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타크 영웅전

2008. 10. 15. 14:19교회사자료/10.세계사

풀타크 영웅전

 

1.테 세 우 스-아름답고 유명한 도끼 아테네를 세운 이 2.로 물 루 스-영원한 영광과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로마의 설립자 3.리 쿠 르 고 스-스파르타의 법령 제정자 4. 누 마 폼 필 리 우 스-로마의 국가체제 정비 5. 솔 론-아테네의 법을 제정한 재판관

 

1.테 세 우 스-아름답고 유명한 도끼 아테네를 세운 이


  아테네를 세운 테세우스와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는 사생아로 태어나서 신의 후예라는 명성을 얻었고, 위대한 전사였으며, 강인한 육체와 현명한 정신을 두루 갖춘 인물들이다. 또한 이와 같은 긍정적 평가에 반해 이 둘은 여인을 겁탈하여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으며, 가정의 불행과 친지들의 질투를 피할 수 없었다. 생의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그 나라 사람들과 커다란 충돌을 일으켰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적어도 우리를 진실로 인도하여 주는 시와 같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테세우스의 혈통은 아버지의 가계로 볼 때 아티카 최초의 주민 에레크테우스까지 거슬러 올라가고, 어머니의 가계로는 펠로프스의 후손띠 되다. 펠로프스는 펠레폰네소스의 모든 왕족들 가운데서 가장 권세가 있는 가문으로, 소유하고 있는 재산도 엄청났지만 자식의 수도 많았다. 그리고 딸은 딸들을 지방의 수령들과 결혼하도록 하였으며, 아들들은 가까운 여러 토시의 통치자 자리에 않도록 만들었다. 그 중 한사람이 테세우스의 할아버지인 피테우스이다. 그는 그 당시에 누구보다도 뛰어난 지혜와 학식을 갖춘 인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아이게우스는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팔란티네 가문으로부터 멸시를 받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델포이에 신탁을 청하였다. 그 과정에서 아이게우스는 피테우스의 딸인 아이트라와 관계를 가져 후에 아들을 낳게 된다. 그리나 그는 팔란티네 가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들의 출생을 알리지 못하고 훗날을 기약하며 아들의 곁을 떠나게 된다. 테세우스는 할아버지 피테우스의 밑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콘니다스라는 가정교사이자 수행원을 두었다. 여기서 테세우스에게 바치는 축제가 벌어지면 그 전날 양을 잡아 콘니다스에게 바치는 행위를 했다고 한다. 당시 그리스의 젊은이들에게는 성인이 되는 첫해에 델포이로 가서 태어난 후 처음 깎은 머리카락을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있다. 테세우스도 델포이로 떠나 신에게 앞머리만 잘라 바쳤다. 이것이 곧 테세우스 방식이다.

 

테세우스는 대단히 강인한 육체의 소유자로 성장했고, 무척 용감하고 민첩한 어른으로 성장해 나갔다. 그러자 아이게우스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들을 아테네로 보낸다. 테세우스는 아테네로 가는 힘든 길인 육로를 선택해 여행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헤라클레스의 용맹에 대해 흠모하고 있었으므로 헤라클레스의 용맹함을 따르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헤라클레스의 정의를 따르기 위해 테세우스는 자신에게 먼저 해를 입히는 사람에게만 복수할 뿐, 어느 누구도 해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길을 떠난다. 그는 가는 도중에 만난 많은 악당들을 그들이 행했던 무도한 방법을 그대로 모방해서 처치했다.

 

아테네에 도착한 테세우스는 왕위를 물려 받으려고 하지만 주위의 반발이 심했다. 그러자 그는 당시의 아테네의 난제였던, 크레타 섬에 대한 조공을 바치는 일을 해결하게 된다. 이 일로 인해 그의 입지는 올라갔지만, 그는 아버지를 잃는 슬픔을 겪게 된다. 테세우스는 곧 아티카의 모든 주민을 한곳에 모이게 하고 하나의 시민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워 실행하게 된다. 당시 공동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해 갈등을 빚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반가운 제안이었으므로 기꺼이 받아들였다. 테세우스는 마을의 지도자들에게 왕도 없는 민주주의 국가, 혹은 민중에 의해 통치되는 공산국가를 약속했다. 그 나라에서 자신은 다만 군대의 지휘관이며 법의 수호자의 구실을 할 뿐이며, 모든 사람에게 완전한 자유와 평등을 주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수단이 많은 이들의 동의를 얻어 그는 사방에 흩어져 있던 정부 청사나. 의사당. 법원 등을 모두 없애버리고 현재 윗동네가 있는 자리에 모두를 위한 청사와 회의장을 지었다. 테세우스는 통일된 나라 안에 아테네라는 이름을 선포하고 모든 시민이 다 함께 참여하는 파나테나이아라고 불리는 단일 명절을 마련하였다. 테세우스는 또한 메토이시아 혹은 이만들의 축제라고 불리는 명절을 제정하였다.

 

테세우스는 약속한 데로 법적인 권력을 내놓고 공화제를 실시하였다. 델포이의 신탁과 함께 국가를 꾸려나갔다. 그는 시민의 수를 더욱 많게 하려는 계획으로 모든 이방인들을 환영하여 아테네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게 하였다. 그러나 온갖 민족이 모임으로 인한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먼저 공화국울 귀족과 평민으로 직공이라는 세 개의 뚜렷한 신분으로 나누었으며, 귀족에게는 제사, 정치, 교육, 풍속의 통솔을 맡겼다. 그러나 모든 시민들은 계급과 세력에 있어 평등했다. 왜냐하면 귀족은 명예로, 농민은 이익으로, 그리고 직공은 그 숫자에 있어 서로 우세하였기 때문이다. 그 밖에 테세우스는 돈을 주조하였으며, 메가라를 아티카와 합병했다. 또한 그는 헤라클레스를 본받아 운동 경기를 개최하였으며 그와 동시에 코린토스 사람과의 합의를 맺었다. 테세우스는 누구의 도움 없이 수많은 원정을 나섰다.(제2의 헤라클레스가 칭함)

 

반면, 테세우스는 여색을 밝히다가 그만 죽음의 위기에 놓이게 되지만 헤라클레스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기게 된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메네스테우스에 의해 자리를 일어 가고 있었다. 결국 그는 스파르타에 의해 점령당하게 되어 스키로스로 이주해 그곳에서 마지막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후에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 전쟁을 치른 후, 델포이의 신탁을 듣게 된다. 그에 의해 아테네인들의 테세우스에 대한 시각은 변화하고, 테세우스의 시체도 되찾아와 시의 중심지에 매장했다. 테세우스의 무덤은 노예들과 권력자의 박해를 피하여 도망쳐 나온 모든 억울한 사람들의 성스러운 피난처가 되었다. 살아 생전에 테세우스가 항상 재난에 처한 사람들의 지지자요 보호자였던 것을 기억하기 위함이다.



2.로 물 루 스-영원한 영광과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로마의 설립자


  로마의 이름의 기원과 시작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믿음직한 것은 로물루스가 이 도시를 창건하고 자기의 이름을 따서 지명을 로마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설에 따르는 사람들도 로물루스의 출생이나 가문에 관해서는 의견이 서로 다르다. 로물루스와 레무스(젖꼭지라는 뜻을 지닌 '루마'에서 유래됨)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건장한 신체와 아름다움으로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었다. 쌍둥이들은 자라나면서 더욱더 불굴의 용기와 남자다운 면모를 풍겼으며, 위험한 모험은 모두 시도하는 담대한 배짱도 있었다. 하지만 로물루스가 더 지략을 써서 행동했으며 정치가와 같은 지혜를 보였다. 그는 다른 사람 밑에서 복종하기 보다는 남을 지배할 운명을 타고 났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미토르와 아물리우스의 소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싸움에 의해서 두 형제의 출생 사실이 밝혀지게 되고 아물리우스는 그 과정에서 제거되게 된다. 그 후 두 형제는 그들 주위로 모여든 수많은 노예들과 도망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새로운 도시를 만든다.


새로운 도시의 기반을 닦은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쌍둥이 형제는 모든 도망자들을 위한 피난처 성소를 개방하였다. 그리고 그곳을 아실레우스 신의 신전이라고 불렀다. 형제는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고 보호하며, 아무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 곳은 거룩한 신탁의 명령에 의해서 특권을 부여받은 장소라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도시는 곧 성장하여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도시의 건설 입지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발생했는 데, 이때 그들은 독수리 점을 통해서 결정을 내렸다.

 

당시 로마인들은 독수리를 중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도시 건설 도중 형제의 사소한 다툼에 의해 두 양아버지와 레무스가 죽게 된다. 로물루스는 레무스와 두 양아버지를 레모니아 산에 매장한 다음, 도시를 건설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로물루스는 투스카니에서 사람을 불러와 보다 적극적으로 도시 건설을 하게 된다. 도시를 세운 로물루스는 모든 장정에게 무기를 주어 군대를 조직하였다.

 

각 부대는 3만 명의 보병과 300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을 군단이라고 불렀는데, 모든 병사들 가운데서 최고로 선택되고 골라낸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주민들로 조직된 부대는 민단이라고 불렀다. 로물루스는 가장 뛰어난 100명의 사랑들을 뽑아서 정무회를 만들었다. 또한 이들을 파트리키안, 즉 귀족으로 봉하고 그 모임을 원로원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연장자들의 모임이라는 뜻이다.   

고물루스는 이와 같이 원로와 평민을 구분하였고, 귀족과 평민을 구별하여 전자는 보호자라는 뜻의 파트론이라 부르고, 후자는 피보호자라는 뜻으로 크리엔트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로물루스는 두 계급의 사람들 사이에 놀라운 사랑과 친근감을 조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거래에 있어서도 위대한 정의를 이루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도시 건설 참여자가 남자였기 때문에 도시가 오래 지속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여자들을 납치해 왔다. 아울러 그 여자들을 잘 구슬린 후, 모든 수단을 다하여 이번 사건을 사비니 동맹을 맺고 상호간의 교역을 트는 기회로 삼고자 하는 더 큰 희망을 품고 이를 실천해 나갔다. 이 일로 인해 사비니인 처녀들을 얻었으며 사비니 일부 부족까지 복속되게 되었다. 그 후 사비니인과의 잦은 싸움이 있었지만 결국은 중간자적인 입장이 되어 버린 사비니인 여자들에 의해 결국 휴전 협정을 맺게 된다. 로마인 과 사비니인은 시내에서 함께 살되, 시의 이름은 로물루스의 이름을 좇아 로마라 한다. 하지만 주민은 타티우스의 출생지의 이름을 따서 쿠리테라고 부르고, 로물루스와 타팅스가 공동으로 군민을 다스리기로 한다. 이 협정을 맺은 곳을 오늘날까지 코미티움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회담을 의미하는 '코이레'라는 로마 어에서 온 것이다.

 

이제 시의 인구는 두 배가 되었다. 사비니인 중에서 100명의 원로를 더 뽑았으며, 군단도 6천명의 보병과 600명의 기병으로 편성하였다. 또한 시민을 세 개의 부족으로 나누었다. 첫 번째 부족은 고물루스의 이름을 따서 람네세스, 두 번째 부족은 타티우스의 이름을 따서 타티엔테스, 그리고 또 하나의 부족은 루케레스라고 하였다. 이 이름은 루크스, 즉 덤풀숲이라는 단어에서 따온 것이다. 각 부족은 10개의 큐리에(형제)로 이루어졌다. 또한 로마에는 여자를 존중하는 많은 법이 있었다.

  로물루스와 타티우스 두 왕은 서로 만나 논의를 하기 전에, 각기 자기 부족의 100명의 원로원들과 먼저 합의를 했다. 그리고 다 함께 회의를 열었다. 사비니 인은 로마 인의 달력을 채택했으며, 두 민족은 축제와 제의에 함께 참여하였다. 로물루스는 불을 신성시하고 거룩한 처녀들로 하여금 성화를 지키도록 하는 법을 제정하였다고 한다. 그 외에 엄한 법으로, 아내는 남편을 버릴 수 없으나, 남편은 아내를 버릴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 타티우스와 로물루스의 공동 통치는 중간에 한번의 대립만 있었을 뿐 비교적 원만한 통치 균형을 이루었다.

 

그 후 로마는 더욱더 번성해 나간다. 그러나 로물루스의 가장 큰 실정은 전쟁으로 얻은 토지를 군인들에게 나누어주고, 베이엔테스에서 잡아온 볼모를 원로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마음대로 돌려보낸 일이다. 그 때문에 그는 원로원을 모욕한 것이 되었다. 이런 일이 있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로물루스는 행방불명 되어 다시는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3.리 쿠 르 고 스-스파르타의 법령 제정자



  리쿠르고스에 대한 기록은 어느 것 하나 정확한 것이 없다. 그의 출생지나, 생애, 사망에 대한 역사학자들의 주장도 제각기 다르다. 그 뿐만 아니라 리쿠르고스가 언제 법을 제정하였으며, 언제 공화국의 기초를 다졌는가 하는 사실에 대해서조차도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그의 계보에 대한 것을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인정하는 것으로 보면 에우노모스가 아버지이고, 에우노모스의 둘째 부인이 그의 어머니라는 것이다. 왕위가 리쿠르고스에까지 오자 그는 왕위를 갓 태어난 아이에게로 옮기고 그는 스파르타를 떠나게 된다. 그를 시기하고 질투하는 이들로부터의 탈출과 같은 것이었다. 그 후 리쿠르고스는 크레타에 도착해서 그 곳의 여러 정부 형태를 연구하며 정계 요인들과 사귀었다. 또한 그 나라의 법 가운데서 높이 평가할 만한 것은 본국에 돌아갔을 때 채택하고, 쓸모 없는 법을 폐지해버리기로 결심하기도 했다.

 

그 나라 사람들 중에서 정치적인 문제와 관련된 학식과 지혜가 높기로 가장 이름난 있는 사람은 탈레스였다. 리쿠르고스는 탈레스로부터 기본 통치 개념을 습득한 후 크레타를 떠나 소아시아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호메로스의 시를 발견하고 시의 원본을 직접 베끼고 순서대로 정리한다. 리쿠르고스가 처음으로 호메로스의 시를 본격적으로 알린 것이다. 이후 이집트를 여행하다가 고국의 간절한 요청에 의해 고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돌아온 그는 공화국의 전모를 바꾸기 위해 모든 일의 계획을 세운 후, 신에게서 개혁에 대한 긍정적인 신탁을 받게 된다. 그것에 힘을 얻은 리쿠르고스가 첫 번째로 실시한 가장 중요한 일은 자신의 세력 기반인 원로원을 세운 것이다. 원로원은 나라의 중요한 문제를 대함에 있어서 왕과 동등한 권한을 지닌 기관이다. 그는 또한 공화국의 제도 안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다 사용해서 정치적 권력을 나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세 사람들은 독재 정치가 될 요인이 아직도 강력하고 우세하게 남아 있다고 보고, 군주의폭력과 분노를 제어하기 위해서 왕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로 하였다. 그것이 리쿠르고스가 죽은 지 130년 만에 세워진 에포로이 제도이다.

 

그의 다음 개혁은 토지를 새로 분배하는 것이다. 당시 스파르타는 사회적으로 극단적인 불평등이 존재하고 있었다. 리쿠르고스는 나라 안에서 교만, 시기, 범죄, 사치 등 빈곤과 치부에서 생기는 모든 재산을 포기하도록 하고 새롭게 토지를 분배하는 일에 동의하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스파르타는 죄에서 오는 불명예와 고귀한 행동에서 오는 신뢰만이 사람과 사람을 구별하는 유일한 척도가 되었다.

 

또한 사치품들은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낫다고 여겼다. 그러나 리쿠르고스는 이 정도에 만족하지 않고 돈에 대해서도 재분배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스파르타 안의 어떤 불평등이나 편파적인 차별도 남기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을 공공연히 추진할 경우 상당한 위험이 뒤따를 것이라고 예상한 리쿠르고스는 모든 금화와 은화를 없애고 모든 돈을 철로 주조해 시간이 지나면 녹이 슬어 화폐의 가치가 없게 하는 식의 우회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다음 단계로 그는 쓸모없고 사치스러운 모든 예술이 불법임을 선포하였다. 그러나 사실상 이와 같은 포고령은 금과 은을 따라서 저절로 사라질 것이지 때문에 필요없는 것이었다. 이 위대한 법률 제정자가 착수한 세 번째 개혁은 사치와 재물에 대한 욕망을 없애기 위한 마지막 결정타였다. 리쿠르고스는 모든 사람들이 공동으로 식사를 하며 똑같은 빵과 똑같은 고기를 먹도록 제정하였다. 이것은 백성들이 그들의 건강을 음식 장사꾼이나 요리사의 손에 맡긴 채, 집에서 사치스러운 식탁에 편안히 앉아 인생을 낭비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 마지막 법령 때문에 부자들은 리쿠르고스에게 원한을 품고 소동을 일으켰다고 한다. 리쿠르고스는 이때 그의 한족 눈이 멀 뻔 했다. 이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리쿠르고스는 아테네에게 드리는 신전을 짓고 오프틸레티스라고 이름 지었다. 스파르타 인들은 이러한 법률을 레트라라고 불렀다. 레트라는 성스러운 계시와 상벌을 나타낸다고 여겨졌다.

 

젊은이들을 훌륭하게 교육시키려는 목적에서 리쿠르고스는 결혼을 통제하였으며, 아이들의 임신과 출산에 대해서까지 관심을 기울였다. 아이가 태어나면 우량아와 열등아를 가려서 키우는 식이었다. 그는 결혼을 명예롭고 존엄한 것으로 만든 다음 그는 이를 위하여 모든 음란한 무질서를 배제하였지만, 남편이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남자에게 자신의 부인을 허용해주고 자식을 얻는 것을 오히려 명예스러운 일로 여기게 하였다.

 

한편 스파르타 인들은 우아하고 재치 있게 대화하는 일 못지않게 시와 음악에 대한 교육에도 굉장한 관심을 기울였다. 전쟁을 할 때에도 왕은 먼저 음악의 신에게 제사를 드렸다. 한결같이 평소 교육받은 대로 마음자세를 가다듬고,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내려질 사람들의 판단을 생각해보라는 것이었다. 또한 음악을 통해 대원정을 수행할 병사들의 원기를 북돋아주었다,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인들이 천하고 계산적인 상업을 배우는 일을 완전히 금하였다.

 

결론적으로 리쿠르고스는 그의 시민을 혼자서도 살 수도 없고 살기를 원하지도 않는 길로 이끌었던 것이다. 스파르타 인들은 국익을 위하여 하나가 되었고 마치 꿀벌처럼 지휘자가 둘레에 굳게 뭉쳤다. 그리고 모든 정열과 애국심 속에서 자신을 잊고 나라만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였던 것이다. 그는 또한 장례에 관해서도 훌륭한 규정을 세웠다. 무엇보다도 어리석은 미신을 일소하고, 시내에 매장하거나 신전 가까이 무덤을 만드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또한 땅 속에 죽은 사람과 함께 아무것도 묻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훌륭한 법령을 많이 만든 그는 정치인의 의무는 가능한 죽음조차도 국가에 봉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델포이에서 마지막을 맞는다.



4. 누 마 폼 필 리 우 스-로마의 국가체제 정비



  로마 귀족 가문에 대한 족보는 비교적 정확하게 거슬러 올라가지만, 누마 왕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당시 로마의 국가 정세는 타티우스왕 집권 이후로 혼란스러웠다. 왕위의 계승에 대한 문제와 결부되어서 사비니 인과 로마 인 사이의 정권 쟁탈이 있었다. 결국 이 문제는 양측에서 똑같은 시간을 분배해서 통치하기로 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방법은 일반민에게 귀족들이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냐는 식의 의혹을 샀다.

 

로마 인의 포기로 인해 사비니 인의 왕인 누마폼필리우스왕이 등극하게 된다. 누마는 폼필리우스의 아들로서 그의 생일은 로마의 창건일과 일치된다. 누마는 진정한 용기란 이성으로써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부터 모든 사치와 편안한 생활 방식을 몰아내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나 동족들이나 한결같이 누마를 타락하지 않은 참다운 재판관이며 상담자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누마가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에 타티우스는 누마를 사위로 선택하고 외동딸을 주었다. 그러나 누마는 왕의 사위가 되었어도, 장인과 함께 로마에서 살겠다는 허영을 조금도 부리지 않았다. 차라리 사비니 인들과 함께 살면서, 연로한 부친을 섬기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의 부인인 타티아는 남편의 이러한 삶에 따르다가 결혼한 지 13년 만에 사망하였다고 한다.

 

누마는 왕위에 오를 것을 제안 받지만 쉽게 승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아버지의 논리적인 권유와 시절적인 이상한 징조에 의해 결국 왕위에 오르기로 결정한다. 누마가 왕이 되어 첫 번째로 한 일은 로물루스가 늘 신변에 두고 있던 300명의 군사들을 해산시킨 것이다. 누마는 자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의심하고 싶지 않으며, 또한 자신을 불신하는 백성이라면 다스리고 싶지도 않다고 말했다.

 

다음으로는 유피테르와 마르스를 섬기는 사제 외에, 세 번째 사제를 두어 로물루스를 섬기게 했다. 그리고 세 번째 사제는 플라멘퀴리날리스라고 부르게 하였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 누마는 백성들의 사랑과 지지를 얻었다. 이제 누마는 조금도 지체 없이 거칠고 강철과 같은 로마인들의 기질을 보다 부드럽고 온순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착수하였다. 누마는 뿌리 깊게 박힌 로마인의 완고한 정신을 유순하게 하는 일이 싶지 않을 것이라고 깨닫고 그는 자주 제사를 드리며 종교적인 행렬이나 춤 등을 이용하였다.  이것은 모두 누마가 개인적으로 주관한 것이었다. 엄숙한 종교행사에 세련되고 재미있는 여흥을 곁들임으로써, 로마인들의 난폭하고 호전적인 기질을 다스리고자 했던 것이다. 동시에 누마는 로마 인의 머리 속에 종교적인 공포심을 심어주었다. 이상한 영혼의 모습을 보았다든가, 무시무시한 목소리를 들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어 초자연적인 두려움을 통해 로마 인들의 기질을 꺾으려고 한 것이다.

 

그가 이런 방법을 사용한 것을 보면 피타고라스와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는 것도 믿을 만한 이야기로 여겨진다. 피타고라스와 마찬가지로, 누마는 숲 속에서 사는 여신에 대한 소문을 퍼뜨렸다. 또한 특별히 로마의 수호신으로 침묵의 신 타키아를 지정하였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숭배도 금지했다. 혹은 그림으로 그리거나 나무에 새긴 신의 모습도 전혀 허용하지 않았다. '폰키피케스'라고 불리는 제사장 제도를 시작한 것도 누마라고 하며, 그 첫 번째 제사장도 누마가 맡았다고 한다.

 

누마는 신녀들에게 규율을 정해 주었다. 신녀들은 30년 동안 독신 서약을 했다. 처음 10년은 맡은 일을 배우고, 다음 10년은 임무를 수행하고, 마지막 10년은 다른 처녀들에게 가르치라는 것이다. 그것이 지나면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결혼할 수도 있었고 신전을 떠나 다른 생활도 할 수 있었다. 신녀에 대한 문책은 오직 대제사장만이 가능하며 또한 대제사장은 사람들에게 장례 의식을 지도해 주기도 하였다. 이 밖에도 누마는 여러 가지 제사장 제도를 설립하는 데, 그 중에서도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오로지 대화를 통한 타협이라고 하는 식의 살리와 페키아레스의 제도이다. 성화를 모셔둔 베스타 신전을 지은 것은 누마였다. 아울러 그는 그 근처에 레기아라는 왕궁을 지었다. 여기에서 누마는 종교적인 업무를 처리했다. 이와 같은 종교적 훈련과 순화를 통해 마침내 로마는 순종적인 기질로 바뀌었다. 아울러 누마왕에 대한 존경심 또한 극에 달았다.

 

누마는 로물루스 시대에 넓힌 많은 영토를 모두 어려운 시민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농사를 장려함으로써 밭을 더욱 많이 경작함에 따라 그들의 마음도 함께 개발되었다. 그러나 누마의 정책 가운데 가장 칭송을 받은 것은 사람들을 직업에 따라 길드와 조합으로 나눈 것이다. 로마의 부족적 분열로 인해 하나로의 통합은 어려웠으므로 작은 단위의 분열 속에 커다란 부족간의 분열을 없애 버리려는 의도였다. 그리고 누마는 부모가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었던 종래의 법을 개정한 것이다. 누마는 결혼한 아들인 경우는 노예로 팔 수 없게 법을 고쳤다. 단, 그 결혼이 부모의 동의와 승낙하에 이루어진 것이어야만 했다. 또한 그는 달력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달의 순서와 10달이었던 것에서12달로 재편했다. 누마 왕이 재위하는 동안에는 어떠한 전쟁이나 혁명 또는 정치적 동요도 생기지 않았으며, 왕을 시기하거나 미워하여 왕위를 빼앗으려고 한 사람도 없었다. 누마는 80세가 넘도록 살았다고 한다. 누마 왕의 업적은 그 성과면에 있어서 우월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5. 솔 론-아테네의 법을 제정한 재판관



  솔론은 그냥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그의 성장기 중간에 그의 아버지의 가산탕진으로 인해 그는 젊어서부터 장사에 나섰다. 이는 돈을 벌기 위한 목적에서 뿐만 아니라 경험과 지식을 배우기 위하여 각지를 여행하였다고 한다. 솔론은 학문적 관심이 매우 컸기 때문에 틈만 있으면 지식을 습득하고 그것을 시로 표현해 보고 했다. 심지어는 솔론은 자신이 만든 법을 서사시의 형식으로 쓰려고 하였다. 철학에 있어서, 솔론은 당시의 많은 현자들과 마찬가지로 도덕의 정치적인 측면을 제일로 보았다. 반면 과학에 대해서는 매우 평범하고 낡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아테네의 사람들은 메게라와의 또랜 전쟁을 통해 매우 지쳐 있었으로 결국은 전쟁에 지쳐서 그만 두는 지경이 되었다. 그리하여 법을 만들어 앞으로 누구든지 살라미스 섬을 다시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글로나 말로 표현하는 사람은 사형에 처하기로 하였다. 솔론은 이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처사를 개탄하는 한편, 많은 젊은이들이 몹시 싸우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미친 사람 흉내를 내면서까지 시를 지어 크게 외웠다고 한다. 사람들은 이러한 솔론의 태도를 칭송했으며, 결국 아테네인들은 그 법을 고치고 솔론의 지휘 아래 또 다시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다행이도 솔론의 책략에 의해 살리미스 섬을 점령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아테네의 혼란기를 통타 메가라인은 또 다시 전쟁을 벌여 살리마스 섬을 빼앗아 갔다.

 

크레타에 사는 에피메니데스는 아테네로 와서 솔론의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솔론이 법을 만드는데 많은 조력을 하였다. 종교 의식을 개정하였으며 장례식 후에는 일정한 제사를 지냄으로써 상을 당한 사람들의 슬픔을 달래었다. 또한 미망인들이 당하던 야만적이고 잔인한 의식을 폐지하였다. 더욱이 여러 가지 제사를 드리고 새로운 신전도 지어 매우 경건하게 신을 받들었다. 마침내 사람들은 법에 잘 순종하며 단결하고 화합하게 되었다.

 

솔론은 국가내의 대립이 있을 경우에는 중립적인 위치에 서서 양쪽을 회유하는 식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한다. 솔론은 필롬브로투스의 뒤를 이어 아르콘, 즉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솔론을 개혁자로 인정하게 되면서 그에게 공화국을 위한 법을 만들게 하였다. 또한 솔론에게 모든 일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하여, 행정원, 공민대회, 원로원, 법원 등의 모든 일을 일임하였다. 솔론의 뜻에 따라 이들 기관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의 정도와 현재의 규정 중에서 무엇을 없애버리고 무엇을 계속 남겨둘 것인가 하는 사항 들이 결정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일 먼저 취한 조처는 드라토가 제정한 법을 살안죄에 관한 것만 남기고 모두 폐지한 것이었다. 법이 너무 엄격하고 형벌이 너무 가혹했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솔론은 모든 행정 업무를 종래에 담당해 온 사람들 즉 부유층에게 그대로 맡겨두었지만, 가난한 사람들도 다른 부문에 있어서는 참여를 시키기 위하여 시민들의 재산 정도를 조사하게 하였다. 재산 정도에 따라 차등적으로 '펜타코시오메딤니', '히파타 테룬테스', '제우기타이', '테테스'라고 불렀다. 4급의 사람에게는 어떤 공직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단지 공민대회에 참가할 자격만을 주었다. 모든 결혼에 있어서 혼수를 제한했다. 신부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옷 세 벌과 비싸지 않은 약간의 살림살이가 전부였다.

 

솔론은 그 외에도 유언 내용에 대한 법, 여자가 여행을 하거나 상을 당하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한 법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솔론의 법 제정은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국민의 생활 방식이 너무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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