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축도"바른이해

2008. 5. 4. 20:33목양자료/1.기독교자료

[축도 고후13장13절의 원문엔 "있을찌어다" 동사 가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교제)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여기까지다- (있을찌어다-원문에 없다) "

아래의 헬라의 원문을 보듯이 이 문장에는 동사가 없다. 그리고 교통하심이 아니라 교제하심이다.

 

본문에 히브리어 및 헬라어 원문이 안보이고 네모로만 나타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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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cariV  tou  kuriou  ihsou  

헤    카리스                        투             큐리우                      예수

The  grace                         of the        Lord                       Jesus

  그 은혜                                             주                         예수의               

cristou kai h   agaph  tou

  크리스투                   카이       헤             아가페                투

      Christ                        and    the              love                 of  

   그리스도                                               사랑과         

qeou kai  h  koinwnia  tou

 데우             카이          헤         코이노니아                           투

  God                and       the        fellowship                      of the

하나님의                                      교제가       

agiou  pneumatoV   meta

 아기우                     퓨뉴마토스                                 메타

    holy                             Spirit                                  with

                  성령의                                                    함께

pantwn  umwn   amhn

      탄톤                              휘민              아멘

         all                         of you              A-men

       모두에게                     너희              아멘

 

그러니 원래의 해석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 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아멘.  이다.

 

축도의 의미에 있어서 기독교 백과사전에서는 축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목사가 예배 시간에 회중을 위하여 드리는 축복 기도로서 보통 고린도후서 13장13절에 있는 말씀을 외운다. 이 축도 때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는 것은 옛적부터 내려오는 관습이며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는 축도를 가장 엄숙한 순서로 인정하여 교직은 예복을 입고 이를 선언한다" 라고 되어있다.

예수님은 그 제자들에게 축도를 가르치신 일이 없다. 아무 제자에게라도 축도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다. 사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르치신 기도, 도고, 감사 등의 기록은 있으나 축도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말씀이 축도의 근거가 된다고 주장한다.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눅6:28),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3:9).

그러나 이러한 말씀은 목회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이 아니다. 그들의 축도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모든 성도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어떻게 끝나는가? 사실 예배는 끝나는 개념이 없다. 예배는 계속적인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인 후에 만찬으로서 그 모임을 마무리하고 서로 교제하였다(행20:7-11,고전11-). 저들의 모임은 말씀을 강론하고 떡을 떼며 교제하고 헤어졌던 것이다. 예배는 끝나는 게 아니다. 예배는 삶 속에서 계속되는 것이다. 축도는 예배를 폐회하는 선언이 될 수 없다.

구약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아론과 그 자손들에게 백성을 축복하는 권한을 부여하셨다(레9:22-23, 민6:22-27).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오늘날 강단에서 목사들이 하는 축도의 기원이라고 주장한다. 구약의 축복기도는 중보자가 드리는 기도이며 대제사장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축도권을 주신 것은 구약시대에는 대제사장이 하나님과 백성들 사이의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대제사장(히3:1, 히4:14)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시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딤전2:5). 목사는 말씀을 증거하고 가르칠 뿐이지 중보적 권한은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영원한 대제사장이시고(히6: 19-20)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유일한 중보자요(딤전2:5) 하나님 앞에 우리를 위한 대언자이신 것이다(요일2:1).

 

오히려 우리는 목사나 집사나 성도나 모두 주 안에서 형제이다(히2:11, 마23:8).
이와 같이 아론의 대제사장적인 축도권에서 그 기원을 찾아 축도한다면 누구도 축도를 할 수 없다. 오늘날에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딤전2:8).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축도의 모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말씀은 손을 들고 기도하던 관습(시63:4, 119:4)에 따라 말한 것이고 다투기 보다 서로 기도하기를 힘쓰라고 하는 권면이다. 손을 들고 기도하는 것은 구약시대부터 내려오는 경건한 풍습이었다.

또 어떤 이들은 서신서 말에 있는 축원을 축도로 오해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고후13:13).『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 자 곧 우리 구주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과 위엄과 권력과 권세가 만고 전부터 이제와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유23-24) (참고: 이곳 있을지어다 는 원문에는 없다)

그렇다고 한다면 목사만이 축도를 할 수 있다고 우기는 것은 말이 되질 않는다. 이는 편지의 끝인사로 기원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편지로나 말로 서로를 축복할 수 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고린도 후서 13장의 말씀이나 유다서의 말씀은 예배시의 축도가 아니라 서신의 끝인사이다.

 

서로를 위한 축복하는 기도는 모든 성도에게 해당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도 서로가 서로를 위해 새해에 복많이 받으라고 빌어주는데, 성도간에 축복하는 일이 어떤 직책에 의해서 제한받는다고 하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면 그것은 사도로서 특별한 위치에 있는 바울이 그가 세운 고린도 교회를 위한 축복이었다고 말하며 오늘날 개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축도를 목사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만일 그것이 어떤 특별한 지위와 관계된 기도라면 그것은 그렇게
흔해서는 안된다.

 

예수님께서 선생님이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제자들을 축복하신 일은 부활 후 승천하실 때 한 번 뿐이었다(눅24:50-53). 멜기세덱도 마찬가지다(히7:6, 창14:19 ). 멜기세덱은 인류 최초의 제사장으로 그리스도의 모형이 되는 인물이다. 그가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위치에서 아브라함을 축복한 것은 일회적인 사건이었다.

 

이삭의 경우는 어떤가? 그는 야곱은 축복하였으나 에서는 축복하지 않았다(창27:34-38). 에서는 동생에게 축복을 다 빼앗긴 후에 "아버지의 빌 복이 이 하나 뿐이리이까"(창27:38)하며 애원하였다. 그럴지라도 아버지의 위치에 선 이삭은 또 다시 축복할 수가 없었다.

 

만일 성도들을 치리하는 목자적인 특별한 위치에서 자기 교인들을 위해 축복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흔할 수가 없다. 적어도 그가 은퇴할 때라든지, 그의 임종 때나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런데 매 주일마다 자기 몸에서 무슨 복(福)이 흘러나오는 양 손을 들어 강복의식을 행하는 것은 때때로 돈만 넣으면 커피가 쏟아지는 자판기를 생각나게 한다(신18:22).

 

『 만일 선지자가 있어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 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신20:22)

        

축도가 복을 비는 기도라면 하나님께 올리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간절히 축원하노라?"가 왠말인가? 복을 비는 사람이 복을 허락하시는 하나님께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것은 종교적 지위를 이용해서 스스로를 격상시키려는 행위, 그 자체다.

 

"내가 복을 비니까 너는 들어라"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비는 자는 권위를 포기한 사람이다. 기도의 첫번째 태도가 구하기 위해 높은 자 앞에서 자기를 낮추는 것이다. 또 축도가 기도라면 그것은 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빌지 않는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을 부탁하셨는데(요14:13) 왜 축도는 이 중요한 원리를 깨뜨리는 것인가? 오히려 기도로 이렇게 하면 더 좋지 않을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우리는 축도의 문제점을 몇가지로 생각해볼 수 있다.

 

1.축도가 기도라고 하면서 그 기도를 꼭 카톨릭의 정의에서처럼 예복을 입고 해야만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물론 오늘날에는 사복을 입고 축도를 하는 목회자들도 생겨났다.

 

하지만 대개 그런 경우는 주기도문 암송을 시킨다. 목회자 까운을 입고 하는 기도와 벗고 하는 기도의 구별은 누가 만든 것인가? 그 사전의 의미대로 까운을 벗고서는 할 수 없는 기도가 있다는 것은 성경에도 없는 의식의 산물이다.

 

더 나아가 이것은 아직도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하는 유대인들의 율법적인 전통을 모방하여 복음이 온 후로도 여전히 그 전통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것이라 하겠다.

 

2.축도가 기도라고 하면서 그 기도를 대예배나 공 예배와 같은 정해진 시간에만 하도록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이 의식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 기도는 때와 장소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우리는 늘 하나님 앞에 기도 드리고 있는 것이다.

 

3.축도가 복을 비는 기도라면 기도할 수 있는 자와 기도할 수 없는 자의 구별이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위엄과 권위와 자만의 태도로 기도한 바리새인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라며 겸손히 기도하는 자가 의롭다함을 얻고 돌아갔다.

 

4.일반적으로 어두운 교인들은 의식화된 축도를 복받는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리고 축도를 한 그 사람에 의해서 복이 좌우되는 것처럼 헛되이 믿고 있다.

그래서
축도는 비복음적인 용어이며 의식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에서 교권주의를 강화하기 위하여 만든 것이며 성도들의 기복신앙을 이용한 발상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이는 무당이나 샤만들이 행하는 기복을 답습한 교회의 이교화 사건 중의 하나다.

 

본래 축도를 베네딕숀(Benediction)이라 하는데 이는 신부와 평신도를 구분하기 위해 베네딕트 신부가 만들었기에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다. 종교개혁을 일으켰다는 개신교가 이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성경에도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목회자들은 교권이라는 교만한 마음을 먹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예수 한 분으론 부족한 것처럼 어떤 대리자를 세우고 그를 통하여 복을 받으려고 하는 성도들의 태도는 더이상 성경적인 자세가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 목회자를 더 의롭게 하시고 비목회자 라고 덜 의롭게 하시는 분이 아니다.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3:22) 인 것이다.

출처 :고동엽 교회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 교회개혁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