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5. 14:17ㆍ교회사자료/10.세계사
오디프스 비극에 관하여
그리스 시대의 문화는 서구의 모든 예술인들과 지성인들의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그리스 시대의 문화는 조화와 안정, 통일을 지고의 미로 삼고 있었고, 그러한 그들의 이상에 맞는 문화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역량 역시 그들은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그리스 시대의 모든 예술은 2천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도 그 빛이 전혀 바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시대의 예술은 모든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수준에 도달하였지만 가장 그 성과가 뚜렷하면서도 그 영향을 후세에 넓고도 깊게 미친 분야로는 문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문학 중에서도 아에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라는 걸출한 삼대 비극 작가가 창조해 낸 그리스 비극은 여타의 문학 작품에 비해 그 주제나 극적인 구성의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깊은 완숙미를 보여주어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미의 전형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들의 작품은 수효가 굉장히 많으나(예를 들어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123개나 된다), 그중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중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은 아에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경향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융합이 단순한 혼합이 아닌 더 높은 차원으로의 지향을 의미하고 있어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서 늘 그의 비극 중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그 구성이라든가 주제의 심각성 등에서 그의 모든 작품들 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오이디푸스 왕 Oidipous Tyrannos'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그 주제의 문제의식에 대해 논의해보도록 하겠다.
소포클레스 (Sophokles B.C. 496 - B.C. 406)는 고대 그리스 비극의 3대 작가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아테네가 살라미스 전투에서 이겼을 때 승리를 축하하기 위한 합창단을 지휘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아에스킬로스가 그 전투에서 직접 싸웠으며, 에우리피데스가 그때 태어났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의 작품 경향을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그가 살았던 시기의 아테네는 페리클레스라는 정치가의 탁월한 영도 밑에서 그야말로 황금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아테네는 안정과 위험이라는 두 가지 요소를 다 지니고 있었는데, 우선 군사적 힘의 취약성은 언제나 아테네의 불안 요소가 되어 있었고, 정치 구조의 안정성 역시페리클레스라는 일인의 지도력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으며,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던 사람들의 보다 나은 생활에 대한 욕구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또한 그리스 지역의 패권을 두고 다투고 있던 스파르타와는 전면적인 승리가 아니면 패배라는 극단적인 대안으로 밖에는 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안정과 불안이라는 이중적 요소를 소포클레스는 충분히 알고 있었으며(그는 홀륭한 정치인이기도 했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작품 세계 전반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왕', '안티고네'와 함께 내용상 삼부작을 이루고 있는데, 안티고네 다음으로 쓰여 져서 연대기 상 삼부작의 중간에 위치하며, 그의 전 작품 세계에서 보아도 거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어 그의 작품세계에서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소포클레스는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아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성공하고 있으며, 이러한 일련의 노력들은 이 작품을 불후의 명작으로 남게 하였다.
작품의 줄거리는 굳이 상세히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유명하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을 아버지인 줄 모르고 살해하며,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보상으로 그의 어머니를 아내로 얻게 된다. 그 후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채로 나라에서 추방을 당한다. 이 얘기는 인류의 모득사회에서 금기시되어 있는 존속살해(patricide)와 근친상간(incest)이라는 버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많은 연구가들이나 일반 독자가 이 작품을 읽은 후 느끼는 것은 운명이라는 것의 가혹함이 아닐까 한다.
즉 우리의 그 어떤 몸부림도 운명이 예정해 놓은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운명을 피하려는 그러한 노력들은 결국 우리의 운명을 재촉하는 결과가 될 뿐이라는 것: 운명은 바꿀 수 없으며, 또한 우리는 우리 앞의 운명이 어떤 것일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 그런 것이 아길까 한다. 사실 이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면 신탁의 위력이라는 것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이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심오한 작품을 너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과연 소포클레스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운명의 엄청난 힘과 그 앞에서의 체념이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극의 구성을 살펴보면 이 극을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은 운명과 인간의 의지라는 양대 축임을알 수 있다. 이건은 우선 극의 시작에서의 오이디푸스의 외침에서부터 잘 드러난다. 오이디푸스는 라이오스 왕의 살인자를 저주하고 그를 꼭 잡아서 추방시키고야 말겠다고 신에게 맹세한다. 그러나 그 저주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임은 곧 관객에게 알려지게 된다. 구성상에서이 극의 특징은, 그리고 곧 그 구성의 위대함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사건의 전모가 관객에게는 극의 초반부에 - 예언자에 의해서 - 아주 명료하게 제시된다는 점이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과거와 아무런 연결점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예언이 자신의 얘기라고 늘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배경 지식의 범위 내에서 아주합리적인 추론을 시도한다.
즉 테이레시아스와 크레온이 서로 공모하여 자신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전모를 알고 있는 관객들은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오이디푸스의 이러한, 사실상 불합리한 추론의 비극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극이 절정으로 치달을수록, 즉 오이디푸스가 점점 더 사실을 향해 나아갈수록 더욱 강하게 경험된다. 어쨌든 오이디푸스는 예언자의 얘기가 자신의 얘기가 아님을 입증하려고 각계각층의 관련자들을 소환하고, 또 그들의 증언에서 일말의 안도감을 얻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또 자신의 얘기였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증명되는 악순환을 경험한다. 이러한 극의 전개 구조는 우리에게 운명이란 것의 엄격함과 냉혹성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운명이 그의 작품에서 오직 하나의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작품이 탐정소설 혹은 추리소설이라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비극의 영웅, 즉 이 비극의 진정한 주인공은 운명에 휘말리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는 인물인 것이다.
운명을 인간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은 '운명 비극'이라 불리는 많은 작품을 양산해 냈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비극은 인간이 노출되어있는 어둡고 예견할 수 없는 운명과 그것에 저항하여 싸우려는 인간의 몸부림 사이의 팽팽한 긴장에서만 산출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이러한 노력은 쓸데없는 것이 될 소지가 크다. 이러한 노력들은 주인공을 더욱 큰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을 수도 있고 그를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 하에서도 인간은 무릎을 꿇으면 안된다. 그가 진정으로 비극적인 영웅일 수 있는 것은 운명 앞에서 단호한 결정을 회피하고 유약한 태도로 일관해 버리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을 배경으로 하고 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단호한 결정은 물론 운명의 엄청난 힘 앞에선 무력하다. 그러나 그러한 패배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위대성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다른 비극의 주인공들, 즉 엘렉트라, 안티고네, 아이아스와 같이 뛰어나고도 불굴의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 운명의 그물은 그를 점점 강하게 죄어온다. 그는 만약 운명을 알고 싶다는 그의 호기심을 조금만 억누른다면 마지막 순간의 재앙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재의 평온을 희생하면서도, 즉 단순하고 평온한 생존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운명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비극의 영웅, 오이디푸스인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영웅 옆에는 편하게, 안전하게, 비밀은 비밀인 채로 살아가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안티고네의 옆에는 이스메네가 있었고, 오이디푸스의 옆에는 이오카스테가 있었다.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진실 추적 과정을 막아보려고 애를 쓰고, 심지어는 아폴로 신에게 기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진실의 노출을 더욱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결국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상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운명이란 것에 대한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거대하고 거역할 수 없는 힘과 맞서서라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진정 용기 있고 위대한 '인간'의 모습이었음을 우린 읽어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소포클레스의 운명과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소포클레스가 왜 3부작을 포기했는지를 설명해 줄 수 있다 아에스킬로스 역시 오이디푸스 신화를 작품의 주요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의 운명관은 소포클레스와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그는 인간을 신이 마련해 놓은 섭리의 테두리 안에서 그 정해진 수순을 밟아 나가는, 그런 존재로 상정하고 있다. 그러한 인식 아래에서 그는 오이디푸스 신화를 가족 전체에 대한 저주의 관점에서 보고 있다. 이것은 가족이라는 단위를 하나의 완결된 것으로 보는 당시의 그리스인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슬포클레스에 와서 변용을 겪는다. 소포클레스가자신 나름대로의 세계관을 강조하고 표출하고 싶었던 점은 그가 오이디푸스 신화의 여러 부분 중 특정 부분을 취사선택했던 점에서 드러난다.
그는 오이디푸스 이야기 중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인 저주의 계승을 (아에스킬로스는 아주 중요하게 다루었던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에 넣지 않았다. 운명과 맞서는 인간의 위대함을 주제로 삼고 있는 그에게 가족 전체에 대한 저주와 그로 인해 고민하고 번뇌하는 인간상은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결국 그의 작품에서 가족의 저주는 작품 전편의 배경으로서는 작용하고 있지만, 그의 작품은 그것보다는 개인의 의지 - 비록 그 결과가 자신의 통제 밖으로 나가버린다 하더라도 - 가 상황을 이끌어 간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소포클레스의 세계관은 그가 살았던 당시의 그리스 사회와 연관을 지어 설명할 수도 있다. 앞에서도 간략하게 소개했듯이 소포클레스가 살았던 시대의 그리스는 정치 사회 문화등의 제분야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특히 페리블레스의 지도 하에 완성된 민주주의는 개인의 중요성을 과거 그 어느 때보다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양산했을 것이다. 이러한 신에 대한 상대적인 인간의 지위 승격을 우리는 자신의 모든 운명의 실타래를 자신 스스로 풀어가는 오이디푸스를 통해서 볼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뿐만 아니라, 아테네의 내재적 불안요소 역시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상의 구축에 영향을 주었다. 즉 아테네는 사실상 전성기를 맞고는 있었다지만, 소포클레스가 죽은 후 얼마 후에 전쟁에서 져서 쇠퇴기를 맞게 된다.
그리고 아테네의 정치에 깊이 관여했던 그는 자신의 폴리스의 이러한 위험 요소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또 깊이 우려했을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폴리스를 지켜나갈 수 있는 방식은 그에게는 신의 도움, 아니면 젊은이들이 옛날의 '마라톤 정신'을 되찾는 것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결국 그로서는 운명에 대하여 인간의 주체적 의지를 강조하는 인물상이 이상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 당시의 사회적 상황 역시 오이디푸스라는 인물 속에 나타난 소포클레스의 의도에 대한 필자의 해석을 뒷받침한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논의해 왔던 오이디푸스의 '개인 의지론'은 오이디푸스의 도덕적 단죄를 논하면서 다시 한 번 더 뒷받침 될 수 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물론 그가 유죄임은 우리의 법의식이나 현대 사회의 법의 기본 논리, 즉 '무지는 무죄의 이유가 될 수 없다'라는 원칙에 비추어 봐도 확실하다. 법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도덕적 차원에서도 그는 용서할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 근친상간은 거의 모든 인간의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터부시되고 있는, 인간의 가장 큰 금기 중의 하나이다. 근친상간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거슬릴 뿐만 아니라 그 사회적, 정신적 함의가 중요하여,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인류학자는 세상의 모든 사회의 기본 구성 원리로서 근친상간을 파악하기도 했고, 프로이드는 인간의 무의식이 자아 의식으로 도약하게 되는 계기를 근친상간과 거기에서 연역되어 나온 거세 콤플렉스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려 하기도 했다. 그리고 근친상간은 Hybris라고 불리는 신에 대한 모독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즉 그는 신이 정해준 경계를 넘음으로써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로 묘사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논의한 그 시대의 자유로운 사상적 분위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오이디푸스는 법적, 도덕적, 종교적이라는 세가지 측면에서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늘 스스로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자신이 통치하던 나라에서 쫓겨나게 된다. 벌을 받은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깊고 넓은 시각에서 보면 위의 확고한 것 같은 논리에 의문이 생긴다. 우선오이디푸스의 그 후의 행적을 보자. 그는 고생을 계속 하게 되지만 결국 그의 죽음은 그에게 저주를 내렸던 신에 의해 다시 축복되고 그의 무덤은 성역이 된다. 그리고 그의 죄가 단순한 무지에서 나온 것이 확실하며, 그 무지는 신의 저주에 의한 것이었고, 문제가 되는 그 신의 저주는 오이디푸스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이디푸스의 선조에 의한 것이었음을 생각해보면 오이디푸스를 무작정 욕할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오이디푸스는 제우스 신의 꼭두각시에 불과한 것일 뿐이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 모든 일을 미리 예비한 제우스 신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위에서 언급한 '무지는 무죄의 변명이 될 수 없다'라는 현대 법의 기본 경구는 '신'이라는 아주 특수한 존재를 계산에 넣지 않은 경구이다. 사실 이 문단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문제의 범위를 어떻게 한정하느냐에 따라 다른 결론들이 내려질 수 있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소포클레스의 태도이다. 과연 소포클fp스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여기서 작품 속의 코러스 중 하나를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법칙은 죽어야 할 인류가 만든 것은 아니며 어떠한 망각도 이 법칙을 잠재우지는 못하리라'라고 쓰여진 부분에서 우리는 소포클레스 사상의 단편을 엿볼 수 있다. 즉 그는 신의 강력한 힘 앞에서는 어떠한 것도 무용지물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오이디푸스의 저주와 그로 인한 고통, 그리고 그 후의 방랑에 치중하기 보다는 그 과정을 알아 나가는 오이디푸스의 주체적인 노력을 묘사하는 부분에 훨씬 더 극적인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그가 자신의 비밀을 알아나가는 부분임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개인 중시 사상은 여기에서도 한 번 더 뒷받침된다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물론 분명히 한계를 지닌다. 우선 여러가지 비판적인 질문들이 제기될 수 있겠는데, 가장 먼저 나을 수 있는 질문으로는 '오이디푸스가 진실을 알기 위해 애썼다는 것 자체가 그의 정해진, 신이 그에게 정해준 운명이 아니겠느냐?'하는 것일 젓이다. 여기서 우리는 오이디푸스 신화라는 '이야기'와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구분지어 이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 전체의 구조를 본다면 오이디푸스의 모든 행동은 신에 의해 계획되어진 것이라는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신화의 원래 얘기는 소포클레스에게 단순히 자신의 사상을 펼칠 수 있는 텍스트 이상의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희곡으로서의 이 작품에서 오이디푸스는 이미 성장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리고 늘 자신의 과거를 하나하나 알아가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의 모든 행동은 관객들에게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물론 관객들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이 맞음을 잘 알고 있고 오이디푸스의 이러한 추론에의 노력을 가련하게 바라보게 될 것이지만 말이다. 요약하자면, 작품으로서 이 이야기에서 오이디푸스는 나중에서야 모든 것이 운명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원칙상으로는 관객도 그래야 한다).그러므로 비록 원래 이 작품의 텍스트가 되었던 이야기가 운명에의 불가항력을 담은 내용이었다 할 지라도 이 작품에서 주가 되는 건은 그러한 운명의 결정성에 도전하는 인간의 모습이라는 주장이 가능한 것이다.
지금까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라는 인간의 본질적 성격에 대해 여러 논거로서 논의를 풀어내 왔다. 결론을 내리자면, 오이디푸스를 단순히 운명에 대한 불거역성을 드러내기 위한 소도구로 인식하는 과거의 이해에는 문제가 있으며, 오이디푸스는 그 당시의 시대 사상과 소포클레스 개인의 사상이 반영된, 엄청난 힘을 가진 운명에 대해서조차 정면으로 맞서려는 인간의 모습을 형상화하는 인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다. 또한 당시의 그리스인들의 사상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오이디푸스가 비극적인 운명을 맞게 되는 건은 결코 자신의 의지가 아니며 그것은 신의 뜻인 것이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인간의 이성을 중시하는 사상이 나타나고 있었으며 이를 경계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지식 즉 그 노매를 맹종하여 신의 뜻인 티케를 무시하였음에 바로 그와 같은 비극을 맞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그의 독백에서 신이 그에게 가혹한 운명을 준 것이 결코 나쁜 것이 아님을 스스로 깨닫는 것이 나온다.
허나 이것만은 나도 알고 있다. 나는 결코 병이나 다른 일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기구한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코 죽음에서 구원받지 못했을 테니까. 결국 오이디푸스 왕을 통해 소포클레스가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마지막에 위의 뜻일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그리스인들의 사상이며 고대의 유럽 사람들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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