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x romana

2008. 10. 15. 14:16교회사자료/10.세계사

pax romana 

 

1. 로마의 전반적인 역사에 대하여 2. 아우구스투스의 정치 3. 로마가 중흥을 이룬 이유 4. 맺음말


1. 로마의 전반적인 역사에 대하여

로마의 정치 체제는 원래 왕정이었는데 그것이 공화정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제정으로 옮겨졌다. 공화제에서 제정으로 옮긴 기원후의 로마는 그 정치체제가 동방적 전제군주제와 다른 것이었으며 오히려 다분히 공화제의 전통을 존중한 비세속적 군주제였다. 그러나 3세기 후에는 제정이 강화되었으며 동방적 군주제에 매우 가까운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제정은 공화제적 전통이 남아있는 프린켑스제(Principatus)의 시대(BC 27 ~AD 284)와 전제군주제라고 간주될 수 있는 도미네제(Dominatus)의 시대(284~476)로 양분될 수 있을 것이다.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국가질서재건 3인위원회가 5년 임기로 구성되었다(BC 43). 그러나 국내의 공화주의자들의 세력이 거의 쇠퇴한 후 이 위원회는 제2차 3두정치로 전환되었다. 옥타비아누스(Octavianus)는 서방 속주, 레피두스(Lepidus)는 아프리카 지방, 안토니우스(Antonius)는 소아시아 및 이집트를 관장하게 되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부하 장군이었으며 그의 부인옥타비아는 옥타비아누스의 누이였다. 안토니우스는 클레로파트라에 빠져 옥타비아와 이혼하였는데, 이 때문에 옥타비아누스와 대결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여하튼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의 세력을 배경으로 안토니우스의 직권을 박탈하고(32 BC), 클레오파트라에 선전포고하였다. 이 싸움은 서방적인 지배체제와 헬레니즘적 군주제 전통과의 충돌을 의미하였다. 악티움(Actium) 해전(31 BC)에서 옥타비아누스의 해군은 아그리파(Agripa)의 지휘하에 안토니우스왕 클레오파트라의 연합함대를 격파하였다.


  악티움 해전의 승리로서 전 지중해 세계가 로마의 세력권 안에 완전 통합되었으며, 로마 안의 공화제 전통을 고수하려는 공화파가 완전히 후퇴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국내외의 질서가 회복되었다는 이유를 들어 자신에게 위임된 권력 일체를 '로마 윈로원과 시민'에게 반환하였다(27 BC). 그것은 카이사독재자라는 소러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러한 옥타비아누스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그에게 공화제 하에서 가능한 최고의 권한을 부여하였다. 즉 종신 집정관, 최고재관 원로원 의장 등을 겸임한 그에게 임페라토르(Imperator, 전승 장군 의미)와 아우구스투스(Augustus, 존엄한 사람)의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는 스tm로를 나라의 제1시민(princeps)이라 칭하였으나, 로마의 정치체제는 실질적인 제정으로 전환하였기 때문에 역사적으로는 그를 아우구스투스 대제라 칭하게 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취한 통치형태는 카이사르의 군주정(monarchia)이나 나중의 디오클레티아누스 이후의 전제정과 상이하였다. 직권에 있어서는 공화제적 전통 내에 머물러 있는 것이긴 하였으나, 그는 국민의 누구보다도 우월한 개인지배의 체제를 취하였다. 자기 자신이 쓴 「아우구스투스의 업적록」 (Resgestae divi hugusti) 34항에는 다음파 같이 적혀져 있다. '나의 제6차 및 제7차 집정관직 재임 중 내란을 진압한 후 전 국민의 동의를 얻어 국가주권을 나 자신의 권한으로부터 로마 원로원과 국민에게 이양하였다. 나의 이러한 공적․봉사 때문에 원로원 의결에 의하여 나는 Augustus의 칭호를 받았다‥‥‥ 그 이래로 나는 권위에 있어서 어느 누구보다도 우월하지만, 그러나 관직에 있어서 나의 동료들보다 더 이상의 권력을 장악하지 않았다. '


  간단히 말해서 아우구스투스의 제정은 당시의 시대적 과도기를 고려하여 성립한, 공화제의 명분 아래 이루어진 독재체제라고 말할 수 있겠다.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정치의 2대 기본은 군재와 재정이었다. 그는 군편제를 개편하여 18군단(legion)으로 줄이고, 복무연한을 16년에서 20년으로 연장하였다. 상비군은 외적과 근접한 지방, 예를 들면 스페인, 포나우강 지방, 아프리카 등에 반영구적으로 장기 주둔하도록 했다. 근위군은 로마에 주둔하였는데 9대대로서 9,000명 가량이었다. 국가재정면에서 본다면 관리와 같이 무보수인 로마의 군대는 전리품이나 사재를 몰수하여 비용으로 충당하였다.


  징세청부제는 폐지되고 그 대신 관리가 파견되어 징세하였다. 속주의 경우 국고는 원로원의 소속(aerarium)과 황제의 소속(fiscus)으로 양분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가 전반적으로 현상유지 및 방어 ․정비의 체제를 취하게 됨에 이르러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시작되었다. 평화시대의 로마는 국가영토의 극대화를 달성했으며, 대내적인 정치 및 경제를 안정시켜 적어도 사회적 모순이 표면화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였고, 학문․예술을 발달시킬 수 있었다.


  로마제국내의 많은 도시에 교량과 수도가 설치되고 도로가 정비되었다. 수도 로마시는 '벽돌의 도시‘에서 '대리석의 도시'가 되었다. 상공업은 활기를 띠고 사회전체에 평화와 안정이 이루어졌다. 전통신앙은 회복되고 신전이 세워지며 라틴문학의 황금시대 이른 바 '아우구스투스 시대'가도래하였다.


  76세의 나이로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후(14년) 양자인 티베리우스(Tiberius) 및 친족 4명이 연이어 재위를 계승하였으나 칼리굴라(caligula)와 네로(Nero) 등 대체로 무능하였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의 통치기반은 동요되지 않았으며, 이른바 5현제시대(Nerva, 96~98---Trajanus,99~117---Hadrianus, l17~138---Antonius Pius, 138~161---Marcus Aurelius, 161~180)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까지 지속되었다.


  기원전 1세기에서 2세기에 걸쳐 로마제국은 그리스 문화를 확대한 대규모의 보편문화를 형성하여 찬란한 외관을 보인 안정기였으며, 수도 로마시가 거대한 로마제국의 통치중심이었다. 그러나 각 지역마다 주요도시가 있어서 지역적 경제활동의 중심이 되는 한편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도로들이 매우 발달되어 제국은 전체적으로 내적인 통합체를 이루고 있었다. 간단히 말해서 로마제국은 많은 도시들이 집결된 거대한 조직체라고 볼 수 있었다.


  기원전 1세기 초에 이탈리아 반도의 도시들은 로마시와 동등한 위치로 격상되었으며, 속주의 도시들도 점차 자치를 획득하고 자유시(municipia)의 특권을 얻게 되었다. 속주에서 도시가 발생하게 된 사정은 도시마다 상이하였다. 즉 스페인이나 갈리아 지방에서는 대체로 식민으로 도시가 발생하였으나, 특별히 스페인의 타라코(Tarraco)나 갈리아의 리옹(Lyons) 혹은 영국의 요크(York) 등은 행정 및 종교행사의 중심이었으며, 군대가 20~25년 장기 주둔하는 변경에서는 병영을 중심으로 여관 ․술집 ․상점 등이 모여 도시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는 막대한 인구가 거주하였고, 상 ․하수도를 비롯하여 극장 ․공동목욕탕 ․경기장 등의 공공건축물과 문화시설이 구비되어 있었다.


  제정 초기의 경제는 방대한 영토를 획득하는 과정에서 증대한 지하자원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전통적이며 기본적인 경제활동인 농업은 갈리아, 스페인, 브리타니아 등에서 곡물이 유입됨으로써 위축되는 경향에 있었다. 그리하여 반도 안에서의 농업생산은 포도․올리브 등의 과수재배로 전환하였다. 그러므로 로마제국의 총 경작면적은 증가하였으나 로마인에 의한 농업생산은 저하하였다.


  자기 소유의 토지를 가진 자영농의 수는 줄어들고 대지주의 대농장이 소작인(coloni)에 의해 경작되었다. 이와 같은 경제적 변동으로 사회적 변화가 수반되었다. 토지를 잃은 무산자는 증가하고 노임은 하락하였다. 토지를 소유한 종래의 구귀족은 몰락하고 속주에서의 경제활동을 바탕으로 한 신귀족이 그들을 대신하여 사회적으로 대두하였다. 이와 같이 사회계층의 변동에 있어서 사회적 불안의 요인은 항상 잠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1~2세기에는 자영농이거나 노예층이거나 전체적으로 로마 국민은 안주하는 외관을 보였다. 따라서 사회적 동요가 두드러지기 시작한 것은 2세기말에서 3세기에 걸친 시기에 이르러서였다.


  이 때부터 로마는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즉 로마인의 사치 생활, 라티품디움의 Colonus로의 전환, 그리고 관료적 전제정치의 발달에 따른 정치 모순, 징병제의 용병제로의 전환에 따른 국방상의 문제 등이 원인이 되어 로마제국은 몰락하였다. 그리하여 Constantinus(280-337)가 도읍을 Byzantium으로 옮겨 Constantinopolis라 이름을 고치고 또 375년 게르만족의 일파인 서고트족(Visigoths)이 제국 내에 침입한 뒤에는 더욱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395년 Theodosius(346-395)가 죽은 뒤 로마제국은 그의 두 아들에 의해 분할되었다. 형 Arcadius는 동방 헬레니즘 세계를, 동생 Honorius는 서방 라틴 세계를 각각 지배하여 동서의 두 로마제국으로 갈라졌다. 서로마제국은 476년 게르만 출신의 용병대장 Odoacer에 의해, 동로마제국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침입에 의해 각각 망하였다



2. 아우구스투스의 정치


  전체적으로 로마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 중에서 내가 유심히 살펴본 부분은 로마의 역사 중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전제 정치이다. 아우구스투스는 Grachus(BC 153-133)이래의 혁명의 1세기는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종말을 고하였다. 이 위대한 공로자를 백성은 환호로써 환영하였고 원로원은 그에게 Augustus라는 존칭을 주었다. 원로원은 여전히 남아 있어서 공화정이 유지되고 있었으나 사실에 있어서는 옥타비아누스의 전제정치와 다름이 없었다.


  아우구스투스의 대외정책은 적극적이었던 카이사르와 달리 이미 얻은 영토를 지키는데 힘썼다. 이러한 소극적인 방침은 로마제국 팽창의 한계를 결정하여 도나우강 저쪽의 게르만 세계를 로마화하는 기회를 잃었다. 아우구스투스이후 악 2세기 동안 이른바 '로마의 평화'(Pax Romana)가 이루어져 표면상 경제적으로 번영하고 라틴 문예의 황금시대를 맞이하는 듯 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독재정치로 공화제가 무너진 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와 함께 황제가 되었다.


  그는 회복된 공화정의 수반을 뜻하는 '프린켑스'(제1시민)로 자처했기 때문에 그의 통치는 원수정으로 알려졌지만, 공화정의 회복은 겉모습에 불과했고 사실상 독재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는 무한한 인내심을 가지고 로마 생활의 모든 측면을 교묘하게 효율적으로 관리했으며, 그리스․로마 세계에 지속적인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렇게까지 원로원이나 시민들에게는 공화정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전제정권을 유지하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선은 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와 달리 카리스마를 지니지도 못했으며 사람들을 이끌어낼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주위에는 아그리파나 등과 같은 오른팔이 있었지만 카이사르에 비해서는 따르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원로원에서 연설을 할 때에도 카이사르가 어떤 발언을 하면 원로원의 의원들은 어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을 정도로 그의 기세에 눌러버렸지만 그에 반해 아우구스투스는 이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곳곳에 있어서 그의 황제의 위엄은 많이 흔들리곤 했다.


  그래서 그는 원로원에서 겉으로 공화정 복귀를 선언하면서까지 여론과 원로원의 눈치를 봐야만 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즉흥 연설에 자신이 없고 특히 중요한 의안을 다룰 수 있는 경우에는 미리 준비한 원고를 낭독했다고 한다. '내가 일곱 번째 집정관이 된 해 (기원전 27년)에 그 때까지 시민 모두의 동의에 의해 절대 권력을 부여 받아 내전을 종식시켰으므로 이제 나는 한동안 행사했던 권력들을 포기하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손에 되돌려주었다'.


  다른 역사가들의 기술에 따르면 브루투스를 비롯한 반대파를 쳐부수고 안토니우스라는 경쟁자도 물리치고 로마 세께의 유일한 절대 권력자가 된 35세의 옥타비아누스는 마치 싸움을 끝낸 전사가 무기를 내려 놓고 갑옷을 벗어던지기라도 하듯 의사단에 줄지어 앉은 원로원 의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고 한다. '내 한 몸에 집중되어 있는 모든 권력을 여러분 손에 돌려주겠소. 무기와 법률, 로마의 패권하에 있는 모든 속주를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손에 되돌려줄 것을 선언하는 바이오.'


  군사와 내정과 외치를 모두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의사당은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환호를 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속으로는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전제정을 만들어나갔다. 아우구스투스는 전제정을 함으로써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 것일까? 그는 전제정이야 말로 로마의 넓은 대륙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공화정을 통해서는 서로의 의견만 분분할 뿐 나라에는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또한 원로원의 의원들이 자리를 오래 지킴으로써 점차 보수적으로 가는 성향을 간파하여 그들의 세력 강화를 막아보려고 하는 것이었다.


  결국 아우구스투스는 그의 권력욕이나 개인적인 이익이 아니라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전제정을 편 것이다. 이는 그가 정치를 할 때도 항상 공과 사를 분명히 하고 항상 국무를 맡을 때에는 개인적인 사견이 아니라 국민과 나라를 항상 생각하는 정치를 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3. 로마가 중흥을 이룬 이유


  로마의 특징 중에는 '노블리스 오블리제'라는 말이 쓰일 정로로 항상 high class들은 항상 그들의 윤리 의식을 지키는 것을 철칙으로 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지위에 맞게 행동하려고 노력한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 라는 말은 제계의 많은 대부분의 성공적인 사업가, 지민 지도자들 또 재능 있는 개인들이 자선활동에 나서게 하는 중요한 동기 중 하나였다. 부와 재능을 자신만을 위해 사용되는 것을 이기적이라 생각하고 그 부와 재능을 이웃과 사회에 나눔으로써 인생의 새로운 즐거움을 느끼는 것이다.


  미국의 강철 왕 앤드류 카네기는 그가 이룬 부로 인해 사회에서 특권을 얻었고 그 특권은 그에게 사회에 그의 많은 재산을 기부하도록 요구했다. 이것이 바로 노블리제 오블리제의 대표적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박사라든지 얼마 전 300억을 대학에 기탁한 정문술 전 미래 산업 사장도 그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는 일부일 뿐 우리나라 사회는 어떠한가? 매일 신문 기사 1면에 장식하는 정치인들 고위층 인사들의 뇌물 연루 사건. 어떻게든지 지위를 이용해서 실리를 챙기려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들은 그들의 지위에 맞지 않는 행동을 서슴없이 자행하여 우리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사람들에게 고위층인사들은 다 저런가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로마라는 나라가 기원전에 존재했는데 태평성대를 이룬 이유는 바로 ‘노블리스 오블리제’ 그들의 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로마의 귀족층들은 자신이 자리를 물러날 때 자기의 재산을 공공시설 등에 기부하거나 도로나 다리를 만들고 그곳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는 등 자기의 이름을 명예롭게 하고 공공의 이익을 중시하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또 로마는 전쟁을 치루면서 자기의 영역을 넓히고 그러면서 많은 다른 종족들을 영입했는데 그들에게 로마시민권을 주면서 자기의 시민들이 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점에서 그들의 개방적인 면을 볼 수 있다.


  다만 로마인은 이기지 않고 관용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이기고 나서 관용을 베푸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로마인은 외국인에게도 관대한 정책을 폈다. 로마인들은 시민법이 적용되고 외국인은 만민법이 적용되었는데 이것은 물론 혜택이 달랐다. 그러나 외국인이라고 해서 로마시민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로마시민이 되고 실은 외국인은 어느 정도의 군복무를 한다면 로마시민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이 제대하면 그 사람들이 정착할 수 있는 곳을 마련해 주었다. 이런 사람들이 정착한 곳에서 현지인 결혼시켜 그들의 자제 또한 로마 시민으로 칭해주었다. 그래서 이 지역 또한 로마의 땅으로 승격시켰다. 지금의 유명한 도시인 쾰른도 이러한 곳이었다.


  이러한 정책으로서 로마는 다민족을 로마의 시민으로 승격시킴으로서 다원화 정책을 편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도 똑같을 교육을 시켜서 그들이 어떠한 능력을 보인다면 그들도 원로원까지 뽑힐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이 정책을 씀으로써 로마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일까?


  그것은 기존의 로마 시민들로 이루어진 원로원 의원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일구어낸 개혁과 정신을 모르고 자기의 자리가 보장되어 왔기 때문에 안주하면서 보수화될 경향이 매우 높다. 그러나 이러한 외국인들로 이루어진 로마 시민들은 어떤 성과를 보임으로서 자기를 인정받고 자기의 입지를 구축하려고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진취적인 개혁정치를 하려고 하는 노력하는 결과 그들 또한 황제가 된 경우도 있었다. 이런 정책을 통해서 로마제국은 정체적이고 보수적인 정치를 탈피하고 혁신적이고 진취적인 정치를 하게 된다. 이것이 로마 제국의 원동력인 것이다. 이러한 좋은 정책은 오늘날에서도 본받을 만한 모범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미국이 하와이를 미국의 땅으로 편입하고 다원화 정책을 써서 지금 강국이 된 것도 로마 제국의 이런 제도를 본받은 것 같다.


  로마의 특징은 뭐니뭐니해도 실용성을 들 수가 있다. 오늘날 사람들이 두고두고 로마인에게 고맙게 여겨야 할 일이 세 가지 있다. 바로건축과 토목, 로마법, 정치체제이다. 로마인은 그리스인보다 철학, 예술 분야에서는 뒤떨어 졌지만 그리스인이 관심을 두지 알았던 실용적인 분야에서 그들의 독자성을 두드러지게 나타내었던 것이다.


  로마는 건축과 토목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특히 지붕을 둥글게 만드는 기술 덕분에 높이와 넓이의 제약을 극복하고 장대하고 웅장한 공공건물을 만들었다. 따라서 이제까지 지붕을 지탱하기 위해 필요했던 기둥은 로마 시대로 들어오면 장식용으로 쓰이게 된다. 또한 로마는 콘크리트를 최초로 발명하였고, 이 값싸고 간편한 재료와 에트루리아의 아아치를 응용하여 개선문, 광장, 경기장, 공중목욕탕, 도로, 다리, 상하수도 등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대규모의 건축과 토목은 광범한 제국의 통치와 실질적인 시민 생활에 필요한 것이었으며, 여기에 창작이나 미학보다 현실성과 실용성을 강조한 로마 문화의 특징이 잘 나타난다.


  로마법은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많이 변했고 그때그때 보완된 내용도 많다. 고마법의 기초는 기원전 450년경 공포한 12표법에 바탕하고 있다. 그때까지의 관습법을 성문화한 12표법은 그 뒤 재판의 판례나 해석 등이 보충되면서 점차 시민법으로 발전해 갔다. 로마가 제정으로 넘어간 뒤에는 시민에게만 적용되던 시민법이 로마 제국 내의 모든 민족에게 적용되는 만민법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로마법은 6세기에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가 편찬한 '로마법 대전'에 집대성되었는데 여기에 담긴 '정의'와 개인의 권리에 대한관념은 오늘날 서양세계의 모든 법전 속에서 맥박치고 있다. 증거로서 나폴레옹 법전은 로마법전을 직접 모방하였고, 독일에서는 1900년까지 로마법이 그대로 적용되었으며, 미국 루이지애나주의 법률에는 아직도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조항들이 엿보이고 있다.


  로마가 남긴 무형의 유산 중 하나는 군웅이 할거하던 당시의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는 과정에서 만든 갖가지 공공 조직이나 제도  통치술이다. 로마의 다양하고 이질적인 민족, 전통, 문화, 언어, 종교를 하나의 제국하에 묶었으며, 그러한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고전 문화를 발전시키고 누릴 수 있었다. 이 실용적인 기술들은 오늘날에도 계속 전승되어서 내려오고 있다.



4. 맺음말


  이 글을 쓰면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와 다른 여러 가지 로마 서적도 많이 읽게 되었다. 읽으면서 놀라운 것은 로마인들의 정신세계가 우리현대인들에게 일깨워줄만한 높은 수준이라는 것이다. 읽으면서 로마인들에게 매력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시대의 정책과 특히 전쟁을 할 때 전략을 보면 너무나 기발하거나 대단한 것 이 많았다. 그 때의 전쟁의 전략들이 걸프전에 이용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것이 사실일까? 의문을 가졌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Rome is not built In a day 라는 속담이 있듯이 로마는 한꺼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항상 우직하게 조금씩 조금씩 그러나 완벽하게 만들어가며 그 틀을 완성 시켰다. 심지어 그들은 망할 때도 서서히 망해나갔다. 한꺼번에 망하지 않은 것이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팍스 로마나도 한 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예전에 닦아 놓았던 기반을 발판으로 이루어 나간 것이다. 이것은 현대의 독일이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선진국들이 로마인의 생활과 정신세계를 연구해서 적용해왔다. 우리나라도 로마 시대의 사람들의 무던하게 꾸준하게 그리고 완벽을 추구하는 그러한 정신을 배웠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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