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 5. 4. 20:21ㆍ목양자료/1.기독교자료
히브리어의 기원
1. 초기 히브리어 문자
[서론]
성서 히브리어와 관련된 문자는 언제부터 정식으로 사용이 되었는가? 복음주의자들이 주장 하는 대로 모세에 의해 기록된 모세 오경은 어떠한 문자로, 어떠한 방법에 의해 기록되었는가?
지난 세기까지 성서 비평 학자들은어느 누구도 성서히브리어 문자 체제가 히브리인들이 나 셈족에 의해 모세 시대부터 사용되었다고는 믿지 않았다. 반면, 어떤 유대인 학자는 창세기 4:26의 기록중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라는 구절을 마치 문자가 셋의 아들 에녹에 의해 발견되었다는 지나친 해석을 하기도 한다.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출 17:14의 기록이 다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 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들리라 -- ".
또한 삿 8:14의 기록은 이미 기 드온 시대(주전 11-12세기)에 문자의 사용이 대중화 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 : "숙곳 사람 중 한 소년을 잡아 신문하매 숙곳 방백과 장로 칠십 칠인을 그를 위하여 기록한지라". 이 외에도 성서 시대에는 수 많은 책들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이를테면 야살의 책(수10:13), 여호와의 전쟁기(민21:14), 유다 왕 역대지략(왕상14:29), 이스라엘 왕 역대 지략(왕상16:5), 솔로몬의행장(왕상11:41), 선지자 나단의 글과 선견자 갓의 글(대상29:29), 선지자 잇도의 주석 책(대하13:22) 등이 그것이 성서 시대와 관련된 책들이 자연스럽게 언급된 것을 볼때 이런 책들은 그 당시 백성들 사이에 두루 사용이 되었으며 문자의 사용이 이미 대 중화 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앞에서 언급한 여러 기록물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며 고대 이스라엘의 여러 비문들 중 많은 부분들이 소실되었기 때문에 모세 시대부터 문자가 사용되었다는 심증은 충분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확증할 만한 물증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많은 비평학자들은 바사 시대 이전에는 팔레스타인에서 알파벳 문자가 널리 사용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료의 결핍과 장문의 비문들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초기 성서 히브리어의 역사는 여러가지 뛰어난 방법으로 점차 밝혀지고 있다. 유명한 유대계 이탈리아 석학 아자리아 드로시 (Azaria de'Rossi)는 성서의 기록을 포함하는 탈무드 문학을 기초로 하여 성서는 본래 초기 히브리어 서체로 기록되었다고 처음으로 주장했다. 비록 소수 이기는 하나 초기 히브리어 서체로 기록된 기록물들이 발견됨으로 그러한 주장 은 더욱 많은 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본론]
- 초기 히브리어 알파벳과 그 기원
초기 히브리어라는 말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성서 히브리어 서체이며 현재 이스라엘에서 사용하고 있는 현대히브리어 문자인 '정방형의 히브리어'와 구별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다. 초기 히브리어는 출애굽 전시대에서 주전 6세 기 까지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사용이 된 문자 를 말한다. 현대 히브리어와 같이 초기 히브리어 알파벳도 22개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이 름들도 현재와 같았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등의 정확한 발음은 사라졌다. 초기 히브리어 알파벳은 다른 북부 셈어 알파벳, 특히 초기 페니키아와 초기아람어와 관련이 되어있다. 모압, 암몬의 알파벳은 초기 알파벳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며 사마리아 알파벳과 주전 2세기 부터 주후 2세기 까지의 유대 동전 의 서체는 그것의 방언으로 본다.초기 히브리어 알파벳은 아마도 히브리민족의 출생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가장 초창기 시대에 초기 히브리어 알파벳은 북부 셈어 알파벳과 동일했다.
그러므로 초기 히브리어 알파벳의 기원에 관한 문제는 북부 셈어 알파벳의 기원에 관한 문제와 연관이 있다. 그러므로 초기 가나안 서체는 초기 히브리어 알파벳의 원형이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알파벳은 이미 족장 시대에 사용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유다의 도장(창38:18,25)은 초기 가나안 문자였을까, 아니면 초기 히브리어 알파벳의 다른 원형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출28:21, 36 을 볼때 인장에 새기는 것은 아주 초기 시대부 터 존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성서 시대에 문자가 사용이 되었으며 그것이 알파벳이라는 견해는 게젤의 농사력과 라기스 문헌이 더욱 뒤받침해 준다. 1938년 라기스에서 발견된 비문(주전 11-12세기)은 초기 히브리어 문자의 기록물이다. 사울 혹은 다윗 시대(주전 1,000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게젤의 달력은 1908년 게젤에서 발견된 것인데 부드러운돌판 에 기록된 것이며 10월에 시작되어 8개월의 목록이 있는 것으로 농사를 위한 달력임을 알 수 있다. 학자들에 따라 어떤이는 그것이농부의 작품으로 보느 이도 있고 학생의 연습용 작품 이라고 보는 이도 있다. 어쨌든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통일 왕국 시대 즉, 주전 1,000년 경에 이미 중앙 행정 체제가 있었을 때 초기 히브리어 알파벳은 존재하고 있었으며 자체적으로 발전이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 초기 히브리어 알파벳의 발전 및 고대 문헌
문자들의 발전은 페니키아와 초기 아람어 알 파ㅂ과 같이 외형적인 것이었다. 초기 히브리어 문자가 차용되는 시기에 약 1,000년 동안 그 수 와 음가는 동일하였다. 초기 히브리어 문자의 외형적인 발전은 다른 서체와 같이 명백한 것 은 아니다. 초기 히브리어 알파벳의 발전은 지속적이었으나 일반인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급진적인 것은 아니었다. 1938년 라기스에서 발굴된 비문은 궁전의 계 단에서 발견되었다. 중요한 점은 그 비문에서 초기 히브리어 알파벳의 5 문자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발굴자들은 그것이 학생들의 알파ㅂ 연습을 위한 것임을 알았다. 이것은 알파벳 순서를 위한 가장 초초의 고고학적 증거가 된다. 단어들의 분리는 점이나 조그만 선을 긋는 것으로 이루어졌다(몇몇의 예외를 제외). 게젤 달 력에서는 단어를 분리하는 표시가 없었다. 그러나 보다 긴 선을 이용하여 절들을 분리했다.
메사(Mesha)의 기념비(모압의 비석)는 1868년 디본(Dibin, 사해 동쪽 40km)에서 발견되었는데 승리에 대한 자축이그 내용이며 주전 9세기 중엽의 작품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 의를 갖는데 특히 성경과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왕하 3:4-27). 주전 9세기의 모압의 언어 와 문화는 히브리 민족의 것과 너무 흡사하기 때문에 모압어는 히브리어의 방언으로 간주된다. 또한 모압 비석의 서체는 초기 히브리어와 연관이 되어있다. 사마리아에서 발견된 약 80개의 오스트라카 (깨어진 자기위에 잉크로 씌여진 기록물)를 볼 때 북왕국에서는 주전 8,9세기까지의 변형이 거의 완벽하다고 볼 수 있다. 그 오스트라카의 대 다수는 한 도시의 왕의 관료들에게 지불된 기름 및 포도주의 조세와 함께 제출된 송장(送狀) 이었다. 주전 700년경의 실로암 비문은 유다 방 언을 나타내주는 반면에 사마리아 오스트라카 는 우리에게 이스라엘 방언의 서체의 본보기를 나타내준다. 실로암 비문은 1880년 6월 몇몇의 학생들에 의해 발견되어 이스탐불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 다. 비록 6줄밖에 없지만 그것은 고대 이스라 엘의 중요한 기념비 비문이다.
그것은 수로를 만든 사람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왕하 20:20, 대하 32:3,30, 33:14과 관련되어 히스기야가 만든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주전 700년 경의 작품이다. 이것과 모압의 비석을 비교함으로서 초기 히브리어 기념비 문체가 꾸준히 그리고 천천히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실로암 비문의 문자들은 초 기 히브리어 기념비 문자의 대표적 역할을 한다. 유명한 라기스 편지(18편)는 1935년 텔 에트 두웨어(ed-Duweir)에서 발굴이 된 것이다. 불에 탄 파편에서 오스트라카가 발견되었는데 이것 은 시드기야 말기에 느부갓네살의 군대에 의해 도시가 파괴될때(주전586년경)의 것으로 추정 한다.
- 초기 히브리어 문헌의 중요성
비록 대 다수가 하나 혹은 두개의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초기 히브리어에 대한 기록물 의 특성은 주목할 만하다.
대부분의 기록물은 위대한 사건이나 인물의 역사에 대한 기록물이 기 보다는 일상생활에 대한 것들이다. 가장 간단한 기록물 조차도 성경 및 고대 이스라엘의 생활과 관습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보충해 주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는 정보를 제공해 준다. 예를들면 사마리아 오스트라카는 사마리아의 궁전에 내는 세금과 관련된 기록물인데 포도주 와 정제된 기름에 관한 여러가지 자료를 포함 하고 있으며 언어, 종교 및 주전 8세기 북 왕국 에 거주했던 주민드르이 이름들에 관한 정보를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형 및 지방 혹은 국가 행정에 관한 자료들을 제공해 준다. 언어학 적으로는 그것이 북 왕국의 히브리어 방언으로 기록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사마리아 오스트라카는 우리에게 북 왕국 이스라엘의 방언과 서체에 관한 예를 제공해 주는 한편 다른 대부분의 기록들은 남 왕국 유 다의 것들을
보여주는데 예를 들면 실로암 비 문, 라기스 편지 등이 그것이다. 유대 기록물들 은 새로운 단어와 흥미로운 형태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스타일은 순수하며 관용구적이고 마치 성서 히브리어의 산문 형태와도 같은 느낌을 준다.
2. 현대히브리어
1. 히브리어의 교훈
- 현대 히브리어의 부활은 전 세계 다양한 문화에 영감을 주었다.
- Simon Griver -
히브리어는 구약의 언어였으며, 약 3,000년 전인 제 1성전 시대에 나오는 이스라엘인들에 의해 사용된 언어이다. 천년 후, 조상들의 고향에서 로마군에 의해 추방당한 이산 유대인들은 그들이 정착한 국가의 언어를 쓰거나 히브리어와 다른 언어를 섞어 이디쉬(Yiddish, 히브리어-독일어)난 라디노(Ladino, 히브리어-스페인어)같은 새로운 히브리어 방언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를 결코 잊지 않았으며, 이는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소망을 표현하는 기도와 문학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100여년 이전에 유대인들이 그들 조상의 땅으로 귀환하기 시작할 때, 리투아니아에서 온 이민자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Eliezer Ben Yehuda)는 성경 히브리어를 현대 일상생활에 접합시키는데 헌신하였다. 그리고 웨일즈에서 아제르바이잔, 카탈로니아에서 뉴질랜드까지 전 세계의 작은 나라들은 수백 년 이상 일상생활에 사용되지 않았던 언어를 소생시킨 이스라엘의 경험에 감동 받았다.
“웨일즈어는 히브리어의 경험에 의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언어입니다.” 암논 샤피로(Amnon Schapiro), 히브리어 아카데미 연구원은 설명한다. “1960년대 웨일즈어 수업을 위한 국가적 네트워크가 히브리어 모델에 근거하여 세워졌습니다.” 심지어 웨일즈사람들은 웨일즈어 수업을 새로운 dlas자들에게 현대 히브리어를 가르치기 위해 특별히 마련된 히브리어 수업에 붙여진 이름인 “울판(Ulpan)"으로 불렀다. ”물론 웨일즈 사람들은 다른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샤피로는 덧붙여 말한다. ”그곳의 웨일즈어 사용자 수는 영어의 영향으로 침식당했습니다. 울판의 도움으로 그러한 경향은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까딸로니아와 바스크어를 억압했던 프랑코 사후에 까딸로니아와 바스크어가 크게 잠식한 스페인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1980년대 울판에서 사용되는 방법 등을 배우기 위해 까딸로니아의 사절단이 이스라엘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이스라엘에서도 울판의 위상은 절대적이다. 새로운 이민자들은 기본적인5개월의 과정을 이수하며, 추가로 그 이후의 고급 과정을 선택할 수 있다. 이민을 담당하는 유대인 기구(The Jewish Agency)는 이민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과 히브리어를 미리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세계의 울판 네트워크 또한 운영하고 있다. 1990년대 구 소연방에서 잠재 이민자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기 위해 주재하였던 유대인 기구 관리들은 새로이 독립한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그루지아의 사람들에게 그들의 국가 언어 회생에 관해 조언해 주었다. “그곳의 문제는 이미 수백만의 사람들이 자유자재로 말할 수 있었으므로 구어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문어를 어떻게 부활시키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샤피로는 그의 견해를 밝힌다. “예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러시아 키릴 문자 알파벳만 읽는 사람들이 라틴 알파벳을 배워야 했습니다.”
히브리어 학습은 고유 알파벳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방법 때문에 다른 외국어를 배우는 것 보다 종종 복잡한 과정이 되곤 한다. 비록 대부분의 숙련된 성인 이민자들이 결코 그들의 억양이나 서투른 문장을 떨쳐버리진 못하지만 어린이의 경우 자유자재로 언어를 구사하여 몇 달 내에 모국어처럼 능숙해지곤 한다.
연구자들은 히브리어 부활의 성공은 이스라엘 사회가 100여 개 국가로부터의 이민자가 세운 국가로 히브리어만이 모든 이들에게 공통의 언어가 된다는 사실에 기인한다고 믿는다. 그러므로 이민자들은 이웃들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 세게 다른 곳에서처럼 종종 이미 공용어를 가지고 있는 경우, 그들 선조들의 고유언어를 부활시키는 것은 더욱 어렵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언어를 부활시키기 위해서 완고한 결정이 요구되어진다. 이스라엘 초기 유대 정착인들은 매일 의사 결정을 위해 러시아어나 이디쉬로 말하는 한시간을 제외하고는 히브리어만을 사용했다. 벤 예후다 그 자신은 비록 그의 어머니와 부인이 그가 말하는 단 한 단어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들에게 히브리어만을 사용하였다.
2. 현대히브리어와 벤예후다의 삶
- Carol Novis (1990.5) -
현재 히브리어는 이스라엘에서 보편적으로 쓰여지는 언어로 간주되고 엘리에젤 벤예후다는 히브리어를 보편화시킨 위대한 선구자로 여겨진다. 사실 이스라엘의 모든 도시에서는 국가는 영토뿐만 아니라 언어를 가져야 한다고 처음부터 주장한 예후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도로가 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
<광신자>
100년 전에 성지의 사람들은 엘리에젤 벤 예후다를 광신자라고 여겼다. 그의 생각은 이상할 뿐 아니라 위험했다. 대부분의 유대인 동료들은 히브리어만이 성스러운 언어라고 믿기는 했지만 예후다는 피했다. 그의 자식들은 추방당했고 그의 가족들은 거의 굶어 죽었다. 그의 첫 부인과 자식들은 병들어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는 히브리어만이 살아 있는 언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가족 모두에게 히브리어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도 말이다.
이런 예후다의 실험적인 정열에 반기를 든 사람은 그의 장남인 이타마르였다. 그는 이스라엘 땅에서 일상 언어로는 처음으로 히브리어를 사용한 사람이었다. 히브리어를 현대 언어로 도입한 이타마르의 이야기는 드보라 오메르가 쓴《Habachor B'Beit(E.B.Y.)》인데 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사랑받는 이야기 책이다. 이 제목에는 말 장난 같은 것이 담겨 있어 번역하기가 어렵지만 대충“E.B.Y. 집안의 첫 아들‘이란 의미이다.
오메르의 책은 루이사 메이 알곳이나 몽고메리의 이야기가 북미 어린이에게 미치는 것과 같은 영향을 이스라엘 어린이에게 끼치고 있다. 오메르는 이스라엘 독자에게 아주 유명한 《하다샷》신문이 행한 1989년 여론 조사에서 이스라엘이 설립된 이래 그 분야에서 가장 두드러진 이스라엘 여성으로 선발되었다.
현재 22판이 인쇄된《Habachor B'Beit》는 유명한 람단 히브리 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찬사를 받았으며 이스라엘 어린이에겐 고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이 책은 20년 전에 첫 출판되었지만 여전히 신선미와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지난 두 달 동안만 하더라도 1만 부가 팔렸다.
오메르는 히브리어를 이스라엘 땅에 심으려는 노력에 관한 실제 이야기를 다룬 첫 작가이다.
<고난의 이야기>
1881년에 팔레스타인에 온 벤 예후다(리투아니아 엘리에젤 펄만이란 이름으로 출생함)는 히브리어가 자신의 땅에서 유대인의 언어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그는 단순한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는 가정에서 히브리어 이외의 말을 쓰지 못하게 했으며, 일생 동안 여러 권의 히브리어 사전을 만드는데 정열을 쏟았다.
오메르가 그의 자서전을 쓰기 전 까지는 그 정열의 어두운 측면과 어린아이들에 미친 그의 영향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오메르는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도 엘리에젤 벤 예후다를 당시의 유행하는 노래처럼 히브리어에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고 또한 그의 이름을 딴 거리들을 생각하거나 그의 사전을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관한 이야기를 한 번도 흥미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라고 말한다.
“어느 날 밤 인터뷰 프로그램을 보던 중 엘리에젤 예후다의 아이들인 이타마르가 소개되는 것을 보았다. 제일 앞 줄에 앉아 있지 않았다면 난 걸어나가 버렸겠지만 그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 청중들은 모두 최면에 걸린 듯했다.
난 혼잣말로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하고 중얼거렸다. 난 이스라엘의 제 3세대에 속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엘리에젤 벤 예후다가 어떤 사람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난 더 듣고 싶어 그를 만났고 기사를 썼고 결국은 책을 쓰게 되었다.“
벤 예후다의 장남인 이타마르가 말하는 형식으로 쓰여진 이 책은 단지 히브리어로만 말해야 하는 데에서 겪었던 정신적, 유체적 고난에 대한 고통스런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오메르는 이웃에 살고 있던 어린이의 부모가 자기 자식에게 이타마르와 놀거나 말도 하지 못하게 했을 때의 그의 기분을 묘사하고 있다.
<극단론자>
오메르는 또 다음과 같이 이 책과 관련해 말하고 있다.
“나는 가끔 이 책을 읽다가 울었다는 어린이의 편지를 받곤 한다.난 답장에서 나도 글을 쓰다가 울었노라고 했다. 어머니로서 나는 어린아이들의 고통에 관한 진실을 말하기가 어려웠다. 동시에 난 엘리에젤 벤 예후다를 증오했다.
나는 책을 끝내고 이타마르에게 떨리는 손으로 원고를 넘겨주었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를 상당히 비판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그는 ‘드보라, 내 아버지는 이보다 훨씬 더했어요. 그는 왜 자신이 이런 일을 하는지 한 번도 말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다.
나는 벤 예후다를 극단주의자로 본다. 그러나 당시의 개척자를 보면 그들 모두가 극단주의자이다. 그들의 가치관은 원시적이고, 단지 천사가 구원의 손길을 펼치지 않을 것을 제외하고는 이삭을 희생시키는 아브라함과 같다. 테오도르 헤르젤을 생각해 보라. 그의 아들 하나는 자살했고 다른 하나는 정신병자가 되었고, 또 한 아들은 마약중독으로 죽었다. 아마 그의 목표는 비극의 주요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헤르젤이 없었다면 유대국가가 존재했겠는가?
그를 통해서 현대 히브리어가 존재할 수 있었기에 나는 벤 예후다에 대한 평가를 내리고 싶지 않다. 벤 예후다는 진정으로 히브리어를 위해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고 확신했고, 그의 아들이 바로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예언자 예레미아의 작품을 연상케 해주었다.
내 마음에는 뼛속에 갇혀 타오르는 불같은 것이 있었다. 나는 억제하느라 애썼지만 그럴 수 없었다.“
3. 현대히브리어 생동감 넘치는 언어로 살아나다
- 손 혜 신 -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 - 히브리어를 살아 있는 언어로 만들다>
히브리어는 19세기까지 기도문 같은 종교적인 책 안에 갇혀 있었다. 히브리어를 일상의 언어로 살려낸 사람이 있다. 엘리에제르 벤 예후다(1858-1922). 러시아에서 태어난 그는 다른 유대인 아이와 마찬가지로 종교교육을 받으며 히브리어를 습득했다. 가족들은 그가 랍비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의 관심은 당시 동유럽의 젊은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종교가 아닌 일반 세상에 있었다.
벤 예후다가 20세 되던 해에 발칸 반도에서는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이에 자극을 받아 유대인도 그들의 조상의 땅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유대인도 다른 민족처럼 그들 조상의 땅과 언어가 있었다. 유대인들은 이제 조상의 땅과 언어를 회복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벤 예후다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부터 팔레스타인 땅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1878년 벤 예후다는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공동체를 위해서 일하려면 의사가 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러나 폐결핵 때문에 벤 예후다는 파리에서의 의학 공부를 중단하고 1881년 그 당시 터키가 통치하고 있던 팔레스타인에 정착한다. 그는 여러 히브리어 잡지에 유대 민족, 그들의 땅과 언어의 르네상스에 대한 주제로 기고했다. 벤 예후다는 히브리어
의 재생을 위해 세 가지 실천 목표를 정했다.
"가정에서 히브리어를", "학교에서 히브리어를", "히브리어 단어, 단어, 단어"
벤 예후다는 팔레스타인에 도착해서 유대인들과 히브리어로 말하기를 시도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서는 히브리어로만 말하기로 결심했다. 벤 예후다와 그의 부인은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로만 말하는 첫 가정이 된 셈이다. 아들 이타마르가 태어나자 히브리어로만 말을 가르쳤다. 벤 예후다는 아들이 이스라엘 현대사에서 완전하게 히브리어를 구사하는 첫 사람이 되도록 했다. 벤 예후다는 아들이 히브리어가 아닌 다른 언어는 듣지도 못하도록 했다. 만일 그의 집에 히브리어를 할 줄 모르는 방문객이 찾아 올 경우 그는 아들을 방으로 들여보낼 정도로 철저했다. 아버지의 이런 열심 때문에 아들 이타마르는 4살이 되서야 뒤늦게 말문을 열게 되었다.
학교에서 젊은이들에게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벤 예후다는 예루살렘의 알리앙스 학교에서 교사 직을 제안했을 때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실 다양한 나라에서 온 어린 학생들이 한 교실에서 쓸 수 있는 공통의 언어는 없었다. 벤 예후다는 건강이 악화되어 오랜 기간 가르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히브리어 교습은 성공적이었고 이것은 다른 교사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당시에는 히브리어를 가르칠 교재도 교육법도 숙련된 교사도 모두 부족했다.
벤 예후다는 어른들이 히브리어를 일상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신문 하쯔비를 1884년에 발행했다. 19세기말 지역적인 차이는 있지만 전 세계 유대인 남자의 50%는 구약의 모세오경과 기도문을 히브리어로 읽을 수 있었다. 벤 예후다가 만든 히브리어 신문은 히브리어가 종교적인 언어일 뿐 아니라 일상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 있는 언어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던 대부분의 유대인 남자들은 어려움 없이 히브리어 신문을 소화할 수 있었다. 신문은 새로운 히브리어 단어를 소개하는 공간이기도 했다. 1910년 벤 예후다는 히브리어 사전을 편찬하기 시작했고 방대한 이 사전은 벤 예후다의 사후 그의 부인과 아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벤 예후다가 가지고 있던 히브리어 부활의 꿈은 당시 유대인 사회 분위기와 부합했기에 실현 가능했다. 벤 예후다가 팔레스타인에 이민을 온 1881년은 초기 유대인 이민자의 물결이 시작되던 해 이기도 하다. 벤 예후다와 같이 젊고 교육받은 이상주의자들은 약속의 땅 팔레스타인에서 새로운 유대인 사회를 건설하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아이들이 탈무드 학교에서 이디쉬로 공부하기를 원치 않았다. 동유럽에서 온 이민자들이 늘어나자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한 학교가 예루살렘, 욥바, 리숀레찌온 등에 생겨났다. 팔레스타인에서 공통의 언어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던 젊은 이민자들은 가정과 학교에서 히브리어 사용을 확산시켰다. 이들의 노력으로 히브리어는 유대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었고 팔레스타인 위임 통치권을 갖고 있던 영국은 1922년 11월 29일 히브리어를 팔레스타인의 공식 언어로 지정했다. 그러나 한달 뒤 벤 예후다는 결핵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시온주의자로 잘 알려진 헤르젤조차도 이스라엘의 독립 국가는 꿈꾸었지만 히브리어의 부활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헤르젤은 그의 소책자 '유대국가'에서 이스라엘이라는 국가가 어떤 체계를 갖게 될 것인지를 자세하게 그리고 있다. 그런데 국어에 관해서는 스위스의 예를 들면서 이스라엘도 이민 온 유대인들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여 독어, 영어 등 몇 개의 언어를 함께 사용하는 것을 제안하고 있다. 헤르젤은 정치적인 독립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언어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말았다.
<이상한 언어 배우기>
나는 이스라엘에 가기 전 히브리어 알파벳조차 알지 몰랐다. 내가 이스라엘에서 처음 생활을 한 곳은 키부츠였다. 작업 시간 중간에 커피를 마시는 휴식 시간이 되자 모두 다 테이블로 모였다. 그런데 그들의 목소리는 곧 싸움이라도 할 듯이 커지기 시작했다. 혹시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것일까. 히브리어를 못 알아들으니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걱정도 되었다. 다음날도 키부츠닉의 말투는 여전했다. 히브리어는 무척 거칠게 들렸고 매력적으로 들리는 언어는 아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유창하게 구사하는 성경의 언어 히브리어. 이왕 이스라엘에 왔으니 성경이 쓰여진 언어 히브리어를 배워서 구약 성경을 원어로 읽어보겠다는 무모한 꿈(?)을 갖고 울판을 시작했다.
히브리어를 배우는 학교를 울판이라고 부르는데, 키부츠에서 운영하는 울판도 있고 대학이나 시에서 운영하는 울판도 있다. 때로 우리 한국 사람들은 히브리어 배우는 것은 울만한 일이 아니냐며 울판이라고 해석한다. 키부츠는 주로 외국의 유대인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울판을 개설한다. 키부츠 울판에 오는 이들의 동기도 다양하다. 모국을 알기 위해 온 사람, 이민을 오기 전에 미리 탐사 차 온 사람, 이민을 왔으나 도시에 정착하기 전에 키부츠에서 언어를 배우며 적응하는 사람들.
전 세계의 유대인들이 다 모였으니 울판에서는 공통의 언어가 없다. 울판의 히브리어 교사는 히브리어로 히브리어를 가르치는 깜짝 놀랄 만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학생들은 언어를 단어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느낌으로 배운다. 그러나 알파벳부터가 워낙 생소하다 보니 정을 붙이기가 쉽지 않다. 꼬부랑 글씨는 그렇다 치고 쉽게 길들여지지 않는 것이 글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쓰는 것이다. 글씨가 오른쪽부터이니 책이나 노트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페이지를 넘긴다. 나는 한국에서 가지고 간 노트를 뒷장에서부터 써야 했다. 글이 오른쪽에서 시작하다 보니 대부분의 순서는 오른쪽에서부터 1이 시작된다. 건물 안의 복도에서도 가장 오른쪽에서부터 1호실 그 옆이 2호실으로 순서가 매겨지기 때문에 방향에 혼란이 온다.
약 이천 년 동안 사람들이 구어로 사용하지 않았던 언어를 부활시킨다는 것은 실현 가능한 일일까? 한 세대 동안 우리말과 글을 잃어 버렸던 우리는 언어의 회복은 나라의 회복과 마찬가지로 어렵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다.
지금은 이스라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히브리어를 쓰고 읽고, 문학과 학술어로 손색이 없지만 약 백여 년 전만 하더라도 자유로운 히브리어의 구사는 소수만이 꿈꾸었던 이상이었다. 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연스럽게 '이마'(엄마), '아바'(아빠)를 시작으로 히브리어를 배운다. 그 아이들에게 자연스러운 이런 일상의 언어가 사실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구사하지 못하던 언어였다고 말해 준다면 이해할 수 있을까. 이스라엘 골목 어디에서든지 들리는 히브리어, 오래된 새로운 나라의 또 다른 기적의 한 모습이다.
<성서 히브리어와 현대 히브리어>
성서 히브리어를 배운 사람이 이스라엘에 가면 히브리어가 모음점 없이 사용되는 것과 필기체가 있다는 것에 낯설어 한다. 히브리어는 모음이 없이 자음만으로 이루어진 언어인데 주후 10세기경 맛소라 학자들이 정확한 모음의 보존을 위하여 모음 기호를 고안했다. 그러나 현대 히브리어에서는 이런 모음점을 사용하지 않는다. 처음 히브리어 단어를 배울 때는 먼저 모음을 붙여서 정확하게 읽고 기억하면 그 다음에는 모음을 붙이지 않아도 단어를 읽을 수 있다. 물론 처음 보는 단어도 몇 가지 원칙을 안다면 읽는데는 어려움이 없다.
그러나 순수한 히브리어가 아닌 외래어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도 처음에는 어떻게 읽어야 될지 망설이게 된다. 예를 들면 워싱톤은 외래어이지만 이미 널리 알려진 단어이기에 읽는데 어려움이 없지만 신문에 홍길동에 대한 기사가 실린다면 홍길동의 히브리어 표기에는 모음점을 붙여서 독자들이 어떻게 발음해야 되는지를 알려준다.
원래 성서 시대에는 모음점이 없었기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에서 모음점이 없이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것은 원래의 히브리어에 가까운 접근이라 할 수 있다. 히브리어 동사는 인칭과 성에 따라 변한다. 우리말에는 동사에 성의 구별이 없기 때문에 말을 할 때마다 늘 상대방의 성을 염두에 두는 것이 히브리어를 배울 때 가장 어려웠다. 내가 주어가 되어 말을 할 때는 여성형 동사를 사용하고 상대방이 나와 같은 동성의 여성이라면 내가 말하는데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되지만, 대화의 상대방이 남성일 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실수를 하곤 했다.
영어는 대문자와 소문자가 있어서 고유명사의 첫 스펠링은 문장 중에서 대문자로 표시한다. 한글과 마찬가지로 히브리어에도 대문자와 소문자가 없다. 히브리어는 모음도 없고 고유명사가 대문자로 시작되지도 않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처음 배우는 단계에서는 외래어나 고유명사라도 무조건 사전을 찾게 된다. 울판에서 공부할 때에 한번은 선생님이 본문에서 모르는 단어에만 줄을 치라고 요구했다. 우리 반의 학생들이 모르는 단어는 대부분 공통적이었는데 선생님의 지도를 따라 차근차근 읽어보았더니 모짜르트, 스웨덴, 비타민 같은 외래어여서 학생들은 박장대소했다. 선생님의 의도는 모르는 단어라고 무조건 사전을 찾지 말고 우선 잘 읽는 시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니 외국인이 한글을 배우고 나서 문패에 쓰여져 있는 대로 "개조심씨 계십니까?"라고 말했다는 것이 실감이 났다.
현대 히브리어와 성서 히브리어는 어떤 관계냐는 질문을 가끔 받는다. 현대 히브리어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진 언어가 아니며 성서 히브리어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단어의 뜻은 대체적으로 변함이 없으며 시제에서 차이가 난다. 성서 히브리어의 완료형, 미 완료형은 현대 히브리어에서 과거형, 미래형으로, 분사는 현재형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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