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5. 15:20ㆍ교회사자료/10.세계사
십자군 원정의 비판적 고찰
1. 십자군 원정의 배경 2. 십자군 원정의 원인 3. 십자군의 경과 1) 제 1차 십자군 2) 제 2차에서 제 4차까지의 십자군 3) 제 5차 이후의 십자군 4. 원정실패의 원인 5. 십자군 원정의 영향 6. 십자군 원정의 의의 / 참고문헌
'전쟁은 피 흘리는 정치이고 정치는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다: 『로마인 이야기』로 우리에게 익숙한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그의 작품 』전쟁』 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 정치적 배경 없이 일어나는 전쟁은 찾아보기 힘들다. 전쟁의 절과 또한 정치적 영향을 낳는다. 이러한 진술을 확연히 드러내 주는 사건이 중세에 일어난 십자군 원정이다. 십자군 원정의 배정, 원인, 경과, 영향을 살펴 봄므로써 전쟁이 정치라는 개념 속에서 갖게 되는 위치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
1. 십자군 원정의 배경
십자군은 11세기 끝 무렵부터 약 2세기간에 걸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차1)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이다. 그때 이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자군이라 부른다 십자군에게서 종교적 요인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단정지어 이야기할 수는 없다. 십자군 원정은 중세의 사회문화적 특수성 아래에서 이해되어져야 한다. 분배받을 영지가 부족해 곤란을 겪던 봉건영주와 하급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을 품고2), 상인들은 이슬람 세력과의 교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였다.3)
그 밖에 여기에는 호기심 · 모험심 · 약탈 등 잡다한 동기가 신앙적 정열과 합쳐져 있었다. 대체로 십자군시대의 서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어느 정도 이루어져 있어서 노르만인의 남부 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동부 독일의 식민활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세계와의 경계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되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 시키는 역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2. 십자군 원정의 원인
고대 로마제국이 동서로 양분된 후 시리아는 동로마제국 통치하에 속주가 되고, 7세기 전반에는 이슬람교도인 아라비아인에게 정복되었을 뿐 아니라, 638년 성도 예루살렘이 그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한편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의 전파와 더불어 예루살렘을 성도로서 숭앙하는 생각이 점차 높아졌는데, 11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많은 그리스도교도가 개인 또는 집단을 이루어 성지 순례를 떠났다.
그 무렵 동방의 이슬람 세계에서는 셀주크 투르크가 세력을 신장시켜 비잔턴제국 영내에까지 진출하고 시리아 아르메니아 ·소아시아를 지배하고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하였다. 1071년에는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순례자를 박해하여 기독교도들의 격분을 불러일으켰다.
1092년 셀주크왕조의 통일이 깨어지고 그 영토는 왕족간에 분할되었다. 이 기회에 비쟌틴제국 황제 알렉시우스 1세는 비잔틴제국의 부흥을 꾀하여 군사적 원조를 청하는 사절을 로마 교황청으로 보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교활 우르바누스 2세는 최초로 십자군을 제창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도는 알렉시우스의 요구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왜냐하면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직서임권 투쟁의 와중에 있었는데 신성로마황제 하인리히 4세보다 우위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동방원정이라는 어려운 사업을 통하여 유럽에서 교황권을 확립하고, 비잔틴에서의 그리스정교회를 로마교회 산하에 통일하여 했던 것이다. 즉, 그는 동서로 갈라진 교회를 다시 통합하여 그 수장이 될 것을 기대한 것이다.
3. 십자군의 경과
1) 제 1차 십자군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클레르몽공의회 회의석상에서 십자군에 관한 연설을 헨다. 그는 성지 해방전쟁을 성전이라고 명명하고 종군하는 군사들에게 신의 구원을 약속하였다. 그가 행한 연설의 일부분이다.
'예루살렘과 콘스탄티노플의 형제들이 긴급한 호소를 해오고 있습니다. 페르시아지방으로부터 침입해 온 투르크인들이 무력으로 기독교인들을 추방하고 약탈을 자행하여 마을들을 불태워 버리고 있다고 합니다. 신성한 교회를 부수고 신앙을 유린하고 있습니다....이러한 악을 물리치고 그 땅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일 것입니다.'
군중들이 이러한 연설을 듣고 흥분해서 투르크인과 이슬람교인들에 대한 분노의 감정에 휩싸인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 후 교황의 호소를 전하기 위하여 각지에 사람이 파견되었다. 교황이 계획한 십자군은 주로 기사들로 편성할 예정이었다. 각 지방에 파견된 사람들과는 달리 멋대로 십자군에 대한 열을 부채질하고 다니는 자도 나타났다.
그 중에서도 은자 피에르는 십자군 사상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동쪽을 향해 떠난 것은 농민을 대부분으로 하는 민중십자군4)이었다. 우선 고티에가 이끄는 일단, 이어서 은자 피에르를 따르는 한 부대가 출발했다. 양군은 헝가리 ·불가리아를 통과할 때 이미 그곳에서 식량이 떨어져 약탈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럴수록 심한 보복공격을 받았다. 양군은 합동하여 소아시아에 건너가 투르크군과 싸움을 벌이기는 했으나 결과는 패배로 끝났다.
그러나 이밖에도 3개의 민중십자군부대가 이어졌는데, 그들에 의해서 유대인 박해가 개시된 것이다. 특히 라이넝겐의 백작인 에미코의 박해는 처참하였다. 십자군에 대한 지나친 열성이 일찍 그리스도를 십자에 매어단 유대인에게로 쏠렸는데, 거기에는 부유한 유대인에 대한 경제적 증오심도 있었다. 이 3개 부대는 헝가리인의 공격에 의해 괴멸되었다.
정규 십자군은 1096년 여름부터 4개 부대로 나뉘어 출발, 육.해 양로를 지나 이듬해 봄 콘스탄티노플에 집결하였다. 그것은 당시로서는 매우 큰 부대였는데 비전투원을 포함하여 5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그 중 주력을 이룬 것은 프랑스인과 노르만인이었다. 하지만 이들 십자군 병사들은 비잔틴제국 사람들로부터 결코 환영받지 못했다. 비잔틴제국에게 필요했던 것은 투르크인과의 전투를 위한 원군이었다. '예루살렘의 해방'이라는 목표는 로마교황과 십자군이 일방적으로 제기한 것이었다.
합류한 십자군은 니케아 공략을 시작으로 동쪽으로 진군하는 동안 투르크인의 공격, 그리고 심한 더위와 굶주림 등으로 상당수의 인원과 말을 잃었다. 시리아에 도착하여 첫 공격 목표인 안티오키아의 공방전에만 8개월이 걸렸다. 점령 후에도 전력회복과 주변지역을 정복하는 데 6개월을 소비했으며 그 동안 유행병에도 시달렸다. 그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지휘자들이 분쟁을 일으킴으로써 부하들의 불평을 싹트게 했다.
십자군이 예루살렘 전면에 도착, 1099년 7월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였다. 거기서 처참한 유혈극이 벌어졌다. 십자군 병사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열광적인 신앙파 이교도에 대한 격한 증오심이 한 덩어리가 되어 십자군의 정신을 형성한 것이다. 당시의 상황을 경험한 한 십자군 병사의 기록이다.
'도시에 입성한 순례자(십자군의 병사)들은 솔로몬 신전 안에까지 사라센인(이스람교도)을 쫓아가 모두 죽였다... 거시에서 우리병사들은 복사뼈가 피에 잠길 정도의 대학살을 자행하였다. 이윽고 우리 병사들은 마을을 휩쓸며 금, 은, 말, 당나귀 등을 약탈하고 재물이 가득한 가옥들을 황폐화시켰다. 이어 우리 병사들은 극도의 환희와 행복에 취해 비명을 지르고 눈물을 흘리면서 우리들의 구주 예수의 무덤에 참배하였고 그리스도에게 약속한 그들의 의무를 완수했던 것이다.'5)
성지를 되찾겠다는 종교적 정열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에 대한 증오심으로까지 발전해 이 같은 대학살을 만들어낸 것이다. 살해된 이슬람 교도의 수는 7만명을 넘었다. 유태교도도 기독교의 적으로 간주되었다. 예루살렘 시내의 교회당에 모여 있던 유태교도는 건물과 함께 불에 타죽었다.
당초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도 십자군 병사들의 일부는 시리아에 정착하였다. 정복지에는 예루살렘왕국. 안티오키아 후작령. 트리폴리 백작령 · 에데사 백작령 등 4개국이 들어섰다. 또 왕국 안에는 요한 기사단 · 템플 기사단, 조금 늦게 독일기사단 등의 종교기사단이 편성되어 성지 방위의 주요 군사력이 되었다. 영주는 성을 거점으로 지배층을 형성하였고, 상인은 도시에서 특권을 얻어 이익을 증대시켰으나 농민은 희망도 없이 예속상태에 놓였다. 교회와 수도원이 건립되고 교회조직도 정비되어 유럽의 제도와 관습이 그대로 옮겨졌다.
2) 제 2차에서 제 4차까지의 십자군
1114년 에데사가 이슬람군에게 탈취되자 제2차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프랑스왕 루이 7세와 독일왕 콘라트 3세가 지휘자가 되었다. 시리아에서 다마스쿠스공격이 계획되었으나 시리아 주재 십자군 병사가 적측의 감언에 속아 전열을 이탈했기 때문에 중도에서 좌절되었다. 그리하여 두 국왕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귀국하였다.
12세기 후반에 이집트의 명군 술탄 살라딘이 하틴전투에서 그리스도교군에게 승리를 거두자 그 여세를 몰아 각지의 도시와 요새를 점령하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 패전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제3차 십자군이 파견되었다. 이번에는 신성로마황제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왕 필리프 2세, 영국왕 리처드 1세 등이 참가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소아시아의 키리키아강에서 빠져 죽었고 남은 군사만 시리아를 향해 진군하였다. 현지에서는 아콘 포위작전이 벌어졌는데도 필리프왕은 1년 8개월 늦게 이 전투에 참가하였다. 게다가 그는 아콘 공략 후 곧바로 귀국해버렸다.
리처드왕은 키프로스섬 정복 때문에 필리프왕보다 2개월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후 리처드는 살라딘과 교전, 몇 개의 도시를 탈환하지만 예루살렘 해방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그리스토교도의 성도 순례와 안전을 보장하는 것으로 그쳤다6). 그 후 아론은 시리아에서의 가장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제4차 십자군은 교황권의 절정기라 할 수 있는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발동되었다. 군단의 편성은 프랑스인을 중심으로 하였는데, 황제나 국왕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먼젓번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 이슬람군의 거점이 된 이집트가 원정의 목표로 결정되었다. 이에 대해 군대의 수송을 담당한 베네치아는 이집트와의 평화적 교역을 바라고 있었다. 그리고 약속한 수송비가 모금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십자군은 베네치아의 지시에 따라야 했다. 그들은 우선 달마티아의 츠아라를 치고 이어서 콘스탄티노플을 향해 진군하였다.
전부터 베네치아는 비잔틴제국 내에 유리한 상업상 특권을 누리고 있었는데, 최근의 정변으로 그것을 잃은 상태에 있었고 제노바와 피사에 눌려 있었다. 1204년 십자군은 정쟁의 혼란을 틈타 비잔틴제국을 무너뜨렸다. 수많은 성유체와 보물을 약탈당하고 수도의 일부와 항만과 섬은 베네치아 영토가 되었다. 그 밖의 비잔틴 영토도 십자군의 지휘자들에게 분할되어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라틴제국이 성립되었다. 이 제국은 약 반세기 동안 존속하였다.
3) 제 5차 이후의 십자군
제5차 십자군은 또다시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의 제창으로 이루어졌다. 이 십자군은 아론으로부터 이집트에 원정하고, 다미에타를 포위하였다. 작전은 성공하였으며 이슬람 측은 다미에타와 시리아를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이를 거절하고 카이로에 진격하였으나 격퇴되었다.
제6차 십자군은 신성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행해졌는데 이제까지와는 다른 특징을 가진다. 프리드리히는 '세례를 받은 시칠리아의 술탄'이라고 불릴 정도로 아라비아의 풍습에 매혹된 황제였다. 그는 무력이 아닌 외교수단으로 이슬람 측으로부터 예루살렘과 그밖에 영토를 양보받았다. 그러나 그가 돌아간 뒤에는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들 사이에 내분이 격화되어 그 사이에 예루살렘도 잃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왕 루이 9세가 이끄는 제7차 십자군이 결성되었다. 루이 9세는 키프로스섬에서 이집트로 건너가서 다미에타를 점령했다. 이때에도 이슬람 측은 다미에타와 예루살렘의 교환을 제안해왔으나 전과 같이 이를 거부하고 카이로를 향해 진군했으나 만슬러전투에서 대패하여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잠시 시리아에 머물면서 약간의 항구와 요새를 탈환하고 철수하였다.
그 후 안티오키아가 이슬람군에게 함락되자 루이 9세는 최후의 십자군을 이끌고 출발하였는데, 튀니스를 공격하였을 뿐 그곳에서 죽었다. 시리아에서는 요새가 잇따라 함락되었고, 1291년 아콘마저 빼앗기자 십자군 국가와 그 운동은 종말을 고했다.
4. 원정실패의 원인
제1차 십자군의 성공은 이슬람세계가 정치적 분열을 한 데에 큰 이유가 있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통일되자 반격을 당하는 상태가 되었다 십자군은 전력도 충분하지 못하였지만 시리아 주둔 십자군 병사와 종교 기사단, 새로 도착한 십자군병사, 상인 등은 상호간, 또는 각 내부에서 분쟁이 그치지 않았다. 거기에는 영토문제와 경제적 이익의 문제가 있었고, 또한 형성되어가고 있던 국민적 감정 등에 의한 대립이 얽혀 있었다.
또 십자군 국가에서는 소수의 정복자가 많은 피정복민들을 지배하고 있었으므로 그 기초는 항상 흔들리는 상태였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무지와 광신과 편협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슬람교도들의 증오심만 부채질하였다. 그리스도교도를 성지로 가게 한 서유럽의 팽창운동은 그 자체의 정체와 더불어 십자군도 종말을 고하였다.
5. 십자군 원정의 영향
십자군운동은 우선 유럽에서 교황권의 후퇴, 국왕 권력의 강화와 중앙집권화, 도시와 상업의 발달, 이슬람문화와의 접촉에 의한 문화의 발달 등 모든 일과 관계가 있다. 즉 교황에 의해 제창된 운동의 실패는 그대로 교황의 권위를 약화시켰다. 전사에 의해 단절된 귀족의 소유영지는 왕령에 편입되어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였다.
십자군운동으로 최대의 경제적 이익을 본 것은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였다. 십자군에 참가한 유럽인들은 미지의 이질적인 세계를 발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영향을 과대하게 평가할 수는 없다. 왕권의 강화는 봉건사회 내부 전개에 기본적 요인을 가지고 있었다.
봉건적인 분열상태에 있을 때에만 유럽세계를 관념적으로 통합할 수 있었던 교황권은 왕권에 의한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도시와 상업의 발달은 십자군운동의 전제조건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규모의 군대를 먼 곳까지 보낼 수도 없었고 다량의 식량과 무기를 모으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동방문화 유입의 중심지는 시칠리아와 에스파냐였다. 유럽인은 이교문화에 접하면서도 최후까지 관용의 정신을 배우는 일이 없었다. 또한 제4차 십자군에 의해 와해된 비잔틴 제국은 다시 부활하지만 이미 소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몰락은 결정적이었다. 그 때문에 비잔틴제국은 이제까지 수행해 오던 유럽의 방벽 역할을 잃게 되었다. 이슬람세계에 대한 영향도 컸다. 이슬람교도는 관용의 정신이 풍부했다. 그러나 십자군의 공격을 받게되자 그들 사이에 점차 비관용성과 민족의식이 고취되었으며, 성전에 대한 정열은 높아갔다.
6. 십자군 원정의 의의
글의 앞부분에서 이미 이야기하였듯이 중세의 십자군 원정은 그 이름과는 걸맞지 않는 다소간의 정치적 목적을 전제로 한 사건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십자군의 원정을 종교적인 신념을 가지고 이슬람세력과 맞서 서유럽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또한 그리스도교의 성지인 예루살렘을 회복하기 위한 성전으로서 인식하고 있다.
물론 십자군 원정을 살펴볼 때 이러한 점을 완전히 배제하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앞서 우리가 생각하여야 할 문제가 많다. 우선 십자군을 주창한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의도이다. 교황은 단지 종교적 이유만으로 십자군의 원정을 원했던 것인가? 이애 대한 답은 '아니다'이다. 당시 교황은 성직서임권투쟁의 와중에서 다소간의 곤란을 겪었고, 왕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확인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교항은 십자군의 원정을 비잔틴제국의 동방정교회를 다시 로마 교황청 아래로 끌어들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생각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 9세기의 성상파괴령 파동이래 비잔틴과 결별하고 있었던 교황에게 이번 기회는 더 없는 절묘한 기회였을 것이다.
다음으로 중세말기의 귀족계층의 상황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한정된 영토 내에서 영주를 포함한 귀족계층은 분배받을 땅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더구나 장자 상속제의 확립은 더더욱 어려운 상황을 유발시켰다. 이에 영지를 둘러싼 사소한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의 하나로 예루살렘을 떠올렸던 것이다. 즉, 이슬람세력을 몰아내고 그 공간의 자신들의 소유로 만들고자 하는 생각이 서유럽의 많은 귀족들의 귀를 솔깃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동방과의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했던 상인계층을 고려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인도 및 중국과의 동방무역 통로에 이슬람세력이 버티고 있어 고민하고 있던 상인들은 십자군원정의 소식은 그 무엇보다도 반가운 소식이었을 것이다. 즉, 이슬람을 거치지 않은 직접교역으로 더 많은 부를 얻을 수 있었던 그들은 이러한 원정에 더욱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덧붙여 이번 성전에 참여하면 모든 죄를 사해준다는 교황의 약속에 혹한 일반 시민들의 이상적인 열정 또한 십자군의 성격을 변질시킨 요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십자군 원정을 종교적 열정과 무관하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무게 추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그 평가는 사뭇 달라질 수 있다. 십자군 원정이 끼친 긍정적 부정적 영향은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다. 하지만, 그러한 결과를 낳게한 원정의 의도를 생각한다면 정치적인 문제가 종교의 탈을 쓰고 얼마나 바뀔 수가 있는지 느낄 수 있다.
이미 인용했던 시오노 나나미의 말처럼 '전쟁은 피흘리는 정치이고, 정치는 피흘리지 않는 전쟁이다'라는 말은 십자군 원정을 살펴보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그것은 성지수복 명분 아래 자행된 전쟁이었으며, 전쟁의 성격을 볼 때 정치, 경제적 이익을 바탕에 둔 하나의 약탈전쟁이었다.
<참고문헌 > 서양문명의 역사 <소나무 1997> E. M. 번즈 서양사강의 <한울아카데미 1992> 배영수 세계사신문 1 <사계절출판사 1998> 세계사신문 편찬위원회 위험한 세계사 <넥서스 1997> 미사초 키류 에세이세계사 <백산서당 1992> 대월서점 편찬위읜회 이야기세계사 <청아출판사 1996> 김경묵, 우종익 |
각주
1) 학자의 관점에 따라 7회로 보기도 한다. 즉, 프랑스 국왕 루이 9세가 일으킨 두 번의 십자군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두 번의 십자군 원정은 구분되어져야 한다.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그 공격대상도 다르기 때문이다.
2) 장자상속제가 시행된 이후, 한정된 영토 내에서 자신의 땅을 가질 수 없었던 하급관리나 영주들은 자연히 예루살렘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십자군 원정의 길을 택하게 되는 것이다.
3) 중에 장원의 울타리 안에서 압제에 시달리던 많은 농노들에게 십자군원정은 일종의 탈출구였음에 틀림없다. 또 이번 성정에 참여하기만 하면 모든 죄를 사해준다는 교황의 약속 또한 많은 농민들을 원정의 길로 이끌게 한 이유임 이 분명 하다.
4) 민중십자군은 닿는 마을마다 '여기가 예루살렘인가?', '예루살렘은 이 길을 가면 되는가?' 하고 물었다고 한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자신들의 고향에서 어느 정도의 거리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이슬람교도와의 실제 전투에는 거의 참가하기 못했다. 오히려 전장에서는 방해가 될 뿐이었다. 제1차 십자군에 합류하여 예루살렘에 도착한 것은 그들 중 일부 뿐 이었다. 이들이 원정에 참여한 것은 예루살렘을 이슬람세력으로부터 구해내겠다는 생각보다는 '성지'인 예루살렘을 한 번 찾아가 볼 수 있는 기회로 생각한 것이다.
5) 예루살렘 약탈 당시, 한 집에 먼저 들어간 사람이 그 집의 주인의 권한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하나의 불문율로 지켜지고, 많은 원정병사들은 한 집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더욱더 맹렬하게 약탈을 자행하게 된 것이다.
6) 장기적인 대치상태에 있을 때, 영국에 남아 있던 리처드왕의 동생 존이 프랑스왕과 짜고 영국 왕위를 노리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리처드는 살라딘에게 휴전을 제의한다. 그 조건으로는 '예루살렘이 살라딘의 영토임을 인정한다. 그 대신에 순례자에게 자유로운 예루살렘 출입을 보장하라'라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예루살렘을 다시 찾지도 못하고 자유로운 출입만을 보장받는 데 그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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