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목사 되기

2006. 7. 9. 00:44신학자료/8.목회학 자료

좋은 목사 되기
양무리
이 글은 30여년의 목회 생활을 통해 얻었던 것들을 정리해서 기록했습니다. 다른 글들과 중복된 글들이 많습니다. 이해하시고 보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배와 목사
목회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예배다. 주님께서는 예배에 대하여 "(요4:23)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하셨다.

예배는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성도가 만나는 신령한 행위이다. 성도들이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성도 각각에게 필요한 은혜를 주신다. 그것은 죄를 용서해 주시는 사죄일 수도 있고 성도들이 원하는 소원를 이루어 주심도 될 수 있다. 즉 예배를 드리는 성도의 요구에 대하여 가장 좋은 것으로 응락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성경에 주님을 만나 경배를 드린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은 은혜를 주신 것이 아니다. 귀먹어리는 듣게 하시고 벙어리에게는 말을 하게 하셨으며, 마리아는 모든 죄의 용서를, 나사로에게 다시 살리심을 주시고 배가 고픈 자들에게는 배 불리 먹을 수 잇는 음식을 주심과 같다. 이와같이 생각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무리로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격으로 대하시기 때문이며 모든 성도 개개인의 사정을 가장 잘 아시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 점에 대하여 요4:23에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를 실감있게 믿도록 예배의 신령한 면과 중요성과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받는 은총을 강조하여 가르칠 것이다.
개신교의 예배는 설교가 가장 중심이지만 다른 순서들도 모두 예배에 속한다. 묵도, 찬양, 기도, 헌금, 심지어 광고까지도 예배에 속한다.
목사는 이 점을 알고 목회 사역의 가장 정점이 되는 예배를 하나님이 바라시는 대로 잘 드려야 한다. 그리고 예배에 참예한 성도들이 개개인의 형편에 따라 하나님이 주시는 가장 좋은 은혜를 받을 수 있도록 가르치고 예배를 인도해야 할 것이다.
이런 개개인에게 주시는 은혜를 모르게 때문에 예배를 드리지 않고 공부한다고 학원에 나가는 학생이 생기고 가장 절실한 필요를 하나님에게서 찾지 아니하고 다른 곳에서 찾아 다니면서 막상 주시는 하나님 앞에서는 졸며 무성의하기 짝이 없는 예배를 형식적으로 드리게 되는 것이다.

목사의 인격 향상
목회에 있어서 두 번째 중요한 일은 목사 자신의 인격 향상이다. 목사의 인격 행상이 필요한 이유는 목사 스스로가 다듬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게 되고 하나님의 죄인 구원하시는 사역에 쓰임 받기에 부족하게 되고 말기 때문이다.

목사의 인격의 가장 표준적인 말씀은 산상 수훈의 첫번째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마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5: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마5: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5:8)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마5:10)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와 같은 인격을 가지고 목회를 하면 결과적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5:11-12)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목사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이상의 어떤 것도바라지 말아야 한다.

이런 인격을 가지고
좋을 때 나쁠 때를 예비하라.
지혜로운 처신을 하라.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
가장 좋을 때에 나쁜 때를 준비 예비하라. 언제나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면서 최선을 향해 가라.
"(눅16:8)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표정 관리를 잘하라.
목사에게 공급된 일용할 양식 이외의 모든 것은 성도와 하나님을 위해 쓰라.
혈기를 절대적으로 삼가라.
거짓 말을 해서는 안되면 약속을 지키되 못 지켰을 때는 솔직히 시인하라.
성도들이 목사를 경게하는 이유를 바악하여 고쳐야 한다.
비판하고 잘하면 칭찬하고 못하면 그냥 두라.
내게 마땅치 아니할 지라도 절대적 순종을 해야 한다.
목사의 용기
밀어 붙이는 것 아니다.
다른 사람의 의사를 꺽는 것 아니다.
인내하는 것,
자기 포기하는 것.
성도를 이해하고 사랑하고
자기 절재
목회 일기를 쓰라.
자신의 할동. 생각
성도들의 모든 것
쓸 수 있는 모든 것을 미루지 말고 쓰라.
거룩한 외식을 하라.
언제나 건강한 척 해야 한다.
슬퍼도 웃으라.
기쁘지 않아도 기쁜척 하라.
평안한 척 하라. 특히 셜교 때는 그리하라.
평안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나님과 대화하고 절제하라.
기도할 때 생각나는 가정은 반드시 심방을 하라.
목회는 목사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목사 가족 전체가 하는 것이다. (겔 )
목회자의 모든 생활 전체가 목회다 (겔 )
목사의 욕심을 버리라.
목회의 욕심
경제적인 욕심
명예욕
성도들은 목사의 희생과 헌심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러므로 이런 부분의 자랑을 삼가라.
아쉬운 말을 하지 말라.
목회자의 주변에서 일어 나는 좋지 못한 이야기를 절대 해서는 안된다.
약속을 조심하여하라.
지킨 것은 잊어버리고 안지킨 것은 오래 기억하여 공격 무기화 한다.
겸손 근검 절약을 솔선 수범하라.
천박한 처신을 해서는 안된다

부족한 인격을 체우시는 방법
말씀의 은혜를 받을 것
자신의 인격 향상을 위한 기도 생활
하나님께서 체우시는 방법
목회의 실패
가정 파탄
자녀들의 문제등 등을 통한 인격
아무리 노력을 하고 진보를 한다고 해도언제나 부족하고 모자란다. 그럼으로 목사는 평생 인격 도야를 위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교만의 원인.
성경 다독,
많이 기도하는 것,
교인 숫자가 많은 것,
성전을 크게 잘 지은 것.
과거의 행적.
선배,
돈 많은 것,
많이 배운 것 등등
교만한 사람의 특징 - 타인의 충고에 기분이 나빠한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아니한다.
자기의 교만을 발견하라.
교만의 원인을 제거하라.

목사의 상처
목사도 상처를 받는다. 그러나 목사가 받는 상처를 성도들에게 말하지 말라.
이 점이 성도들이 받는 상처를 치유 받는 것과 목사의 그것을 치유 받는 방법의 차이다. 목사는 상처를 하나님께 치유 받아야 한다. 교인들에게 치유를 받을 수 없다. 만일 교인들이 목사를 치유한다고 해도 다른 것을 요구하게 된다.

설교나 일상 생활에서 덕이 있는 농담을 하라. 성도들을 늘 즐겁게 하라.
목사가 기분이 나쁠 때는 성도들을 만나지 말라.
무표정은 그 사람의 마음을 완전히 감춘다. 과도한 표정은 실수를 유발한다. 거울이나 비디오를 이용해서 표정 관리를 하라.

다른 목사의 목회는 참고를 하되 흉내를 내서는 안된다.
소위 성공적인 목사들의 목회 방식은 내 목회를 대신한 것이 아니다. 대게의 경우 성공적인 목회자들은 권위 의식을 가지고 발언하고 책을 쓴다. 진실한 자기 모습을 들어 내지 아니하니 속지 말라. 그들에게도 가시(어려움)가 있고 목회의 비애가 있으나 말하지 못한다. 그런 말을 하면 지금 당장 그들에게 가시가 되는 성도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기 때문에 절대 글로는 발표하지 않으며 공개적으로 자기의 목회 난관을 토로하지 않는다.

독재자 형 지도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권위 의식, 지배 의식, 일등 의식, 나 아니면 안된다는 생각들, 모든 일을 혼자 하려는 마음 자세들이 독재자라는 말을 듣게 한다. 민주적으로 하라. 같거나 비숫한 의견이면 성도의 의견을 따르는게 현명하다.

관리자가 되라.
일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시키고 점검하고 격려하고 칭찬과 포상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즉 사람을 부리는 사람이 되라는 말이다. 어떤 목사는 사단장 역할을 하지만 어떤 목사는 분대장 역할도 못하는 사람이 있다. 목사가 목사의 역활을 해야지 집사의 역할을 해서는 안된다. 내가 쓴 글에 이런 일에 관해 쓴 글들이 어디에 있다.

언제나 진실하한 사람이 되라.
언제나 진실하라. 그러나 그 진실은 목사의 모든 것을 온 천하에 모든 것을 들어 내느 것을 말하지 않는다. 목사의 진실성을 약속과 성취에 있다는 것을 알라. 하나님의 진실성이 그렇게 증명되고 있다.

멀면 덕이 미치지 못하고 가까우면 허물된 사람
목사는 성도들과 적당한 거리감을 두라. 알면서도 모른체 하고 모르면서도 친절하게 응답해야 한다. 적당한 거리감을 목사의 신비성을 유지하게 한다. 거리감을 적당한 간격은 어떤 것인가?

너무 앞서 가려는 사람
지혜로운 목사는 성도들 보다 너무 앞서 가지 않는다. 앞서 갈 수 잇지만 성도들과 발을 마추어 간다. 어린 아이들 대리고 가는 엄마가 잘 걸을 수 있다하여 아이의 손을 놓고 빨리 가버리면 아장거리며 가는 아기는 울고 주저 앉아 떼를 쓰고 말 것이다. 아이는 엄마와 발을 마출 수가 없다. 엄마가 발울 마추어 주어야 한다. 목사도 마찬가지 처신를 해야 목회생명이 길다.

어거지로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들.
어떤 목사는 이상한 옷차림, 자기 자랑, 지식, 가족, 심지어 자기의 잘못 살았던 과거까지 말하면서 성도들에게 인정을 받으려하고 관심을 끌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성도들은 그런 것 때문에 목사를 훌륭하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종으로 성실히 살라. 강단에서 설교한 말씀과 일체한 생활을 하라. 하나님의 종으로만 살으라. 그러면 어느 날 당신을 성도들이 성자라고할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목사들 가운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성자되기를 노력하는가? 성자는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충성할 때 다른 사람이 불러 주는 영광된 이름이다.


안일에 빠진 목사들.
기도 안하기, 성경 안보기, 공부 안하기, 자신을 모르기, 성도들을 모르기, 조그마한 여유만 있으면 여행 다니고 놀기,
어느 날엔가 한탄과 눈물을 흘릴 것이다. 목사가 이런 일에 빠져 인생을 즐기기에는 너무 인생 그 자체가 짧고 목사의 목회 시간이 짧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나 더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사람들.
목회를 하면서 몸부림을 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 몸부림이 하나님의 종되기 위한 몸부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좋은 교회 만들어 영광을 받기 위한 몸부림, 대접 받기 위한 몸부림, 교단을 장악하기 위한 추잡한 몸부림, 좋은 것을 먹고 좋은 환경에서 부럽지 않게 살기 위한 몸부림, 주님이 아닌 다른 구세주를 찾아 이리 다니고 저리 다니는 목사가 참으로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도 잃고 그들이 찾고자 했던 것을을 찾을 수 없으며 설혹 찾아 가졌다고 해도 순식간에 빼앗길 것이다. "(마13: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하신 주님의말씀은 부자를 더 부자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충성하는 자에게 더욱 충성하도록 하신다는 말씀이다.

목사의 사명감
올바른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헌신.
"(눅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것뿐이라 할지니라"
목사는 하나님의 종
대리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비유컨데 옛날 양반집의 종들과 그 양반집의 자녀들과의 관계라고 생각하라. 그리고 그 관계르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섬김의 목회를 하라.

목사의 성경 배우기

성경 보는 법
"(히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목사는 성경을 많이 보고 잘 보아야 한다. 목사가 성경을 보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설교를 하기 위해 보는 방법이 있고, 또 하나는 목사 자신의 심령을 위해 보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목회를 하다 보면 자신의 심령을 위해 말씀을 보기 보다는 설교를 위해 성경을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사실 중요한 것은 목사의 심령 상태가 양호해야 좋은 설교를 할 수 있음으로 설교를 하기 위해서 보다 자신을 위해 말씀을 더 많이 보아야 한다.
성경을 보는 방법은 성경을 보는 사람이 성경에 매어야 성경을 볼 수 있다. 시간이 나는데로 여가를 선용하여 성경을 본다면 절대 성경을 볼 수 없을 뿐 아니라, 시간을 내서 성경을 본다고해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성경을 보는 사람이 시간에 의해 지배되기 때문이며 형편에 맞게 성경을 본다면 그 상황에 매이기 때문에 성경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성경을 보기 위해 성경에 매여야 한다는 말은 하루에 정해 놓은 성경을 보지 아니하고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그런 자세로 성경을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을 한 달에 한 번 정도 보기로 한다면 성경 전권을 30으로 나눈 후에 하루에 1/30 를 보면 한달만에 성경 전권을 볼 수 있게 된다. 만일 하루 분량의 성경을 보지않으면 식사도하지 않고 다른 어떤 일도 하지 않아야 한다. 정해 놓은 성경 보기가 하루 일과중에 가장 우선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아주 간단한 것 같지만 절대 간단하지 않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성경을 볼 때 쉬지 않고 보아야 한다. 성경을 하루 보고 일주일 보고 쉬었다 한 달 후에 다시 본다면 성경을 보는 연결 고리가 끊어져 앞 뒤 연결이 되지 않으므로 말씀의 은헤를 받기 어렵게되고 말 것이다.
성경 읽기를 하라.
성경 66권을 페이지로 나누어 날마다 1/30을 읽으면 한달에 한 번 읽는다. 이 방법은 매우 쉬운 것같지만 실제로 해 보면 그렇게 쉽지 아니할 것이다. 나의 형편에 마추어 성경을 일게되면 절대 통독이 되지 아니한다. 성경에 매여야만 성경을 읽게 된다.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를 하게 해야 한다.
제목를 주고 그 방면의 말씀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하라. 그리고 마지막에 토의하라. 스스로 답을 얻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면 장로들에게는 신구약의장로들에 대한 성구를 찾아 읽게 하고 장로 직분에 대하여 연구하게 하고, 집사 직분, 목회자에 대한 성도의 자세, 교회 섬기는 법 등, 모든 신앙 생활에 대한 사항들을 성경을 직접 읽어 깨닫게함으로 터둑하게 하라. 이 방법이 목사가 장로의 직분을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설교 대한 공부하기
설교의 내용
본문
현실성
대지와 소지의 구성
예화 사용

목사와 설교
설교에 길들여 질려면 7-10년이 걸린다. 불평을 이해하라.
설교
성경 해석
의미
적용
에화는 절대 두 번 쓰지 말고 두 번 쓸 경우는 반드시 썼다는 것을 말하라.
성격의 에화는 몇번을 써도 좋다.
일용할 양식에 대한 말씀
설교를 잘하라.
대화식, 쉽게, 재미있게, 성경을 인용할 때 일상적인 용어로 각색하여 이야기 식으로 말하라. 심방이나 성도들이 듣고 싶어 하는 설교를 체집하라. 그러기 위해 준비된 설교가 많아야 한다. 컴을 이용하면 가능하다.
설교는 듣는 사람이 중요하므로 듣는 사람을 중심으로 하라.
없는 사람은 중하지않다.
성도들의 가장 심각한 문제에 대한 가장 적절한 성경적 해답을 하도록 말씀에 밝아야 한다.
그 말씀의 처방이 문제를 가진 성도들의 마음에 와 닫는 처방이 되어야 한다.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해답을 주고 스스로 만족하지 말라. 그런 대답을 이미 그 성도에게 거리감을 주고 괴리감을 느끼게 해서 목사에게 멀어지게 된다.
어려움을 당하면 타인의 설교를 그대로 하는 것이 좋다. 특히 제미있는 예화를 많이 하라.
설교 집을 많이 읽으라.
유명 목사의 설교를 인용하라.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자존심이다.
어떤 설교든 성도들이 읂메 받는 것이 중요하다.
교회와 현실에 맞게 다시 조리하는 극단의 기술이 팔요하다.
유명 목사의 설교는 고급 설교다.
내가 만든 죽보다 고급 음식점에서 가져 온 음식이 훨씬 더 맞이 있고 영양가가 높다.
주님의 말씀을 인용하는 이치라고 생각하라.
많은 성도들이 은헤 받은 설교에 우리 성도들도 은헤 받을 수 있다.
유익한 점
목사가 설교에 스트레스를 받지 아니한다.
설교에 언제나 여유가 있다.
시간과 사건에 마춘 적절한 설교를 할 수가 있다.
동일한 요지일지라도 같은 설교는 하지 않게된다.
다양한 설교를 할 수 있다.
설교하는 것으로 사명을 다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설교로 사람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며 강박 관념에 사로 잡히지 말라. 하나님께서 변화 시켜 주시는 것이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생각으로 목사가 설교에서 실수를 하게된다.
은혜는 목사의 설교에도 관게가 있으나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에배에 임하는 마음, 간절함, 그들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설교하는 그 자체만으로 감사하라
목사의 일용할 양식이다. 남어지 모든 것들은 하나님을 위해 하라.
설교에 농담을 하라.
재미있는 설교를 하라.

전달하는 방법
50-60년대는 연설하는설교,
70년대와 80년대는 강해 설교
90년대는 대화 설교
90년대 후반에서는 이야기 설교
2000대는 보이는 설교

교회 행정
교회 정치
목사의 주도권을 놓지 말라.
교회의 사건. 주도권을 잃으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 교인들의 고용인으로 전락한다.
주도권을 잃지 않는 방법
기도, 말씀, 성령의 감화, 진실한 사랑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
3년은 그들에게 마끼고, 3년은 기도하고
목회의 위기
3년, 5년, 7년, 18년
세습 목회를 거부하는 이유
주도권 때문이다. 충현, 영락, 이상근 목사의 아들(대구 제일 교회)

인사 행정
제정 문제

목회 사역
시험에 들었을 때
뱀 같이 지혜롭게 하라.
최소한 사단과 버금가는 지헤를 가지라는 말씀. 성령의 지혜를 가지라.
모든 일을 서두르지말라. 서두르면 쫓겨 난다.
뜨거운 물에 손을 담그듯이 하라.
말을 안들어도 속이 상하지 말아야 한다.
한계선을 인식하라. 다 할 수 잇는 것은 아니다.
그 사람을 이해하라
하나님의 자녀지 내 자식이아니다.
인내하라.
병명을 하지 말라. 점점 더 많은 말이 되어 자기에게 불리하게 되돌아 온다.
가족을 생각하라
해명을 할 필요가 없다. 해명으로 받아 들이지 않는다.
기도하라.
지연 작전을 쓰라.
제 3자를 세워 말하라.
교회 건물을 사수하라.
하나님께 마끼라.
기도하라.
강단을 떠나지 말라
교회를 포기해야 하는 죄들
간음 죄 - 미리 준비하여 실수를 하지 말 것.
돈 문제
교리적인 문제
금호동의 어떤 목사가 당한 불행한 일들 (김민광 제보 사건)
서 재신 목사의 강단 기도. 윤두환 목사의 허---참으로 끝나는 마음 풀기

부 교역자 다루기
부 교역자 유형
자기 일만 하는 사람.
자기 이익을 취하는 사람.
목회를 헤꼬지 하는 사람-박상화.
무능한 사람,
꾀가 많은 사람.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 임시로 와 있는 사람 (늘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
목사를 배신하는 자들.
부교역자를 대하는 방법
점진적으로 잘해 주라
2년을 주기로 바꾸라
성도들의 부교역자를 대하는 마음에 초연하라
교인들이 선물들이나 그들에게 지불하는 돈에 관심을 가지지 말라.
교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충분한 수고비를 주라.
교인들은 동정적이다.

재직 세우기
장로나 집사의 역할을 잘하게
가르치지만 성경을 보게해서 스스로 답을 얻도록 유도하라. 목사에게 마땅히 해야할 도리를 가르쳐도 가르치는 목사에게 잘하라는 말로 듣는다. 부흥사가 와서 가르쳐도 마찬가지고 제직 세미나에서 가르쳐도 마찬가지다.

목사와 건축
지나친 건축 경비을 쓰지 말라.
건축에 욕심을 버려야 한다.
건축 후유증을 조심하라.
쌓이는 스트레스. 아까운 헌금(이자) 긴축 제정 운영으로 인한 스트레스,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야외나 온천으로 데리고 다니고 부드럽고 친근한 설교를 하라. 이런 상황에서 목사가 속이 상해 발언을 하면 성도들은 엄청난 상처를 입게된다는 것을 명심하라. 모두 환자가 되어 있음을 감지하고 극히 조심해야 한다. 중환자가 있는 병실에서 함부로 처신하지못하는 것과 같다.

목회의 기술
컴푸터를 배우라.
설교 작성,
성도들의 성향 분석, (신앙, 달란트, 성격, 취미, 가정, 직장등 모든 분석 자료를 담아 활용하라)

목사의 헌금
성도들은 목사의 헌금은 헌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목사가 하나님께 드린 헌금을 성도들은 인정하지 않는다. 목사가 헌금을 하지 않으면괴로운 심정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모른다. 성도들은 목사의 과다한 헌금으로 인해 생활이 늘 넉넉하지 못하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나중을 위한 저축이나 모아둔 재산이 없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목사의 노후나 자식들의 공부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 필요성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목사도 자기들처럼 어느 정도 헌금하고 남어지는 저축하며 내일을 위해 물질을 쌓아 둘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부분의 성도들이 다 그렇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도들에게 노후를 마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노후에 거지처럼 사는 목사들이 매우 많고 자식들의 구박을 받아 가며 사는 목사들이 많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알라. 우선 근겸 절약 정신을 배우라. 작은 물질을 아끼라. 쓰고 싶은데로 다 쓰고, 먹고 싶은 데로 다 먹고, 하고 싶은 일들을 다 하고, 입고 싶은 것을 다 입고, 가지고 싶은 것들을 다 가져서는 나중에 돌리킬 수 없는 후회를 할 것이다.
"(고후9:5)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연보를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연보답고 억지가 아니니라"
나는 목사 스스로 자식들이나 교회의 근심이 되지 않도록 준비하며 사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목사가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다. 연보에 대하여 바울은 목사에게 가져 오는 것도 연보라고 했다. "(고후8:5)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하신 말슴이 바로 그 말씀이다. 목사들은 스스로의 노후를 위해 스스로에게 연보를 하라.
자기들의 헌금과 헌신은 대단하게 평가한다.
사실 11조를 잘하는 성도는 정말 귀한 성도들이다. 목사의 11조 드리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드린 11조가 다시 되돌아 오는 사례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됴의 11조는 전혀 그렇지 않다. 믿음이 아니면 도저히 드릴 수 없는 돈이고 그 믿음이 확실하지 않으면 바치지 못한다. 어떤 목사는 11조를 드리는 성도는 스스로 알아 신앙 생활을 하는 성숙한 성도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칭찬해 주라. 그런 성도들을 마겨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라.
그런데 목사들은 성도가 그 헌금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기 때문에 칭찬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지 말라. 하나님께 잘하는 것을 하나님의 종이 칭찬해 주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 아닌가? 감사도 마찬가지다. 칭찬하고 축하해 주라. 그리고 못하는 성도들을 위해 기도해 주라. 질책과 야유를 해서는 안된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교회 등록한 새 신자는 약 3년 정도 신앙 지도를 잘 받아야 11조와 감사 헌금을 한다. 성도는 어린이다.

성도 사랑하기.
좋은 것을 조금만 말하라.
성도들이 보는 앞에서 부부의 애정 표현을 조심하라.
자식들의 칭찬을 하지 말라.
권중길 집사의 시기
생활을 사치하게 해서는 안된다.
집, 차, 가구, 음식, 옷 등등
성도들의 어떤 요구에 응답하라
좋은 것은 즉시 즉시
눈에 띄이도록 효과를 극대화 하라.
하나님의 뜻이나 교회에 맞지 않는 무리한 요구는 천천히 시정하라. 즉석에서나 빠른 시간 안에 그들의 요구가 거부되였다는 것을 알면 자존심이 상해하고 목사를 불신한다.
모든 요구에 기도해 보겠다고 하라.
시간을 벌어 몇번이고 다시 생각해 보라.

사랑과 인정과 애정의 상관 관계.
목사의 목회 생활 가운데 가장 강조해야할 점이 성도에 대한 사랑이다. 그런데 목사들이 이 사랑을 잘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사랑에 대해 가장 잘 말씀하신 분은 바울이다. 그 분은 고린도 전서 13장에 사랑에 대하여 사랑의 가치성과 사랑의 특성과 사랑의 효과에 대해 말씀하셨다.
바울은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라고하여 사랑은 사람의 인격 즉 정적, 지적, 의지적인 모든 것을 초월한 신비, 신앙, 자선의 제일되는 품성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공허하며 무가치해 진다.
그런데 여기서 말한 사랑은 [아가페]로서 [필레아]와 대조를 이룬다. 이 두 낱 말은 요 21:15-17의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랑의 대화에서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씀은 [아가페]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필레오]로 대답했다. 즉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페]을 요구하셨으나 베드로는 [필레오]로 밖에 대답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그렇게 말하고 싶어서 그렇게 대답을 한 것이 아니다. 그렇게 밖에 대답을 할 수가 없엇기 때문에 그렇게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면 두 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가페]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이 죄악된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이요, 거기에 응답해야 하는 성도의 하나님 사랑이다.
어학자인 트렌취라는 분은 [아가페]은 "계시 종교의 품안에서 탄생된 낱말이다"라고 했다.
반면에 [필레오]은 人情이다. 즉 부자, 혈연, 친구간의 자연적인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다 보니 이 두 사랑을 혼돈해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과 사람의 인정인 [필레오]은 혼돈하는 것이다.
목사들에게 이런 일로 교회를 섬기는 중에 이 두가지 사랑을 혼돈해 사용하는 것이다. 즉 성도들은 사랑으로 인도하고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인정으로 목회를 하는 경우다.
예를 들면 가난한 성도들을 동정한다든지 어려서부터 함께 신앙 생활을 한 젊은 여 성도들에게 아버지나 또는 오라비와 같은 친인척적인 친근감을 느껴 무례한 말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들이다.
또는 성도들에 대하여 인간적인 배신감이나 섭섭함을 느낄 대도 마찬가지다. 더욱 더 위험한 것은 성도들에게 [에로스]를 느끼는 일이다. 즉 이성적인 애정을 느끼는 일이다.
교회 생활은 순수한 [아카페]만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교회 생활에 [필레오]라는 인정이 작용하고 [에로스]라는 애정이 작용하면 크나 큰 사건이 생긴다.
고린도 교회에도 이런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교회 안에 간음하는 문제가 생겼다.
내가 아는 어떤 목사도 교육학 박사 학위를 가진 자인데 성도들을 간음하다가 교회를 파가 망신 시키고 또 다른 곳에 가 이런 짓을 하는 것을 보았다.
성도들도 교회 생활을 [아가페]로 하지 않고 인정이나 애정으로 하면 반드시 신앙 생활에 시험을 당하고 실패를 하게된다.
목사는 성도들에게 인정이나 애정을 가지면 안된다. 주님께서는 죽은 아버지를 장례하고 따르겠다는 사람도, 장가들어 첫 밤을 보내고 따르겠다는 자도 합당하지 못한 자라고하셨다.(눅 9:59-62)
골고다를 올라 가실 때 주님의 고난 당하심을 본 여인들이 따르며 울 때도 "(눅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셨다.
이와같이 주님께서 인간의 정을 물리치신 것은 그 사랑에 많은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목사가 인정머리 없다는 말을 듣는다. 사실 인정 머리 없는 목사가 잘하는 목사다. 인정을 베풀다가는 교인들을 망친다.
[필레오]은 정이다. 정이라는 것은 세상에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신앙 생활을 정으로 하면 안된다. 정은 [아가페] 보다 질이 낮은 인간의 사랑이다. 교회는 정(필레오)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아가페)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부부는 정으로 만난다. 그리고 자식도 정으로 낳는다.
30-40년 전에 한국 교회를 부흥시킨 아주 휼륭한 목사님이 계셨다. 대 부흥사시고 은혜가 충만한 목사님은 가정 생활에 원만하지 못했다. 그래서 목사님 부부는 붙으면 싸우고 이혼을 수 백번을 했다. 목사님의 성격이 어찌나 날카롭고 정답지 못했다. 일년 사지장철 부흥회를 다니시는데 모쪼럼 집에 오신 목사님이 사모님을 정 있게 대하시지 못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모님은 견디다 못해 한 번은 부흥회를 따라 나섰는데 이불 보따리를 가지고 가셨다.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그 얼굴은 천사와 같았다. 그래서 사모님은 집회를 마친 후에 이불을 강단에 깔랐다. 그리고 말하기를 [여기가 천국이네, 나는 여기서 살아야 목사님과 천국에 사는 것 같을 것이네] 하고 들어 누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갓 재미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다. 이 목사님 부부는 사랑의 관계를 잘 몰라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부부는 [필레오]의 사랑이지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가정에서도 목사가 되면 곤란해 진다. 가정에 오면 목사는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목사님이 부흥회만 다니시다 보니 이 점을 소홀히 하게된 것이고, 사모님은 강단에서 가장이 이루워 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강단에 이불을 깐 것이다.
"Jesus Christ"라는 무지칼이 있다. 이 무지칼은 하도 유명해서 우리 나라에서도 몇번씩 공연한바가 있다. 그 내용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은 이상하게 인간적으로 살아하는데 주님께서 그 사랑을 받아 주지 않아서 고민한다는 내용이다. 주님의 [아가페]을 막달라 마리아의 [필레오]로 격하시킨 연극이다. 만일 주님이 이런 [필레오]을 했다면 마리아와와 결혼을 했을 것이고 우리 주님이 도실 수 없었을 것이다.
목사가 가정에서 [아가페]하면 자식을 낳지 못한다. 남편이 아니라 구세주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교회에서 여려 성도들에게는 [아가페]의 사랑을 해야한다. 이 점을 성도들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교회 생활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는 것이지 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아가페]로 하지 않고 [필레오]로 하기 때문에 시험에 들고 섭섭하고 기분이 나쁘고 속이 상한다. [아가페]로하면 절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아가페]의 사랑의 특성에서 잘 나타난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의 특성 (고전13:4-7)
처음 두 구절은 긍정적 말씀이니 오래 참고, 온유하며,
다음 네 구절은 부정적 말씀이니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게 기뻐한다.
다음 두 구절은 다시 긍정적 말씀이니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모세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였다. 그러나 그는 구세주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를 그들의 구세주의 모양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절대 구세의 모습을 가지지 못했다.
모세와 주님 앞에는 원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잘못하는 사람, 그를 반대하는 사람,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원망하는 사람, 우상을 섬기는 사라므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여지 없이 죽였다.
10계명 돌판을 받아 왔을 때, 고라 아비람 다난를 처형할 때도 당이 갈라져 그들을 죽인다. 애굽의 바로와 그의 백성들도 모세 앞에는 오직 죽음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의 누나도 미리암도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동이가 되고 말았다.
모세는 이런 그의 성격과 처신에 대하여 회개도 하고 괴로워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그런 식으로 쓰셨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대망했던 가나안을 들어 가지 못했다.
주님은 모세에 못지 아니한 반대자들과 비방하는 자들과 주님을 핍박하고 죽이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않으셨다. 모두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그들을 포용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
이 차이가 무엇인가?
모세는 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주님은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가 통치한 40년 광야 시대에 무려 200만명의 그의 백성이 죽어 가는 꼴을 보아야 했으며 그의 능력과 힘은 그의 시대에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까지 죄인을 구원하시고 우리도 구원하셨다.
그래서 사랑은 영원하다. "(고전13:8-10)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아가페]의 효력이요, 능력이요, 힘이다. 교회는 [아가페]을 하자는 사람들이 모여 주님을 배우는 곳이다. 그런데 아직도 [필레오]를 하면서 섭섭하느니, 잘 했느니, 잘못했느니, 당신 때문이라느니 하면 되는가?
우리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도 그랬다. 그는 3번씩나 천국을 다니면서 예수님에게 특별 과외를 해서 사도가 된 사람이다.
"(고후12:2-4)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그런 그도 주님의 참 사랑을 잘 몰랐다고 했다.
삼년씩이나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배운 베드로도 마지막까지 [아가페]을 잘 이해할 수 없었으며 [아가페]을 할 수가 없어서 필레로라는 말로 대답을 했다. 좋아 한 말이 아니라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그렇게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잘한 짓은 아니다.
바울이 위대한 점은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치는 그 점이다.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본문에 했다.
사랑의 효과
"(고전13:11-13)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장에서 가장 위대하고 감동적인 말씀이 바로 이 말씀들이다. 바울은 말한다. "나는 주님의 [아가페]을 잘 몰랐다. 그럴 때 나는 말하는 것, 깨닭는 것, 생각하는 것들이 어린 아이 수준이였다. 즉 유치하기 짝이없는 사람이였다. 그리니 안다는 것, 한다는 일들이 모두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 같아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하는 일인지 잘못하고 있는지 조차 분별이 잘 안되였고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부분적 밖에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나서 어른이 되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얼굴과 얼굴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확실하고 분명해 졌으며 주님께서 나를 알고 사랑하시는 것 처럼 나도 주님을 알고 세상의 모든 것을 완전히 알게 되였다. 그렇게 나는 장성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고 말씀을 배우고 기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는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하셨고 바울은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하셨다.
오늘까지 우리는 바울 사도께서 "(엡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라 말씀하신데로 바르게 주님을 배웠다. 그리고 천국에 갈 때까지 주님을 배워야 한다. 서두루지 말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사람이요 거룩하게 되는 사람이지 거룩한 사람이 아니다. 완전하지 않다.
바울 사도처럼 우리 다 함께 우리들의 부족을 인정하고 인정이 아닌 사랑으로 교회 생활을 하도록 하자. 그러하면 이해 못하고, 용서 못하고, 사랑 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천국은 사랑으로 용서하고 덮어 주는데서 이루어 지는 것이지 따지고 정죄하는 곳에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바로 우리가 있는 이곳에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바리세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시비를 걸었을 때 "(눅17:20-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을 미워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주님이 계시면 천국이 되고 주님을 믿는 사람 마음도 천국이라 하신 것이다.

여러분의 교회는 천국이다. 우리는 다 같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죄인이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 되는 것이다.

책망할 때 인상을 쓰거나 큰 소리로 말하지 말라.
앞에서 표정 관리에 대한 말을 잠간 언급헸다.
여수에 계신 존경하는 목사님이 있다. 그 목사님은 정말 표정 관리를 자하신 분이시다. 언제나 웃은 얼굴이다. 그래서 우리가 목사님께 직접 물어 보았다.
[목사님은 항상 웃고 계시는데 그렇게 좋은 일들이 많십니까?]
[글쎄요. 좋은 일도 있고 나뿐 일도 있지요]
[그런데 언제나 웃고 계시니 저말 대단하십니다.]
[그래요. 잘 보셨습니다. 나는 속상하는 일이 있으면 더 많이 웃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하십니까? 비결을 가르쳐 주십시요.]
[비결이요. 있지요. 사람들이 나를 보고 인상이 나쁘다고 해서 정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결심을 했습니다. 거울을 보고 웃는 얼굴를 만들자고요. 그리고 피나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랫더니 다른 사람들이 웃는 얼굴을 가졌다고 말하던데요. 마음이 행복해야 웃움이 나오지만 목사는 그것만으로 웃으려하면 안됩니다. 교회 안에 죄인들만 우굴거리는데 날마다 웃을 일이 있겠어요. 웃는 얼굴을 만들어야 하고 속 상하는 일이 생기면 더 웃도록 공부를 해야 합니다.] 진리가 따로 없었다. 그 목사님의 말씀이 진리가 아닌가? 목사가 속이 상해 울고 화를 내고 인상을 쓰고 한탄을 하며 슬퍼한다면 어디 그런 사람이 목사인가? 그제 보통 흔히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사람이지-----마치 내 말을 하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사실이 그런걸 어떻게 하는가?

가정 사역
가정 사랑하기
젊었을 때는 교회지만 50이 넘었을 때는 가족을 생각해야 한다.
가족이 교회 보다 먼저다.
교회는 누가 와도 잘 할 수 있으나 가적을 책임져 주는 사람은 없다.
가정, 건강, 교회, 성도순위를 지킬 것
성전 보다 사택을 먼저 준비하라.
아내 사랑하기
목사와 아내
자기를 다스리면, 아내를 다르히면, 교회를 다스리면 성공한다.
아내에게 존경을 받은 목사는 위대하다.
목사의 아내들
목사들 보다 훨씬 더 많은 문제를 가진다. 신학적 지식이 부족, 성경 지식이 부족,
가장 껄끄러운 존재
아내의 충고를 듣는 법
충고가 다 맡는 것은 아니다. 지혜롭지 못한 충고가 대부분이다. 설교학을 모르는 사람이 설교를 충고하는 것이 이상하다. 듣고 흘리라. 다투지 말고 걸러 받으라. 아내는 목사에게 말할 수밖에 없다. 아내를 통한 간접적인 성도들의 부 평도 마찬가지다.
아내 다루기가 전 성도 다루기 보다 어렵다.
아내를 잘 다루는 사람은 목회를 성공할 것이다.
순종형이 좋다.
아내로 인해 가장 많이 좌절한다.
부부 싸움
원인
아내가 이해 못하는 부분

설교.
사명감.
정서.
감정.
대인과의 관계.
세속적인 것들
영적인 것들
동반자이면서 원수
돕는 배필이면서도 시험에 넘어지게 하는 자
목사를 망하게 하는 악처들
고집이 센 아내
자기 주장이 강한 사람.
불순종하는 아내.
목사와 조화되지 않는 기질의 사람.
사치하는 아내.
목사를 독차지 하려는 아내-성도들의 사랑에 시기 질투를 한다.
목회 사명이 없는 사람
개으른 사람
불평 불만이 많은 사람.
성도 섬기는 일을 마지 못해 하는 사람.
목사에게 불안과 스트레스를 주는 사람.
목사의 지나친 선생.
목사를 무시하는 사람.
목사를 자기 식으로 만들려는 사람.
생활에 짜증이 많은 사람.
전투적인 사람.
내조기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
대접만 받으려는 아내.
신경질이많은 아내.
돕는 배필의 위취를 떠난 사람.
돈을 좋아하는 사람. 계 조직을 한다.
문제를 인간적으로 풀려는 사람.
할 수없이 목사의 부인이 된 사람.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
분별력이 없는 사람.
설교하고 싶어 하는 사람.
거짓 말을 잘하는 아내.
음란한 아내.
자식 교욱을 잘못하는 사람.
허래와 허식을 좋아하는 사람.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
목사를 좌절시키는 사람.
대안이 없는 사람.
남편의 잘못에 대해 반드시 사과를 받으려는 아내
용서하고 이해할 줄 무르는 아내
원망이 가득찬 아내
남편인 목사로 인해 불행해 졌다고 생까하는 아내
남편의 항복을 받아야 직성이 풀리는 아내

. 자식 사랑하기 자식 교육을 잘하라.

심방 사역
. 성도 관리
교회를 떠나겠다는 성도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나간다면서도 목사가 오기를 기다린다.
우월감. 쾌감. 승리감. 자기 정당화.
그래도 찾아 가라. 안되면 전화라도 해서 만족감을 주라. 그래야 원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심방 안하면 다른 성도르도 오해를 한다. 나도 소홀이 한다고
목사가 성도들에게 선물을 주라.
병문안.
새 집에 이사를 했을 때.
개업 예배를 드릴 때.
즉 기본적인 예의를 지키도록 하라는 말이다.

교인들이 자기 같아 지기를 바라지 말라.
성도들과 목욕탕에를 가지 말라.
성도들을 존중하라
목사 보다 사회적으로 지식적으로 겸험으로 가정적으로 훨씬 월등한 경우가 많다.
성도들은 이런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목사이기 때문에 존중하고 순종하는 것이지 인간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라.

성도들의 직업과 신앙 생활은 대단히 긴밀한 관계가 있다.
상인 - 언제나 경제적인 수치 계산을 한다. (재레에 밝다. 조건적인 헌금. 투자 심리)
군인 - 목사에게 복종 정신이 강하다. 그러나 협력이나 이해심이 부족하다. 권위적이다.
직장인 - 사무적이며 위계 의식이 강하다.
교사 - 초등 교사 (마음 쓰는 것이 좁다)
실업자 - 경계 인물 (극단적인 두 얼굴을 가진다. 열심히 사회적인 욕구를 체울려 교회 봉사를 잘하지만 언제나 좌절 속에 있다. 경계 인물, 비판적이다. 열심 있는데 이런 모습이니 다른 성도들에게 동정과 존경을 받는다. 이런 류의 사람이 목사를 대적하면 것 잡을 수 없다.
자영 업자 -
불만족한 가정 주부 - 설친다. 그러나 위험하다. 세상에서 실패하고 만족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에서 열심을 내면 자기 목소리를 높이고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한다.

성도들의 기질을 파악하라.
이성적인 사람 - 판단력이 바르나 냉험하다. 비판적이다. 감동이 없다.
정적인 사람 - 판단력은 미숙하다 감정적이며 사랑이 많다. 그러나 변덕이 심하다.
다혈질의 사람 - 일을 잘 하고 뜨겁지만 변덕시 심하고 한 번 돌아 서면 되돌아 오지 않는다.
공격형이 된다. (체용수)
느린 성격을 가진 사람 - 열정적이지 않으나 지속적이며 배신을 하지 않고 꾸준하다. 목사에게 가장 좋은 성도가 여기 있다. (김애영)
무지한 사람 교회 오래 다닌 사람 아파트 교인들 일반 주택지의 교인들

사랑이 깊으면 배신감도 깊다.
목사가 직접 교회 중진들의 아내들을 교육하라. 성경, 목회 방침, 어떤 일에 대한 설명
교인 수가 작을 때는 전체 교인들의 것을, 많을 때는 중진들의 개인 정보를 상세히 파악하라. 컴퓨터에 입력하라. 차 범근 감독처럼
성도들의 불평을 즐겁게 들으라.
넘기면 안된다. 사랑하는 아이들의 불평으로 듣고 가급적 즉각적으로 반응하라.
박천일 목사의 악수 작전
예배에 결석한 사람을 축복하라.
이는 예배에 참예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책망을 삼가고 그 심령을 위해 기도하라.
상처난 성도를 건드리지 말라.
기도, 전도도 마찬가지다. 강요하지 말라. 당연한 일이지만 괴로워 한다. 처음에는 하기 어려워 고통하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자기 변명을 하고 결국 반항하고 적대하고 대항 세력에 동조하고 대항한다.
말 안듣는 사람 설득하기
기도 많이하고, 설교, 상담, 제 3자의 도움을 받으라.
목회를 덕으로 하라.
덕이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김민광의 목회
순결한 사랑을 하라. 고전 13: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 것이다.
칼을 쓰지 말라.
잘못을 보고 의분하지 말고 내가 잘모한 사람을 고치려 하지말라. 오히려 당하는 수가 있다. 기도하고 하나님께 마끼고 가만히 기다리라. 지금은 모든 권징을 목사가 할 때가 아니고 하나님께 마낄 때다.
성도의 약점을 들추지 말라 -공개적 책망을 절대하지 말라
졸아도 존다고 공개적인 책망을 말라. 그냥 놔두라. 조는 것은 나쁘지만 그것을 나무래는 목사도 좋아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본인을 인격 모독감을 느끼고 다른 사람은 비판적이 되어 있다가 기회가 되면 목사을 공격하는 미사일이 된다.
인정을 조심하라 목회는 인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순수한 사랑으로 한다. 인정으로 손을 잡고 안아 주는 것인데 주님은 그런 일이 없으셨다. 인정은 순결하지 못한 사람이며 무례히 행하는 사랑이다.
교인들의 과도한 대접을 특히 경계하라.
그들이 요구하는 툭별한 것이 있다. 그것을 체워 주지 못했을 경우에 반드시 그 대접이 부배랑이 되어 나를 헤친다. (허초옥)
한 사람의 많은 헌금을 경계하라.
여기도 어떤 묵시적인 요구가 있다. 순수하게 주님께 드림으로 끝나는 헌금은 벌반없다.
성도들의 시기심을 유발하지 말라.
목사는 성도들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성도들은 묵사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쓴다.
그런데 대게의 경우 성도들은 여러 가지면에서 목사가 자기들 보다 조금 못해보이는 것을 좋아한다. 생활도 좀 가난해서 자기들이 도와줄 여지가 있기를 바라고, 아이들도 좀 못나서 동정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만일 목사가 자기들 보다 어느 점에서 좀 나아 보이면 시기와 질투를 한다.
내 친구 목사는 부부의 정이 남달랐다. 어느 날 목사는 성도들과 소풍을 가게되였는데 목사와 사모가 정답게 팔장을 끼고 성도들의 앞에 갔다.
그 광경을 매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모습이였으나 성도들에게는 아름답거나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특히 홀로된 과부들이나 남편과 사이가 별반 좋지 아니한 성도들에게는 치명적으로 기분 나쁜 광경이 되는 것이다.
필자의 경험도 그런 일이 있었다. 우리 아이들과 어렸을 때부터 함께 교회를 나오면서 자란 형제 자매와 같은 청년들이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남매요 그 권사의 자녀들도 남매였다. 좋은 대학을 모두 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틈이 생겼다.
우리 딸이 지금의 사위와 결혼 이야기가 있을 때 그 권사의 딸이 교회를 옮겼다. 그리고 결혼을 하고 나서 그 권사는 시험을 당하기 시작을 했다. 그리고 결국 아무 dldbeg 없이 교회를 떠났다. 정말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무리 말을 해도 교회 생활에서 인정을 벗어 버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주님의 사랑을 투기하지 않는다고 하셨는데(고전 13:4) 16년을 같이 신앙 생활을 했으면서도 자기 자식과 우리 아들이 비교가 되고 속이 상했던 모양이다. 정말 이런 경우에 목사가 어떻게 해야할지 난감하다.
그러므로 목사는 성도들 보다 좀 못하게 살아야 하고 좀 못하게 처신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목사의 사생활에 대한 자랑을 절대 삼갈 것이며 성도들의 도움이 있음으로써 목사가 되엿다는 점을 강조해야 한다. "(고후11:30)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하신 말씀을 명신할 것이다.
성도들은 목사의 개인적인 어떤 일에 축하를 하면서도 한편으로 시기 질투를 한다는 것을 명심할 것이다.
전도 사역
선교 사역
목회의 성공
큰 건물, 많은 성도, 교회의 영광과 명예가 아니다. 물리적인 성공을 성공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전혀 이런 방법이 아닌 믿음의 성공자들을 찾아 볼 수 있다. "(히11:35-38)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충성이 성공이다.
성공적인 노후 대책이다.
명예로운 퇴진을 하라.
원로 목사로 추대된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자녀들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목사가 당하는 유혹들
야망과 이상의 차이
목사가 목회를 잘 해 보겠다는 것을 말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생각에 대해 하나님께서도 잘못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아주 고무적인 말씀을 하신 일이 있으시다. "(요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그러나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해서 마치 주님 보다 더 큰 일을 실제로 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큰 일'이란 땅끝까지 복음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하신 말씀이다. 또한 더 많은 시간 동안 복음의 증인이 되게 하시겠다는 말씀이시기도 하다. 즉 지역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주님 보다 더 멀리, 더 많은 기간 동안 복음의 사역자가 되리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목사들이 이 말씀 보다 더 큰 야망을 가지고 목회를 하려 하다가 시험에 들게 된다.
가장 큰 교회, 위대한 목회자, 유명한 목사, 온 세게를 향해 복음을 전하는 자, 21세기를 책임지는 사람, 썩어질 대로 썩은 교회를 바로 잡을 수 있는 현대판 종교 개혁자가 되려고 하는 것이다.
이런 비 이성적이며 비 복음적인 욕망은 신학교에서부터 배워지는 것 같다. 신학교에 당국자들은 자기 신학교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인지 늘 위대한 신학교, 21세기를 책임질 신학교, 하나님 마음에 가장 합당한 신학생들을 위해 기도를 한다.
내가 어떤 결혼식에 초대를 받아 갔을 때 들을 수 없는 말들을 들었다. 신랑 신부 두 사람은 모두 목회자의 자녀들이요 신학생들인데 그들을 앞에 놔 두고 주례하는 별로 유명하지 않는 그 신학교의 교수인 목사는 두 사람에게 21세기를 책임지라고 권면했다. 그리고 신랑의 아버지인 목사는 부흥사 특유의 걸걸한 목소리로 [이 두 사람은 앞으로 21세기를 책임질 사람이니 여러분들이 많이 기도해 달라] 고 광고를 했다. 그리고 듣는 사람들은 [아-멘]으로 화답을 했다.
나는 이 자리에 우리 성도들만 있는가 하고 두리번 거리며 옆을 살폈다. 정말 세상에 21세를 마낄 사람이 없어서 저 신랑 신부에게 21세기를 마끼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교회 개척을 마꼈을 때 개척 교회 하나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당대에는 개척 교회 하나 해서 번듯한 교회 만들기에도 너무 힘이 들고 어려웠다. 하나님 앞에 그것만이라도 잘 해 놓고 갈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21세기를 책임지라든지 나라를 책임지라 하시지 않으셨다. 주님은 "(마25:21; 25)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셨다.
물른 이 두 사람이 21세기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부터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방식이다. 작은 일에 충성하기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 큰 일을 하고자 하면 그것이 바로 탐욕이요 야망이 되고 만다. 그런 탐욕과 야망을 가지게되면 작은 일에 충성하지 못하게 되고 하나님께 쓰임 받기에 부족한 사람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21세기는 하나님이 책임을 지시는 세기며 역사지 사람이 책임을 지는 시간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게서 마껴 주신 일터에서 착한 종으로 일을 할 뿐이다. 어디 목사가 하나님이신가? 21세기나 나라와 민족을 책임지게------
그러므로 모든 목사의 이상과 꿈은 작은 목회를 어떻게 잘 할 것인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작은 목회를 잘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잘 했다하여 큰 일을 마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큰 일을 하는 목사가 되기를 소원하는 감추워진 바람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멋있는 인생' '누구 누구와 같이 되는 것들'의 욕망, 즉 좋은 집, 좋은 차, 화려한 외출, 인사 받는 사람, 인기 있는 목사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 있다.
정말 목회자의 멋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죽도록 순종하는 종의 모습에서 찾아야 한다.
목회를 잘하기 위해 신비한 은사를 사모하지 말라.
나는 우리 기독교의 신비성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도 많은 신비 체험을 했다. 목사의 신비 체험에는 아주 특별한 의미가 한가지 있다. 목사에게 확고한 믿음을 주셔서 어떤 일을 당해도 흔들리지 않고 충성하도록 하기 위한 배려가 그것이다. 사도들은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많은 신비 경험을 했다. 그러나 그 분들은 신비한 일들을 통해 전도를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런 신비한 일들이 하나님의말씀을 가릴까 염려하여 두려워한 장면들을 볼 수 있다.(행 14:1-15 28:1-5)
소위 물량적으로 목회에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대게 자기들에게 다른 사람이 가지지 아니한 신비한 힘이 있다고 선전한다. 그들은 불치병을 많이 고치기도 하고 귀신을 물리치기도 했으며 축복권을 가지고 있어서 축복을 받게도 하고 심지어 수 만리 밖에서도 성도들의 형편을 꾀뚤어 볼 수 있다고 한다.
사람의 마음을 자유 자제로 움직일 수도 있고 그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성도들에게 군립하기 위해 카리스마적이며 일종의 공포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고 절대자의 모습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들의 말에는 위엄과 권위가 가득차 있고 지배자로써의 위용이 넘처 난다.
목회를 잘 해 볼려는 사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식의 어떤 신비한 힘에 유혹을 당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사람을 지배할 수 있는 함.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 축복을 줄 수 있는 역사 등을 맹렬히 간구하게 된다. 일정 기간 동안 그런 것들을 위해 기도하고 나면 자기에게 어떤 신비한 힘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선전하며 그런 어떤 주슬적인 행위를 하게되는데 안수 기도, 안찰, 신비한 경험 등을 성도들에게 말하고 설교한다.
그러나 이런 짓들은 주님이 우리들에게 바라시는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런 신비한 행위나 말들은 일시적인 효과가 있을지 모르나 진실한 목회자가 할 일은 못된다.
진실한 목회자에게는 말씀이 중요하고 참된 목회 자세와 마음으로부터 울어 나오는 성도들을 향한 깨끗한 사랑이다.
우리는 언제나 사람들이 보는 관점에서 판단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는 입장에서 목회를 해석하고 처신해야 할 것이다.
목사의 믿음과 모험의 착각.
어떤 목사는 '믿음은 어자피 모험'이라는 말을 했다. 그러나 이 말은 크게 잘못된 말이다. 우리가 주님을 믿는 믿음은 위험 수당이 많은 모험이 결단코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은 절대적인 약속에 근거한 절대적인 확인에서 비릇된다. 이 절대적인 약속과 성취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히6:13-19)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가리켜 맹세할 자가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여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 소망이 있는 것은 영혼의 닻 같아서 튼튼하고 견고하여 휘장 안에 들어가나니"라고 하셨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목사들이 믿음이 아닌 모험을 즐기는 경우가 많이 있다. 성공에 대한 확신과 근거가 없이 자기 믿음을 스스로 과신하여 터부니 없는 일을 저지르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목사의 모험 가운데 도저히 자격이 미달된 사람을 교회의 중책에 기용한다거나 제직에 임명하면서 가르쳐 좋은 일군되게 하리라는 것이 있다. 정말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특히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들이 주의할 모험이다. 거의 100%로 실패할 확율이 높다.
. 목사의 노후 대책
미리 미리 준비하라. 집. 생활 방법. 아무 대책 없이 교회나 자식의 짐이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목사가 교회를 사랑하여 헌신한 것 처럼 목사를 사랑하지 않는다. 교회는 죄인들의 집단체다. 자식이 부모를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못하다.
목회의 소성
지나친 욕망도 문제을 일으키나 목사의 목회에 대한 염증도 문제가 된다. 근검 절략 200% 인내하라.

건강 관리
피곤하면 무조건 쉬라. 정기적인 건강 체크를 하라. 불 필요한 일을 줄이라.

목사의 스트레스 해소법
안 듣는데서 혼자 말하기 혼자 욕하고 화내면 화가 풀린다. 상대는 모른다. 풀고만나라. 개를 키우라. 운동 드라이브 등산 낙시 구경 음악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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