되었으나 원로원 자체는 제국의 상업 팽창에 관심을 갖지 않았던 것 같다. 다만 뒷날에 퀴테스(기사계급)로 발전한 계층은 국가의 하청을 받아 도로를 닦고 광산을 경영하며 군대에 납품을 하는 등 사업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이탈리아에 나타난 가장 큰 경제적 변화는 대농장인 라티푼디움의 발전이었다. 부자들은 국유지를 점유하는 한편 몰락해 가는 소농의 땅을 싸게 사들여 대농장을 만든 뒤 곡물을 재배하는 대신 값싼 노예로 대규모 목축을 경영하여 수많은 농민들이 땅을 잃고 로마로 몰려들었다. 한편 동부 지중해에서 사치품과 노예가 많이 수입됨에 따라 로마인은 동부로 많이 이주해갔고, 서부 속주에는 주로 군인을 중심으로 한 많은 로마인이 정착했다.


  로마는 일찍부터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았는데, 동부 지중해를 손에 넣은 후 그 영향력은 더욱 커졌다. 상류층은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작가들은 그리스 문학을 수용 ․모방했다. 한편 로마 종교와 달리 인간을 닳은 신을 섬기는 그리스 종교와 당시 그리스에 널리 퍼져 있던 회의주의는 로마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그리스의 영향이 로마의 전통을 파괴한다고 걱정했고 젊은이들은 그리스 문화에 매료되었으나. 뒷날 로마가 쇠락해갈 때에는 모든 로마인이 그리스를 정복함의로써 로마의 건전한 기풍이 약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리스가 로마에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한 영역은 법률뿐으로, 로마법은 12표법을 바탕으로 하여 독자적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BC 146년에 있었던 카르타고와 코린트의 함락은 로마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로써 높은 문명을 지닌 세력에 맞선 대규모 전쟁이 끝을 맺었던 것이다(히스피니아에서 계속되었던 전쟁은 BC 133년에 일단 끝을 맺었음). 그에 따른 결과는 제국의 행정 부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났다. 속주는 군사력을 기반으로 통치되었기 때문에 총독은 속주에서 절대적인 임페리움을 지닌 군사령관이었다. 이러한 절대적 권력이 종종 남용됨에 따라 원로원의 속주통제가 요구되었고, 이에 원로원은 로마시를 넘어 제국 전체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었다


  대규모 전쟁이 끝나고 다량의 전리품이 더 이상 들어오지 않게 되자 사회 기강이 흐트러졌고 이제껏 잠복해 있던 사회적 ․경제적 문제들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대농장 경영이 급속히 늘어났고, 로마 부근에서는 속주에서 들어온 값싼 곡물 때문에 곡물경작이 쇠퇴 ․붕괴되었다. 심지어는 그러한 영향을 비교적 적게 받았던 북부에서도 농민들의 장기간 종군으로 땅을 제대로 경작하지 못하게 되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므로 수많은 농민이 땅을 잃고 도시로 몰려들었으며 부자들은 몰락한 농민의 땅을 사들여 상당한 면적의 토지를 확보했다. 게다가 땅을 잃고 유랑하는 농민을 병사로 징집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히 군대는 약화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혁운동이 전개되었다. BC 133년에 호민관으로 뽑힌 티베리우스 그라쿠스는 개인이 점유할 수 있는 공유지 면적을 500유게라(익 1,214m')로 제한하는 법안을 내놓아 나머지 국유지를 땅이 없는 시민들에게 나누어주려 했다. 대토지 소유자들로 이루어진 원로원이 이에 반대하자 그는 평민회에 법안을 직접 제출했다. 그러나 귀족편으로 기울어진 호민관 마르쿠스 옥타비우스가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에 평민회는 그라쿠스의 주도 아래 옥타비우스의 호민관직을 박탈했는데 이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 뒤 더욱 강경한 내용의 법안이 통과되었다. 원로원파는 평민회의 개표 장소로 몰려가 티베리우스를 살해했고 피비린내 나는 탄압이 뒤따랐다. 하지만 티베리우스가 시작한 개혁은 계속되었고 시민들이 갖고 있던 초과 공유지가 더 이상 남지 않게 되자 시민이 아닌 이탈리아인들이 점유한 광유지까지 분배 대상이 될 위험에 처했다. 이탈리아인들은 이에 항의했고 개혁파는 그들에게 시민권을 주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좌절당했다.


  티베리우스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는 BC 123년 호민관이 된 뒤 전반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그는 공공수입을 늘려 그 혜택을 인민에게 돌리려 했고, 한편 에퀴테스에게 아시아속주의 주요세금을 거두는 책임과 행정관의 부패를 다루는 특별법정을 맡겨 원로원을 견제하려 했다. 그는 2번째로 호민관직에 오른 뒤 더 많은 사람에게 시민권을 주려 했으나 실패했으며 이듬해에는 호민관 선거에서 졌다. 그는 BC 121년 무력으로 개혁을 밀어붙이려고 준비하던 도중에 폭동으로 목숨을 잃었고 그를 따르던 민은 사람이 처형되었다. 그 뒤 10년 동안 인민을 위한 딴은 법안들은 대부분 철폐되었으나 에퀴테스를 위한 규정들은 정치적 이유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다.


  BC 120년에는 로마의 속국 누미디아에서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쟁이 일어나 이를 계기로 로마는 누미디아와 전쟁에 들어갔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일부 호민관들은 귀족들이 적에게서 뇌물을 받았다고 소문을 냈는데,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이틈에 부상할 기회를 잡았다. 에퀴테스 출신인 미리우스는 프라이토르를 거쳐, BC 107년 귀족과 맞선 호민관과 에퀴테스의 도움을 받아 콘술이 되어 누미디아와의 전쟁 지휘권을 받았다. 그는 전쟁을 잘 이끌어가지 못했지만 휘하에 있었던 루키우스 술라의 활약으로 BC 105년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에 앞서 북쪽에서는 게르만족이 남부 프랑스로 쳐들어와 로마군을 잇달아 격파해 로마를 두려움 속에 몰아넣고 있었는데 바로 이때 마리우스가 승리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알려졌고 그는 법의 제한을 뛰어넘어 BC 104년 또다시 콘술이 되었다. 게르만족이 이탈리아 공격을 늦추고 있는 동안 그는 콘술로 재선되었고, BC 102~101년에는 마침내 게르만군을 쳐부쉈다.


  한편 전통적인 징병제로는 병력을 충원하기가 매우 어려움을 깨달은 마리우스는 재산이 있어야만 병사가 될 수 있다는 자격을 무시하고 빈민들 사이에서 많은 의용군을 모집해 병적에 넣었다. 동시에 그는 호민관 루키우스 사투르니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여 퇴역 군인들에게 주둔 지역의 토지를 나눠주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인기를 얻은 사투르니누스는BC 99년에 다시 집정관직에 올라 온갖 폭력과 살인을 저질렀다. 마리우스는 이제 선택을 해야 했다. 사투르니누스를 편든다면 계속 플레브스와 에퀴테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마리우스는 제1시민(프린켑스)이 되어 한때 그를 경시했던 사람들에게서 높이 떠받들어지길 원했다. 그 때문에 원로원파가 그에게 이제까지 그의 편이었던 혁명파에게서 나라를 구해달라고 요청하자 마리우스는 거절하지 못하고 혁명파를 적으로 돌렸다. 그러나 대가는 보잘 것 없어서 그는 플레브스의 지지를 잃었고 위기에서 벗어난 과두정에게도 외면당했으며 위신을 크게 잃었다. 한편 옛 부하 술라는 더 많은 지지자를 모아 마리우스를 공격했다.


  대외적으로 BC 90년대에는 아시아가 문제였다. 아시아에서 폰투스가 흑해 주변에 제국을 세워 로마와 맞섰으며. 더구나 아시아 속주에서는 이탈리아인 사업가와 로마의 징세관들이 부정 ․부패를 저질러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었다. 원로원은 이를 척결하려 했으나. 가이우스 그라쿠스 이후 법정을 장악하고 있던 에퀴테스에게 오히려 역공을 당해 실패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도 불만이 점점 고조되어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시민권을 확대하려 했던 시도는 좌절되었고 마리우스 때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결과 이탈리아인 사이에서는 불만이 더욱 커져갔는데, BC 91년에 호민관이 된 마르쿠스 리비우스 드루수스는 농업과 관계있는 입법으로 빈민의 지지를 얻어 이탈리아인에게 시민권을 줄 것과, 법정을 원로원의 주도하에 두는 대신 원로원에 에퀴테스 300명을 새로 들여보내는 타협안을 내놓아 사법권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BC 90년 이탈리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키자(동맹시 전쟁) 로마는 재빨리 정책을 바꾸어 모든 이탈리아인에게 시민권을 개방하는 법을 통과시켜 반란을 누그러뜨렸다.


  이처럼 로마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틈을 타 폰투스는 강력한 공세를 취해 로마 영토로 쳐들어왔다. 로마에서는 여러 장군이 그 전쟁의 지휘권을 두고 겨룬 끝에 BC 88년 콘술이 된 술라가 지휘권을 따냈다. 그러나 당시 호민관이었던 푸블리키우스 술피키우스는 새로 시민이 된 이탈리아인들에게 투표권을 주려고 계획하고 있었는데, 마리우스는 그를 지지하는 대가로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술라는 예상을 뒤엎고 군대를 통솔하여 로마로 쳐들어와 술피키우스를 처형했으며, 마리우tm는 도망쳤다. 마리우스의 군사개혁은 장군 개인에게 충성하는 사병부대를 만들어냈는데 이들 사병부대가 이제 처음으로 로마를 점령했던 것이다. 공화정의 종말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로마를 점령하고 몇 가지 법을 통과시킨 술라가 동방에 가 있는 동안 마리우스는 다시 로마를 점령했으나 얼마 뒤 죽었다. 한편 술라는 폰투스와 싸워 이겨 화약을 맺고는 BC 82년 이탈리아로 되돌아왔다. 딕타토르(독재관)로 뽑힌 술라는 공포정치를 시작해 수많은 사람을 재판 없이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한편 포괄적인 개혁을 시행했다. 그는 호민관, 켄소르, 속주 총독, 에퀴테스의 권한을 줄이고 원로원의 권위를 드높였다. 그러나 그 목적은 단순한 반동이 아니라 정부에 다시 안정을 가져오는 데 있었다. BC 80년 초 술라는 딕타토르를 그만두고 콘술이 되었으며 그해 말에는 콘술직도 사퇴했다. BC 78년 술라가 죽자 그의 체제는 곧 공격을 받았지만 젊은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의 활약에 힘입어 공격은 곧 격퇴되었다.


  폼페이우스는 기회주의적인 인물로 원래 술라의 반대파였다가 전향해 출세를 했으나 다시 술라를 배반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술라 체제와 커다란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그 체제가 무너지도록 방관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한편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프라이토르(법무관)를 지냈던 퀸투스 세르토리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독립정부를 세웠다. BC 77년 원로원은 폼페이우스에게 세르토리우스를 진압하는 임부를 맡겼고 그는 오랜 싸움 끝에 BC 72년 승리를 거두었다. BC 74년에는 폰투스가 다시 로마에 도전했는데, 그 전쟁의 지휘권은 온갖 잡음 끝에 술라의 친척인 루키우스 루쿨루스에게 넘어갔다. 동시에 동부 지중해에서 해적들을 소탕할 책임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넘어갔고, 스파르타가 일으킨 노예반란(BC 73) 진압은 마르쿠스 크라수스가 자원했다. 그러나 크라수스가 반란 노예들을 거의 격퇴했을 때(BC 71)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에서 돌아와 남아 있는 노예군을 궤멸시킨 뒤 반란진압 공로를 가로채려 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이제 제각기 콘술직을 요구하며(BC 70) 맞섰으나 결국 힘을 합치기로 하고 둘 다 콘술이 되었다. 그들이 콘술로 있는 동안에는 술라 체제의 정치적 결정이 철회되었고, 호민관의 권한이 완전히 되살아났으며 술라 집권 이후 켄소르가 처음 선출되었다. 이로써 술라가 로마 공화정에 마련해놓으려 했던 법과 탄탄했던 권력의 기반들이 무너졌다. 선동정치가가 다시 등장했고 장군들은 개인적인 야심을 위해 부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합법정부를 지진 수 있을 만한 사람들은 이미 예전에 술라에게 제거되었기 때문에 술라가 고치려고 애썼던 상황은 오히려 더욱 심각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뇌물과 부질서가 난무했으며 속주에서는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원로원은 원래 외국 땅을 로마에 병합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통적으로 반대해왔으나 이 판례마저도 개인적인 야심 때문에 사그러들었다.


  정치적으로 BC 60년대는 폼페이우스의 시대였다. 그는 BC 69년 관례에 어긋나게도 속주 총독으로 부임하기를 거부하고 기회를 기다렸다. 그는 BC 67년 해적 소탕의 책임을 맡아 매우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다. 한편 루쿨루스는 폰투스와 싸워 승리했으나 자신의 부하들에게 인기를 잃어 정치적으로는 몰락했다. BC 66년에 동방 군대 총지휘권을 넘겨받은 폼페이우스는 폰투스에게 대승해 동방을 석권했다. 동방은 대부분 그에게 돈을 바치게 되었고 그는 로마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로마에서는 정권을 장악하려는 크라수스가 주도한 음모와 폭력이 난무하고 있었다. 또한 빈곤과 부채가 심각해져 혁명이 일어날 가능성도 높아졌는데 이는 민중파였던 포풀라래스(populares)에게 기회를 마련해주었다. 실제로 BC 63년 말 카틸리나라는 정치가가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콘술이었던 키케로에게 진압당했다. 그러나 로마에서 폼페이우스의 이익을 대변했던 키케로는 그에 대한 보상을 받기는커녕 폼페이우스와 귀족들 모두에게 냉대를 받았다. 동부에서 평화롭게 되돌아온 폼페이우스는 독재가 아니라 명예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군대를 해산하고 권력을 내놓았으나, 자신이 거느린 병사들에게 토지를 나누어주고 동방에서 그가 이루어놓은 일들을 비준해 달라는 주요요구들을 모두 거절당했다.


  바로 이때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히스파니아(스페인)에서 돌아왔다. 젊은 시절에 이미 뛰어난 재능과 드높은 야심을 드러냈던 그는 어느 누구도 적으로 만들지 않으려 했고 BC 63년에는 프라이토르도 지내지 않은 몸으로 폰티펙스 막시무스로 뽑히는 놀라운 성공을 거두었다. 카이사르는 BC 62년에 프라이토르가 된 뒤 총독으로서 히스파니아를 잘 다스렸고. 로마로 돌아와 BC 59년에는 콘술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콘술직에 있는 동안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 모두에게 신뢰를 얻어 정권을 장악했다. 3명 모두 그들이 바라던 것을 얻었는데, 특히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의 지휘권을 5년 기한으로 얻어 갈리아로 떠났으나 로마는 이제 옛 공화정 체제로 돌아갈 수 없었다. 키케로는 3명 사이의 연합을 깨뜨리려고 애썼지만 BC 56년 그들은 일약을 맺었고, 로마는 또다시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군 지휘권을 5년 더 연장할 수 있었고, 폼페이우스는 히스파니아 전역에 대한 특별 지휘권을 얻었으며, 크라수스는 돈과 명예를 얻고 싶었으므로 파르티아를 공격했다. 키케로는 마침내 권력 앞에 고개를 숙여 그들의 충실한 대변자가 되었다.


  폼페이우스와 결혼했던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BC 54년 죽고 이듬해 크라수스까지 세상을 떠나자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으로 폼페이우스에 못지 않은 위신과 부를 쌓아 많은 지지자를 거느리고 있었다. 폼페이우스와 당시 과두정부는 서로의 이익 때문에 결탁하게 되었고 이로써 카이사르는 고립되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로마로 소환하려 했으나 응하지 않자 그를 범법자로 탄핵했다(BC49).


  이에 대항해 카이사르는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와 갈리아의 국경선이었던 루비콘 강을 건너 이탈리아에 침입해 내란에 뛰어들었다.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의 신속한 행동으로 2개월 내에 이탈리아를 넘겨주고 그리스로 퇴각했다. 그는 히스파니아에도 군대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그리스로 건너가 폼페이우스를 패배시켰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갔으나 그곳에서 암살당했고, 카이사르는 남아 있는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아프리카에서 궤멸시킨 뒤 히스파니아에서 폼페이우스의 아들들이 일으킨 봉기도 진압했다. 그는 권력을 독점했으나 석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내렸다. 빈곤과 부채를 다소 경감시켰지만 전반적인 부채 말소나 재산의 재분배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는 또 개혁하려는 계획도 전혀 갖고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명예와 권력을 징악하고 1인 독재를 행사해나갔다. 그 결과 그에게 반감을 품은 사람들에 의해 원로원에서 암살당했다(BC 44. 3. 15)


  암살의 주역인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는 로마인이 자유를 되찾아 기뻐할 것이라고 여겼지만 사실상 자유를 찾게 된 것은 지배계급이었고 인민들은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반면에 군대는 카이사르에게 충성했고 원로원도 카이사르를 따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점차 로마 시 전체를 장악해갔고 암살자들은 동부로 도망쳤다. 그러나 안토니우스는 곧 카이사르의 양자 옥타비아누스의 도전을 받았다. 옥타비아누스는 아직 20세도 안 되었지만 키케루가 주도하는 원로원과 협력해 안토니우스에 대항했고. BC 43년에는 안토니우스를 패배시켰다.


  그러나 상황이 변해 권력을 독점할 수 없게 되자 그는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를 끌어들여 5년 기한의 3두정 체제를 이루었다. 그들은 브루투스와 카시우스를 격퇴한 뒤 최마 세계를 턱할 통치했다. 이탈리아를 맡게 된 목타비아누스는누 이인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와 결혼시켜 동맹을 맺은 뒤 이탈리아 부근의 섬들을 폼페이우스의 아들에게서 빼앗고, 세력을 키우려던 레피두스를 제거했다. 이로써 옥타비아누스는 서부를, 안토니우스는 동부를 징악하게 되었다. 그들은 제각기 자기 영역에서 원정에 나서 더욱 영토를 넓혔는데, 안토니우스는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해 이집트를 그의 군사적 ․정치적 기반으로 삼으려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로마 세계를 이집트에 넘겨주려 한다고 선전함으로써 많은 사람이 안토니우스에게 등을 돌리게 만들었다. 마침내 BC 31년 옥타비아누스는 콘술이 되어 안토니우스를 공격했다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부스와 클레오파트라를 파멸시켰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로마는 공화정 시대에서 제정시대로 넘어 가게 되었다. 공화정 초기에 글로디아, 디그니타스, 아욱토리타스를 크게 강조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투쟁한 결과 적대적인 주변 종족들로부터 국가를 열정적으로 방어하고, 토지에 굶주린 인구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로마의 영토를 확장하고, 사제들과 정부관들과 원로원 의원들로서 국가를 위해 유능하게 봉사한 지도자들의 세대가 등장했다. 로마가 비교적 좁고 동질적인 이탈리아라는 한계 안에서 팽창하는 동안에는 로마에서 귀족들이 벌이는 정쟁이 크게 확산될 기회가 없었고 국가 안정이라는 고도의 이상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그 정쟁에 연료를 제공한 가치관이 강화되었다. 그런 뒤 바로 이 가치관이 해외 확장과 그에 발맞춘 국재에서의 파괴적인 사회 경제적변화에 이바지 했다.


  귀족 개개인은 그 두 가지 상황에 힘입어 경쟁자들과 투쟁하기 위한 과도한 자원을 얻을 수 있었다. 오래 유지된 가치관을 가지고 이런 자원을 열정적으로 추구하는 과정에서, 공화정 귀족들은 서로간의 경쟁을 그들이 애지중지하던 국가 자체를 파멸로 몰고 갈 정도의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참고문헌

'로마사' 프리츠 하이켈하임 지음, 김덕수 옮김, 현대 지성사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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