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5. 14:16ㆍ교회사자료/10.세계사
12표법에 대하여
리비우스가 '로마의 모든 공법과 사법의 원천'으로 지적하고 있는 12표법은, 기원전 451년부터 449년까지 3년에 걸쳐 편찬된 것으로서 유명한 로마법의 모체이다. 그 전에는 구전에 의존하던 관습법을 해석하는 일이 귀족계층에게만 허용되었고, 이는 귀족의 특권의 버팀목이었다. 이 시기에는 10인의 입법가(법제정 10인 위원, deceviri legibus scribundis)의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이들의 활동 결과로 민회의 표결을 통해서 공법, 사법, 종교법, 그리고 형법들로 확정되어 하나의 법전에 담겨서 청동판에 새겨진 채 로마광장에 고시되었다. 키케로시대의 소년들은 이 l2표법의 원문을 암기해야 했고 어떤 조문들은 비잔틴 시대까지도 유효했다. 일반적으로 이 12표법은 소요 속에서 그 때까지 배제되고 억압받던 사회집단인 평민들이 통치신분, 즉 귀족들로부터 쟁취한 정치적 성공의 한 좋은 예로서 여겨져 왔다. 그래서 스컬러드(H.H.Scullard) 교수는 그의 유명한 '로마세계의 역사'에서 '평민은 대승을 거두었다'고까지 기술했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12표법이 진정으로 평민들을 위한 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먼저 제기될 수 있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먼저 12표법에는 빈민들에 대찬 어떤 경제적 구제책도 들어 있지 않다. 토지분배안도 없고, 부채말소안도 없다. 오히려 채무노예에 대한법적 조치가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평민들은 여전히 최고 정무관직이나 성직에 나아갈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로마의 귀족과 평민 양신분간의 치열한 정치적 투쟁 끝에 평민신분이 대승을 거두었고, 그 산물이 12표법이라는 정치적 설명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 할 수 있겠다. 1986년에 발표된 에데르(W.Eder)교수의 '상고로마에서의 사회 투쟁들-신분분쟁에 관한 새 전망들'이라는 논문은 오랫동안 품어 왔던 우리들의 의구심에 해명의 서광을 비쳐주고 있어 매우 중요하다. 그는 12표법이 근본적으로 귀족지배를 확실히 하려는 입법 조처로서, 사회적 소요로 심하게 위협받고 있던 정치, 경제적 상태를 안정시키려는 의도에서 제정되었다는 탁견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논지를 통한 역사적 진실에의 접근은 그 의의가 크다. 앞서 언급되었던 10인의 입법가 또한 분석해보면 문제의 소지가 있다. 10인의 입법가가 12표법의 제정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10인의 입법가들이 귀족출신이 확실한 이상, 우리는 법전편찬을 요구한 것은 실제로 누구였는가 하는 질문에, 그것은 상층신분인 귀족(patricii)이라고 쉽게 대답할 수 있다. 따라서 귀족, 위기, 입법은 긴밀하게 상호 관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당시 귀족지배체제에 대한 실질적 위협은 무엇이었고, 12표법의 제정으로 보호된 것은 무엇이었는가? 법전편찬의 시기에 실제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귀족이라고 하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로마에서 귀족들은 계속 배타적으로 최고 정무관직인 콘술직과 성직을 독점하고 있었다. 더욱이 불문법의 해석과 집행은 그들의 수중에 놓여 있었다. 심지어 키케로는 귀족원로원의 권력이 12표법의 제정 시기에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귀족정치에 대해 심각한 정치, 경제적 위협이 급격하게 다가오고 있었다. 정치, 종교, 법률 등 모든 분야의 권력이 평민출신들은 제외된 채 오직 귀족출신만이 독점하게 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평민들이, 그러면 따로 떨어져 나가 평민만의 국가를 새로 세우겠다는 위협과 함께 행동으로 옮기려 하였다. 그 결과 귀족이 양보해, 제 1차로 기원전 494년에는 평민을 콘술의 자의적인 행동에서 보호하기 위해 소위 호민관 제도가 등장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제 2차로 기원전 471년에는 평민들만의 민회인 소위 트리부스평민회(Concilium PlebisTributum)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변혁을 볼 때에, 12표법의 제정시기는 확실히 로마의 귀족과 평민 양신문간의 치열한 신분분쟁의 한 시기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당시의 위기와 그 대처 방안을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가 있다. 귀족들에게는, 기들에 의해 부당하게 취급받고 있던 아주 많은 가난한 평민들의 불만은, 과소평가될 수 없었던 하나의 위협이었다. 따라서 누군가가 이들 불만자들을 추종 세력으로 한 참주가 되고자, 평민의 불만을 개인적인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할지도 모른다. 또 호민관들은 지배귀족에게 다른 방식으로 심각한 곤란을 안겨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즉 비록 호민관 자신은 통치권은 없었지만, 콘술들에 대해 '거부권'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귀족의 정치권력의 지배에 대해 심하게 방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권력의 상실은 부의 상실을 수반한다. 그러므로 지배귀족은 여전히 정치권력의 독점을 누려야 했다. 한마디로, 귀족들의 주요 목표는 귀족 자신들에 의해 배타적으로 규정된 공동체와 국가의 질서 속에 평민들을 재통합시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국가 속에 국가'를 세우기를 원했던 귀족들은 자신들의 이상에 따라 국가를 형성할 것을 고집함으로써 평민을 배제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호민관들이 선출됨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분명히 평민들을 고려하지 알고 국가공동체를 운영하려 하였다. 따라서 잘 조직된평민들과 그 지도자들이 귀족 정무관들의 권력에 간섭하는 것을 일사불란하게 막는 것과 귀족들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했다. 바로 이러한 지배귀족들의 정치적 아이디어들이12표법이라는 성문법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그 증거 몇 가지가 있다. 바로 평민의 정무관직 접근을 차단하고자 한 것이 '귀족과 평민의 금혼법-귀족의 폐쇄(serrata del patriziato)'와'호민관의 무력화'이고, 귀족의 재산권을 보호하고자 한 것이 '사용 취득(usus auctoritas)'과'채권자의 권리규정', 그리고 '피호 관계에서의 보호자에 대한 처벌 규정'이다. 귀족의 폐쇄(serrata del patriziato)-귀족과 평민의 금혼법-에 관한 조처는 원래 기원전449년에 제11표로 성문화되었으나, 오늘날 그 조문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키케로의 '국가론'에 그 내용이 적혀 있을 뿐이다. 물론 이 '국가론'에는 키케로의 선입견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귀족과 평민간의 금혼 조항이 제11표에 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로마의 귀족들은 이미 기원전 480년경에 그들의 신분을 폐쇄시켰던 것 같은데, 금혼법도 의당 이것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제 귀족과 비귀족, 즉 평민간의 엄격한 구별이 생겼다. 금혼법은 귀족가문과 결혼하는 데 아주 충분하다고 여겼던 경제적으로 부유한 야심만만한 평민들이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이러한 비귀족들은 확실히 정부의 지도적 지위를 인계받을 능력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런데 결혼 금지법에 의해 방해받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금혼으로 귀족과 평민간의 관계를 끊었던 것은 정치, 경제적 존재가 평민가문들과의 결혼관계에 의존하고 있던 일부 귀족가문들을 배제하려는 의도였다는 것도 설득력이 있게 들린다. 요컨대, 귀족들은 그들의 일사불란한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금혼법을 성문화했다. 호민관의 무력화를 획책하는 직접적 조항은 12표법에는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기원전449년 12표법 이후 곧이어 제정된 동년의 발레리우스-호라티우스법들은 평민들이 제3차 분리운동(secessio)을 통해 호민관직의 재창설과 호민관의 신성불가칭성(sacrosanctitas)을 확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평민들은 왜 상기 법들을 새로 제정해야 했을까? 오직하나의 논리적인 대답이 있다. 즉 귀족은 12표법을 호민관의 지위를 폐지하기 위하여 사용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침 호민관들은 뽑히지 않아, 최소한 1년 동안 전혀 호민관들이 없었기 때문에 시기도 잘 선택한 셈이다. 요컨대, 평민과 그 지도자들을 귀족들의 지배하에 두려는 것이 그들의 주목표였던 만큼, 12표법을 제정한 직후부터 귀족들은 그것을 호민관의 무력화를 통한 간섭배제를 획책했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귀족들의 재산권을 보장하는 경제조치에 관한 한, 사용취득(usus auctoritas)은 특히 중요한 것으로 보인다. 사용취득은 시민법상 소유권 취득의 한 방법인데, 물건을 일정 기간 계속 점유함으로써 소유권의 취득이 생긴다. 이것은 제6표에 기재되어 있었으나, 오늘날 원문은 전해져 오지 않고, 키케로의 '화제론'에 짤막하게 언급되어 있다. 토지의 사용취득의 권원은 2년이고‥‥‥‥다른 모든 물건의 사용취득은 1년이다. 이 글은 최소한 1년간(또는 토지의 경우 2년간) 시민이 소유권을 무시하게 유지해 오면 모든 것은 그의 완전한 소유가 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미 사실상 명백했던 소유상태를 법으로 고정시키고 보호하는 수단으로 보는 것은 확실히 과장이 아니다. 소유하지 않고 단지 2년간 정유된 토지조차도 이렇게 하여 분배를 면하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즉, 이는 용익권을 소유권으로 인정함으로써 특히 귀족들의 재산소유 상태를 법조문화하여 확실히 보장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특히 채무자가 채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에 채권자의 권리를 상세하게 성문화한 것을 보면, 채무자들의 대부분이었을 평민에 대한 채권자로서의 귀족들의 권리 규정은 놀랄 정도로 엄격하다. 현존하는 제3표의 원문과 겔리우스의 '아티카의 밤들'에 따르면,30일의 유예기간, 60일의 감금기간이 지난 후에도 채무자가 변제하지 못하면, 채권자는 그를 살해하거나 또는 국경 외로 노예로 매각하여도 무방하며, 원고가 수인인 경우 그 시체를 분할할 수 있되, 원고가 그 채권액에 응한 지분 이상 또는 그 이하로 분할하여도 무관하다고 쓰여 있다. 이러한 조항은 특히 채무자의 대부분을 차지했을 평민들에게는 가혹했다. 그리고 이렇게 성문화된 이상, 호민관들도 채무자인 평민을 채권자의 법집행으로부터 보호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더욱이 귀족들은 평민운동의 단합을 깨기 위해 차원이 높은 또 다른 법조문을 넣은 것 같다. 그것은 제8표로서 원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보호자가 그의 피호민에게 작해를 한 경우, 그의 재산은 신성하게 몰수당해야 한다. 이것은 피호관계를 맺고 있는 보호자가 피호민의 재산을 사취한 경우, 보호자의 재산을 몰수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트리포니누스에 따르면 보호자의 재산 몰수라는 것이 손해배상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원래 피호관계란 법적 관계가 아니다. 그것은 신의(fides)를 매개로 한 윤리관계이다. 그런데 상기 조항은 귀족인 보호자와 그의 평민인 피호민 사이에 인격적인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특히 귀족의 일방적인 의무를 강요하고 있다. 이것은 사면법과 비슷한 것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정치적으로 평민과 협조하였던 피호민들에 대해서조차도 귀족 보호자의 보호와 자비를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장은 어떻든 통일적이지 못했던 평민전선을 약화시키고, 평민들의 '투쟁력'을 더욱 약화시키는 것을 도왔을지도 모른다. 이상 살펴보았듯이, 12표법이 신분투쟁에서 평민들이 거둔 커다란 성공이라는 주장은 섣불리 내려서는 안 될, 다시금 고찰해 볼 필요성이 있는 문제라 하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2표법이 제정되기까지의 평민들의 공헌을 전혀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사용취득에 관한 경제조치와 채무자의 채무불이행시 채권자의 권리규정, 그리고 피호관계에서 피호민에 대해 재산상의 신의를 저버린 보호자에 대한 처벌규정과 같은 것들이 평민들에게 다소 유리한 입법 조처였음은 충분히 주장될 수 있는 논리이다. 무엇보다도 l2표법 중 평민에게 최대한 불이익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귀족과 평민간의 금혼조항 조차도 12표법이 제정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은 기원전 445년에 평민의 공세로 무너지고 만다. 즉 귀족과 평민 사이의 혼인이 허용된 것이다. 물론 이 삭제는 부유한 평민에게만 효과가 있었겠지만 이는 평민들의 지위가 눈부시게 발전되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라 할 수 있겠다. 따라서 12표법의 제정을 단순히 귀족의 권력수호책으로 보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 12표법의 제정에는 확실히 평민들의 공헌이 크다. 하지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12표법의 제정을 평민들의 위대한 승리로만 여기는 것은 약간의 문제의 소지가 있다. 또한 이를 귀족들의 권력수호책으로 치부하는 것 또한 문제가 있다. 따라서 우리는 12표법의 제정에 평민들의 위대한 승리라는 개념과 귀족의 권력 수호책이라는 개념이 서로 상존한다는 결론을 조심스레 내릴 수 있겠다. 앞으로의 과제는 12표법의 제정을 계기로 그 전후가 어떻게 달라지게 되는가 하는 그 역사적 내용을 조목조목 따져 보는 일이 되어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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