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세기 흑사병

2008. 10. 15. 15:18교회사자료/10.세계사

14세기 흑사병

(재앙과 축복의 두 얼굴 흑사병 -14세기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의 영향 -)

1. 흑사병은 어떤 병인가 2. 역사 속의 흑사병 3. 흑사병의 발병과 전파 4. 흑사병이 미친 영향 5. 흑사병과 중세의 붕괴 6. 역사를 바꾼 흑사병 < 참고문헌 >

 

 

'흑사병이 없었다면 오늘날 인간은 달에 착륙할 수 없었다' 언뜻 듣기엔 이치에 맞지 않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14세기 중반 유럽을 강타한 흑사병의 결과를 살펴보면서 긍정의 머리 짓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유사 이래로 이 처렴 커다란 재앙은 잦아볼 수 없으며, 이처럼 역사에 영향력을 행사한 전염병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먼저 흑사병이란 질병에 대해 살펴보고, 그 전개과정과 중세에 미친 영향을 고찰해 봄으로써 14세기 중반 유럽에 크게 유행했던 흑사병의 역사적인 의의를 서술하겠다.

1. 흑사병은 어떤 병인가

흑사병은 주로 쥐에 잘 걸리는 질병으로서, 감염된 쥐에 기생하는 벼룩을 통해 사람에게 전염된다. 벼룩이 쥐로부터 흑사병 균을 빨아들여 사람의 피부를 물 때 인체에 옳기는 것이다. 흑사병에 걸리면 열이 높이 오르고, 손발이 쑤시며 가장 전형적으로는 임파선이 크게 부풀어오른다.

이런 증후의 질병은 영양 실조 등으로 허약해진 사람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지만, 사실 그 자체만으로 목숨을 앗아갈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흑사병에는 두 가지 치명적인 변종이 있어서 그 하나를 폐 흑사병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부르는 흑사병이다. 질병이 폐렴의 형태로, 즉 공기 흡입을 통해 침투하게 되면, 종기 대신 기침을 하면서 피를 토하고 3일 내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1). 감염자의 몸에 흑색 반점이 생기며 죽은 자의 피부색이 까맣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지게 되었다.

2. 역사 속의 흑사병

기록에 의하면 흑사병으로 판단되는 가장 오래된 병은 기원전 3세기에 상당히 오래 이집트와 중동에 유행했던 풍토병이다. 흑사병이 보다 광대한 지역으로 대유행한 것은 6세기로, 동 지중해 유역으로부터 서유럽, 아일랜드까지 퍼졌다. 그 후 소규모 유행이 8세기 중간까지 반복된 후 300년의 공백을 두고 11세기에 다시 세차게 밀어닥쳤다. 그 발원지는 인도였는데 계속 서진 하였고, 세기말부터 시작된 십자군의 왕래가 그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 유행이 끝나고 다시 300년 정도가 지난 후 흑사병이라면 바로 이때의 가리킬 만큼 유명한 14세기 중반의 대유행이 돌아왔다. 이 14세기의 흑사병은 중국으로부터 중앙아시아, 유럽전역으로까지 파급된 미증유의 것으로, 그 참상은 다양한 기록으로 남겨져 전해지고 있다. 2)

3. 흑사병의 발병과 전파

1347, 48년의 흑사병은 45년 봄 무렵 이탈리아 상선대에 의해 동방에서 흑해연안에 도달하고 다음해인 1347년 크림반도 남안의 가파 부근에 상륙한 뒤 무역로를 따라 시칠리아섬의 멧시나를 거쳐 이탈리아반도 서안을 따라 북상, 피사, 제노바, 베네치아, 피렌체 등 여러 도시를 강타하였다. 그리고 다음해인 48년에는 두 방향으로 나뉘어 당시의 무역통로대로, 한편은 알프스를 넘어 독일로, 다른 한편은 마르세이유에서 론강, 손강을 북상하여 서유럽 나아가 영국과 북유럽에까지 퍼졌다.

1350년을 전후로 한 유럽의 전 인구를 알 수 있는 단서는 없다. 그러나 신뢰도가 높은 J. FC. 해커의 『중세기의 진염병』 (1859)이라는 연구서에 의하면 약 1억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는 2~3세기 전부터 이루미진 토지개척과 농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인구 증가가 거의 정점에 달하고 있었다. 페스트에 의한 사망자 총수에 대해서도 결정적인 숫자는 없다. 당시의 기록, 자료를 그대로 믿는다면 사망률은 50%를 넘는다.

해커는 1347년부터 50년까지 전 유럽의 사망자수를 2500만 정도로 추정하고 있다. 이 숫자는 도시와 군의 인구비, 전파의 격차를 고려한다 하더라도 과장이 아닐 것이며 실제 사망자수는 훨씬 많았을 것이다. 적어도 거의 1억에 가까운 인구의 1/4 죽었다는 뜻이다. 3)

실례를 들어본다면 툴루즈의 인구는 1335년의 약 30,000명에서 1385년에는 26,000명으로, 그리고 1430년에는 8,000명으로 줄어들었다. 동부에 있는 노르망디의 전체 인구는 1347년에서1357년 사이에 30%가 줄어들었으며, 1380년이 되기 전에 다시 30%가 줄어들었다. 4)5)

당시의 어떤 의학으로도 이 병을 예방하거나 치유할 수 없었다. 살아남을 수 있는 확실한 방법은 병이 퍼지지 않은 산골로 피신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데카메론』 (Decameron)에 등장하는 남녀들이 그러하였듯이, 부유층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4. 흑사병이 미친 영향

먼저 흑사병은 구질서와 권위를 뒤흔들었다. 흑사병은 인구 밀집지인 도시에서 더욱 극심하여 사망률은 피렌체의 경우 전 인구의 3/5, 베네치아 4/5, 파도바 1/3애 이르는 형편이었다. 살아남은 시민 가운데는 귀족의 재산을 접수하여 벼락부자가 된 사람도 나타났다. 텅 빈 도시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시정 또한 무경험자의 손으로 넘어가게 되어 기존의 권위와 질서는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학문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다.

둘째로, 흑사병은 농촌지역에서의 노동력의 격감을 야기 시켜 농민의 입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농촌의 사망률은 도시보다 낮았지만 농촌의 인구가 워낙 많았기 때문에 총 사망자수도 많았다. 장원의 노동력 격감에 직면한 살아남은 영주들은 노임을 주고서라도 어떻게든 노동력을 확보하려 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노임은 계속 상승하였고6), 영주들 가운데는 농민에게 토지를 임대해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변동은 결과적으로 농민의 입장을 강화하였고, 영주의 반동적 지배에 대한 저항을 확대시켰다.

마지막으로 흑사병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놓여있던 生死관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흑사병이한 도시나 마을에서 맹위를 떨치는 기간은 평균 6개월이었다. 불과 반 년 동안에 발생한 대량사망, 원인을 알 수 없지만 닥쳐올 것은 확실한 이 공포 앞에서 유럽인들 사이에는 '죽음을 잊어버려라'는 경구도 생겨났다. 평소에 죽음과 친숙한 생활방식을 만들어 탠 것이다. 나쁜 돌림병을 신의 분노로 보고 몸 속의 죄악을 쫓아내기 위하여 동료와 서로 신체를 채찍질하며 행진하는 고행자들도 나타나게 되었다. 7)

5. 흑사병과 중세의 붕괴

1347~48년 사이에 전 유럽을 휩쓸고 그 이후에도 빈번하게 발생한 흑사병은 파멸적인 인구격감과 노동력 부족을 야기했다. 지배계급은 처음에는 수입 보존과 노동력의 확보를 위하여 노동자의 이동과 임금을 강력치 억제하려고 했다. 1351년 영국에서 제정된 노동자 조례 (TheStatute of Labourer)와 프랑스에서 취해진 비슷한 법적 제재가 바로 그 같은 조치들이었다. 그러나 1347년 이전의 임금수준으로 묶어두려는 그 같은 법적 조치는 다 같이 농민과 수공업자의 심한 반발을 초래했다. 결국 두 계급 사이의 이해관계의 대립과 적대감이 심화되면서 그것은 곧 바로 격렬한 계급투쟁으로 비화하였다.

1381년 영국에서 일어난 와트 타일러(Watt Tyler)의 반란은 가장 대표적인 농민반란이다. 영국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은 흑사병 이후 전개된 농민에 대한 통제와 수탈을 강화하려는 영주의 시도가 그 원인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와트 타일러의 반란이 농민의 해방과 자유를 확보하려는 반봉건운동의 성격이 강했다는 점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영국의 농민반란에는 중세교회에 반항하는 반 교회운동도 결합되어 있었으며, 원시 그리스도교에서 유래하는 평등사상도 뚜렷이 나타났다. 비록 봉기는 실패하였으나, 반란군들이 꿈꾸었던 '자유롭고 평등한 왕국'에 대한 열망은 완전히 사라질 수 없었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사이의 투쟁은 농촌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주로 상인층인 도시귀족이 행정권을 독점하고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신분상승을 봉쇄하였을 때 도시빈민 또한 이에 대해 대대적으로 저항했던 것이다.

나아가 흑사병을 신의 형벌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수많은 신자들이 병에 걸린 카톨릭 교회에 대한 믿음이 약해져 갔다. 영국의 경우 성직록을 받는 사제의 40%가, 그리고 수도원 수도사의 45%가 희생되었다. 이에 결과로 교회의 지배력도 약화되었다. 결과적으로 14~I5세기의 전환기에 이르자 중세의 기반인 장원제도가 자체가 붕괴에 직면하게되었다. 또한 농민반란과 1337~1453년간의 백년전쟁, 1455~1485년간의 장미전쟁은 유럽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바야흐로 중세가 지나가고 근대가 태동하는 시기가 핀 것이다.

6. 역사를 바꾼 흑사병

얼마 전 『라이프』 지에서는 '천년의 역사를 뒤흔든 대사건 100'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1000년간 인류사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사건을 순위별로 정리해서 발표하였다. 그 중에서 1348년의 흑사병 창궐은 21위를 차지했다. 단지 하나의 질병으로서 다른 여러 사건들을 뒤로하고 21위에 오른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의문은 중세 말 흑사병이 갖는 위상을 고려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흑사병은 하나의 질병이 아닌 서양중세사회를 변화시킨 역동적인 힘이었다. 비록 그 진행이 인간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인류사에 미친 영향은 그 어떤 인위적인 사건보다 강력했다.

물론 중세사회의 붕괴가 단순히 흑사병 때문이라고 단정지어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도 아주 커다란 잘못이다. 하지만 화학실험에서 촉매를 사용하여 반응을 빨리 일으킬 수 있듯이, 흑사병은 중세의 붕괴를 촉진시키는 하나의 촉매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흑사병은 여러 분야에서 중세의 붕괴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톨릭 교회에 대한 불신이 커지고 교회의 지배력이 약화되었다. 농민들은 자신들을 속박하던 장원을 떠나 자유로운 도시를 찾아 떠나기 시작했으며, 지방 봉건제후의 힘이 약해지는 반면에 왕권은 점차로 더 강해져 갔다. 즉, 근대국가 형성에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변화보다도 중요한 것은 흑사병이 중세의 인류에게 미친 정신적인 영향력일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 어떤 분야도 변화를 겪지 않은 분야는 없지만, 이러한 변화를 이끈 힘은 역시 인간의 정신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힘겹고 단조로운 삶을 본질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옛 관습의 속박을 깨뜨리고, 삶을 보다 적극적으로 영위하고자 하는 진취성으로 발현되었다.

농민들은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도시의 상공업자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보다 적극적인 모습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생각해 보라. 죽을 수 밖에 없는 흑사병이라는 재앙 앞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들은 삶의 희망에 부풀어 있었을 것이며,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살아남은 자의 모습을 가지고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신적인 변화야말로 중세의 어두움을 극복하고 근대로 나아가는 진정한 힘이었을 것이다. 이제 수동적인 삶의 태도는 사라지고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삶의 태도가 인류의 모습에 떠오르게 된다. 구텐베르크의 활자 인쇄나 콜롬버스의 대서양 횡단, 그리고 그 외의 여러 변화들이 이러한 사실을 충분히 뒷받침해 준다.

흑사병은 분명 인류사의 커다란 재앙이었지만, 그것은 또한 커다란 축복이기도 했다. 중세를 무너뜨리고 근대로 나아가게 하는 커다란 원동력이 된 사건이다.

< 참고문헌 >

서양문명의 역사 <소나무 1997> E. M. 번즈

서양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2> 배영수

천년의 역사를 뒤흔든 대사건 100, 고려문화사 1998, 박미경

위험한세계사 <넥서스 1997> 미사오 키류

세계사기초지식 <신서원 1994> 김태숭

100문 100답 세계사 산책, <백산서당 1993> 역사교육자협의회

각주

2) 14세기 이후 흑사병을 포함한 각종 전염병의 유행횟수를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1300-99 : 27회, 1400-99 : 28회, 1500-1599 : 21회, 1600-1699 : 18회, 1700-1799 . ,32회, 1800-1867 . 33회

3) 당시 클레멘스 6세 치하의 로마교황청은 사망자수를 42,834,485명으로 추산했다.

4) 영국의 인구는 흑사병직전 450-600만, 그러나 인두세를 징수한 1377년 250-300만, 1520년대 200-250 만명으로 감소하였다. 16세기말 17세기초에 비로써 인구가 흑사병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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