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10. 15. 15:21ㆍ교회사자료/10.세계사
마녀사냥 (중세 유럽의 사회상)
I. 서론 II. 본론 1. 마녀개념의 형성 2. 마녀사냥의 양상 3. 마녀사냥의 소멸 III. 결론 참고문헌
I.서 론
'마녀' 라는 단어는 우리에게는 그리 낮 익지 않은 말이다. 흔히들 고깔 모자를 쓰고 빗자루를 타고 다니는 익살스러운 그림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마녀는 단순히 동화 속 악인이이 아니라 한 시대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물론 일인의 인물은 아니지만 종교적인 분쟁이나 사회의 혼란을 뒤집어씌우는 명목 좋은 제물이 되기도 했으며 자세히 들어가서는 당시 사람들의 사상이나 인식 심지어 처형 방법 등을 알 수 있다. 이에 마녀사냥이라는 단편적 주제로 알아볼 수 있는 유럽 중세의 사회상을 심도 있게 조사해 보았다.
ll. 본 론
1. 마녀개념의 형성
1) 마녀사냥의 배경과 실태
유럽에서는 대략 1450년부터 1650년까지 마녀재판이라는 집단적인 고발, 재판, 처형이 일어나 10만명 이상의 목숨이 희생을 당했다. 그들이 마녀로 지목되고 죽임을 당했던 가장 표면적인 이유는 공동체에 해를 주는, 즉 기독교적 질서 뿐 아니라 근대인들의 평화와 안정을 위한다는 명목이었다.
역사학에서의 마녀연구는 일종의 도그마로부터 시작하였다. 즉 과학과 이성의 시대인 근대말기의 유럽인들은 자신의 선조들 중에 마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하였고 모든 책임을 진보의 걸림돌인 교황청으로 돌렸다. H.C. Lea를 태두로 하는 영미계의 이른바 자유주의 사가들은 이러한 논지를 펴는 대표적인 학파로서 교황, 심문관, 재판관 등 종교적 엘리트들의 비관용 정책과 광분을 마녀사냥의 가장 큰 원인으로 보았다.
이에 비해 1920년대의 문화인류학, 민속학자들은 유럽에서의 마녀신앙을 실존했던 것으로 파악했던 바, 그 담지자는 일반민중들이며, 이는 기독교화가 완성되기 전에 게르만족이 보유하고 있었던 원시이교신앙이 잔존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M. Hurray를 위시한 이들 민속학파는 따라서 마녀문헌과 재판기록상에 나타난 믿을 수 없는 진술들이 사실이거나 아니면 실제와 유사한 형태로 묘사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그 결과 자유주의 학파와는 상반되게 마녀사냥에 관해 아래로부터의 책임을 은연중에 내비치었다.
그러나 근래의 연구는 이 극단적인 두 학파의 오류를 수정하고 절충하며 위든, 아래든 어느 한쪽만이 원인을 제공했다기보다는 보다 다원적인 차원, 즉 사회경제적인 원인을 밝히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따라서 마녀재판이 담당했던 사회적인 기능뿐 아니라 마녀개념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환경의 추이에 대한 연구성과가 두드러졌다.
R. Kleckhefer, N. Cohn, H.R. Trevor-Roper, E. Peters, J.B. Russell등은 마녀개념의 형성을 사회경제적인 변화와 관련된 유럽인들의 감수성의 관점에서 고찰하였으며, K. Thomas, A. Macfarlane, E.W.Montor, H.C. Midelfort,Nissenbaum , p. Boyer 등은 마녀재판의 사회사적인 의미를 주로 관찰하였다.
이들 두 부류의 공통점은 마녀개념과 재판을 종교, 신앙적인 문제에 국한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관심은 언제나 총체적인 사회현상으로서의 마녀재판이며 따라서 학살의 원인제공자에 대해서도 일방적인 입장을 지양한다.
2) 민간신앙
근대 초의 마녀개념이 언제부터 정립되었는지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다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대의 주술사가 그 한 뿌리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영어의 Wicca (Witcha와 동일한 발음), sorcerer, 독어의 Hexe, 불어의 Sorcier, 라틴어의 Maleficus 등은 모두 이를 지칭하는 말이며, 영어와 라틴어의 그것은 어원상 '사악함, 악의'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또한 유스티아누스의 Digesta에서 사람을 해하는 주술사에 대한 규정이 있는 것으로, 또한 일반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반면 게르만족의 고대 주문인 'Sprach Jung Frau Hille, Blut stand stille'에서 보이듯이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 등 공동체의 요구에 부합하는 기능도 아울러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의 이미지와 기능이 어떠하였건 간에 카톨릭은 주술사를 비난했다. 모든 자연현상은 오직 하나님의 주관이며, 따라서 인간이 여기에 간여하려함은 반드시 악마의 힘을 빌고자 하는 사악한 짓이라고 규정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이며, 그의 입장은 스콜라철학에 접목되고 그 결과 중세를 지나면서 기독교자체의 악마론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고대의 주술사와 더불어 마녀개념의 형성에 있어 근간을 이룬 것은 원시 이교신앙이었다.
대표적인 예인 이른바 Wild Hunt는 죽은 영혼의 무리로서, 숲 속 등을 떠돌아다니는 광포한 존재였다. 무리의 구성원들은 반인반수의 괴물로 등장하기도 하며, 그 우두머리는 여성인 Hilda로 여겨졌는데, 후에 그녀는 로마의 여신인 Daina와 결합한다. 이 귀신들이 인간의 형태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잘 나타내는 것은 약 900년경의 법령집인 Canon episcopi 이다.
이 법령집은 귀신들의 회합을 인간인 악녀들이 Diana를 섬기기 위한 모임으로 묘사했으며, 따라서 훗날 전형적인 마녀모임인 sabbath에 근접해 있었고, 이러한 악녀들이 회합을 하고 그들의 신을 섬긴다는 개념도 훗날 마녀가 연대조직을 가지고 있다는 확신의 근거가 되었기에 대량처형이 자행될 수 있었다.
10세기경에 이러한 문구가 등장하였다고 해서 이 시대에 이미 마녀가 널리 퍼졌다고 속단 할 수는 없다. 다만 서유럽의 기독교화가 일단락 지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원시 이교신앙이 광범위하게 존재했으며, 카톨릭은 이를 제거하려고 노력했다는 점과 여성혐오의 전통이 민간신앙을 점차 변형시킨 흔적을 찾아 볼 수는 있다 하겠다.
3) 중세의 이단들
10세기까지 나타난 마녀의 개념은 주로 민간신앙 적인 요소를 띠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이후 마녀의 전형이 될 만한 이미지들은 거의 다 드러난 셈이다. 이는 상기 지적한 민속학파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유럽만의 특징적인 면모는 공적인 권위체제가 집단적인 처벌의 대상으로 마녀를 규정했다는 점이며 이는 민간신앙에 대한 규제의 차원을 넘어선 것이었다.
이러한 방향으로 마녀의 개념형성을 강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이단의 창귈과 카톨릭의 대응이었다. 대략 1000년 이후 유럽은 내부의 정치적 분열상과 외부의 이민족침입을 극복하고 중세적인 질서의 건설기에 몰입하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교권확장을 반대하는 개혁주의 이단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들은 카톨릭의 형식성과 부패를 거부하고 순수했던 초대교회로 복귀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교황청은 이들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탄압하였다.
최초의 공식적인 이단심판인 1022년 오를레앙에서의 재판은 바로 이들을 처형한 것인데, 눈여겨볼 것은 이들의 죄목이 교황에 대한 불경죄가 아니라 혼음파티, 즉 sex orgy였다는 것이다. 이는 교황의 권위뿐만 아니라 현세의 질서마저 부정했던 이들 이단이 교회의 입장에서 악마를 숭배하는 것처럼 여겨졌을 것이라는 점과 더불어 이들이 은밀한 종교적 회합을 orgy 내지는sabbath로 과장했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아닌 악마를 숭배하는 이상 그들에 대한 비난은 마녀에 대한 그것과 다를 것이 없게 된 것이다.중세사회의 발전은 I2세기라는 번영기를 낳았지만 아울러 기독교적 가치질서에 혼란을 가져왔으며 이는 중세 최대의 이단인 까따리파가 창궐하는 토양이 되었다.
까따리파가 전례 없이 교황청을 위협할 수 있었던 것은 2원론을 내세우는 그들의 교리 때문이었다. 이들은 선과 악의 원리를 당시대상에 적용했는데, 현세의 모든 것들을 악마의 소산으로 보았으며, 따라서 교회도 악마의 피조물로 이해했다. 현세에 불만을 가진 이들이 여기에 가담하여 상당한 세력을 형성했고, 교황의 사절마저 감금시키는 사태가 일어나자 교황청은 무력진압을 결정하여 알비즈와 십자군을 동원케 하였는가 하면, 교황직속의 심문관을 파견하여 이들을 근절함과 동시에 일반인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고취시켰다.
마녀개념이 급속히 정형화해 가는 것은 바로 이들 까따리파에 대한 응징의 과정에서였다. 종래의 sabbath뿐만 아니라 인신공양, 인육섭취, 영아살해, 근친상간 등의 부도덕한 면모들이 이들의 묘사에 등장한다. 실제로 이들이 이러한 관행을 행했는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엇갈린다. Jonas, Koch, Wemer 등의 사가들은 이원론적 이단의 특징인 현세부정주의는 자유신앙주의(libertinism)와 反도덕주의(antinomianism)를 개념 필수적으로 수반하는 것으로서 종교적, 도덕적 금기를 부정하고 실제로 음란하고 방탕한 행위를 자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이러한 관행의 흔적들을 살펴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부도덕한 면모에 대한 과장, 특히 성과 관련된 비난은 고대 이래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는 것이다. 로마인들도 기독교인들의 brother, sister와 같은 호칭만으로 근친상간이라는 비난을 뒤집어 씌웠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상업적으로 로마인들을 앞서자 이들이 로마인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퍼졌고 기독교도들은 동의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예를 보건대 부도덕한 면모에 대한 과장과 비난은 대개 자기보호의 수단으로 행한 조치의 성격을 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구나 탄압의 대상이 종교적 성격을 떤 것이라면 비난은 더욱 강렬해졌다. 1022년 오를레앙 재판 뿐 아니라 까따리파 탄압과정에서 나타난 이미지들은 악마라는 카톨릭최대의 적을 묘사한 것이며 마녀개념은 민간신앙의 차원을 벗어나 이제는 기독교교리의 한 부분이라고 할만큼 정형화했다. Aquinas, Albertus Magnus와 같은 스콜라신학자들의 철학적 기반이 이단의 응징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악마와의 계약과 같은 마녀개념을 저작을 통해 발전시켰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4) 14세기의 공포와 악마론의 발전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 13세기 말엽까지 악마와 연결된 이단의 이미지가 완성되었고 마녀개념은 이것으로부터 양분을 흡수했다. 그러나 정작 악마가 이 세상을 쥐고 흔든다는 공포심이 민간인들의 의식 속으로 자리잡았던 것은 유례없는 사회적 위기상황이 지속되었던 14세기이후였으며, 따라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모두 악마의 소행으로 돌리려는 스콜라철학의 악마론 자체가 사회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교황권의 대분열, 세속군주의 성장, 신비주의, 경험주의의 대두와 같은 '중세의 가을'에 전쟁, 기근, 전염병, 인구감소와 장원제의 해체와 같은 일련의 사태가 진행되어 그 결과 유럽은 일종의 아노미 상태에 빠져들었다.
흑사병이후에 나타난 유럽사회의 취약성은 채찍질고행, 죽음의 춤, 광란의 춤, 천년왕국운동의 부활 등의 예로서 짐작해 볼 수 있다. 민중들의 불안한 심리가 이렇듯 현세권위에 대한 부정 내지는 악마숭배로 나타났던 반면, 지식인들은 이러한 움직임을 탄압하면서도 불안을 감출 수는 없었는데, 이러한 면모는 주술사에 대한 탄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중세 전반에 걸쳐 비교적 관대한 처분을 받았던 단순한 주술사는 이제 전염병 및 각종 불행의 원인제공자라는 혐의를 쓰게 되었다. 14세기말에서 15세기초까지 교황의 칙령뿐 아니라 각 대학의 신학교수들마저 단순주술사를 악마와 관련된 마녀로 규정하였고 I5세기초의 주술사에 대한 재판에서 마녀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자유주의사가들의 주장대로 마녀가 엘리트, 특히 성직자들의 의도적인 산물인지 아닌지를 규명하기 이전에 분명 이들이 기독교질서의 보호를 위해서 마녀개념을 확대, 강화시켰던 것만은 사실이다. 속인들의 심리상태가 악마를 긍정하여 숭배하거나 두려워하는 경향이 짙어지자, 성직자들은 숭배하는 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면서도 두려움을 제고시키려 했다. 이런 와중에서 악마와 별로 관련이 없어 보이던 단순 주술사 마저 신에 대한 반역자로 낙인찍혀 탄압 받았던 것이다.
사회적인 위기와 맞물려 악마론이 성행하자 14세기말부터 일반속인들간의 마녀재판이 성행하였다. 아직은 그 개념이 다소 모호하고 처형자도 소수에 지나지 않았지만 대부분의 사례들에서 악마숭배가 두드러졌다는 것과 12-3세기 이단운동의 지리적 한계성을 초월하여 이제 악마론이 전 유럽으로 파급되어가고 있음은 주목할 만한 것이었다.
사회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성직자의 마녀문헌도 I5세기에 급증한다.15세기는 이단탄압의 결실인 악마론과 민간신앙이 체계적으로 결합하는 시기이며, 문헌의 전파로 말미암아 정형화한 마녀개념을 유럽대륙은 공유하게 되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해보면 마녀개념의 형성에 관한 한 자유주의 사가들의 주장이 일면 타당한 면모를 가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완전하지 못하다. 실제로 마녀사냥이라 부르는 대학살이 왜 16세기후반에야 일어났으며, 과연 일부계층만의 체계적인 개념만으로 10만 명 이상을 살상할 수 있는 가라는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마녀사냥의 극성기인 16-7세기 사회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보다 포괄적인 연구방법이 요구되는 것이다.
2. 마녀사냥의 양상
1) 성직자에서 속인으로
마녀개념의 확대, 강화와 더불어 재판절차에서도 진전이 이루어져 I5기 내내 마녀재판은 꾸준히 증가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전반기는 인문주의 회의론의 강세, 종교개혁으로 인한 교회조직의 붕괴 등으로 인하여 일시적이나마 마녀재판은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 16세기 중반이후부터는 다시 마녀재판이 전 유럽적으로 재개되는데, 이는 가히 마녀사냥이라고 할만큼 대대적인 집단처형이었으며, 과거의 재판과는 여러모로 다른 성질을 띠었다.
16세기 마녀재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세속법정, 내지는 세속정부가 과거 교회법정의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지 알고 이제는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는 것이다. 1532년 Carolina법전을 필두로 16세기중반을 거치면서 각 국의 법전에는 마녀가 세속범죄로 규정된다. 과거 로마법에 규정된 마녀는 단지 타인에게 해로운 주술을 행하는 'Maleficium'적 성격이었지만 16세기에는 세속정부가 이런 범죄뿐 아니라 악마를 숭배하는 영적 범죄, 즉 'Diabolism'적인 마녀까지도 규제하려 했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Trover-Roper의 주장대로 분명히 성직자들에 의해 완성된 마녀개념은 16세기 이후 속인권력자에게 확대되었으며, 마녀재판의 주도권 또한 이들에게 넘어갔다. 이런 양상을 놓고 많은 사가들이 권력의 추구, 민중에 대한 통제, 경제적인 이익추구라는 인간의 어두운 면을 강조하는 해석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증연구를 통하여 이러한 해석이 일반적인 적합성을 갖지 못함이 밝혀졌다.
반면 마녀개념의 세속권력에로의 확산이 종교개혁이라는 시대실과 필연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Levack의 견해는 보다 포괄적인 이해를 제공해준다. 종교개혁과 반동개혁이 사회를 정화시키고 개인적인 도덕성, 신앙심을 고취시키는데 관심을 기울였고, 개혁가들은 이를 위해 국가의 힘을 빌려쓰는데 주저하지 않았다는 그의 주장은 이 시기에 근친상간, 매춘, 간음을 규제하는 법률이 제정된 맥락을 가늠케 해준다.
나아가 종교적 비관용의 시대에 세속 정권이 도덕적으로 가장 타락한 형태의 범죄인 마녀를 규제한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그러나 사회의 도덕적 순수성 유지의 의무를 이제 국가가 떠맡게 된 보다 근본적인 동인은 국가와 신의 관계에 악마가 개입하지 말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개혁자들, 특히 프로테스탄트들은 악마의 존재를 확신하고 사람들에게 더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켜 호전적인 양상까지 띠었고, 카톨릭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종교적 분열로 인한 폭력, 반란 및 정치적 불안정성은 세속의 지배자에게 일시적으로나마 신앙의 충실성을 제고시켰으며, 악마의 존재를 확신한 그들은 이제 자신이 지배하는 영역이 보다 종교적으로 순수해지고 경건해져서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 곳(Godly State)이 되기를 원했다. 마녀가 제거대상이 되어야 함은 이렇게 자기정화, 자기보호의 차원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세속권력의 이러한 의지로 마녀에 관한 입법이 이루어지고 마녀사냥은 본궤도에 올랐다. 그러나 위로부터의 열의만큼 중요한 것은 바로 하층계급으로부터의 열망이었다. 공적 권력기관이 주도한 처형사례가 있긴 하지만 대부분의 마녀재판은 이웃의 고소로부터 시작되었고, 고문에 의해 색출된 공범자 속에 자기의 친척이 있다하더라도 이를 묵인한 것은 바로 일반민중이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마녀사냥을 거부한 사례가 극소수이고 반란마저 없었다는 사실은 히스테리에 가까울 정도로 마녀가 전사회적인 적개심의 대상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일반민중이 카톨릭의 마녀개념을 수용한 데에는 사회변동으로 인한 불안의 심리와 종교개혁가들이 강조한 죄의식의 만연이라는 원인이 있었다. 가격혁명, 인구증가, 인플레이션과 생환비용의상승은 대부분의 민중들에게 고통을 주었으며, 상업의 발달은 농업체제를 붕괴시키고 계급의 분화를 촉진시켰다.
이러한 경제적 이유로 마녀고소사례가 있었기는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이러한 사회변화가 종교적, 정치적 혼란상과 중첩되었다는 것이다. 내란, 전쟁 및 구원의 기관이었던 교회의 분열, 상쟁은 세속인으로 하여금 불안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으며, 나아가 악마가 이 세상을 흔들고 있다는 악마론이 다시금 고개를 들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었다. 강력한 프로그램적 성격을 지닌 종교개혁가들의 논리는 설교를 통해 일반인들의 의식 속에 주입되었던 바, 이들은 개혁가들의 2원론에 가까운 세계관을 수용하게된다.
Calvin은 특히 악마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고 구원에 이르는 길은 성인들의 삶을 실천하고 개인 스스로가 도덕적으로 순수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는데, 이로써 일반대중도 자신이 지은 죄를 인식하고 이런 오명을 지울 수 있는 방법의 모색에 집착하게 되었다. 성경의 번역으로 인하여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마녀를 성경 그 자체의 뜻대로 받아들이지 않은 받아들인 민중들은 더욱 마녀의 존재를 확신하고 공동체의 모든 죄악이나 불행의 원인을 마녀에게 뒤집어씌우게 되었던 바, 16세기, 특히 위기의 시대인 17세기를 지나면서 마녀는 본적으로 속죄양의 지위에 서게 되었다.
비단 속죄양으로서의 성격이 아니라도 마녀를 고발한 사례는 다양했다. 정치적 라이벌, 상업에서의 경쟁자, 상속권의 경합자에게 마녀라는 누명을 씌웠는가 하면, 아무 원한이 없더라도 단지 미심쩍은 행동을 한 사람들이 마녀로 지목되어 처형당했다. 이러한 사례들은 마녀의 존재에 대한 착신에 차있었으며, 따라서 이에 집착하여 모든 상황을 설명하려 했던 취약했던 근대인의 의식구조를 반영하는 것이다.
적어도 17세기에는 더 이상 마녀가 성직자, 신학자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14세기에는 주로 자연적인 재앙에 의해 악마론이 힘을 얻었던 것과는 달리 16세기에는 유럽사회의 발전과 한계로 인하여 기존의 체제를 스스로 파괴해나가야만 했던 사회, 종교적인 변화의 과정에서 마녀는 전 계급적인 자리 메김을 할 수 있었던 것이며, 나아가 이제는 속인들이 마녀처형을 더욱 갈망할 정도로 응징의 주도권은 교회의 손을 떠나 있었다.
2) 마녀사냥과 국가
지금까지 서술한 대로 마녀재판에 열을 올린 것은 속인들이었고 재판의 담당자 측면에 있어서도 세속법정이 교회법정을 제치고 주도권을 잡게 된다. 그러나 무조건 세속법정이 마녀재판을 수도하였다고 해서 대규모의 처형으로 연결된 것은 아니었다. 대륙에서의 마녀개념이 발원했던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만 해도 처형자수와 처형비율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바, 이는 구체적이고 세부적인 사회적 여건의 차이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마녀재판을 진행하는 절차와 방법이 상이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으며, 나아가 세속권력을 집행하는 구조적인 면모에 대한 분석의 필요성을 던져주고 있다.
마녀재판이 그 본질상 대규모 도시보다는 지방의 소규모 농업사회에서 일어나기 쉽다는 이론이 이미 인류학에서 정립되었고 유럽에 있어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몇 건의 사례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마녀사냥은 집단의 구성원 서로를 잘 알고 있는 소규모 사회에서, 또한 지식인들의 역할이 그다지 유용하지 않고 전통적인 신앙체계가 잘 보존된 농업사회에서 일어났다.
반면 중앙의 권력자들은 마녀가 위협적인 존재라는 점에 동의하기는 했지만 마녀의 인적상황을 몰랐으며, 따라서 지방적인 수준의 공포심을 직접 접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진보적인 지식인의 영향을 받을 수토 있었고, 전문적인 법률가들의 대두로 인해 공정한 재판절차를 선호해 부당한 재판결과를 거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상위권력체인 중앙정부가 지방에서의 마녀처형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 하는 문제는 곧 마녀사냥의 히스테리가 어느 정도까지 확산되었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 통제가 가능했는가 하는 문제이며, 또한 궁극적으로 중앙집권화의 정도가 마녀사냥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와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중앙집권 또는 계층적인 사법기관의 운영이 원활한 국가일수록 마녀사냥은 미약한 경향을 보였다. 독일과 스페인의 비교는 이를 잘 보여준다. 유럽에서 가장 많은 수를 처형했던 신성로마제국은 제국최고법원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300개 이상의 자치단위들이 독자적인 법전을 형성하고 있었고, 사법영역에서 중앙의 권위는 지방의 수준까지 도달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지방 사법기관의 자의적인 재판을 통제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항소제도마저 유명무실한 실정이었으므로 지방에서의 히스테리는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제국법전인 Carolina법전을 준수하지 않는 곳일수록 처형비율과 처형자수가 높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해준다. 반면 스페인은 정치적으로는 분열되어 있었으나 사법적으로는 최고법원으로서의 Suprema가 확고한 권위를 행사하고 있었고, 심문관 역시 국왕에 의해 임명되어 지방의 이단과 마녀재판을 총괄하였다. 1609년 바스크 지방의 마녀열기를 식힐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최고법원의 포고 때문이었고, 이후 스페인에서는 이렇다할 만한 마녀처형사례를 발견할 수 없었다.
스코틀랜드의 연구는 지방수준의 법정과 중앙의 법정이 취했던 태도차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지방의 유력자들로 구성된 임시법정이 91%라는 높은 처형률을 보인 반면, 에딘버러에 위치했던 최고법원은 55%, 순회재판소는 불과 16%에 불과했다. 이러한 양상은 영국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마녀재판이 중앙에서 파견된 판사들로 구성된 순회재판소에서 행해졌던 영국은 대륙의 평균 처형률, 유죄 확정률보다 낮았다.
프랑스는 보다 신중한 관찰을 요하는 경우로 정치적으로 중앙집권이 진전되어 있었음에도 마녀재판의 강도는 영국보다 높고 독일보다는 낮았다. 이는 프랑스가 이단운동의 본산지이며 마녀개념이 형성된 곳이기 때문이라는 해석도 가능케 하지만 사법구조면에서의 해석이 더욱 적실성을 갖는다.
우선 프랑스는 고등법원과 체계적인 항소제도를 구비하고 있었고, 지방에서의 유죄판결도 상당한정도가 상고심에서 파기될 수 있었다. 파리고등법원은 여타의 고등법원보다 비교적 관대한 태도를 보였고 원심파기율도 가장 높았다.
지금까지의 비교를 통해본 바, 중앙권위체가 마녀사냥을 주도한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마녀에 대해 중립적인 위치를 견지했고 지방에서의 히스테리를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요컨대 유럽의 마녀사냥은 그것의 필요성을 느낀 지방의 세속권력이 그들의 상위권력으로부터 승인을 얻은 후, 지나치게 가혹한 방법으로 혐의자를 화형장에 몰아세운 양상을 띠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중앙권력은 마녀재판의 보증자이자 동시에 이를 규제, 완화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단정을 중앙집권국가의 성장기인 근대의 시대상창과 결부시켜 본다면 마녀재판은 이행기적인 현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분명 근대국가의 성장이 마녀사냥의 전제조건을 제공해 주었던 바, 그것은 영적 질서수호자로서의 지위를 교회로부터 물려받았다는 점, 이를 위해 각종 제도의 마련과 사법기관, 법률관료의 발달이 있었던 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중세 말과 근대 초에 통일된 권력을 갖지 못해 권력의 공백이 생긴 초기근대국가의 부정적인 면모로부터 마녀사냥은 나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마녀는 그 개념에 관한 한 심성사적인 측면에서 장기지속의 역사와 '긴 중세' 입증하는 좋은 예이지만, 적어도 국가와 권력의 측면에서만 보면 시대적인 혼란과 결부되고, 아직 근대국가가 불완전한 위치에 있었던 불과 200년간에 일어난 이행기적 현상이라 할 수 있다.
3. 마녀사냥의 소멸
마녀개념이 늦게 전파된 동유럽과 스칸디나비아반도는 18세기중반까지 마녀사냥의 열기에 휩싸여 있었지만 대부분의 유럽지역은 17세기 후반 이래로 마녀재판의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재판사례가 현저하게 감소했을 뿐더러, 처형되는 사람의수도 소규모였다. 이렇듯 마녀재판이 쇠퇴할 수 있었던 가장 대표적인 요인은 회의론의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지적환경의 변화였다.
모든 것을 의심하고 회의하는 데카르트주의와 자연과학에서의 기계론적 세계관은 실제 검증할 수도 없는 악마와 마녀의 존재를 부정하였고, 오히려 마녀를 정신병적인 우울증, 신경쇠약 등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이러한 새로운 사고방식이 세속의 지배자들에게 유입되었다. 1648년 이후 유럽은 국가체제로 돌입하게 되고, 이제는 과거처럼 종교적 열의보다는 왕조간 실리적인 세력다툼의 구도로 편입되었다 따라서 마녀를 불태워서 자기영역을 정화시키려는 지배엘리트들의 열의는 식었으며, 여기에 지식인들의 회의론이 유입되었기에 이들은 17세기중반부터 재판절차를 보다 엄격히 하거나, 고문을 금지하는 규정을 두었고, 18세기에는 마녀재판을 아예 금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마녀재판의 소멸과정에 있어서도 여전히 일반민중의 역할을 도외시 할 수 없다. 이들은 상층의 엘리트들과는 달리 지식인들의 회의론을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고 적어도 의식구조면에 있어서는 여전히 낡은 관념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기록들이 이런 면모를 잘 보여준다. 마녀재판이 금지되어, 고소를 받아주지 않자 마을사람들은 스스로가 마녀에게 집단적인 린치를 가했다.
19세기, 심지어 20세기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들이 발견되었는데, 이런 것들은 모두 산간벽촌이나 후진지역에서 일어났다는 점으로 보아 신지식에 접하지 못한 일반민중들의 경우 낡은 관념을 쉽게 떨쳐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뒷받침 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중들이 스스로 고소나 고발을 자제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분명히 밝혀둘 것은 이것을 회의론이 민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친 결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민중들의 고소사례가 줄었던 것은 마녀재판을 가능하게 했던 제반 사회환경의 변화 때문이며, 예전처럼 이웃을 상대로 재판을 걸어 이길 승산이 그만큼 감소했기 때문이었다.
1970년대에 환기를 띠었던 사회사가들의 연구결과는 이 방면에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종교적, 정치적 안정과 더불어 17세기후반과 18세기에 유럽의 경제적 상황은 회복되었고, 물가와 인구증가도 진정국면으로 들어섰으며, 생활수준도 향상되었다. 이러한 향상은 지방사회의 좌절과 불안심리 및 긴장을 가져오고 히스테리를 촉진했던 사회적 여건도 제거할 수 있었다. 도시와 town의 발달로 인해 익명성의 사회가 그 영역을 넓혀갔다는 사실도 도외시할 수 없거니와 과부와 독신녀의 증가로 그들의 존재가 대수롭지 않게 되었다는 사실도 지적될 만 하다.
마녀재판의 소멸에서 분명 그 주도권을 상층엘리트가 쥐고 있었으며, 일반민중은 수동적인 지위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Montor는 상하간 계급의 벽이 높아졌던 17-8세기에 상층계급은 민중들의 생활방식을 경멸하였고, 민중들의 마녀개념마저 조롱하는 과정에서 회의론이 이들 상층계급사이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상층의 회의론이 하층으로 전파될 여지가 없었음을 간접적으로나마 시사하는 연구결과라 할 수 있다.
물론 민중들 스스로가 부당한 재판결과를 거부하면서 집단행동을 취했던 예가 있고 따라서 아래로부터의 소멸에 비중을 두는 사가가 있지만, 그것은 극소수의 사례에 한정된 경우이므로 일반화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고 봐야 할 것이다.
111. 결 론
지금까지 본 바대로 유럽의 마녀와 마녀재판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오랜 기간을 연구시기로 설정해야 했는데, 이는 자유주의학파나 민속학파의 마녀개념에 대한 연구로는 전반적인 현상을 설명할 수 없고 마녀재판이 진행되고 소멸되기까지의 전과정에 걸친 연구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분명 마녀의 개념은 민속학파의 주장처럼 민간신앙에서 유래한 부분도 있었거니와 자유주의 학파의 그것처럼 중세적 질서를 보호하려는 교회의 산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서 그치지 만은 않는다. 신학자, 성직자들에 의해서 마녀의 정형화가 일단락 지어졌던 I5세기가 아니라, 세속권력이 대두했던 16-7세기에 마녀사냥이 대대적으로 행해졌다는 사실은 마녀를 신앙-反 신앙의 견지에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과 마녀재판은 중세가 아니라 근대적인 현상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마녀의 개념이 신학자, 성직자 등 카톨릭에 의해서 완성되었지만 이것이 그들 내에서만 머물러 있었더라면 근대 초의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마녀개념의 확산에 있다. 16세기의 대량 처형은 바로 상하를 막론한 속인들의 열정에서 비롯된 것이며, 더군다나 교회를 대신하여 사회질서의 유지자로 새로이 대두되는 세속권력의 힘을 빌었을 때 더 격렬한 양상을 띠었고, 중앙의 통제와 간섭을 벗어난 지역일수록 민중과 엘리트들의 히스테리는 더욱 심했다.
따라서 마녀재판을 교회 쪽의 산물로만 보거나 지배-피지배 계급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서론에서 제시한 바대로 자유주의사가들의 지적 편견과 현대에서의 마녀재판과 유사한 사례-예를 들어 미국의 메카시즘으로 인하여 근대의 마녀재판도 상층으로부터의 일방적이고, 의도적인 탄압이 가장 중요한 관건이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마녀의 개념과 마녀재판은 전사회적인 가치체계와 공감대를 요구조건으로 하는 것이므로 단지 상층계급의 억압도구로 만 이해한다거나, 하층계급만의 독자적인 신앙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류이다. 비록 민간의 이교신앙을 추출해내고 이를 악마론과 결부시켜 탄압의 대상으로 만든 것은 교회였지만, 성직자가 아닌 속인들이 이를 받아들였고 마녀재판의 주된 담당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마녀재판이 이들에게 사회적인 순기능을 제공해주었음을 의미한다.
즉 마녀재판은 지배층에게는 국가, 사회의 정화를, 일반인들에게는 불행에 대한 속죄양을 제공해주는 기능을 수행했고, 따라서 국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기반이 취약했던 근대세계에 상-하 모든 계급이 참여한 일종의 전사회적인 자기보호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마녀재판의 소멸과정은 엘리트와 민중간에 발생하는 의식구조변화의 시간차를 잘 보여준다 마녀재판이 금지된 이후에도 민중 스스로에 의한 사형이 자행되었다는 점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뿌리깊은 악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민중이 가지는 의식구조면의 취약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즉 이런 취약성은 민중들의 사고방식이 보다 합리적인 것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전반적인 생활환경의 합리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엘리트들의 회의론이 민중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없었던 것도 그 당시 민중의 생활환경이 낡고 비이성적인 신념과 잘 조응했기 때문이다.
대체로 교육수준의 향상, 산업화 및 세속화의 진행 등으로 민중사이에 잔존해 있던 마녀신앙이 설자리를 잃었으며, 이성을 중시하는 사고방식의 유행으로 인하여 마녀사냥은 서구인에게 있어 유럽역사 중 가장 암울하고 부끄러운 것이며 비이성적인 사건으로 간주되어 왔고 19세기의 미슐레부터 많은 역사가들이 이를 해명하기 위하여 다양한 수사학을 동원하여 왔다.
그러나 본고에서 관찰한 바대로 마녀를 재판하는 것은 그 당시로서는 매우 긍정적인 목표를 지향하는 당연한 처사로서, 심지어 가장 합리적인 행위라고 평가하는 사가도 있다. 1970년 이후로 많은 사가들이 '마녀광란 (Witch Craze)이라는 용어를 재 정의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이며, 비록 일부지역에서 단기간 내에 수백 명을 처형한 예가 있긴 하지만 그림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신병적 현상으로까지 치부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고 하겠다.
요컨대 유럽의 마녀사냥은 중세라는 통일된 세계가 붕괴되는 시점에서 배태되었던 부정적인 요인들이 맞물려 일어났던 상황일 뿐, 우둔하고 정신착란 적인 증상은 아닌 것이다. 마녀라는 개념을 후세사람들이 그 시대상과 향상만을 보고 판단하기는 힘들다. 많은 상황들이 있었지만 사회의 주도신앙이나 인식은 타국와 학생인 본인이 판단하기에는 미숙하고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러나 마녀사냥은 비단 마녀등장과 이로 인한 혼란한 중세가 그 목적이 아니라 마녀를 만들고 유포하는 민간신앙과 나아가 교황과 마녀라는 무속의 대립으로까지 이어져 결국 마녀가 찢김을 당하는 결론에서 최후의 승리까지 가늠해 보는 것이다. 사회의 현상은 이렇게 심오한 의미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의 무녀와는 다른 개념의 마녀는 마녀를 만들 수밖에 없었던 유럽 사회의 샤회상의 한 단면이라 볼 수 있다.
<참 고 문 헌>
마녀사냥의 역사 - 불타는 여성 /오성근 지음, 미크로, 2000
마녀사냥 - 매카시 매카시즘 / 로버트 그리피스 지음 : 하재룡 역 , 백산서당, 1997
마녀사냥 / 모리시마 쓰네오저 : 조성숙 역, 현민시스템, 1998
광기의 사회사, 김영진 지음, 민음사. 1995
역사비평, 1994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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