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5. 14:11ㆍ교회사자료/10.세계사
로마의 미술
1.서론 2. 본론 1). 로마미술의 특징 (1). 그리스 미술의 연장 2).건축 (1). 가옥과 신전 (2). 세계의 통치자들을 위한 세계적인 건축 3). 회화 4). 로마의 조각상과 부조 (1). 초상:인물의 특성 (2) 역사부조 : 사건의 구체성 (3) 개인을 위한 부조 : 석관 3. 결론
1-서론
그리스가 독자적 문화를 구축하기 시작하던 시대만 하더라도 로마는 변방의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했다. 로마가 세워진 것은 기원전 8세기경 티베르강 유역의 한 작은 거주지로부터 출발하였다. 그러나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카르타고와 치룬 세 차례에 걸친 포에니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특히 기원전 146년의 제3차 포에니전쟁때는 이미 지중해 지역 문화활동의 중심지로 성장해 있었다. 삼두정치에서 승리하여 독재자의 위치에 오른 케사르는 현재 프랑스인 갈리아를 정복하고 게르마니아의 라인강까지 진출했으며, 그의 뒤를 이은 옥타비아누스는 그리스 헬레니즘 왕국인 이집트를 정복하고 스스로 공화정의 옹호자라 변명했지만 '위대한 자'를 의미하는 아우구스투스란 명칭에 걸맞게 로마를 제정으로 바꿔놓았다. 로마가 팽창하는 동안 로마는 군인, 상인들을 통해 외국의 선진문물을 왕성하게 수입하는 한편 공화정의 시대부터 벌써 토착문화를 유럽 전역에 전파하고 있었다. 이국적이면서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적 요소가 로마의 양식과 결합하면서 이른바 그레코로만 (Grecoroman)이란 독특한 양식을 창출하였는데 이러한 경향은 중세의 새로운 도 상과 형식이 나타나기 이전가지 지배적 양식으로 지속되었다. 로마미술은 대부분 그리스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으나 보수적이고 추상적인 그리스미술에 비해 훨씬 더 진취적이고 개방적인 특징을 지닌다.
2 본론
1). 로마미술의 특징
(1). 그리스 미술의 연장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그리스인들에 비해 세속적인 로마인들의 취향을 반영한 것은 미술이다. 강력하고 잘 조직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로마공화정은 그리스의 헬레니즘 국가들을 하나하나 복속시켰다. 마지막으로 케사르와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프톨 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그리스를 장악했으며 로마의 정복자들은 자신의 정복당한 나라의 문화재를 약탈하여 자신의 저택과 정원을 장식 했다. 로마인들이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그리스인들을 지배하긴 했지만, 그들은 그리스인들의 예술과 문화의 우수성에 굴복하였다. 로마인들은 그리스의 미술뿐만아니라 시, 수학사, 철학등에도 매료되었다. 이것은 그리스 지식인들과 장인들 - 교사, 학자,사상가,조각가,화가-에게는 대단히 즐거운 일이었다. 엄청나게 많은 조각들이 로마제국시기에(BC 31-AD 330)제작되었다. 그것의 대부분 들은 그리스 조각상의 모사품들이었다. 이것은 제국도처에 재료와 제작법을 알고있는 수 백명들의 숙련된 조각가들에게 일거리를 제공해주었다.
2. 건축
로마하면 우리는 판테온(만신전), 콜로세움, 개선문 등의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떠올리게 된다. 그만큼 로마미술은 건축으로 대표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로마가 예술사에 기여한 것은 건축공학이며, 특히 공리성,규모의 장대함은 현대적 관점과 기능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로마의 건축에는 아치, 등근볼트의 공학적 원리가 적용되었으며, 콘크리트와 같은 새로운 건자재가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바실리카나 개선문, 콜로세움, 대목욕탕처럼 기념비적이고 비종교적인 건축과 더불어 포장도로, 다리, 터널, 하수구, 운하 등 실용적인 토목공학도 발달했다. 로마건축을 대표하는 콜로세움은 대 경기장이자 기독교도를 박해한 역사적 사건의 현장으로도 유명하지만 그리스 건축의 세 양식인 도리아, 이오니아, 코린트를 모두 적용한 건축물이다. 특히 서기 79년 헤수비우스 화산폭발로 전 도시가 화산재로 뒤덮혀 버렸던 폼페이와 헤르클라네움의 유적을 보면 점포와 주택, 여러 층의 공동주택(아파트먼트와 같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로마인들은 알렉산더가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헬레니즘 도시인 알렉산드리아 를 건설했던 것처럼 유럽은 물론 북아프리카 등의 정복지역에 대경기장파 목욕탕, 도로 등을 갖춘 많은 로마식 도시를 건설했다.
(1). 가옥과 신전
로마인들은 그리스인들과 접촉하기 오래 전부터 가옥과 신전을 지었으며 그것들의 축조법에 관한 강력하고 오래되었으며 신성한 전통들을 갖고 있었다. 전통적으로 로마가옥은 그리스 가옥과는 달리 엄격하고 변경 불가능한 설계도에 따라 지어졌다. 로마인들은 전통을 대단히 존중했으므로 사회에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고 있는 가옥의 전통형식을 변경시키는 것을 꺼려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가옥에서 찬미했던 몇가지 특질들을 받아들이고자 하였다. 그들은 가옥 앞부분은 계속 전통적 방식으로 지었지만 뒤부분에는-집보다 사적인부분-주위에 임의적으로 방들이 배치된 그리스식의 페리스타일을 추가하였다. 전통은 로마의 사 원 형태도 좌우하였다. 사원들은 에트루리아의 선례에 따라 대개높은 축대 Podium 위에 지어져서 정면 계단의 층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셀라 cella (사원의 주실로써 단 하나라로 되어 있거나 혹은 세 부분으로 분할될 수도 있었다)는 축대의 넓이 전체를 덮으며 뒤쪽가지 뻗어 있다. 셀라가 덮지 않은 유일한 축대부분은 정면으로서, 이곳은 계단 끝에서 셀라 안으로 이르는 깊숙한 현관으로 되어 있다. 그리스 사원은 보통 그다지 높게 세워지지는 않았다. 대개 그것은 전체를 둘러싼 단 세 개의 계단 위에 지탱되었다. 이에 비해 높은 축대 위에 세워진 로마 사원은 사람들 위에 우뚝 솟아 있었다. 그리스 사원은 네 측면 모두가 많이 닳은 모양이었지만 로마 사원은 그렇지가 않았다. 계단과 현관으로써 강조된 정면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측면과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후면과는 뚜렷하게 구별된다. 실제로 후면은 너무도 하찮게 여겨서 종종 벽에 붙여서 지어졌다. 그리하여 로마사원은 자유롭게 선 건물로 있기보다 부조처럼 고정시키는 것이 가능하였다. 로마 사원들이 모두 이런식으로 로마의 전통과 그리스의 장식 사이의 절충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몇몇은 대단히 독창적 이었다. 그 중 가장 놀라운 것의 하나는 하드리안 황제 시대 (117-138)에 로마에 세워져서 다행스럽게도 오늘날까지 매우 훌륭하게 보존되고 있는 판테온 Pantheon이다.
(2). 세계의 통치자들을 위한 세계적인 건축
로마인들은 위대한 조직자들이고 위대한 건설자들이었다. 그들은 문명세계의 서부지역 전역으로 퍼져갔으며 그들이 가는 곳마다 식민지를 건설하고 도시를 세웠다. 여기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모형들에서 알 수 있는 극장과 원형극장, 사원등이 있다. 이런 건축들은 유럽 지역에서 볼 수 있으며 특히 북아프리카 여러 지역과 서아시아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로마제국이 확대되면서 콘크리이트를 이용하는 아치형 지붕기법과 건축기법들도 확산되었다. 헬레니스틱 전통이 오랫동안 강하게 남아 있었고 도시들이 크고 훌륭하게 설비되어 있었던 제국의 동부에서조차도 새로운 새로운 건물들이 로마의 모범을 쫓아 세워졌으며 오래된 것들은 보다 로마적인 생 활방식을 수용할 수 있도록 변경되었다. 목욕탕, 법정, 정부청사, 수도관(aqudeuct), 시장터- 이 모든 것들과 다른 많은 실용적이고 장식적인 건물들이 로마인들에 의해 본토와 해외에서 건설되었다. 모두가 기술적이고 창의력있게 처리되었지만, 그럼에도 대부분 동일하게 정려한 대도시 유형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제국이 멸망한 후, 곧 훌륭한 건축물들은 붕괴되기 시작하였다. 조각상들은 약탈되고 소각되어 석회로 만들어졌으며 대리석 겉장식들은 벽에서 도난당하고, 지붕들은 내려앉아 버렸다. 그러나 비록 폐허 속에서 일지라도 로마인들이 건설했던 육증한 잔해들은 여전히 방문객을 놀라게 하고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3. 회화
세속적 제재에 대한 로마인들의 관심과 취향은 회화에 특히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모든 후기 헬레니즘 시대의 예술처럼 로마의 회화는 그리스, 이집트, 에트루리아로부터 빌려온 요소를 절충한 특징을 드러낸다. 또한 종교적 영웅적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배경으로서의 풍경이 아니라 풍경화, 정물화 등 순수회화 장르가 이미 로마시대에 나타나고 있음도 주목된다. 서기 79년 베수비우스 산의 화산폭발로 화산재에 잠긴 폼페이와 헤르클라네움의 발굴을 통해 로마회화의 진면모가 드러남으로써 신고전주의 형성을 자극했던 것은 이미 잘 열려진 사실이다. 폼페이와 주변 도시들의 화가들과 실내장식가들은 위대한 헬레니즘 미술가들이 이룩해 놓은 업적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그리스 회화들이 대부분 유실된 반면 로마 회화는 폼페이 등의 매몰로 오히려 그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다.
폼페이 회화는 크게 네 가지 양식으로 나눠진다. 첫째, 제1양식은 기원전 2세기에 지중해 연안세계에 두루 보급되었던 양식으로 회 화와는 전혀 무관한 것이었다. 그것은 다른 종류의 대리석판처럼 보이도록 형태를 갖춘 채색된 석고로 단순하게 벽면을 덮은 것에 불과했다. 제2양식은 로마의 독창적인 창조였다. 제2 양식의 벽면들은 방의 경계가 뒤로 물러난 듯이 보이거나, 아니면 그것이 완전히 제거된 듯이 보이도록 그려졌다. 때로 인물들이 서있거나 앉아있는 낙간을 그리기도 하고 ,열주 사이로 멀리 잇는 풍경이 보이는 장면을 그리기도 했고, 또 어떤 때는 환영적인 기법으로 난간 위의 전체공간을 개방시켜 방안의 벽면들이 매력적인 정원처럼 보이게도 하였다.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그림들은 공간이 그럴듯하게 연장된 느낌을 주도록 언제나 합리적이고 자연스럽긴 하지만 재미있게 다양화되어 있다. 논리적이고 그럴듯한 이 양식에 싫증을 느낀 마술가와 그들의 주문자들은 새로운 것을 찾기 시작했고 마침내 벽의 평평하고 한정적인 특성을 강조하고, 미묘하고 복잡한 세부를 즐기며, 또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모든 외양을 공공연하게 거부하는 제3양식이 출현했다. 그러나 서기 62년 경 폼페이에 지진이 일어나 많은 장식들을 다시 장식해야 할 일이 발생하자 그들은 제3양식 대신 다시 환영적인 제4양식을 창안했다. 그들은 '제4 양식'에서 제2양식의 무한성과 제3 양식의 우아함 사이의 새로운 종합을 창조하려고 하였다. 폼페이인 '베티의 집 House of Vettii'에 있는 방은 제4양식 장식의 훌륭한 예를 보여준다. 다소 저속하게 그려진 이 방은 명랑하지만 약간 조잡한 폼페이 회화의 일반적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중앙의 그림들은 유행하는 그리스 원작들을 둔감한 솜씨고 모작한 것들인데, 연극적인 장면을 통해 다소 화려한 효과들을 추구한 것들이다. 훨씬 더 화려한 단편적인 그림으로 현존하고 있는 작품을 베티의 집과 같은 벽 구조 의 왼쪽 벽면 위에 원근법상으로 보여질 각도를 감안하여 아주 높게 설치되었을 것이다. 그림의 정교함, 색조 범위의 분명함, 화려한 솜씨등은 이 연극적인 풍경을 16 세기 후반 바로크 장식화의 어느 걸작과도 필적되게 한다.
4. 로마의 조각상과 부조
1). 초상 : 인물의 특성
로마인들은 기질상으로나 전통적으로 그리스인들과는 매우 달랐다. 그리스인들이 사상과 예술에서 추상과 일반화를 즐겨했던 반면, 로마인들은 그들 자신이 현실적이며 실용적이었듯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것을 선호하였다. 마치 증명사진을 보듯 묘사된 대상의 개성을 뚜렷이 보여주는 초상조각의 발달(케사르, 브루투스, 카라카라, 등의 초상조각)은 로마조각이 물려준 훌륭한 유산이었다. 초대황제 아우구스투스상은 그리스 고전기의 대표적인 조각품인 폴리클레이토스의 <창을 든 남자>의 형식을 로마식으로 번안한 작품인데 아마 그리스 출신의 예술가에게 제작을 의뢰한 작품이다. 폴리클레이토스의'창을 든 사람' 은 고전조각의 극치이다. 로마인들은 신중하게 구 축된 포즈가 인물상에 부여하는 평온함과 위엄있는 분위기를 깊이 음미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은 아우구스투스를 재현하는 데 있어 전체적인 윤곽을 제공하는 것으로 선택되었다. 이 작품을 아우구스투스의 백성들에게 그의 위엄에 대한 존경심과 아울러 품위와 자제력에 대한 찬미를 전하도록 의도된 것이었다. 그러나 '창을 든 사 람은 그 자체로 본보기가 될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로마인들의 취향과 위반되는 여러 가지 특징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창을 든 사람'은 이상적 인물상이었다-그것은 실제인물이라기보다 아마도 호머의 서사시에 나오는 영웅 아킬레스의 재현인 듯하다. 이 작품은 변화되어야만 했다. 그리하여 창은 등 사람의 머리는 아우구스투스의 실제 모습을 포착해내는 데 필요한 만큼 수정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우구스투스의 모습은 '창을 든 사람'의 순수한 형태가 충분히 반영되어 아주 아름답다. 누드인 반면 황제를 벌겨벗겨 놓을 수는 없으니까 조각가는 창을 든 남자의 형식에 로마장군의 갑옷을 덧붙여 놓았다. 또한 창을 든 남자에는 방향과 초점이 없으나 로마황제가 그렇게 몽상적 공간 속을 배회하도록 표현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황제는 그의 조각상 앞에 선 백성들을 압도해야만 했다. 그 결과 손을 내뻗어 군중들을 향해 연설하거나 명령하는 듯한 자세로 표현된 것이다. 여기에 조각가는 이 황제가 비너스의 비호를 받고 있거나 혹은 비너스의 자손임을 상징하려는 듯 비너스의 아들인 큐피드와 그의 상징물인 돌고래를 덧붙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2) 역사부조 : 사건의 구체성
로마 초상에서 보여지는 구체성을 추구하는 조각술은 로마 부조들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들 중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특별한 사건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기념물들을 장식하기 위해 조각된 역사 부조들이 있다(제단, 아치, 원주 등). 그리스 건축조각은 대개 초시간적인 신화들을 묘사하였다. 그래서 나름대로 기념적이었던 파르테논 프리이즈조차도 인물과 사건의 명료함과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는데 로마인들에게는 이것이 필요하고 의미있는 것이었다. 아우구스투스 시대 미술이 그러하듯이 주제에 위엄과 우아함을 부여하기 위해 그리스 모형이 이용되긴 했지만 로인의 사고가 전체적으로 스며있다. 그 제단을 두조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그 중 몇몇은 파츠테논 프리이즈에 조각된 행령상을 분명히 상기시켜주는 행령상을 보여주었다. 그리스에서처럼, 로마의 조각가 부조도 항상 채색이 되었기 때문에, 신전에서 약탈한 황금 물건들을 재현한 조각에는 도금이 되어있을 것이다.
(3). 개인을 위한 부조 : 석관
3세기의 1/4분기 이후 국가를 위한 공공조각은 거의 제작되지 않았다. 정부는 기념물을 세우는 일과는 다른 걱정거리가 있었다. 235년에서 284년 사이 스물 여섯 명의 황제가 재위하는 동안 그들은 끊임없이 찬탈자들에게 위협을 받았다. 단 한명 만이 자연사를 했을 뿐이었다. 내전이 제국을 휩쓸었으며 동시에 국경에서는 오랑캐들이 준동하고 있었다. 석관들은 여러 가지의 다른 방식으로 장식되었다. 그 위에 새기는 부조에는 가끔씩 그리스 신화나 로마인의 전투장면들, 또는 사망자의 생애에서 대표적 사건들을 묘사하기도 했다. 또한 그것들은 계절이나 박카스 축제의 환희의 장면들, 혹은 단순히 무성하게 드리워진 화환 등의 묘사로 장식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석관들 중 예술적인 걸작은 거의 없다, 그러나 미술사에서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들 중 많은 것이 고대 때부터 남아 있거나, 혹은 르네상스 때 에 발견되었는데, 그때 그것들을 굉장한 찬미를 받으면서 예술가들에게 큰 영감의 원천이 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로마 조각은 그리스 조각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로마의 독창적인 기여는 특별한 사람 및 사건들을 재현하고자 하는 로마 특유의 요구에 의해 자극 받아 초상과 기록 및 기념 부조물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2세기말부터는 표현과 장식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어 로마인들은 언제나 그리스 조각의 일부분을 차지하였던 합리성과 규제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3. 결론
시간, 전쟁 그리고 문화파괴주의 vandalism, 이 모두는 그리스와 로마 미술의 파괴에 기여하였다. 단지 단편들만이 남았지만 이들은 종종 후대를 위해 충분한 영감이 되었다. 이미 카롤링 왕조시기 Carolingian period 초엽부터 예술가와 사상가들은 예술과 문학에서 인간성과 교양의 모범을 찾아 이교도적인 고대를 돌아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 미술이 스스로 충분하게 진가가 알려지게 된 것은 겨우 르네상스 시대(15세기부터)에와서의 일이다. 그때 이래로 그것은 끊임없이 연구 · 모 사 · 찬미 ·분석되어 왔다. 신고전주의 시기(18세기)동안에는 사람들이 그리스와 로마 미술을 '고전적 고대'로서 같이 간주하는 대신 차이점들을 점차로 깨닫게 되었으 며, 그 이후로 이러한 구별은 더욱 분명해졌다. 새롭게 등장한 르네상스의 도시사회들은 그들이 고대의 도시사회들에 관해 배운 것으로부터 커다란 감명을 받았다. 수세기 동안 고대의 부흥은 문명인이 되기 위한 가장 가능성이 높은 목표처럼 생각되었다. 심지어 석고 주조물들이나 하찮은 라틴어 원전들조차도 예민한 눈과 마음을 과거의 영광에로 열어주기 위해 열광적으로 이용되었다. 20세기는 그와는 다른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한때 그리스와 로마 미술에 대해 느꼈던 열정의 강렬함은 사라졌지만 창조물의 아름다움과 힘은 그 옛날 영광스러웠던 그리스와 위대했던 로마에 대한 말없는, 그러나 웅변적인 증거로 남아있다.
참 고 문 헌
그리스 ·로마미술 , 수잔 우드포드, 예경산업사
이야기 서양미술 ·서양미술이야기, 오광숙 , 정은사
서양미술사 , E. H. 공부리치, 예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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