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니발과 2차 포에니전쟁

2008. 10. 15. 14:14교회사자료/10.세계사

한니발과 2차 포에니전쟁

 

1차 포에니 전쟁/ 전쟁 한니발 출생 후의 카르타고와 시대 상황/ 한니발의 등장과 2차 포에니 전쟁의 발발 / 2차 포에니 전쟁 - 알프스 넘어 이탈리아까지/2차 포에니 전쟁 - 전쟁의 전개 /2차 포에니 전쟁-스키피오의 등장/2차 포에니 전쟁에 대한 평가 /한니발과 스키피오 비교

 

1차 포에니 전쟁


  1차 포에니(페니키아 인과의 싸움) 전쟁은 시라쿠사의 메시나 침입이 발단이 되었다. 이제 막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한 로마와 이미 지중해의 해운 강국이었던 카르타고는 대외 팽창을 위해서 언젠간 만나야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그 시기에 로마가 카르타고와 싸우기를 택한 것은 너무 무모했다. 시라쿠사와 메시나 모두는 시칠리아 섬이라는 곳에 있는 도시 국가였는데, 이 섬은 카르타고와 로마의 중간에 위치한 곳이었다. 양국 모두 이 섬을 적의 수중에 놓이게 된다면, 바로 코 앞에 적군을 둔다는 것을 의미했다.


  흔히 전쟁은 전쟁 장소를 제공하는 곳의 피해가 더욱 큰 법이다. 당시 메시나는 시라쿠사의 침락으로 로마가 도와주지 않는 다면 카르타고에 도움을 청할 생각이었다. 로마는 이 문제를 고민하다가 결국 도와주기로 결정하고 시칠리아 섬으로 병력을 파견하기로 한다. 이 것이 23년간 계속된 포에니 전쟁의 발단이다. 농경민족이었던 로마가 바다를 무대로 한 시칠리아 섬에서 이미 해운강국로의 이름을 날려온 카르타고와 싸우는 것은 절대적으로 불리했다. 그리나 로마는 예상외로 해군력에서 카르타고를 압도하며 전쟁을 주도하게 된다. 그러나 로마는 무리하게 아프리카 원정을 강행하다가 참패를 하고, 2번의 폭풍우로 인해 많은 손실을 입었다. 그리고 뒤에는 하밀카르(훗날한니발의 아버지)라는 젊고 유능한 장수까지 파견했지만 결국 승리는 로마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강화 조약에서 시칠리아 섬에 대한 영유권을 완전히 상실했고, 이 의미는 카르타고가 지중해 서쪽바다에 대한 제해권을 잃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다.


한니발 출생 후의 카르타고와 시대 상황


  카르타고는 전쟁에서 졌지만, 로마의 통치를 받게 된 것도 아니고, 경제 활동에 제재를 받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카르타고 내부의 상황은 달랐다. 카르타고는 국내파와 국외파로 나뉘어져 있었다. 특히, 하밀카르가 속한 바르카스 가문은 국외파로 해외 통상을 부의 원천으로 삼는 리더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페니키아 인은 원래 통상 민족이었다. 반면 국내파는 농업경제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집단이었다. 곧, 해상권의 상실은 국외파 수입의 축소를 의미했고, 그 것은 그들의 카르타고 내의입지를 약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하밀카르는 국내파가 우세한 카르타고를 떠나 에스파냐에 새로운 거점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이제 막 40대에 접어든 한창의 나이였다. 그를 따르는 카르타고인들도 많았다. 에스파냐로 이주할 때 하밀카르는 당시 9살 난 아들 한니발이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자, 아들을 데리고 바알 신전으로 데리고 가 평생 로마를 적으로 삼을 것을 서약시킨 뒤에야 에스파냐로 함께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에스파냐에서도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는 하밀카르는 원주민을 상대로 패배를 하지 않는 엄청난성과를 거두며, 지배 지역을 급속히 확산시켜 나갔다. 카르타고의 농업 기술력과 에스파냐의 고아맥 발견으로 하밀카르의 식민지 경영은 성공을 거두었다. 하밀카르가 이주한 뒤 9년 뒤에는 이미에스파냐의 동부까지 제패되었다. 그리고 신카르타고(카르타고라는 나라의 이름은 카르타고라는 도시의 이름에서 나왔다)가 세워졌으며 바르카스 가문의 성도 세워졌다. 그러나 하밀카르 자신은 전쟁터에서 전사하여 이 도시가 세워지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그 뒤를 이은 하스드루발은 하밀카르의 사위이며 오랫동안 그의 부장으로 일해왔다. 이 때 한니발의 나이는 18살. 하스드루발은 유능한 후계자였고, 장인이 시작한 사업을 뿌리가 내리게 했다. 이렇게 에스파냐에서의 카르타고의 세력은 커져 갔지만, 로마는 경계할 틈이 없었다. 해적을 해결해야하는 문제가 생겼고, 북쪽에서는 갈리아인들이 쳐들어 왔기 때문이다. 물론 희마는 이 문제를 잘 해결하였다. 카르타고 본국에서도 로마에 대한 설욕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한니발의 등장과 2차 포에니 전쟁의 발발


  한니발이 26세가 되던 해에 하스드루발이 갈리아인 하인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한니발은 그 뒤를이어 에스파냐 통치자에 오른다. 카르타고 본국에서도 인정하였다. 전권을 장악한 한니발은 에드로강 이남을 완전히 제패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것은 원주민들 때문에 불가능했다. 28세가 되자 한니발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생각을 드디어 실천에 옮기에 된다. 그 일은 로마도, 카르타고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한니발은 사군토를 공략했다. 사군토는 당시 로마의 동맹 도시니까 한니발은 로마와 전쟁을 벌인 것이다. 로마는 한니발에도 사절단을 보내고 카르타고에도 사절을 보냈으나 양쪽 모두에게 무시당했다. 사군토는 8개월만에 함락되었고, 로마는 선전 포고를 하였다. 그리고 때는 본격적으로 2차포에니 전쟁에 접어들고 있었다.


2차 포에니 전쟁 - 알프스 넘어 이탈리아까지


  기원전 218년 5월, 29세의 한니발은 카르타헤나(신카르타고)응 떠나 로마로 진격하였다. 그 당시의 사람들은 한니발의 참뜻은 몰랐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젊은 장수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지방으로 들어가 론강을 건너, 알프스 산맥을 넘었다. 병력의 규모도 엄청났고, 부대에는 코끼리까지 함께 했다. 한니발은 왜 이런 선택을 하였을까? 과연 후세의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싶어서 이런 일을 한 것일까? 분명 바다로 가는 길도 있었고 육지에서도 길이 있었으나, 바다에서는 이미 희마의 적수가 되지 못 했을 뿐더러, 코끼리를 태우고 가는 것은 사실상 무모했다. 코끼리를 태우지 않고 가도 되지 않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으나, 코끼리는 카르타고 군의 중요한 전력이었다. 이미 로마인들은 외부와의 몇 차례의 전쟁으로 코끼리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을 무력화 시키려면 이미 이 성능이 입증된 코끼리를 데리고 갈 수 밖에 없었다. 물론, 한니발의 의마 침공에서는 로마로 도착하는 동안 코끼리가 모두 죽어서 사용할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알프스를 넘는 길이 아닌 곳으로 갈 경우에는 많은 로마의 동맹 도시들을 거쳐 가야 할 필요가있는데, 이 경우에는 많은 희생을 감수하게 된다. 지금 한니발은 원정을 가는 것이고, 그 곳에서 필요한물자를 조달해야하는 어려움을 감수해야하는데, 희생이 많아 질수록 본국이나 에스파냐를 통해 군병을 보충해야 했다. 그러면 싸움은 더욱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게 되며, 로마가 카르타고의 물자를 차단할 경우에는 후회를 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한니발은 어렵지만 여러 계산을 넣은 '길'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한니발이 카르타헤나를 떠날 때 이끌고 있던 병력은 보병 9만 명과 기병 1만 2천명, 그리고 코끼리 37마리였다. 이 중 본국을 수비하기 위해 2만 명을 파견했고, 본거지인 에스파냐를 수비하기위해 보병 1만 2천과 기병 3천, 코끼리 21마리를 남겨 놓았다. 에스파냐의 방위는 동생인 하스르두발에게 맡겼고, 막내 동생은 형과 함께 전쟁에 동행하게 된다. 기병은 이미 그 질이 입증된 누미디아 출신이 중심이었고, 이 기병들은 한니발의 주력이 된다. 보병은 리비아 출신과 에스파냐 인이2대 1로 섞인 혼성군이었다.


   그가 본격적으로 행군을 시작했을 때 에스파냐로 이루어진 병사들은 빠져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결국에브로 강을 건너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 쪽으로 들어갔을 때 그의 병력은 보병 5만에 기병9천, 코끼리 37마리가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로마는 이 전쟁이 시칠리아 섬과 에스파냐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여 군대를 둘로 나누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로마는 '한니발이 피레네 산맥을 넘고 있다'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고, 그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당황해 하였다.


  시칠리아 섬에 파견된 로마의 집정관도 섬의 평온한 분위기와 카르타고의 조용함에 당황하였다. 피레네 산맥을 건넌 한니발은 로마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5만명의 병력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미 한니발은 그것까지 계산을 하고 있었고, 프랑스 지방을 거치는 동안 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많은 갈리아부족들을 회유하거나 정복하면서 행군을 계속했다. 그리고는 1년 내내 수량이 풍부한 론 강을 건넌다.


  여기서 론 강을 건너는 것도 약간의 희생을 필요로 하였다. 근데 론 강 하류로 정찰을 보냈던 한니발의군대와 로마의 기병이 맞붙어 로마는 한니발의 의도를 알아차리게 된다.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진격하는 것. 그러나 이미 한니발은 많이 앞질러 가고 있었다. 한니발을 알프스 기슭에서도 많은 산악부족을 만났지만, 한니발은 그들을 회유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부족이 한니발에 대해적대심을 품었기 때문에 남아 있는 코끼리를 앞에 서게 하였다. 이 정도로는 적대 행위가 풀이 죽었을지 모르나 그래도 산악 부족들은 숲에서 활을 쏘는 등, 한니발을 괴롭혔다 희생자도 조금씩 나오고 있었다.


  9월에 이르자 산속에서는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 모양이다. 코끼리들도 이 추위에 기분이 나빠졌는지 걸핏하면 사나워 졌고, 그것을 달래는 병사들도 눈을 처음 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위험한 곳에 오면 코끼리들은 본능적으로 움직일 생각들을 안 한다 발을 한 발짝만 헛디뎌도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는 곳이 많았다. 수레나 코끼리들을 데리고 알프스를 넘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바퀴가 미끄러지거나 코끼리가 발을 헛디디면, 그것들은 사람을 길동무 삼아 저 밑으로 떨어지기 일 수였다. 숙영지 건설 따위는 엄두도 못 내어서 추운 밤을 천막 천으로 몸을 감고 지냈다. 한니발도 일개 병사와 마찬가지로 얼어 붙은 식사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고, 낭떠러지 아래서 선잠을 잤다.


  산을 오른지 아흐레가 되던 날, 고갯마루에 도착할 있었다. 이미 너무 깊게 들어온 병사들은 살던 죽든 간에 일단 이 산을 넘는 수 밖에 없었다. 푸른 하늘 밑에 희미하게 이탈리아의 평지가 보였다. 한니발은 마지막으로 병사들에게 힘을 불어넣고는 산을 내리가기 시작하였다. 한니발의 목표는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공격하는 것을 알고 있는 갈리아 인들은 더 이상의 게릴라 작전은 펴지 않았지만, 그래도 산을 올라갈 때보다 내려가기가 더 힘들었나 보다. 이미 겨울이 절정에 달해 있던 알프스는 밤 세 내린 눈이 빙판 길을 만들어 더 위험하였고, 산사태 때문에 길이 막히는 곳도 많았다. 코끼리나 수레가 갈 수 없는 길은 바위를 깎아서 길을 만들기도 하였다. 코끼리들 중에서도 발을 헛디뎌 병사들과 운명을 함께 하였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알프스를 넘는데 무려 15일이 걸렸다. 이 때 한니발에게 남아 있던 병사가 보병 2만에 기병6천이었다. 론 강을 건넌 시점에서 보병과 기병을 합하여 4만 6천이었으니, 피레네 산맥을 넘을 시점과 비교하면 무려 3만 3천의 시체를 뒤에 두고 온 것이다.


  후세의 감탄을 받을 만큼 위대한 업적에는 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리고 알프스를 넘은 뒤에 한니발은 15일간의 휴식을 주었다. 여기서 한니발은 알프스 이남의 갈리아 인들을 회유하기 시작한다. 알프스 이남의 갈리아 인들은 그 전의 역사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로마로의 남하를 시도하였지만 이미 그 기세가 컨이고 오히려 로마에 쫓겨 점점 위로 후퇴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들을 회유하여 한니발은 그 동안 행군으로 잃어 버린 전력을 보강하고자 한다. 그러나 동의하지 않고 한니발에 저항하는 부족은 모두 피의 제물이 되었다. 이렇게 알프스를 넘어 새로 얻게 된 갈리아 병력은 그 수가 1만을 헤아렸다 게다가 갈리아 인들은 누미디아와 함에 기병의 산지였다.


  한니발은 결코 무모한 계획을 강행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갈리아 부족들이 한니발을 믿지 못하거나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단 로마와 전쟁을 해서 그의 힘을 보여 줄 필요를 절감하고 있었다. 한 편, 로마도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맞이한 적과 싸우기 위하여 준비하였다. 그 동안 로마는 겨울엔 휴전기였으나, 지금 이 비상식적인 한니발을 상대로 그 것은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깨닫고 있었다.


2차 포에니 전쟁 - 전쟁의 전개


  한니발에 대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시피, 전쟁 초기에 승세를 잡은 것을 한니발이었다. 이 첫 전째전쟁은 티치노에서 기병전으로 시작된다. 당시 집정관이었던 코르넬리우스와 한니발은 지형 답사를 위하여 나왔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양쪽의 우두머리가 마주쳤으니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군의 사기는 대장의 행동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우두머리가 솔선하여 전투에 임할 때 비로소 병사들도 힘을 얻어 전쟁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사소한 싸움에서 후퇴를 한다는 것은 이유야 어떻든 간에 사기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이로써 2차 포에니 전쟁 첫 번째 전투가 벌어지게 되는데, 여기서 정찰을 나온 병사는 주로 기병대였다. 로마 쪽에는 경무장 보병이 있었으나, 이 들은 돌격해오는 기병에 겁을 먹고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


  기병들 간의 싸움에서 누미디아와 갈리아로 이루어진 기병의 위력을 실로 막강해서 로마 군을 패배를 하게 되었다. 이 전투는 소규모 싸움이었기 때문에 로마는 솔직히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집정관은 카르타고군의 기병의 전력이 희마측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 싸움 후에 카르타고는 로마의 군량 저장소까지 빼앗아 갈리아로부터 악탈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회유를 하기에 더 쉬워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갈리아 인들이 사태를 더 관망하고 있기 때문에 한니발은 로마 전쟁을 더욱 원하였다. 다음 전쟁부터는 본격적으로 대규모양상을 띄게 되었다.


  제 2회전은 트레비아라는 곳에 있었다. 한편 다른 집정관이었던 샘프로니우스도 로르넬리우스 진영에 도착하게 된다. 로마군의 병력은 이로써 4만이 된다. 그러나 이중 기병은 4천정도 밖에 되지 않은데 비하여 카르타고 군은 전체 3만 8천 중에 8천이었다. 기병 수가 질적으로나 수적으로 우세하였던 것이다. 이런 기병의 우세를 바탕으로 한니발은 그 동안 로마군이 겪어 온 다른 전투와는 다른 고차원적인 전쟁을 하게 된다. 한니발은 트레비아 강 서안에 있는 판목 숲에 군사를 매복 시켜 놓고, 해가 뜨기 전 로마군에 기습을 강행한다. 혼란 속에 로마군은 두꺼운 옷을 입을 채비도 없이 갑옷과 무기만 들고 전투를 하게 된다. 이 로마군을 유인한 후에 우세한 기병으로 양 옆을 공격하여 점점 로마군을 둘러싸는 포위작전이 시작된다.


  그리고 매복하고 있던 카르타고군이 출몰하자로마는 완전히 포위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도망친 군사는 약 1만. 2만은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승리한 한니발의 군대의 전사자는 대부분 갈리아 인들이었다. 다만 코끼리들은 한마리를 제외하고는 모두 죽거나 도망쳐 버렸다. 로마는 이탈리아 북부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고, 반면 한니발 쪽에는 그동안 고민하던 갈리아 부족들이 모두 붙어버렸다. 한니발의 군대는 순식간에 불어나 5만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서 한니발은 갈리아에게 쓴 회유책을 로마에게도 쓰려고 했다. 로마군은 사역을 시키고, 음식조차 제대로 주지 않았고, 반면 동맹국 군사들에게는 휴식과 식사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포로에 대해 차별대우를 함으로써 한니발은 자신의 목표는 로마를 정복하는 것일 뿐, 동맹국은 적으로 간주하지도 않는 다는 것을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다. 한니발은 이후의 전투에서도 로마 군 포로는 죽이고, 동맹국 포로는 풀어 주는 등의 회유책을 계속 쓴다. 그래도 이 정도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해서인지 한니발은 다시 큰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한다. 로마는 이 패배를 인정하고 추가로 2개군단을 편성하게 된다. 그 군대와 싸우기 위해 한니발은 에트루리아 지방을 약탈하고 불태우면서 진격하였다. 그리고 트라메시노 전투에서는 새로 편성된 2개 군단 등 2만 5천명을 전멸 시킨다. 역시 한니발의 군대는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2천명 가량의 손실은 갈리아 병사만의 희생이었다. 이 패도 또한 로마는 깨끗이 인정했다.


  그러나 에트루리아 도시 중에서도 한니발 쪽에 돌아선 곳도 하나도 없었다. 동맹국을 불지르며 약탈하고, 로마 군과 싸워서 이기면 회마 동맹은 자연적으로 해체 될 것이라고 한니발은 생각했다. 이 것은 갈리아 인들에게는 통했다. 그러나 역시 로마 연합에는 통하지 않았다. 이 것은 한니발이 오해한 최대의 실수였던 것이다. 한니발은 더욱 큰 결전을 원했고, 로마인들도 상황을 역전 시키고 싶은 마음에 병역의무가 늘어나는데 찬성하였다. 이로써 로마 역사상가장 큰 참패인 칸나에 전투가 발발하게 되었다.


  칸나에 전투는 그 뛰어난 한니발의 전술 때문에 아직도 세계의 많은 육군사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 로마는 보병 8만에 기병 7천 2백 명을 편성한다. 이에 비하면 한니발 수중에 있는 병력은 보병 4만에 기병 1만. 로마는 보병 전력상으로 수적으로 2배나 우세하며, 질적으로도 이미 압도하고 있다. 그러나 한니발의 기병대는 수적으로는 2천이나 딸리지만, 오히려 질적으로는 2배나 우수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이전까지의 전투를 살펴본 결과, 평원에서는 로마가 한니발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보병이 많아도 기병대의 우세함으로 포위작전을 쓰는 카르타고 군을 이길 수는 없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새로운 군대에 편성된 두 집정관은 평원에서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2배가 넘는 전력으로는 승산이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한니발은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로마군과 싸우기 위해서라도 칸나에에서 결전을 치르기로 마음먹었다. 처음부터 대규모 충돌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치되어 있는 상태에서 양쪽 군은 소규모충돌만을 벌렸다. 한니발이 2천명은 내보내면 로마 쪽에서도 2천명을 내보내고 이런 식으로 소규모 싸움이 계속 되었는데, 주로 로마 군이 이겼다. 한니발이 로마군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기원전 216년 8월 2일. 마침내 두 군대는 대규모 전쟁을 하게 된다.


  로마는 오판토 강을 오른쪽에 끼고 가운데 중무장 보병과 경무장 보병을 배치하고, 양 옆에 기병을 둘로 양분하여 배치하였다. 이에 대항하여 한니발은 가운데 앞에 갈리아 보병을 배치하고, 그 뒤 가운데에는 한니발의 정예병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양 옆에 갈리아 기병과 누미디아 기병을 나누어 배치하였다.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 초반에는 로마군의 우세 속에 진행되었다. 로마군의 주력인 중무장 보병의 위력이 카르타고 군의 보병을 압도했기 때문이다. 앞에 있던 갈리아 보병들은 희마 보병의 위력에 양쪽으로 흩어져 버렸다. 그 뒤에 나타난 한니발의 정예부대는 정예답게 로마군의 공격에 잘 견뎌 냈다. 그러나 싸움은 카르타고 군의 기병이 로마군의 기병을 물리치면서 달라졌다.


  카르타고 군의 기병의 의력에 압도당한 로마 기병대는 전멸하거나 흩어져 버렸고, 거기서 승리한 누미디아와 갈리아 기병은 로마의 뒤 쪽에서 공격해온 것이다. 그리고 도망 간 줄 알았던 갈리아 보병들이 로마군의 양 옆을 공격하면서 상황은 금세 바뀌어져 갔다. 7만 명의 로마 군은 5만 명의 한니발 군대에게 멋지게 포위당한 것이다. 이 전투에서 로마 군의 전사자는 약 7만 명 가량으로 헤아려 진다. 반면, 승리자 쪽의 손실은 불과 5천 500명 가량. 그 중 2/3 이 갈리아 병사들이었다. 이번에도 한니발의 주력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로마에는 설상가상으로 갈리아 땅에서 2개 군단이 전멸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한니발이 로마를 휘젓는 사이에 용기를 얻은 갈리아 인들이 봉기한 것이었다. 며칠 밤 사이에 로마는 8만 명에 달하는 군대를 잃었다.


  반면 카르타고 군의 그날밤 분위기는 가히 축제의 분위기였다. 장교들은 한니발에게 로마로 본격적으로 쳐들어가자고 진언했다. 그러나 한니발은 그러지 않았다. 아직도 시기상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의 이런 판단의 근거는 첫째, 견고한 대도시의 공성전에는 적어도 2~3년의 기간이 필요하고, 그렇게 되면 갈리아 군대를 신용할 수 없게 된다. 갈리아 인들은 그 특성상 의심이 많고, 따라서 능력을 제때제때에 보여주지 못하면 언제든지 배반할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둘째로 아직도 카르타고에서의 윈조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로마를 이기기란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셋째로 로마는 한 도시에 모든 것이 집중해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여러 도시가 로마를 배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쪽으로 계속 진격하면 항복을 받아내며, 대항하는 도시는 함락했다. 로마 연합의 큰 도시 중 하나인 카푸아는 배반을 했다. 이 것으로 만족하면서 그는 그 해 겨울을 카푸아에서 날 생각이었다. 그런 한니발에게 또 한가지 낭보가 날라 왔다. 마케도니아의 왕이 한니발과 동맹을 맺고 싶다는 것이었다. 당시 마케도니아의 왕은 25세로 필리포스 5세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알렉산드로 대왕의 후예임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케도니아의 그리스 패권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 동맹 사실을 안 로마는 침착한 대응을 하였다. 계속 제해권을 유지하는 것을 잊지 않았고, 마케도니아에 당장 싸움을 거는 것이 아니라, 한니발의 에스파냐 거점을 계속 묶어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로마에는 아직도 한니발과 맞서 싸우는 네 명의 사령관이 잘 견뎌 내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 연합은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로마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 사령관들은 정면으로 한니발에게 싸움을 걸진 않았다. 그리고 소규모 충돌만 되풀이 했을 뿐이다. 그들은 이기지도 않았지만 지지도 않았다. 그리고 한니발이 없는 카르타고군과 싸우면 이겼다. 끈질긴 4사령관의 추격에 한니발은 이탈리아 남부에서 꼼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 전선에 파견된 레비누스는 외교에 진면목을 발휘하면서 마케도니아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로마의 이 지구전법은 바로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카푸아, 시칠리아, 타란토 -즉 이탈리아 남부의 3대 도시- 가 한니발 수중에 들어갔기 때문에 전황은 한니발에게 유리해 보였다. 그러나 그 효과가 서서히 나타나고 있었다. 한니발은 점점이탈리아 내에서 아무 손을 쓰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구전법은 한니발에게 직접적으로 타격을 입히지도 않지만, 한니발이 없는 곳에는 반드시 승리하였으며, 한니발의 병사는 그 때마다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루비콘 강 이북에 파견한 로마 군사도 갈리아 일들이 한니발에게 유입되는 것을 막았다. 한니발은 그 동안 카르타고 본국이나 에스파냐로 지원을 받기 위해 항구 도시를 함락하기 위해 꾸준히 군대를 출동시켰지만, 그 뒤에 항상 로마가 배후를 습격했고, 막상 싸움을 걸면 나타나지를 않았다.


  카르타고 본국에서도 한니발에게 지원하기 위해 계속 선단을 파견했지만, 그 때마다 로마해군에게 가로 막혀 되돌아갔고, 결국 포기하였다. 에스파냐에서는 로마의 사령관이 계속 공격을 쉬지 않았다. 결국 로마는 타란토와 시칠리아를 다시 확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로마 쪽에는 전혀 손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지속적인 병력 감소로 매년 새로 병사를 보충해야할 필요도 있었다. 그리고 에스파냐에서 싸우던 두 사령관이 카르타고군과 하스드루발의 양면 공격을 받고 전멸하였다. 이탈리아반도 내에서 싸우던 4명의 사령관 중 한 사람도 목숨을 잃었다. 전쟁은 점점 후반기로 치닫고 있었다.


2차 포에니 전쟁-스키피오의 등장


  에스파냐 전선의 괴멸에 고심하고 있던 원로원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온다. 24세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훗날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였다. 그는 연령 미달인데도 불구하고 2개 군단의 총지휘권을 맡길 원했다. 이 것은 원로원을 고민하게 하였지만, 더 이상 연령에 적합하고 능력있는 장수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스키피오는 에스파냐 전선에 투입되기로 결정이 된다. 이것은 새로운 영웅의 출현을 의미했다.


  그 젊은 로마 영웅은 일단 정보부터 수집하는 신중함을 보였다. 그리고 새로 편성한 2개 군단과 패잔병8명을 합한 병력으로 임기가 시작하는 3월 15일에 정확히 행동을 개시했다. 20일 거리를 7일만에 소화하여 걷는 등, 강행군을 하고도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방책을 쌓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하루만에 석호를 건너 카르타헤나를 점령하는 묘기를 부린다. 그리고 카르타고 인들과 에스파냐 식민지 부족들이 힘과 제물로 쌓여진 관계라는 것을 알고는 온정주의를 베풀었다. 전쟁에 이겼으면서도 성의 주민을 노예로 삼지 않았으며, 카르타고가 잡아둔 유력 부족의 볼모들을 모두 되돌려 보냈다. 그 성과는 좋았다.


  이 결과는 로마인들에게는 기쁨이었지만, 한니발은 사방이 둘러 쌓여져 있었기 때문에 이 소식을 알지못했다. 한니발의 상황도 좋지 못 했던 것이다. 한니발은 끝없이 쫓아오는 한명의 사령관(마르켈루스)의 추격을 따돌리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사이에 다른 사령관이 타란토를 빼앗았다. 그리고 남쪽으로 도망쳤을 때 이미 그는 카르타헤나가 점령당했다는 소식뿐이었다. 그리고 이미한니발은 외부의 지원이 차단 당한지 오래여서 병력도 많이 줄어 들어있었다. 한편 에스파냐에 있는 스키피오도 계속 군대를 움직였다. 다시 한번 희마와 카르타고는 칸나에 전투이후 른 격전을 치르게 된다. 물론 이 전투에는 한니발은 없지만, 스키피오가 있었다. 스키피오는 에스파냐에 카르타고 군이 총 7만 5천 명이 있다는 것을 염두 해두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현재3군단으로 나누어져 있을 때 전투를 하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바이쿨라전을 치르게 된다.


  스키피오의 적의 주력을 무력화 시키는 작전을 편 결과, 바이쿨라에서는 2차 포에니전쟁 이후 일어난 대규모 전투 중 로마가 거두어 들인 첫 승이 된다. 여기서 충격을 받은 카르타고는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은 한니발을 도우러 이탈리아로 가고, 마고네와 시스코네가 스키피오와의 공동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들은 이 결정에 신속하게 대처했다. 그러나 하스드루발이 형(한니발)에게 보낸 전령이 로마군에게 잡혀 로마는 그의 행로를 알아 버렸다. 이 것을 안 로마 군은 하스드루발이 한니발과 만나기 전에 싸움을 걸었고, 하스드루발을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에스파냐에서도 스키피오와 마고네와 시스코네의 연합부대의 싸움이 전개되었다. 교무만으로는 칸나에전투와 대등하다는 일리파회전이 그것이다. 이번에는 카르타고 쪽 병사가 훨씬 많았다. 보병이 7만,기병이 4천이었고 반면 로마군의 보병은 4만 4천, 기병이 4천이었다. 기병의 질은 같은 수인 만큼 카르타고 쪽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그리고 로마군에 평범한 장군이 있었다면 전쟁은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군에는 스키피오가 있었다. 여기서 멋지게 승리를 거두는 스키피오는 카르타고에서 싸우지 않으면 이 전쟁이 끝날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기병의 산지인 누미디아와 내통하며 로마원로원에 가서 아프리카에서 싸워야하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많은 반대가 있었지만 한니발이 로마를 헤집고 다닌 것처럼 적의 본거지를 공격하는 것은 굉장히 효과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결국 그는 반대 당했으며 시칠리아로 임지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의 에스파냐 전적에 이미 매료되어 있던 많은 사람들과 도시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칸나에 전투에서 패한 역전의 용사들도 시칠리아에 있었는데 그에게 자원입대를 하였다. 그리고 그의 신중하고 완벽한 성격답게 정보 수집에 열중하였다. 군대도 훈련시켰다. 그가 아프리카로 원정을 떠나 도착하였을 때 많은 어려움에 부딪혔다. 결정적으로 누미디아로부터 기병을 지원받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스키피오는 낙담하지 않았다. 그는 불과2만 6천의 병력으로 9만 3천에 이르는 병력을 기습으로 격퇴시켜버렸다. 그리고 그 전투 후에 기운을 차린 카르타고 누미디아 군대를 다시 한번 격파함으로써 아프리카 전선의 주도권은 완전히 로마가 잡게 되었다.


  그러자 카르타고는 스키피오에게 강화를 제안하였다. 스키피오도 그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건이 맞아 한니발은 로마에서 나오게 된다. 그러나한 니발이 아프리카로 돌아오자 카르타고는 그 강화에 대해 강경한 자세로 나왔다. 이렇게 되면 다시희대의 영웅의 대결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 두 사람은 만나서 회담을 가졌지만 합의점은 찾지 못하였다. 역사상 영웅 둘이 만나 결투를 하는 것은 드물다. 이 2차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인 자마전투는 흥미롭게 전개되었다. 병력도 카르타고 군이 우세하였다. 보명 4만 6천, 기병이 4천, 코끼리가80마리가 가세하였다. 반면 로마는 보병이 3만 4천, 기병이 6천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투에서는 그토록 한니발이 중요하게 여기고 그의 전력에 주력으로 썼던 기병이 로마 쪽에 더 많다는 것이었다. 칸나에전투와 양상이 바뀐 것이다. 이 싸움에서 한니발의 작전 역시 완벽하였지만, 그 것의 허를 찌른 스키피오의 완벽한 승리가 연출되었다. 이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은 이탈리아에서 16년 간 함께 싸워 온역전의 용사들을 모두 잃고 카르타고로 돌아갔다. 그리고 강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원로원에서 말했다. 그리고 강화는 성립되었다. 로마로 돌아온 스키피오에 대하여 사람들은 '아프리카누스'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이 말 뜻은 '아프리카를 제압한 자'라는 뜻이다. 로마는 다시 돌아온 평화에 기뻐하였다.


2차 포에니 전쟁에 대한 평가


2차 포에니 전쟁 같은 위기를 잘 견뎌 내고, 그 것을 역전을 할 줄은 지중해의 어느 나라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로마는 그 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로마가 수천 년 동안 많은 외세의 침입에 시달리면서 건재 할 수 있었던 것은 2차 포에니 전쟁에서 보여 준 것과 같은 로마 체제 자체의 중요한 강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강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1. 최마 군대의 질적 우수성을 들 수가 있다. 어느 나라나 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로마만이 지중해 최강의 보병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그들은 병역의 의무를 자신처럼 생각하였다. 그 당시 전제 군주의 나라 병사들은 전쟁을 하는 이유는 그 나라를 위해 싸운다는 생각보다는 그 왕을 위해 싸우는 것이었다. 그리고 로마 시민병은 병역을 로마 최고의 명예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병사들의 사기와 충성심은 당연히 용병이나 비통치자 집단으로 이뤄어진 병사들과 질적으로 틀릴 수밖에 없다.


  2. 로마 연합의 탄탄한 유대 관계를 들 수 있다. 한니발이 생각하였던 것처럼 로마의 강점 중 하나는 로마 연합체라는 거대한 후원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로마에 대한유대감에는 변함이 없었다. 전쟁 기간 중에 고통과 희생도 함에 감수 하였다. 이 희마의 특이한 관계를 한니발은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그의 잘못이었다. 만약 그가 이 연합을 무너뜨릴 것을 자신의 전략에 넣었다면 그는 전쟁의 첫 단추를 잘못 채운 것이다.


  3. 마지막으로 로마 정치 체제의 우수성을 들 수 있다. 로마의 정치 체제는 희마에 대해 모르는 사람들도 그 것이 우수하다는 것을 무조건 알고 있다. 그들은 어려움에 있어도 흔들리지 않았고, 군론이 분열되지 않았다 로마가 카르타고, 한니발, 마케도니아의 3면 공격에 훌륭하게 대처할 수 있었던 것도 그 체제의 우수성을 입증해준 것이다. 이 상이 희마가 한니발을 이길 수밖에 없었던 강점이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비교


  누구나 마지막 전투의 결과를 알았을 때는 스키피오가 한니발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음에 소개하는 내용은 스키피오와 한니발이 대면하였을 때 대화하였던 내용이다. 자마 전투가 일어 난지 몇 년 뒤에 이 두 사람은 로도스 섬에서 우연히 만났다. 12세 연상인 스키피오가 한니발에게 정중하게 물었다.

'우리 시대의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즉석에서 대답하였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 대왕이요. 페르시아 대군을 소규모 군대로 무찔렀을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경계를 훨씬 넘어선 지방까지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소.'

실제로 알렉산드로 대왕은 3-4만의 군대로 페르시아의 10-20만에 이르는 군대를 격파하였다. 그도 한니발처럼 기병의 활용을 중시하였다. 그런 면에선 한니발은 알렉산드로의 제자라고 할 수 있다. 스키피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두 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입니까?'

한니발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하였다.

'에페이로스의 피로스 왕이요. 그는 우선 병법의 대가요. 그리고 숙영지 건설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기도 하오.'

스키피오는 계속해서 질문을 계속하였다.

'그렇다면 세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이번에도 주저 없이 대답하였다.

'그건 바로 나 자신이오.'

자마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아프리카누스'라는 칭호까지 받은 스키피오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질문을 하였다.

'만약 장군께서 자마에서 나를 이겼다면?'

한니발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내 손위는 피로스를 앞지르고 알렉산드로도 앞질러 첫번째가 되었을 것이오.'

한니발의 대답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동시대의 로마의 많은 사람들과 지금의 역사 학자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한니발이 더 우수한 장수라는 평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병과 보병을 유기적으로 활용하는 포위 작전은 알렉산드로 대왕이 창안하여 한니발아 그 성능을 입증한 것이기도 했다. 한니발의 불행했던 점은 그의 우수한 제자가 적에게 나왔다는 것뿐이다. 스키피오 같은 사람이 카르타고에 나왔다면 한니발은 그 자신을 최고의 장수로 평가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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